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N을 창업했던 김범수 사장의 새로운 도전으로 주목받았던 위지아닷컴.난 연초에 처음 그 소식을 듣고 6월이었던가,서비스가 처음 시작하자마자 이용을 하기 시작했다.(이런 서비스가 나온다는 기사도 쓰고 블로그에 포스팅도 했었던 것 같다.)

내가 느낀 바로는 위지아는 중독성이 강한 서비스였다.어? 이건 또 뭘까? 하면서 내 마음에 맞는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게 만든다.게임으로 일가를 이뤘던 김범수 사장답게,재미와 중독이라는 요소에 있어선 역시 천부적이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자주,계속해서 들어오게 만드는 유인은 좀 적은 것 같았다.지식in처럼 여러가지 유인책을 만들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올 여름에 꼭 가봐야 할 휴양지'라던가 '남편이 아내에게 많이 할 거짓말들','인기있는 드라마 OST','20대가 결혼전에 꼭 갖춰야 할 것들'  등등 이런 정도의 질문과 답변은 호기심을 끌 수는 있지만 그것자체로 사람들을 계속 유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즉 호기심 차원에서 일회성 방문에 그칠 가능성이 많은 서비스라는 거다.(나를 비롯해서 내가 실험해본 나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좀 더 보편적이랄까,대중적이 되려면 아직 멀은 것 같았다.이런 스타일의 서비스 자체가 매니아틱한 성향이 있는 것인지,아니면 아직 본격적인 무엇인가가 나오지 않은 것인지 아직까지는 판단 유보지만,
현재까지 상황만 놓고 보면 호기심을 유발하고 재미가 있기는 하지만 게임처럼 좀 더 대중화된 수준의 재미는 아니고,지속적인 방문을 유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는 거였다.

아주 확 뜨기는 힘들 것 같은데,김범수 사장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의 생각을 섣불리 예단하기 힘드니 아마도 그가 계속 선보인다는 100개 벤처 기업의 움직임을 좀 더 지켜봐야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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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NHN 창업자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는 것을 바로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그의 새로운 도전의 골자는 자신이 직접 과거 한게임과 같은 비즈니스를 하기보다는 국내외 사업 경험을 살려 게임을 포함한 인터넷 비즈니스를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나 기업을 발굴하고,지원하고,컨설팅하는 일이다.이를 위해 그는 아이위랩(I.W.I. LAB)이라는 랩사를 설립했다.발굴하고 지원,육성하려면 역시 바닥을 훑고 다녀야 한다.당연히 사람도 많이 만나야 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눠야 한다.그러다보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됐고 내 귀에도 들어오게 됐다.

 지난 번에 올렸던 글보다 조금 진전된 내용이 있다.일부 보도나 블로그에서 올려진 내용과는 약간 다른 부분인데,그가 직접 대표를 맡지 않고 이재범 교수라는 분이 대표를 맡았다고 한다.이 부분은 서명덕 기자의 블로그에서 언급했던 부분이기도 한데,서명덕 기자는 이재범씨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재범 NHN 기술연구센터장과 동일인?’이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서 기자가 나한테 질문한 것은 아니지만 나도 궁금해서 알아보니 그것은 아니었다.
(그냥 생각해봐도 김범수 전 NHN 대표가 회사를 나와서 다른 사업을 시작하는데 지금 NHN 기술센터장으로 있는 분을 대표로 앉히지는 않을 것이다.이 양반도 퇴사하지 않는 한...그런데 이 분은 퇴사하지 않았다.)

 암튼 현재 확인된 것은 이재범 교수라는 분이 대표라는 것이다.검색을 해 보니 이재범 교수라는 분은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라고 돼 있는데,이 역시 이 분을 내가 몰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좀 더 정확한 내용이 나오는 대로 다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그렇고,이번에 하고 싶었던 것은 그가 이런 일을 왜 시작했는가이다.최근에 김범수 창업자를 만났다는 분들이 하도 많아서 얘기를 종합해 보건대,그는 최근 “CEO 100명을 키우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는 말을 종종 한다고 한다.그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이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이 말에는 상당한 진심이 있는 것 같다.조선일보를 비롯해 일부에서 나온 것처럼 그저 인터넷 비즈니스를 정색을 하고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것 같지는 않다.물론 투자를 하고 기획을 하면서 특정 사업에 중점을 둘 수는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단순 컨설팅보다는 투자와 유망한 분야에 대한 직접 진출 모두를 진행할 것이라 판단된다.
 
