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어느덧 점점 잊혀진 서비스가 되고 있지만 1990년대 말 시작돼 2000년대 초반 돌풍을 일으켰던 ‘프리챌’(http://www.freechal.com)이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이 사이트를 만든 전제완 (주)자유와도전 사장은 삼성그룹에서 일하다가 회사를 뛰쳐나와 벤처기업을 차려 대박의 꿈을 이뤄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주금가장납입 사건으로 전 사장이 긴급체포 된 후 프리챌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전제완 사장 역시 프리챌의 쇠락과 함께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았다. 결국 프리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재창업에 도전했다. 하지만 과감한 투자와 공격적인 경영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했다. 두 번의 실패 이후 사라질 것 같았던 그는, 하지만 돌아왔다. 그리고 보란 듯이 투자를 유치하고 다시 한번 재기를 꿈꾸고 있다. 그는 이번에 우뚝 설 수 있을까. 사실상 세 번째 창업이자 네 번째 내놓는 서비스를 들고 전제완 사장이 다시 돌아왔다.

◆자금난 인력난에 고전한 유아짱

전제완 사장의 이야기는 블로그에서 몇 차례 소개한 적이 있기에 프리챌 시절의 이야기는 그만두고 유아짱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게 좋을 것 같다. 그가 유아짱이라는 회사 설립 준비에 나선 것은 2008년이었지만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은 2010년이었다. 그리고 2011년 들어 짱라이브 선보였다. 짱라이브는 서비스 오픈 1년여만에 200만명이 넘는 사용자를 확보하는 등 순항했다.

초기에는 블로그 등 인터넷에서 개인 방송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서비스로 출발했지만 스마트폰이 확산되면서 스마트폰용 영상SNS로 발전했다. 주로 사진이나 텍스트, 동영상 등을 올려놓고 댓글을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다른 SNS와 달리 짱라이브는 앱을 통해 서비스를 했고 사람들이 동영상을 즉석에서 찍어 올리고 동영상을 보면서 채팅을 할 수 있다는 차별점이 있었다.

앱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시간 방송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 사용자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열혈 이용자들이 제법 있었다.

짱라이브 서비스의 핵심은 안정성이었다. 서비스 자체의 경쟁력이 동영상을 기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할 수 있다는 점이었기 때문에 동영상 서비스가 끊기지 않고 잘 돌아가야 했다. 물론 사람들이 이용하기 쉬운 UI(사용자 인터페이스)와 유려한 디자인 등도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짱라이브 서비스는 안정성에서 종종 문제가 발생했다. 동영상 재생이 끊기거나 에러가 발생하는 경우가 잦았다. UI 측면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기 힘든 구조였다. 그러다보니 초기 열혈 이용자를 중심으로 사용자가 늘었으나 어느 정도 수준에서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동영상에서 에러가 자꾸 나면서 회사 차원에서 공격적으로 유저 수를 늘리기 위한 마케팅을 전개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결국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대규모 투자가 필수적이었다. 서버 차원의 투자를 단행해 안정성을 높이고 실력있는 개발자와 디자이너를 영입해야 했다. 2011년말까지는 이런 작업이 순조롭진 않았어도 조금씩 이뤄졌었다. 전 사장은 다섯 군데의 투자회사로부터 13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2012년 들어 투자가 뚝 끊겼다. 투자회사들이 인터넷 회사에 투자하는 금액 규모상 더 이상의 투자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었다. 게다가 수익모델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도 보이질 않는 상태였다.

자금 유입이 중단되면서 회사는 급격하게 어려워졌다. 2012년 3월에는 KT가 회선을 끊는 일까지 발생했다. 잠깐이지만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사용자들이 이탈을 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직원들 월급을 주기 힘든 상황까지 몰렸다. 자금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전 사장은 결국 2012년 9월 12일 오후 6시부터 짱라이브 서비스를 잠정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공지에서 “2008년 10월1일 창업 이후,지난 4년간 글로벌 서비스를 목표로 영상SNS를 개발해 왔습니다. 척박한 벤처투자 환경 속에서도 5개의 국내 기관투자자가 130억원을 투자해줘서 220만명이 사용하는 국내 유일의 SNS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지난 3개월간 필요한 운영자금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해왔습니다만, 자금 조달을 마무리하지 못하였고 KT와 LG 측 회선사용료 미납으로 인해 더 이상 서비스 유지가 어렵게 되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전 사장은 회사 공개 매각도 추진했다. 하지만 적절한 인수 희망자를 찾기도 힘들었고 직원들이 모두 떠난 상태에서 회사는 사실상 폐업을 했다. 전 사장은 “자금난도 어려웠지만 인재를 구하는 게 훨씬 더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에어라이브로 다시 시작하다

과거 프리챌의 실패도 겪었던 그였지만 유아짱은 더욱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창업멤버들이 줄줄이 회사를 떠났고 오래 함께 일했던 직원들도 잃었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희망의 끊을 놓지 않았다. 프리챌 때에 비해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엄청난 채무를 뒤집어쓰진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다시 한번 줄기차게 사업의 기회를 모색했다. 회사는 사실상 공중분해됐지만 서비스는 아직 살아 있었다. 다만 동면상태에 있을 뿐이었다. 잠에서 깨우려면 돈이 필요했다.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투자자들의 문은 2014년 들어서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2014년 5월 상장사인 키스톤글로벌에서 30억원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짱라이브에는 대대적인 변화를 줬다. 우선 새로운 법인을 설립해 투자를 받는 것으로 했다. 짱라이브는 기능을 업그레이드하고 디자인을 혁신한 뒤 에어라이브로 개편했다. 지배구조에도 변화를 가했다. 에어(Aire)라는 법인을 이미 1월 미국에 설립했다. 에어는 기존 유아짱의 지분 100%를 갖는 모회사다. 유아짱은 사명을 에어라이브코리아로 변경했다. 전 사장은 에어의 최대주주가 됐다.

에어라이브코리아는 10월 15일 전세계 어디서나 채팅과 동시에 화상대화를 할 수 있는 '페이스채팅(Facechat)' 기능이 탑재된 모바일 앱 '에어라이브(Airelive)' 를 출시했다.

'에어라이브'는 글이나 사진, 영상 컨텐츠를 모바일과 웹을 통해 확산시킬 수 있는 소셜 기반의 멀티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한국어와 영어, 일어버전으로 출시됐으며 특히 여러 명과 함께 화상대화를 할 수 있는 '페이스채팅' 기능이 가장 눈에 띄는 서비스다.

'페이스채팅'은 다른 메신저 서비스와 같이 채팅의 기본 기능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화상대화가 가능하다. 실시간으로 최대 4인이 동시에 얼굴을 보며 음성대화 및 채팅이 가능하고, 화상대화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4인의 영상통화를 보고 들으며 채팅창에서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기존 짱라이브의 기능도 그대로 구현했다. 자신의 일상을 모바일로 촬영해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라이브 방송 기능은 기본이다. 아바타샵에선 유명 연예인이나 캐릭터로 제작된 다양한 무료 아바타를 다운받을 수 있다. 채팅이나 타임라인, 내 홈피 등에서 자신의 감성을 아바타로 표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친구들에게 보낼 수 있는 영상쪽지 기능과 내 폰에 있는 사진으로 멋진 효과와 음악을 삽입해 사진영상을 만들 수 있는 기능, 10초간 짧은 영상을 나눠 찍어 타임라인을 통해 공유할 수 있는 10초 영상 등 다양한 영상관련 기능들도 포함됐다.

