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을 준비하거나 막 시작한 사람들에게 필수코스가 하나 있다. ‘고벤처포럼에 나가서 발표를 하는 것’.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이 아니더라도 고벤처포럼은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모여들어 발표를 듣고 교류를 하고 토론을 하는 장이 되고 있다. 이 포럼을 만든 고영하 고벤처포럼 회장은 전형적인 벤처기업가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는 지금 누구보다 벤처기업인들을 잘 알고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가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고 회장은 사실 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지만 1974년 유신헌법 반대 시위를 하다 투옥됐고, 그로 인해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그 뒤 그는 정치가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 1987년에는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해 고(故) 제정구 의원과 정당 활동을 하기도 했고 민주당 공천을 받아 1992년과 1996년 서울시 도봉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연거푸 낙선했다. 이후 그는 정치의 뜻을 접은 것 같다. 진로를 바꿔 1999년에는 최초의 IPTV였던 셀런티비 창업자들을 만나 사내이사로 참여했고 하나TV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고벤처포럼에 이어 엔젤투자협회를 발족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한국의 스타트업’에서는 100회를 (자체) 기념해 고영하 회장을 만나 한국벤처산업의 현황과 문제점을 논의했다. 진작 만나 대화를 나눴어도 좋았겠지만 격변의 시기에 정부 정책의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하기엔 그만큼 적절한 인물도 없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고벤처포럼을 이끌고 있는 고영하 회장(가운데)>

◆한국은 정부가 투자한 벤처의 실패율이 높다

고 회장을 만나자마자 ‘벤처기업의 숫자는 많아지는데, 더불어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벤처도 많아지고 있다’고 말을 꺼냈다. 정부가 보다 많은 벤처를 지원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벤처들이 정부 지원을 받고 있다면, 그리고 그 벤처기업들이 정부 지원이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수준이라면, 더 나아가 정부의 이런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런 벤처기업들이 좀처럼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면, 여기엔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한국의 최근 벤처붐에서는 이런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걸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이 최근 KDI 김기완 연구위원이 출간한 보고서다. 그는 ‘제2의 벤처붐을 맞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벤처 기업이 늘고 있지만 열 중 아홉은 정부 지원을 받는 벤처라고 분석했다. 그가 인용한 중소기업청 자료에 따르면 2010년말 국내 벤처기업 수는 2만4645개로 사상 최대 수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벤처기업 수는 2001년 1만1392개까지 늘었다가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2003년 7702개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후 다시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 2010년 2만개를 돌파했다.

 김기완 연구위원은 이들 중 90.6%인 2만2231개가 기술보증기금 등의 지원을 받는 정부지원 벤처라고 분석했다. 벤처캐피털 업체들이 냉정한 평가를 통해 투자한 회사는 622개(2.5%)에 불과했다. R&D(연구개발)를 위주로 하는 연구개발기업의 비중도 6.4%에 그쳤다. 벤처 수는 갈수록 늘지만 코스닥 상장 벤처기업은 오히려 줄었다. 2005년 전체 9732개 벤처기업 중 405개 기업(4.2%)이 코스닥에 상장돼 있었지만 2010년에는 2만4645개 벤처기업 중 1.2%에 불과한 295개만 상장사였다.

 고 회장을 만나 간략하게나마 이런 내용을 설명했다. 그는 보다 직설적으로 말했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자금을 지원한 벤처기업의 실패 확률이 매우 높다고.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높을 거라고 말이다. “서울산업통상진흥원 700개 입주 기업 가운데 매출과 이익을 내며 성장하는 기업을 7개가 채 되질 않습니다. 1%도 안된다는 뜻이죠.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요.”

◆대상 선정부터 잘못

우선 한국은 정부가 지원 대상 벤처기업 선정부터 제대로 하질 못한다는 게 고 회장의 지적. 우수한 벤처기업 발굴부터 안된다는 거다. “제가 심사위원 등으로 많이 다니다보니 한국에서 정부가 투자할 기업을 찾는 과정이 보이더군요. 사실 이건 투자 대상을 찾는 게 아닙니다. 거의 점치는 수준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냥 서류 받아서 일차로 체크하고 한두차례 불러서 발표를 듣죠. 팀이 어떤지, 인간성이 어떤지, 경력이 진짜인지,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등등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원할 팀을 뽑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제대로 될 리가 없는거죠. 이러다보니 기껏 팀을 뽑아 놓고 나도 돈을 대자마자 팀이 깨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반면 다른 나라는 어떨까. 아무래도 스타트업 관련 정부 지원 제도가 비교적 잘 되고 있는 국가와 비교할 수밖에 없다. 고 회장은 이스라엘과 독일의 사례를 들었다. “독일은 정부 지원 벤처기업의 성공률이 20%가 넘습니다. 이스라엘이나 핀란드도 한국보다 이 비율이 훨씬 높구요”

 이게 가능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선정 과정에서부터 확실히 다르다는 게 그의 생각. 그는 그래서 이스라엘의 사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고 한다. 

 이스라엘에선 매년 500여개의 기업이 정부 지원을 받으려고 지원을 한다. 정부 내에 있는 120명 가량의 evaluator(그의 표현에 의하면, 투자감별사)가 어떤 기업에 정부 자금을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500개 업체에 파견을 나간다. 그래서 팀웍 확인을 위해 2-3개월 정도 같이 지낸다.