 어쨋든 분명한 것은 정황만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개발자와 프로덕트 매니저 출신들이 있다고 해서 이 회사를 어떤 회사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최대한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을 갖고 판단하는 것이 가장 맞지 않겠는가.그가 무슨 어두침침한 일을 한다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닐 리 만무하다면 말이다.

 “CEO 100명을 키우고 싶다”는 그의 말은 김범수 사장 답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다.자기가 다시 거창하게 CEO가 되기보다 인터넷 분야에서 역량있는 100명의 CEO를 발굴하고 지원해주고 싶다는 말이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고 활용하고 싶다는 말을 그는 여러 차례 했었다.인터넷 비즈니스를 한참 해보니 알게 됐던 것들,그가 겪은 시행착오들을 후배들에게는 좀 미리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강한 것 같다.아울러 (한국의 인터넷 비즈니스환경이 열악함에도)뛰어난 아이디어의 서비스들이 많이 나왔지만 안타깝게 사라진 것들이 많아 초기부터 해외 시장을 노리고 시작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는 것 같다.

 내가 궁금한 것도 이것이다.시시콜콜히 그가 누구를 데리고,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 보다는 왜,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일을 진행하며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까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그것은 그가 가져올 변화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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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터넷업계는 김범수 NHN 창업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시끌하다.블로그 사업을 시작했다,해외 인터넷 비즈니스 업체들에 대한 컨설팅 일을 하고 있다,NHN 주식을 팔고 회사를 이미 차린 상태다,서울대 공대 쪽 벤처 기업에 투자했다 등등

 이 중 정확하게 확인된 것은 없다.본인이 입을 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대부분의 이야기는 김범수 사장(왠지 사장이라는 칭호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이 아닌 이 분이 최근 투자한 회사에 일하고 있는 사람이나 NHN 사람들,업계에서 흘러나온 얘기이기 때문이다.나 역시 본인에게 직접 듣지는 못했다.다만 김범수 사장과 자주 만나는-김범수 사장의 측근이라기 보다는 김범수 사장이 주로 상담을 하기 위해 만나는 업계 사람-분으로부터 김범수 사장의 근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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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소문을 또 하나 추가할까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확인한 바로는 김범수 사장은 정자동에 사무실을 열고 회사도 설립했다고 한다.현재 직원은 20명 정도.아직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 것은 물론 아니다.김범수 사장이 지난해 NHN USA 대표이사를 그만둔 이후 아직은 차근차근 준비하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김범수 사장은 ‘아이위랩’(IWILAB)이라는 회사를 만들었고 홈페이지(www.iwilab.com)도 개설했다.사무실은 분당 정자동에 있는 시그마타워란 빌딩에 위치해 있다.NHN측은 김범수 사장이 이 회사를 설립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회사에 투자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하지만 내가 알아 본 바로는 그가 이 회사를 설립하는데 깊이 관여했으며 지금은 이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아이위랩은 I.W.I. LAB으로 표기된다.I.W.I.는 ‘Innovation With Internet’의 약자라고 한다.

 다만 서울대 검색 벤처에 투자했다거나,블로그 사업을 구상하는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최근 김범수 사장을 만났다는 한 게임업계 인사는 “블로그 사업을 하겠다는 것은 그냥 하나의 가능성이 확대된 것 같다”며 “블로그 사업 뿐 아니라 게임 사업에도 여전히 관심을 갖고 있으며 아직 구체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김범수 사장은 전혀 새로운 인터넷 사업에 도전할 것으로 예상된다.이미 NHN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둔 그는 게임사업(한게임)을 통해 새로운 산업의 문을 열었듯 현재 존재하지 않는,또는 미약한 분야에 도전할 생각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해외 시장을 겨냥한 컨설팅 사업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됐다.그가 직접 사업을 하되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새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김범수 사장의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을 받는 이유는 그가 짧은 한국 인터넷산업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기 때문이다.다른 이들과 달리 큰 성공을 거둔 후에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고 나선 그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어찌보면 계속 도전을 하는 그는 자신의 행적을 통해서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오늘도 계속 꿈을 꾸고 있다.그의 최근 행적을 볼때 머지 않아 그가 어떤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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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사장은 유희동 실장을 분대장(?)으로 한 6명의 특공대를 한게임재팬에 긴급 투입하기로 결정했다.이 역시 한국에서 한게임 유료화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유료화를 시작하고 나서 초반에 확실히 분위기를 잡아놓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것이다.