그는 화상 대화 중 영상이 끊기지 않도록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데 유아짱 시절을 포함해 5년이 넘는 시간과 200억원이 넘는 자금을 쏟아 부었다. 에어라이브는 한 마디로 유튜브와 아프리카TV,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의 기능이 모두 포함된 복합 SNS인 셈이다. 채팅이나 사진 전송은 물론이고 개인 모바일 방송, 화상 채팅 등도 가능하다. 타임라인 기능이 있어 친구들의 소식도 알 수 있다.

에어라이브는 그가 꿈꿨던 모든 기능을 담았다. 프리챌 시절부터 꿈 꿔왔던 글로벌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플랫폼의 완성체가 드디어 에어라이브에서 구현된 것이다. 미국 투자를 추진하고 있는 그는 미국 투자회사의 자금을 받아 글로벌 서비스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는 계획이다.

모든 것을 다 잃고도 다시 시작한 그가 이번에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돈도 잃고 사람도 잃고 신용마저도 잃었던 그는 진짜 맨주먹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그가 겪었을 고통과 외로움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또한 그 못지않게 괴로웠을 창업멤버들과 직원들의 힘든 나날들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어찌 보면 그는 ‘자유와 도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삼성그룹을 뛰쳐나와 맨손으로 첫 창업에 도전했던 1999년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 심정인지도 모른다. 누가 봐도 불가능했던 도전은 이미 시작됐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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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챌 창업자인 벤처 1세대 전제완 유아짱 사장이 상장사인 키스톤글로벌으로부터 50억원의 투자를 유치, 재기에 나선다. 이에 따라 지난 2012년 9월 운영자금 부족으로 문을 닫았던 영상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짱라이브’도 20개월여 만에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28일 전제완 사장은 “최근 키스톤글로벌과 50억원 투자 유치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고 이 중 20억원이 오늘 입금됐다”며 “이를 기반으로 5월중 짱라이브 서비스를 재개하고 6월15일까지 나머지 투자자금을 받아 미국에서도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키스톤글로벌이 투자하는 회사는 한국의 유아짱이 아닌 미국 신설법인 ‘에어(Aire Inc.)’다. 에어는 올 1월 전제완 사장이 미국에 설립한 벤처회사로서 키스톤글로벌은 이번 투자로 에어의 지분 20%를 보유하게 된다. 키스톤글로벌은 이같은 내용을 29일 공시할 계획이다. 에어는 투자 유치와 함께 짱라이브를 서비스하고 있던 기존법인 유아짱을 100% 자회사로 편입하게 된다. 기존 유아짱 주주들은 정해진 비율대로 에어사의 주주로 변경된다. 전 사장은 이런 절차가 마무리되면 유아짱 사명을 에어코리아로 변경할 예정이다.

 전제완 사장은 지난 1999년 ‘자유와 도전’을 기치로 내걸고 프리챌을 창업, 2년만에 1000만명이 넘는 회원을 모으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2002년 12월 주금가장납입혐의로 긴급체포되면서 프리챌은 몰락하게 됐고, 그는 훗날 개인적인 혐의는 벗었지만 230억원의 부채를 안고 파산에 이르렀다. 2008년에는 동영상 SNS 업체 유아짱을 설립, 짱라이브를 통해 한때 230만명의 회원을 모았으나 자금난을 겪다가 서비스를 중단하기도 했다.

  전 사장은 “현재 전세계적으로 영상SNS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다”며 “한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 안에 미국에서 영상SNS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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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완 유아짱 사장이 이번에 세상에 내놓은 것은 동영상 기반 소통서비스 ‘짱라이브’였다. 지난 1999년 프리챌을 창업하고 커뮤니티 서비스를 선보였던 그가 12년만에 돌아와 도전한 것은 영상소통플랫폼이란 분야.

 “소셜 동영상 모바일 풀랫폼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열어 2년 내 1억명의 이용자를 확보하겠습니다.”

 호탕하고 씩씩하게, 전 사장은 기자간담회장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8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장에 나타난 전 사장은  “짱라이브는 기존 문자만 주고받는 모바일 메신저와 달리 영상을 주고받고 생중계도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모바일 SNS”라며 “다음달 일본을 시작으로 세계 시장을 적극 공략하겠다”고 말했다. 짱라이브 앱은 애플 앱스토어와 구글 안드로이드 마켓에서 무료로 다운받아 이용할 수 있다.

 짱라이브는 세가지 핵심 기능으로 이뤄져 있다. 동영상 플랫폼이 첫번째고 영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두번째, SNS 기반의 커머스가 마지막이다. 이 중에서 핵심은 기기에 상관없이 주소록을 기반으로 연동된 친구들과 문자메시지, 동영상 채팅 및 공유, 모바일 생중계 등을 가능하게 하는 SNS 기능이다. 기존 모바일 메신저들이 휴대폰 주소록에 국한돼 있지만 유아짱이 이번에 공개한 짱라이브 버전 3.0은 여기에 더해 PC 주소록과 이메일 주소록까지 연결했다. 어떤 기기로든 짱라이브 앱이나 웹페이지에 접속해 있으면 친구들과 실시간 동영상 공유가 가능하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회의하는 장면이나 동창회 장면, 결혼식 장면 등을 지인들에게 현장에서 간편하게 생중계를 할 수 있고 이를 보면서 지인들끼리 바로바로 채팅도 할 수 있다.

윤태중 부사장은 “짱라이브가 추구하는 것은 방송이 아니라 영상 소통”이라며 “방송이라고 하면 아주 거창한 장비를 들고 힘들게 준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짱라이브의 동영상 생중계는 소통이 목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등으로 촬영을 해 이를 지인들과 나눌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했다.

 릴레이 방송 기능이 있는 것도 짱라이브의 특징이다. 릴레이 방송은 친구가 생중계하는 동영상을 다른 그룹의 사용자들에게도 중계로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이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로 계속 연결될 수 있어서 확장성이 클 것으로 짱라이브는 기대하고 있다. 

현재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는 있는 '****톡'류의 서비스보다 한층 진화된 서비스라는 차원을 강조한 짱라이브 3.0 캐치프레이즈도 눈길을 끌었다. '톡(Talk)까지 말고 비춰봐' 어렵게 말로 하지 말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영상으로 보여주면 된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전 사장은 2002년 12월 프리챌 사장 시절 긴급체포되면서 이후 회사 차원의 공식 행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로서는 9년 만의 공식 행사에 모습을 나타낸 셈이다. 만감이 교차할 만한 순간이지만 그는 의외로 담담해보였다. 지나온 일보다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해서일까. 2008년 그가 재기를 노리며 창업한 유아짱은 3명의 직원에서 출발해 3년여만에 120명으로 불어났고 100만명의 회원도 확보했다.

