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월드(www.dadaworlds.com)라는 게 있었다. 1999년 한국에서 출시된 이 서비스는 가상세계를 구현했다. ‘세계 최초의 3D 가상세계 서비스’로 해외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다다월드는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세계와 유사한 모습으로 가상의 공간을 만들었다. 이 가상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물건을 팔 수도 있고, 모여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으며, 자신을 치장하거나 사람들을 사귈 수도 있었다. 다다월드는 이후 등장한 세컨드라이프에 비해 컨셉트 측면에서 훨씬 먼저 개발됐고 실제로 서비스를 했다. 

<2000년 당시 다다월드의 모습. 삼성증권이 입점해 있었다.>

 다다월드를 만든 사람은 광운대 건축공학과 신유진 교수. 신 교수는 미국에서 들여온 3차원 채팅 프로그램에 건축 기술을 추가해 사이버 월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가상공간에 현실세계를 옮겨 실제로 생활과 상거래가 이뤄지게 하는 게 신 교수의 구상이었다. 그는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생각다른세상이란 회사를 세워 대표를 맡았다. 다다월드는 ‘정보기술(IT) 붐’에 힘입어 1년여 만에 회원(시민) 10만명을 달성했다. 2000년에는 400개 점포를 분양했는데 눈 깜짝할 새 다 나갔다. 분양가는 평당 10만원. 10평짜리는 100만원, 200평짜리는 200만원을 받았다. 삼성증권 외환카드 성도어패럴 등 대기업도 앞다퉈 사무실을 냈다. 한양대병원은 분원을 열어 가상세계에서 진료를 시작했고, 서울경찰청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사이버 파출소 설치를 추진했다.

 다다월드를 통해 사이버영토를 확장하겠다던 신 교수의 꿈이 무산된 것은 ‘IT 버블’이 꺼졌기 때문. 분위기가 급랭하자 계약을 했던 사업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입주를 포기했다. 상담도 다 끊겼다. 먼저 입주해 사업을 시작한 사업자들도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다다월드 사이버 세상은 한순간 폐허로 변했다. 학교와 회사를 오가며 바쁘게 뛰어다녔던 신 교수는 교단으로 돌아가야 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그가 다다월드의 서비스를 재개하기 위해 움직이던 2007년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터23이란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다다월드는 가상의 세계였지만 터23은 보다 현실적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자 했다. 하지만 터23 역시 뜻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접어야했다. 그리고 다시 6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는 여전했다. 가상세계에 대한 꿈을 버렸거나, 잊고 있지도 않았다. 공교롭게도 페이스북이 가상세계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예고한 시점이었다. 세계적인 기업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선견지명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다시 옛날 얘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선, 과거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다다월드는 왜 도중에 좌초됐을까.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컨드라이프도 결국 몰락하게 된 이유는 뭘까. 그리고 그는 왜 아직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다다월드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그 당시 투자를 받기 위해 벤처캐피털을 만났었어요. 처음엔 주당 2만원에 얘기가 오갔지만 나중엔 20만원 얘기가 나올 정도로 기업 가치가 크게 올랐었죠. 하지만 그 순간 벤처거품이 꺼졌고 투자를 하겠다는 곳이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그렇게 한 순간에 모든 분위기가 변할 줄 꿈에도 몰랐던거죠. 투자를 받아야 할 시점에 투자를 못 받으니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질 못했고, 오래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신 교수의 설명이다.

 세컨드라이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떨까. 세컨드라이프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신 교수 역시 터23을 준비했었다. 다다월드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뜻대로 안됐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세컨드라이프마저 어려움에 빠졌다.

<세컨드라이프>

 “세컨드라이프도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마저 들더라구요. 가상세계는 역시 안되는 걸까. 어디가서 가상세계의 ‘가’자도 꺼내기 힘든 상황이 됐죠.”

 왜 안되는 걸까.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가상의 세계라는 것을 억지로 만드는 것에 집착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냥 사람들이 살아가고 뭔가를 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사람들이 모이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세계가 형성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에 이르른 그는 ‘사람들을 모으게 하는 동인이 뭘까’에 생각이 미쳤다.  

 “어떤 경제적 이익이 있거나, 명예를 얻거나, 시간가는 줄 모르게 즐겁거나 하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까요. SNS는 명예나 소통의 욕구로, 게임은 재미있으니까 사람들을 끌어당기죠. 그런데 세컨드라이나 다다월드의 경우 정체성이 애매했던 것 같아요. 소통을 하기는 어렵고, 시간가는 줄 모르게 즐겁다고 하기엔 게임보다는 훨씬 그런 요소가 약했구요. 결국 게임의 외양을 하고 있는데 게임보다 재미가 덜하고 게임보다 퀄러티가 떨어졌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그가 생각한 것은 경제적 이익을 얻게 하자는 것. 그는 이것을 ‘소셜네트워크마켓(SNM)’이라고 이름붙였다.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서 물건을 팔 수 있고 이로 인해 직접 이익을 얻게 하자는 게 그의 구상. 

 자기가 갖고 있는 중고 물품을 판매할 수도 있고 중소기업이 만든 물건을 판매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도 있다.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물건을 팔게 하면 이를 활용하기 위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인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물론 여기엔 판매자 뿐 아니라 추천만 해도 리워드를 받게 해 주는 시스템을 도입할 계획이다. 누구나 물건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오픈마켓의 가상세계 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네트워크를 극대화한다는 점, 그리고 추천만 해도 리워드를 받아 이를 통해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물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선 온라인 다단계 아니냐는 의혹을 극복해야 한다. 

 그의 새로운 구상은 과연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까. 사실 그는 1999년부터 같은 생각을 해 왔다.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였을 뿐이다. 그가 그 당시에 얼마나 앞선 생각을 하고 이것을 실현했는지는, 이어진 세컨드라이프나 싸이월드, 페이스북 등의 행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다월드나 세컨드라이프가 실패로 귀결됐던 것은, 결국 이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선 게임의 요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인데 게임의 요소에 의존할수록 점점 현실과 괴리된다는 거였다. 가상세계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는 생명력을 오래 가져갈 수 없다는 게 그가 세컨드라이프의 실패를 보면서 배운 점이라고 한다. 

 물론 실패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가상세계에서 제2의 삶을 계속 영위하고픈 마음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도 물론 원인이다. 다다월드를 만들었던 신 교수는 그래서 또 다른 대안을 찾고 있다. 그는 결국 사람들이 현실에서 살아가듯이 가상세계에서도 결국 제2의 삶을 살아갈 것이란 점을 굳게 믿고 있다. 다만 아직 그럴 만한 환경이 구축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만한 강력한 유인책이 없었을 따름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신 교수는 “억지로 가상 세계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들어와 살으라고 할 게 아니라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게 하면 너도나도 들어오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우선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이것을 통해 가상세계가 하나 둘 씩 만들어져 가는, 그런 방법을 이번에는 택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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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창업하셨습니까?”

간단한 질문이지만, 성공한 창업가를 만나 누구라도 가장 처음에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질문을 숱하게 던졌고 성공한 기업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 바로 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일 것이다.

 ‘어떻게 창업하셨습니까’라는 제목의 책은 이처럼 창업가들에게 듣고 싶은 핵심적인 질문을 주제로 출간됐다. 현재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들이, 그것도 창업을 꿈꾸고 있는 젊은이들이 직접 성공한 창업가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오가는 대화를 녹취록을 풀듯이 써내려갔다. 권도균 이니시스 창업자,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 손주은 메가스터디 창업자, 장병규 네오위즈 창업자 등 창업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만나고 싶어할만한 8명의 성공한 벤처기업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최대한 현장감과 자신들의 궁금함 그리고 그것이 해소되는 과정을 드러냈다. 주제 뿐 아니라 풀어나가는 방식도 흥미롭다. 어떻게 대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한 마음에 이들을 만났다.