 2002년 11월 11일 어느새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추운 날씨 속에 유희동 실장이 거느린 6명의 특공대원들이 베낭 하나씩만 달랑 메고 일본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유희동 실장이 총괄을 하고 게임개발자 3명,빌링을 담당한 사람이 1명,현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1명 등으로 구성된 멤버였다.거주지 마련 등 기본적인 것도 거의 준비하지 못한 채 긴급하게 결정된 사안이었다.이들은 처음 한달 동안은 사무실이나 근처 여인숙 같은 곳에서 숙박을 취하면서 힘들게 생활해야 했다.

 김범수 사장이 특별 조직한 이 특공대는 이후 10개월동안 일본에 머무르면서 한게임재팬의 기본적인 시스템과 유료화 구조,네트워크 등을 구축했다.지금의 NHN재팬은 이때 만들어진 시스템위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유희동 실장은 그 이후 한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가족들을 데리고 2004년에 일본으로 돌아와 지금은 일본에서 완전히 정착해서 살고 있다.이 특공대가 당시 교육했던 일본인 다쿠마 상이 지금도 NHN재팬의 게임 시스템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로 손꼽힌다.

  특공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막 유료화를 시작한 일본 한게임의 수익 모델을 안정화시키는 것이었다. 2002년 10월 유료화를 시작한 일본의 한게임은 한국에 비해선 훨씬 못 미치는 유료화 성적을 내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돈이 들어오는 방안을 구체화하고 결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게 중요한 시기였다. 한게임재팬이 확실하게 자립할 수 있어야 한국의 한게임도 부담없이 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게임재팬은 초창기에는 그냥 한국게임들을 그대로 올려놨었다.한국의 한게임에서 서비스하던 게임들을 언어만 바꿔서 올려놓는 식이었다.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현지에서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했다.유희동 실장을 주축으로 한 6명은 오자마자 한게임재팬의 아바타시스템을 대대적으로 바꿨다.아바타를 클라이언트단이 아니라 서버쪽에서 저장해서 바로 불러 오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이로 인해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게임을 개발할 수 있게끔 환경을 구축했다.

 “처음에는 모듈이 2개가 있었습니다.대기실을 누르면 창이 또 뜨는 시스템이었죠.당시 한국에서 넷마블이 하나로 된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우리도 그것을 벤치마킹해 일본 시장에 적용했습니다.동시접속자수가 단숨에 1만명까지 올라갔고 2003년초에는 1만명을 넘겨 1만2000명까지 급상승했습니다.”
 유희동 실장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2002년 일본에는 게임개발자가 2명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유희동 실장은 아쉬운 대로 직접 직원들을 교육을 시켰지만 결국 2003년에 여자2,남자 1명으로 구성된 웹개발팀이 한국에서 추가적으로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특공대는 한게임재팬이 자체적으로 게임을 개발하고 과금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다.아울러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고 백업할 수 있는 내부 의사 결정 시스템을 만드는 역할도 했다.

 특공대가 다녀간 이후 한게임재팬은 기준이 달라진 회사가 됐다.이후 하늘처럼 높아만 보였던 야후재팬의 게임 사이트가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여기에 내부적으로 시스템이 구축되자 목표를 정해놓고 이의 달성을 위해 매진할 수 있는 분위기도 형성됐다.이 시기에 천 대표는 또 한번의 큰 모험을 했다.아직 채 성장하지 않고 직원들도 아직 많지 않던 시기였지만 일본 도쿄 시내에서도 유명한 에비수가든으로 사무실을 옮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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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유료화를 생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돈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유료화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하지만 동접 4800명은 일본에서도 유료화를 하기에 쉬운 조건은 아니었다.

 가장 힘든 것은 직원들을 설득하는 거였다.직원들조차 아바타 유료화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자기 자신조차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논리를 세워서 남을 설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사실 천 대표도 한국에서 성공한 그 모델로 일본에서도 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비즈니스에 확신이란 건 없기 때문이다.결국 그것이 대표이사라는 자리의 무거움인 것 같다.그래도 한국에서의 경험이 있다는 것은 역시 좋은 일이었다.한국에서의 경험과 유료화의 진행 과정은 김범수 대표와 김정호 대표가 수시로 전해줬다.
 그리고 천 대표는 사내에서 직원들과 계속 입씨름을 했다고 한다.