전 사장은 해외 시장에서 승부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짱라이브는 페이스북처럼 이용자가 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플랫폼이기 때문에 언어의 장벽이나 문화의 장벽이 크지 않고 세계시장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해외에 인터넷데이터센터(IDC)를 구축하는 등 공격적으로 투자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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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용 전 NHN CMD 본부장은 NHN 창업 멤버는 아니다.하지만 그가 작년 NHN을 퇴사할 때 쏠린 관심은 창업자에 준하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NHN에서 디자인과 마케팅을 총괄했던 그가 갖는 권한과 책임때문이었던 것 같다.최근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이 트위터에서 그에 대해 ‘디자인의 대가’라고 지칭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그는 NHN을 나와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뒤 최근 논현동에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차렸다.그로서는 첫 창업이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차린 건축디자인 사무소?
그가 두달전 창업한 제이오에이치(JOH) 사무실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그곳은 일하는 공간으로서의 사무실이 아니었다.입구 오른쪽에는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듯한 카페가 마련돼 있었고 왼쪽에는 혼자서 생각에 잠길 법한 작은 방도 있었다.안쪽으로 들어가자 유럽풍의 찻집 분위기가 연출됐다.그리고 칸막이 너머 제이오에이치 사람들이 일하는 공간이 있었다.

 제이오에이치는 어떤 회사일까? 사전 정보가 전혀 없이 회사를 방문했다.보통 회사를 취재하러 가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에는 NHN 시절에 만났던 조수용이라는 인물이 이번에 어떤 일을 하는가가 궁금해서 갔다.이 사람이 새로 시작한 일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얼핏 사무실 분위기는 건축 관련 디자인을 하는 사무소같았다.조수용 대표의 지난 이력을 생각해보면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나 역시 별 정보 없이 갔지만 아마 그라면 디자인과 관련된 사업을 시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때 내가 생각했던 디자인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디자인이었다.그가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으로 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인터넷이라는 틀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았다
 조수용 대표는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 92학번이다.1999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당시 전제완 프리챌 사장의 요청에 프리챌 초기 멤버로 입사했다.그가 당시 만들었던 게 붉은 와인색의 프리챌 로고였다.그는 2003년 NHN으로 옮겨 작년에 퇴사하기까지 8년 가까이 일했다.인터넷 업계에서 만 11년을 일하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만한 흔적을 많이 남겼다.2001년 프리챌에 있을 당시 검색 광고 바로 밑에 배너 광고를 넣는 시도를 처음으로 했고 네이버의 녹색 검색창도 그가 최종 디자인했다.검색 창을 밝은 녹색으로 바꾸고 검색창 안을 하얗게 비워 놓은 모습을 NHN의 상징으로 만든 것도 그의 작품이다.

 많은 일을 해왔기 때문일까.그는 인터넷이라는 틀을 벗어날 때가 됐다고 생각한 것 같다.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자신이 원래 하고 싶었던 일로 돌아간 것 같았다.그는 그것을 ‘브랜드 디자인’이라고 칭했다.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인터넷이라는 틀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사실 프리챌에 근무할 때도,NHN에 와서도 제 관심사는 로고나 검색창이 아니라 브랜드였습니다.프리챌에 있을 당시 브랜드 디자인에 골몰하다보니 로고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거였죠.NHN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프리챌을 그만두고 나서 잠깐 제 사업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그때도 제가 추구했던 것은 브랜드 디자인이었죠.보기엔 인테리어 디자인처럼 보였지만요.”

◆브랜드의 최종 단계는 공간 디자인
 그런데 그것을 NHN에 있으면서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왜 그는 NHN을 나와 새출발을 했을까.조직에 속해 있으면 아무래도 제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그래도 그가 브랜드 디자인이라는 것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프리챌과 NHN이라는 시대를 대표할 만한 두 인터넷 회사에서 일한 경험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특히 NHN에서 보냈던 마지막 3년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제이오에이치를 설립하는 직접적인 밑거름이 됐다.그 3년동안 그는 NHN의 분당 본사 건축을 책임졌다.2006년 외주로 맡긴 업체에서 NHN 본사 사옥의 설계도와 조감도 등을 갖고 왔다.그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런 건물로는 NHN의 정체성이나 특징,NHN이 지향하는 것을 좀처럼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강하게 반대하고 제가 직접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기획됐던 일이기에 안에서 반대가 심할 수 밖에 없었다.그래도 그는 밀어붙였고 다행히 창업자인 이해진 의장이 그의 의견을 받아줬다.NHN 사옥을 직접 설계하고 구상하면서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브랜드 디자인의 완결을 경험한 것 같다.

 “브랜드의 최종 단계는 공간입니다.공간과 만나 브랜드가 완성되는 거죠.특정 기업이나 상품의 이미지,우리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정점은 결국 공간 입니다.”

 디자인에는 문외한이지만 이미지가 공간과 만나 완결된다는 것에는 나도 동의하는 터.취재를 하러 갈때도 일단 상대방이 있는 곳,일하는 곳,주로 머무는 장소로 가는 원칙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기업이나 사람의 이미지 역시 공간에서 완성되고 파악되기 때문이다.

◆디자인에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그는 디자인이 의도를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사람들이 아이폰을 처음 접했을 때 반하는 것은 보기에 예쁘기때문만은 아닙니다.이 제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직관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죠.그런데 아이폰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아이폰이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디자인됐기 때문인데,다른 제품들도 디자인은 사람들에게 말을 해 줍니다.‘나를 이렇게 쓰면 돼’라고요.디자인이 행동을 유발하는 거죠.결국 디자인에는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가치는 그가 직접 설계하고 만든 제이오에이치 사무실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우리는 흔히 그런 말들을 하쟎아요.‘아 카페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다.때로는 창가에서 생각에 잠기고도 싶다.그러면 일이 더 잘될텐데’.. 이런 생각만 하지 말고 정말 이런 환경에서 일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사무실을 만들었습니다.저 역시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기도 하구요.제가 생각하기엔 진짜 일하고 싶은 사무실은 일하는 것처럼 보이면 안됩니다.모순적으로 들리지만 현실은 그렇습니다.”


 창업한 지 불과 석달도 되지 않았지만 제이오에이치는 벌써 대형 고객사로부터 브랜드 디자인과 관련된 일을 맡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그는 이 일을 NHN 출신 프로그래머와 정통 디자이너,건축 설계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하고 있다.“NHN 사옥을 지을 때 제가 추구했던 디자인을 일부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너무 튀지 않고 묵직하지만 혁신의 이미지를 담고 있고,평범해 보이지만 주변의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그런 디자인.그리고 무엇보다 있고 싶고 쓰고 싶은 느낌을 주는 그런 디자인을 추구할 생각입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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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챌의 파산을 지켜보며

뉴미디어 세상 2011. 3. 14. 14:26 Posted by wonkis
국내 1세대 인터넷 벤처이자 최초의 커뮤니티 포털사이트였던 프리챌이 결국 파산했다.프리챌의 대주주인 솔본은 서울중앙지방법원 제 12파산부에서 프리챌의 파산선고를 결정했다고 지난 11일 발표했다.프리챌은 회사가 설립된지 12년 만에 문을 닫게 됐다.프리챌이 파산했다고 당장 프리챌 사이트가 문을 닫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결국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길을 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프리챌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그 동안 사라지거나 파산한 다른 사이트들에 비해 프리챌은 존재감이 남달랐다.지금의 30대가 대학 시절 가장 많이 쓰던 서비스 중 하나가 프리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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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도전으로 시작한 프리챌
프리챌을 창업한 사람은 지금 유아짱 대표를 맡고 있는 전제완 사장이다.서울대학교 경영학과 83학번인 전 사장은 1989년 삼성물산 인사팀에 입사해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전 사장은 1991년 삼성그룹의 인사정보시스템 개발 업무에 투입돼 94년까지 이 일을 맡아서 하게 된다.