<'어떻게 창업하셨습니까'의 공동 저자들. 왼쪽부터 이상호, 김준호, 최우정>

◆답답함을 풀고 싶다

서울대 법학과 05학번인 김준호 군은 책의 출발점이 된 질문을 던지고, 이 작업을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법학과 학생으로는 매우 특이하게 컴퓨터공학을 부전공으로 택했고 컴퓨터와 관련된 공부를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서울대 벤처동아리인 서울대 학생벤처네트워크(SNU SV) 활동도 했다. 

 그가 처음부터 책을 써야겠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창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막막하더라구요. 제가 엔지니어가 아니다보니 더욱 그랬구요.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답답했죠. 대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부터 하기 시작한 거구요. 창업과 관련해 저 자신의 답답함을 풀어보겠다는 게 주된 목적이었죠. ”

 원래 그는 일단 대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 다음 이를 동아리 게시판에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책으로 내도 되지 않겠냐’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듣고 마음을 바꿨다. 

 답답함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대가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기록으로까지 남겨보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대부분은 그런 답답함을 안고 있어도 그냥 넘기기 때문이다. 답답함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남다른 경험에서 오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2011년에 MIT(메사추세츠공과대학)가 주최한 글로벌스타트업워크샵(GSW)이 있었는데 여기서 제가 연사 섭외하는 일을 맡았어요. 그때 황창규, 이재웅 등 성공한 기업가나 벤처기업인 등을 섭외해 보면서 인터뷰를 하는 것도 할 만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역시 무슨 계기가 있겠지 싶었다.

 하여간 이런 경험을 한 덕에 그는 자신의 창업의 궁금증, 더 나아가 창업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가질 만한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8명이 모이다

사람을 모으기 위해 김준호군은 벤처동아리 게시판에 함께 인터뷰하는 작업을 할 사람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깃발들고, ‘일을 시작할테니 관심있는 사람은 모두 모여라!’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까다롭게 골랐다. 아무래도 그가 갖고 있는 그런 문제의식과 비슷한 문제의식, 아니 유사한 관심사가 있어야 함께 일을 해나가면서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래서 그는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면접을 실시했다!

 “면접을 하면서 한가지 공통된 질문을 던졌어요. ‘창업을 한다면, 누구와 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할 수 있는 사람과 같이 이 일을 해보자고 마음먹은 거죠.”

 그렇게 해서 김준호를 포함해 총 8명이 모이게 됐다. 이 중 6명은 서울대 학생벤처네트워크 동아리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등 서울대생이고 나머지 2명은 연세대, 고려대 재학생이었다. 

 이들을 만났을 때 공동 저자 중 2명이 함께 나왔다. 연세대 화학공학과 09학번 이상호는 연세대학교 벤처동아리 활동을 시작하면서(2009년) 창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이 개발자로 변신을 꾀해야한다는 생각을 한편 하면서 창업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김준호가 올린 모집 공고를 보고, ‘창업을 하고 싶어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주는 기획이다’라고 판단, 응모를 했고 함께 일을 하게 됐다고 한다. 

 2012년 SNUSV 동아리 부회장을 맡았던 최우정은 서울대 디자인 08학번. 그 역시 쟁쟁한 학교 선배들의 창업 스토리를 보면서 창업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더 알고 싶었다. 김준호가 올린 내용은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할 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래서 그도 합류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꿈이 생겼다

대부분 책을 쓴다는 일 자체가 처음인 대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일을 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우선,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2012년 2월에 팀원을 모집했고, 바로 인터뷰 작업에 들어갔는데, 2013년 2월에야 마지막 인터뷰가 끝났죠. 그런데 그 뒤로 책이 나오는데는 다시 1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더라구요.” 리더격인 김준호의 설명.

 이들을 만난 자리에서 저자들로부터 직접 책을 받았다. 디자인이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디자인을 전공으로 한 최우정씨가 직접 디자인을 했다고 한다. 저자가 직접 디자인을 했으니 남다를수밖에 없다. 

 이들은 김범수, 장병규, 손주은, 권도균, 이택경 등 일선 취재기자들도 만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을 직접 일일이 만나 인터뷰를 했다. 자신들이 궁금한 창업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성공한 창업가들이 한 말을 그대로 녹취를 따서 옮겨 적었다. 덕분에 바로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이 되는 효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대신 이들 자신의 해석이나 평가, 생각 등은 대부분 배제했다. 즉 대가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집중한 것이다. 창업가들로부터 자신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내는, 즉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능력도 상당한 것 같았다. 덕분에 나도 잘 알지 못했던 이들의 옛 이야기, 속마음, 하고 싶은 일들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무려 2년에 걸친 작업을 하는 동안 이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김준호는 “오히려 조급한 마음이 사라졌다”고 털어놨다. 창업가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하루라도 빨리 창업을 해 보겠다는, 창업 자체에 대한 목적 의식이 강했고 그래서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는 것에 대한 조급함이 많았는데 이제는 오히려 느긋한 마음마저 갖게 됐다는 것. “아직 병역특례 기간이 남아있어서요,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등 해외에 나가 외국업체에서 일해보는 기회도 갖고 싶어요. 그러면서 창업을 준비해볼까 합니다.”

 함께 자리를 한 이상호는 일단 군입대를 준비하고 있다. 군대에서 개발자가 될 지 아니면 팀을 만들어 창업을 할 지 좀 더 고민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한다. 게임업체 취직을 생각하고 있던 최우정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자신만의 꿈이 생겼다고 한다. “디자이너 생산자들을 위한 툴을 만들고 싶어졌어요. 그런 목표를 갖고 앞으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짧은 시간 동안 다 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들 역시 2년여 시간동안 큰 변화를 겪지 않았을까. 그게 책이 나온 것 못지 않게 이들에게 중요해보였다. 그리고 2년간의 작업으로 나온 책이 창업을 고민하는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생각과 고민의 시간을 갖게 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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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벤처 창업이 활성화겠죠. 그런데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똑똑한 젊은이들은 여전히 창업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창업에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죠.”

 4월 2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KDI(한국개발원) 주최로 열린 ‘창조경제 구현을 위한 정책방향’ 세미나에 앞서 이석우 카카오 대표를 만났다. 그는 현재 정부의 창조경제 정책 관련 논의에 대해 “큰 방향은 맞다고 보고, 바람직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본다”면서도 “현장에서 느끼는 (변화에 대한) 체감도는 아직 낮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창조경제의 핵심으로 벤처창업 활성화 및 벤처생태계 조성을 꼽았다. 이를 위해선 똑똑한 젊은이들이 창업에 나설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 그런데 현실은? 여전히 똑똑한 청년들은 창업을 하지 않고, 고시 공부하고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의사가 되는 것을 꿈꾼다. 한국에서 창업에 나서는 사람들은 아직도 매우 독특한 인생관을 지녔거나, 무모할 정도로 겁이 없거나(또는 세상사에 무지하거나 철이 없거나), 자신만의 어떤 세계가 있는 특이한 인물 쯤으로 치부된다.

