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인터넷 인사이드(limwonki.com)는 한국경제신문 임원기 기자 본인이 작성한 글만 게재를 해 왔습니다. 그것도 신문에 쓴 기사는 제외하고 별도 취재를 통해 새롭게 작성한 글만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임원기가 아닌 다른 기자의 글을 올립니다. 한국경제신문 남윤선 기자(by inklings)는 산업부에서 삼성전자 LG전자 등을 오랫동안 취재해 온 베테랑 기자입니다. 최근 저와 함께 스타트업 취재팀을 꾸리면서 합류, 스타트업과 첨단 기술, 기업가 정신에 대해 같이 취재하게 됩니다. 이승우 기자(by leeswoo)는 경제부에서 기획재정부, 환경부 등을 출입했으며 IT기기와 최신 트렌드에 해박한 기자입니다. 역시 남 기자와 함께 스타트업 취재팀에 합류했습니다. 두 사람은 수시로 스타트업 취재 기록을 블로그를 통해 전달하게 됩니다. 우선 남윤선 기자의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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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기가막힌 멜로디를 흥얼거린 적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노래로 만들면 대박일텐데라는 생각이 들지만 일반인들은 멜로디를 악보로 옮길줄 모른다.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진 전설의 명곡이 수십만곡에 이를 지도 모를 일이다.


 스타트업(신생 창업기업) 쿨잼이 만든 험온은 이렇게 사라질 멜로디를 노래로 살려줄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이다. 흥얼거리기만 해도 그 멜로디를 악보로 옮기는 것은 물론 발라드, R&B 등 각종 음악 스타일에 맞는 화음도 자동으로 입혀준다. 콘셉트는 단순하지만 머신러닝’(빅데이터를 분석해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 알고리즘을 활용한 최신 기술이 활용됐다. 수 많은 아마추어 뮤지션의 꿈을 살려줄 앱을 개발한 주인공은 삼성전자 출신의 최병익 대표다.

 

삼성을 뒤로 하고 창업한, 음악을 사랑하는 기술자


갤럭시노트7 사태등 이런 저런 사건사고가 있지만, 삼성전자는 여전히 한국 최고의 직장 중 하나로 꼽힌다. 뒷면이 파란 삼성전자의 명함은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자식이자 동년배 보다 많은 월급을 받는다는 일종의 증명서다. 최 대표는 이런 삼성전자를 떠나 험난한 창업의 길을 선택했다. 대박의 꿈이나 거창한 계획이 있을 줄 알았지만 그가 내세우는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음악이 너무 좋아서요, 사람들에게 쉽게 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었고요.”


 최 대표는 원래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에서 센서 선행개발을 맡았다. “2020년까지 모든 가전을 사물인터넷(IoT)으로 연결하겠다는 윤부근 삼성전자 대표의 비전을 실행하는 핵심부서다. 전공은 전기공학이다. 한편 교회에서 10년 넘게 반주를 하고 있는 음악애호가이기도 하다. 원래 음악을 전공할까도 생각했지만, “음악은 취미로도 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공학도의 길을 택했다. 그러다가 삼성에 근무하면서 음악과 공학의 접점을 찾았다. 바로 MIR(music information retrieval·음악 정보 인출)이라는 학문이다.


 MIR은 쉽게 말해 소리인 음악을 신호로 바꾸어 정보화 시키는 것이다. 녹음과는 다르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말 그대로 소리일 뿐이지만 이를 전기 신호로 바꾸면 이 소리는 정보가 된다. 개별신호를 가공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쪼개서 전달할 수도 있다. 최 대표는 “MIR을 활용하면 악기를 다루지 못하거나 악보를 읽지 못하는 사람도 맘껏 작곡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망설임없이 삼성의 사내벤처 프로그램인 ‘C에 지원했다.


<'험온'이 띄워진 태블릿을 들고 토론을 하는 최병익 쿨잼 대표(첫줄 왼쪽)와 창업멤버들.남윤선 기자 >


 C랩 과제로 뽑히면 1년간 일상적 업무를 하지 않고 신사업 개발을 할 수 있다. 사업을 개발하면 사내 심사를 거쳐 분사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준다. 삼성은 약간의 금액을 투자하고 지분을 가져간다. 최 대표는 험온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사내 게시판을 통해 같이 할 사람을 찾았다. 반응은 생각보다 컸다. 삼성의 구동소프트웨어(OS)인 타이젠을 개발한 주역인 안영기 책임을 비롯한 쟁쟁한 인재 4명이 함께 사업을 하고 싶다고 손을 들었다. ‘쿨잼은 그렇게 탄생했다. 최 대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리 멤버들은 삼성전자에서도 우수한 인재들이라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안영기 최고기술책임자(CTO)우리는 모두 음악을 사랑했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최고의 기회였다고 말했다.

 

머신러닝활용, 허밍을 노래로 바꿔준다


허밍을 음표로 바꿔준다는 콘셉트는 간단하지만 기술적으로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허밍으로 똑같은 도레미를 불러도 음색이나 소리의 진폭 등은 모두 다르다. 이를 기계적으로 악보로 옮기면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온다. 자신은 도레미를 허밍으로 불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프로그램이 인식한 건 도미레미파미식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프로그램은 허밍하는 사람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악보로 옮겨야 한다. 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기술이 머신러닝이다. 최 대표는 사람의 허밍은 파형이 굉장히 불안전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악보로 옮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수 많은 허밍 빅데이터를 머신러닝을 통해 분석해 사용자의 의도를 읽어내는 기술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 기술을 활용하면 허밍은 물론 개짖는 소리,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등 어떤 소리도 악보를 갖춘 음악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게 최 대표의 설명이다.


 단순히 악보로 옮겨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허밍을 악보로 옮겨주는 앱은 과거에도 있었다. 하지만 험온은 악보에 좋아하는 장르의 화음도 붙여준다. 역시 머신러닝 기술을 활용했다. 프로그램이 많은 악보들을 학습해 사용자가 허밍한 멜로디에 최적화 된 화음을 골라 입혀주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찾은 악보도 있지만 스스로가 음악 고수인 최 대표를 비롯한 팀원들이 직접 음원을 만들어 데이터를 입력했다. “스스로 많은 데이터를 확보한 것이 앞으로 시장에 뛰어들 경쟁자를 따돌릴 수 있는 큰 자산이라는 설명이다.


 일반인이 허밍을 악보로 만드는 게 신기할 순 있다. 출시 수개월만에 6만 다운로드를 기록한 것이 대중의 관심을 방증한다. 하지만 이 앱이 이 될까. 최 대표는 사업적인 가치도 충분하다고 자신했다. 일단 단기적으로는 유명 음악가들과 협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예를 들어 화음을 입힐 때 인앱결제를 통해 박진영 스타일을 구매하면 그대로 음악을 구성해주는 것이다. 아울러 최 대표는 전문가들로부터 험온으로 만든 음악파일을 가공이 가능한 미디형식으로 추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올 초 SXSW(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매년 3월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리는 3대 음악축제 중 하나)에 앱을 선보였을 때 미디 추출만 되면 100달러라도 지불하고 이 앱을 사겠다는 뮤지션이 적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궁극적으로는 머신러닝을 연구하다보면 새로운 사업기회가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 대표는 게임 같은 것을 만들 수도 있고 제대로 된 음악 검색을 하고 싶어하는 검색사이트들과 협업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식으로 독립한지는 석달이 채 안됐지만 벌써 해외 유명 포털사이트들과 미팅이 잡히고 있다. 앱도 좋지만 삼성 출신이라는 이름표와 각종 스타트업 경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덕에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 CTO자신 없었으면 삼성전자 타이틀을 버리고 나오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by inkl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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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TRE)의 이철희 대표는 예전부터 쓰레기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쓰레기는 버려야 할 것이고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는 쓰레기를 다시 활용하는 것에 엄청난 부가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춥고 배고픈 나날들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이 맞다는 것을 입증하는 관문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중국에서 발견한 사업기회

그는 본래 건축학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다고 했다. 00학번이라고 하니까 16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학을 마치진 못했다. 아마 경제적인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건축사무소에서 일하고 인테리어 업체에 들어가 일을 했다고 한다.


인테리어 회사에서 2년쯤 있다가 중국에 프로젝트를 나갈 일이 있었어요. 중국에 가서 보니 중국 인테리어 시장이 급성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냥 사무실에만 앉아서 행정적인 일만 처리했으면 아마 그런 생각을 크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현장을 다니는 일을 했다. 현장을 다니다보니 이쪽 분야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많은 물자와 사람이 모인다는 것도 알게 됐다.


 “중국 프로젝트 일이 끝나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계속 그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서 직접 내가 해 보자하고 결심하고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때 그는 사업 기회만 보고 달랑 단돈 200만원만 들고 중국에 갔다. 회사 직원으로서 중국에 갔을 때와 사업을 하러 중국에 갔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고객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인테리어 사업을 해 본 경험과 그동안의 인맥 등을 활용해봤지만 결국 현지에 있는 한국 사람들의 일거리를 맡아서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계속 되긴 힘든 구조였다. 현지인들의 사업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자 일거리를 갈수록 줄어들고 갖고 있는 돈은 바닥이 났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정말 길거리에서 한달 반 정도 생활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기를 쓰고 일감을 따 내 그럭 저럭 버티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3년차부터는 한국 사람들 일감은 거의 안하고 중국인들의 일을 많이 했습니다. 자리를 잡은 셈이죠. 그러다가 5년이 지나서 한국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결국 중국에서 중국 현지 일을 따내긴 했지만 중국에서 사업하는 것의 어려움을 뼈져리게 깨달은 그는 돌아오는 것을 택했다. 2010년이었다.


 

첫 시도와 실패

이철희 대표가 한국에 돌아온 것은 중국 사업의 어려움때문이기도 했지만 중국에서 인테리어 일을 하면서 쓰레기를 활용한 사업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 중국에서는 아직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사업을 하면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봤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개인 사업으로 인테리어를 했던 것을 제외하면 사업 경험도 부족했고 관련 시장에 대한 지식도 부족해 사업이 쉽지 않았다.


 그는 당초 쓰레기 가운데 소재화할 수 있는 재료를 찾고 있었다. 그냥 쓰레기를 재활용해 물상품을 제작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양한 물건으로 만들 수 있도록 소재화할 수 있는 재료를 찾았다. 소재화할 수 있는 재료를 찾는데는 시간이 걸렸고 그의 사업은 진척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빚만 떠안은 채 2013년에는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커피 전문점을 지나던 그는 종량제 봉투가 터져 상당히 많은 양의 커피 찌꺼기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지만, 똑같은 광경을 몇 차례 본 뒤 '커피 찌꺼기를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쓰레기의 재활용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해 온 그이기에 가능한 물음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는 커피 찌꺼기가 엄청나게 버려지고 있다는 것, 0.2%의 결과물(커피)을 얻기 위해 99.8%가 버려지고 이는 커피 생산의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커피 찌꺼기를 버리는 일은 커피 전문점을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커피를 취급하는 모든 사람들이 당면한, 아주 귀챦은 일입니다. 대부분을 그대로 버리니까 손실이기도 하구요. 소각하는 과정에서의 환경적인 문제도 무시하기 힘들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찾던, 쓰레기 재활용의 궁극의 지점을 커피 찌꺼기에서 찾았다. 커피 찌꺼기는 일단 어디에서나 쉽게 수집할 수 있다. 즉 공급이 부족할 걱정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커피 찌꺼기를 수집한다고 할 때 쌍수를 들어 환영하거나 수집에 도움을 줄 이들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쓰레기나 찌꺼기 중 비교적 다루기 쉽고, 천연재로 그대로인 상태(물이 첨가되긴 했지만)라는 점도 고려했다.


