트리(TRE)의 이철희 대표는 예전부터 쓰레기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쓰레기는 버려야 할 것이고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는 쓰레기를 다시 활용하는 것에 엄청난 부가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춥고 배고픈 나날들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이 맞다는 것을 입증하는 관문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중국에서 발견한 사업기회

그는 본래 건축학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다고 했다. 00학번이라고 하니까 16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학을 마치진 못했다. 아마 경제적인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건축사무소에서 일하고 인테리어 업체에 들어가 일을 했다고 한다.


인테리어 회사에서 2년쯤 있다가 중국에 프로젝트를 나갈 일이 있었어요. 중국에 가서 보니 중국 인테리어 시장이 급성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냥 사무실에만 앉아서 행정적인 일만 처리했으면 아마 그런 생각을 크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현장을 다니는 일을 했다. 현장을 다니다보니 이쪽 분야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많은 물자와 사람이 모인다는 것도 알게 됐다.


 “중국 프로젝트 일이 끝나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계속 그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서 직접 내가 해 보자하고 결심하고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때 그는 사업 기회만 보고 달랑 단돈 200만원만 들고 중국에 갔다. 회사 직원으로서 중국에 갔을 때와 사업을 하러 중국에 갔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고객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인테리어 사업을 해 본 경험과 그동안의 인맥 등을 활용해봤지만 결국 현지에 있는 한국 사람들의 일거리를 맡아서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계속 되긴 힘든 구조였다. 현지인들의 사업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자 일거리를 갈수록 줄어들고 갖고 있는 돈은 바닥이 났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정말 길거리에서 한달 반 정도 생활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기를 쓰고 일감을 따 내 그럭 저럭 버티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3년차부터는 한국 사람들 일감은 거의 안하고 중국인들의 일을 많이 했습니다. 자리를 잡은 셈이죠. 그러다가 5년이 지나서 한국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결국 중국에서 중국 현지 일을 따내긴 했지만 중국에서 사업하는 것의 어려움을 뼈져리게 깨달은 그는 돌아오는 것을 택했다. 2010년이었다.


 

첫 시도와 실패

이철희 대표가 한국에 돌아온 것은 중국 사업의 어려움때문이기도 했지만 중국에서 인테리어 일을 하면서 쓰레기를 활용한 사업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 중국에서는 아직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사업을 하면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봤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개인 사업으로 인테리어를 했던 것을 제외하면 사업 경험도 부족했고 관련 시장에 대한 지식도 부족해 사업이 쉽지 않았다.


 그는 당초 쓰레기 가운데 소재화할 수 있는 재료를 찾고 있었다. 그냥 쓰레기를 재활용해 물상품을 제작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양한 물건으로 만들 수 있도록 소재화할 수 있는 재료를 찾았다. 소재화할 수 있는 재료를 찾는데는 시간이 걸렸고 그의 사업은 진척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빚만 떠안은 채 2013년에는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커피 전문점을 지나던 그는 종량제 봉투가 터져 상당히 많은 양의 커피 찌꺼기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지만, 똑같은 광경을 몇 차례 본 뒤 '커피 찌꺼기를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쓰레기의 재활용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해 온 그이기에 가능한 물음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는 커피 찌꺼기가 엄청나게 버려지고 있다는 것, 0.2%의 결과물(커피)을 얻기 위해 99.8%가 버려지고 이는 커피 생산의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커피 찌꺼기를 버리는 일은 커피 전문점을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커피를 취급하는 모든 사람들이 당면한, 아주 귀챦은 일입니다. 대부분을 그대로 버리니까 손실이기도 하구요. 소각하는 과정에서의 환경적인 문제도 무시하기 힘들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찾던, 쓰레기 재활용의 궁극의 지점을 커피 찌꺼기에서 찾았다. 커피 찌꺼기는 일단 어디에서나 쉽게 수집할 수 있다. 즉 공급이 부족할 걱정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커피 찌꺼기를 수집한다고 할 때 쌍수를 들어 환영하거나 수집에 도움을 줄 이들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쓰레기나 찌꺼기 중 비교적 다루기 쉽고, 천연재로 그대로인 상태(물이 첨가되긴 했지만)라는 점도 고려했다.


 문제는 커피 찌꺼기가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는 각종 문헌과 논문 등을 닥치는 대로 뒤졌다. 그래서 커피 찌꺼기를 그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대로 소재화 할 수 있는지를 실험해봤다. 그의 결론은 소재화가 가능하다는 거였다.

 

나무를 베지 않고 나무를 만드는 회사


기존 회사를 정리하고 트리(TRE)라는 회사를 설립한 게 2013년말이었다. 당시 그는 커피찌꺼기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닌,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소재를 개발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소재를 개발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


 꼬박 1년 반 동안 커피찌꺼기를 쌓아놓고 실험을 계속했다. 매일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찌꺼기 수십 박스를 받아와서 테스트를 했다. 의정부에 마련한 공장형 사무실에서는 끊임없이 화학반응을 실험했다.


 “커피찌꺼기에 대한 화학반응을 통해 얼마나 견고하게 굳어질 수 있는지가 핵심이었어요.”

스타벅스, 이디야 등 커피전문점을 다니면서 커피찌꺼기를 수집했다. 업소에서는 두 팔 들어 환영했다. 가뜩이나 처리하기 골치 아픈 커피찌꺼기를 그냥 가져가겠다니 반색을 하는 게 당연. 20156월이 돼서야 이철희 대표는 나무 대용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소재화에 성공했다. 이를 입증하는 특허도 출원했고 각종 특허 신청도 해 놓은 상태다.


 이 대표를 만나던 날 그는 서울 서초구에 있는 로버트 해리스란 카페로 안내를 했다. 여기엔 트리에서 개발한 커피찌꺼기 소재의 테이블과 의자, 조명갓 등이 설치돼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 회사에서 만든 제품을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커피숍의 사장님은 이철희 대표가 사업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투자를 했고 이 대표는 이곳과 계약을 체결하고 제품을 만들어 커피숍에 비치를 한 것이다.


 제품을 보자마자 냄새부터 맡았다. 그런데 커피 냄새가 나진 않았다. “다들 커피찌꺼기로 만든 테이블이라고 하면 냄새부터 맡습니다.” 이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설명을 따로 듣지 않는다면 커피찌꺼기로 만든 테이블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냥 나무로 만든 원목 테이블 같았다. 실제 원목으로 만든 테이블과 비슷한 강도를 갖는다고 했다. 테이블 뿐 아니라 각종 인테리어 마감재, 조명, 소품 등을 만드는 데 쓰일 수 있다. 원목을 가공하듯이 나무나 합판의 형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이 이 대표가 본래 지향했던 부분이었다. 즉 산업현장이나 인테리어 공사 등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할 준비가 됐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일단 테이블 등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은 제품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제품화의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 제품을 만들어 보여줌으로써 대량 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투자유치가 시설 확보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커피찌꺼기로 만든 테이블은 기존의 원목 테이블에 비해 40%-50% 저렴할 정도고 가격 경쟁력이 있다. 테이블 사이즈가 커 질수록 가격 경쟁력이 커진다. 원목으로 큰 사이즈(예를 들어 2m 이상)의 식탁을 만들 경우 단가가 급상승하는 반면 트리의 방식은 그럴 걱정이 없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무를 베지 않고 버려지는 커피 찌꺼기를 나무 대용 자재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철희 대표의 말이다. 가구재로 많이 쓰이는 나무의 소비와 훼손을 줄인 리사이클 제품인 동시에, 디자인까지 접목한 업사이클 제품이라는 점이 포인트다. “트리는 '훼손하지 않으며 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업사이클 전문 기업입니다.”


 스타벅스에 이어 이디야 등 커피 전문점에 납품을 시작했거나 계약을 체결하는 등 제품화에 대한 인정은 이미 받았다. 이제는 대량 생산과 소재를 통한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대형 가구업체나 원목을 활용해 상품을 만드는 제조업체에 소재를 판매하는 것에서 진짜 성장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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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갈 때면 새삼 느끼는 게 있다. ‘한국에는 참 싸고 좋은 옷이 많구나.’ 그런데 한국의 싸고 질 좋은 옷들이 해외에선 막상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스토레츠를 만든 재이 김보용 대표의 문제 의식은 여기서 시작됐다. ‘내가 그 일을 해야겠다로 발전한 그의 아이디어는 동대문표 의류와 자체 제작한 패션 상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여성 의류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면서 실행됐다.


 재이의 온라인 여성 의류 쇼핑몰 '스토레츠'는 최신 유행 트렌드를 반영한 디자인, 빠른 상품 회전율, 저렴한 가격으로 미국, 유럽, 중동 등에서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성장했다. 올리비아 홀트, 제이미 정 등 할리우드 스타나 유명 패션 블로거들이 스토레츠 제품을 입은 사진을 올리면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처럼 최근 1-2년새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스토레츠가 한국의 스타트업 243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왜 한국엔 ZARA 같은 브랜드가 없을까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지만 그는 대학 재학 중에도 전공에서 주로 다루던 국내외 정치 이슈나 정치 이론보다는 사업에 더 관심이 많았다. 특히 옷이나 패션 쪽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것에 재미를 들였다고 한다. 사실 취미생활 수준이었을 수 있는데, 이걸 좀 격하게 한 것 같다. “대학 재학 중에 동대문에서 양말을 사다가 인터넷에서 판매하기도 했는데 엄청 잘 팔렸어요. 그것 때문에 옥션 파워셀러가 되기도 했죠.”


 하여간 인터넷 쇼핑몰에서 다양한 의류 상품을 이것저것 팔면서 의류 판매에 대한 을 익혔고, 결국 전공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택한 김보용. 2000년대 중반 훌쩍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 유학 중에도 한국에서 하던 습관대로 한국 쇼핑몰 등에서 옷을 사입었다고 한다. “지마켓이나 동대문표 옷을 주로 입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 사서 입다가 가져간 것도 있고, 해외에서도 한국 쇼핑몰에서 주문해다가 입었던 것도 있구요.”

 그런데 그냥 편하게 그의 취향대로 사 입은 옷에 대해 현지 외국인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런 옷을 어디서 났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냥 동대문표 옷인데도 말이죠. 그만큼 예쁘고, 경쟁력이 있다는 의미의 반응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한국 패션 의류의 경쟁력을 실감했어요. 그런데 왜 한국에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중화된 브랜드가 없을까이런 생각도 자연스럽게 하게 됐죠.”


 그는 영국 백화점에서 인턴을 하기도 하고 현지 패션 브랜드를 접할 수 있는 곳에서 틈틈이 경험을 쌓았다. “영국의 브라운스라고 하는 패션 브랜드에서 인터넷 사업부 인턴을 했어요. 해외에서 통하고 글로벌 소비자들을 겨냥한 온라인샵의 초기 상태를 경험해 본 셈이 됐죠.”


 이런 경험을 하면서 그가 자신이 생각했던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한국의 패션 상품들, 특히 롱테일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런 수많은 브랜드들이 좀 더 큰 시장에 나가지 못한 이유는 기업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아닐까.


