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언젠가 다시 창업에 나설 인물처럼 보였다. 신념이 있고, 자신의 생각이 뚜렷한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는 당시 공동 창업을 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뭔가에 목말라 있는 듯했다. 공동 창업을 했던 회사가 온통 풍파에 휩싸이면서 그와는 한동안 연락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다시 나타났다. 좀 더 홀가분한 모습으로, 하지만 여전히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비데이즈 유범령 대표다.

◆정수환을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

학생 유범령은 국민대학교에 입학했다가 미국 학교에 도전했다. 미국 사립 명문대인 코넬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경제학과 통계학을 배웠다. 국내 대학에 다니다가 외국 대학으로의 진학을 결정하는 것은 본인의 인생에서 엄청난 결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대학이 유명대학이라는 이유 뿐 아니라 완전히 다른 문화 속에서 온갖 인종들, 다양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섞여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게 그에겐 더 소중한 기회가 됐다고 한다.

그가 사업가의 길을 가는 것은 코넬이 제공해주진 않았다. 당초 그는 로스쿨에 진학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로스쿨에 가기 위해 한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만난 정수환이 그의 인생 진로를 바꿔놨다. 유범령과 정수환을 비롯해 또래의 대학생들은 청년과 미래라는 사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학비 마련을 위해 유범령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도 두 사람은 자주 봤다. 그리고 유범령이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 진학 등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정수환이 제안을 했다. “창업 같이 합시다!”

IT창업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그의 인생에 창업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얼마쯤은 친구의 아이디어와 열정에 끌려서 얼마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시작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코넬대학 시절 어떤 동기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해외 시장을 무대로 비즈니스를 하고픈 꿈 같은 것 말이다.

앱디스코의 급성장, 그리고...

두 사람이 시작한 회사는 앱디스코. 앱디스코의 사업 모델과 초기 창업 스토리는 이 코너에서도 설명한 바 있다.

정수환, 유범령 등이 2011년 7월 설립한 앱디스코의 주력 서비스는 애드라떼. 광고를 보면 커피 한 잔이 나온다는 컨셉트로 시작된 서비스다. 정수환 대표는 당시 불과 한 학기 남은 학교(고려대)를 그만두고 사업에 ‘올인’할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사업에 목숨을 걸었다고 한다.

처음 애드라떼의 경쟁력은 영업이었다. 어차피 영업을 통해 광고를 따내야 했고 다행히 이들은 이 분야에 경재력이 있었다. 젊었고, 뭐든 해보겠다는 의지가 충만했으며, 마침 시장이 매우 초기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애드라떼는 광고주들이 올린 광고를 볼 수 있는 앱이라고 보면 된다.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기 때문에 단순 광고는 아니었다. 광고를 열심히 보면 적립금이 쌓였다. 친구를 초대하면 500원씩 현금이 생겼다. 이것으로 진짜 커피를 사먹을 수 있었다. 이런 보상 요인 때문에 애드라떼는 급성장했다.

물론 여기엔 어두운 측면도 있었다. 보상을 노린 사용자들이 급증하면 단기 자금이 어려워질 수 있다. 하나하나는 푼돈이지만 모이면 큰 돈이 되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 어려움에 빠질 때도 있었지만 이들은 부지런히 자금을 확보했다. KT에서 투자도 유치했다. 물론 나중에 KT로부터 받은 이 투자로 인해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되기도 했다.

KT와 관련된 수사가 마무리되고 관련성이 없음이 입증된 뒤 그는 앱디스코를 나왔다. 타이밍이 공교롭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는 본래 계획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1년만 같이 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점점 늘어나 3년이 됐죠. 3년째가 되면서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어서 준비를 했죠. 때가 돼서 나온 거에요.”

◆광고 시장에 아직 할 게 많다!