 당시 그가 이 일을 맡아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인사과에서 일하던 시절 인사 업무처리가 비효율적으로 되는 것을 보고 독학으로 컴퓨터를 공부했기 때문이다.그는 4년간 이 업무를 마치고 제1회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국으로 1년간 지역전문가로 파견되기에 이르른다.40여일동안 미국 40개주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오레곤주에서 공부도 한 그는 당시 실리콘밸리에 대한 투자가 진행되던 미국의 현실에 깊은 인상을 받고 큰 자극과 도전을 받은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 3년 정도 삼성에서 더 근무했지만 대기업의 구조에서 탈피해 자유로운 생활을 동경했던 전 사장은 ‘자유와 도전’이라는 두가지 가치만 들고 미련없이 삼성을 그만뒀다.
 그가 1999년 4월 15일 자본금 5000만원으로 설립한 프리챌((주)자유와도전)은 다음,네이버 등 다른 포털이나 이미 당시 국내 최대 인터넷사이트였던 야후코리아에 비해 뒤늦게 출발했지만 확실한 차별점을 갖고 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인간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인터넷 상의 공간을 생각하면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쇼핑 섹션 바이챌, 금융 및 증권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찰닷컴, 게임업체 드림챌과 조이챌, 디자인 회사 인디챌 등 그가 프리챌 설립후 확장해 나간 사업들은 이후 인터넷기업들의 모델이 될 만큼 중요한 역할들을 했었다.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꿈이었던 전제완 사장은 프리챌을 통해 그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프리챌에서 강력한 커뮤니티를 구축한 것은 그런 그의 꿈을 위한 1단계였던 것이다. 커뮤니티를 통해 소프트웨어를 보급하고 그 플랫폼을 통해서 전 세계에서 누구나 자신들의 언어로 접속해 사용하는,그런 모델을 꿈꿨다고 한다.때문에 그는 다음이나 네이버 등 포털업체와 경쟁할 필요가 없다고 봤고,독자적인 모델을 구축하려고 애썼다.

◆프리챌 돌풍
 프리챌은 당시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젊은 층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설립 2년만에 회원 1000만명을 끌어모아 야후,다음과 함께 포털 빅3로 거론될 정도로 성장을 했다.

 소프트웨어 업체의 경영자로서 그는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으로서 유료화를 생각했던 것 같다.사용자가 최소한의 사용료를 내야 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사업자의 입장에서는 필수적인 수순이었겠지만 2002년 하반기 당시엔 엄청난 파장을 몰고왔었다.인터넷은 전부다 공짜라는 인식이 강했던 시절이었기에 프리챌의 새로운 시도가 미칠 영향에 다들 주목했던 것이다.

 주위의 우려와는 달리 40% 이상의 회원들이 유료화에도 불구하고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전 사장은 서비스의 유료화 이후 글로벌화 및 전혀 새로운 개념의 SNS,소프트웨어 제공 등으로 서비스의 선순환을 유도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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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자유와 도전
 하지만 이런 모든 과정은 2002년 12월3일 오전 전제완 사장이 주식대금 가장납입 혐의로 전격 체포되면서 모두 끝나 버렸다.전제완 사장이 구속된 이후 그가 뽑았던 당시 인터넷 업계의 최고 인재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회사 역시 주인을 잃고 표류하게 됐다.선장을 잃은 프리챌과 프리챌홀딩스 등은 창업 초기의 정신을 모두 상실하고 매각과 부도 등을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회사로 변했다.

 전제완 사장 개인 역시 그 이후 고난의 삶을 살았다.긴급체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던 가장납입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이미 그는 2년의 옥살이와 회사 부채를 개인이 떠안은 것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됐다.

 프리챌은 유료화 전환 이후 안팎으로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었다.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유료화에 동참했다고 하더라도 책임감을 갖고 이를 진두지휘할 선장이 필요했다.하지만 전제완 사장이 구속된 이후 이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2003년에 과거 새롬기술이었던 솔본에 인수됐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인수 후에도 프리챌은 적자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동영상 서비스,게임 등 새로 시도하는 서비스마다 실패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여기에 최대주주인 솔본과 프리챌 경영진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으면서 경영난이 가중됐다.지난해 프리챌 경영진은 회생절차 개시를 신청하고 소셜커머스를 위한 소셜쇼핑을 오픈하는 등 부활을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프리챌이 2003년 이후 보여준 행보는 사실 전 사장이 처음 설립할 때 내세웠던 자유와 도전과는 거리가 멀었다.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서비스를 답습하는데 그쳤고,경영진과 대주주의 계속되는 분쟁은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였다.

 프리챌은 여러 번 회생절차 개시를 신청했지만 솔본은 지난해 12월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파산신청을 했다.파산신청에 앞서 솔본은 경영상황의 악화로 보유하고 있던 프리챌의 지분 83.1%를 전량 매각하고 프리챌의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회사는 사라지고 사람은 남는다
 회사는 파산의 길을 걷게 됐지만 프리챌은 한국 인터넷산업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할 만하다.프리챌이 이룬 업적 때문이 아니라 프리챌이 배출한 인재들 때문일 것이다.프리챌에 청운의 꿈을 안고 입사했던 수백명의 젊은이들은 모두 당대의 실력파였다.그들은 프리챌이 몰락하는 과정에도 실력을 바탕으로 살아남아 지금 한국의 인터넷 산업을 이끄는 인물들로 성장했다.

 프리챌을 창업했던 전제완씨는 현재 인터넷 방송 및 전자상거래 플랫폼 서비스 업체 유아짱의 대표로 재직중이다.전제완 사장이 삼성물산 재직시 함께 머리를 맞대고 밤세워 창업 아이템을 함께 고민했던 윤태중,장규오씨는 각각 웹젠과 블루코드 등 다른 회사를 돌아 지금은 다시 전제완 사장과 만났다.두 사람은 함께 유아짱 창업 멤버가 됐다.이태신 SK커뮤니케이션즈 본부장 역시 프리챌 창업 멤버다.