 문제는 커피 찌꺼기가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는 각종 문헌과 논문 등을 닥치는 대로 뒤졌다. 그래서 커피 찌꺼기를 그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대로 소재화 할 수 있는지를 실험해봤다. 그의 결론은 소재화가 가능하다는 거였다.

 

나무를 베지 않고 나무를 만드는 회사


기존 회사를 정리하고 트리(TRE)라는 회사를 설립한 게 2013년말이었다. 당시 그는 커피찌꺼기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닌,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소재를 개발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소재를 개발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


 꼬박 1년 반 동안 커피찌꺼기를 쌓아놓고 실험을 계속했다. 매일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찌꺼기 수십 박스를 받아와서 테스트를 했다. 의정부에 마련한 공장형 사무실에서는 끊임없이 화학반응을 실험했다.


 “커피찌꺼기에 대한 화학반응을 통해 얼마나 견고하게 굳어질 수 있는지가 핵심이었어요.”

스타벅스, 이디야 등 커피전문점을 다니면서 커피찌꺼기를 수집했다. 업소에서는 두 팔 들어 환영했다. 가뜩이나 처리하기 골치 아픈 커피찌꺼기를 그냥 가져가겠다니 반색을 하는 게 당연. 20156월이 돼서야 이철희 대표는 나무 대용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소재화에 성공했다. 이를 입증하는 특허도 출원했고 각종 특허 신청도 해 놓은 상태다.


 이 대표를 만나던 날 그는 서울 서초구에 있는 로버트 해리스란 카페로 안내를 했다. 여기엔 트리에서 개발한 커피찌꺼기 소재의 테이블과 의자, 조명갓 등이 설치돼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 회사에서 만든 제품을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커피숍의 사장님은 이철희 대표가 사업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투자를 했고 이 대표는 이곳과 계약을 체결하고 제품을 만들어 커피숍에 비치를 한 것이다.


 제품을 보자마자 냄새부터 맡았다. 그런데 커피 냄새가 나진 않았다. “다들 커피찌꺼기로 만든 테이블이라고 하면 냄새부터 맡습니다.” 이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설명을 따로 듣지 않는다면 커피찌꺼기로 만든 테이블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냥 나무로 만든 원목 테이블 같았다. 실제 원목으로 만든 테이블과 비슷한 강도를 갖는다고 했다. 테이블 뿐 아니라 각종 인테리어 마감재, 조명, 소품 등을 만드는 데 쓰일 수 있다. 원목을 가공하듯이 나무나 합판의 형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이 이 대표가 본래 지향했던 부분이었다. 즉 산업현장이나 인테리어 공사 등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할 준비가 됐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일단 테이블 등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은 제품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제품화의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 제품을 만들어 보여줌으로써 대량 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투자유치가 시설 확보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커피찌꺼기로 만든 테이블은 기존의 원목 테이블에 비해 40%-50% 저렴할 정도고 가격 경쟁력이 있다. 테이블 사이즈가 커 질수록 가격 경쟁력이 커진다. 원목으로 큰 사이즈(예를 들어 2m 이상)의 식탁을 만들 경우 단가가 급상승하는 반면 트리의 방식은 그럴 걱정이 없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무를 베지 않고 버려지는 커피 찌꺼기를 나무 대용 자재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철희 대표의 말이다. 가구재로 많이 쓰이는 나무의 소비와 훼손을 줄인 리사이클 제품인 동시에, 디자인까지 접목한 업사이클 제품이라는 점이 포인트다. “트리는 '훼손하지 않으며 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업사이클 전문 기업입니다.”


 스타벅스에 이어 이디야 등 커피 전문점에 납품을 시작했거나 계약을 체결하는 등 제품화에 대한 인정은 이미 받았다. 이제는 대량 생산과 소재를 통한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대형 가구업체나 원목을 활용해 상품을 만드는 제조업체에 소재를 판매하는 것에서 진짜 성장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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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갈 때면 새삼 느끼는 게 있다. ‘한국에는 참 싸고 좋은 옷이 많구나.’ 그런데 한국의 싸고 질 좋은 옷들이 해외에선 막상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스토레츠를 만든 재이 김보용 대표의 문제 의식은 여기서 시작됐다. ‘내가 그 일을 해야겠다로 발전한 그의 아이디어는 동대문표 의류와 자체 제작한 패션 상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여성 의류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면서 실행됐다.


 재이의 온라인 여성 의류 쇼핑몰 '스토레츠'는 최신 유행 트렌드를 반영한 디자인, 빠른 상품 회전율, 저렴한 가격으로 미국, 유럽, 중동 등에서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성장했다. 올리비아 홀트, 제이미 정 등 할리우드 스타나 유명 패션 블로거들이 스토레츠 제품을 입은 사진을 올리면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처럼 최근 1-2년새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스토레츠가 한국의 스타트업 243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왜 한국엔 ZARA 같은 브랜드가 없을까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지만 그는 대학 재학 중에도 전공에서 주로 다루던 국내외 정치 이슈나 정치 이론보다는 사업에 더 관심이 많았다. 특히 옷이나 패션 쪽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것에 재미를 들였다고 한다. 사실 취미생활 수준이었을 수 있는데, 이걸 좀 격하게 한 것 같다. “대학 재학 중에 동대문에서 양말을 사다가 인터넷에서 판매하기도 했는데 엄청 잘 팔렸어요. 그것 때문에 옥션 파워셀러가 되기도 했죠.”


 하여간 인터넷 쇼핑몰에서 다양한 의류 상품을 이것저것 팔면서 의류 판매에 대한 을 익혔고, 결국 전공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택한 김보용. 2000년대 중반 훌쩍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 유학 중에도 한국에서 하던 습관대로 한국 쇼핑몰 등에서 옷을 사입었다고 한다. “지마켓이나 동대문표 옷을 주로 입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 사서 입다가 가져간 것도 있고, 해외에서도 한국 쇼핑몰에서 주문해다가 입었던 것도 있구요.”

 그런데 그냥 편하게 그의 취향대로 사 입은 옷에 대해 현지 외국인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런 옷을 어디서 났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냥 동대문표 옷인데도 말이죠. 그만큼 예쁘고, 경쟁력이 있다는 의미의 반응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한국 패션 의류의 경쟁력을 실감했어요. 그런데 왜 한국에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중화된 브랜드가 없을까이런 생각도 자연스럽게 하게 됐죠.”


 그는 영국 백화점에서 인턴을 하기도 하고 현지 패션 브랜드를 접할 수 있는 곳에서 틈틈이 경험을 쌓았다. “영국의 브라운스라고 하는 패션 브랜드에서 인터넷 사업부 인턴을 했어요. 해외에서 통하고 글로벌 소비자들을 겨냥한 온라인샵의 초기 상태를 경험해 본 셈이 됐죠.”


 이런 경험을 하면서 그가 자신이 생각했던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한국의 패션 상품들, 특히 롱테일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런 수많은 브랜드들이 좀 더 큰 시장에 나가지 못한 이유는 기업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아닐까.


 “기업화가 안 된 곳이 많았어요. 패션사업을 글로벌하게 더 키우려는 그런 시도가 적었던 거죠. 하지만 누군가 제대로 시도를 한다면 충분히 해 볼만한 일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목표를 쇼핑몰 창업으로 두고 귀국한 그는 우선 의류 업계의 공급망을 제대로 알기 위해 벤더 업체에 취직했다. 해외 명품 브랜드를 구매하는 업체에도 취직하기도 했다. 패션 상품의 주문부터 제작, 유통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어느 정도 배웠다고 생각한 그는 2011년 인터넷쇼핑몰 스토레츠를 열었다. 동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떼 와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사막 한 가운데 옷 가게를 낸 것 같았다


기업화에 대한 고민은 했지만, 그 역시 그쪽에 경험은 없었다. 일단 당면 과제는 인터넷에서 한국의 경쟁력있는 동대문표 의류 상품을 좋은 가격에, 글로벌 시장에 판매하는 것.

처음엔 개인사업자로 시작했다. 기존에 인터넷 쇼핑몰 파워 셀러 경험을 하면서 익히 해 본 일이었다. 그런데 옷을 팔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쇼핑몰을 열면 사람들이 찾아와 옷을 살 것 같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 매장을 낸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스토레츠는 결국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의류 상품을 판매하는 게 주된 업이었고, 1차적인 관문은 좋은 상품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었고 이를 잘 알리는 것이었다. 해외 소비자들이 찾는 상품이 많이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 사이트는 활성화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좋은 상품의 확보 못지 않게 해외 소비자들의 눈높에 맞춘 UI나 결제 시스템, 편리한 구매 방식 등이 선결돼야 했다.


 좋은 상품을 확보하는 문제는 자신있었다고 했다. 알리는 것도 하면 되지하는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 결제 문제는 처음부터 이 회사를 난관에 빠뜨렸다.

해외에 있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옷을 팔아야 했는데 당시 한국의 결제 시스템 문제로 외국인이 한국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는 것 자체가 어려웠어요. 결제가 안되는 경우도 허다했고 액티브엑스 등 복잡한 프로그램을 강요해서 구매를 포기하는 사례도 많았죠. 정말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말도 못할 만큼 고생을 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다보면 2013년 한국에서 (대통령의 발언 등으로도 물론 화제가 됐지만) 논란이 됐던 액티브엑스 문제가 떠올랐다. 해외에서 물건을 사려고 해도 결제가 안되는 한국의 인터넷 환경에 대한 논란이었다.


 다행히 결제 문제가 조금씩 해결됐다. 결제문제가 개선되면서 해외 소비자들에 대한 마케팅도 탄력을 받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업이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법인화를 하면서부터였다. 본엔젤스 등 외부 투자자들의 조언을 듣고 협업을 하면서 사업이 크게 팽창했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 키운다


 “2015년에 들어와서 법인으로 전환했어요. 사업을 시작하고 4년이나 지나서야 그렇게 한거죠. 법인으로 전환하고 본엔젤스 등으로부터 투자를 받은 뒤 본격적으로 온라인 마케팅을 강화하면서 판매량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동대문표 옷이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이었다. 하지만 법인화를 전후해 상품의 구성이 다양해졌다. 스토레츠가 지향하는 것은 개성 강한 브랜드’. 한국의 자라(ZARA) 수준에 그치지 않겠다는 게 김보용 대표의 포부다. 즉 샤넬 에르메스 등 명품 브랜드와 명품 스타일을 대중화시켜 빠른 시간 내에 상품을 선보이고 회전율을 높인 SPA 브랜드, 딱 그 중간 지점을 겨냥했다.