일단 나왔지만 그는 당장 진로를 정하진 않았다고 했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광고 시장에 대한 미련이 아직 있었다. 어찌보면 그가 앱디스코에서 했던 광고 상품은 틈새시장이었다. 그는 모바일 시장에 더 큰 기회가 있다고 믿었고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구체화하고 싶었다.

그가 애드라떼를 서비스하면서 만난 수많은 앱 개발사들은 모두 수익모델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광고를 탑재했고 많은 광고상품들, 모바일 광고대행사와 미디어렙 등이 이들을 위한 상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다운로드 수가 많고 이용자 수가 많은 상위 10%의 스마트폰앱은 이런 형식의 모바일 광고를 하지 않는다는 걸 유 대표는 알게 됐다. 왜? 앱이 지저분해지기 때문이다. 앱이 지저분해지면 사용자가 떠나고 사용자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상위 10%의 앱들은 바라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이것 말고도 다른 수익모델이 있기에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 대표는 이런 최상위 앱을 대상으로 한 광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를 ‘유니클로가 아니라 테일러메이드 양복같은 상품’이라고 표현했다. 월 평균 사용자수(MAU)가 최소 10만 이상 되는 100개 앱을 고객사로 모시는 것. 내년까지. 이게 그가 정한 구체적인 목표였다. 영업력은 검증됐고 업계가 돌아가는 구조는 이미 앱디스코 시절에 다 파악했다.

앱디스코 시절에 그가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개발력의 중요성. 처음부터 해외 시장 진출, 글로벌 서비스 등을 염두에 두고 통합 서비스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에 필요한 개발인력을 갖춰야 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번엔 처음부터 개발력을 갖추는 데 총력을 다했다고 한다.

2014년 7월, 그는 이런 생각을 구체화하는 모비데이즈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창업을 하자마자 그의 사업모델은 쟁쟁한 인물들의 인정을 받았다. 프라이머의 이택경 대표, 퓨처플레이 류중희 대표, YJM엔터테인먼트 민용재 대표, 다음카카오의 조민식 사외이사 등이 엔젤투자자로 투자를 한 것이다.

모비데이즈는 ‘국내 최초 모바일 전문 마케팅 기업’을 모토로 미디어 렙, 모바일 게임 마케팅, 에드 네트워크, 글로벌 모바일 광고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해외 20개국 100여개이상의 광고대행사, 애드네트워크, Ad Exchange, SSP와 협업하는 광고 플랫폼 ‘모비 더블유(Mobi W)’를 앞세워 글로벌 비즈니스를 활발하게 계획하고 있다.

“옛날로 치면, 대우정신? 그런 게 저한테는 좀 있는 것 같아요. 국내 시장은 너무 좁아요. 해외로 가야죠. 할 게 정말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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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스물 여섯의 나이에 벌써 사업을 해 보고 두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이것 만으로 큰 자산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세번째 사업에 도전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런 사람에게 투자를 하겠는가 안하겠는가. 정수환 앱디스코 대표는 대학생 시절 창업을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 시작한 사업에서 짧은 시간 안에 정착하고 있다.

대학생 시절에는 젊은 혈기와 청년다운 이상주의적인 사고로 사업에 접근했던 그는 쓰라린 경험을 겪은 뒤 현실에서의 사업이 무엇인지에 대해 몸으로 완전히 체득한 인물 같았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두 번 실패를 겪은 사람이 세번째 시작하는 사업에는 반드시 투자하라고 말을 하곤 하는데 그의 경우가 이에 해당될까. 애드라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정수환 대표를 만났다.

◆태권도 선수에서 고대 총학생회장까지
창업자들을 만나다보면 별별 사람이 다 나오지만, 이제는 드디어 운동선수 출신까지 나왔다! 정수환 대표는 중학생까지 태권도 선수였다.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고 하니, 대단한 실력의 보유자였던 것 같다.(사실 그 당시 전국체전 금메달이면 아마 해당체급에선 세계 랭킹에서 손가락에 꼽힐 수준이 아니었을까) 곱게 자란 청년같은 외모지만 운동선수였다는 경력은 꽤나 이채롭다.