 왜? 창업 자체도 엄청난 모험인데, 실패했을 때 상상도 못할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창조경제의 걸림돌로 창업 의지를 꺾는 법과 제도를 꼽았다. 특히 대출을 받거나 정책 자금 등을 지원받을 때 창업자의 연대보증을 요구하는 게 대표적. 이 대표는 “연대보증을 했다가 그 빚을 못 갚으면 사기죄로 형사처벌까지 받는 게 현재 한국의 현실”라며 “창업을 독려하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창업자에게 지나치게 부담을 지우는 제도”라고 말했다.

 산업연구원이 지난해 펴낸 ‘청년창업 생태계 조성 및 활성화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청년 벤처기업인 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34.3%는 ‘창업실패에 따른 사회안전망 미약’을 창업의 최대 걸림돌로 꼽았다. 이석우 대표의 발언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그는 “지금 이런 현실에서는 솔직히 저도 어디가서 젊은이들에게 창업하라고 선뜻 얘기 못 합니다. 실패를 했을 때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거든요. 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대표는 교육의 중요성을 거론했다. 어릴 때부터 창업을 준비하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미국에서 창업을 꿈꾸는 학생에게 고등학교 시절부터 소액이라도 신용카드를 만들어 차곡차곡 신용을 쌓아가도록 하는 것도 참고할 만하다는 지적이다. 신용이 준비되고 창업 의지가 있는 준비된 창업자에게 연대보증이라는 가혹한 부담을 지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창조경제가 세계 시장을 무대로 한 것이라면 창업생태계도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창업하고 싶어할 정도로 매력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도 했다. 이 대표는 “실리콘밸리에선 우스개소리로 벤처캐피털이 벤처 투자를 고려할 때 CTO(최고기술책임자)가 인도계이면 점수를 더 준다는 말이 있는데 그 정도로 실리콘밸리를 떠받치는 힘은 인도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는 것”이라며 “글로벌 인재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창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창조경제 달성이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소프트웨어 산업 육성, 투자펀드 조성 다 좋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육성은 20년 걸리는 것이고 투자펀드 조성은 민간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정부는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 창업과 투자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부터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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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한국의 벤처 붐 현상이 부럽습니다. 젊은이들이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한국에서는 이런 현상에 대한 우려도 있는 것 같지만 아예 젊은이들의 벤처 창업을 보기 힘든 일본에 비하면 훨씬 낫습니다. 뭔가가 있어야 그 중에 제대로 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에비하라 히데유키 사이버에이전트벤쳐즈(CyberAgentVentures)코리아 대표는 이렇게 운을 뗐다. “한국의 벤처 열풍이 놀랍고 부럽다”는 게 그의 첫마디 말이었다. 열정을 가진 한국 벤처들의 일본 시장 진출을 돕고 동시에 사이버에이전트가 아시아,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데 한국이 교두보가 되고자 하는 바람도 피력했다. (만나자마자 즉시)그가 내민 사이버에이전트벤쳐즈 회사 소개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이버에이전트벤쳐즈와 함께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서 세계로!’

 한국에서 좋은 회사들을 발굴, 투자해 성장시킨 뒤 한국 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아시아와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키우고 싶다는 뜻이다. 사이버에이전트벤쳐즈는 지난 10월 한국에 진출했다. 지난해 카카오에 투자해 성과가 좋았다. 그 뒤로 카카오를 통해 한국 벤처 상황을 파악하고 한국 진출 기회를 모색해온 것 같다. 

 한국 벤처 기업의 발굴이라는 미션을 갖고 입국한 에비하라 히데유키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동안 컨설팅 업체에 입사해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다가 2005년 사이버에이전트벤쳐즈에 합류했다. 한국에 들어와 언론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와 사이버에이전트벤쳐즈가 현재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교육과 오프라인-온라인 연계 사업. 교육은 주로 영유아를 위한 교육 콘텐츠 업체에 관심이 간다고 했고, 오프라인 비즈니스 중 온라인과 연계되거나 온라인화되고 있는 사업이 향후 발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사이버에이전트는 현재 한국 벤처기업들의 잠재 성장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있다고 그는 전했다. “한국에서 경험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7년 동안 계속해서 벤처기업들을 찾아다니고 시장 조사를 하고 투자를 해 왔습니다. 제 경험상 일본에 비해 한국은 훨씬 역동적이고 성장 잠재력이 큽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한국의 벤처기업들은 위기의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시장이 바뀌는데 소외될 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있는 것 같고 이것이 기업을 강하게 해 줍니다. 반면 일본은 안주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위기의식도 훨씬 덜하죠. 이것이 이들을 더욱 약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스타트업에 원화로 1사당 5억원에서 15억원 정도를 투자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세웠다고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이드라인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많이 투자하거나 더 적은 금액을 투자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는 한국에서 투자할 회사를 찾으면 사이버에이전트의 국내외 네트워크를 총동원, 적극적으로 도울 방침이다. 한국 벤처기업들의 해외 시장에서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는 비교적 후한 점수를 주고 있었다. 

“미국에 있는 VC들로부터 소식을 듣고 있는데 한국 벤처들의 미국 진출이 최근 부쩍 활발하다고 들었습니다.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한국 스타트업은 많지만 일본 스타트업은 없습니다. 그런 점이 좀 답답했는데, 한국의 벤처기업들이 사이버에이전트와 함께 커나갈 여지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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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기업가 정신.”

“실리콘밸리를 무작정 따라하려고 하지 말고 피츠버그 사례를 참고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기획재정부와 KDI(한국개발연구원) 주최로 지난 22일 서울 반포 JW매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2012년 산업혁신 서비스 선진화 국제포럼’에 참석한 그가 따로 언론인터뷰 시간을 가지면서 그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한편으론 그에게 개인적으로 많은 질문을 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없음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비교적 길게-1시간 30분 남짓-대화를 나눴다.혁신과 산업클러스터 이론으로 저명한 스콧 스턴(Scott Stern) 미 MIT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명쾌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한국의 첨예한 이슈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는 듯 했지만 주요 이슈를 설명하면 금방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한국에도 이미 일부산업에서 클러스터(산업집적지)가 형성돼 있다는 것. 반도체, 조선, 해양산업, 통신 등을 예로 들었다. 즉 한국은 클러스터에 이미 성과를 냈지만 도전 과제에 직면해 있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은 특정산업, 해양장비, 조선, 통신 등에서 크게 성장했습니다. 여기서 한국만의 비교우위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하고 있는 제조업 분야에서 서비스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단순히 다른 나라의 사례를 모방해서는 곤란할 겁니다.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 사례를 그냥 접목하려고 하면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그는 지난 10여년간 한국에서 클러스터에 변화가 있어왔다고 지적했다. “흥미로운 현상은 한국에서 IT클러스터가 상당히 특화됐는데 통신장비에 있어서 삼성 등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섰습니다. 그런데 IT 내에서도 다른 클러스터 부분은 상당히 순위가 떨어집니다. 지금 한국의 IT클러스터는 좀 더 서비스에 특화된 측면으로 변화돼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례가 있을 수 있을까. 기존 제조업에서 성공을 거둔 기업이 어떻게 서비스업으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뜻인가. 그는 IBM이 IT하드웨어에서 서비스 회사로 변신한 사례를 들었다. 반도체 제조회사가 물류 등 서비스 회사로 얼마든지 전환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논리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물류를 비롯한 서비스 업종에서 새로운 클러스터가 형성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를 학문적으로 또는 사업적으로 실험하는 것을 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다. 스콧 스턴 교수는 Martin Trust Center for MIT Entrepreneurship의 전략경영가그룹 의장을 맡고 있는데 여기서는 연구 교육 등을 포괄적으로 하면서도 실제 사업을 하면서 자문도 받고 아이디어를 사업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하는 작업도 한다. 