 “기업화가 안 된 곳이 많았어요. 패션사업을 글로벌하게 더 키우려는 그런 시도가 적었던 거죠. 하지만 누군가 제대로 시도를 한다면 충분히 해 볼만한 일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목표를 쇼핑몰 창업으로 두고 귀국한 그는 우선 의류 업계의 공급망을 제대로 알기 위해 벤더 업체에 취직했다. 해외 명품 브랜드를 구매하는 업체에도 취직하기도 했다. 패션 상품의 주문부터 제작, 유통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어느 정도 배웠다고 생각한 그는 2011년 인터넷쇼핑몰 스토레츠를 열었다. 동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떼 와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사막 한 가운데 옷 가게를 낸 것 같았다


기업화에 대한 고민은 했지만, 그 역시 그쪽에 경험은 없었다. 일단 당면 과제는 인터넷에서 한국의 경쟁력있는 동대문표 의류 상품을 좋은 가격에, 글로벌 시장에 판매하는 것.

처음엔 개인사업자로 시작했다. 기존에 인터넷 쇼핑몰 파워 셀러 경험을 하면서 익히 해 본 일이었다. 그런데 옷을 팔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쇼핑몰을 열면 사람들이 찾아와 옷을 살 것 같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 매장을 낸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스토레츠는 결국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의류 상품을 판매하는 게 주된 업이었고, 1차적인 관문은 좋은 상품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었고 이를 잘 알리는 것이었다. 해외 소비자들이 찾는 상품이 많이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 사이트는 활성화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좋은 상품의 확보 못지 않게 해외 소비자들의 눈높에 맞춘 UI나 결제 시스템, 편리한 구매 방식 등이 선결돼야 했다.


 좋은 상품을 확보하는 문제는 자신있었다고 했다. 알리는 것도 하면 되지하는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 결제 문제는 처음부터 이 회사를 난관에 빠뜨렸다.

해외에 있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옷을 팔아야 했는데 당시 한국의 결제 시스템 문제로 외국인이 한국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는 것 자체가 어려웠어요. 결제가 안되는 경우도 허다했고 액티브엑스 등 복잡한 프로그램을 강요해서 구매를 포기하는 사례도 많았죠. 정말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말도 못할 만큼 고생을 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다보면 2013년 한국에서 (대통령의 발언 등으로도 물론 화제가 됐지만) 논란이 됐던 액티브엑스 문제가 떠올랐다. 해외에서 물건을 사려고 해도 결제가 안되는 한국의 인터넷 환경에 대한 논란이었다.


 다행히 결제 문제가 조금씩 해결됐다. 결제문제가 개선되면서 해외 소비자들에 대한 마케팅도 탄력을 받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업이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법인화를 하면서부터였다. 본엔젤스 등 외부 투자자들의 조언을 듣고 협업을 하면서 사업이 크게 팽창했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 키운다


 “2015년에 들어와서 법인으로 전환했어요. 사업을 시작하고 4년이나 지나서야 그렇게 한거죠. 법인으로 전환하고 본엔젤스 등으로부터 투자를 받은 뒤 본격적으로 온라인 마케팅을 강화하면서 판매량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동대문표 옷이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이었다. 하지만 법인화를 전후해 상품의 구성이 다양해졌다. 스토레츠가 지향하는 것은 개성 강한 브랜드’. 한국의 자라(ZARA) 수준에 그치지 않겠다는 게 김보용 대표의 포부다. 즉 샤넬 에르메스 등 명품 브랜드와 명품 스타일을 대중화시켜 빠른 시간 내에 상품을 선보이고 회전율을 높인 SPA 브랜드, 딱 그 중간 지점을 겨냥했다.


 “명품 브랜드는 고가라 부담스럽고, SPA 브랜드는 뭐랄까. 너무 유행만 좇는 스타일인 것 같아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가 어렵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고 독특하면서도 예쁜 스타일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브랜드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결국은 동대문표 옷 만으로는 안된다. 직접 디자인한 옷의 비중을 늘리면서 스토레츠를 자체 브랜드로 키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이 효과를 내고 있다.


 올들어 지난해 상반기 대비 스토레츠 방문자 수는 5.5배 늘었고, 페이지뷰는 718%나 증가했다. 매출은 540% 증가했다. 2분기만 놓고 보면 실적이 더 좋다. 김 대표는 2분기엔 작년 2분기에 비해 매출이 60배 이상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빠르게 변하는 유행에 대응하면서 자라나 H&M과 같은 기존의 SPA 브랜드보다 훨씬 더 개성 강한 소비자들을 충족할 수 있는 디자인에 승부를 걸고 있다. 좋은 옷을 싸게 만들어내는 동대문의 효율성과 김 대표의 감성이 만나 현재까지는 반응이 좋다. 김 대표는 처음엔 한국의 자라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더 큰 꿈을 꾸고 있다전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우수한 패션을 알리는 대표 브랜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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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강남 지역과 분당, 판교, 용인, 안양 등지에선 출퇴근 시간대 카풀 서비스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럭시와 풀러스라는 두 서비스가 모두 비슷한 지역권에서 서비스를 시작해 뜨거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풀러스가 지난 5월 먼저 나왔지만 3개월 가량 늦은 8월에 출시된 럭시가 가입자 수, 드라이버 수, 일 카풀 건수 등 대부분의 지표에서 풀러스를 추월하면서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뒤늦게 나온 럭시는 어떻게 풀러스를 단숨에 추월했을까. 글로벌 카풀 서비스 우버는 퇴출됐는데 이들은 어떻게 합법적인 서비스가 가능한 걸까. 아직 끝나지 않은 이들의 경쟁 속에 이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을까. 이번 한국의 스타트업 주인공은 출퇴근 카풀 서비스 럭시를 만든 길창수와 최바다 창업자다.


다날에서 만난, 다른 듯 닮은 두 사람

럭시의 창업자 길창수, 최바다 두 사람은 모두 창업으로 잔뼈가 굵었다. 세상의 정해진 길을 가는 것보다는 기존의 것에 의문을 던지고, 불편한 것은 거침없이 바꾸는 것을 시도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


 최바다 이사는 1997,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에 씨봉뮤직이라는 음악사이트를 만들었다. 아직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시절에 고등학생이 사이트를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광고를 붙여 돈까지 벌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는 컴퓨터 덕후라고 불렀다. 아직 어릴 때부터 이른바 덕심이 충만했던 것 같다.


 대학 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던 그는 고3 졸업을 앞두고 대학에 안 가면 바로 군에 입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단 대학 진학은 하지만 학교 공부엔 애시당초 관심이 요만큼도 없었다. 그가 만든 씨봉뮤직은 번창했다. 2000년에는 제법 널리 알려진 MAXMP3라는 사이트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는 맥스MP3 사이트의 창업멤버로 들어간 셈이다.

2006년 맥스MP3CJ에 인수되면서 그는 CJ에 합류했지만 대기업에서는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1년여뒤인 20076, 다날에 들어갔고 여기서 길창수 대표와 만나게 된다.


 길창수 대표의 창업 이력은 2006년부터다. 그는 부채질닷컴이라는 뉴스 사이트를 만들었다. ‘불난 이슈에 부채질하다라는 뜻의 기막힌 작명이다. 10년전 당시로서는 드물게 하루 UV100만명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는 창업자로서 직접 기사도 쓰고, 광고도 유치하고, 대외적으로 자신의 회사를 알리는 등 13역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너무 인기가 많다보니 콘텐츠를 관리하고 사이트를 지속하기가 힘들어졌다. 소송 등에도 자주 휘말렸다.


 “기사를 좀 독하게 썼어요. 조회 수도 많았고 제목도 자극적으로 뽑았고 그랬죠. 그런데 소송이나 이런 저런 일에 휘말리니까 개인이 관리하고 그러기 힘들더라구요.”


 그래도 다날에서 부채질닷컴을 인수하는 바람에 그 역시 다날에 합류했다. 200712월의 일이었다. 부채질의 높은 트래픽에 점수를 준 것이다. 이후로도 2년간 부채질을 운영한 뒤 2010년부터는 페이스월드매치라는 걸 만들었다.


 페이스월드매치는 모바일 앱에 올려놓은 사용자들의 사진을 보고 이상형을 선택하게 한 뒤 토너먼트 방식으로 승자를 가리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랭킹이 결정되지만 이후 팔로워 수 등을 합산해 월드 베스트, 국가별 베스트, 내 주변의 인기인들 등을 보여주는 앱이었다. 인간의 아주 원초적인 호기심을 자극한 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채질닷컴도 그렇고 길 대표는 상당히 근본적인 욕구나 사람들의 관심사를 이끌어내는데 능한 것 같다.


 다날에서도 다양한 사업을 경험했던 그는 2014년 회사를 나왔다. ‘내 일을 하자는 생각 때문.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결국 돈은 회사가 버는 것 같았습니다. 이왕이면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싶었어요.”


웨딩카에서 시작된 카풀 비즈니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나와서 창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블로그나 카페 활동을 했다. 다음 카페 초창기 시절부터 활동을 하기도 했고 2008년부터는 길창수의 웨딩카 나라라는 블로그를 운영했다고 한다.


 본래 길창수의 웨딩카 나라는 그의 주말 알바 컨셉트로 시작됐다. 주말에 웨딩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길 대표가 직접 달려가서 공항 등으로 라이드를 제공해주고 대가를 받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알려지면서 고급 수입차나 중대형 승용차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에게 웨딩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일로 발전을 해 나갔다.


 이런 일을 하면서 그는 고급 수입차를 보유하고 있는 전국 각지의 다양한 사람들과 방대한 네트워크가 구축됐다. 스스로 적극적으로 활동한 측면도 컸다. 고급차 동호회를 부지런히 다니면서 인맥을 쌓았다. 그가 2014년 다날을 나와 창업을 결심하게 된 것도 이런 사업 경험과 네트워크를 활용한 비즈니스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2014년에 그는 에어래빗이라는 서비스를 만들었다. 모바일 앱으로도 만들었는데, 일종의 고급 수입차를 활용한 주말 알바 소개 앱이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고급 수입차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곳에 활용되고 있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웨딩카는 물론, 프로포즈를 하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공항에 픽업을 나가거나 등등 다양한 곳에서 활용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다보면 의문이 생겼다.

물론 카푸어(Car poor)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 고급 수입차를 가진 사람들은 충분히 돈이 있는 사람들 일텐데, 그런 사람들이 주말에 몇 십만원 벌려고 그런 일에 나서나요?”

그쵸. 그러니까 돈으로 접근하면 안되죠.”

“!!”

이 분들은 이미 돈은 충분히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험으로 접근을 했어요. 에어래빗에서 고객과 연결이 되면 차량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직접 운전을 해서 가야하거든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걸로 설득을 했죠. 돈을 번다는 것에는 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새로운 경험과 환경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움직인 분들이 많아요.”


 그의 말처럼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이들 드라이버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차량에 심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음악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은 그날의 선곡한 음악을 고객에게 선물을 하는 식이었다. 일 자체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그러니까 이런 네트워크가 장기적으로 구축될 수 있지 않았을까.


 에어래빗을 설립하면서 그는 다날에서 만난 최바다 이사와 함께 공동 창업을 했다. 뚝심있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상당히 섬세하고 돌다리도 수십번 두들기며 건너가는 최 이사의 신중한 성격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자신과 서로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드시 고급 수입차가 아니더라도 남는 시간대에 차량을 빌려주거나 공유하는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란 게 이들의 판단이었다. 다만 2014년말 우버가 퇴출되는 것을 보면서 고민이 시작됐다. 그래도 언젠가 시장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카풀은 안되지만, 출퇴근 시간대의 카풀은 허용된다는 것을 알고 이 시장을 노린 서비스 준비에 나섰다. 그러던중 이들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바로 경쟁업체가 먼저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럭시의 공동 창업자 길창수 대표(오른쪽)와 최바다 이사>


3개월만에 월 10만건 매칭


2016년 봄이었다. 이들의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자신이 있었다.

