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벤처 붐은 없다?

한국의 스타트업 2012. 11. 12. 22:07 Posted by wonkis

벤처기업이 급격히 늘어나는 최근의 현상을 제2의 벤처 붐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까. 이에 대해 벤처기업 수가 급증하고 있지만 정부의 정책 자금을 받는 기업이 대부분이어서 최근의 벤처 열풍을 결코 ‘제2의 벤처붐’으로 볼 수 없다는 분석이 니왔다. 시장 활성화에 따라 벤처 생태계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정부자금의 정책적 지원 대상이 늘어난 것 뿐이라는 뜻이다.  

 김기완 한국개발원(KDI) 연구위원은 12일 ‘제2의 벤처붐을 맞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최근 몇 년간 벤처 기업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시장의 평가를 받았다기 보다는 정부 지원을 받아 생존한 업체들”이라며 “정부 자금받는 벤처의 급증이 정부의 벤처지원제도가 남용된 결과는 아닌지, 또 벤처지원제도가 기업 성장을 유도한 것이 아니라 벤처 지위를 유지하도록 유인한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한다”고 지적했다.


◆10개 중 9개는 정부지원 받는 벤처

KDI보고서에서 인용한 중소기업청 집계 자료에 따르면 2010년말 국내 벤처기업 수는 2만4645개로 사상 최대 수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벤처기업 수는 2001년 1만1392개까지 늘었다가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2003년 7702개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후 다시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 2010년 2만개를 돌파했다.

 김기완 연구위원은 이들 중 90.6%인 2만2231개가 기술보증기금, 중소기업진흥공단 등의 지원을 받는 정부지원 벤처라고 분석했다. 벤처캐피털 업체들이 냉정한 평가를 통해 투자한 회사는 622개(2.5%)에 불과했다. R&D(연구개발)를 위주로 하는 연구개발기업의 비중도 6.4%에 그쳤다. 

 김 연구위원은 벤처 수는 갈수록 늘지만 코스닥 상장 벤처기업은 오히려 줄어드는 현상을 지적했다. 2005년 전체 9732개 벤처기업 중 405개 기업(4.2%)이 코스닥에 상장돼 있었지만 2010년에는 2만4645개 벤처기업 중 1.2%에 불과한 295개만 상장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지원 업체는 상장비율이 더 낮았다.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설립된 2만5698개 벤처 중 정부 지원을 받은 업체는 2만539개. 이 중 1.8%인 385개사만 상장됐다. 하지만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받은 벤처는 1566개사 중 5.5%인 86개가 상장했다. 김 연구위원은 “정부지원보다 시장에 의한 선별이 기업 성장에 더 효과적이라는 뜻”이라며 “최근엔 벤처 수만 늘어날 뿐 시장에서 평가받아 성장하는 경우는 줄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만든 ‘가짜’ 벤처생태계

김 연구위원은 정부가 지원을 하는 기업의 규모(매출액 기준)가 2005년 매출액 25억원대에서 2010년 10억원대로 추락하는 등 계속 축소되고 있다는 것도 지적했다. 정부 지원을 받은 뒤 매출이 줄거나 정체되는 회사가 많다는 점도 문제다. 정부의 자금이 점점 더 영세한 기업에만 집중되고 성장과 무관했다는 것은 정책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을 시사한다.

 김 연구위원의 이런 지적은 벤처업계에서 일찍이 논란이 됐던 부분이기도 하다. 전문성에 의한 경쟁력 평가를 기반으로 정부 지원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테마를 정해놓고 무조건 집행하기 때문에 옥석이 가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의 벤처 열풍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창업의 테마를 좌지우지하고 이를 따라다니는 벤처인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지적은 꼭 비판적인 벤처캐피털리스트 뿐 아니라 업계의 벤처기업인들도 계속해서 지적해 온 문제들이다. 권일환 퀄컴벤처스 한국대표는 “한국은 정부가 테마를 정해놓고 투자자금을 배분하면 거기에 맞춰 벤처들이 태어나는 전형적인 정부주도형 벤처생태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벤처생태계는 정부가 만든 가짜 생태계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류한석 기술문화연구소장은 “특정 테마를 정해놓고 50개 벤처를 지원하라는 지침이 내려지면 회사의 사업 내용, 전망, 기술력 등을 도외시한 채 무작정 숫자만 맞추는게 지금 한국의 벤처지원제도”라며 “이렇게 정부가 억지로 만든, 경쟁력없는 가짜 벤처생태계에 돈을 넣는 것은 세금 낭비”라고 비판했다.

 전반적으로 김 연구위원의 문제 의식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벤처 붐은 과거에도 정부 주도형이었다. 다만 벤처캐피털 업체들이 투자하는 회사가 전체 벤처기업 중에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한국에서 벤처 붐이란 아예 없었다는 것이 맞지 않을까. 더 중요한 것은 벤처캐피털 업체들이 투자하는 회사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정부가 지원하는 벤처기업의 규모는 점점 작아진다는 것. 아주 초창기에 있는 벤처기업들이 시장에서 평가받고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어쨋든 결론은 명확하다. 정부는 직접 지원을 하는 그런 방식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것. 어떻게 하면 벤처캐피털업체들이 좀 더 리스크를 떠 안고 투자를 확대하도록 할 지, 그런 환경을 만드는 데 좀 더 골몰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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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을 예약하는데 할인을 받아서 간다? 흔한 소셜커머스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 서비스엔 쿠폰이 따로 필요없다. 소셜커머스의 약점이나 단점을 없애는데 주력해 재고나 과잉 주문 등의 부작용이 없다. 무엇보다 매장 주인이나 매니저들이 따로 뭘 학습하거나 조작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위시랜드는 철저하게 매장을 운영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그들의 입장에서 활용하기 쉬운 그런 레스토랑 예약 서비스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은 창업자가 매장을 직접 운영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서비스를 만들었기 때문. 레스토랑을 소셜커머스 사업의 하나로 하는 것이 아니라 레스토랑 플랫폼 비즈니스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위시랜드 최윤호 대표를 만났다.