 한국의 경제민주화나 일감몰아주기 등의 논의에 대해 그는 잘 알고 있지 못한 듯 했다. 하지만 “기존 중소기업을 보호해야한다는 논리가 아니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창업 기업을 키울 수 있게 도와주는 방향으로 정책을 입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사업의 구조를 결정해선 안됩니다. 누가 어떤 사업을 참여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서도 안되죠. 그런 결정은 혁신과 품질이 기준으로 결정돼야 합니다. 그것은 시장에서 결정될 겁니다.”

 ‘한국은 혁신역량, 신기술 개발과 도입에는 큰 성과를 냈다’는 게 그의 진단. 하지만 기업가 정신 육성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자 그럼 이것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그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우선 기업가 정신을 직접 가르치는 것(교육). 그리고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이 재원을 공동으로 조달해 벤처캐피털 등을 만드는 것. 마지막으로 누가 기업가이고 기업가 정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규범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는 특히 세 번째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한국에서는 서울대생이 졸업한 다음에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공무원이 되지 않고 창업을 한다고 하면 주위에서 말린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의 결정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기업가, 기업가 정신에 대해 전혀 다르게 보기 때문이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기업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려면 이런 규범의 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

 한국에서 클러스터는 어떻게 생성될 것인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일일까. 그는 절대적인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모든 클러스터에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실리콘밸리보다는 한국에는 피츠버그(펜실배니아) 모델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이 조화를 이뤄가면서 클러스터를 만든 사례죠. 한때 세계 철강의 중심이었던 피츠버그는 한국이 철강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공장이 폐쇄되고 실업자가 넘쳐나는 등 몰락해 모두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폐쇄된 공장을 로봇과 IT 실험실 등으로 활용하면서 인공지능과 첨단로봇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는 싸이를 한국형 혁신의 사례로 꼽았다. “싸이는 한국 스타일이 세계속에 강하게 이미지화된 사례. 한국의 또다른 면, 창조성과 예술가적인 측면이 세계적인 리더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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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이 창립 1주년 행사로 3월 22일 서울 양재동 포스코센터에서 창업희망토크콘서트를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는 김정주 넥슨 창업자(NXC 대표), 신현성 티켓몬스터 대표가 나와 대담을 나눴습니다. 공개석상에서 잘 모습을 보기 힘든 김정주 대표의 멘트를 따로 뽑아서 정리를 했습니다. 한국경제신문 정소람 기자가 전달한 메모를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사회자의 질문에 김 대표가 답변하는 형식입니다) 김정주 대표가 단상에 등장할 때 박수와 환호성이 텨지는 등 현지 분위기는 '아이돌'의 등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은둔의 창업가라는 별명 맘에 드시나요?
 “맘에 들진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별명이?(웃음) 
 “회사에서 너무 열심히 해서 이런 별명 붙은 것 같다.”

-성공의 키워드
 “꾸준히 오래 해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할 것 같고요. 새로 시작하는 분들도 길게 할 수 있는 일 찾아서 길게 하는 것 그게 성공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

-기업가정신이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처음 시작할 때 도전정신 중요하지만 회사 규모가 커지면 사람들과의 조화가 있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 내외부 고객이 고객으로서 뿐만 아니라 파트너 1년 2년이 아니라 10년 20년 같이 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유저가 가족 만들어서 가족까지 같이 갈 수 있는 것 그게 기업가 정신입니다.”

-창업의 계기를 꼽자면?
 “계기라고 할 만한 것은 따로 없습니다. 집안이 사업가 집안이라서 회사 조직 회사가 만들어내는 가치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 넥슨이 처음 만든 게 아니라 하다 망하고 또 하다 망하고 망하면 학교로 돌아가서 잠깐 있다 다시 나오고 그런 식으로 계속 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회사에서 일하는 게 즐거웠어요.”

-왜 다른 업계가 아니라 온라인게임 선택했나요
 “제가 공부했던 분야하고 일치했다. 저희가 마침 접하고 공부하고 바꿔갈 수 있는 것으로써 좋은 사업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땐 성공 예상했나요
“아직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20대 때와 창업 환경이 달라졌는데요
 “창업 인프라 달라졌습니다. 당시엔 인식 제도 지원이 없었습니다. 회사를 바라보는 시각 달라져서 맥킨지를 그만두고 사업도 할 수 있고 사업 시작하고 봐도 큰 회사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습니다. 90년대 초엔 창업환경 어려웠죠. 하지만 펀더멘털은 변한 게 크게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변 도움 있을 순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 없습니다.

-창업의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했나요?
 “95년부터 2012년이 됐으니 15년이 됐습니다. 20년 해보니까 회사는 3년, 10년이 지나든 여전히 어렵고 하루하루가 힘듭니다. 작년에 일도 많았고 올 초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굉장히 힘들고. 하지만 맷집이 생겨서 혼나면 극복해야지.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생각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삼성 갈 수 있는 좋은 기회 있는데 안 가고 창업하다가 5년 뒤 다시 LG 갈 수 있을까?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극복하는 게 어렵습니다. 굉장히 위험하지만 해보면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창업초기부터 다른 시도, 다른 회사에서 안하는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우린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회사에 학교 같은 시스템이 있죠. 프로그래머인데 악기를 가르치거나 디자이너인데 전혀 다른 문화를 접하고 배우고 그렇게 풍성하게 가는 것이 모토입니다. 회사의 기본 펑션이라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산업이 15만원 10만원 경쟁하는....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면 다르게 갔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업계는 이게 팔리면 팔리고 아니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차별화할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그게 우리 회사일이고 제 일입니다.”

-일본에서 상장돼서 거래 시작했는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서 보면 코스피 코스닥에 상장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상장할 수 있는 시장 많습니다. 게임 회사는 일본에서 상장해보자 하는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아시아에서 더 잘 팔리는 게임이고 그러면 인더스트리의 원류는 일본 게임회사들이고. 선택이었죠. 디자이너가 이탈리아에 가고 싶은 것처럼 말입니다.”

-해외시장 진출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데요, 준비해야 될 게 있다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넥슨의 경우 매출의 반이 해외에서 나온 지가 꽤 됐습니다. 작년에 70%-80% 정도는 해외매출이었습니다. 지금 해외를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저희는 96년에 처음 게임서비스를 천리안에서 시작했어요. 미국 법인이 97년이고 일본 법인이 99년에 시작했죠. 우린 특히나 한국 서비스 갖고는 굴러갈 수 없다고 초기부터 생각해서 해외진출 생각했습니다. 해외를 더 집중적으로 가야되는 업계 선택하는 분들이 꾸준히 하고 오래하면 결국은 해외에서 물건을 팔아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메이플스토리하고 있는 미국법인이나 동경증시에 상장돼 있는 일본 법인은 가서 2-3번 다시 만든 겁니다. 계속해서 다시 두드려야 합니다. 결국은 사주는 사람이 있을 거다라고 믿고 하십시오.

-자금 압박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A가 있으면 B도 있고. 이런게 저희 땐 없었어요. 국내에서 실제로 벤처캐피탈 생겨서 제안서 가져가서 들어주는 게 90년대 말이었습니다. 저는 90년대 초반에 사업을 시작했어요. 당시엔 은행에서 빌리지 않으면 돈을 빌릴 데가 없었죠. 준비해서 시작하고 쌈짓돈으로 하면 집안이 망할 수도 있는데 뭐 그렇게도 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큰 공장 지어서 처음부터 제품 만들어서 하려면 대출받아야 하지만 최근처럼 1인창업 웹 개발 하면 작은 규모로도 할 수 있죠.”