카풀은 검증된 운전자와 검증된 차량을 확보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저흰 그렇게 봤습니다. 그래야 고객에게 만족스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거든요. 제가 웨딩카 사업을 하면서 배운 건, 사람들은 결코 돈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택시보다 싼 가격에 카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상당히 좋은 조건이죠. 하지만 그게 다는 결코 아닙니다. 정말 만족스런 서비스를 제공해야 해요. 가격이 싸지만 서비스는 결코 싸구려가 되면 안되는거죠.”


 길 대표와 최 이사는 방대한 수입차 보유자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럭시의 사업모델에 기꺼이 참여했다. 이들 상당수는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출퇴근하면서 사람을 태워서 갈 수 있다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경쟁사에 비해 3개월 늦은 올 8월에야 럭시는 나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수천명에 달하는 드라이버를 확보한 채 성남, 용인, 서울 강남 등지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처음에 8월 한달간 1만건의 매칭(운전자와 탑승자 연결) 을 목표로 내걸었어요. 9월에는 27000건을 목표로 했죠. 다들 너무 무리한 목표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웬걸, 첫달에 벌써 2만건 가까운 매칭 실적을 올렸고 9월에는 4만건을 돌파했다. 10월에는 월 10만건에 달하는 매칭 실적이 예상되고 있다. 그야말로 돌풍이다. 서비스 호조에 힘입어 10월 중순에는 부산에도 진출했다.


 앱을 다운받으면 2만원의 쿠폰을 증정, 2회 정도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카풀 성공률이 높고 요금이 저렴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이용자가 급증했다. 카풀 서비스 1회당 평균 요금은 1만원. 택시비에 비해 30% 가량 저렴하니 사용자가 몰리고 운전자는 어차피 빈 차로 가는 것보다 돈을 벌 수 있으니 사람이 몰리고 있다.


 서비스는 가격과 편의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카풀 서비스의 출발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자각과 의식이었다. “출퇴근하기 위해 아침에 일찍 거리에 나가 보면,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반면 거리의 차들은 운전자 한 명만 탄 채 출퇴근하는 차가 대부분입니다. 가까운 지역에 살면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이들이 함께 출퇴근할 수 있게 하면 교통 정체도 줄이고 출퇴근 스트레스와 비용을 모두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우리는 큰 기업을 일궈내자는 거죠.”


 차량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는 우버와 비슷하지만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점은 다르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은 자가승용차량의 유상운송을 금지하고 있으나 출퇴근시 차량 공유(카풀)은 허용(81)하고 있다. 럭시는 카풀 운전자가 출퇴근시에만 카풀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이를 전업으로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 최대 카풀 제공 횟수를 3회로 제한했다. 택시 사업자들과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지금 현재는 1 1 매칭 위주이지만 앞으론 1 대 다() 매칭을 겨냥한 서비스가 출시된다. 요금이 더욱 저렴해지는 것이다. 흔히들 카풀 서비스 얘기를 들으면, 아침에 택시를 타고 출근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라는 반응을 보인다. 아무리 싸게 한다고 해도 비용이 버스나 지하철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 하지만 여럿이 함께 카풀을 이용하면 이용 요금을 3분의 1, 4분의1로 낮출 수 있다. 확산될수록 거리의 교통체증을 줄이고 대중교통의 붐비는 현상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서울시 교통연구원를 보니까, 출퇴근시간대 총 8시간 동안 택시에 대한 수요가 공급에 비해 2배 가량 많더라구요. 택시로는 도저히 출퇴근 교통난을 해결하기 힘들다는 거죠. 거리의 수많은 나홀로 드라이버족의 차량을 공유해 출퇴근 교통정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겠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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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있는 시장엔 사람이 몰려든다. 중고차 시장이 대표적이다. 중고차 거래는 앞으로 점점 늘어나겠지만 여전히 불편하고, 신뢰가 가지 않으며, 가격이나 거래 과정에 대한 불만이 존재한다. 한국의 스타트업 이백마흔두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중고차 직거래 플랫폼 꿀카를 만든 라이노브파트너즈의 오종수 대표다


 스타트업 창업가들 가운데에는 정말 색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오 대표의 경력 역시 만만치 않다. 이제 갓 서른이 넘었건만 20년이 넘게 해외에서 생활을 했고, 국내외를 오가며 직장 생활과 창업 경험을 쌓은 특이한 인물이다. 분명한 건, 이력에서 보듯 거침없이 도전하기를 즐기는 이 젊은 사업가가 이번엔 중고차 시장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Just Do It


즉흥적인 성격일까, 아니면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을 즉각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일까. 오종수 대표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음악 활동을 하는가 하면, 훌쩍 유학을 떠났다가 창업을 하는 등 심상치 않은 행보를 보였다.


 “어릴 적부터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향이 강했어요.”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부모님과 함께 중국에서 살던 중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한 게 대표적이다. 음악이 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래도 고등학교 과정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검정고시를 봐서 합격을 하고 음악을 독학했다고. 프로듀싱을 배운 그는 불과 6개월여만에 파이오니어 중국 전국 대회에서 2등을 하면서 상하이 현지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게 2004년의 일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당시 한류를 타고 중국에서 엔터테인먼트쪽 사업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그는 자신이 음악적 재능이 탁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추진력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어쨌든 그의 이런 추진력에도 불구하고 음악 쪽 사업을 중국에서 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던 반도체 사업이 잘 안되면서 위험이 큰 사업을, 그것도 생소한 분야에서 한다는 건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자신의 끼는 잠시 접어두고 안정적인 코스를 밟았다. “호주 맥쿼리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어요, 그리고 영국으로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구요.”


 어린 시절 그는 해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사업을 했던 아버지 덕분에 해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도 그는 외국에서 일했다. 언스트앤영 싱가포르 법인에서도 일했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창업 쪽에 가 있었다고 한다.

한동안은 집안 사정 때문에 위험을 오랫동안 감수하는 일을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시기는 계속 보고 있었어요.”


실패에서 배운 교훈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 대한 도전 의식과 열망이 항상 있었던 그는 직장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창업을 계속 시도했다고 한다. 하라금에듀라는 이러닝업체를 창업하기도 했다. 하지만 뜻이 맞지 않던 멤버가 있어서 제대로 추진도 해보지 못하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고 한다. “그때 알았어요. 팀원 간에 정말 잘 맞아야 한다는 걸요.”


 친구와 창업을 결국 같이 하게 된 것도 이때의 경험 때문이었던 것 같다. 번역 회사를 차리기도 했고 몇 차례 소소한 창업이 이어졌지만 큰 성공을 거두기보단 금전적 이득과 훗날을 위한 경험 축적의 측면이 강했다.


 그에겐 중학교때부터 친구인 이신우가 있었다. 이신우는 연세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IBM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가 워낙 해외 생활을 오래 했지만 한국에 들어와서 그는 다시 친구와 만나 자신이 생각하는 창업 아이템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헤브론스타라는 전략컨설팅 업체에서 일할 때였어요. 고객사 중에 중고차 매매 관련 업체가 있었는데 시장 조사를 하다가 중고차 시장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친구와 함께 2015년초부터 중고차 시장에 대해 얘기를 나눴죠.”


 IBM에서 일하고 있던 이신우 역시 그의 생각에 적극 동조했다.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개인간 중고차 직거래를 활성화해주는 플랫폼을 만들면 큰 기회가 있을 거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결국은 차를 온라인으로 사고 파는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중고차에서도 그런 시기가 빨리 올 것 같았구요. 그런 서비스를 우리가 먼저 만들어보자고 한거죠.”


<꿀카의 오종수 대표(왼쪽)와 이신우 COO>


 두 사람은 20159월부터 사업 기획을 시작했고 팀 빌딩에 나섰다. 오 대표의 경우 사업 경험은 많았지만 중고차 시장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없었다. 이신우 이사의 경우에도 공대를 나와 IT 분야에 대해선 밝았지만 중고차 세계는 새로 배워야 하는 처지. 다행히 이들에게는 자동차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이 있었다. 이도겸 최고기술책임자(CTO)는 고등학교때부터 창업을 해 본 인물이고 멕시코에서 차량 매매 사이트 Autoplaza를 개발하고 운영한 경험이 있었다. 오 대표와는 하라금에듀를 같이 창업한 사이이기도 하다. 고태일 CSO(최고전략책임자)는 삼성공조 등 자동차 부품업체에서 일한 경력이 있고 김건무 CMO(최고마케팅책임자)는 삼성전자에서의 마케팅 경험과 출판사 창업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의 어려움과 결실을 모두 맛 본 인물이다. 레이싱팀 경정비 경험을 한 김훈기 팀장 등이 합류하면서 창업팀이 탄탄해졌다. 2016년 오 대표는 라이노브(RINNOV)를 설립했다.


꿀카에서, 좋은 차를 가장 좋은 가격에.


라이노브는 Right + Innovation의 합성어다. ‘올바른 혁신을 추구하자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이들의 첫 프로젝트는 꿀카. 중고차 직거래를 위한 최고의 도우미를 자처하는 서비스다.


 시장성도 분명 있었지만 오 대표의 개인적인 경험도 작용했다.

차를 좋아해서 여러 번 직거래로도 구매해 보고, 딜러를 통해서도 구매해 보기도 하고 그랬어요. 20살 때 처음으로 대학 시절 호주에서 혼다 시빅을 구매했는데 산 지 3주 후에 후진이 안되더라구요. 엔진룸에서 불이 날 뻔도 했죠. 결국 폐차를 했어요. 스물아홉살 때 지금 타고 있는 차를 샀는데, 다행히 품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알고 보니 비싸게 구매를 했더라구요. 정말 열이 받았어요. 하지만 이 경험 덕분에 창업을 하게 됐죠. 이런 경험을 다른 사람들도 많이 할 테니까요. 우리는 이런 경험이 아닌, 좋은 차를 잘 샀다는 그런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꿀카에 대해 국내 최초 관리형 중고차 직거래 중개 서비스라고 설명했다. 중고차 거래에 특화된 e-commerce 플랫폼을 운영한다.

“3월에 베타서비스를 런칭한 이후 현재까지 약 900대 판매신청이 있었지만 수도권 지역에서만 운영 중이어서 200대만 취급하고 있습니다. 매물에 대한 욕심도 당연히 있지만 처음에 너무 욕심을 내지 말고 믿을 수 있는 차량들을 엄선해서 초기유저들의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고 판단했거든요.”


 기존의 딜러를 끼고 있지 않다는 점에선 분명 직거래라고 할 수 있다. 사이트에는 판매자가 차량을 올려놓고 구매자는 인터넷에서 전자제품 구매하듯 차를 산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직거래는 아니다. 그래서 관리형 직거래라는 말을 쓴다. 차량에 대한 보증이나 검증, 거래의 안정성 등을 꿀카에서 담보하는 형태다. 정말 하루 이틀 안에 빨리 차를 팔아야 하는 상황만 아니라면, 직거래는 가장 높은 가격을 받고 차를 파는 방법이면서, 가장 싼 가격에 차를 살 수 있는 방식이다. 중고차와 같이 플랫폼 업체가 많이 관여하는 상품도 전자상거래가 가능하다는 가설이 이미 미국 등에서 증명된 것도 사실이다. 현재 미국, 중국 등에서는 조단위 벨류에이션을 받고 있는 검증된 사업 모델.