 내가 블로그에서 소개한 바 있는 이진수 포도트리 대표도 프리챌 초창기 멤버고,카카오의 CTO(최고기술책임자)를 맡고 있는 이확영 이사도 프리챌 창업 공신 중 하나다.전제완 사장이 서울대를 직접 찾아가 삼고초려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조수용 전 NHN 본부장과 정욱 NHN 한게임 대표도 프리챌 초창기 멤버들이며 온라인게임 A.V.A를 만든 레드덕의 오승택 대표도 프리챌 초기 멤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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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챌 창업자인 장규오 (왼쪽부터)유아짱 상무,전제완 대표,윤태중 부사장>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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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이라고 하면 아직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젊은이가 새로운 종류의 서비스나 상품을 들고 나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도전한다는 느낌을 준다.아마 실제 정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아짱의 전제완 사장은 스타트업이나 스타트업 기업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일단 그는 꽤나 유명하다.프리챌의 창업자로서 이미 10년전부터 유명세를 떨쳤던 인물이다.수백억원을 투자해 한때 한국의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사이트를 만들었던 인물인데다가 나이도 제법 많다.이래저래 흔히 생각하는 스타트업 창업자라는 이미지와는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 사장을 한국의 대표적인 스타트업 기업인으로 꼽았다.그가 여전히 도전의식으로 충만해 있다는 점이다.나이는 들었을지 몰라도 과거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을 받게 했던 명석함과 근면함은 새 출발에 대한 의지와 만나 더욱 강해졌다.과거의 영광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그는 완전히 새 출발을 했다.돈도 없고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마치 대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이가 창업하듯 황무지에서 시작했다.이렇게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스타트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머리말이 좀 길었지만 이는 전제완 사장과 그간 나눴던 대화의 내용이 나의 짧은 글솜씨로 담기에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전 사장과 만나 다양한 대화를 나눴다.때로는 그의 인생관을 듣기도 하고 한때 성공했다가 몰락해버린 프리챌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을 듣기도 했다.자유와 도전을 사랑했고 자유와 도전에 청춘을 바치고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고 승부를 펼쳤던 그의 스토리를 듣노라면 숱한 밤을 지세워도 아마 모자르리라.이 블로그에 올리는 짧은 글 역시 그의 아이디어 중 100분의 1을 표현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그와 나눴던 대화 중 최근의 서비스 진행과 관련된 내용 일부를 정리했다.그가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의 블로그에서 접할 수 있다.내가 과거 썼던 기사블로그 글을 참고하셔도 좋을 것 같다.

-지난해 복귀한 뒤로 대외 활동은 많이 안하시는 것 같다.
 “요즘 서비스를 점검하고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기 위해 기획하고 개발하는데 주력하고 있다.조용히 지내는 편이다.”

-최근 유아짱의 방송 위젯 짱라이브의 인기가 높다고 들었다.
 “짱라이브를 플레이하는 횟수가 3월말 2만여건에서 4월25일 현재 40만건을 넘어설 정도로 급격히 증가했다.20배가 늘어난 셈이다.이 횟수가 150만에서 200만 정도 되면 손익분기점(Break Even Point)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과거 프리챌과 비교해보면 어떤가.
 “당시엔 국내에서 인터넷이 막 활성화되던 시기였다.따라서 시대적인 차이점은 존재한다.하지만 단순 수치만 놓고 비교해보면 그때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것 같다.프리챌때는 300만명 방문자수를 확보하는데 2년 가까이 걸렸다.하지만 유아짱의 경우 올초부터 본격적인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석달만에 40만을 넘어섰고 6개월이 되는 시점에 200만을 예상하고 있다.프리챌 시절보다 돈은 10분의 1도 쓰질 않았지만 훨씬 성장 속도는 빠르다.”

-왜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는지 자체적으로 분석한 게 있나
 “현재까지 입소문의 위력으로 파악하고 있다.하나둘씩 사용자들이 짱라이브를 써보면서 쉽게 쓰고 전파가 쉽다는 것을 알고 확산되는 것 같다.과거 프리챌을 했던 시절보다 지금은 인터넷에서의 확산이 더욱 활발하기 때문에 사용자들의 평이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초기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아직은 적자인 것 같은데.
 “초기이니 그렇지만 지금 속도로 보면 이르면 8월부터 흑자전환도 가능하다고 본다.”

-유아짱의 짱라이브는 누구나 쉽게 방송을 할 수 있다는 개념인데,유사한 서비스가 최근엔 국내외에서 나오고 있다.짱라이브의 차별화된 점은 무엇인가.
 “짱라이브는 별다른 다운로드나 인스톨과정 없이 위젯 또는 플레이어 스킨을 통해,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쉽게 내 블로그 및 내 까페에서 직접 방송을 하거나 타 방송자의 방송을 중계방송할 수 있는 플래쉬 기반의 방송 서비스다.타인의 방송국을 중계할 수 있는 네트워크 방송이 가능하고,여러 개의 위젯을 활용할 경우 방송 채널 및 프로그램 편성도 가능하다.방송자가 원하는 공간,예를 들어 블로그,카페,개인 홈페이지 등에서도 방송이 가능하다.현재 대부분의 방송 관련 모델은 사용자를 자사의 사이트로 모아서 트래픽 기반의 광고수익이나 소액의 유료서비스 수익을 추구하는 ‘포털형 방송’을 지향하는 반면,짱라이브는 최초 ‘위젯퍼가기’ 이후에는 짱라이브 사이트를 방문하지 않아도 방송자가 원하는 곳에서 방송을 할 수 있는 ‘분산형 방송’을 지향하고 있다.”

-국내에서 크게 마케팅 등을 안하는 것 같다.성장 속도에 비하면..
 “일단 사용자가 어느 정도 확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좋은 방송을 많이 하고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도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로 가려고 하기 때문에 돈을 써서 알리는 것보다는 입소문 등을 통해 열혈 유저가 많아지는 것을 노리고 있다.현재로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국내 동영상 업체들과의 경쟁 구도는 어떻게 되나.
 “그런 것은 별로 고려하고 있지 않다.국내에서 어느 정도 자리는 잡는 연말께부터 해외로 진출하려고 한다.12월에 영국에서부터 테스트를 시작한다.글로벌 방송 위젯 플랫폼을 지향해서 시작했기 때문에 국내 시장에만 머무를 생각은 전혀 없다.예전 프리챌때 아쉬웠던 부분도 본격적으로 날개를 펴기 전에 꺾였다는 점이다.이번엔 몸집을 가볍게 해서 일찌감치 해외에 진출,글로벌 무대에서 승부를 볼 생각이다.영국을 시작으로 영어권 국가에서 우선적으로 서비스를 하고 이어 아시아 등에도 진출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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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벤처 2.0 시대