-멘토가 있다면?
“회사를 하고자 하는 분한테 질문 받아보면 막연합니다. 제 생각에 세상에 항상 정답지는 아니지만 참고자료 이런게 항상 있었던 것 같고 어떤 일을 하시든지 분명히 있습니다. 컨닝페이퍼가 있었죠. 일본의 스퀘어가 있고. 그런 알려진 회사들을 뒤져보면 의외로 자료가 있었습니다. 이런이런 행동을 하고 인센티브 시스템이 있고, 이런 규모일 때 이런 정책을 펴서 벗어나더라. 항상 비교할 수 있는 게 있고 저희가 온라인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패키지 하게 되면 역시 참고할 수 있는 게 있는 거죠. 연감 같은 것 1년에 500타이틀 가까이 됩니다. 내가 하려는 업계에서 그 규모와 비슷한 회사를 찾아보면 예상문제지를 찾아보면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

-넥슨의 도전정신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은데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혁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지적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 회사는 밖으로 나가서 창업하는 것을 적극 지원합니다. 우리는 인하우스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회사입니다. 90%이상 인하우스에서 하니까, 오히려 밖으로 나가서 창업하는 것을 지원하려고 합니다. 밖으로 나가서 창업하는 사람이 도끼 들고 적이 돼서 나가는 게 아니라 도전하려고 가는 거거든요.

 넥슨 밖의 도전이지만 실제로는 저희가 한다고 봐주시고요. 한 번 나가서 메이플스토리 같은 경우 성공하면서 다시 우리회사로 들어왔어요. 근데 또 나갔습니다. 네오위즈인가. 결국 그 친구가 다시 회사로 와서 신규사업본부장 다시 하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만 특별한 게 아니라 미국에서 흔히 나오는 거죠.” 

-힘들 때가 언제인가요? 
“정말 친한 친구가 떠날 때 힘들죠. 게임 안 팔릴 때 힘들지는 않습니다. 사실 게임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팔리는 게 너무 당연한 상품이어서 나갔는데 안 팔려서 괴로웠던 적은 없습니다. 지금 저희가 인하우스를 90% 한다고 했잖아요. 실제로 저희가 라인업이라고 준비했던 것은 30개 정도입니다. 실제로 이것을 바라보는 기댓값은 제로에요 ‘저거 잘 될 것 같애’ 하고 기대하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 때마다 상심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한 마디 해 주셨으면.
“살면서 모든 것에 이분법을 적용해서 이건 어려운 일이고 이건 안정적인 일이고.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를 가는 게 전통적이고 훨씬 편안한 길이다, 좋은 길이다, 그러니까 창업은 이상한 사람들이 하는 길이고 망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안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좋은 회사 안정적인 회사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절대 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 회사 가도 문제가 있어요. 동료 마음에 안들 수 있고 심심할 수 있고. 큰 회사에 속해서 일을 할 때는 자기 결정권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이거 하고 싶은데 그건 안 된다고 한다든지. 이게 위험하고 힘든 일이고 저건 안정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회사는 다른 무엇보다 내 결정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해보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죠. 잘 판단하시고 후회안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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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가 연내 4G(세대) 이동통신 롱텀에볼루션(LTE) 연내 가입자 400만명을 모으겠다는 목표를 사실상 철회했다. KT는 LTE 부문에서 가입자 확대보다 서비스 품질 향상에 중점을 두겠다고 설명했다.

 표현명 KT 개인고객부문 사장은 28일(현지시각)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12’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연초 이석채 KT 회장이 밝힌 LTE 가입자 400만명은 경쟁사들 상황에 맞춰 얘기한 것”이라며 “내부적으로는 따로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KT는 지난 1월3일 LTE 상용화를 했다. 상용화에 앞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석채 회장은 연내 400만명 가입자를 모으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KT는 현재 서울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LTE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으며 오는 4월까지 전국 84개시에 LTE를 구축할 계획이다.

 표 사장은 목표가 수정된 것이냐는 질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 원래 내부적으로 목표가 설정된 적이 없었다”며 “다만 연초 간담회때 기자들이 목표를 물어보니 경쟁사들과 비슷하게는 하지 않겠냐는 뜻에서 400만명 수준이라고 얘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LTE 가입자 모집을 위해 보조금 많이 풀고 밀어내기로 파는 방식 안하겠다”며 “그 돈을 서비스 품질 향상에 투자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품질 향상을 내세웠지만 표 사장의 이런 발언은 LTE 가입자가 좀처럼 늘지 않고 있는 KT의 초조함을 반영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KT는 현재 LTE 가입자 숫자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10만명이 안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면 경쟁사인 SK텔레콤은 이미 지난달 100만명 가입자를 돌파했고 LG유플러스도 100만명에 도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KT가 현 상태에서 연내 400만명 가입자 목표를 달성하려면 매달 40만명에 가까운 가입자를 유치해야 한다. 네트워크 구축 속도가 가장 느린 KT에게는 버거운 목표일 수가 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LTE를 서비스하고 있는 KT에 비해 SK텔레콤은 이미 전국 30여개 도시에서 서비스를 하고 있고 LG유플러스는 84개 도시에서 서비스가 진행중이다.

 개인고객부문을 책임지고 있는 표 사장이 LTE 가입자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다고 뒤늦게 해명(?)을 함에 따라 당초 400만명이 목표라고 했던 이석채 회장이 머쓱해지게 됐다. 물론 한편에서는 이 회장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표 사장이 나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현재로서는 KT가 당초 목표를 달성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무리하게 달성하려고 할 경우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어야 하는 등 만만치 않은 출혈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해프닝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연초에 당당하게 목표치를 얘기했다가, 그것도 회장이 이야기한 것을 개인고객부문 사장이 뒤집는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니다.

 이런 해프닝의 근원은 KT가 처음부터 LTE 서비스를 무리하게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KT가 올초 LTE 서비스를 시작할 때 서울 시내, 그것도 고작 3개 구 정도에서만 서비스가 가능한 상태에서 시작했다. 이 정도면 사실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시범 서비스 정도? 물론 이것은 역시나 무리를 해가며 LTE 서비스를 한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 등 경쟁사들이 먼저 치고 나간 상황에 쫓긴 측면도 있다. 그래도 KT의 경우는 유난히 좀 심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아직 서울시내에서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KT의 LTE 서비스는 여전히 본격적인 시작도 안했다고 봐야 한다.  
 