 “사장님,솔직히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인데요,집 파일(zip file;판매용 아바타를 묶어놓은 파일) 팔아서 도대체 얼마나 돈이 될까요? 사장님의 지시를 받아 이걸 기획하고 있지만 제가 물끄러미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저는 이걸 결코 구매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맞아요.제가 여기 오기 전에 게임회사에서 일하면서 배운 것이 있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살 마음이 들지 않으면 남도 사지 않는다‘는 겁니다.우리는 사활을 걸고 이것을 준비하는데 성공 가능성이 너무 낮지 않은가요?”

 천 대표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사실 맞는 말이구요.기본적으로 마케터들이 고민할 수 밖에 없는 부분입니다.하지만 저는 그냥 밀어 붙였습니다. 직원들도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그냥 따라올 수 밖에 없었죠.그래서 직원들을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여러분이나 나같은 30대들은 돈을 쓰지 않겠지만 10대 20대들은 다르지 않을까? 우리는 문구점 가서 장난감 안 사지만 10대들은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상 세계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만드는 아바타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유료화 초기 목표는 하루 매출이 100만엔을 넘어서는 것이었다.쉽지 않았다. NHN재팬이 선택한 유료화 모델은 아바타였다.한국에서는 이미 2001년 네오위즈,한게임 등이 성공한 모델이었다.

 유료화 첫날. 4800명에 불과한 동접수에 비해서는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첫날 하루동안 70만 엔의 수입이 들어왔다.많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돈이 들어오는 것을 본 뒤 천 대표는 바로 김범수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이날 상황을 김범수 사장이 직접 전한 적이 있다.

 천양현 대표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습니다.전화 너머로도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흥분한 것을 느낄 수 있었죠.유료화가 성공한다는 것이 한게임재팬의 독자적인 생존을 좌우하는 것이였기에 당연하기도 했지만 한국 게임업체가 해외에서 독자적인 과금 모델로 수익을 창출하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깊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한국에서 한게임이 유료화를 했던 과정과 비슷했다.첫날만 그랬고 이후 계속 수입이 감소했다. 15만 엔에 불과한 날도 있을 정도로 어려운 나날들이 계속됐다.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 한게임을 통해 경험해 봤기 때문에 심하게 당황하지는 않았다는 거였다.

 유료화를 한 뒤 첫날 이후로 수익이 감소하는 것은 당연하다.아직 무료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갑을 열 만한 새로운 서비스나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 그 다음 단계에서 필요했다.이 때가 천 대표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한다.고민은 너무 많았지만 생각을 너무 해 머리가 쉬지 않는 특이한 병에 시달리기도 했다.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어도 머리가 쉬지 않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기도 했다.원형탈모증에 걸려서 고생도 했다.하지만 무엇보다 특히 고민을 털어놓고 대화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 그에겐 가장 힘든 점이었다.아무래도 일본인 직원들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상황을 지켜보던 김범수 사장이 천양현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2002년 10월 말의 일이었다.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기가 왔음을 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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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가야할 것 같아”
 “다시 공부하려고?”
 “공부에 대한 생각도 아직 있지만,일본에서 게임 사업을 하면 어떨까해서.그때 얘기했던 것도 있고.”
 “잘 됐다.한게임 이름을 달고 하는 거야.한국에서도 지금 한참 크는 중이라 지원을 많이 하긴 힘들겠지만 이쪽에서 노하우도 있고,PC방도 해 봤으니깐 그쪽 생리는 잘 알꺼고.”

 ‘일본으로 가야겠다’ 는 마음을 먹고 있던 천양현 NHN재팬 대표(당시 미션엔터테인먼트 자양동 지점 PC방 사장)는 2000년 여름,김범수 한게임 사장과 만나 일본 시장 개척을 논의했다.김범수 사장과 자양초등학교 동기동창인 천양현 대표는 일본 유학 시절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 받을 정도로 김범수 사장과 친한 친구 사이다.그가 1999년 한국에 들어올 때만 해도 한국 일을 마무리한 뒤 다시 게이오 대학 박사과정에 들어가 학업을 계속할 생각이었지만 PC방 사업을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일본에서 게임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그의 이런 생각에 김범수 사장도 찬성했다.김범수 사장과 천양현 대표는 아직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미지의 땅 일본에서 온라인게임 사업을 일찌감치 개척해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봤다.

 아직도 따가운 여름 햇살이 채 가시지 않은 2000년 9월초,천양현 대표는 김범수 사장과 단 둘이서 도쿄로 넘어갔다.두 사람이 일본 게임업체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린 결론은 ‘일본에는 아직 전혀 온라인게임에 대한 기반이 없다’는 거였다.