뉴미디어 세상 2009. 6. 19. 15:38 Posted by wonkis

한국 인터넷 산업에서 최근 두드러진 점은 1990년대 중후반 인터넷 벤처를 창업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인물들이나 이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미국에서 2005년을 전후해 웹2.0 기업들이 본격화되면서 제2의 벤처붐이 일었다면 웹2.0기업의 활약이나 산업에서의 파급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혹은 한국에서는 애시당초 웹2.0 성격이 상당히 반영된 1세대 기업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나는 이것을 한국 인터넷 산업에서도 2기가 시작됐다고 표현하고 싶다.또는 유행처럼 일었던 말을 활용한다면 인터넷 벤처 2.0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굳이 한국에서 웹 2.0보다 1세대들의 복귀 또는 재도전을 2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들이 한국 인터넷 산업에서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는 점과 함께 이들이 시도하는 서비스들의 동향,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움직임이 한국적인 벤처 창업 현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벤처 1세대들의 새로운 도전.
이런 경향은 2007년부터 일찌감치 시작됐다.NHN의 창업자이자 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벤처사업가로 손꼽히는 김범수 사장이 그해 여름 NHN USA 사장을 그만두고 공식적인 모든 직함을 내놓고 다시 야인으로 돌아간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김범수 사장은 작년에 위지아이닷컴을 오픈하면서 벤처 창업 일선에 복귀했다.
 나성균 사장과 함께 네오위즈를 만들었던 장병규 사장이 비슷한 시기 움직인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장병규 사장 역시 게임개발사인 블루홀스튜디오를 만들고 벤처 창업 일선에 다시 뛰어들었다.장병규 사장은 이미 그 이전에 첫눈이라는 매우 실험적인 검색 벤처를 시도한 바 있으니 그는 공식적으로만 3번째 창업을 하게 되는 셈이다.
 한국 인터넷 산업의 대부로도 불리던 허진호 전 인터넷기업협회 회장도 일선에 복귀했다.그는 물론 창업이라는 형태를 띄진 않았지만 인터넷산업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왔기에 그의 움직임도 주목되고 있다.
 1999년 프리챌을 창업해 한국 인터넷 벤처 1세대 인물에 속하는 전제완 사장도 최근 유아짱을 창업하면서 일선에 복귀했다.전제완 사장은 신개념의 쇼핑몰이란 컨셉으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옥션 창업자였던 이준희 사장은 하루에 딱 한가지 물품만 파는 원어데이라는 쇼핑몰로 이 분야에 다시 도전하고 있다. 싸이월드 창업자로 잘 알려진 형용준 사장은 최근 신개념의 오디션 사이트 스토리투필름닷컴(story2film.com)을 오픈,눈길을 끌기도 했다. 또 이와는 조금 사례가 다르지만 안영경 핸디소프트 사장은 지난 해 4년여만에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왜 1세대의 복귀인가.
1세대들 복귀의 표면적인 이유는 간단하다.새로운 시도를 해보기 위해서다.그리고 아주 실험적인 일을 하기엔 기존의 조직은 덩치가 너무 크다.이들의 DNA 자체가 벤처 DNA라는 설도 있지만,Who knows? (어떤 이들은 몸속에 벤처의 피가 흐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공동 창업자 또는 자신이 만든 조직과의 갈등 때문인 경우도 있다.이 역시 기존의 조직에서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하기가 어려워진 케이스다.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안정된 곳을 뛰쳐나와 새로운 시도를 하는 케이스라면 정말 이들이야말로 일찌기 경제학자 케인스가 언급한 야수와도 같은 기업가 본능을 가진 인물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두에서 1세대들의 복귀를 매우 한국적인 상황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이는 새로운 벤처 기업 발굴,지원에 인색한(혹자는 전혀 없다고도 한다) 한국적인 벤처 투자 상황에 비춰 볼때 기존의 성공을 통해 자금력을 갖춘 이들을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벤처 창업을 하는 사례 자체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악화되는 벤처 창업 환경이 1세대들의 복귀를 이끌 수 밖에 없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10년전과 다른 점? 같은 점?
사람은 같다.하지만 그들의 상황은 전혀 달라졌다.이들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성공의 경험이다.그리고 이것은 바로 가장 큰 독이 될 수도 있다.어쨋든 이들의 성공 경험은 일찌기 보기 힘든 매우 소중한 자산이다.이들의 움직임이 항상 주목되는 이유다.
성공 경험만 있는 게 아니다.일부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 과거의 성공을 기반으로 자금 기반을 갖추고 있다.외부에서 돈을 끌어올 필요도 없고,혹 그런 시도를 하다가도 여의치 않으면 그냥 자기 돈을 투자해서 하면 된다는 거다.
 돈도 있고 경험도 있지만,이게 다는 아니다.이들은 여전히 아이디어로 반짝인다.김범수,전제완,장병규,이찬진 등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은 팔팔한 20대들 못지 않은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로 의욕에 불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새로운 시도는 또 다른 대박을 낳을 수 있을까? 아쉽게도 그건 아무도 모른다.아이디어와 돈,그리고 경험의 3박자를 모두 갖췄지만 이것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불확실한 시장의 힘이기도 하다.
 이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뭘까? 사람이다.그러고보면 모든 것을 다 갖춘 듯 보여도 역시 사업은 혼자 할 수 있는게 아니다.정말 적재 적소의 쓸만한 인물을 찾기란 그들이 창업하던 10년,15년 전보다 더 힘들어졌다.왜? 이제는 이 분야에도 NHN,엔씨소프트,다음커뮤니케이션과 같은 안정된 직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인재들을 흡수해간다.인력 시장에서의 배고프고 가난하던 시절은 끝났는지도 모른다.때문에 이들 중 상당수는 눈을 해외로 돌리고 있다. 이들의 두번째(혹은 세,네번째) 시도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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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챌 창업 멤버들의 행적

뉴미디어 세상 2009. 5. 1. 23:34 Posted by wonkis

지난해 초 프리챌 창업자 전제완 사장의 소식을 접하게 된 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당시 그와 함께 프리챌을 창업했던 인물들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전제완 사장이 2002년 12월 3일 급작스럽게 구속된 이후 아주 짧은 시간에 전제완 사장이 만든 프리챌이란 기업은 해체돼버렸다.전 사장의 표현대로 200명이 넘는 직원들 중 2명을 제외하고 모두 회사를 나갔고 창업자는 한명도 프리챌에 남아 있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됐다.1999년 7월 전제완 사장의 집에 모여 (주)자유와 도전을 만들었던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또 2000년 1월 최초로 서비스를 오픈할 당시 주축이 됐던 30여명의 준 창업 멤버들은 어디 있을까?

아직 절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들의 행적을 보는 것은 한국 인터넷을 인물 중심으로 보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이들 중 상당수가 그 뒤로도 업계에 남아 계속 활약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제완 사장과 일부 창업멤버들에 따르면 1999년 전제완 사장 집에서 모여서 프리챌의 최초 사명인 (주)자유와 도전을 만들기로 결의한 사람은 모두 7명이라고 한다.전제완,윤태중,김용진,이태신,예덕호,이정수,김정준.이들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조인한 인물들로는 문규동,이확영,변창원,이상원,서해진 등이 있다.약간씩 엇갈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아주 초창기엔 이들 12명이 중심이 됐던 것 같다.

전제완 사장의 행적은 이미 여러 차례 썼으니 생략하기로 하겠다.이 중 가장 특이한 인물은 예덕호씨인데,이 분은 지금은 선교사가 되어 해외에 나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김용진씨 역시 업계를 떠난 인물인데 이 분은 지금 동화마루라는 기업의 사장을 맡고 있다.

