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열정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 꿈과 비전을 설명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들었다. 그는 확실히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될 때까지 계속 해 보는 것. 이루고 싶은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것. 그가 사는 세상은 이런 세상이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왜 알토스벤처스가 이 회사에 투자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에이프릴의 서경미 대표다.
한국은 너무 좁다. 내 무대는 ‘세계’
그의 전공은 호텔경영학. 학교는 미국 라스베가스에 있는 네바다주립대를 나왔다.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한 전공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대학 졸업에서 큰 의미를 찾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졸업을 한 것은 그 나름대로 부모에 대한 ‘효도’의 일환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미국 학교로 간 이유를 물었다. “그때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한국은 너무 좁은 나라라고. 한국 사람들은 왜 미국에서도 코리아타운에 몰려 살까. 더 넓은 세계를 향해서 움직이고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해 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으로 미국에 가서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찾아 다녔던 학생 서경미. 미국 여성들, 특히 흑인 여성들을 위한 네일아트가 사업이 될 것 같았다고 한다. 뭔가가 보이면 즉각 시작하는 것이 서경미 대표의 특징이다. 즉시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네일아트 아이템을 들여와 미국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갖고 있는 돈 2만 달러를 몽땅 투자했다고 한다. 네일아트 관련 아이템은 날개돋힌 듯이 팔렸다. 불과 6개월 만에 현지 업체에 70만 달러를 받고 회사를 매각했다. 사업을 좀 더 하면 더 회사를 키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당시엔 학교를 다녀야 하는 문제도 있었고 현실적으로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그 사업에서 제 운은 거기까지였던 거죠. 그 뒤 그 회사는 더 많이 성장해서 지금도 잘 되고 있어요.”
학생 신분으로선 짧은 시간에 상당히 많은 돈을 번 서 대표. ‘쿨’하게 회사를 정리했지만 얌전하게 학교에서 학업에만 몰두할 리 만무했다.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그는 틈틈이 사업을 병행하면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거점은 미국에 두고 있었지만 그는 사업 기회가 세계 시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 브라질, 한국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사업 기회를 찾았다. 주로 패션, 주얼리 쪽을 했단다. 어렵게 생각하질 않고 일을 벌였다. 라스베가스에 오는 사람들이 도박을 하러 오기 때문에 행운을 중시한다는 걸 간파하고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크리스탈에 넣어서 간단한 소품, 액세서리로 만들어서 판매했다. 매장을 30개나 늘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업을 하면 할수록 그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는 한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하기엔 제약이 너무나 많았다.
무엇보다 그는 결국 한국을 기반으로 사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 시장에서 도매업 경험은 있었지만 한국을 기반으로 하기엔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됐다. 온라인 쇼핑몰이나 플랫폼을 중심으로 패선 및 주얼리 사업을 하려고 했지만 한국의 핵심 상권인 동대문 업자들이 좀처럼 문을 열지 않는 것도 그로 하여금 미국을 떠나게 하는 계기가 됐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결국 한국에 들어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장사되는 일이라면 지구 끝까지 간다
“전 세계에서 의류 도매와 생산 모두가 되는 곳이 어딘지 아세요?”
서경미 대표의 느닷없는 질문. 글쎄. 내가 알 턱이 없다.
“한국, 중국, 미국, 브라질, 인도 이렇게 다섯 개 나라가 전붑니다.”
“그 정도 밖에 없나요?”
“그게 다에요. 다른 나라들은 도매업은 하지만 생산을 못하거나 생산만 하고 도매 능력이 안되거나 그런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 중 인도를 제외한 4개 국가에 한국인 네트워크가 광범위하게 구축돼 있어요.”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유독 한국인 네트워크가 구축된 것이?”
“한국이 예전에 어려웠던 시절에 외국에 이민을 가서 주로 세탁소를 차리거나 봉제업 분야의 일에 종사를 했어요. 이 사람들이 결국은 세탁소로 부를 축적하고 봉제업에서 성공해 현지 공장을 세우고 이러면서 의류 분야의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 거죠.”
서 대표 덕분에 역사 공부까지 했다. 그가 유독 중국과 미국, 브라질을 오가면서 사업을 벌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동대문을 잡으면 되겠다.’
이게 서 대표의 생각이었다. 전 세계 주요 거점에 한국인 네트워크가 있다면 그 네트워크의 핵심은 동대문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서 대표는 동대문 경험이 없었다. 견고한 이들의 네트워크를 뚫고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동대문에 들어가서 B2B 사업을 해야겠구나. 그의 결론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쉬지 않고 일을 벌여오셨나요?”
쉴 새 없이 생각하고 일을 벌이고, 계속 새로운 시장을 찾아가는 그의 모습이 신기해 물었다.
“너무 재밌어요. 그냥 재밌어서 하는 거에요. 돈을 얼마를 벌어야겠다. 이런 목표를 정한 적은 없었어요. 그냥 사업 기회를 찾아서 물건을 팔고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는 게 너무 재밌었죠.”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라고 한다. 역시. 그 피가 어디 가질 않는다.
어쨌든 기회를 찾아 세계를 누비던 서 대표는 한국에 들어와 동대문에서 정착했다. 의류 도매업자로 일을 시작해 도매 매장 5개, 소매 매장 1개를 열었다. 중국 광저우에도 매장을 여는 등 꾸준히 확장을 해 나갔다. 3년간 동대문을 팠다. 동대문을 알았다 판단한 그는 드디어 2012년 에이프릴을 설립했다. 진짜 해보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동대문의 의류와 패션을 전 세계를 상대로 판매하는 것이다. 개인사업자로 일해온 그에겐 법인은 처음이기도 했다.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개인 사업자로 일하는 것과 법인을 차리는 게 엄청난 차이가 있네요.”