◆창업을 동경한 공대생

최윤호 대표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다고 한다. 남자들은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든가, 아니면 완전히 반대의 극단적인 길을 걸어가기 쉽다. 그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사업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게 됐다고 한다. 

 연세대학교 신소재공학과 04학번으로 입학했지만 학교 분위기는 그가 생각했던 것과 딴판이었다. 그는 “벤처기업인들 중에 연대출신들도 많지만 컴퓨터공학과 산업공학과를 제외하면 다른 공대 출신은 찾기 힘들다”고 전했다. 그러고보니 나도 취재중에 그와 비슷한 백그라운드를 자주 접하진 못한 것 같았다. 김세중 젤리버스 대표가 연대 같은 과 출신이지만 최 대표보다 몇년 선배다.

 창업을 동경한 최 대표는 3학년때 경영학을 복수전공으로 택했다. 그런데 공부보다는 분위기를 익힌 게 더 도움이 됐다. “경영대 공부가 정말 창업에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래도 공대와 분위기는 확실히 달랐고 그쪽 분위기가 저에게 더 맞았습니다. 그걸 확인한 게 소득이었죠. 공대에서 실험실 인턴 생활도 했는데 스타일이 잘 맞지 않았습니다. 너무 정적이라고 생각했죠.”

 학점에 쫓겨 그는 끝내 경영대 복수전공을 마무리하진 못했다. 창업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을 뿐 주위에 조언을 구할 선배도 없었다. 보통 이런 경우 일단 군 문제부터 해결한다. 그도 2008년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도 창업을 어떻게 하면 시작할 수 있을까에 골몰했다. 2010년 제대하자마자 주식투자를 했는데 다행히 운이 좋았다. 주식으로 돈을 좀 벌었지만 그는 그 수익에 취하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든 사업 경험을 해보고 싶었는데, 이 돈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죠. 크게 일을 벌이긴 힘들 것 같아 우선 커피숍부터 하나 해 보기로 했어요. 제가 그런 쪽에 관심이 많기도 했구요.” 그는 그 돈으로 ‘카페베네 반포삼호가든점’을 열었다. 아직 카페베네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기 전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훗날 큰 기업을 일궈내는 사람들 중에는 어릴 적 장사를 하면서부터 수완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돈을 버는 법칙이란 어디나 비슷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1년 남짓 카페베네를 운영했지만 그는 순식간에 서초구 지역 커피전문점 매출 1위에 오를 정도로 수완을 발휘했다. 그가 카페베네 문을 처음 열 때 바로 맞은 편에 커피빈 매장이 있어서 본사에서도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우려가 있었다고 한다. 너무 강력한 경쟁자가 있어서 사업이 되겠냐는 거였다. 그는 우선 그 지역의 특성을 파악했다. “커피숍이 보통 11시면 문을 닫쟎아요. 그런데 그 동네엔 인근에 젊은 사람들이 밤에 앉아서 대화를 나눌 만한 그런 공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24시간 영업을 도입했죠.”

 체력과 배짱이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근처에서 주목을 받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사업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매장을 운영하면서 향후 사업에 필요한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는 점. 영업을 위해 매장 점주로서 소셜커머스도 직접 써 봤다. 소셜커머스는 손님들로 매장을 채우는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관리비용을 유발했다. 갑자기 수요가 몰리거나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등 수요 변화가 심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잔여석을 이용한 온라인마케팅 플랫폼’, 위시랜드의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그가 매장운영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의 일을 다 해결할 수 없다는 거였다. 가장 큰 이유는 점주나 업소 매니저, 지배인들에 대한 교육이 불가능하기 때문. “사실 대부분의 매니저들은 식당이 잘되는 것보다 일이 적고 돈 많이 주는 곳을 선호하죠. 업소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인데요, 이 주인들은 보통 영업시간엔 없고 매니저들에게 가게를 맡기고 외부에 있어요. 가게의 중요한 결정을 이 매니저들이 결정한다는 뜻인데 이들은 괜히 일을 크게 벌리거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길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럴 이유가 별로 없죠.”

 매장 주인들로서는 손님 관리 못지 않게 골치아픈 것이 직원 관리. 아르바이트생부터 쉐프까지 수시로 이직이 일어나기 때문에 매니저들 CRM 교육 시켜봤자 이직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괜히 경쟁사 좋은 일만 시켜줄 수 있다. 

 매장 주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레스토랑 분야의 생리를 잘 알게 됐다는 것. 그것이 그가 가진 장점이었지만 처음에 그는 전혀 다른 분야의 사업을 택했다. 이른바 ‘소셜닥터’라고 불리는 시장이었다. 

 “오프라인 사업을 해 봤기에 온라인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IT 지식과 경험이 필요했죠. 소셜커머스 시장이 폭발하는 것을 보면서 소셜쪽 분야에 도전하고픈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6개월 정도 해보니 안되겠다 싶더라구요.”

 왜 그랬을까. 우선 그의 장점은 온라인이 아니었다. 짱짱한 개발진을 보유하고 IT 기술로 승부를 보기엔 기반이 약했다. 그의 장점은 오프라인이었다. 공동 창업자로 합류한 류형석과 고지훈 역시 생각이 같았다. 소셜닥터 준비를 접고 바로 오프라인 레스토랑에 좀 더 집중한 서비스 준비에 들어갔다. 이들은 올 1월 법인을 설립하고 준비한 지 2개월여만인 올 3월 서비스를 출시했다. 