두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 업계에 남아 있다.이태신 프리챌 부사장은 프리챌에서도 CTO등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인물로서 지금은 SK에 인수된 코난테크놀로지의 전략기획실장을 맡았다.김정준씨는 넥슨에서 일하고 있고 윤태중 이사는 전제완 사장이 구속되고 새롬기술에 인수된 프리챌홀딩스가 부도처리되는 과정을 보면서 회사를 나와 계속해서 전제완 사장과 함께 하고 있다.지금은 전제완 사장이 새로 창업한 유아짱의 이사로 일하고 있다.이정수씨에 대해선 분명치 않은데,연대 전산과를 나와 삼성SDS에서 일하다 프리챌 창업의 동지가 된 이 분 역시 업계에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창업 멤버 중 몇몇은 NHN으로 갔다.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나온 서해진씨는 지금 NHN에서 일하고 있고 문규동씨 역시 NHN에서 일하고 있다.변창원씨 역시 NHN으로 자리를 옮겼고,전제완 사장이 최고의 실력자라고 극찬해 마지 않았던 이확영씨는 NHN으로 일찌감치 자리를 옮겨 재작년까지 NHN재팬에서 일하다 당시 김범수 NHN 창업자가 NHN을 떠나 아이위랩을 새로 창업,위지아라는 일종의 집단 지성 사이트를 오픈하는데 참여해 맹활약하고 있다.이확영씨는 아이위랩의 CTO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000년 1월 프리챌이 사이트를 오픈할 당시에는 인원이 이보다 훨씬 더 많아진 상태였는데(프리챌은 급속도로 직원이 늘어난 회사였다) 앞에 언급한 인물들과 2000년 1월 당시 새로 합류한 인재들의 현재 모습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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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완 프리챌 창업자가 전하는 2002년-2003년 프리챌 매각 비화.이전 글인 '프리챌이 SK에 매각됐다면(1)'에 이어지는 글입니다.이 글은 프리챌 매각을 시도해왔던 전제완 사장이 직접 밝힌 내용입니다.SK 등 관련된 분들의 반론이나,보충 설명 등을 모두 환영합니다.>


-구속되고 난 뒤엔 회사를 매각하는 일도 타격을 받았을 텐데
 프리챌 인수에 관심이 있었던 기업들이 내가 구속된 이후 전부 프리챌 인수를 포기했다.그러면서 회사의 자금난이 가중돼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얘기를 당시 프리챌의 오건석회장, 우지형사장, 이상열사장 등 접견 온 사람들로부터 들었다.

-그러면 누가 딜을 책임지고 했나.
 당시 구속후 모든 실무적인 딜은 우지형사장과 이상열사장이 진행했고 오건석회장은 딜에 직접적인 관여 없이 최종 결과만 보고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출소후에 SK딜을 보류하고 새롬과의 딜을 선택하게 된 것도 우지형사장이 오건석회장에게 SK와 새롬의 매각금액이 동일하고-실제로는 100억차이가 나는데-전제완이의 잔여부채를 상여처리함으로써 탕감하겠다는 홍기태회장의 방침과 새롬측이 프리챌홀딩스 메모시재 25.2억으로 고발한다는 협박 등을 받고 우지형사장의 잘못된 보고로 인해 결국 새롬딜을 선택하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지형사장은 당시 새롬기술의 대표이사였던 홍기태사장과는 공군장교 동기였고 삼성그룹 입사동기란 인간적 친분을 바탕으로 프리챌을 새롬에 매각하는 딜을 진행해 왔다는 것을 나는 출소 후에 알게 됐다 그런데 그는 새롬과의 딜을 진행하게 되면서 당시 구속된 나에게는 다른 어떤 딜도 성사가 되지 않고 오직 새롬만 프리챌인수에 관심이 있다고 보고를 했다.
 
-그럼 실제로 당시에도 다른 딜이 진행되고 있었던 건가?
 2002년 12월 24일 당시 내 변호인인이였던 김상연변호사(서정법무법인)가 찾아와 새롬딜이 성사가 되었고 여러가지 자금 사정상 처리할 서류작업이 많으므로 새롬과의 딜을 위해 프리챌 지분에 대한 인수의향서,금전소비대차,질권설정계약 등에 대한 위임서를 요구했다.당시 새롬과의 딜 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아무런 의심없이 당연히 위임서에 싸인을 했다.

그런데 당시 내 친구 한 명이 율촌의 윤세리변호사로부터 SK가 프리챌 인수의 뜻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이에 당시 프리챌홀딩스의 사외이사였던 조명현 교수(고려대 경영학과)가 나서 SK측의 서진우 사장 (와이더댄닷컴),가종현 부사장,전주호 상무 그리고 윤세리 변호사 등과 함께 하이야트호텔에서 오후 3시경에 만나 오후 9시까지 프리챌 인수에 관한 의견을 조율했다.

-인수 합의가 이뤄졌나
 당시 프리챌의 재무담당이었던 이성복상무로부터 내 부채가 총 200억이라고 들었던 조명현 교수 등은 SK가 프리챌을  인수하겠다는 뜻을 확인하고 SK측이 프리챌 및 드림챌,(주)현찰 등 내 지분을 150억에 인수하여 프리챌에 있던 내 개인 명의의 대여금을 전액 다 상환하고 ㈜프리챌홀딩스의 내 지분을 담보로 50억의 대출을 발생시켜 전제완 개인의 외부 부채를 상환한다는 구조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SK와 프리챌의 본협상은 2002년 12월 26일 오전 3시에 합의에 도달,㈜새롬기술보다 좋은 조건의 SK딜을 당시 참석한 프리챌 및 프리챌홀딩스 관계자들이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그 자리에서 MOU를 맺기로 참석자 전원이 합의하였으나,(이상열사장이 작성한 일지에 보면 SK와 새롬과의 딜규모가 50%차이가 났으며 당연히 SK딜을 하겠다고 명확히 나와 있다) 우지형사장이 이렇게 중요한 딜을 맑은 정신으로 아침에 계약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여 집에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같은 날 오전 9시에 MOU 싸인을 위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 후 전원이 다 일단 귀가했다.헤어진 후 서진우사장은 최태원회장에게 프리챌인수에 대한 보고를 한 것으로 들었으며 우지형사장은 모처에서 홍기태사장을 만난 것으로 나는 들었다.

-그럼 홍기태 사장에게 다 보고가 됐다는 건가?
오전에 서진우 사장 등 일행이 프리챌을 방문,몇시간 전에 합의한대로 SK와 프리챌이 MOU 싸인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태도를 바꾼 우지형 사장이 SK딜을 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서진우 사장은 결국 최종 의사결정자인 전제완사장의 결정을 통해 딜을 진행할 수 밖에 없게 됐다고 한다.