 이미 한국에서 도입되기 시작한 초고속인터넷은 물론이고 미국에서 먼저 시작한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은 아주 느릴 때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일본에서 게임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다.온라인은 대세이고,일본 시장이 그 대세에서 비켜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특히 체질적으로 게임이라는 장르에 강한 일본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보다 먼저 움직여야 했다.김범수 사장 스스로 “당시 막연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무도 안할 그 때에 시작하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시장 개척 임무를 받은 천양현 사장은 막연하기 짝이 없었다.우선 시부야에 10평도 안되는 방을 하나 얻고 직원 5명을 채용했다.모두가 일본인이었다.당시 한국 한게임도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시기여서 자금이나 인력 차원에서 따로 지원을 기대하기가 힘들 때였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초기 자본금은 비싼 일본의 물가 등으로 인해 금세 동이 났다.설립 초기 ‘한번 해 보자!’는 분위기 속에 젊은 소수의 직원을 이끌고 시작할 때만 해도 패기에 넘쳐 있었지만 돈이 떨어지자 사정이 달라졌다.돈이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은 설립후 1년이 지났을 때부터.즉 2001년 여름부터 NHN재팬(당시 한게임재팬)의 진정한 위기가 찾아왔다.

 "가끔 정말 힘들 때는 한국의 재무 담당자와 통화를 해 보기도 했지만 서로 돈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힘없이 전화를 끊곤 했다”

 모두가 일본인인 직원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언어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온라인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다.돈이 많으면 많은 댓가를 지불하며 직원들을 붙잡을 수 있지만 그마저도 어려워진 것이다.여기에 회사 직원들마저 온라인으로 게임 사업을 하는 것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고 그러면서 사기가 점점 떨어져간다는 것이 문제였다.

 천양현 대표가 홀로 밤잠을 자지 못하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물리적으로 돈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아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데다 분야마저 생소한 온라인게임에서 현지의 투자를 받기도 어려웠고,사실은 관심을 가져주는 곳도 거의 없었다.그저 하루 빨리 인정을 받는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엔 사실 일본 IT업계를 다니면서 좀 만나자고 해도 아무도 쉽게 만나주지 않던 시기였습니다.더군다나 보수적인 일본시장이니 더욱 그랬죠"

 이후 유료화를 시작하는 2002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1년이 넘는 기간동안 한게임재팬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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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게임,NHN의 창업자인 김범수 사장이 NHN을 떠날 것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건 작년 여름,아는 교수님으로부터였다.당시 책 ‘네이버,성공신화의 비밀’의 집필을 막 시작했던 터라 사실 당황스러웠다.하지만 NHN에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을 하고 김범수 사장이 곧 이어 NHN USA 대표가 되는 것을 보면서 ‘미국 법인 대표로 가는 것이 와전됐구나’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지 꼭 1년 만에 김범수 사장은 NHN을 떠난다는 발표를 했다.기자 감각이 떨어진다고 자신을 자책하기에 앞서 정말 궁금했다.김범수 사장은 왜 NHN을 떠날 생각을 했을까? NHN USA 대표를 맡은 지 불과 8개월도 되지 않아 퇴진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뜻밖이었다.한때 주춤했던 국내 한게임 사업도 최근 다시 살아나고 있고 해외 시장에서 NHN의 게임쪽 위상이 날로 커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김범수 사장의 퇴진은 의외다.그는 왜 NHN을 떠날 결정을 했을까.

 이에 대해 몇가지 설이 있고 내가 얻은 정보를 토대로 한 가정이 있다.그걸 한번 정리해봤다.

 우선은 그가 목표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그야말로 ‘다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거다.김범수 사장은 국내 게임 역사상 게임이라는 콘텐츠로 대박 신화를 만든 단 3명(김택진 김범수 김정주)중의 한 사람이다.국내 최초의 게임 포털을 만들었고 유료화 성공으로 게임 산업이 커지는 기반을 닦았다.지금도 한게임은 국내 최대 게임포털이다.일본과 중국에서도 한게임은 승승장구하고 있고 미국에서도 점점 성과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가정은 그가 가진 그릇의 크기나 목표 등을 감안할 때 틀릴 가능성이 높다.그가 NHN에서 무언가 이루고자 했다면 이것보다 훨씬 목표가 클 것이란 소리다.지금의 NHN이 국내외에서 보여주는 성적 정도는 아직 김범수 사장의 욕심에 다 차지 않을 것 같다.