 “그동안 국내에서 딜러를 통해 거래를 했던 이유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쇼핑몰에서 물건 사고 팔듯 가장 안전하게, 가장 만족스런 가격에, 좋은 차를 판매하고 구매할 수 있는 직거래 서비스가 된다면 한국에서도 상당한 성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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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선택이다. 매순간 열심을 다해 살더라도, 모든 결정적인 것은 선택의 순간에 온다. 단 하나의 선택지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선택이다. 학교를 진학하거나 전공을 선택하는 일도, 배우자를 만나고 직업을 결정하는 것도,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도, 모두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 선택의 과정에서 결국,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진짜 모습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한국의 스타트업 이백마흔한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디디소프트 송경수 대표다. 그는 디디소프트 창업을 하기까지 참 굴곡이 많은 시간을 통과했다. 폭풍우에 굴하지 않고 키를 잡고 전진을 외치는 선장처럼, 그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거센 파도와 바람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93학번으로 입학한 송경수 대표는 대학 졸업 뒤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공과대학을 나왔지만 그가 간 곳은 인사팀이었다. 그 자신도 상당히 의외였다고 말했다. 인사팀은 통상 권력의 자리로 알려져 있지만 삼성의 인사팀에서 일개 사원이 할 수 있는 역할이나 권한은 거의 없었다. 4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는 회사를 나왔다.


 뜻밖에 인사팀으로 가게 됐지만 이후 이 경력은 그를 계속 따라다녔다. 삼성을 나와서도 그가 가게 된 곳은 결국 다른 기업의 인사팀이었다. 2003년에는 당시 뮤온라인이라는 게임으로 상종가를 치고 있던(상장도 했던), 온라인게임업체 웹젠에 입사하게 된다.


 삼성에 있으면서 좀 답답했던 그는 웹젠에서 즐겁게 회사 생활을 했다고 했다. 인사 기획이나 다양한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고 활기차게 일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점점 회사를 둘러싼 외부 환경이 악화되긴 했지만..

 

 2007년말까지 웹젠에 있었던 그는 2008년 이후 소규모 광고대행사로 직장을 옮겼다. 일찌감치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던 그에게 이해 아들이 태어나는 경사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일이 있었던 때 엄청난 사고가 따라왔다. “그해 세 살 어린 후배가 있었는데, 사기를 당했어요. 날린 금액이 수 억원에 달했으니까요. 구로동 쪽에 집이 있었는데 집도 날리고, 결국 있을 곳이 없어서 대전에 있는 부모님 댁에 내려가 있었어요.”


 휴대폰도 해지하고 그는 6개월간 칩거를 했다고 한다. 사람에 대한 배신감, 자신에 대한 실망, 그리고 앞날, 특히 아들과 가족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가 세상에 다시 나온 것은 이듬해였다. 어쨌든 생계를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인사팀 일을 계속 해 왔으니 헤드헌팅업체를 차려서 영업을 하면 되겠다 싶더군요.”


 헤드헌팅 일을 하려는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웹젠 시절 그를 채용했던 윤태중 유아짱 부사장이었다. 2009년 당시 전제완, 윤태중, 장규오 등 세 사람은 유아짱을 설립하고 채팅 플랫폼 서비스를 한창 기획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즉시 유아짱에 합류했지만, 이 생활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유아짱이 어려워진 측면도 있지만 자신의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작더라도 내 일을 하자. 이게 당시 그의 판단이었다.


人間萬事 塞翁之馬


2011년 그는 헤드헌팅 업체를 차렸다. 삼성과 웹젠에서 인사 업무를 해 온 경험을 살렸다. 예전에 알던 후배들도 합류했다. 한동안 일은 꽤나 잘 됐다고 한다.


일이 술술 잘 풀렸어요. 게임업계 쪽에 원래 인맥도 좀 있었고, 영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죠. 유아짱 시절이나 예전 웹젠 시절에도 항상 늦게 까지 일을 하고 생활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이 좀 생기더라구요.”


일찍이 닦아 놓은 인맥을 통해 영업 진행이 잘 되자 일은 마치 내버려둬도 굴러갈 것 같았다. 2012년에 접어들자 그는 투잡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회사 일은 잘 되고 있었지만 과거 사기 사건으로 인한 빚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2013년 송 대표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수원대학교 주변)에 위치한 작은 치킨집을 인수, 직접 운영을 했다. 음식점 경영은 물론, 닭을 튀겨본 적도 없는 그가 치킨집 경영에 뛰어든 것. 헤드헌팅 일은 같이 창업을 했던 후배들에게 맡겼다.


 헤드헌팅 일이 계속 유지가 되면서 치킨집까지 잘 된다면, 그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리고 경험이 없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치킨집도 잘 됐다! 심지어 동네 인기집으로 떠서 배달의 민족 등 주요 앱에서 항상 최상위에 노출되고 평점이 가장 높은 집으로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어려움이 시작됐다.


 “헤드헌팅이 계속 영업을 하면서 네트워크를 관리해야 했는데, 그게 전혀 안됐어요. 영업망이 무너지자, 일감이 없어졌죠. 저의 짧은 생각이 결국 헤드헌팅 사업을 망가뜨리게 된 거에요. 제가 일일이 직접 세심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후배들에게만 맡겨두었던 것이 패착이었던 겁니다.”


 결국 부업으로 시작했던 치킨집이 본업이 됐다. 부업으로서는 할 만 한 일이었지만 본업이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충분한 수익을 내기 어렵기 때문. 그는 떡볶이와 곱창을 추가, 3가지 아이템을 판매하는 등 매출을 올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이 과정에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선 본인이 직접 대부분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조리도 하고 배달도 했다. 배달 도중 오토바이 사고로 새끼 발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4개 모두 골절 되는 중상을 입기도 했고, 추운 겨울 기브스를 풀지도 않은 채 배달을 다니는 등 고충을 겪었다. 문제는 이런 고생이 아니었다. 치킨집은 아무리 고생을 해도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종류의 창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구로디지털단지 디디소프트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 회사 임직원들. 왼쪽 세 번째가 송경수 대표.>


매장관리 유무선 연동 플랫폼


 자신이 치킨집 사장을 하면서 겪은 가장 큰 고충은, 너무 바쁘고 사람이 몰릴 때는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저녁에 주문이 몰릴 때는 정말 여기가 치킨집인지, 전산실인지 모를 정도였어요.” 그만큼 매출을 입력하고 계산하고 정리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뜻.


 고객이 계산을 하면 POS 단말기로 전송이 된 뒤 매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내부적으로 별도의 관리 프로그램에 입력을 해야 했다. 이걸 그때 그때 일일이 할 수 없으니 하루 영업을 마친 후에 몰아서 하곤 했는데 이러다보니 매출 누락이 발생하기도 했다. 고객이 계산을 했는데 이게 현금인지, 카드인지, 카드 거래를 한 뒤 취소를 했는지 안했는지, 가게 주인이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배달을 나가면 더욱 그랬다.


 “고객들이 배달을 쉽게 주문하고 이용하기 편리한 서비스들은 많죠. 하지만 점주 입장에서 매장을 관리하고 고객에게 제때 쿠폰 등을 줄 수 있는 통합 서비스는 없습니다. 제가 해 봤으니 알 수 있는 거죠.”


 그는 자신의 매장 경험 노하우를 바탕으로 매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이 점포를 관리하는 데 최적화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기획안을 들고 옛 유아짱 시절 선후배들에게 보여줬다. 사업화하면 충분히 수요가 있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났다. 옛 후배들을 모으고, 디디소프트를 차렸다. 구로디지털단지에 사무실을 내고, 수원 봉담에서 하던 치킨집은 정리했다. 4년여만에 다시 IT업계로 돌아온 것이다.


 송 대표의 구상은 매장 업주들을 위한 매장관리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것. 그가 몸소 겪었던 불편함을 해결해 주는데 초점을 맞췄다.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도 정산을 위해 오랜 시간 매장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점, 그렇게 정산을 하고 나서도 실제 매출과 다른 경우가 너무 많다는 점, 배달 나간 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해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음식을 조리해 배달하기 쉽지 않다는 점, 너무 많은 다양한 앱과 각종 프로그램을 관리하기 힘들다는 점 등 점주들의 고충은 끝이 없었다.


 디디소프트가 개발한 디디샵(DDSHOP)은 매장 관리 유무선 연동 플랫폼이다. 매장 내 상황을 배달 직원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고, 매장 관리 프로그램에 입력한 매출 등 각종 내역이 점주의 스마트폰에도 바로 전송된다. 모든 내역을 스마트폰에서 바로 알 수 있고, 매장 관리 프로그램에 입력과 동시에 공유되기 때문에 매출이 누락되거나 고된 하루 매출 정산 작업을 오랜 시간동안 별도로 할 필요도 없다.


 매장 주인 입장에서는 매장 관리 프로그램만 디디샵으로 바꾸고 앱을 깔면 고객에게 쿠폰을 발송해주는 등 단골 고객을 관리하는 데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 고객 입장에서는 굳이 기존 배달앱과 다른 별도의 앱을 깔지 않고도 쿠폰 서비스 등을 문자를 통해 받을 수 있다. 물론 디디샵 앱을 깔면 자신이 자주 배달을 시키거나 이용하는 매장의 쿠폰 서비스 등을 받을 수 있다는 잇점이 있다.


 4,5년 전에도 모바일 매장 관리 프로그램이 나온 적이 있었다. 자영업자들을 겨냥한 서비스였는데, 대부분 너무 사용법이 복잡하거나 추가적인 학습을 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실패했다. 자영업자들의 입장에서 이들의 현실을 알지 못한 채 나온 서비스였기에 현실성이 떨어진 서비스가 많았다.


 디디소프트의 디디샵은 이런 자영업자들의 매장 관리용 소프트웨어와 기존 배달앱을 결합한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다만 B2B 형태로 매장 주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수익모델은 기존 매장 관리 프로그램처럼 프로그램을 설치할 때 정산을 하는 방식과 이 프로그램을 통해 주문이 들어왔을 때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부과하는 방식이 있다. 두 가지 모델을 놓고 검토중이다. 이달 중 테스트를 거쳐 서비스가 본격화될 예정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치킨집 이런 거 하지 말고 헤드헌팅 일 만 계속 했으면 더 평탄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하지만 치킨집을 열지 않았으면 이런 사업 기회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겠죠. 사는 게 참 어찌 될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어딘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편함과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걸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보람이 있습니다. 제가 잘 알고, 해결해 볼 수 있는 일에 도전하고 있다는 건, 힘들어도 해볼 만한 일인 것 같아요.”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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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이름을 처음에 들으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사실 회사 이름이라고 생각하기도 쉽지 않다.) 회사 이름이 노예스런이라니. 직원을 채용할 때 잘못하면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 이름에는 제법 이들이 추구하는 바가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스타트업다운 유머러스함과 끼를 반영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의 스타트업 240회는 노, 예스, 런의 창업자 오홍석 대표와 김진수 CTO의 이야기다.


결국, 할 사람은 한다

오홍석 대표와 김진수 CTO는 한성과학고, KAIST(한국과학기술원) 동창이다. KAIST 산업공학과 99학번으로 입학한 오홍석 대표는 대학을 졸업한 뒤 약 7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다. 소프트브릿지라는 회사에서 HTS(홈트레이딩시스템) 관련 업무를 하기도 했다.


 회사 생활을 잘 하다가 왜 나와서 창업을 했을까. “답답했어요. 이렇게 하는 게 답이 아닌 것 같은데, 회사에서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서 일을 하게 되면, 아닌 것 같은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많더라구요. 그게 싫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서 일을 하면 일이 잘 돼도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기도 했구요.”