◆전국 레스토랑의 토탈 마케팅 플랫폼

이렇게 해서 탄생한 위시랜드는 ‘원하는 레스토랑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가격으로 쿠폰없이 즐기자’를 내세웠다. 레스토랑에 할인쿠폰을 가져가면 할인을 받을 수 있는 기존 소셜커머스와 뭐가 다를까. 

 우선 메뉴 제한이 없다는 게 가장 큰 특징. 세트메뉴는 안된다던가, 음료는 안된다든가 이런 제한이 전혀 없다. 30% 할인이면 무조건 30% 할인이다. 쿠폰을 따로 제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기존 소셜커머스와 차별화된 점. 쿠폰을 확인하느라 서로 쑥스럽고 번거로운 그런 과정을 없앤 것이다. 그 대신 예약을 반드시 해야 한다. 예약을 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쿠폰 확인이 필요없다. 예약을 할 때 3000원의 예약금을 고객으로부터 받는 것도 포인트. 업소 입장에서는 손님의 방문에 대한 신뢰를 더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고객에게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마음이 바뀌면 3000원을 날려야 한다.

 업소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이를 위해 아무것도 따로 배우거나 조작할 필요가 없다는 것. 비교적 고급레스토랑 위주로만 하기 때문에 업소들 간 ‘우리가 저런 식당이랑 같이 소셜커머스를 해야겠어’라는 위화감을 최소화할 수 있다. 잔여 좌석을 활용한다는 것도 특징이다. 이게 가능한 것은 최윤호 대표가 카페베네를 운영하면서 얻은 노하우 덕분. “매장을 운영하다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언제 매장이 비고 언제 꽉 차는지. 언제 대략 몇 석이 남는지를 알게 되죠.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대부분 매장 주인의 이런 예측은 다 맞아떨어집니다.”

 12월에 위시랜드는 리뉴얼이 예정돼 있다. 우선 고객으로부터 받는 3000원 예약금 제도를 폐지할 계획이다. 고객들의 진입장벽을 낮추겠다는 것. 매장의 광고와 마케팅을 도와주는 기능을 강화한다. 잔여좌석 마케팅 플랫폼이 아니라 레스토랑의 토탈 마케팅 플랫폼이 되겠다는 것. 

 카페베네 1년여의 경험을 그가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 그는 직원들 관리로 골치아파하는 자영업자들, 레스토랑 주인들의 헤드헌팅을 컨설팅하고 이를 대행하는 기능도 향후 추가할 계획이다. 그렇게 해서 현재 80개 수준인 제휴 레스토랑 숫자를 연말까지 100개로 늘리고 내년에는 300개로 확대한다는 게 최 대표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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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은 슈퍼맨. 별명처럼 한국인같지 않은 외모가 우선 눈에 띈다. 미국인을 연상케 할 정도의 큰 덩치에 안경을 쓰면 선해보이지만 안경을 벗으면 갑자기 인상이 부리부리해진다. 타파스미디어를 최근 설립한 김창원 대표는 아블라컴퍼니 노정석 사장과 함께 과거 태터앤컴퍼니 공동 대표를 지내다가 구글에 회사를 매각한 뒤 구글에서 3년반 정도 일을 했다. 태터앤미디어는 구글이 아시아에서 인수한 유일한 벤처기업이기에 그와 그의 회사도 제법 유명세를 탔다. 

 그가 새로 시작한 타파스미디어는 미국에 설립한 미국 법인이다. 하려는 사업이 독특하다. 한국에서 태동해 특화된 웹툰이라는 장르의 세계 진출이라는 다소 색다르고 엉뚱한 그런 목표를 갖고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지만 한국의 웹툰 문화를 갖고 미국을 포함한 해외에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보겠다는 포부다. 싸이가 자신이 만든 스타일의 음악을 들고 세계 무대로 나가 해외 시장을 공략하는 것과 비교해볼 수 있을까.

◆세계적인 기업에서 일을 배우다

김창원 대표는 원래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하지 않고 얼마 안 있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시간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 물리학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후 삼성전자에 취직했다.

 삼성전자에서 그가 일한 곳은 무선사업부. 글을 쓰기 좋아하는 그는 삼성전자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잡지 등에 글을 기고했는데 통신 기술과 무선인터넷의 발전 방향에 대해 쓴 그의 글을 읽고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김창원 대표는 글을 맛깔나게 재미있게 쓰는 편이다. 평소 대화할 때 드러나는 기묘한 유머감각이 글에도 배어 있다.) 인젠을 창업했고 태터앤컴퍼니를 만든 아블라컴퍼니 노정석 사장이었다. 당시 노정석 사장은 두번째 창업인 젠터스에서 쓴 맛을 보고 SK텔레콤 ‘대리’로 근무하고 있었다. 

 무교동의 한 낙지집에서 만나 식사를 함께 하며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금방 친구가 됐다. 벤처업계 젊은 벤처인들 사이에서 형님뻘로 통하는 노정석 사장은 평범함과는 완전한 극단에 있는 인물인데, 이런 사람과 만나자마자 대화가 통하고 친구가 됐다는 점에서 김창원 대표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임은 분명한 것 같다.

 그때 만난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뜻이 통한 두 사람은 태터앤컴퍼니에서 다시 만났다. 2005년말 노정석 사장이 태터앤컴퍼니를 창업하고 2006년 김창원 대표가 이 회사에 공동 대표로 합류한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과 의기투합은 좋은 결말을 맺었다. 2008년 태터앤컴퍼니를 구글이 인수하면서 이 회사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구글이 인수한 벤처기업’ 이 됐다. 