 두번째 시나리오는 내부 갈등으로 인한 퇴진이다.이전부터 심심치않게 제기돼 온 설이다.네이버쪽 경영진(이해진 최휘영 이준호 김정호 김진희 등)과의 경쟁에서 한게임쪽 경영진(김범수 천양현 문태식 남궁훈)이 밀려났다는 주장이다.이 설은 최고게임책임자(CGO)를 맡고 있던 천양현 NHN재팬 대표가 올 초 갑자기 CGO에서 물러나고 조직 개편이 단행되면서 힘을 얻었다.여기에 김범수,남궁훈 등 한게임 쪽 창업 멤버들이 일제히 NHN USA로 가면서 더욱 굳어졌다.

 이 시나리오는 NHN이 한게임쪽을 아예 분사해 매각할 것이라는 설과 함께 유력해지기도 했다.국내에서 네이버 매출이 한게임의 2배가 넘는 상황에서 한게임의 입지가 자꾸만 좁아지기 때문에 제기되는 설이다.물론 NHN이 한게임을 매각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아주 어리석은(?) 결정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NHN이 이만큼 커지게 된 데는 초기 한게임과 네이버의 합병 효과가 있었고 최근에는 한게임의 해외 매출 영향이기 때문이다.NHN은 지금 한게임이 없다면 그냥 로컬 검색회사에 불과하다.지금의 기업 가치보다 절반 이하로 떨어져야 맞다.

 어쨋든 ‘내부 갈등으로 인한 퇴진’이라는 설이 맞아 떨어지려면 남궁훈 문태식 천양현 등 다른 한게임쪽 임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천양현 NHN재팬 대표,남궁훈 NHN USA 대표가 내년 초 물러나거나 지분 매각 등의 모습을 보인다면 이 시나리오는 개연성이 아주 높아진다.김범수 문태식 남궁훈 천양현은 1999년 한게임때부터 9년동안 사업을 같이 해온 일종의 ‘의형제’ 같은 관계다.굳이 말하자면 한국 게임업계의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천양현,남궁훈 등이 떠날 모습이 감지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시나리오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세번째 설은 최휘영 사장이 물러난 뒤 복귀하기 위한 수순이라는 설이다.일부에서 제기된 바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가장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가능성도 가장 낮다.최휘영 사장이 임기가 끝난 후 누가 다음 NHN호를 이끌 것인가에 대해선 명확하게 정리된 바가 없지만 김범수 사장이 굳이 이런 잡음을 일으키면서 다시 국내 대표로 복귀할 필요성이 적다.NHN은 지금 대내외적으로 이슈가 많고 복잡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런 무리수를 둘 가능성은 극히 떨어진다.

 네번째 설은 김범수 사장 개인의 심정 변화에 관한 것이다.그가 게임쪽에 한계를 느꼈다는 것.아크로드의 실패가 그에게 미친 영향이 크다는 주장이다.아크로드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범수 사장이 밀어붙인 게임이다.그리고 크게 실패를 했다.이후 스스로 게임에 대한 감이 떨어졌다는 자책이 있을 법 하다.작년에 NHN USA를 방문했다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현지에서 직원들로부터 듣기도 했다.김범수 사장은 과거에 비해 ‘게임 사업’에 대한 의욕이 좀 떨어졌다고 한다.아울러 다른 의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말도 비치기도 했다.그는 벤처 기업의 해외 진출과 관련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도 한다.국내에서 NHN이 네이버 중심으로 돌아가고 이슈도 네이버 중심으로 이뤄지고,해외의 게임 실적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거꾸로 ‘NHN은 이제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가는 조직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거다.

 NHN 측에서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바는 네번째 설이다.개인적인 판단은 두번째 설과 네번째 설의 조합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사업 실적의 측면도 있지만 내부적인 갈등 요인을 완전히 배제하긴 힘들다는 판단이다.NHN은 기업이 엄청 커지면서 사실 김범수 사장이 당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 같다.
 김범수 사장 때문에 가려진 측면이 있지만 사실 남궁훈 대표가 이끌 NHN USA의 방향에도 관심이 간다.김범수 사장이 이끌던 지금까지의 NHN USA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갈 것으로 예상된다.남궁훈 대표는 김범수 사장보다 훨씬 보드게임에 특화된 인물이다.국내에서 고스톱,포커,바둑 등 보드 게임에 대해 가장 뛰어난 감각을 갖추고 의욕을 보이는 인물이다.NHN USA가 운영하는 이지닷컴의 성격이 보다 보드게임에서 강점을 보일 가능성도 있다.