 서진우 사장의 상황 설명을 들은 프리챌홀딩스 사외이사였던 조명현 교수,임동욱 박사 등은 나를 구치소로 방문해 SK딜을 설명하고 최종 컨펌을 받기로 하고 특별 면회 신청을 해 왔다.그래서 2002년 12월 27일 오후 3시에 만났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새롬측의 홍기태 대표이사는 첫째, 딜과정에서 알게된 프리챌홀딩스 메모시재 25.2억에 대해 전제완사장 및 프리챌홀딩스의 등기이사였던 오건석회장,우지형사장,이상열사장 및 사외이사까지 전부 검찰에 고발하겠다고 했다.둘째 당초 인수하지 않기로 하였던 ㈜현찰닷컴도 추가로 인수해 인수금액을 일정 금액 상향하여 SK딜과의 차이를 줄여주겠다고 제의하였으며,셋째 그래도 전제완 사장의 부채가 남는다면 그것은 상여처리하여 전제완 사장의 프리챌 부채를 없애주면 결과적으로 전제완의 부채가 전부 소멸되므로 SK와의 딜과의 규모가 결국 같게 된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후 상여처리 등은 전혀 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난 프리챌에 100억이 넘는 부채가 남게 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다.그리고 부채를 상환하지 못해 주주에게 손해를 끼친 부분등이 인정되어 2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2년간 복역후 2004년 11월 30일 출소하게 됐다.

-SK와의 딜이 막판에 성사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나?
 내가 이미 새롬과의 MOU를 위임하는 싸인을 했고 그를 위해 대표이사에서 사임까지 했기 때문에,더욱이 당시 막 감옥에 와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밖에서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몰라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무엇보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아무도 감옥에 있는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즉 당시 상황은 나에게 얘기해주지 않으면서 나를 배제하고 일이 진행됐던 것이다.

-어쨋든 SK과의 딜은 성사되지 못했다.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는 건가?
 무엇보다 SK와 새롬기술은 프리챌 인수에 있어서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SK는 프리챌에 자금을 투자하고 키워서 활용할 생각이었지만 새롬기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그 이후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프리챌이 새롬에 인수된 직후 프리챌의 모든 임직원이 2명을 남고 모두 퇴직했다.관계회사를 포함해 200명이 넘는 임직원이 불과 2년만에 모두 퇴직했다.나는 최고의 인재를 가려 뽑았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실제 이들은 현재 네이버,구글,다음,네이트,CJ 등 각 정보통신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프리챌에 100억과 이자포함하여 140억에 상당하는 부채가 남아있게 됐고 2년간의 실형을 선고 받게 됐다.새롬기술은 나의 이런 부채를 감안해 줄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정당한 가격에 인수가 돠었다면 이 자금은 전부 프리챌의 제 대여금 상환이으로 회수되어 프리챌 주주의 이익이 보호됐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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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챌이 SK에 매각됐다면?(1)

뉴미디어 세상 2009. 4. 22. 16:20 Posted by wonkis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가정을 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허무한 일이다.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그런 가정을 많이 하곤 한다.그러면서 과거를 재구성하기도 하고,역사와 현실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도 하게 된다.새롭게 가정하게 되는 과거의 그 사실이 자기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면,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일이었다면 한번쯤 그런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프리챌을 창업했고 지금은 유아짱으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는 전제완 사장이 바로 그런 케이스다.그가 감옥에 있던 중 프리챌과 SK사이에 진행되던 매각 딜은 무산되고 프리챌은 결국 새롬기술에 팔리게된다.전 사장은 프리챌이 SK에 매각됐다면 부채 문제도 해결되고 회사가 지금의 상황까지 이르진 않았을 것이며 SK의 싸이월드 인수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물론 이것은 그의 ‘가정’이자 ‘주장’이지만,프리챌의 창업자로서 대기업의 투자를 추진해왔던 그의 말을 전혀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무시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런 가정 자체가 인터넷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것 같다.메신저로 그와 오랜 시간에 걸쳐 나눴던 대화들을 재구성해봤다.
(참고로 전 사장이 창업한 프리챌의 지난 이야기와 전 사장의 현재 스토리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그가 최근 오픈한 블로그 를 직접 방문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수 있겠지만 구속되던 당시 얘기를 좀 들었으면 좋겠다.
 2002년 12월 3일 주금가장납입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한양대에 강의가 있어 오전 7시에 옷을 입고 있었는데,갑자기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자 "서울지검 OOO호 검사실에서 나왔습니다. 전제완씨는 특정경제가중처벌법 위반으로 긴급체포하겠습니다." 라는 소릴 들었다.그야말로 아침에 일어나보니 감옥이었다.

-전혀 아무런 조짐이 없었나?
직전까지 나는 전혀 그런 조짐을 알지도 못했다.가장납입 부분은 결국 무죄 판결을 받게 됐지만 나중에 문제가 됐던 것은 프리챌 대표로 있을 당시 대표이사로서 회사의 부채를 대신 지고 있던 부분이었다.내가 구속되고 나서 새롬과의 딜이 진행되면서 대표이사가 바뀌고 대표이사에서 물러나는 과정이 있었는데,상식적으로 그렇게 되면 대표이사 명의로 지고 있던 회사의 부채 역시 새로운 대표에게로 옮겨가야 하는데 나는 구속중이라 이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나에게 이런 과정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출소하고 나서 정말 분통이 터졌지만 결국은 모든 위험을 관리하지 못했던 나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출소하고 나서 공백이 좀 있었던 것 같다.그 기간중 어떤 일이 있었나?
 2004년 12월 출소한 뒤에도 내가 갖고 있던 가장 큰 의문은 2002년 당시 내가 왜 그렇게 갑자기 구속됐고 회사가 그 지경에 이르게 됐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거였다.그래서 출소한 뒤 내가 긴급 체포되던 시점을 전후로 해 어떤 일이 있었고 그 뒤로 회사가 어떻게 됐는지를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또 한가지는 내가 지고 있던 240억원의 부채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서 이것을 해결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부채는 해결됐나.
 2월20일자로 신분이 회복됐다.법원에 파산신고하고 면책 결정을 받기까지 1년이 걸렸다.세금문제도 있었는데 그것이 해결되는 시기가 올해 2월20일이었다.5년 동안 이것 때문에 계속 고생을 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한 개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여러번 죽으려고도 했다.한동안 내 친구 하나는 아침마다 전화해서 내가 살아있는지 확인을 하곤 했다.하지만 기업인으로서 내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서 다시 나서게 됐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파악이 좀 됐나.
 나로선 철저하게 당했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내가 파악한 것은 프리챌이란 회사를 헐값에 매각하고 그 과정을 통해 이익을 챙기려는 당시 프리챌 이성복 상무(CFO)와 일부 경영진,그리고 새롬기술에 철저하게 당했다는 거다.

-좀 더 자세히 들어봐야 할 것 같다.
2002년 12월 3일 구속되기 전까지 같은 해 9월부터 KT와 프리챌 매각관련 딜을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KT와 딜을 하는 과정에서 SK그룹과도 인수협상을 진행했었다.
 2002년11월 28일 이상열사장(프리챌부사장 및 드림챌대표이사)과 함께 저녁 늦게 라마다르네상스 근처에서 와이더댄닷컴사장이었던 서진우사장(현 SK텔레콤 전무)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프리챌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서는 KT와 SK텔레콤과 같은 기간통신 사업자에게 프리챌을  매각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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