KT의 LTE 서비스 목표 설정이 표 사장의 말처럼 이 회장이 질문에 대답하다 우발적으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표 사장이 예상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는 LTE 가입자 현황에 시달리다 그런 답변을 한 것인지는 KT의 행보를 보면 곧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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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 2월27일(월)자 1면에 실렸던 김영삼 아이러브스쿨 창업자 인터뷰 내용의 전문을 싣습니다. 신문에는 지면 사정상 일부만 게재됐습니다. 임정욱 라이코스 대표님을 비롯해 여러분들이 전문을 요청하셨습니다만 제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MWC 2012 취재차 체류하고 있었던 관계로 블로그에 전문을 올리는 게 좀 늦어졌습니다. 그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모두 올립니다. 신문에는 제목을 뽑기 위해 특정 대목을 앞으로 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이 글에는 시간 순서대로 제가 그를 만나 대화한 내용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이번 취재는 윤희은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1차 내용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줬습니다.
(혹시 김영삼 사장이 누군지 모르시는 분은 아마 좀 어리둥절하실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읽지 마시고 이 글 끝으로 스크롤해 내려가면 김영삼 사장이 누구인지 제가 간략히 써 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걸 먼저 본 후 읽으시는게 나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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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아이러브스쿨 창업자를 만나러 가는 길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한 벤처기업가가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문턱에서 좌절한 스토리는 무엇일까. 마음 한 구석에 착잡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를 어떻게 풀어쓸까에 대한 고민은 둘째였다. 너무 자세히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괜한 과거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컸다. 한편으로는 그저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자리가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하면서 나는 점차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는 인터뷰 도중 뜻밖에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저는 금양 정현철 전 사장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의 의도가 어찌됐던 결과적으로 나를 속였고 그로 인해 큰 손해와 엄청난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덕에 저는 사람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 그대로 돈을 벌고 세상이 말하는 대로 성공을 거뒀다면 저는 인간 말종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경영 철학도 없이 남이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사업을 하고 으스대고 돈을 마음껏 쓰면서 기업가가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 아니 그 전에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살았겠죠. 지금 돌이켜보면 금양과 주식 매각 계약을 체결하던 전후의 시점, 저는 인간으로서는 망가진 존재였습니다. 진실한 사랑도 없었고, 삶에 대한 고민도 없었죠. 그러고 보면 그런 일을 겪은 후 저는 오히려 그때보다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말종이 되지 않도록 기회를 준 정현철씨에게 감사합니다.”

 정말 뜻밖이었다. 지난 11년이라는 세월은 그에게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돈도 잃고, 친구도 잃고, 가정도 잃고, 자존심과 명예까지 모두 잃었다. 너무나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며 그냥 생을 마감해버릴까하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인터뷰를 수락한 것은 자신의 실패담이 창업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때문이었다고 한다. 내가 대화 내용 전문으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흔쾌히 동의했다. 많은 것을 초월한 듯한 그런 모습도 보여줬다. 그와 장장 3시간에 걸쳐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원래 창업에 뜻이 있었습니까.

 “창업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정보학과 연구실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었는데 같은 연구실 옆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싸이월드를 만들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인맥 기반으로 하려면 학연이 최고인데 그걸 안하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내가 해보자’고 어느날 결심하고 만들었죠. 연구실에 같이 있던 이춘석, 최병구 두 사람과 같이 각자 50만원씩 내서 150만원으로 PC 사서 개발했습니다.”
▶학교에서 시작한 건가요?
 "그렇죠. 당시 카이스트는 국내에서 손꼽힐 정도로 인터넷 환경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카이스트 출신들 중 많은 IT 창업자들이 나올 수 있었죠. 저희도 학교 밖에서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이트를 오픈하고 나서 얼마 안돼 (회원이 몇 없던 시절인데) 비만 오면 사이트 접속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알아보니 당시 학교에서 건물이 낡아서 누전 우려가 있다고 비만 오면 전기를 내려버렸더군요. 이래선 서비스를 유지하기 힘들겠다 싶어서 PC를 들고 밖으로 나오게 됐죠." 
▶운영비가 많이 들텐데 자금은 어떻게 조달했나요
 “창업하고 얼마 안돼 사무실 전화비를 낼 돈이 없더군요. 집에는 쌀이 떨어졌죠. 할 수 없이 아버지를 찾아가 3000만원을 빌렸어요. 그런데 회원이 아직 1만명도 안됐던 1999년말에 KTB와 금양 두 회사가 저를 찾아왔어요. 투자할 의향이 있는 것 같길래 10억만 투자해 달라고 했죠. 지분 40%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동시에 투자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왜 금양을 택했나요?
 “KTB는 권성문 대표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투자하겠다고 하더군요. 문제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반면 금양쪽은 회사 차원의 투자였습니다. 우호적으로 다가왔기에 좋게 해석했습니다. 금양은 발포제 만드는 중소기업인데, 부산에 근거가 있고 나름 견실한 회사로 알고 있었습니다. 금양이 회원 1만명일 때 10억원을 투자하면서 지분 40%를 가져갔어요.“ 
▶창업 후 얼마 안 돼 최대 주주가 변경됐네요?
 “금양이 단일 최대주주가 된 거죠. 1999년 가을에 창업했는데 그해 말에 투자를 받았어요. 저는 30% 좀 넘는 지분이 있었고 다른 창업자와 직원 등 우호지분을 합쳐 60% 가량 있었어요. 창업자 쪽 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별 문제 없을거라고 봤어요. 제가 너무 경영을 몰랐던거죠. 나중에 알고보니 창업자들이 최대주주 자리는 회사를 매각하기 전까지는 내놓지 않더군요.”
▶다른 회사도 만나 봤습니까.
 “삼성 LG 효성 등 다른 대기업도 만나 투자를 타진해 봤습니다. 다들 투자 의사는 있었어요. 그런데 다들 조금씩만 투자하려 했습니다. 외국 회사들을 만나면서 국내 회사들은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걸 알게됐죠. 국내 기업들, 투자자들은 투자를 했을 때 기존 다른 대주주와 지분 싸움을 해서 이길 정도로만 지분을 확보하려고 하더군요. 회사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해서 인수 뒤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없는 것 같았아요.”
▶외국 기업들은 어떻게 다른가요
 “외국 기업들은 벤처기업을 인수할 때 지분 전체를 인수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리고 창업자의 공로를 인정해 줘요. 지분을 다 인수하고 오히려 스톡옵션을 주고 경영권을 보장해 줍니다. 야후가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금양과 사전 조율이 없었나요
 “금양이 투자하고 5개월이 안돼 2000년 5월에 25만명 돌파했어요. 회원이 너무 빠른 속도로 늘어 추가 투자가 필요해 금양을 찾아갔는데 돈을 더 투자 못한다고 거절하더군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회원이 150만명이 됐어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요. 당황스러웠죠.”
▶야후는 어떤 조건을 제시했나요.
 “야후는 회원 한명당 얼마씩 계산하는 그런 기준이 있었어요. 300만명일 때 야후가 왔는데 300억원으로 시가총액을 산정했어요. 그런데 한달 만에 회사 회원수가 450만명이 되니깐 야후가 그걸 보고 놀라서 일단 가치를 500억원으로 하고 투자하겠다고 하더군요. 야후코리아는 당시 한국 증시에 상장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커뮤니티가 약하다는 게 항상 약점이었어요. 아이러브스쿨을 인수해서 커뮤니티를 키우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금양이 태도가 바뀌었어요.”
▶가치를 그 정도로 평가해준 것에 반응한 거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원래 야후와는 2000년 8월31일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는데 14일에 금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경영권을 보장하고 야후와 같은 기준으로 투자를 한다는 거였어요. 일부 돈을 현금화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도 했죠.”
▶그 말대로 했나요.
 “아닙니다. 그냥 순리대로 하자는 생각에 이미 늦었다고 하고 야후와 계약을 맺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금양을 만나보니 야후와 계약을 안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야후가 100% 지분을 인수하려면 금양 지분도 사야하는데 금양은 팔 생각이 없었어요.”
▶금양이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계약을 무산시킬 수 있는 상황 아니었나요. 처음부터 무리한 계약을 추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후가 저희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정 안되면 창업자들이 갖고 있는 60% 지분이라도 사겠다고 했어요. 금양과의 지분 매각 협상은 그 뒤에 해도 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런데 제가 그걸 거절했어요.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했죠.”
▶금양과는 어떻게 됐나요.
 “최종적으로 야후와 모든 협상이 결렬된 뒤 9월6일 금양과 계약을 했습니다. 지분 11%를 81억원에 금양이 샀어요. 저는 지분을 매각해 당시 30억원을 현금화했는데 이 중 3억원을 직원 몇명에게 나눠줬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확고한 철학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게 멋있는 줄 알았어요. 겉멋만 부린 거죠. 금양은 지분이 51%가 되면서 아이러브스쿨을 자회사로 편입했습니다.”
▶그때 그럼 회사 주인이 금양으로 바뀐 거네요.
 “그런데 그걸 제가 몰랐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제가 아이러브스쿨의 실질적인 최고경영자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현실을 몰랐죠. 경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회원이 너무 빨리 늘어서 당황했고 쫓아가기 바빴습니다. 하루에 몇십만명씩 가입하기도 했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금양 자회사로 편입되자마자 회사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창업자들은 다 회사를 나갔고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도 뭐하러 이 회사에 있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바로 회사를 나갔나요.
 “2000년말에 금양을 찾아갔더니 보유 지분 전부를 사주겠다는 제안을 하더군요. 그러면서 2001년 2월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장 돈을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구요. 2달 정도 뒤에 주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걸 믿었다는 게 이상하네요.
 “믿었습니다. 그 전에 지분을 판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돈을 잘 받았거든요.그런데 그 뒤로 돈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 합치면 160억원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정말 큰 돈이었는데 말입니다.”
▶지분을 팔고 뭘 할 계획이었나요.
 “그냥 학교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회사는 커졌지만 일은 경영은 제 뜻대로 안됐고 이참에 사업하느라 못다한 공부를 마저하려고 했죠. 그런데 결국 돌아가지도 못했어요. 너무 창피했습니다. 학교에서는 내가 돈을 많이 번 것으로 알았고, 심지어 기부 요청도 들어왔는데 저는 매각 대금도 못 받고 세금때문에 빚만 잔뜩 진 상황이었거든요. 그런 걸 왜 그리 신경썼는지. 철학이 없어서 중심도 못 잡았고 그냥 체념하는 심정으로 집에 있었습니다.”
▶세금 문제는 어떻게 된 건가요.
 “세금을 간과한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주식을 양도했으니 세금을 내야하는데 돈을 못 받아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2004년 세금부과 예비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원래 낼 돈은 8억원인데 연체료, 미신고가산세 등이 붙어 24억원으로 불었어요. 잘못하면 있는 재산을 전부 빼앗길 것 같아서 아내에게 이혼을 하자고 했어요. 일종의 위장이혼인데, 얼마 안 가 진짜로 이혼을 했어요. 아내와 처가쪽 식구들이 결국 그 힘든 시기를 견디지 못했어요. 나에게 돌아서는 걸 보면서 피눈물이 났습니다.” 
▶재기 시도를 계속 한 것으로 압니다.
 “돈 벌어서 세금 내 보겠다고 2004년에 아파트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공동구매 사이트 아이티아를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투자 받으러 가도 아무도 투자를 하지 않았어요. 아이러브스쿨을 만들어 그렇게 키워본 경험이 있다는 제 경력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더군요. 시기적으로도 좋지 않았어요. 당시엔 벤처 거품이 완전히 꺼지고 난 뒤 벤처 투자에 대한 반감이 심하던 시절이었어요. 벤처 차리고 3년 지나면 다 사채업자한테 가는 거 모르냐며 외면했습니다. 결국 2005년말 사업을 완전히 접었죠.”
▶그 뒤로 공백이 많았습니다.
 “죽으려고 했습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다시 재혼하지 않았으면 아마 진작에 자살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내는 나와 함께 아이티아를 설립했던 사람이었는데. 처음엔 아이티아를 포기 못하겠다고 하다가 나까지 살려보겠다고 했습니다. 2006년 아는 분에게 오피스텔을 빌려 사업을 하려고 했지만 신용불량자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국내에선 안되겠다 싶어 2010년 중국에서 사업을 시도했지만 잘 안됐구요.”
▶왜 벤처기업에 투자를 안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국내에서는 IT벤처를 아이디어사업이 아니라 단순한 돈벌이수단으로만 생각합니다. 투자를 하고 장기적으로 추이를 봐서 회사를 키워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투자하고 빨리 이익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만 해요. 산업을 장기적으로 못 보니 결국 IT사업이 ‘빨리 피고 빨리 죽는’ 사업이 된 겁니다.”
▶벤처 창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성공을 대비하라’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대개의 사람들이 실패를 대비하지요. 대신 성공에 대해서는 ‘성공하면 성공하는 거지’하고 맙니다. 하지만 성공을 준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성공을 준비하지 않아서 실패했습니다.”