 그 뒤로 한동안 김창원 대표는 구글에서 일했다. 2년여 구글코리아에서 PM(프로덕트매니저)로 있었고 2010년 이후엔 구글본사로 넘어갔다. 본사에서 블로그&닷컴의 서비스기획과 리뉴얼을 담당하였으며, 구글플러스 프로젝트의 PM이자 유일한 한국인 멤버로 활약했다.

◆웹툰에 빠져 창업을 꿈꾸다

그가 아마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그 좋은 회사를 다니다 왜 창업을 하겠다고 뛰쳐나왔냐?”는 걸거다. 아무리 예상했던 일이라고 할 지라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창업을 고민하던 시점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직장으로 손꼽히는 구글에 다니고 있을 무렵. 구글코리아에서 2년을 일하다 본사로 건너갔기 때문에 “회사에 다시 입사한 것 같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살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 외국계 기업에서 일해왔고 영어를 구사하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한국인. 한국 사람이 외국 회사의 본사에서 일하는 게 녹록했을 리 없다. 더군다나 경쟁이 치열한 구글이니. 

 본래 그는 만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남들이 흔히 보던 유명 만화가들의 작품도 그는 전혀 접하지 않았다. “저는 만화책을 즐겨 보고 그런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웹툰은 즐겨보게 됐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한 방법으로 그가 웹툰을 보게 된 것은 아닐까. 만화책과 달리 웹툰은 호흡이 짧으면서도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그날그날의 이슈가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픽보다는 스토리 구성에 더 강점이 있는 게 웹툰이기도 하다. 기묘한 유머감각을 갖고 있는 김 대표로서는 기존의 만화보다는 재치가 넘치고 시대의 이슈가 반영된 웹툰이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생전 만화를 안 보다 어느 날 갑자기 웹툰을 열심히 보는 자신을 보면서 김 대표 스스로도 놀랐다고 한다. 그가 가장 열심히 찾아본 것은 야후코리아에서 제공하던 웹툰서비스. 

 “웹툰을 너무 자주, 많이 보면서 한편 느낀 것은 약간의 허탈감이랄까. 왜 그런 거 있쟎아요. 만화를 너무 열심히 보고 나면 한편으로는 스트레스도 풀고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 내가 괜히 시간 낭비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고. 할 일도 많은데 말이죠. 그러다가 어느날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 웹툰을 보면서 시간낭비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웹툰으로 사업을 해보면 되겠구나!’ 그래서 이 분야를 알아보기 시작했죠.”

 그가 발견한 것은 웹툰이라는 장르는 한국에서 시작해 한국이 키워낸 놀랍고 혁신적인 IT 미디어 콘텐츠 플랫폼이라는 것. 하지만 한국의 시장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네이버 다음 등 극소수 포털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돼 있고 이들이 국내 시장에 안주한데다 독점 구조라서 성장이나 해외 진출에 대한 의지도, 계획도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웹툰 시장이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웃음과 재미라는 코드는 어차피 모두 같은 법. 형식이 문제가 아니기에 점차 웹툰 방식의 서비스를 하려는 업체들이 생겨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이 원조인, 희귀한 분야인데 뺏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지들을 규합했다. 

◆웹툰으로 세계시장에 새로운 한류 모델 만든다

그의 이런 열정과 준비태세를 보고 UC 버클리 하스 스쿨을 졸업한 장영준씨가 CCO(최고콘텐츠책임자)로 공동 창업을 하기로 했다. 장영준씨가 합류하면서 하스 스쿨 출신 또는 버클리 출신의 우수한 실리콘밸리 인재들이 타파스미디어에 합류했다.

 창업진들에 대해 장영준 공동창업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직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거나 가진것을 모두 버린 사람들이 여기 타파스 미디어에 모였습니다. 공동창업자 김창원 대표님, 자식이 둘이고 멀쩡히 수억대 연봉 받으시던 분이 이 아이디어에 대한 열정 하나, 저와의 신뢰 둘, 이렇게 무기 삼아 회사 때려치우고 새로운 도전에 온 몸을 던졌고,  저는 그 약속에 답하기 위해 학교를 한학기 조기 졸업하고 모든 안정된 취직 자리를 던졌습니다. 우리 웹개발자들 역시 대기업의 기회를 버리고 우리의 비전에 동참해주셨으며, 마케팅 팀은 모두 하스출신의 유능한 제 친구들로서 역시 대기업 자리대신 우리의 프로젝트에 동참해주었습니다. 작가들 역시 모두 출중한 실력이 있으나 대기업이 시키는대로 그림만 그리는 환경보다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우리를 선택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다른 기회를 포기하였고, 이제 두 손에 가진것이 없이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 한다면, 열정과 실력에 대한 자신감, 그 두가지 가슴에 품었을 뿐입니다.”

 타파스미디어에서 타파스(Tapas)는 스페인어로 핑거스푼, 또는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소량의 음식을 뜻한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그런 콘텐츠와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가 되겠다는 지향점이 담겨 있다.