 하여간에 국내 대표적인 벤처기업인이자 가장 존경받는 게임인물인 김범수 사장이 자신의 30대를 모조리 바쳐서 이뤄낸 NHN을 떠난다는 건 그 자체로 국내 IT업계에 큰 사건임에 분명하다.김범수 사장은 그냥 조용히 집에서 쉬면서 여가를 즐길 사람이 아니다.그의 이제까지 경험과 그가 가진 지식과 카리스마는 국내 IT산업 발전을 위해 더 많이 활용되야 한다.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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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N의 창업자인 이해진 CSO와 김범수 NHN USA 대표,온라인게임업체 넥슨의 김정주 대표와 김상범 넥슨 이사,XL게임즈의 송재경 사장,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 간에는 공통점이 있다.한국의 인터넷 산업을 좌지우지하는 걸출한 인물들이라는 점이다.이 밖에도 무시못할 공통점이 있으니 공과대학,그것도 서울대나 카이스트의 86학번이라는 점이다.<이미 책(네이버,성공신화의 비밀)에서 이 내용을 일부 언급한 바 있지만 그때 못다한 얘기도 일부 있고 추가된 부분도 있어서 다시 한번 쓰게 됐다.>

 이해진 CSO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 출신이다.NHN의 김범수 사장도 서울대 산업공학과 86학번 출신이다.대학 입학때 재수를 해 이해진 CSO보다 한 살 위인 김 사장은 지난 98년 11월 게임사이트인 한게임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해 2000년 7월 당시 이 사장이 운영하던 네이버와 합병,현재 NHN USA의 대표를 맡고 있다.

 온라인게임 업체 넥슨의 김정주(34) 대표 역시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이다.김정주 대표는 국내 최초의 그래픽 기반 온라인게임인 `바람의 나라‘를 개발한 주역이다.이해진 CSO와 김정주 대표의 관계는 대학원 시절에서도 계속 이어진다.1991년 대전 카이스트 기숙사의 5~6평 남짓한 방에서 이해진 김정주 당시 두 대학원생은 같이 생활했다.카이스트 기숙사 룸메이트 둘이 각각 현재 국내 최대의 인터넷기업을 세웠다는 점은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카이스트 룸메이트 신화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이해진 김정주 두 대학원생이 같이 쓰던 방 옆에서는 송재경 김상범 두 동기생이 방을 같이 쓰고 있었다.송재경씨는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를 만들어 국내 최고 흥행 개발자로 꼽히는 사람이다.그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을 거쳐 카이스트 석사과정 90학번으로 입학했다.김상범씨는 넥슨 초창기 멤버로 메이플스토리 퀴즈퀴즈 등을 만든 거물급 개발자다.그는 카이스트 86학번,석사과정 90학번이고 송재경 사장과 대학원 시절 룸메이트로 같이 생활했다.

 둘은 대학 시절 학교에서 천재로 불렸다는 점에서도 닮았다.송재경 사장은 카이스트 재학시절 내내 학교 내에서 화제가 될 만한 개발 사례를 양산했고 김상범 넥슨 이사는 90년 카이스트 석사과정에 수석으로 입학했다.김정주 이해진 송재경 김상범 이들 네 명은 당시 카이스트내에서도 소문날 만큼 친했다고 한다.91년 카이스트에는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천재 청년 4명이 함께 동거동락했던 셈이다.


 국내 최대 온라인게임업체 엔씨소프트를 이끌고 있는 김택진 사장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이다.그는 송재경씨와 함께 리니지를 만들었다.

 서울대-카이스트는 아니지만 다음의 이재웅 사장은 연세대 전산학과(현재 컴퓨터공학과) 86학번으로 프랑스 유학을 거쳐 지난 95년 2월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한 인물이다.다음 이재웅 사장은 이해진 NHN CSO와 청담동 진흥아파트 위아래층에 살며 20년간 알아온 사이다.동네친구라고 할 수 있다.두 사람의 인연은 같은 아파트 위 아래층에 살며 서로 친해진 부모님들이 당시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새내기 이해진 씨와 연세대 전산과학과 새내기 이재웅 씨가 같은 연배에 같은 전공이란 이유로 서로 아들을 소개하며 시작됐다.