 “이런 방식은 창업 멤버들의 기업가 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팀웍, 특히 인간성을 알 수 있게 되거든요. 사실 인간성이 가장 중요한 선정 기준일 수도 있습니다. ”

 이렇게 2-3개월이 지나면 이들 감별사들이 리포트를 작성한다. 리포트 결과를 바탕으로 500개 기업 중 120개 기업에 투자를 하게 된다. 1 사당 투자 금액은 한국 돈으로 약 7000만원 정도. 이 중 20%가 성공하게 된다. 투자를 한 게 끝이 아니다. 투자를 한 다음에 6개월에서 1년 뒤에 가서 다시 평가를 하게 된다. 성취가 있을 경우 VC들이 와서 투자를 집행한다. 만약 VC들의 투자를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정부 차원에서 판단해 가능성이 있다고 보면 5억 정도 정부가 직접 투자를 진행한다.

 그럼 성과가 없는 팀에 대해선 어떻게 하나? 그냥 버리나? 아니다. 멘토링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걸르고 걸러서 투자할 팀을 추려내면서도 미래를 위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발견되면 이를 키워나갈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일본꼴 난다

그는 “한국이 이대로 가면 일본꼴이 난다”고 걱정했다. 무슨 뜻일까. 한국에서도 일본과 같은 장기 침체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는 여러 곳에서 들려온다. 대부분은 자산 시장의 거품 붕괴, 고령화 등에서 원인을 찾는다. 고 회장은 ‘성장동력의 상실’을 가장 우려했다.

 “한 사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성장 동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기업에만 의존해서는 지속적인 성장 동력이 나오기 힘들어요. 대기업은 혁신이 나오기 힘든 구조거든요.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해외에도 대기업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혁신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질문에도 그는 답이 준비돼 있었다. “IBM 애플은 어떻게 혁신을 했을까요. 외부의 혁신역량을 사들여 내재화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가. 자체적으로 혁신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방형 혁신을 한 거죠. open innovation.  벤처기업들을 M&A해서 혁신을 사들이는 것. 이게 되는 곳이 미국이고 이런 것이 안되는 곳이 일본입니다. 미국에서는 그래서 제값을 주고 벤처를 삽니다.”

 국가가 근본적으로 벤처 산업을 일으키는데 진정 관심이 있고 여기에 국가의 운명이 걸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각하게 여기는지가 문제다. 한국은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다는 게 고 회장의 진단. 

 정부만 그런 게 아니다. 창업하는 사람들, 인재들의 문제도 있다. “제일 똑똑한 애들이 창업하는 게 실리콘밸리인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똑똑한 애들이 대기업에 가거나 관료만 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나 미국에서는 똑똑한 친구들이 창업을 하는데 말이죠.” 

 그럼 한국에서는 이런 문화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을 거론했다. “ 우선 다양성 교육이 선행되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가 정신이 있는, 그런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일찌감치 발굴해낼 수 있는 거죠. 실패를 용인하는 것이 두번째 조건이입니다. 도전했다가 실패를 하더라도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는 그런 제도와 문화가 필요하다.” 

 맞는 말이다. 본래 교육이라는 것은 아이의 잠재력, 가능성을 찾아주는 게 목표가 돼야한다. 그냥 학생을 대학에 보내는 게 목표가 되서는 안된다. “다양한 교육을 실시하면 아이들이 다양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업가의 소질이 있는 아이도 있습니다. 미국에선 바로 그런 아이들이 창업을 하기 때문에 성공 확률도 높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불만도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선 모두가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이 자라다가 갑자기 자기가 배운 것과 다른 선택을 하고 생소한 환경에서 창업을 해야 합니다. 창업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큰 게 당연하죠. 사실 이런 환경에서 창업을 하는 사람들이 대단한 겁니다.” 

◆엔젤투자자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엔젤투자자 문화를 육성할 것을 주장했다. 

“미국은 30만명의 엔젤투자자가 있는데 한국에는 고작해야 300명, 400명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1만명 수준으로 늘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엔젤투자협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2020년까지 엔젤투자자 1만명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VC는 1조원을 투자하는데 엔젤투자자의 투자 자금은 고작 300억원. 이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VC는 원래 아주 초창기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초기단계에서 엔젤투자자의 자금을 수혈받아 회사를 어느 정도 성장시켜야 VC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엔 엔젤투자자도 없고, 그런 문화도 없다. 그러다보니 VC가 투자할 곳이 없다. 결국 정부 지원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벤처들만 넘쳐난다. 벤처 감별의 눈이 없는 정부가 이들에 새 모이 주듯 자금을 조금씩 지원하다보니 영세한 벤처들만 많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그는 2020년 엔젤투자자 1만명이 투자자금 1조원을 굴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의 엔젤투자자들이 200억 달러는 굴리는 것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모두 지금의 30배 수준이다. 

 “국내 현실을 보면 어차피 중산층 이상이 투자할 돈이 없습니다. 엔젤투자가 해결책이 될 수 있어요. 1억원을 1000만원씩 10개 기업에 투자했다가 1개에서만 수익이 나도 나머지를 커버할 수 있죠.”

 그는 엔젤투자협회를 통해 중소기업부 만드는 것을 건의하고 있다. 그 산하에 창업진흥청을 만들고 창업을 진흥하게 한다는 복안이다. 현재의 중소기업청은 청 단위여서 힘이 약하다는 판단도 작용 했다.

 “핀란드는 정부에서 8000억원을 투자하는 데 이 돈이 전부 새로 투자되는 자금이 아닙니다. 상당수는 성공한 기업에서 회수한 돈입니다 그 돈이 다시 돌고 돌아 재투자되면서 생태계에 기여를 하는 거죠. 반드시 큰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산업에 대한 열정과 의지, 안목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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