 타파스미디어는 웹툰을 미국에서 서비스하는 전문 포털 타파스틱(www.tapastic.com)을 10월8일 오픈했다. 모바일 앱도 만들었다. 타파스틱의 미션은 우선 2가지. 웹툰 문화가 거의 없다시피한 미국 등 서구 사회에 한국의 시작한 웹툰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대표 플랫폼이 되겠다는 것.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일으키고 이를 선도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한국 작가들의 해외 진출을 도와 한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보겠다는 것. 타파스틱에는 현재 50여 편의 작품들이 연재 중인데 지금까지 10편의 한국 작품을 선정해 현지에 최적화된 번역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연재를 지원하고 있다. 김 대표는 “타파스미디어의 목표는 타파스틱을 통해 새로운 플랫폼을 제공하고 시장 구조를 개편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김 대표의 별명은, 모두에서도 밝혔듯이 수퍼맨이다. 스타트업과 대기업, 글로벌기업, 벤처기업을 두루 다니며 경험하고 학습한 그가 처음으로 하는 창업은 그의 별명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만화라는 분야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수퍼맨을 포함한 영웅히어로를 앞세운 DC와 마블 코믹스의 수퍼맨 군단과 경쟁해야 할 처지가 됐다. 수퍼맨과 수퍼맨의 대결인 셈이다. 이 정도면 한국의 스타트업 100회째로 손색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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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기반한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실제 모든 서비스는 오프라인에서 이뤄진다. 마이리얼트립이라는 회사는 이름처럼 여행과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여행이란 몸이 움직여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온라인에만 머물러서는 아무것도 이뤄질 수가 없다. 

 진부한 듯 보이지만 온라인과 모바일을 통한 오프라인 세계의 변화와 발전은 사실 모든 서비스과 상품의 근본이다.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이 실제로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진짜 여행을 보여주겠다는, 마이리얼트립은 여행을 무지무지 좋아하는 두 사람이 만들었다.

           <마이리얼트립 창업멤버들. 왼쪽 끝이 백민서 부사장. 오른쪽 끝이 이동건 대표.>

◆위대한 기업가가 되려면?

마이리얼트립의 이동건 대표는 위대한 기업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날 때부터 이런 꿈이 그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이런 꿈을 갖게 된 것은 2009년 가을 한 학회에 가입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05학번인 이 대표는 공군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2009년 고려대 내 학회인 미래기업가들의 모임(FES)에 들어갔다. 경영학과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학회에 자연스럽게 가입했다고 할 수 있지만 들어가서 기업가들에 대한 케이스스터디를 하면서 꿈이 자라났다. 위대한 기업들이 어떻게 사업을 시작했고 어떤 어려움을 거쳐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계속 들여다보면서 자신도 그들과 같은 기업을 일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독일에 교환학생으로 6개월동안 가게 된 것도 그에겐 행운이었다. 독일에서 만난 학생들에게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무엇을 할 지 이야기하던 중 전략컨설팅 펌(회사)에 들어가 사회생활을 하며 경험을 쌓은 후에 창업을 하겠노라고 자랑스럽게 말 한 것이다. 자신의 꿈은 위대한 기업가가 되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독일 학생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사회 생활을 하는 것도 좋지만 기업가가 꿈이라면 창업을 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거였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 이 대표는 귀국해 바로 창업 준비에 착수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맞다고 판단되면 바로 받아들이고, 오래 고민하지 않고 실행에 옮긴다는 점이다. 

 처음에 그가 한 사업은 크라우드펀딩이었다. 일종의 사회적 기업이다. 지인들, 친구들과 함께 창업을 했다. 처음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사업은 꽤나 순조로왔다. 미국, 유럽 등지에서 이미 가능성을 보여줬던 사업 아이템이지만 한국에서도 이런 방식의 펀딩에 대해 예상보다는 사람들의 거부감이 적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을 어떻게 버느냐였다. 

◆빨리 실패해봐야 일찍 성공한다

원래 크라우드펀딩 사업은 확실한 수익 모델이 있다. 돈을 제대로 끌어 모으고 적기에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 사람과 돈이 모인다면 거기서 회사 생존을 위한 돈은 충분히 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게 안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어처구니 없는데, 그 당시에도 크라우드펀딩 쪽에 경쟁이 제법 있었어요. 경쟁자들을 의식하면서 우리가 뭘로 차별화할까를 생각하다가, ‘남들은 수수료 받는데 우리는 수수료 받지 말자’는 제안을 회사에서 한 거에요. 제가 회사를 이끌어가는 입장이었는데 그런 말을 한 거죠. 내부에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추진했어요. 그 덕에 인기는 끌었는데, 돈은 못 벌었죠.”

 어찌보면 학생다운 순수한 마음으로, 또는 너무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를 몰라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른다. 그때 이 대표는 처음 알았다고 한다. 돈을 번다는 것이 그냥 회사를 굴러가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고. “조금만 일이 안 풀려도 자신도 모르게 다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내가 돈도 못 버는 이런 일에 왜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지?’라구요.”

 그러면서 사업의 추진 동력을 잃었고 초기 창업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거의 그 혼자 남았을 때 그는 사업을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대학교 동창인 백민서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백민서 역시 과 동기인 이동건의 사업 소식을 비슷한 시기 들었다.

 백민서 부사장은 학교를 일찌감치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에 유학을 떠났다. 사회정책 분야에서 석사학위를 따고 프랑스에 있는 기업 입사가 결정된 상태에서 그는 비자 문제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 일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일정이 뒤엉켜버렸다. 크라우드 펀딩, 그것도 인디밴드를 위한 크라우드펀딩 사업을 한다는 말을 듣고 사업을 좀 도와주겠다고 나섰는데 일이 커져버린 것이다. 2011년 11월, 두 사람은 새로운 서비스로 새롭게 출발하기로 하고 권도균, 이택경 대표를 만나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런데 오히려 두 분이 소셜 여행상품으로 서비스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구요. 마침 저희도 여행을 너무 좋아하고 모델이 매력적이어서 좋다고 했죠. 함께 이야기하면서 모델을 발전시켜나갔고 법인을 설립하기도 전에 2011년 12월말 프라이머의 투자를 받게 됐습니다.” 백민서 부사장의 설명이다.

◆진짜 여행을 할 수 있는 곳, 마이리얼트립

2011년말부터 서비스 개발을 시작한 이들은 2012년 2월 법인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서비스 출시를 준비했다. 그런데 중간에 이들의 표현대로 하면 서비스를 한번 ‘엎었다.’ 왜?