 “명품 브랜드는 고가라 부담스럽고, SPA 브랜드는 뭐랄까. 너무 유행만 좇는 스타일인 것 같아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가 어렵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고 독특하면서도 예쁜 스타일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브랜드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결국은 동대문표 옷 만으로는 안된다. 직접 디자인한 옷의 비중을 늘리면서 스토레츠를 자체 브랜드로 키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이 효과를 내고 있다.


 올들어 지난해 상반기 대비 스토레츠 방문자 수는 5.5배 늘었고, 페이지뷰는 718%나 증가했다. 매출은 540% 증가했다. 2분기만 놓고 보면 실적이 더 좋다. 김 대표는 2분기엔 작년 2분기에 비해 매출이 60배 이상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빠르게 변하는 유행에 대응하면서 자라나 H&M과 같은 기존의 SPA 브랜드보다 훨씬 더 개성 강한 소비자들을 충족할 수 있는 디자인에 승부를 걸고 있다. 좋은 옷을 싸게 만들어내는 동대문의 효율성과 김 대표의 감성이 만나 현재까지는 반응이 좋다. 김 대표는 처음엔 한국의 자라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더 큰 꿈을 꾸고 있다전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우수한 패션을 알리는 대표 브랜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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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성공에 비결, 정답 이런 건 없는 것 같다.”

정말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고 성공은 하늘이 내려준다는 게 맞는 것 같다. 가장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이 온다. 그 사람을 하늘이 내려주는 거 아닐까.”

“100건을 시도하니 그 중 하나가 가까스로 되더라.”

 

 이해진 네이버 의장이 24일 서울 코엑스에서 진행한 기술창업자들과의 간담회’(데뷰2016의 부대 행사)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대화 내용은 전혀 기술적이지 않았고 창업가들의 질문은 그의 경영 철학과 계속되는 도전에 대한 궁금함으로 가득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간담회의 내용을 네이버 홍보실의 도움을 받아 전달받았다. 간단히 내용을 요약해봤다.


 

라인성공으로 시작된 제2의 창업

라인이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하고 상장에까지 이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해진 의장과 네이버에게 제2의 창업이 시작됐다는 거였다. 즉 지금까지 국내에서만 사업을 했던 네이버가 이제 한국 시장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해외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는 의미다. 상장으로 자금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상장을 하고 라인이 독립을 함으로써 더 이상 네이버가 라인에 자금을 투자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만큼 수천억원 이상의 자금에 여유가 생긴 것이고 그 자금이 제2의 창업 기반이 된 것이다.


 이 의장 역시 창업가들과의 간담회에서 이런 점을 언급했다. 이 의장은 라인 성공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상태에서 기적 같은 일이고, 행운이라 생각한다라인이 성공했기에 유럽과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구글, 페이스북 등과 경쟁하는 것 때문에 밤에 잠을 잘 못잔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그였지만, 아무리 큰 그런 회사라도 전 세계 시장을 다 갖지는 못할 것이고 거기에 기회가 있다는 게 이 의장의 판단이었다.


구글, 페이스북이 몇 개의 시장을 다 갖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세계적으로 독자적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갖춘 회사가 나와야한다고 생각하구요. 글로벌하게 봐도 (네이버나 라인처럼 로컬에서 시작해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하는 회사가) 별로 없는데, 이런 사례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유럽을 가는 이유도 로컬 사업자들이 없는데 대안도 못찾고 있어 같이 협력하고 고민하려고 하는 겁니다. 국내만 가지고는 부족하기 때문에 해외에서 시장을 얻어야 하는데 굉장히 어려운 일이며, 여러분들이 해외 진출할 때 실질적으로 도와드릴 수 있다면 돕고 싶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없다


이날 창업가들은 이해진 의장에게 성공의 비결, 창업의 동기 등에 대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당연하다. 누구라도 그걸 물어보고 싶을 것이다.) 약간 허무할 수 있지만, 그의 대답은 요약하자면 한결 같았다. ‘비결은 없는 것 같다. 나도 잘 모르겠다.’

겉에서 보면 쉽게 성공하고 계속 뭔가 도전하고 혁신을 이루는 것 같지만 안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


 “사내벤처로 시작했고, 밖에 나와서도 플랫폼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셨는데, 어떻게 그 어려움을 견디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검색엔진을 개발하는 게 재밌었고, 큰 조직에서 안되니 나가서라도 해야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외부에서 볼 때 성공한 사례에 대한 이야기는, 된 다음에 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지, 바로 직전까지는 안될 거 같고 후회, 불안감이 가득하고 그랬습니다. 저는 사업의 성공에 대해서는 운칠기삼이라고 생각해요. 사업의 성공은 70%는 하늘이 해주는 것 같습니다. 사업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데, 성공을 한 것들을 보면 반드시 그 성공을 이뤄주는 좋은 사람이 나타났던 것 같아요. 그것이 하늘이 내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한국에선 비즈니스모델에 대한 고민 더 치열해야


한국 시장이 작다는 것, 그런데 경쟁은 대단히 치열한 그런 시장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다. 이 의장도 이런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해 수익모델을 좀 더 다듬고 사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서비스할 때 어려운 점은 광고시장이 굉장히 작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료로 사용자들을 모으고 수익을 내는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광고라는 것은 1등이 다 먹는 구조. 미국에서도 페이스북이 있어 트위터가 어려워지는 구조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셔야 합니다. 미국이나 중국과 달리 대한민국은 정말 작죠. 어떻게 돈을 벌지 고민해야 합니다. 미국식 모델만 따라하면 어려울 겁니다.”


 그가 뽑은 수익모델의 근본은 사용자 시각에서 사업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 “저는 가장 중요한 것이 사용자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게임과 합병했을 때 한게임 직원이 네이버를 평가할 때, 네이버 직원이 한게임 서비스를 평가할 때 정말 정확했거든요. 서비스 전력, 비전, 철학이 중요한게 아니라 써보면 정말 보여요. 결국 사용자 시각이 중요한데 서비스를 만들다보면 그 로직안에 갇혀서 그걸 잃어버립니다. 그걸 잃지 않게 일깨워 주는 게 중요합니다.”

 

리더십은 성공사례에서 온다


의장님이 2,3년차의 초창기 창업가로 돌아간다면, 어떤 부분에 진중하는 게 좋을지, 어떤 부분이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검색엔진 개발이 하고 싶어서 나와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신차려 보니, 나를 따라온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 엄청나더군요. 그래서 수익만 내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수익을 내고 나니 이 시장에서 1등 못하면 경쟁력을 잃을 것 같고, 1등이 되니 글로벌 안 하면 글로벌 플레이어에게 밀릴 것 같고, 또 이후에는 직원들에게 새로운 것을 안주면 더 좋은 사람들이 안올 것 같고.. .매년 새로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의장은 동료들과의 신뢰가 이런 문제를 풀어가는 힘이 됐다고 강조했다. (상당히 철학적, 형이상학적 말이지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신뢰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일본에 가서 검색으로 승부 보겠다고 준비를 했는데, 성공은 결국 메신저인 라인 통해서 이뤄진 것을 보면, 소신껏 끝까지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변신하는 것도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검색으로만 나갔으면 잘 됐을지 모르는 것.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 의사결정자의 고독한 싸움입니다.

(라인 출시하기 전) 일본에서 검색을 포기할 때 굉장히 어려웠어요. 지금껏 투자한 것을 버리고, 모바일로 바꾸는 일인데, 그게 힘들었습니다. 의사결정 하는 순간이 CEO로서 가장 어려운 순간입니다. 결정은 다 장단점이 있는데 그에 따른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하거든요. 그 때 너무 외롭고 힘들텐데, 정답은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결과론인 것이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리더십에 대한 고민도 빠지지 않았다.

저는 다른 CEO들이 비전도 발표하고 연설도 하는 것을 보며 CEO로서의 리더십, 카리스마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타입이 있는 것이고, 결국 리더십은 성공사례로부터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직원들도 CEO를 믿을 수 있습니다. 성공은 하늘이 좌지우지 하는 것인데 결국 성공적인 의사결정이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고, 신뢰를 잃지 않는 근본적인 것이 되는 거죠.”


그의 마지막 멘트는 성공과 행복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통찰이었다.

네이버에 이어 라인까지, 그렇게 성공을 거둤는데, 유럽까지 가면서 사업을 잘하려고 하는 이유는 뭔가요? 어떨 때 행복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페이지 천만 뷰, 매출 10, 수익만 나면, 1등만 하면, 일본에서 자리만 잡으면 행복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성공하면 그 다음 숙제가 항상 있었다. 어떻게 재미있게, 행복하게 살아야하는지 고민입니다. 선배들도 다들 해매고 계신 것 같아요. 돈이 있다고 현명해지는 게 아니고, 사업이 성공했다고 인생이 성공하는 것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에 대해서는 저나, 신입사원이나 같을 거에요. 성공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해외에 나가는 이유도 동기부여 목적도 있습니다. 일단 살아야겠다는 절박감으로 시작되었었겠지만. 후배들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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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강남 지역과 분당, 판교, 용인, 안양 등지에선 출퇴근 시간대 카풀 서비스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럭시와 풀러스라는 두 서비스가 모두 비슷한 지역권에서 서비스를 시작해 뜨거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풀러스가 지난 5월 먼저 나왔지만 3개월 가량 늦은 8월에 출시된 럭시가 가입자 수, 드라이버 수, 일 카풀 건수 등 대부분의 지표에서 풀러스를 추월하면서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뒤늦게 나온 럭시는 어떻게 풀러스를 단숨에 추월했을까. 글로벌 카풀 서비스 우버는 퇴출됐는데 이들은 어떻게 합법적인 서비스가 가능한 걸까. 아직 끝나지 않은 이들의 경쟁 속에 이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을까. 이번 한국의 스타트업 주인공은 출퇴근 카풀 서비스 럭시를 만든 길창수와 최바다 창업자다.


다날에서 만난, 다른 듯 닮은 두 사람

럭시의 창업자 길창수, 최바다 두 사람은 모두 창업으로 잔뼈가 굵었다. 세상의 정해진 길을 가는 것보다는 기존의 것에 의문을 던지고, 불편한 것은 거침없이 바꾸는 것을 시도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


 최바다 이사는 1997,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에 씨봉뮤직이라는 음악사이트를 만들었다. 아직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시절에 고등학생이 사이트를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광고를 붙여 돈까지 벌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는 컴퓨터 덕후라고 불렀다. 아직 어릴 때부터 이른바 덕심이 충만했던 것 같다.