by wonkis


<김영삼 사장은 누구>
김영삼 사장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정보공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1999년 연구실에서 동료 2명과 함께 아이러브스쿨을 창업했다. 아이러브스쿨은 초등학교 친구들을 연결시켜주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란 새로운 개념을 앞세워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회사를 설립한 지 1년도 안돼 500만명의 회원을 모으며 세계 인터넷 사이트 순위를 매기는 알렉사랭킹에서 한국 1위, 세계 3위까지 올랐다.
 2000년 8월 야후코리아가 500억원에 인수를 추진했으나 계약이 무산된 뒤 그는 금양에 지분을 넘기고 2001년초 회사를 떠났다. 하지만 금양측이 지분 매각 대금을 주지 않으면서 주식 양도세를 내지 못한 그는 미납 세금, 이자 등이 더해져 개인 빚이 20억원까지 불어났다. 2004년 아이티아라는 아파트 기반의 SNS를 설립했지만 실패했고 중국에 가서 사업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아 귀국했다. 금양 전 대표이사였던 정현철씨를 상대로 주식매각대금 청구 소송(민사) 1심에서 승소했고 현재 형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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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완 유아짱 사장이 이번에 세상에 내놓은 것은 동영상 기반 소통서비스 ‘짱라이브’였다. 지난 1999년 프리챌을 창업하고 커뮤니티 서비스를 선보였던 그가 12년만에 돌아와 도전한 것은 영상소통플랫폼이란 분야.

 “소셜 동영상 모바일 풀랫폼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열어 2년 내 1억명의 이용자를 확보하겠습니다.”

 호탕하고 씩씩하게, 전 사장은 기자간담회장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8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장에 나타난 전 사장은  “짱라이브는 기존 문자만 주고받는 모바일 메신저와 달리 영상을 주고받고 생중계도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모바일 SNS”라며 “다음달 일본을 시작으로 세계 시장을 적극 공략하겠다”고 말했다. 짱라이브 앱은 애플 앱스토어와 구글 안드로이드 마켓에서 무료로 다운받아 이용할 수 있다.

 짱라이브는 세가지 핵심 기능으로 이뤄져 있다. 동영상 플랫폼이 첫번째고 영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두번째, SNS 기반의 커머스가 마지막이다. 이 중에서 핵심은 기기에 상관없이 주소록을 기반으로 연동된 친구들과 문자메시지, 동영상 채팅 및 공유, 모바일 생중계 등을 가능하게 하는 SNS 기능이다. 기존 모바일 메신저들이 휴대폰 주소록에 국한돼 있지만 유아짱이 이번에 공개한 짱라이브 버전 3.0은 여기에 더해 PC 주소록과 이메일 주소록까지 연결했다. 어떤 기기로든 짱라이브 앱이나 웹페이지에 접속해 있으면 친구들과 실시간 동영상 공유가 가능하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회의하는 장면이나 동창회 장면, 결혼식 장면 등을 지인들에게 현장에서 간편하게 생중계를 할 수 있고 이를 보면서 지인들끼리 바로바로 채팅도 할 수 있다.