 “서비스를 어떻게 구현하는 게 좋은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근사한 웹사이트를 하나 만드는 것 같은 기분으로 시작했죠. 겉모습에 많이 치중하다보니까 화려하지만 별 쓸모없는 기능만 있는 그런 사이트가 되는 것 같았죠. 그래서 기획을 다시 해서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어요.”

 이들은 콘텐츠에 집중해 사이트를 만들었다. 누구나 여행상품을 만들어 팔 수 있는 ‘여행상품 중개 플랫폼’을 컨셉트로 내세웠다. 한국을 포함해 각지의 유학생, 주재원, 전문 가이드 등 가이드로 현지의 역사와 문화, 유적지 등을 보여주고 이를 여행상품화해 팔 수 있는 그런 사람들과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꾸며진다. 

 사이트가 얼마나 쓰기 편한지, 여행 상품을 통해 사람들의 만남이 어떻게 이뤄지고 얼마나 잘 되는지를 직접 알기 위해 이동건 대표가 자사 사이트를 이용해 직접 가이드로 변신, 여행객들을 모집해보기도 했다. 

 사실 이 서비스에서 온라인은 안정적으로 구현되고 편리하면 그 뿐, 진짜 중요한 것은 오프라인에서 여행이 어떻게 돌아가느냐다. 특히 가이드의 수준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상품이 핵심이다. 가이드는 현재 100여명 정도가 등록돼 있다. 가이드가 등록을 하기 전에 스카이프를 이용해 면접을 진행하고 있다. 직접 대면 인터뷰를 통해 가이드를 뽑는 여행사 상품에 비해 가이드 수준이 떨어지지 않을까. 이들은 이것을 활발한 온라인커뮤니케이션과 다른 여행사 상품에 비해 보다 쉽고 자유롭게 상품 구성이 가능하고 재야에 숨은 고수 가이드들이 마음껏 참여할 수 있도록 장을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수수료를 받는게 이들의 수익모델이다. 수익모델의 중요성을 첫 사업 실패로 깨달았기에 이들은 수익모델이 확실한 사업을 선택했다. 다만 다른 여행사 등이 하고 있는 광고, 제휴 등은 진행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선 여행이라는 분야에 있어서나, 사업이라는 분야에 있어서나 아직 모두 초보이고 아마추어처럼 보이는 이들이 힘겹게 사업을 이끌어간다는 것을 약점으로 꼽을 수 있다. 이들에 초기 투자한 프라이머의 역할이 아마 이런 것을 보완해주는 것일 거다. 하지만 우리는 어차피 모두 다 아마추어아닌가. 다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기를. 이런 서비스로 인해 기존 업계의 관행이나 문제점을 고치고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그렇게 해서 소비자들, 또는 고객들이 누리는 효용이 높아지고 만족도가 커진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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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이 시점에 이 일을 하지?” 어떤 일이 눈 앞에 닥쳤을 때, 또는 어떤 기회를 만났을 때, ‘닥쳤으니 해야지’ 하면서도 의미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 중 상당수에 대해 우리는 이유와 목적, 방향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지나고 나서 보면 그때 겪었던 일들이 나중에 자신의 삶에 자양분이 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직접적인 생존 또는 성공의 근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비교적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방향이 조금만 틀어지면 살아가면서 겪는 온갖 일들이 자신을 해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북잼 조한열 대표는 자신도 뚜렷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금의 사업을 착실하게 준비해 창업한 그런 케이스가 됐다. 이 과정의 대부분을 그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매 순간 그가 막연하게나마 어떤 지향점을 갖고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나온 과정들이 협력하여 선한 결말을 맺었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와 더불어 한국의 벤처산업을 움직이는 양대 산맥에 해당될 정도의 학교·학과지만 94학번 출신 중에는 창업자가 적은 편이다. 80년대 후반 선배들에게 창업의 광풍이 몰아닥친 후의 어떤 공백기 같기도 하다. 조 대표는 서울대 컴공과 94학번이다.

 졸업하고 그는 넷사랑컴퓨터라는 벤처기업에서 병역특례로 일했다. 소프트웨어를 제작해 수출하는 회사였는데 유닉스 윈도에서 작업한 내용을 MS 윈도에서 작업할 수 있는 에뮬레이터를 제공했다. 다른 수많은 창업자들의 스토리처럼 그도 이 회사에서 사람을 하나 만났다. 그게 넷사랑컴퓨터에서 가장 보람된 일 아니었을까. 한동대 전산전자공학부 96학번 출신의 유찬씨는 그 당시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이자, 경쟁자였다. 물론 처음부터 함께 창업을 계획할 정도의 친분이 이들에게는 없었다.

 항상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일에 골몰하던 조 대표는 병특을 마치고 2005년 칩셋미디어라는 회사로 입사했다. “소프트웨어는 어느 정도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드웨어를 너무 모르겠더라구요. 하드웨어 부분을 알아야겠다 싶어서 들어갔습니다.”

 2008년까지 이 회사에 있으면서 동 하드웨어 칩셋과 동영상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그는 그저 하드웨어가 궁금해서 들어간 거였지만 하필이면 이 회사가 동영상 인코딩, 디코딩 및 관련 칩을 만드는 회사여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모바일 환경에서 동영상 및 각종 프로그램의 구동 원리를 배우게 된다. 