 대학 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던 그는 고3 졸업을 앞두고 대학에 안 가면 바로 군에 입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단 대학 진학은 하지만 학교 공부엔 애시당초 관심이 요만큼도 없었다. 그가 만든 씨봉뮤직은 번창했다. 2000년에는 제법 널리 알려진 MAXMP3라는 사이트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는 맥스MP3 사이트의 창업멤버로 들어간 셈이다.

2006년 맥스MP3CJ에 인수되면서 그는 CJ에 합류했지만 대기업에서는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1년여뒤인 20076, 다날에 들어갔고 여기서 길창수 대표와 만나게 된다.


 길창수 대표의 창업 이력은 2006년부터다. 그는 부채질닷컴이라는 뉴스 사이트를 만들었다. ‘불난 이슈에 부채질하다라는 뜻의 기막힌 작명이다. 10년전 당시로서는 드물게 하루 UV100만명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는 창업자로서 직접 기사도 쓰고, 광고도 유치하고, 대외적으로 자신의 회사를 알리는 등 13역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너무 인기가 많다보니 콘텐츠를 관리하고 사이트를 지속하기가 힘들어졌다. 소송 등에도 자주 휘말렸다.


 “기사를 좀 독하게 썼어요. 조회 수도 많았고 제목도 자극적으로 뽑았고 그랬죠. 그런데 소송이나 이런 저런 일에 휘말리니까 개인이 관리하고 그러기 힘들더라구요.”


 그래도 다날에서 부채질닷컴을 인수하는 바람에 그 역시 다날에 합류했다. 200712월의 일이었다. 부채질의 높은 트래픽에 점수를 준 것이다. 이후로도 2년간 부채질을 운영한 뒤 2010년부터는 페이스월드매치라는 걸 만들었다.


 페이스월드매치는 모바일 앱에 올려놓은 사용자들의 사진을 보고 이상형을 선택하게 한 뒤 토너먼트 방식으로 승자를 가리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랭킹이 결정되지만 이후 팔로워 수 등을 합산해 월드 베스트, 국가별 베스트, 내 주변의 인기인들 등을 보여주는 앱이었다. 인간의 아주 원초적인 호기심을 자극한 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채질닷컴도 그렇고 길 대표는 상당히 근본적인 욕구나 사람들의 관심사를 이끌어내는데 능한 것 같다.


 다날에서도 다양한 사업을 경험했던 그는 2014년 회사를 나왔다. ‘내 일을 하자는 생각 때문.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결국 돈은 회사가 버는 것 같았습니다. 이왕이면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싶었어요.”


웨딩카에서 시작된 카풀 비즈니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나와서 창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블로그나 카페 활동을 했다. 다음 카페 초창기 시절부터 활동을 하기도 했고 2008년부터는 길창수의 웨딩카 나라라는 블로그를 운영했다고 한다.


 본래 길창수의 웨딩카 나라는 그의 주말 알바 컨셉트로 시작됐다. 주말에 웨딩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길 대표가 직접 달려가서 공항 등으로 라이드를 제공해주고 대가를 받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알려지면서 고급 수입차나 중대형 승용차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에게 웨딩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일로 발전을 해 나갔다.


 이런 일을 하면서 그는 고급 수입차를 보유하고 있는 전국 각지의 다양한 사람들과 방대한 네트워크가 구축됐다. 스스로 적극적으로 활동한 측면도 컸다. 고급차 동호회를 부지런히 다니면서 인맥을 쌓았다. 그가 2014년 다날을 나와 창업을 결심하게 된 것도 이런 사업 경험과 네트워크를 활용한 비즈니스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2014년에 그는 에어래빗이라는 서비스를 만들었다. 모바일 앱으로도 만들었는데, 일종의 고급 수입차를 활용한 주말 알바 소개 앱이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고급 수입차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곳에 활용되고 있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웨딩카는 물론, 프로포즈를 하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공항에 픽업을 나가거나 등등 다양한 곳에서 활용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다보면 의문이 생겼다.

물론 카푸어(Car poor)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 고급 수입차를 가진 사람들은 충분히 돈이 있는 사람들 일텐데, 그런 사람들이 주말에 몇 십만원 벌려고 그런 일에 나서나요?”

그쵸. 그러니까 돈으로 접근하면 안되죠.”

“!!”

이 분들은 이미 돈은 충분히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험으로 접근을 했어요. 에어래빗에서 고객과 연결이 되면 차량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직접 운전을 해서 가야하거든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걸로 설득을 했죠. 돈을 번다는 것에는 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새로운 경험과 환경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움직인 분들이 많아요.”


 그의 말처럼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이들 드라이버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차량에 심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음악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은 그날의 선곡한 음악을 고객에게 선물을 하는 식이었다. 일 자체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그러니까 이런 네트워크가 장기적으로 구축될 수 있지 않았을까.


 에어래빗을 설립하면서 그는 다날에서 만난 최바다 이사와 함께 공동 창업을 했다. 뚝심있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상당히 섬세하고 돌다리도 수십번 두들기며 건너가는 최 이사의 신중한 성격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자신과 서로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드시 고급 수입차가 아니더라도 남는 시간대에 차량을 빌려주거나 공유하는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란 게 이들의 판단이었다. 다만 2014년말 우버가 퇴출되는 것을 보면서 고민이 시작됐다. 그래도 언젠가 시장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카풀은 안되지만, 출퇴근 시간대의 카풀은 허용된다는 것을 알고 이 시장을 노린 서비스 준비에 나섰다. 그러던중 이들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바로 경쟁업체가 먼저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럭시의 공동 창업자 길창수 대표(오른쪽)와 최바다 이사>


3개월만에 월 10만건 매칭


2016년 봄이었다. 이들의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자신이 있었다.

카풀은 검증된 운전자와 검증된 차량을 확보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저흰 그렇게 봤습니다. 그래야 고객에게 만족스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거든요. 제가 웨딩카 사업을 하면서 배운 건, 사람들은 결코 돈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택시보다 싼 가격에 카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상당히 좋은 조건이죠. 하지만 그게 다는 결코 아닙니다. 정말 만족스런 서비스를 제공해야 해요. 가격이 싸지만 서비스는 결코 싸구려가 되면 안되는거죠.”


 길 대표와 최 이사는 방대한 수입차 보유자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럭시의 사업모델에 기꺼이 참여했다. 이들 상당수는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출퇴근하면서 사람을 태워서 갈 수 있다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경쟁사에 비해 3개월 늦은 올 8월에야 럭시는 나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수천명에 달하는 드라이버를 확보한 채 성남, 용인, 서울 강남 등지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처음에 8월 한달간 1만건의 매칭(운전자와 탑승자 연결) 을 목표로 내걸었어요. 9월에는 27000건을 목표로 했죠. 다들 너무 무리한 목표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웬걸, 첫달에 벌써 2만건 가까운 매칭 실적을 올렸고 9월에는 4만건을 돌파했다. 10월에는 월 10만건에 달하는 매칭 실적이 예상되고 있다. 그야말로 돌풍이다. 서비스 호조에 힘입어 10월 중순에는 부산에도 진출했다.


 앱을 다운받으면 2만원의 쿠폰을 증정, 2회 정도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카풀 성공률이 높고 요금이 저렴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이용자가 급증했다. 카풀 서비스 1회당 평균 요금은 1만원. 택시비에 비해 30% 가량 저렴하니 사용자가 몰리고 운전자는 어차피 빈 차로 가는 것보다 돈을 벌 수 있으니 사람이 몰리고 있다.


 서비스는 가격과 편의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카풀 서비스의 출발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자각과 의식이었다. “출퇴근하기 위해 아침에 일찍 거리에 나가 보면,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반면 거리의 차들은 운전자 한 명만 탄 채 출퇴근하는 차가 대부분입니다. 가까운 지역에 살면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이들이 함께 출퇴근할 수 있게 하면 교통 정체도 줄이고 출퇴근 스트레스와 비용을 모두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우리는 큰 기업을 일궈내자는 거죠.”


 차량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는 우버와 비슷하지만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점은 다르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은 자가승용차량의 유상운송을 금지하고 있으나 출퇴근시 차량 공유(카풀)은 허용(81)하고 있다. 럭시는 카풀 운전자가 출퇴근시에만 카풀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이를 전업으로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 최대 카풀 제공 횟수를 3회로 제한했다. 택시 사업자들과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지금 현재는 1 1 매칭 위주이지만 앞으론 1 대 다() 매칭을 겨냥한 서비스가 출시된다. 요금이 더욱 저렴해지는 것이다. 흔히들 카풀 서비스 얘기를 들으면, 아침에 택시를 타고 출근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라는 반응을 보인다. 아무리 싸게 한다고 해도 비용이 버스나 지하철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 하지만 여럿이 함께 카풀을 이용하면 이용 요금을 3분의 1, 4분의1로 낮출 수 있다. 확산될수록 거리의 교통체증을 줄이고 대중교통의 붐비는 현상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서울시 교통연구원를 보니까, 출퇴근시간대 총 8시간 동안 택시에 대한 수요가 공급에 비해 2배 가량 많더라구요. 택시로는 도저히 출퇴근 교통난을 해결하기 힘들다는 거죠. 거리의 수많은 나홀로 드라이버족의 차량을 공유해 출퇴근 교통정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겠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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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대학때 코딩 못했어요. 1,2학년때 프로그래밍 부진아였죠. 컴퓨터 정말 잘 못했습니다. 수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구요.”


 이두희 누구나주식회사 대표와의 인터뷰 도중, 그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상당한 충격이었다. 한국 벤처업계에서 알아주는 개발자로 손꼽히는 그가 대학때 프로그래밍 수업을 못 알아들을 정도였다니.


 이두희 대표는 업계에선 천재 개발자로 통한다. 대학 재학 중 서울대 전산실을 해킹했던 사건이나 단기간에 만들었던 그의 개발작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인식이다. 멋쟁이 사자처럼의 코딩 교육, SK텔레콤이 설립한 누구나주식회사 대표 등 그간의 이력을 보면서 코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를 찾아갔다. 인터뷰는 구글 캠퍼스서울의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한국경제신문 추가영 기자와 함께 갔다.


 누구나주식회사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할지, 멋쟁이 사자처럼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지. 이 회사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대학때 코딩 부진아였다니?

<즉석에서 작성한 코드 프로그램을 띄워놓고 가리키고 있는 이두희 멋쟁이 사자처럼/누구나 주식회사 대표. 사진=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


대학 2년까지 컴맹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코딩을 잘 하게 됐나요?”


수업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정말 힘들었어요. 학점은 전부 1점대를 깔고. 그런데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다른 길을 찾아볼까 생각도 했는데, 컴퓨터공학과에 들어왔는데 어떻게든 코딩은 배우고 나가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혼자서 공부를 했죠.”


 그는 C언어가 너무 힘들어 코딩을 포기할 뻔 했다고 했다. 그래서 파이썬과 루비로 시작을 했다고. (개인적으로는 루비를 더 추천한다고 한다.)