 86학번이 이렇게 인터넷산업 성장의 주역으로 등장한 이유가 특별히 있을까.넥슨의 김상범 이사는 “PC가 처음으로 보급되던 시기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특히 카이스트의 경우 당시 한국에서 처음으로 인터넷(지금과는 많이 다른 형태였지만)에 접속할 수 있는 PC가 들어온 시기였다.서울에 있던 카이스트를 이전하는 문제 때문에 90학번 석사과정 새내기들만 덩그마니 대전 카이스트에 있었고 다른 학번들은 아직 서울에 있던 때였다.

 김상범 이사는 “맨날 기숙사에서 PC를 갖고 이것저것 해보던 최초의 학번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한 시도는 전부 최초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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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N 내부에서 한동안 회자되던 ‘이해진 굴욕 시리즈’가 있다.NHN 창업자인 이해진씨가 NHN이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에 겪었던 일종의 에피소드다.업계에서 알만한 분들은 다 들었겠지만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사례 하나 정도를 드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이미 한참 지난 일이니 이해진 NHN 창업자께서도 너그러이 봐 주시리라 믿는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03년의 어느 날.당시 NHN이 입주해 있던 강남 스타타워(현 강남파이낸스센터)가 오전부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갑자기 그날 정보통신부로부터 장관(당시 진대제씨)께서 NHN을 방문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정통부 장관이 IT기업을 방문하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런 통보인 데다가 NHN으로서는 단독으로 정통부 장관의 내방을 받는 것이 처음이었던지라 법석을 떨 만했다.일단 대외 업무를 담당하는 홍보실이 난리가 났고 당시 이해진,김범수 두 공동 대표도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김범수 사장이 그날 외부 일정이 많아 이해진 사장이 장관 방문시 손님 접대를 맡기로 했다.회사가 고위층 손님 맞이에 한참 시끄러울 때 문득 정통부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장관이 다른 일정 때문에 NHN 방문을 할 수 없게 됐다는 거였다.
 이 때 당시 NHN에서는 그러려니 했다.실망스럽긴 했지만 갑작스런 방문이 취소됐기에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도 내쉬었다.그럼 이때 진대제 장관은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걸까.당시 야후의 창업자인 제리양이 한국을 방문해 진대제 정통부 장관과 미팅을 가졌다.진 장관으로서는 해외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기존 약속을 취소한 셈이 된 것이다.

 한달 쯤 지났을까.인터넷기업인들과 진대제 정통부 장관의 오찬 미팅 자리가 있었다.당시만 해도 이해진 창업자가 활발하게 대외 활동을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자리에 이해진 창업자가 직접 참석했는데 그는 장관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고 한다.

“야후 사람들 만나느라고 NHN 방문을 취소하셨다면서요? 저희가 준비 많이 했었는데..나중에 꼭 한번 들러 주십시오”

나름대로는 당시에 좀 삐졌다는 것을 은연중에 표시한 셈이고,한편으로는 국내 인터넷기업에 대한 관심을 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다.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말이었는데,진대제 장관이 이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제가 NHN을 방문하기로 했다고요? 전혀 그런 일정이 있었던 적이 없는데요? 뭘 잘못 아신 것 같습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진 모르겠지만 이 발언으로 자리가 일순 썰렁해졌다.참석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러다보니 아무래도 이날은 서먹한 가운데 자리가 마무리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일이 기억에 남았나보다.IT기업인들과 정부 쪽 사람들의 미팅이 열렸을때 진대제 장관이 유난히 이해진 창업자에게 아는 척을 했다.그때 분위기를 만회해보려했는지는 몰라도 이해진 창업자와 함께 직접 동행하면서 참석자들에게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이 분은 네이버를 창업하진 ‘이해찬’ 사장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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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4년 전만 해도 사정이 이랬다.이와 비슷한 일화가 또 있다.같은 해 NHN은 모 신문사에서 수상을 하게 됐다.시상식에는 이해진 창업자가 직접 참여했는데 시상을 하던 그 신문사 회장께서 이렇게 물어보면서 (본인의 느낌이었겠지만) 자리가 일순 싸∼해졌다고 한다.

 “저 그런데 NHN이 뭘 하는 회사인가요? 제가 들어본 적이 별로 없어서요.”

하긴 뭐 지금에야 제법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엔 NHN을 NHK의 오타로 잘못 알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던 시기니 그럴만도 했다.

 사실지금도 NHN이 뭘 하는 회사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코스닥 대장주가 됐지만,여전히 네이버나 한게임은 알아도 NHN에 대해선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게 NHN 측의 자체 분석이기도 하다.글로벌 기업을 꿈꾸는 NHN으로서는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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