 회사를 잘 다니던 그가 창업에 대해 처음 생각하게 된 것은 2006년부터. “사실 이렇게 힘들 줄 몰랐으니 창업했죠. 하하. 그런데 당시엔 어린 마음에 이런 치기어린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 최고경영자가 어떤 것들을 고려해서 결정을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답답한 부분도 있었고, 나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거죠. 나중에 창업을 해서 보니 창업자의 고충을 알겠더라구요.”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2006년 첫 사업 아이디어를 구상한다. 블로그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있는 많은 콘텐츠를 수집하고 편집해서 보여주는 그런 일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큐레이션인데, 그 당시엔 그 말이 생각이 안났다고 한다. 사업계획서를 만들었지만, 그에겐 일을 같이 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그에게 한 사람이 떠올랐다.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

사업 준비 막바지 시점에 조 대표는 다니던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었다.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넷사랑컴퓨터에서 함께 일했던 유찬씨가 회사를 나오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됐다. 소식을 듣자마자 조 대표는 그를 찾아가 함께 창업을 하자고 설득했다. 함께 일해봤기에 그의 실력을 알고 있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머리 속에 그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인터큐비트라는 회사를 2008년 설립했다.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돈을 버는게 중요했기에 서비스를 개발하면서 외주 용역을 계속 따서 했다. 한 사람이 외주 일을 하면 다른 한 사람은 본업인 서비스를 개발하는 일을 했다. 6000만원짜리 아이폰용 앱 개발 용역을 따내기도 했다. 물론 나름대로 분명한 원칙을 세우고 용역을 했다고 한다. “돈만 보고 덥석 하지 말고 미래에 도움이 될 용역을 하자.”

 그러던 어느날 작은 출판사에서 그를 찾아왔다. 2010년이었다.  

 “전자책을 내겠다면서 용역을 해 줄 수 있냐고 찾아왔어요. 2000만원을 불렀는데, 깜짝 놀라더라구요. 그 정도의 액수인줄 상상도 못했겠죠. 저흰 저희대로 출판 시장을 전혀 몰라 나름대로 금액을 많이 낮춰서 불렀다고 생각했어요.”

 서로 의견이 안 맞았으니 그냥 돌려보내고 끝났을까. 그렇지 않았다. 출판사를 만나고 호기심이 든 그는 그때부터 전자책 시장 스터디를 시작했다. 시장이 될 거라 생각했다. 출판사와 다시 만난 그는 돈을 계속 낮추다 결국 공짜로 만들어주고 이익을 쉐어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앱을 한 달 만에 뚝딱 만들었다. 그 때 나온 책이 ‘청춘을 뒤흔든 한 줄의 공감’이었다. 처음 만든 책이 앱스토어에서 2위까지 올랐다. 생각만큼 돈이 많이 되진 않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시장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봤어요.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효율적으로 잘 전환하고 제작비를 낮추면 수익을 낼 수 있을 거라고 봤죠.”

 그리고 본격적으로 전자책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 이름도 북잼으로 바꿨다. 위즈덤하우스와 계약을 체결하고 2011년 1월31일 ‘사소한 차이’라는 전자책을 출시했다. 이 역시 전체 2위까지 올랐다. 게임이 아닌, 전자책으로는 대단한 판매량이었다. 유료인데 1만7000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여러 회사에서 전자책을 만들고 있었는데 북잼이 만든 것은 확실히 달랐다. 왜 다를 수 있을까. 이들은 책 만드는데 완전 초보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2008년 외주를 했다고 했죠? 그때 웹브라우저 용역도 했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일이 완전히 전자책과 똑같은 일이었어요. 저도 모르게 전자책을 오랫동안 준비한 셈이 됐죠.” 

◆10년을 해도 질리지 않을 일 

히트작이 줄지어 나왔다. 닥치고 정치는 3만부가 넘게 팔렸고 올 9월 3일 출시한 열혈강호는 한달도 안 돼 10만부를 돌파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이들이 만든 책들이 자신들만 독자적으로 만든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 열혈강호의 경우 북잼이 만들기 전에 이미 여러 회사들이 개발, 출시했었다. 하지만 북잼이 만든 열혈강호는 그 이전에 다른 업체들이 만든 열혈강호 전자책 버전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팔렸다. 왜 그럴까. “이퍼브가 한국 실정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답이다.

 무슨 소리?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퍼브는 외국에서 만든 거쟎아요. 그런데 미국만 해도 하드커버와 페이퍼백 시장이 나눠져 있어요. 재생용지로 만들고 한번 읽고 버리는 그런 소설책을 비롯해 가볍게 읽는 책들은 대부분 페이퍼백으로 나오죠. 이퍼브는 하드커버와 비교되는 게 아니라 페이퍼백과 비교돼죠. 충분히 읽을 만해요. 그런데 한국은 전혀 달라요. 하드커버가 아니더라도 책들이 다 고급스럽고 예쁘죠. 그래야 팔려요. 페이퍼백이 한국에는 불편하고 낯설어요. 그러니 페이퍼백 느낌의 이퍼브를 좋아할 리가 없죠. 완전히 다른, 우리만의 제작툴,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든 것이 BXP. 북잼만의 이른바 독자적인 전자책 포맷이다. 독자적인 포맷이 성공 가능성이 있을까. 일단 시장이 아직도 초기 상태라는 것. 이퍼브 체제가 한계를 보였다는 것. 자체 서점을 오픈해 확장을 꾀한다는 것이 조 대표가 생각하는 가능성이다. 

 전자책 사업을 하면서 얼마나 동기부여가 될까. “앞으로 10년을 더 이 일을 하면 기분이 어떨까를 생각했죠. 질리지 않고, 즐겁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그러면서 결정을 했습니다.”