 그가 코딩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의미를 찾았기 때문.

이 어려운 걸 배워서 뭐하나 이런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수업 시간표 프로그램도 만들고, 해킹도 하고. 이것 저것 응용이 되더라구요. 사회에 영향도 미치고. 할 게 정말 많았어요. 그때 정말 빠져들었죠.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로그래밍의 의미를 찾은 그는 무섭게 코딩을 익혔다. 울트라캡숑을 창업한 것도 세상에 의미있는 변화를 주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는 울트라캡숑 창업자였지만 결국 회사를 나왔고, 끝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는 이 얘기를 길게 하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어쨌든 울트라캡숑을 나와 집에서 백수로 지냈다고 한다.


 “그냥 누워서 빈둥거렸어요. 할 일이 없더라구요. 기분도 안 좋았구요.”


 대학에 돌아갈까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박사과정을 밟던 도중 그만두겠다고 통보한 터였다. 결정을 번복하기는 싫었다. 할 일을 찾다가 심지어 수능을 다시 보고 약대를 갈까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실제 수능 공부도 했고, 약사 일이 어떨까 싶어서 친구가 하는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도 해 봤다. 그런데 하루 종일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자신에겐 맞지 않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집에 돌아와서 고민했어요. 난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요.”


 그때 그가 생각해 낸 것이 멋쟁이 사자처럼프로젝트였다.


 “내가 잘 하고, 항상 하고 싶은 것은 코딩이니까 이걸 사람들한테 가르치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일단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었죠. 얼마나 오래 할까 이런 생각도 없었어요. 내가 백수니까, 근데 백수의 왕은 사자니까, 이름을 사자로 지었구요. 나 자신에게 최면을 가하기 위해 멋쟁이 사자처럼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나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어요. 나는 멋있다. 나는 잘 할 수 있다 계속 최면을 걸었죠. 그때 저에겐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게 필요했어요.”


벼랑끝에서 시작한 멋쟁이 사자처럼


처음에 30명에게 프로그래밍 교육을 시작했다. 장소를 못 잡아서 애를 먹었는데, 자주 갔던 카페 사장님이 도움을 줬다. 이 사장님은 돈을 벌어서 네팔에 집 지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사정을 듣고 흔쾌히 장소를 내줬다고 한다.


“30명을 어떻게 모았나요?”

서울대에 안내문을 붙였어요, 10.”
그렇게 해서 얼마나 지원을 했나요?”

200명 정도?”

그 중에서 30명을 어떤 기준으로 뽑나요?” (이게 정말 궁금했다.)

정말 고마워하면서 배울 사람. 그리고 정말 전력을 다해서 배울 사람을 뽑았습니다. 코딩이 배우기 어렵거든요. 이것만 열심히 해도 배우기 쉽지 않습니다. ”


 처음에 30명을 가르쳤는데, 어려운 환경에서도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계속하기는 힘들었다. 수업을 무료로 진행하는데다 오히려 자비를 써가면서 가르쳤는데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한 번 하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이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만두겠다고 페이스북에 공지를 했더니 메일이 300통이 넘게 오는 거에요. 교육을 계속 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죠. 자기도 받고 싶다는 내용도 있구요.”


 지원자가 많아서 몇 차례 더 진행을 했지만 번번이 그는 그만두려고 했다. 자금 문제가 있었고, 그도 계속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가 아니라 창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기까지 하고 정말 그만두려고 했을 때 구글에서 찾아왔다. 이걸 꼭 해야 한다는 게 구글의 요구였다. 비용도 대겠다고 했다. 구글과 손잡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수락했다. 올해 구글의 임팩트 챌린지에서 선정되면서 지속할 수 있는 지원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해서 멋쟁이 사자처럼은 벌써 4년 가까이 진행됐다. 이 기간 중 2000여명이 과정을 거쳐갔다. 어떤 사람들이 코딩을 잘 할까. 얼마나 코딩 능력을 익혔을까. 궁금한 게 많았다.


 “2000명 중 20% 정도? 400명 가량은 코딩 능력을 습득했어요. 이 중에는 저보다 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0% 정도는 사실 중도에 포기했구요. 나머지 60% 정도는 과정은 마쳤지만 코딩 능력을 완전히 익히진 못했어요.”


 “그래도 의미가 있나요?”


 “네 의미가 있습니다. 코딩은 할 줄 몰라도 볼 줄은 알게 됐어요. 무엇보다 개발자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들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 된 거죠. 처음부터 멋쟁이 사자처럼은 이걸 의도헀어요. 비전공자들이 코딩을 배워서 개발자들과 대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코딩의 핵심은 문제의식


비전공자들을 가르칠 때 어떤가요? 수학을 오랫동안 하지 않은, 예를 들어 인문계 학생들도 잘 배우던가요?”


 “
사실 인문대생들 가운데 코딩을 잘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기본적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거든요. 사실 공대생은 이런 부분이 좀 덜해요.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개발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거죠. 예를 들어 총학생회 온라인 투표 앱을 만든 학생은 불문학과 출신이에요. 정치 참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학생이었죠. 이런 문제의식이 확실히 있으면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그는 개발만 해 온 개발자들이 가장 어려워 하는 게 소통이라고 했다. 개발자들에게 소통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보다 커뮤니케이션을 잘 하고 사회적인 문제의식이 있는 비전공자들에게 코딩을 가르쳐 이들이 개발자들과 소통하는 게 더 나을 거라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비전공자들에게 코딩을 가르쳤다는 것. 농대를 다니다가 멋쟁이 사자처럼의 코딩 수업을 듣고 컴퓨터공학과로 전공을 바꾼 사람도 있었다. 수업을 듣는 사람들에겐, 어쨌든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멋쟁이 사자처럼 과정은 이제 상당히 유명해졌다. 그 덕에 후원 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처음의 취지를 지속하기 위해 학생들에겐 무료로 가르치고 있따. 초등학교쪽에도 진출하고 있다. 지리산 토지초등학교 영곡분교라는, 전교생 20명 밖에 안되는 곳에 가서 소프트웨어 의무교육을 해주고 있다고 한다. 이곳 학생들은 집에 컴퓨터도 없기 때문에 컴퓨터 후원을 받아서 교육을 진행중이다.


 취지는 좋지만 어쨌든 돈을 벌어야 사업도 지속할 수 있다. “중고등학교는 유료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취업층을 1년 안에 개발자로 컨버팅 해 줄테니 믿고 따라와라 하는 식으로 가르칠 수도 있구요. 아주 세심하게 가르쳐야겠죠. 이것도 유료가 가능합니다.”


 이두희 대표는 멋쟁이 사자처럼 커리큘럼이 대학에서 배우는 코딩과는 매우 다르다고 했다. “대학교 프로그래밍은 이론부터 출발해요. 변수가 뭐고 분기문, 자료 구조, 알고리즘 등 용어부터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멋쟁이 사자처럼은 조합해서 이것을 만들 수 있다. 네가 만들 것을 정의해라. 3~4명 팀을 갖춰서 팀이 만들 것을 정의하라고 합니다. 만들 것이 없으면 개발하지 말라고 해요. 예를 들어 채팅 구현하기 위해서 소켓을 배워야합니다. 목적 지향적이에요. 네가 만들고 싶은 것이 있어야 하고 컴퓨터는 그 발판이 될 뿐이다라는 거죠.”


누구’, 국민 비서로 진화한다


코딩을 가르치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누구나주식회사의 대표가 된 것은 어찌 된 일일까. 그는 인공지능에 특별히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SK텔레콤으로부터 올해 봄, 알파고 붐 직후 얘기를 듣고도 이게 잘 될까 싶었다고 한다. “처음 베타 버전일 때 인식률이 낮았어요. 그런데 이후 개발 속도가 상당히 빠른 걸 보고 제대로 된 뭔가가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올해 초여름경에 SK텔레콤의 누구프로젝트에 합류한 그. 누구나주식회사의 가상 대표를 맡게 된 그가 하는 일은 전문가 집단과 SK텔레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공지능이나 이와 관련된 다양한 학문이 있어요. 여기엔 전문가 분들이 많이 있는데 이 분들의 아이디어 역시 상당히 많습니다. 회의를 자주 해요. 난상 토론을 합니다. 이 분들은 상당한 고집과 철학이 있고, 다 의미가 있는 부분이지만 사업화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에요. SK텔레콤에 이런 전문가들의 지식과 제안을 사업화할 수 있게 다듬어서 다시 제안하고 함께 고민하는 게 저의 역할입니다.”


 그는 누구에 대해 기본적으로 잘 짜졌다고 평가했다. “문자 매칭이 아니라 모듈이 잘 짜여 있어요. 버전업이 빨리 될 것 같습니다. 알파고 후에 첫 번째 채널을 잘 열었고,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해외에 에코 등 비슷한 서비스가 있지만 한국어 음성과 발음을 제대로 인식한 것은 의미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서비스는 결국 어떻게 진화되게 될까. “기획 단계에서 고민이 있었어요. 친구 역할을 할지, 비서 역할을 할지. 처음엔 대화 상대로 여기는 시리 쓰듯이 몇 살이지?’, ‘나랑 사귀자와 같은 친근한 대화로 갔습니다. 그런데 비서쪽으로 방향을 잡았어요. 앞으론 대화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해주는 그런 비서와 같은 존재로 성장할 것 같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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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있는 시장엔 사람이 몰려든다. 중고차 시장이 대표적이다. 중고차 거래는 앞으로 점점 늘어나겠지만 여전히 불편하고, 신뢰가 가지 않으며, 가격이나 거래 과정에 대한 불만이 존재한다. 한국의 스타트업 이백마흔두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중고차 직거래 플랫폼 꿀카를 만든 라이노브파트너즈의 오종수 대표다


 스타트업 창업가들 가운데에는 정말 색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오 대표의 경력 역시 만만치 않다. 이제 갓 서른이 넘었건만 20년이 넘게 해외에서 생활을 했고, 국내외를 오가며 직장 생활과 창업 경험을 쌓은 특이한 인물이다. 분명한 건, 이력에서 보듯 거침없이 도전하기를 즐기는 이 젊은 사업가가 이번엔 중고차 시장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Just Do It


즉흥적인 성격일까, 아니면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을 즉각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일까. 오종수 대표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음악 활동을 하는가 하면, 훌쩍 유학을 떠났다가 창업을 하는 등 심상치 않은 행보를 보였다.


 “어릴 적부터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성향이 강했어요.”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부모님과 함께 중국에서 살던 중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한 게 대표적이다. 음악이 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래도 고등학교 과정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검정고시를 봐서 합격을 하고 음악을 독학했다고. 프로듀싱을 배운 그는 불과 6개월여만에 파이오니어 중국 전국 대회에서 2등을 하면서 상하이 현지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게 2004년의 일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당시 한류를 타고 중국에서 엔터테인먼트쪽 사업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그는 자신이 음악적 재능이 탁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추진력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어쨌든 그의 이런 추진력에도 불구하고 음악 쪽 사업을 중국에서 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던 반도체 사업이 잘 안되면서 위험이 큰 사업을, 그것도 생소한 분야에서 한다는 건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자신의 끼는 잠시 접어두고 안정적인 코스를 밟았다. “호주 맥쿼리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어요, 그리고 영국으로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구요.”