속칭 장사만 하다가 법인을 차리고 나서 당황했다고 한다. 조직 관리도 해야 하고, 사람도 잘 뽑아야 하고, 신경 쓸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아 사업이 혼자서 하는 게 아니었구나. 이런 생각이 처음 들었어요.”
그의 구상은 처음부터 명확하고 심플했다. 동대문의 의류 패션 매장의 상품들을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플랫폼이 되는 것. 예전에도 온라인으로 상품을 판매해봤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우선 플랫폼이 되야 했기 때문에 사이트 구성이 훨씬 더 치밀하고 완성도가 높아야 했다. 그런데 이건 그가 잘 하는 분야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외주에 맡겼는데 여기서 탈이 났다.
“제가 원하는 수준의 사이트가 나오질 않더라구요.”
사실은 수준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류도 많았고, 필요한 기능 자체가 제대로 작동이 안됐다. 안되겠다 싶어 사람을 뽑았다. 솜씨 좋은 개발자라고 해서 영입해서 일을 맡겼는데, 이게 웬걸. 이번에는 사람이 배신을 했다.
“그냥 믿고 다 맡겼는데, 뽑아 놓은 개발자가 어느날 사이트는 공중분해시켜놓고, 사이트 개발 과정에 얻은 핵심 콘텐츠와 코드 등을 다 들고 사라져버렸어요.”
계속 눈을 반짝이며 얘기하던 이 순간에만 그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 역시 대표가 잘못한 일인 걸. 그리고 다시 한번 절실하게 느꼈단다. 좋은 파트너가 있어야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지나고 보니 모든 게 다 인사 사고였네요. 사람 잘못 뽑은 제 탓이죠. 그래도 사람을 믿어야 한다는 제 소신은 변함이 없습니다.”
<에이프릴 서경미 대표(가운데)와 직원들. 아래에 놓인 비닐봉투에는 동대문 의류 시장에서 촬영을 위해 가져온 옷들이 담겨 있다. 사진-에이프릴>
결국 2012년에 법인 설립하고 사이트를 세 번이나 뒤엎었다. 그리고 네 번째 만든 사이트가 링크샵이다. 링크샵을 만들면서 서 대표는 멤버를 대폭 보강했다. 우선 다음커뮤니케이션 출신의 전문가를 영입했다. 올해초 합류해 CTO(최고기술책임자)를 맡고 있는 추연진 이사다. 웅진에서 M&A 업무를 하던 오영지 이사도 합류해 회계, 재무, 조직관리 등을 맡고 있다.
알리바바 잡는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차근차근 일은 진행되고 있다. 동대문 상권을 중심으로 글로벌 생산자 네트워크를 연결해 한국의 에프릴이 전 세계에 인터넷 판매하는 그림이다. 멤버를 보강해 제대로 된 사이트를 오픈했고 11월에는 알토스벤처스로부터 투자도 잘 받았다.
동대문 상권에서 팔리는 제품의 규모가 얼마나 될까. 2만 개나 되는 동대문 상인들의 판매 규모는 연간 11조원에 달할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물론 이 곳에서는 대부분의 매출이 현금으로 발생하는데다 상당수 물량이 외국인 관광객 등 해외로 판매되기 때문에 정확한 시장 규모는 아무도 모른다.
하여간 시장 규모는 충분히 된다. 그의 목표는 동대문이 곧 링크샵이 되는 것. 링크샵에 입점한 동대문 매장은 전 세계를 상대로 매출을 올릴 수 있다. 사이트내 개별적인 홈페이지나 고객 관리 등도 가능해진다. 6월에 오픈했는데 1100개가 입점해 있다. 에이프릴은 내년까지 3000개 매장 입점을 목표로 하고 있다.
6월에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뒤 거래액도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6월 거래액 대비 9월 거래액은 5배에 달한다.
“동대문 시장이 이대로 있다간 중국에 먹힐 것 같아요. 중국이 예전에는 하청공장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생산, 도매, 디자인 등 생산과 판매의 전 과정을 다 하고 있거든요.”
서 대표의 구상은 동대문 상권을 살린다는 ‘대의명분’도 있다. 동대문 시장은 전 세계에서 밤을 꼴딱 새가며 영업을 하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 내수가 부진하고 대부분 중국 등 해외 바이어들이나 관광객들의 구매력에 의해 돌아가는 곳이다. 링크샵은 낮에 잠깐 쉬고 밤새도록 영업을 하는 이곳 매장으로부터 옷을 받아가서 하루종일 촬영을 돌린다. 이렇게 촬영을 한 옷 등 패션제품들을 링크샵에 올려놓고 매장들이 영업을 하기 전 저녁 시간에 다시 돌려준다. 링크샵만이 가진, 업체들과 상생할 수 있는 장점이다.
동대문 시장의 패션 제품들이 모든 시장에서 다 통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과 동남아에서는 잘 통하지만, 미국에서는 잘 안통한다.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제품은 따로 있다. 반면 유럽 관광객들에게는 반응이 좋다. 그래서 에이프릴은 한국의 동대문 시장, 미국의 자바 시장, 그리고 중국의 상인들로 셀러(판매자) 네트워크를 확대하면서 전 세계 고객들의 다양한 수요를 맞춰간다는 계획이다. 패션에서 시작해 주얼리, 기프트 등 아이템도 확장한다.
“암요 알리바바 잡아야죠. 이왕 시작했는데, 세계적인 회사 되야죠. 패션하고 주얼리는 저희가 잘 알아요. 알리바바 잡아야죠. 할 수 있어요.”
서 대표는 ‘알리바바 잡아야죠’를 계속 되뇌었다. 주문처럼. 나오는 길에도 그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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