 그의 부모는 부유하진 않았지만 아들의 판단과 나름의 삶을 존중하는 분들인 것 같다. 운동을 시작했을 때도, 잘 하던 운동을 그만두고 성과가 불확실해보이는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를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뭐든 하면 죽을 힘을 다해 하는 것이 정수환이라는 사람의 스타일일까.

 태권도를 할 때도 그랬다. 태권도 선수 초기 시절 그는 자신의 체력이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훨씬 달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술도 부족했다. 그냥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남들보다 2배 이상 연습을 했다. 타이어도 끌고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별 걸 다해봤다고 한다. 태권도를 만만치 않게 해 본 기자가 봐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공부를 해도 그는 제대로 했다. 요즘처럼 아주 어릴때부터 영재교육이다 과외다 하는 분위기에 비하면 한참 늦은 셈이다. 그래도 열심히 해 고려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2005년이었다. 

◆하고 싶은 건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그가 느낀 것은 학생들의 목소리가 학교에 잘 반영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는 자신이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고심했다. 나이 차이 때문인지 기자가 대학에 다닐 때 본 학생회 인물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른바 대의명분에도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는 ‘정치적 인간’의 모습도 띄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하고 싶은 건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했다. 이런 성격은 나중에 사업을 하면서도 여러가지 모습을 나타난다. 고집스럽다는 단점이 있지만 판단이 맞을 경우 확실한 의지와 방향성을 갖고 일을 추진할 수 있다.

 학생회장이 된 것도 가장 큰 이유는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 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뭐든 악착같이 달라붙어 제대로 하고야 마는 그 성격과 추진력이 그를 학생회장으로 만들었다. 2008년 그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됐다. 하지만 총학생회장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숙제를 안겨줬다.사회공헌 활동과 이 활동을 청년들의 단체를 통해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더 강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추진하기에 1년이라는 총학생회장 임기는 너무 짧았다. 물론 뭐든 어떤 것을 책임지는 자리에 가면 시간이 짧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2009년 청년 단체 활동을 시작한 그는 어찌보면 처음으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게 된 것 같다. “금전적인 필요성을 느꼈어요. 돈이 없으면 사회 공헌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거죠. 그래서 외주 개발일을 맡아서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러다가 기업을 통해 사람들에게 가치를 주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라는 걸 알게 됐죠.” 2010년, 대학생 정수환은 그래서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두 번의 실패
사업 경험이 없이 개발 용역만 동료들과 해본 경험이 전부였던 그에겐 경험자의 조언이 필요했다. 카카오 이제범 대표는 그에게 사업을 위한 멘토가 돼줬다. 잠시 카카오에서 일하며 사업을 한다는 것, 대표이사가 된다는 것에 대해 어깨너머로 배운 그는 법인을 설립했다. 청년 단체 활동을 하면서 외주개발을 해 모은 돈 3000만원이 사업 밑천이 됐다. “개인 사업으로 시작하면 흐지부지될까봐 주식회사로 시작했어요. 처음엔 왕십리에 하루에 만원 내면 사무실 대여해주는 곳을 썼죠. 결국엔 안암동 학교 앞에 사무실 차리게 됐습니다.”