 어린 시절 그는 해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사업을 했던 아버지 덕분에 해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도 그는 외국에서 일했다. 언스트앤영 싱가포르 법인에서도 일했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창업 쪽에 가 있었다고 한다.

한동안은 집안 사정 때문에 위험을 오랫동안 감수하는 일을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시기는 계속 보고 있었어요.”


실패에서 배운 교훈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 대한 도전 의식과 열망이 항상 있었던 그는 직장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창업을 계속 시도했다고 한다. 하라금에듀라는 이러닝업체를 창업하기도 했다. 하지만 뜻이 맞지 않던 멤버가 있어서 제대로 추진도 해보지 못하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고 한다. “그때 알았어요. 팀원 간에 정말 잘 맞아야 한다는 걸요.”


 친구와 창업을 결국 같이 하게 된 것도 이때의 경험 때문이었던 것 같다. 번역 회사를 차리기도 했고 몇 차례 소소한 창업이 이어졌지만 큰 성공을 거두기보단 금전적 이득과 훗날을 위한 경험 축적의 측면이 강했다.


 그에겐 중학교때부터 친구인 이신우가 있었다. 이신우는 연세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IBM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가 워낙 해외 생활을 오래 했지만 한국에 들어와서 그는 다시 친구와 만나 자신이 생각하는 창업 아이템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헤브론스타라는 전략컨설팅 업체에서 일할 때였어요. 고객사 중에 중고차 매매 관련 업체가 있었는데 시장 조사를 하다가 중고차 시장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친구와 함께 2015년초부터 중고차 시장에 대해 얘기를 나눴죠.”


 IBM에서 일하고 있던 이신우 역시 그의 생각에 적극 동조했다.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개인간 중고차 직거래를 활성화해주는 플랫폼을 만들면 큰 기회가 있을 거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결국은 차를 온라인으로 사고 파는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중고차에서도 그런 시기가 빨리 올 것 같았구요. 그런 서비스를 우리가 먼저 만들어보자고 한거죠.”


<꿀카의 오종수 대표(왼쪽)와 이신우 COO>


 두 사람은 20159월부터 사업 기획을 시작했고 팀 빌딩에 나섰다. 오 대표의 경우 사업 경험은 많았지만 중고차 시장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없었다. 이신우 이사의 경우에도 공대를 나와 IT 분야에 대해선 밝았지만 중고차 세계는 새로 배워야 하는 처지. 다행히 이들에게는 자동차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이 있었다. 이도겸 최고기술책임자(CTO)는 고등학교때부터 창업을 해 본 인물이고 멕시코에서 차량 매매 사이트 Autoplaza를 개발하고 운영한 경험이 있었다. 오 대표와는 하라금에듀를 같이 창업한 사이이기도 하다. 고태일 CSO(최고전략책임자)는 삼성공조 등 자동차 부품업체에서 일한 경력이 있고 김건무 CMO(최고마케팅책임자)는 삼성전자에서의 마케팅 경험과 출판사 창업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의 어려움과 결실을 모두 맛 본 인물이다. 레이싱팀 경정비 경험을 한 김훈기 팀장 등이 합류하면서 창업팀이 탄탄해졌다. 2016년 오 대표는 라이노브(RINNOV)를 설립했다.


꿀카에서, 좋은 차를 가장 좋은 가격에.


라이노브는 Right + Innovation의 합성어다. ‘올바른 혁신을 추구하자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이들의 첫 프로젝트는 꿀카. 중고차 직거래를 위한 최고의 도우미를 자처하는 서비스다.


 시장성도 분명 있었지만 오 대표의 개인적인 경험도 작용했다.

차를 좋아해서 여러 번 직거래로도 구매해 보고, 딜러를 통해서도 구매해 보기도 하고 그랬어요. 20살 때 처음으로 대학 시절 호주에서 혼다 시빅을 구매했는데 산 지 3주 후에 후진이 안되더라구요. 엔진룸에서 불이 날 뻔도 했죠. 결국 폐차를 했어요. 스물아홉살 때 지금 타고 있는 차를 샀는데, 다행히 품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알고 보니 비싸게 구매를 했더라구요. 정말 열이 받았어요. 하지만 이 경험 덕분에 창업을 하게 됐죠. 이런 경험을 다른 사람들도 많이 할 테니까요. 우리는 이런 경험이 아닌, 좋은 차를 잘 샀다는 그런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꿀카에 대해 국내 최초 관리형 중고차 직거래 중개 서비스라고 설명했다. 중고차 거래에 특화된 e-commerce 플랫폼을 운영한다.

“3월에 베타서비스를 런칭한 이후 현재까지 약 900대 판매신청이 있었지만 수도권 지역에서만 운영 중이어서 200대만 취급하고 있습니다. 매물에 대한 욕심도 당연히 있지만 처음에 너무 욕심을 내지 말고 믿을 수 있는 차량들을 엄선해서 초기유저들의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고 판단했거든요.”


 기존의 딜러를 끼고 있지 않다는 점에선 분명 직거래라고 할 수 있다. 사이트에는 판매자가 차량을 올려놓고 구매자는 인터넷에서 전자제품 구매하듯 차를 산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직거래는 아니다. 그래서 관리형 직거래라는 말을 쓴다. 차량에 대한 보증이나 검증, 거래의 안정성 등을 꿀카에서 담보하는 형태다. 정말 하루 이틀 안에 빨리 차를 팔아야 하는 상황만 아니라면, 직거래는 가장 높은 가격을 받고 차를 파는 방법이면서, 가장 싼 가격에 차를 살 수 있는 방식이다. 중고차와 같이 플랫폼 업체가 많이 관여하는 상품도 전자상거래가 가능하다는 가설이 이미 미국 등에서 증명된 것도 사실이다. 현재 미국, 중국 등에서는 조단위 벨류에이션을 받고 있는 검증된 사업 모델.


 “그동안 국내에서 딜러를 통해 거래를 했던 이유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쇼핑몰에서 물건 사고 팔듯 가장 안전하게, 가장 만족스런 가격에, 좋은 차를 판매하고 구매할 수 있는 직거래 서비스가 된다면 한국에서도 상당한 성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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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선택이다. 매순간 열심을 다해 살더라도, 모든 결정적인 것은 선택의 순간에 온다. 단 하나의 선택지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선택이다. 학교를 진학하거나 전공을 선택하는 일도, 배우자를 만나고 직업을 결정하는 것도,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도, 모두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 선택의 과정에서 결국,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진짜 모습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한국의 스타트업 이백마흔한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디디소프트 송경수 대표다. 그는 디디소프트 창업을 하기까지 참 굴곡이 많은 시간을 통과했다. 폭풍우에 굴하지 않고 키를 잡고 전진을 외치는 선장처럼, 그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거센 파도와 바람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93학번으로 입학한 송경수 대표는 대학 졸업 뒤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공과대학을 나왔지만 그가 간 곳은 인사팀이었다. 그 자신도 상당히 의외였다고 말했다. 인사팀은 통상 권력의 자리로 알려져 있지만 삼성의 인사팀에서 일개 사원이 할 수 있는 역할이나 권한은 거의 없었다. 4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는 회사를 나왔다.


 뜻밖에 인사팀으로 가게 됐지만 이후 이 경력은 그를 계속 따라다녔다. 삼성을 나와서도 그가 가게 된 곳은 결국 다른 기업의 인사팀이었다. 2003년에는 당시 뮤온라인이라는 게임으로 상종가를 치고 있던(상장도 했던), 온라인게임업체 웹젠에 입사하게 된다.


 삼성에 있으면서 좀 답답했던 그는 웹젠에서 즐겁게 회사 생활을 했다고 했다. 인사 기획이나 다양한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고 활기차게 일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점점 회사를 둘러싼 외부 환경이 악화되긴 했지만..

 

 2007년말까지 웹젠에 있었던 그는 2008년 이후 소규모 광고대행사로 직장을 옮겼다. 일찌감치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던 그에게 이해 아들이 태어나는 경사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일이 있었던 때 엄청난 사고가 따라왔다. “그해 세 살 어린 후배가 있었는데, 사기를 당했어요. 날린 금액이 수 억원에 달했으니까요. 구로동 쪽에 집이 있었는데 집도 날리고, 결국 있을 곳이 없어서 대전에 있는 부모님 댁에 내려가 있었어요.”


 휴대폰도 해지하고 그는 6개월간 칩거를 했다고 한다. 사람에 대한 배신감, 자신에 대한 실망, 그리고 앞날, 특히 아들과 가족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가 세상에 다시 나온 것은 이듬해였다. 어쨌든 생계를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인사팀 일을 계속 해 왔으니 헤드헌팅업체를 차려서 영업을 하면 되겠다 싶더군요.”


 헤드헌팅 일을 하려는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웹젠 시절 그를 채용했던 윤태중 유아짱 부사장이었다. 2009년 당시 전제완, 윤태중, 장규오 등 세 사람은 유아짱을 설립하고 채팅 플랫폼 서비스를 한창 기획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즉시 유아짱에 합류했지만, 이 생활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유아짱이 어려워진 측면도 있지만 자신의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작더라도 내 일을 하자. 이게 당시 그의 판단이었다.


人間萬事 塞翁之馬


2011년 그는 헤드헌팅 업체를 차렸다. 삼성과 웹젠에서 인사 업무를 해 온 경험을 살렸다. 예전에 알던 후배들도 합류했다. 한동안 일은 꽤나 잘 됐다고 한다.


일이 술술 잘 풀렸어요. 게임업계 쪽에 원래 인맥도 좀 있었고, 영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죠. 유아짱 시절이나 예전 웹젠 시절에도 항상 늦게 까지 일을 하고 생활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이 좀 생기더라구요.”


일찍이 닦아 놓은 인맥을 통해 영업 진행이 잘 되자 일은 마치 내버려둬도 굴러갈 것 같았다. 2012년에 접어들자 그는 투잡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회사 일은 잘 되고 있었지만 과거 사기 사건으로 인한 빚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2013년 송 대표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수원대학교 주변)에 위치한 작은 치킨집을 인수, 직접 운영을 했다. 음식점 경영은 물론, 닭을 튀겨본 적도 없는 그가 치킨집 경영에 뛰어든 것. 헤드헌팅 일은 같이 창업을 했던 후배들에게 맡겼다.


 헤드헌팅 일이 계속 유지가 되면서 치킨집까지 잘 된다면, 그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리고 경험이 없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치킨집도 잘 됐다! 심지어 동네 인기집으로 떠서 배달의 민족 등 주요 앱에서 항상 최상위에 노출되고 평점이 가장 높은 집으로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어려움이 시작됐다.