 결국은 자신의 일을 찾아 창업을 했으리란 얘기지만 혼자서 하긴 힘들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데는 친구와의 우연한 만남도 한 몫 했다. 친구 결혼식장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친구가 김진수 CTO였다.


 두 사람이 결혼식장에서 느닷없이 조우했던 2011년에 김진수 CTO는 레블릭스에 있었다. 한국의 스타트업 코너 제 21회에서 아주 초창기에 소개한 바 있는 레블릭스는 훗날 엔써즈에 인수됐는데 김진수 CTO는 윤종일, 신화용 등과 함께 이 회사를 창업했다.


 오 대표는 이번이 자신의 첫 창업이지만 김진수 CTO의 창업 경력은 10년을 훌쩍 넘긴지 오래다. KAIST 00학번인 그는 학교 동기동창인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이사와 함께 이미 지난 2002년 중소기업창업경진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때 받은 상금 1억원으로 에빅사라는 인터넷 회사를 설립했다. 2005년까지 사업을 했지만 창업멤버들이 모조리 군에 입대하거나 병역특례로 군 복무를 대신하게 되면서 사업이 중단됐다. 당시 김진수 CTO는 병역특례로 그래텍에 갔다가 넥슨으로 옮겼다. 이들이 다시 모여 레블릭스를 창업한 게 2010년이었다.


 동영상 검색업체인 엔써즈가 2012년 레블릭스를 인수한 뒤 김진수CTO도 엔써즈에 들어갔다. 두 사람이 우연처럼 결혼식장에서 만난 뒤 201320142년 동안은 창업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었다. “이 때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테스트를 해 봤어요. 그래도 제가 해보고 싶었던 아이템이 따로 있었죠.”


 2014년말 김진수 CTO가 엔써즈에서 나왔고 비슷한 시기 오 대표도 회사를 나와 두 사람은 함께 창업을 했다. 회사 작명은 김 CTO가 했다. 과거 레블릭스 등 회사 이름을 직접 짓는데 소질을 보였던 그는 이번에는 약간의 재치와 유머감각, 그리고 듣는 이의 여유가 필요한 독특한 이름을 지었다. ‘노예스런의 탄생이다.


외국인 친구를 만나는 최고의 방법, 미프.

노예스런 회사의 소개서 첫 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써 있다.

No apps for your needs?

Yes, there will be!

Run our app

각 문장의 첫 글자를 따면 노예스런이 된다. “노예스런은 생활의 윤택함을 주기 위한 모바일 서비스 개발회사입니다


 오 대표가 회사를 차리고 해 보고 싶었던 사업은 이거였다. “이태원에 가면 외국인들이 많이 있죠? 많은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합니다. 영어 등 외국어를 배우고 싶은 욕구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문화권의 친구를 만나고 싶은 욕구때문인 경우도 있고,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다양하죠. 그런데 무작정 오프라인에서 헌팅으로 만나는 건 실패 확률이 너무 높고 위험한 것 같아요.”


 이렇게 생각한 오 대표는 스마트폰에서 외국인과 대화를 나눠본 뒤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앱 ‘Meeff’를 개발했다. 2014년말 법인을 설립한 뒤 지난해 앱 개발이 완료됐다. 지온네트웍스, 엔써즈, YAP 등에서 일한 유민정 이사가 디자인 책임자로 합류했다.


<'노예스런' 창업멤버들. 왼쪽부터 유민정 CDO, 김진수 CTO, 오홍석 CEO>


 미프는 외국인 친구를 모바일 앱 상에서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서비스다. 한국인 친구를 만나고 싶은 외국인이나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은 한국인을 연결해준다. 서로 원하는 국적과 언어, 스타일 등을 선택하면 외국인 친구를 미프에서 만날 수 있다.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부작용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만, 1년 동안 서비스를 운영한 결과 현재까지는 대부분 실제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에 들어오는 이들이 많다고. 20만 명이 가입했고 월간 실 사용자 수는 10만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수치를 보이고 있다. 내년 말까지 이 숫자를 35만으로 끌어올리는 게 이 회사의 목표.


 특정 국적이나 성별을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 놓으면 회원 중 선택 조건에 맞는 인물들 사진과 프로필이 내 화면에 뜬다. 이를 보면서 대화하고 싶은 사람을 클릭한 뒤 상대방이 이를 수락하면 대화를 할 수 있는 방식이다. 상대방이 수락해야만 대화가 가능하지만, 사이버 머니를 조금 쓰면 바로 대화창을 열 수도 있다.


 미프는 국가별 서비스라는 게 특징이다. 일본과 대만, 중국 시장을 겨냥한 서비스도 준비중이다. 즉 일본인을 친구로 사귀고 싶은 외국인과 외국인을 만나고 싶은 일본인을 위한 별도의 미프가 나오는 식이다.


 대화방을 바로 여는 유료화 모델 외에도 다양한 유료화 모델을 개발중이라고 한다. 언어 교환 콘텐츠도 제작중이다. 현재 서비스를 이용중인 고객층 가운데 여성의 비중이 남성보다 높다는 건 상당히 고무적이다. 당초 한국 여성과 외국 남성의 친구 맺기가 많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오히려 한국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친구 맺기가 많다. 오홍석 대표는 점점 외로운 사람이 많아지고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은 수요는 더 늘어나고 있다외국인 친구를 만나는 가장 좋은 통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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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팀이다. 네 남자의 우정이 그렇고, 이들이 지향하는 세계가 그러하며, 이를 위해 차근차근 일을 꾸며 나가는 것도 그러하다. 이런 팀이라면 자신들이 그리는 미래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뭔가 세상에 임팩트를 주는 일을 하지 않을까. 한국의 스타트업 이백서른아홉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반베이스(Urbanbase)를 창업한 네 남자들이다.


여덟 살에 코딩을 시작한 소년


집에 애플II가 있었어요.”
 어반베이스 하진우 대표가 인터뷰 도중 불쑥 이런 말을 했다. 하 대표의 아버지는 상당한 IT매니아였던 것 같다. 엔지니어였던 하 대표의 아버지는 새로운 전자제품을 즐겨 사용했고 집에 애플II와 같은 컴퓨터가 있었던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접했다.


 틈만 나면 게임을 하던 그에게 어느 날 아버지의 말씀. “이왕이면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배우면 어떻겠냐.”

 그래서 그는 프로그래밍을 배웠다. 베이직부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여덟 살 때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어린 나이에 코딩을 배우다니. “아직 글도 잘 모를 때였어요. 저한테는 그냥 숫자를 익히는 것처럼, 어떤 기호처럼 코딩이 다가온 것 같아요.”

 어쨌든 그는 그 덕에 일찌감치 프로그래머가 됐다. 당연히 대학도 컴퓨터공학과로 갔을 것 같은데 그의 선택은 건축공학과.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된다는 부모님 말씀도 있었고..당시에 건축학과가 인기도 좋았거든요. 하하


 춤추는 걸 즐겨하고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지만 코딩을 단숨에 배우는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내신이 전혀 뒷받침이 되지 못했지만 이과에 필요한 학업에 능한 그는 속성으로 준비해 경희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2000년대 초반인 당시는 TV프로그램에서 러브하우스 등이 인기를 끌면서 건축학과가 상당히 주목받던 시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그는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건축설계사무소에 들어가게 된다. 언젠가 자신의 건축사무실을 차려야 하는 입장에서 마땅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맞닥뜨린 것은 우울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잠시 중단해야 한다. 지금 회사를 창업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계기가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라고 판단해서다. 그가 대학 과정을 마무리하고 건축설계사무소에 입사하는 그 사이에, 그는 군대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어반베이스 창업 멤버들. 왼쪽부터 하진우 대표, 이경우 CTO, 김덕중 COO, 오세준 CSO. -어반베이스 제공>


군에서 만난 네 남자

 

 하 대표는 학부를 졸업하고 공군 장교로 군에 입대했다. 경남 진주의 공군 훈련소에서 동기간으로 만나 금방 친해진 이가 오세준(CSO)과 이경우(CTO). 오세준 이사는 싱가포르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지내다가 한국에 들어왔다. 뭔가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렴풋이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이유인 듯하다. 하여간 군에서 몸을 부대끼며 친해진 이들은 김덕중 교관을 만난다. 공군사관학교 산업공학과를 나온 김 교관은 당시 빨간 모자를 쓴 악마의 조교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들 넷은 결국 하 대표의 아이디어와 설득으로 다 같이 창업이라는 험한 바다에 뛰어들게 되지만 이 당시만 해도 그저 친한 친구일 뿐이었다.


 “군대 가서 가장 친한 친구가 생긴 셈이죠.”

네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부러울 정도로 드문 일이다. 더군다나 훈련을 받는 입장에서 교관과 그렇게 친해진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엄격하고 터프한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사람이 참 좋더라구요.” 하 대표의 말에 다른 멤버들도 맞장구. 내가 봐도 그렇다. 네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다. 또래들이 만나니 금방 친해진 것. 그런데 친해지려면 약간의 우연 아닌 우연도 필요하다. 훈련소 시절에 처음 만나 친해졌지만 계속 관계를 이어가려면 군 생활을 같이 해야 했다. 공교롭게도 훈련이 끝난 뒤 자대 배치도 같은 곳으로 받았다. 이제는 이들의 만남이 어떤 필연이 됐다.


 2년이라는 시간동안 이들은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했다. 밤에는 술잔도 기울이고, 젊은 체력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도 나눴다. 서로를 속속들이 알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도 제대를 하고는 각자의 길을 가야 했다. 각자 갈 길이 다르기도 했다.


 2009년말 제대한 하 대표는 훌쩍 여행을 떠났다. 중남미와 아프리카가 그가 선택한 여행지.

왜 하필이면 중남미랑 아프리카를?”

당시에 제가 체게바라를 좋아했어요. 그런 기운을 느껴보고 싶어서 중남미로 갔구요.”

다녀오니 어땠나요?”

글쎄. 오히려 그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고나 할까. 체게바라의 혁명 시기와 지금은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았고, 오늘날 세상을 바꾸는 힘은 스타트업에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오지에 와서 중국산 신발을 파는 아저씨를 보면서, 세상은 넓고, 정말 다양한 일이 있으며, 사업 아이템이 무궁무진하다는 것도 그가 배운 것. 그렇게 장장 6개월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건축설계사무소로 들어갔다. 아직은 자신의 진로를 확정하지 못했을 때였다.


가상현실에서 미래를 보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건축설계사무소에 있던 기간 동안 그는 쉽지 않은 건축업계의 현실을 확인했지만, 그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다른 일이 아닌, 그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다. 2013년 그가 건축설계 관련 외주업체를 창업할 당시만 해도 그가 찾아다닌 새로운 가능성은 아직 희미했다.


 “일을 하다보니 설계도면을 3D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파트의 경우 건축법 규제에 의해서 규격과 모양이 대부분 정해져있기 때문에 사실 도면만 있으면 3D 입체화를 하는 게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건축법상의 규제 등을 데이터값 화해서 코드에 집어넣으면 가상의 모델링이 되겠다 싶었죠.”


 그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설계 전문가와 고객의 인식상의 차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설계 전문가들은 도면을 보면 실제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지지만, 클라이언트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설계사무소에서 도면을 3D로 만들어주는 외주 업체를 이용하지만너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서 작업이 진행이 안 될 때가 많았어요. 잘 설계된 알고리즘으로 이걸 자동화할 수 있으면 상당히 많은 곳에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전우들은 각자의 길에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오세준은 2009년말 제대한 뒤 SK텔레콤에 입사해 마케팅과 전략 기획 분야 등의 업무를 차례로 했고, 김덕중은 2012년 공군을 제대한 뒤 삼성디스플레이에 입사해 일을 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면서도 이들이 계속 같이 만남을 이어갔다는 게 중요했다.