 경험이 없다는 것, 그리고 사업을 하기로 했지만 아직 현실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다는 것은 그에게 실패를 경험하게 했다. 사회공험 쪽에 관심이 많아 ‘선행을 릴레이하자’라고 하는 사회적 기업의 성격을 지닌 사업이 그의 첫 일이었다. 자본도 없고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고객 CS부터 사진 및 편집까지 그가 다 맡아서 했다. 경험 부족에 사업 성격이 모호한 점이 맞물려 첫 사업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바로 다시 도전에 나섰다. 2010년 10월 소셜커머스 서비스 해피즌을 시작했다.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고 한다. 첫 사업을 실패한데다 소셜커머스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이미 티켓몬스터 쿠팡 위메이크프라이스 등이 펄펄 날고 있었고 글로벌 1위 기업 그루폰이 한국에 진출하네 마네 하는 소문이 돌던 시점이었다. “저도 힘들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긴 했죠. 그런데도 해 보고 싶어라구요. 그래서 무작정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주위 사람들의 만류때문인지 그는 친구들과 함께 시작하면서 시한을 걸었다. “3개월 해 보고 안되면 접자”  늦게 하다보니 투자 받기도 쉽지 않았고 지출만 늘었다. 게다가 소셜커머스라는 영역은 마케팅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어느 정도 규모가 되고 ROI가 나오기 힘든 구조다. 그루폰도 아직 BEP를 맞추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결국 3개월 만에 사업을 접게 됐다. 2011년 초였다 이것저것 합하면 1억 넘는 빚만 지게 됐
다. 같이 일하던 친구들도 모두 그를 떠났다.

◆애드라떼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실패는 혹독했다. 힘들 거라 예상은 했지만 훨씬 힘들었다. “정말 아침에 일어나 해를 보기가 싫더라구요. 생각해보면 그때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빚 문제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떠나갔다는 것이 그를 더 힘들게 했다.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의 특징은 힘든 가운데도 뭔가 활동을 하면서 재기를 모색한다는 점이다. 그 역시 그랬다. 대학동기인 황원준씨를 만나 창업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최신 트렌드를 공부했다. 둘은 결국 창업을 하게 된다.  “해피즌 당시에 정말 열심히 했지만 기본적인 경험이 부족해서 초기에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비즈니스모델에 대한 판단 같은 게 부족했던 것 같아요. 시장을 리드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실패를 곱씹던 그는 문득 그는 소셜네트워크에서 광고를 하는 것이 아직 국내에서 본격화되지 않았고 해외에서는 가능성을 이미 보여준 분야라는 것에 착안했다. 그래서 그는 2011년 7월 앱디스코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뭔가 신나게 해보고 싶다는 뜻에서 작명했다. 사업 직전 학교를 그만뒀다. 졸업을 불과 한학기 남겨뒀는데 말이다.

 “졸업은 하지 그랬어요?”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 약해지고 결단을 못 내릴 것 같아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승부사적인 면도 엿보인다. 물론 빚을 갚아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그는 그래서 ‘이 사업에 목숨을 걸었다’고 했다. 애드라떼의 키워드는 영업이었다.사업 시작 전 투자를 받으려고 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직접 영업을 뛰면서 광고를 받았다. CJ 등에 직접 컨택해서 20여개의 대기업으로부터 미리 광고영업을 수주받은 상태에서 시작했다. 확실히 수월했다. 즉 분명하게 돈이 되는 분야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광고를 보고 카페라떼 한 잔’이 처음 내세운 모토였다. 그래서 이름도 애드라떼로 지었다.

 “해피즌처럼 수익이 나지않는 사업을 경험하고 아예 처음부터 바로 매출이 생길 수 있는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애드라떼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광고의 흐름이 소비자에게 혜택을 돌려주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독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발로 뛰는 영업력으로 사업을 본 궤도에 올려놨다는 평을 듣고 있다. 애드라떼 앱을 실행하면 광고주들이 올린 광고를 볼 수 있다.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기 때문에 단순 광고는 아니다. 광고를 보면 적립금이 쌓인다. 친구를 초대하면 500원씩 현금이 생긴다. 이것으로 진짜 커피를 사먹을 수 있다. 이런 보상성때문에 애드라떼는 지난해 8월 출시된 이후 4개월여만에 누적 다운로드 수 100만건을 달성했다. 일본에도 진출해 앱스토어 무료분야 전체 순위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해외에서 성공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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