 “헤드헌팅이 계속 영업을 하면서 네트워크를 관리해야 했는데, 그게 전혀 안됐어요. 영업망이 무너지자, 일감이 없어졌죠. 저의 짧은 생각이 결국 헤드헌팅 사업을 망가뜨리게 된 거에요. 제가 일일이 직접 세심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후배들에게만 맡겨두었던 것이 패착이었던 겁니다.”


 결국 부업으로 시작했던 치킨집이 본업이 됐다. 부업으로서는 할 만 한 일이었지만 본업이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충분한 수익을 내기 어렵기 때문. 그는 떡볶이와 곱창을 추가, 3가지 아이템을 판매하는 등 매출을 올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이 과정에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선 본인이 직접 대부분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조리도 하고 배달도 했다. 배달 도중 오토바이 사고로 새끼 발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4개 모두 골절 되는 중상을 입기도 했고, 추운 겨울 기브스를 풀지도 않은 채 배달을 다니는 등 고충을 겪었다. 문제는 이런 고생이 아니었다. 치킨집은 아무리 고생을 해도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종류의 창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구로디지털단지 디디소프트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 회사 임직원들. 왼쪽 세 번째가 송경수 대표.>


매장관리 유무선 연동 플랫폼


 자신이 치킨집 사장을 하면서 겪은 가장 큰 고충은, 너무 바쁘고 사람이 몰릴 때는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저녁에 주문이 몰릴 때는 정말 여기가 치킨집인지, 전산실인지 모를 정도였어요.” 그만큼 매출을 입력하고 계산하고 정리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뜻.


 고객이 계산을 하면 POS 단말기로 전송이 된 뒤 매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내부적으로 별도의 관리 프로그램에 입력을 해야 했다. 이걸 그때 그때 일일이 할 수 없으니 하루 영업을 마친 후에 몰아서 하곤 했는데 이러다보니 매출 누락이 발생하기도 했다. 고객이 계산을 했는데 이게 현금인지, 카드인지, 카드 거래를 한 뒤 취소를 했는지 안했는지, 가게 주인이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배달을 나가면 더욱 그랬다.


 “고객들이 배달을 쉽게 주문하고 이용하기 편리한 서비스들은 많죠. 하지만 점주 입장에서 매장을 관리하고 고객에게 제때 쿠폰 등을 줄 수 있는 통합 서비스는 없습니다. 제가 해 봤으니 알 수 있는 거죠.”


 그는 자신의 매장 경험 노하우를 바탕으로 매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이 점포를 관리하는 데 최적화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기획안을 들고 옛 유아짱 시절 선후배들에게 보여줬다. 사업화하면 충분히 수요가 있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났다. 옛 후배들을 모으고, 디디소프트를 차렸다. 구로디지털단지에 사무실을 내고, 수원 봉담에서 하던 치킨집은 정리했다. 4년여만에 다시 IT업계로 돌아온 것이다.


 송 대표의 구상은 매장 업주들을 위한 매장관리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것. 그가 몸소 겪었던 불편함을 해결해 주는데 초점을 맞췄다.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도 정산을 위해 오랜 시간 매장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점, 그렇게 정산을 하고 나서도 실제 매출과 다른 경우가 너무 많다는 점, 배달 나간 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해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음식을 조리해 배달하기 쉽지 않다는 점, 너무 많은 다양한 앱과 각종 프로그램을 관리하기 힘들다는 점 등 점주들의 고충은 끝이 없었다.


 디디소프트가 개발한 디디샵(DDSHOP)은 매장 관리 유무선 연동 플랫폼이다. 매장 내 상황을 배달 직원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고, 매장 관리 프로그램에 입력한 매출 등 각종 내역이 점주의 스마트폰에도 바로 전송된다. 모든 내역을 스마트폰에서 바로 알 수 있고, 매장 관리 프로그램에 입력과 동시에 공유되기 때문에 매출이 누락되거나 고된 하루 매출 정산 작업을 오랜 시간동안 별도로 할 필요도 없다.


 매장 주인 입장에서는 매장 관리 프로그램만 디디샵으로 바꾸고 앱을 깔면 고객에게 쿠폰을 발송해주는 등 단골 고객을 관리하는 데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 고객 입장에서는 굳이 기존 배달앱과 다른 별도의 앱을 깔지 않고도 쿠폰 서비스 등을 문자를 통해 받을 수 있다. 물론 디디샵 앱을 깔면 자신이 자주 배달을 시키거나 이용하는 매장의 쿠폰 서비스 등을 받을 수 있다는 잇점이 있다.


 4,5년 전에도 모바일 매장 관리 프로그램이 나온 적이 있었다. 자영업자들을 겨냥한 서비스였는데, 대부분 너무 사용법이 복잡하거나 추가적인 학습을 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실패했다. 자영업자들의 입장에서 이들의 현실을 알지 못한 채 나온 서비스였기에 현실성이 떨어진 서비스가 많았다.


 디디소프트의 디디샵은 이런 자영업자들의 매장 관리용 소프트웨어와 기존 배달앱을 결합한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다만 B2B 형태로 매장 주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수익모델은 기존 매장 관리 프로그램처럼 프로그램을 설치할 때 정산을 하는 방식과 이 프로그램을 통해 주문이 들어왔을 때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부과하는 방식이 있다. 두 가지 모델을 놓고 검토중이다. 이달 중 테스트를 거쳐 서비스가 본격화될 예정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치킨집 이런 거 하지 말고 헤드헌팅 일 만 계속 했으면 더 평탄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하지만 치킨집을 열지 않았으면 이런 사업 기회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겠죠. 사는 게 참 어찌 될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어딘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편함과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걸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보람이 있습니다. 제가 잘 알고, 해결해 볼 수 있는 일에 도전하고 있다는 건, 힘들어도 해볼 만한 일인 것 같아요.”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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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이름을 처음에 들으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사실 회사 이름이라고 생각하기도 쉽지 않다.) 회사 이름이 노예스런이라니. 직원을 채용할 때 잘못하면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 이름에는 제법 이들이 추구하는 바가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스타트업다운 유머러스함과 끼를 반영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의 스타트업 240회는 노, 예스, 런의 창업자 오홍석 대표와 김진수 CTO의 이야기다.


결국, 할 사람은 한다

오홍석 대표와 김진수 CTO는 한성과학고, KAIST(한국과학기술원) 동창이다. KAIST 산업공학과 99학번으로 입학한 오홍석 대표는 대학을 졸업한 뒤 약 7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다. 소프트브릿지라는 회사에서 HTS(홈트레이딩시스템) 관련 업무를 하기도 했다.


 회사 생활을 잘 하다가 왜 나와서 창업을 했을까. “답답했어요. 이렇게 하는 게 답이 아닌 것 같은데, 회사에서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서 일을 하게 되면, 아닌 것 같은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많더라구요. 그게 싫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서 일을 하면 일이 잘 돼도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기도 했구요.”


 결국은 자신의 일을 찾아 창업을 했으리란 얘기지만 혼자서 하긴 힘들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데는 친구와의 우연한 만남도 한 몫 했다. 친구 결혼식장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친구가 김진수 CTO였다.


 두 사람이 결혼식장에서 느닷없이 조우했던 2011년에 김진수 CTO는 레블릭스에 있었다. 한국의 스타트업 코너 제 21회에서 아주 초창기에 소개한 바 있는 레블릭스는 훗날 엔써즈에 인수됐는데 김진수 CTO는 윤종일, 신화용 등과 함께 이 회사를 창업했다.


 오 대표는 이번이 자신의 첫 창업이지만 김진수 CTO의 창업 경력은 10년을 훌쩍 넘긴지 오래다. KAIST 00학번인 그는 학교 동기동창인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이사와 함께 이미 지난 2002년 중소기업창업경진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때 받은 상금 1억원으로 에빅사라는 인터넷 회사를 설립했다. 2005년까지 사업을 했지만 창업멤버들이 모조리 군에 입대하거나 병역특례로 군 복무를 대신하게 되면서 사업이 중단됐다. 당시 김진수 CTO는 병역특례로 그래텍에 갔다가 넥슨으로 옮겼다. 이들이 다시 모여 레블릭스를 창업한 게 2010년이었다.


 동영상 검색업체인 엔써즈가 2012년 레블릭스를 인수한 뒤 김진수CTO도 엔써즈에 들어갔다. 두 사람이 우연처럼 결혼식장에서 만난 뒤 201320142년 동안은 창업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었다. “이 때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테스트를 해 봤어요. 그래도 제가 해보고 싶었던 아이템이 따로 있었죠.”


 2014년말 김진수 CTO가 엔써즈에서 나왔고 비슷한 시기 오 대표도 회사를 나와 두 사람은 함께 창업을 했다. 회사 작명은 김 CTO가 했다. 과거 레블릭스 등 회사 이름을 직접 짓는데 소질을 보였던 그는 이번에는 약간의 재치와 유머감각, 그리고 듣는 이의 여유가 필요한 독특한 이름을 지었다. ‘노예스런의 탄생이다.


외국인 친구를 만나는 최고의 방법, 미프.

노예스런 회사의 소개서 첫 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써 있다.

No apps for your needs?

Yes, there will be!

Run our app

각 문장의 첫 글자를 따면 노예스런이 된다. “노예스런은 생활의 윤택함을 주기 위한 모바일 서비스 개발회사입니다


 오 대표가 회사를 차리고 해 보고 싶었던 사업은 이거였다. “이태원에 가면 외국인들이 많이 있죠? 많은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합니다. 영어 등 외국어를 배우고 싶은 욕구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문화권의 친구를 만나고 싶은 욕구때문인 경우도 있고,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다양하죠. 그런데 무작정 오프라인에서 헌팅으로 만나는 건 실패 확률이 너무 높고 위험한 것 같아요.”


 이렇게 생각한 오 대표는 스마트폰에서 외국인과 대화를 나눠본 뒤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앱 ‘Meeff’를 개발했다. 2014년말 법인을 설립한 뒤 지난해 앱 개발이 완료됐다. 지온네트웍스, 엔써즈, YAP 등에서 일한 유민정 이사가 디자인 책임자로 합류했다.


<'노예스런' 창업멤버들. 왼쪽부터 유민정 CDO, 김진수 CTO, 오홍석 CEO>


 미프는 외국인 친구를 모바일 앱 상에서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서비스다. 한국인 친구를 만나고 싶은 외국인이나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은 한국인을 연결해준다. 서로 원하는 국적과 언어, 스타일 등을 선택하면 외국인 친구를 미프에서 만날 수 있다.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부작용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만, 1년 동안 서비스를 운영한 결과 현재까지는 대부분 실제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에 들어오는 이들이 많다고. 20만 명이 가입했고 월간 실 사용자 수는 10만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수치를 보이고 있다. 내년 말까지 이 숫자를 35만으로 끌어올리는 게 이 회사의 목표.