처음부터 친구들하고 사업을 하려고 했었나요?”

아뇨 그렇진 않았어요. 그냥 창업을 하고 일을 하다보니 필요한 분야가 생겼죠. 그때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에게 상의를 했는데 이렇게 같이 하게 됐네요.”


 결국은 하진우의 꿈에 세 친구들이 함께 한 셈이 된다. CTO 역할을 맡은 이경우와는 처음부터 창업 시작을 함께 했고, 일을 구체화하면서 삼성디스플레이에서 재무 담당으로 있었던 김덕중, SK텔레콤에서 마케팅과 기획을 한 오세준이 합류했다. 친구들은 하 대표의 아이디어와 실행방안에 공감했다. 시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차례로 합류하면서 팀이 완성됐다.


 출발은 건축설계 업무를

하는 데 필요한 2D 도면을 3D화하는 솔루션의 개발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무엇이든 도면만 있으면 모든 현실세계를 가상의 세계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면 그대로 구현되는 것이 실제의 건축물이기 때문에 도면만 있으면 가상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이를 통해 여러 가지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실내공간정보를 가장 많이 가진 기업


 “전 세계에서 실내 공간정보를 가장 많이 가진 회사가 될 겁니다.”

 하 대표가 밝히는 이 회사의 비전은 명확했다. 실내 공간정보를 VR 가상현실에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자는 게 이 회사의 비전이었다.


 어반베이스는 현재 100만개에 달하는 국내 아파트와 오피스텔의 도면 및 이 도면에 따른 3D 실내 공간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어떤 건물의 실내든 기본적으로는 도면만 있으면 2초 만에 실내 공간의 3D 정보가 만들어진다. 아파트의 경우 한 도면을 공유하는 세대가 많기 때문에 100만개의 도면만 있어도 국내 1000만 가구를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 대표의 설명을 들으며 어반베이스 홈페이지에 들어가 국내 한 아파트의 도면을 클릭했다. 순식간에 집의 입체 정보가 나타났다. 방의 위치는 물론 계졀에 따른 일조량에 따라 방의 밝기와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까지 표현이 됐다. 현재 어반베이스는 3D 모델 뿐 아니라 여기에 가구를 배치해 집안을 꾸미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내가 꾸민 방을 SNS에 올리거나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직은 붙이지 않았지만 커머스를 추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구를 배치해 보고 직접 구매를 할수도 있다. 구매시 수수료 수익이 생긴다.


 어반베이스 포 비즈니스도 준비하고 있다. 인테리어 업체 등이 고객들에게 설명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솔루션을 개발해 판매하는 것이다. 그 밖에 호텔이나 콘도 등 건물 내부 정보의 가상화가 필요한 업체들에게 3D 솔루션을 제공할 수도 있다.


 해외 진출도 물론 가능하다는 설명. “국경을 뛰어넘어 건물의 설계 도면만 있다면 어느 곳이든 가상의 공간을 만들 수 있거든요. 특히 일본과 중국은 한국과 도면 작성 방식이나 주거 형태가 비슷해서 어반베이스의 알고리즘을 쉽게 적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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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는 놀라움 자체였다! ‘국내 최초, 최고 시설이라고 이들이 설명하지 않았더라도, 오로지 VR(가상현실) 콘텐츠 제작만을 위해 이런 시설을 갖추고 있는 곳이 흔치 않으리란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시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리얼리티리플렉션(Reality Reflection)3D 가상화 솔루션 기술을 개발해 온 손우람, 그리고 네 차례의 창업과 세 차례의 성공 경험을 가진 노정석 두 사람의 기술과 노하우가 결합해 탄생했다.


3D와 가상현실에 대한 꿈

건국대학교 컴퓨터 공학과(04학번)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방사선응용생명과학)에 진학한 학생 손우람. 공학 기술과 의료 분야의 접목된 사업을 생각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 아니었을까.


 군 생활을 대신하기 위해 병역특례로 삼성전자에 입사한 것이 그의 이런 관심사를 구체화하는 계기가 됐다. “3D 기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품에서 작동하는지를 그때 처음 알게 됐어요. 카메라에 들어가는 3D기술에 대한 선행연구를 했거든요.”


 이후 그는 3D 기술을 갖고 사업을 할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가 처음 찾아낸 사업은 3D 스캐너 솔루션이었다. “신체를 스캔해서 3D 모형으로 만들어내는 걸 생각했어요. 정밀하게 스캔을 할수록 쓰임새가 많아질 것은 분명하구요. 특히 일단 성형외과를 비롯해 의료 분야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20144월 그가 자신의 이름 끝자를 따서 만든 람테크놀로지는 페이스박스라는 솔루션을 개발했다. 페이스박스는 포터블 3D 스캐너를 이용, 성형수술 전에 환자의 신체를 정량적으로 측정한다. 의사에게는 수술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고 환자에게는 수술 시뮬레이션을 통해 수술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즉 성형외과를 찾은 환자가 수술 전에 자신의 수술 후 모습을 정밀하게 예측해 볼 수 있는 시뮬레이션 솔루션이다.


 성형외과에서 다양하게 쓰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시작했지만 사실 치료 목적 뿐 아니라 모형물을 제작해야 하는 곳이나 상상의 것을 현실화해서 봐야 하는 여러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손 대표는 람테크놀로지 시절 그해 11KBS 황금의 펜타곤이라는 창업 공개 오디션에서 시즌2 6주차 우승을 하기도 했다. 11월말에는 대한민국 창조경제박람회 2014에 나가 3D 스캐닝 기술을 시연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손 대표는 생각지도 못했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꿈꿨던 3D 스캐닝 기술의 확장 기회를 얻게 된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시작된 재도전

2014년 겨울은 11월 중순부터 일찌감치 찾아왔다. 밖은 한겨울 날씨였지만 창조경제박람회가 열린 코엑스는 더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손 대표는 부스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3D 스캐닝 기술에 대해 생소한 사람들에게 회사의 기술과 비전을 알려야했기 때문이었다. 3D 스캐닝 기술은 충분히 관심을 받을 만했고, 즉각 쓰일 수 있는 분야였기 때문에 중소기업청장부터, VC 관계자들, 대기업 임원, 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손 대표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명하고 있을 때 노정석은 창조경제박람회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손 대표의 열정적인 설명 장면이 들어왔다. 이미 네 차례의 창업을 했고 세 번이나 성공을 한 경험을 갖고 있는 노정석 전 아블라컴퍼니 대표는 유심히 손 대표의 설명을 들었다. 노 전 대표가 손 대표에게 그처럼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역시 3D 가상화 분야의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 전 대표는 즉석에서 손 대표에게 제안을 했다. “저랑 같이 사업을 하시죠. 더 큰 시장이 열리는 곳에서.”


 그야말로 길거리 캐스팅으로 공동 창업자를 찾아낸 격이다. 3D 스캐닝 기술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든 이미지를 찍은 다음 이를 가상의 공간에서든 실제 현실에서든 실물 그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 손 대표가 축적한 이 기술을 갖고 의료업계에서 쓰이는 수준을 뛰어넘어 좀 더 큰 시장에서 활용하려고 했던 게 이들의 의도였다. 아직 어떤 시장이 열릴지, 어떤 분야에 적용을 할지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현실의 생생함을 그대로 살리는 3D 모델을 만드는 것이었다.


 20154월 킵코코리아 법인을 설립하고(나중에 리얼리티리플렉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노 전 대표와 과거 아블라컴퍼니 시절 같이 일했던 김준수 이사가 합류하게 된다. 3D 기술로 출발한 이 회사는 점차 사업 모델을 구체화해 지난해 하반기에는 현실의 인물 캐릭터를 가상세계에서 구현하는 기술 개발 회사로 다시 태어났다. 사명도 현실을 반영한다는 뜻의 리얼리티 리플렉션(Reality Reflection ; RR)으로 지었다.


<리얼리티리플렉션 창업멤버들. 왼쪽부터 노정석 CSO, 손우람 대표, 김준수 COO. 사진=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2015년 하반기는 언론과 소셜네트워크 상에서 VR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던 시점이었다. 노정석 손우람 김준수 등이 VR관련 기술 개발에 나섰다는 소문도 퍼져나갔다. 그런데 웬걸? 관심이 많은 분야인 듯 했지만 막상 투자 유치조차 쉽지 않았다.


 “올해 초만 해도 VR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던 것 같아요. 별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VC들 중에도 실제 투자와 관련된 관심을 보이는 쪽은 거의 없었습니다.”


 3D TV나 스마트TV와 같은 꼴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를 뒤집어쓰고 힘들게 경험해야 한다는 VR의 태생적인 한계가 시장의 정확한 전망을 가늠하게 하는 데 상당한 진입장벽이 된 것이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2016년초부터였다. “CESMWC 이런 국제IT컨퍼런스에서 VR에 대해 대대적으로 조망을 하면서 관심이 갑자기 늘었습니다. 투자자들이나 같이 사업을 제휴하고 싶다는 이들의 문의가 이때부터 급증하기 시작했죠.”


실제보다 생생한 가상현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RR 사무실을 찾았을 때,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곳곳에 있는 VR 장비였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열명 남짓한 이들의 화면에는 전부 다 인물 캐릭터를 3D로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그래픽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가장 시선을 끈 것은 사무실 한 층 아래에 있는 별도의 스튜디오였다. 이 스튜디오는 가상 현실의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영상 촬영 장비였다. 즉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아주 정교한 3D 가상현실 이미지로 구현하는 것이었다. 사진에서 보듯 무대장치처럼 꾸며진 스튜디오에는 무려 160개의 DSLR(디지털일안반사식)카메라가 구비돼 있었다. 카메라는 각각이 인체를 부위별로 정교하게 찍을 수 있도록 위치가 고정돼 있었다.


<리얼리티리플렉션 스튜디오 촬영장비 앞에서. 왼쪽이 손우람 대표. 오른쪽이 노정석 CSO>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사진을 찍을 필요가 있나요?”

 “특히 얼굴 부위는 정교한 표정이 나와야 합니다. 얼굴 표정이 변하는 게 캐릭터의 생생함을 살려주는 데 가장 중요하거든요.”


 이들이 추구하는, 그리고 상당히 진행된 VR 캐릭터는 지금 VR 게임이나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VR 캐릭터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VR 기기를 쓰고 나타난 캐릭터가 나에게 반응을 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눈을 크게 뜨기도 하고 손을 흔들어 인사하면 같이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고 말하는 등 반응을 보인다. 아무런 반응이 없이 그냥 만들어진 영상을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만 하는 듯한 기존의 VR 영상과 다른 점이다.


 반응하는 VR 인물 캐릭터는 연내 출시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다양한 실험적인 서비스를 내놓을 계획이다. 우선 관객 앞에서 드럼을 연주하는 VR 음악 게임을 선보인다. 손우람 대표의 강권(?)VR 기기를 뒤집어쓰고 직접 게임을 해봤다. 익숙치 않으니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스틱을 휘두르기만 하다가 끝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게임 자체는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C게임이나 모바일게임에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환경이었다. 우선 몰입도가 대단했다. 만약 정말 생생한 영상이나 캐릭터가 눈앞에 펼쳐지고 이와 대응해서 게임을 하거나 대화를 한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할 것 같았다.