윤태중 부사장은 “짱라이브가 추구하는 것은 방송이 아니라 영상 소통”이라며 “방송이라고 하면 아주 거창한 장비를 들고 힘들게 준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짱라이브의 동영상 생중계는 소통이 목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등으로 촬영을 해 이를 지인들과 나눌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했다.

 릴레이 방송 기능이 있는 것도 짱라이브의 특징이다. 릴레이 방송은 친구가 생중계하는 동영상을 다른 그룹의 사용자들에게도 중계로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이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로 계속 연결될 수 있어서 확장성이 클 것으로 짱라이브는 기대하고 있다. 

현재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는 있는 '****톡'류의 서비스보다 한층 진화된 서비스라는 차원을 강조한 짱라이브 3.0 캐치프레이즈도 눈길을 끌었다. '톡(Talk)까지 말고 비춰봐' 어렵게 말로 하지 말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영상으로 보여주면 된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전 사장은 2002년 12월 프리챌 사장 시절 긴급체포되면서 이후 회사 차원의 공식 행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로서는 9년 만의 공식 행사에 모습을 나타낸 셈이다. 만감이 교차할 만한 순간이지만 그는 의외로 담담해보였다. 지나온 일보다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해서일까. 2008년 그가 재기를 노리며 창업한 유아짱은 3명의 직원에서 출발해 3년여만에 120명으로 불어났고 100만명의 회원도 확보했다.

전 사장은 해외 시장에서 승부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짱라이브는 페이스북처럼 이용자가 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플랫폼이기 때문에 언어의 장벽이나 문화의 장벽이 크지 않고 세계시장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해외에 인터넷데이터센터(IDC)를 구축하는 등 공격적으로 투자할 계획입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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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자 한국경제신문 37면(인물면) 톱에 관련 기사가 이미 나갔습니다만,양이 좀 줄어서 처음 썼던 내용을 그대로 블로그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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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열 KT 홈고객부문 사장이 마라톤을 취미로 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취미로 마라톤을 하면 어느 정도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달리기는 상당히 좋아할 것이 분명하고,가끔씩 하프코스를 뛰는 정도가 아닐까.분명치는 않지만 그런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서유열 사장을 만나자마자 그가 처음 한 말에 나는 놀랐다.

“2005년에 처음 마라톤을 하기 시작해 만 6년 동안 풀코스를 11번,하프마라톤을 20번 뛰었어요.”

 서초동에 위치한 KT 올레캠퍼스 10층에 있는 서유열 사장의 방에 들어서자 창가에 가득히 세워놓은 마라톤 관련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춘천국제마라톤,경주마라톤 등 선수들이나 뛸 것 같은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사진과 기록들이 빼곡했다.

 마라톤 선수들도 일년에 42.195㎞ 풀코스 완주를 두 번 정도만 한다고 한다.서 사장은 6년동안 11번을 완주했으니 1년에 얼추 두번씩 뛴 셈.거의 선수급이다.기록도 대충 취미생활로 뛰는 수준이 아니다.서 사장이 31번 뛴 풀코스와 하프코스 기록을 보여줬다.최고 기록은 2008년에 세운 3시간 32분 29초.3시간 35분내로 들어와야 마라토너들의 꿈 보스톤 국제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다.이 기록이 작년에 공인되면서 서 사장은 올해부터 보스톤 마라톤에 출전할 수 있게 됐다.

“올해는 너무 바빠서 출전을 못했는데 내년엔 가고 싶죠.그런데 가려면 일주일 휴가를 내야하니 사실 어렵죠.허허”

 그의 말을 듣다 새삼 서 사장을 쳐다봤다.유심히 보지 않았는데 다시 보니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 같았고 56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힘이 느껴졌다.사람이 탄탄해 보이면 역시 이유가 있었다.


 마라톤이 취미이자 특기이다 보니 그의 애장품은 모조리 마라톤과 관련된 거였다.갖고 있는 뉴밸런스 마라톤화만 스무켤레가 넘는다.“두 번만 완주해도 신발 뒤가 닳아요.돈 아낀다고 그거 그대로 신고 나가면 무릎에 무리가 오죠.마라톤 제대로 하려면 신발도 자주 바꿔줘야 합니다.”

 그가 보여준 마라톤복은 KT의 변천사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2005년 처음 대회에 출전할 때 입었던 마라톤복 상의에는 네스팟(Nespot)이 크게 적혀 있었다.KT가 당시 전국에 네스팟 와이파이망을 깔았기 때문이다.2007년에는 IPTV를 시작하면서 마라톤복에도 Mega TV가 프린트돼 있었다.2008년 옷에는 당시 KT의 캐치프레이즈인 ‘Life is Wonderful’이,2009년에는 ‘Qook’,그리고 작년 옷에는 ‘올레KT’란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대체 왜 이렇게 열심히 뛰는 걸까.어릴 적 유달리 몸이 약했던 것이 계기가 됐다.“초등학교 2학년때 숨을 쉬지 않아 가족들이 죽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죠.”
 
 아니 도대체 몸이 어느 정도 약했길래...“죽었다고 생각한 가족들이 거적대기를 덮어놨었어요.송장 치울 일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났어요.”

 그 뒤로 서 사장은 죽어라고 운동을 했다.태권도를 10년동안 해 3단까지 취득했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스무살에 시작한 산행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등산 경력만 35년에 달한다.지금도 골프 대신 매주 북한산,도봉산 등 서울 시내 인근 산에 오른다.지리산 종주를 10시간만에 끝낼 정도로 빠른 속도로 등산을 한다.그렇게 단련된 체력이 고스란히 마라톤에서 이어지고 있다.

 “2005년에 기업고객 본부장이 되면서 시간이 없어서 멀리 있는 산을 찾아가 등산을 하기가 어려워지더라구요.그래서 마라톤을 하기 시작했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할 정도로 힘든 마라톤을 계속 하다 보니 에피소드가 없을 수 없다.작년 춘천국제마라톤대회에 나갔다가 35㎞지점에서 발에 쥐가 나서 쓰러진 것이다.“한 시간 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있었어요.” 
 
 진행요원들이 그를 들것에 실어 트랙 밖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때가 10월이었으니 1시간을 누워 있으면 등에 한기가 느껴질 터. 땀이 식으면 더욱 심했을 것이다. 왠만하면 포기하고픈 마음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났다.

 “물을 중간에 안 마시고 좀 오버페이스했더니 바로 쥐가 나더군요.하지만 인생에 포기란 없습니다.기록이 한시간 늦어지긴 했지만 다시 일어나서 끝까지 뛰었어요.”

 흔히 마라톤을 인생에 비유하곤 하는데 서 사장은 마라톤을 하면서 그 이유를 실감하고 있다.“35㎞ 구간을 통과하면 무아지경에 빠져듭니다.몸 속의 에너지가 다 타고 달리던 관성으로 앞으로 나가는 거죠.이때쯤 되면 표현하기 힘든 쾌감마저 듭니다.마치 인생을 좀 살아봐야 의미를 아는 것처럼 말이죠.힘들고 지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달려야 한다는 것.포기해선 안된다는 것.그래서 마라톤을 인생이라고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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