 특정 국적이나 성별을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 놓으면 회원 중 선택 조건에 맞는 인물들 사진과 프로필이 내 화면에 뜬다. 이를 보면서 대화하고 싶은 사람을 클릭한 뒤 상대방이 이를 수락하면 대화를 할 수 있는 방식이다. 상대방이 수락해야만 대화가 가능하지만, 사이버 머니를 조금 쓰면 바로 대화창을 열 수도 있다.


 미프는 국가별 서비스라는 게 특징이다. 일본과 대만, 중국 시장을 겨냥한 서비스도 준비중이다. 즉 일본인을 친구로 사귀고 싶은 외국인과 외국인을 만나고 싶은 일본인을 위한 별도의 미프가 나오는 식이다.


 대화방을 바로 여는 유료화 모델 외에도 다양한 유료화 모델을 개발중이라고 한다. 언어 교환 콘텐츠도 제작중이다. 현재 서비스를 이용중인 고객층 가운데 여성의 비중이 남성보다 높다는 건 상당히 고무적이다. 당초 한국 여성과 외국 남성의 친구 맺기가 많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오히려 한국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친구 맺기가 많다. 오홍석 대표는 점점 외로운 사람이 많아지고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은 수요는 더 늘어나고 있다외국인 친구를 만나는 가장 좋은 통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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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팀이다. 네 남자의 우정이 그렇고, 이들이 지향하는 세계가 그러하며, 이를 위해 차근차근 일을 꾸며 나가는 것도 그러하다. 이런 팀이라면 자신들이 그리는 미래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뭔가 세상에 임팩트를 주는 일을 하지 않을까. 한국의 스타트업 이백서른아홉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반베이스(Urbanbase)를 창업한 네 남자들이다.


여덟 살에 코딩을 시작한 소년


집에 애플II가 있었어요.”
 어반베이스 하진우 대표가 인터뷰 도중 불쑥 이런 말을 했다. 하 대표의 아버지는 상당한 IT매니아였던 것 같다. 엔지니어였던 하 대표의 아버지는 새로운 전자제품을 즐겨 사용했고 집에 애플II와 같은 컴퓨터가 있었던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접했다.


 틈만 나면 게임을 하던 그에게 어느 날 아버지의 말씀. “이왕이면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배우면 어떻겠냐.”

 그래서 그는 프로그래밍을 배웠다. 베이직부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여덟 살 때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어린 나이에 코딩을 배우다니. “아직 글도 잘 모를 때였어요. 저한테는 그냥 숫자를 익히는 것처럼, 어떤 기호처럼 코딩이 다가온 것 같아요.”

 어쨌든 그는 그 덕에 일찌감치 프로그래머가 됐다. 당연히 대학도 컴퓨터공학과로 갔을 것 같은데 그의 선택은 건축공학과.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된다는 부모님 말씀도 있었고..당시에 건축학과가 인기도 좋았거든요. 하하


 춤추는 걸 즐겨하고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지만 코딩을 단숨에 배우는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내신이 전혀 뒷받침이 되지 못했지만 이과에 필요한 학업에 능한 그는 속성으로 준비해 경희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2000년대 초반인 당시는 TV프로그램에서 러브하우스 등이 인기를 끌면서 건축학과가 상당히 주목받던 시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그는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건축설계사무소에 들어가게 된다. 언젠가 자신의 건축사무실을 차려야 하는 입장에서 마땅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맞닥뜨린 것은 우울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잠시 중단해야 한다. 지금 회사를 창업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계기가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라고 판단해서다. 그가 대학 과정을 마무리하고 건축설계사무소에 입사하는 그 사이에, 그는 군대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어반베이스 창업 멤버들. 왼쪽부터 하진우 대표, 이경우 CTO, 김덕중 COO, 오세준 CSO. -어반베이스 제공>


군에서 만난 네 남자

 

 하 대표는 학부를 졸업하고 공군 장교로 군에 입대했다. 경남 진주의 공군 훈련소에서 동기간으로 만나 금방 친해진 이가 오세준(CSO)과 이경우(CTO). 오세준 이사는 싱가포르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지내다가 한국에 들어왔다. 뭔가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렴풋이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이유인 듯하다. 하여간 군에서 몸을 부대끼며 친해진 이들은 김덕중 교관을 만난다. 공군사관학교 산업공학과를 나온 김 교관은 당시 빨간 모자를 쓴 악마의 조교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들 넷은 결국 하 대표의 아이디어와 설득으로 다 같이 창업이라는 험한 바다에 뛰어들게 되지만 이 당시만 해도 그저 친한 친구일 뿐이었다.


 “군대 가서 가장 친한 친구가 생긴 셈이죠.”

네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부러울 정도로 드문 일이다. 더군다나 훈련을 받는 입장에서 교관과 그렇게 친해진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엄격하고 터프한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사람이 참 좋더라구요.” 하 대표의 말에 다른 멤버들도 맞장구. 내가 봐도 그렇다. 네 사람은 나이도 비슷했다. 또래들이 만나니 금방 친해진 것. 그런데 친해지려면 약간의 우연 아닌 우연도 필요하다. 훈련소 시절에 처음 만나 친해졌지만 계속 관계를 이어가려면 군 생활을 같이 해야 했다. 공교롭게도 훈련이 끝난 뒤 자대 배치도 같은 곳으로 받았다. 이제는 이들의 만남이 어떤 필연이 됐다.


 2년이라는 시간동안 이들은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했다. 밤에는 술잔도 기울이고, 젊은 체력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도 나눴다. 서로를 속속들이 알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도 제대를 하고는 각자의 길을 가야 했다. 각자 갈 길이 다르기도 했다.


 2009년말 제대한 하 대표는 훌쩍 여행을 떠났다. 중남미와 아프리카가 그가 선택한 여행지.

왜 하필이면 중남미랑 아프리카를?”

당시에 제가 체게바라를 좋아했어요. 그런 기운을 느껴보고 싶어서 중남미로 갔구요.”

다녀오니 어땠나요?”

글쎄. 오히려 그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고나 할까. 체게바라의 혁명 시기와 지금은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았고, 오늘날 세상을 바꾸는 힘은 스타트업에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오지에 와서 중국산 신발을 파는 아저씨를 보면서, 세상은 넓고, 정말 다양한 일이 있으며, 사업 아이템이 무궁무진하다는 것도 그가 배운 것. 그렇게 장장 6개월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건축설계사무소로 들어갔다. 아직은 자신의 진로를 확정하지 못했을 때였다.


가상현실에서 미래를 보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건축설계사무소에 있던 기간 동안 그는 쉽지 않은 건축업계의 현실을 확인했지만, 그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다른 일이 아닌, 그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다. 2013년 그가 건축설계 관련 외주업체를 창업할 당시만 해도 그가 찾아다닌 새로운 가능성은 아직 희미했다.


 “일을 하다보니 설계도면을 3D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파트의 경우 건축법 규제에 의해서 규격과 모양이 대부분 정해져있기 때문에 사실 도면만 있으면 3D 입체화를 하는 게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건축법상의 규제 등을 데이터값 화해서 코드에 집어넣으면 가상의 모델링이 되겠다 싶었죠.”


 그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설계 전문가와 고객의 인식상의 차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설계 전문가들은 도면을 보면 실제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지지만, 클라이언트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설계사무소에서 도면을 3D로 만들어주는 외주 업체를 이용하지만너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서 작업이 진행이 안 될 때가 많았어요. 잘 설계된 알고리즘으로 이걸 자동화할 수 있으면 상당히 많은 곳에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전우들은 각자의 길에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오세준은 2009년말 제대한 뒤 SK텔레콤에 입사해 마케팅과 전략 기획 분야 등의 업무를 차례로 했고, 김덕중은 2012년 공군을 제대한 뒤 삼성디스플레이에 입사해 일을 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면서도 이들이 계속 같이 만남을 이어갔다는 게 중요했다.

처음부터 친구들하고 사업을 하려고 했었나요?”

아뇨 그렇진 않았어요. 그냥 창업을 하고 일을 하다보니 필요한 분야가 생겼죠. 그때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에게 상의를 했는데 이렇게 같이 하게 됐네요.”


 결국은 하진우의 꿈에 세 친구들이 함께 한 셈이 된다. CTO 역할을 맡은 이경우와는 처음부터 창업 시작을 함께 했고, 일을 구체화하면서 삼성디스플레이에서 재무 담당으로 있었던 김덕중, SK텔레콤에서 마케팅과 기획을 한 오세준이 합류했다. 친구들은 하 대표의 아이디어와 실행방안에 공감했다. 시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차례로 합류하면서 팀이 완성됐다.


 출발은 건축설계 업무를

하는 데 필요한 2D 도면을 3D화하는 솔루션의 개발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무엇이든 도면만 있으면 모든 현실세계를 가상의 세계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면 그대로 구현되는 것이 실제의 건축물이기 때문에 도면만 있으면 가상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이를 통해 여러 가지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실내공간정보를 가장 많이 가진 기업


 “전 세계에서 실내 공간정보를 가장 많이 가진 회사가 될 겁니다.”

 하 대표가 밝히는 이 회사의 비전은 명확했다. 실내 공간정보를 VR 가상현실에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자는 게 이 회사의 비전이었다.


 어반베이스는 현재 100만개에 달하는 국내 아파트와 오피스텔의 도면 및 이 도면에 따른 3D 실내 공간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어떤 건물의 실내든 기본적으로는 도면만 있으면 2초 만에 실내 공간의 3D 정보가 만들어진다. 아파트의 경우 한 도면을 공유하는 세대가 많기 때문에 100만개의 도면만 있어도 국내 1000만 가구를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 대표의 설명을 들으며 어반베이스 홈페이지에 들어가 국내 한 아파트의 도면을 클릭했다. 순식간에 집의 입체 정보가 나타났다. 방의 위치는 물론 계졀에 따른 일조량에 따라 방의 밝기와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까지 표현이 됐다. 현재 어반베이스는 3D 모델 뿐 아니라 여기에 가구를 배치해 집안을 꾸미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내가 꾸민 방을 SNS에 올리거나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직은 붙이지 않았지만 커머스를 추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구를 배치해 보고 직접 구매를 할수도 있다. 구매시 수수료 수익이 생긴다.


 어반베이스 포 비즈니스도 준비하고 있다. 인테리어 업체 등이 고객들에게 설명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솔루션을 개발해 판매하는 것이다. 그 밖에 호텔이나 콘도 등 건물 내부 정보의 가상화가 필요한 업체들에게 3D 솔루션을 제공할 수도 있다.


 해외 진출도 물론 가능하다는 설명. “국경을 뛰어넘어 건물의 설계 도면만 있다면 어느 곳이든 가상의 공간을 만들 수 있거든요. 특히 일본과 중국은 한국과 도면 작성 방식이나 주거 형태가 비슷해서 어반베이스의 알고리즘을 쉽게 적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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