 “어느 날 스마트폰 시대가 왔쟎아요. 이제 VR 시대가 들이닥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대가 오면 사람들이 스마트폰 들여다보는게 아니라 눈앞에 바로 영상이 펼쳐지고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콘텐츠를 즐기게 될 겁니다.”


 VR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 아닐까. 손 대표와 노정석 CSO(최고전략책임자. 그는 RRCSO를 맡았다)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커뮤니케이션 수요가 가장 클 것이라는 점.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현실과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생생한 캐릭터와 하고 싶어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예측이었다. 하다못해 VR상에 나의 비서를 만들고 비서와 대화를 하더라도 이왕이면 반응하는 캐릭터가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이런 시대를 대비해 VR 시대 적절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려는 게 손 대표와 노정석 CSO, 김준수 COO(최고운영책임자)의 목표다.


 3D 가상화 분야의 기술을 보유한 사람(손우람)과 다양한 창업 성공의 경험을 보유한 사람(노정석)의 만남으로 탄생한 리얼리티리플렉션. 이들은 어쨌든 VR이라는 로켓에 올라탔다. 어디를 향해 날아갈지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진 않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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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속옷에 대단한 혁신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속옷에 대단한 혁신이 필요한 걸까. 어쨌든 옷감이 아무리 좋아지고 색이 아무리 화려지고, 희한한 디자인이 나온다고 해도 어쨌든 속옷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에 잘 맞고 편해야한다는 거 아닐까


 여성 속옷쪽은 잘 모르지만 남성 속옷만 해도 같은 사이즈, 같은 브랜드, 비슷한 질감과 스타일의 속옷을 사도 살 때마다 뭔가 들쑥날쑥하고 잘 안 맞거나 편함이 다르게 느껴지는 건 분명히 있다. 속옷 시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이 문제를 바꾸면 어떤 기회가 있을까. 얼마나 사람들에게 이로울까. 속옷 시장을 바꿔 보겠다고 당차게 사업을 시작한 소울부스터 박수영 대표가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시작도 못 해 보고 접은 첫 창업

박 대표는 회계사였다. 삼일회계법인과 삼정회계법인을 거치며 2년 남짓 일했다. 그쪽 업계의 전문 용어로 시즌을 4차례 돌았다고 한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졸업 전에 이미 CPA에 합격했다. 당연한 수순인듯 회계법인에 들어가 일했지만 그는 내심 창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일을 하고야 말겠다는 게 그의 결심.


 삼일에서 삼정으로 옮긴 이유도 사업을 하려면 M&A 딜과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해당 분야의 업무에 자리가 났는데, 여성이 아닌 남성을 뽑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일을 꼭 해보고 싶었던 박수영 대표는 콜드콜(Cold Call)을 걸었다고 한다. “안 뽑아도 좋으니 일단 면접이라도 한 번 보게 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들어갔죠.”


 안되면 되게 하든지, 안되더라도 부딪혀보든지. 원하던 일을 하게 된 후 박 대표의 그 다음 계획이 실행됐다. 창업을 위해 필요한 기술을 익히기! ‘멋쟁이 사자처럼을 통해 코딩을 배우는 게 그의 다음 계획이었다. 2014년 하반기는 낮에는 회사 일을 하랴, 밤에는 코딩 숙제를 하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석 달 동안 배우는 과정인데, 정말 너무 힘이 들더군요. 배우는 기간 중에는 다른 일 안하고 온전히 코딩 배우는 일에만 집중해야 하더라구요.”


 바쁜 일과를 쪼개 코딩을 배운 건 창업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온전히 과정을 끝내지 못했다는 게 부담이 됐다. 어쨌든 그는 이미 마음 속에 창업을 하고픈 아이템이 있었고, 그것을 하기 위해선 개발력이 필수였다. 자신이 혼자서 하려고 했던 마음을 버리고 그는 개발자로 구성된 팀을 찾아 다녔다. 다행히(?) 때마침 개발자들끼리만 모여 경영자를 찾던 팀을 만날 수 있었다. “잘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팀을 합쳤죠.”


 그는 자동 기장 프로그램으로 사업을 하려고 했다. 정교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했다고 한다. 엔지니어링이 가장 중요했고 본인이 직접 개발을 다 책임질 게 아니라면 개발팀과의 협업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됐다. “서로 스타일이 너무 달랐고, 잘 안 맞았어요. 안되겠다 싶었죠. 결국 팀을 해체했어요.”


 20152월 창업을 하겠다고 기세 좋게 삼정회계법인을 박차고 나온 지 불과 몇 달 안 돼 너무 빨리 결정된 첫 실패였다. 재무적 손실도 있었다. 그래도 그의 뜻은 꺾이지 않은 듯 했다. 아니 오히려 더 불타올랐다. 그래도 시간은 필요했다. 손실도 메꿔야했다. 무엇보다 첫 실패에서 배운 바를 정리하고 넘어가야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상인 DNA

다시는 그런 식의 창업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박수영 대표가 첫 실패 때를 떠올리며 한 말이다. 어떤 식의 창업을 말하는 걸까.

내가 온전히 잘 알지 못하고, 남에게 의존해야만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식의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시도에서 시작조차 못하고 팀을 해체한 뒤 그는 자신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자신이 잘하는 게 뭔지, 누군가로부터 끊임없이 도움을 얻고 조언을 구하지 않고도 해 낼 수 있는 일이 뭔지. 결론은 패션, 아니 속옷이었다!


 옷에 관심이 많거나 잘 입고 다니거나, 그런 사람은 상당히 많을 것이다. 여성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그가 말한 것은 그런 관심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의류 유통업을 하셨어요. 지방에서 브랜드 의류를 파는 사업을 하셨던 거죠.”

아하. 뭔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속옷 사업을 한다고 뛰어든 걸까. 궁금했던 부분이 조금씩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20년 넘게 의류 유통업을 하신 어머니가 옷 파는 걸 보면서 자랐어요. 고향이 강릉인데, 지방에서 숙녀복을 판매하셨거든요. 어머니는 옷을 권할 때 두 가지를 보셨어요. 체형과 얼굴색.”


 옆에서 곁눈질만 한 건 아니었다. 대학생때 그는 어머니의 의류유통 대리점 가운데 하나를 직접 운영해 매출을 크게 끌어올리는 경험도 했다고 한다. 아마 이런 경험을 하면서 사업의 묘미를 알게 되지 않았을까.


 그는 여성들의 옷차림을 보면 단박에 체형에 잘 맞지 않은 속옷(브래지어)을 입었는지 알아차린다고 했다. 체형에 비해 너무 큰 사이즈의 브래지어를 했거나, 사이즈만 보고 속옷을 사 입어서 불편해하거나, 겉옷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거나 등등. 속옷을 제대로 입지 못해 생기는 불편함이나 문제점은 많다. 이걸 간파해내고 조언을 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그녀에게 물어보는 친구들이 많다고 한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냈지만 사실 진작부터 어머니는 그가 사업가의 길을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냥 회계법인에 들어갔으니 회사를 잘 다니다가 결혼하는 걸 바라셨던 것 같아요.”

사업이 너무 힘든 길이라는 걸 워낙 잘 아시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요.”

그렇겠죠. 그래도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었어요. 어머니께도 말씀드렸죠. ‘엄마 내가 엄마가 하라는 것만 하면서 불행하게 사는 게 엄마에게도 과연 좋은 걸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게 엄마에게도 행복이 아닐까이렇게요.”


 어쨌든 자식 고집을 꺾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어머니의 반대는 그가 삼정으로 옮겨 사업을 준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그는 결국 어머니와 다투고, 논쟁을 서슴치 않으면서도 사업가의 길로 차근차근 갔다. 그리고 첫 사업에 실패 후 낙담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용기를 불어넣어준 이는 결국 그의 어머니였다.


 그는 의류 사업의 비즈니스 사이클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옐로모바일의 패션사업부에 들어갔다. 거기서 의류 업계의 속성과 프로덕트 사이클을 공부했다.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릴 필요는 없었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고 그는 실제로 4개월여 만에 배움을 마치고 나왔다. 그리고 패스트트랙아시아(FTA)의 박지웅 대표를 만나게 된다.


이제, 속옷에 몸을 맞추지 말자

FTACEO 프로그램은 2011년부터 시작된 CEO 및 컴퍼니 육성 프로그램이다. 컴퍼니빌더인 FTA가 지원을 받아 심사, 함께 사업을 키워나갈 만한 기업가를 선정하는 프로그램이다. 박수영 대표는 FTA CEO 프로그램의 첫 여성CEO로 선정됐다.


 FTA의 선발 과정에서 박 대표는 기존 속옷 산업에 대한 관점과 앞으로 혁신해야 할 방향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FTA와 생각을 같이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여성 커뮤니티를 전수 조사하고 관련 키워드로 약 3만여개의 댓글을 분석, 여성 속옷에 대한 잠재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파악해 낸 것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박 대표의 문제의식은 이거였다.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도 수시로 제기된 문제였다.

엄마와 딸이 입는 속옷 브랜드가 같을 정도로 혁신이 없는 기존 여성 속옷 시장.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국내 여성 속옷 시장은 1조원에 달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정확한 속옷 사이즈나 특성은 모르고 불편하면서도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그냥 입고 있어요.”


 박 대표는 소울부스터를 창업하면서 속옷을 안에 입는 옷, 내의의 관점이 아니라 패션 스타일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여성의 멋진 스타일이 체형을 기반으로 한 속옷에서 시작된다는 관점이다.


 “사명이 왜 소울부스터인가요?”

 “속옷을 잘 입으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신감이 생긴다는 뜻에서 지은 겁니다. 하하. 이름이 어떤가요?”


<소울부스터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


 721일 법인을 설립하고 올 11월쯤 첫 상품이 나올 예정이다. 그 전에 중요한 것이 어떤 상품을 제공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 소울부스터를 통해 속옷을 구매하면 퀴즈를 통해 내게 가장 잘 맞는 속옷을 추천해 준다.


 “데이터 기반 추천 알고리즘입니다. 이건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코딩을 배운 게 이럴 때 확실히 도움이 됩니다.”


 소울부스터는 여성의 신체 중 어깨부터 허벅지까지 토르소의 패턴을 8가지로 분류하고 키와 토르소 패턴의 조합으로 여성의 체형을 스타일링과 연결, 20가지에서 30가지 정도로 다시 분류한다. 여기서 중요한 게 소울부스터의 비밀의 퀴즈! 살짝 어떤 퀴즈인지 알려달라고 했으나 단호히 거부당했다. 정말 비밀의 퀴즈다. 하여간 이 퀴즈는 사용자들이 자신의 신체 특성이나 취향에 대해 답하면서 알게 되는 그런 퀴즈인 것 같다. 이를 바탕으로 소울부스터는 여성의 가슴 패턴을 수십개로 분류해 신체 특성과 겉옷과의 조화를 감안한 보정 기능을 넣어서 고객에게 추천하게 된다.


 속옷을 입으면 정말 자존감이 높아지게 될까. 일단 편하고 좋은, 멋진 속옷을 입으면 왠지 하루 기분을 좋게 시작하는 것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잘 되면 남성 속옷 시장도 잊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면서 인터뷰를 끝냈다. 다음은 박수영 대표의 클로징 멘트.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개인이 가진 아름다운 영혼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체형적인 한계 때문에 입을 수 있는 옷의 종류가 제한되지 않도록, 더 이상 속옷에 몸을 맞추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소울부스터가 속옷을 만들고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자존감이 높아지고 하루의 시작이 달라질 겁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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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차 가격 비교 앱 헤이딜러를 서비스하는 PRND는 설립된 지 고작 2년여밖에 안 된 스타트업이지만 이제는 상당히 유명한 회사가 됐다. PRND 설립자인 박진우 대표는 20대의 젊은 나이, 아직 학생 신분에 창업을 했다. 처음부터 그가 시장에 엄청난 변화를 주거나 정말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는 큰(?) 꿈과 포부를 갖고 창업을 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사실 별로 중요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소비자에게 혜택을 제공했고,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으며, 이런 변화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중고차 딜러가 된 대학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교육과 09학번인 PRND 창업자 박진우. 사범대를 다녔지만 그는 대학 1학년 때부터 학교 강단에 서는 것보다 창업에 꿈이 있었다. 그래서 서울대 벤처창업 동아리(SNUSV)에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거기서 사람들을 만났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동아리에서 같은 학교 컴퓨터공학과 09학번인 김지환을 만났어요. 나중에 같이 창업을 했죠.”


 그는 중고차 시장에 큰 기회가 있다고 봤다. 중고차 시장은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모두에게 불만과 불안을 안겨주는 시장이고 그래서 이 시장에 변화를 줄 수 있다면 사업적으로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 학생 신분인 그는 경험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직접 중고차 딜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학교를 휴학하고 20141월부터 그해 말까지 1년 동안 중고차 딜러 생활을 했다. 그리고 중고차 딜러 생활을 하면서 그는 중고차 시장에서 차를 파는 소비자와 이를 매입해가는 딜러 모두에게 불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가격을 주고 차를 구입해도 소비자들은 정보가 제한돼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합리적으로 차를 처분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반면 딜러들의 경우에는 누가 차를 파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차를 파는 사람과 관련된 정보에 대한 갈증이 있었구요.”


 차를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딜러 등 모든 시장 참여자가 일단 가격에 대한 불만이 존재하는 시장이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정보의 제한과 불투명한 시장이라는 시장의 독특한 구조에서 발생하는 문제였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속임수와 불친절, 무질서 등이었다. 이런 문제점을 생각하다보면 중고차를 사고 파는 것을 생각만 해도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너무나 골치 아픈 문제가 된다.


 박 대표는 복잡한 중고차 거래 흐름에서 딱 한 가지 시장만 파고들기로 했다. 그가 선택한 과정을 보면 일단 매우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을 다 바꾸려하지 않고 딱 한가지 포인트에만 변화를 주되, 해외에서 이미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는 모델을 도입했다. 바로 중고차 매입가격 비교 서비스였다.


 “해외의 중고차 가격비교 서비스들을 많이 참고했어요. 미국을 비롯해 유럽, 일본 등에서 하고 있는 중고차 매입가격 비교 서비스 중 시장점유율이 높은 업체들을 분석했습니다. 일본의 경우 2010년에 나온 매입업체 견적비교 웹서비스가 이미 중고차 물량의 30%를 공급하는 거대 플랫폼으로 발전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헤이딜러와 같은 역경매 모델인 미국의 트루카 역시 지난 2014년 주식공개상장(IPO)를 진행할 만큼 성장했구요.”


 중고차 딜러 생활을 하면서 그와 김지환, 그리고 함께 중고차 딜러 일을 했던 김수현 등 3명은 20148PRND를 설립했다.



기존 사업자들의 반발

20151월 출시된 중고차 매입 가격 비교 서비스 헤이딜러는 소비자들이 차를 팔기 위해 정보를 올리면 이 정보를 본 딜러들이 얼마에 살 것인지 가격을 올리는 매우 심플한 서비스다. 소비자들은 이 중 마음에 드는 가격과 딜러를 선택해 거래를 진행하면 된다.


 흔히들 자신이 타던 차를 팔 때 새 차를 사기 위해 기존 차를 파는 사람은 신차 딜러를 통해 차량 판매를 맡긴다. 이게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차딜러-중고차 딜러-경매상 등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수수료가 늘어나고, 결국 차 가격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정보가 제한돼 있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이래저래 귀챦은 이들에게는 이게 나을 수도 있다. 품을 들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서류 등을 잘 챙기거나 시간이 넉넉한 사람은 직거래를 선택할 수도 있다. 직거래를 선택할 경우 가격은 더 잘 받을 수 있지만 상당히 귀챦고 시간이 좀 더 걸린다.


 그런데 신차 딜러에게 차를 맡기고 팔아달라고 할 때 만큼 편리하면서도, 가격을 이보다 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다면? 소비자들이 이런 서비스를 선택하지 않을 리 없다. 즉 거래의 복잡하고 귀챦고 불안한 과정은 헤이딜러가 다 해주면서, 소비자들에게 선택권을 더 주겠다는 게 헤이딜러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이게 시장에서 통했다.


 소비자들은 기껏해야 한두군데 딜러에게 차량 매입 의사를 타진해볼 수 있었지만 헤이딜러를 통하면 헤이딜러에 등록된 전국 1000여명의 딜러 중 최소 10여 명의 딜러들로부터 매입 가격을 받아볼 수 있게 됐다. 딜러들끼리는 서로 다른 딜러들이 어떤 가격을 제시했는지 알 수 업다. 아무래도 10여곳의 딜러들이 가격을 제시하면 서로 다른, 다양한 가격이 나올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의 선택이 넓어진 것이다. 입소문이 나면서 나온 지 1년도 안돼 누적 거래액이 300억원을 돌파하는 등 순항을 했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지 못한 문제가 터졌다. 기존 사업자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20151228일 새누리당 김성태 의원이 대표발의한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김성태 의원은 오프라인 중고차 업계가 많이 모여 있는 서울 강서구 을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국회의원이다. 개정법에는 온라인 자동차 경매업체도 오프라인 영업장(3300이상 주차장, 200이상 경매실, 50의 차량성능점검·검사 시설 등)과 사무실을 갖춰야 하며 이를 위반할 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겠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오프라인의 자동차 경매상들은 어찌됐든 헤이딜러와 경쟁관계에 있다. 이들이 이해관계를 어떻게 강하게 어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들의 의견이 관철된 법안이 통과된 셈이다. 즉 헤이딜러와 같은 온라인 자동차 경매 사이트도 오프라인 경매시설을 갖춰야 한다는 것. 당연히 헤이딜러는 이런 시설이 없었다. 헤이딜러는 딜러와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하기 때문에 이런 시설을 둘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 서비스를 해 왔다.


 수십 억 원이 필요한 시설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박 대표는 결국 20161월 폐업선언을 하고 서비스를 종료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그러나 소비자의 지지를 받던 헤이딜러의 폐업 선언이 알려지자마자 시대에 맞지 않는 규제가 기업을 망친다는 목소리가 언론과 소비자의 입을 통해 즉각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때마침 택시를 잡기 어려운 시간대에 안전한 귀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전세버스 중개 서비스 콜버스 역시 택시업계 등의 반발로 서비스가 좌초 위기를 겪는 일이 발생했다. 헤이딜러와 콜버스 사례는 창조경제를 내세워 청년 창업을 독려했던 정부 정책과 배치되는 사례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결국 국토교통부는 정부와 업계 관계자, 전문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매매업 발전 민·관 합동 협의회를 구성해 회의를 열고 논의에 착수했다. 기존 업체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헤이딜러의 회생을 적극 지원하고 적절한 법령해석을 통해 합법화 추진한다고 밝혔다. 김성태 의원도 스스로 발의한 법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헤이딜러는 폐업 선언 50여 일만에 기사회생하게 됐고, 곧 이어 3SV인베스트먼트, 미래에셋벤처투자, 메커니즘엔젤펀드 등으로부터 총 16억원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50일 동안 사업을 중단했다가 3월에 다시 서비스를 재개했죠. 아직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이해 당사자들과 정부, 국회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소비자들의 편의를 높이면서 업계를 살리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헤이딜러의 중고차 거래 개념도>


더 많은 기회와 안전한 거래

헤이딜러가 결국 논란에도 불구하고 서비스를 재개하고, 성장하고 투자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시장 참여자 가운데 소비자들에게 확실하게 혜택을 주기 때문 아닐까. 이런 가정을 입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비스를 직접 써 보는 것이다.


 한국의 스타트업 코너에서 소개하는 모든 서비스를 이용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헤이딜러 서비스는 나도 사용을 해 봤다. 때마침 차를 팔아야 하는 상황이 와서 헤이딜러를 통해 차를 올려놓고 판매를 진행했다. 물론 당연히 다른 루트로도 차 판매 견적을 뽑아보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차 사진을 찍어서 올려놓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량에 대한 정보를 올리는 것도 간단했다. 차량 정보를 올리자마자 발빠른 몇몇 딜러들이 차량 매입 희망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격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예전이 알던 딜러, 또는 신차 구매시 딜러에게 맡기는 방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즉 비슷비슷한 가격들이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새롭게 헤이딜러에 진입, 고객을 확보하면서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는 딜러들이 생각보다 높은 가격을 써 낸 것이다. 그 중에는 확실히 주위의 어떤 딜러에게 문의해도 나올 수 없는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도 등장했다.

딜러를 선택하자 바로 연락이 왔고, 딜러와 내가 거래를 한다는 내역이 PRND에도 통보가 됐다. 안전한 거래를 헤이딜러가 보장해주는 가운데 딜러가 직접 소비자를 찾아와 일사천리로 계약이 진행됐다. 가격에 대한 큰 논란이 없으면 매물을 올려놓고 48시간 내에 딜러가 결정되고, 그 뒤 하루 이틀 새에 모든 거래가 끝난다.


 그런데 거래를 진행하면서 차를 올려놓는 사람 뿐 아니라 딜러들에게도 헤이딜러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헤이딜러를 통해 차를 팔 계획이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 영업력이나 인맥이 부족해 정보가 적었던 딜러들에게는 꽤 괜챦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물론 헤이딜러가 상당히 까다롭게 딜러를 심사하고 시차를 두면서 등록을 하기 때문에 번거로울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게 소비자들에게 더 신뢰를 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현재 헤이딜러는 등록된 딜러들에게 가격 후려치기, 말 바꾸기, 불친절 등을 모두 금지하고 있다. 까다롭게 관리하면서 등록을 했다가 내보낸 딜러도 500여명에 달한다. 가입 대기는 700명이 넘는 상황.


 “예전에도 매입 가격 비교 서비스는 있었어요. 그런데 룰이 지켜지지 않았죠. 모바일 거래가 되지 않는 불편함도 있었구요. 룰을 지키게 하면서 모바일로 편리하게 거래를 하게 하는 게 우리의 핵심 경쟁력이었습니다.”


 아직까지는 딜러들의 헤이딜러에 대한 호불호는 크게 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박 대표는 좋아하지 않는 딜러들이 더 많을 것이라면서도 딜러들에게도 결국 좋은 방향으로 서비스를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중고차 거래에 있어서 판매자와 구매자가 가격 측면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거래를 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직거래뿐이다. 딜러가 개입하는 순간, 가격 측면에선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딜러 제도를 부인할 수도 없다. 딜러들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충분히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즉 중고차 거래 과정의 불편함이 싫은 이들에게는 딜러들이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헤이딜러를 기존 딜러제도를 발판으로 성장해야 하는 서비스다.


 “제가 딜러를 해 보면서 알게 된 것은 중고차 딜러들의 80%가 중도에 그만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딜러들도 고달픈 일이란 거죠. 딜러들도 충분히 원하는 정보를 얻으면서, 소비자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넓게 해 주는 것. 그렇게 되면 중고차 거래 과정의 불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고 시장이 변화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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