 북잼 포맥의 장점은 여러 해상도에 대응해 최적의 색을 낼 수 있고, 디자인이 예쁜 데다 종이책의 느낌을 그대로 살릴 수 있다는 것. 이 장점을 앞세워 10월말에 저작툴을 공개하고 11월 중에는 독자적인 전자책 서점도 선보일 계획이다. 10년 넘게 초기 시장 상태라는 전자책 시장의 암울함이 그와 북잼에겐, 오히려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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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7일이 인터넷이 처음 시작된 날. 인터넷의 생일이다. 회사 이름을 이렇게 지은 건 인터넷이 시작된 날, 세상이 연결되고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그런 감격적인 순간처럼 그런 서비스를 세상에 선보이겠다는 이들의 열망이 담긴 것 같았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소셜 데이팅 서비스를 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인터넷이 그랬듯, 희망과 행복을 주고 싶은 게 에이프릴세븐의 창업자들이 생각한 거였다. 에이프릴세븐은 오로지 컴퓨터가 좋고 인터넷에 꿈을 품은, 이 회사의 창업자들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계속해서 도전해 온 간단치 않은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PC통신으로 프로그래밍 독학

남경식 대표는 중학교 2학년때 프로그래밍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 상당히 빠르다. 프로그래밍을 배우게 된것은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됐다. “학교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 사람 있냐고 물었는데, 전 그게 워드 할 줄 아는지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해서 할 줄 안다고 했죠. 하하”

 특이한 학교다. 어린 학생들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다니. 하여간 그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진짜로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시작했다. 책을 보고 공부를 했을까. 중학생이 하기엔 쉽지 않았을텐데. 그는 PC통신에 개설돼 있는 동호인들 모임방에서 자료를 받아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90년대 후반이니 PC통신이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점이다. 환경이 제대로 받쳐준 때 그 기회를 잘 이용한 셈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그의 컴퓨터 사랑은 계속됐다. 궁금한 것이 생겼지만 학교에서도, 동호인 모임에서도 해결이 안 될 때는 잠깐씩 컴퓨터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 잠시 컴퓨터 학원에 배우려고 갔다가 나중에 함께 창업하게 되는 두 사람(김진환, )을 만났다. 

 관심사가 같고 뜻이 맞으니 계속 연락을 한 세 사람. 학교를 각자 다른 곳으로 갔지만 전공은 모두 같았다. 남 대표는 연세대학교 03학번으로 입학해 기계공학과 컴퓨터공학을 복수 전공했다. 학교에 들어간 이듬해, 세 사람을 창업을 하기로 했다. 창업을 안하고는 못 배기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기 때문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한 번 해볼만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창업을 하기 전 남 대표는 학교 교수님을 찾아가 창업 상담을 받았다. 그런데 창업하지 말라는 소리만 들었다고 한다. “지금 창업하면 정말 실패할 확률이 99.9%라는 말씀을 하더라구요. 하하”

 교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는 웹에이전시 회사를 차렸다. 돈을 벌면서 사업을 해가면 될 거라는 게 이들의 기본적인 가정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의 예측대로 이들은 보기좋게 실패했다.

◆보약이 된 첫 실패

홈페이지 등을 외주로 제작하는 것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됐다. 일감을 따오는 것은 아는 사람들을 통해, 각종 게시판 등을 통해 이뤄졌고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이들이 너무 경험이 없다는 것. 대학에 들어간 지 1년이 갓 지난 학생 3명이 사업에 대해 뭘 알았겠는가.

 계약서 작성에 서툴렀던 이들은 일감을 수주한 뒤 계약을 파기하거나 A/S를 무리하게 요구하는 고객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때로는 몇 번씩이나 재개발을 요구하는 바람에 당초 수주했던 개발비의 몇 배나 되는 비용이 들어가기도 했다. 그래도 나이도 어린 데다 업계의 룰을 잘 몰랐던 이들은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던 듯 하다. 

 하지만 이런 시행착오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사업을 한 목적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외주를 받아서 돈을 벌어가면서 우리가 진짜 만들고 싶은 서비스를 만들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다보니 주객이 전도됐죠. 해보고 싶었던 서비스는 만들지 못하고 외주 일을 해결하느라 정신없었어요.”

 결국 8개월 만에 사업을 접었다. “손해를 많이 봤나요?” 내가 물었다.

 “시간을 손해 본 거죠. 금전적인 피해는 거의 없었습니다. 빚은 지지 않았으니까요.”

 충격을 받거나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까. “사실 그 때 창업의 꿈을 접었던 것 같아요. 한 차례 혼이 난 것처럼 한동안 생각하지 않고 학교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했으니까요. 그때 사업을 접으면서 창업자들끼리 모여서 ‘학교 졸업하고 회사 다니면서 경험을 좀 쌓은 뒤에 만나서 다시 창업하자’라고 얘기하고 헤어졌는데, 사실 한동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끼가 어디갈까. 학교로 복귀해 컴퓨터공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병역특례로 파수닷컴에서 근무를 하면서 다시 슬금슬금 창업에 대한 열망이 피어올랐다. 벤처 기업에서 일하고 업계 사람들을 만나면서 잊고 있던 꿈이 다시 생각났다. 2004년 함께 창업했다가 실패를 경험했던 두 친구들도 비슷했다. 다른 회사에서 병특으로 군 생활을 마친 둘이서 먼저 창업을 했다.  

◆소셜데이팅에서 커플 서비스로 발전

처음에 선보인 서비스는 워드 브레이크라는 일종의 영어 단어 암기장과 같은 서비스. 모바일 교육 시장을 노린 것이었고 제법 사용자들도 모았지만, 문제는 돈이 안됐다. 2004년에 돈이 안 돼 고생을 겪었던 이들인지라 돈이 안되는 서비스에 대한 불안감이 컸을 것 같다.

 다시 창업을 할까 말까, 친구들의 모습을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경식 대표가 이때부터 투입돼 함께 사업 모델을 갖고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맞댄 이들이 찾은 것은 소셜 데이팅 서비스. 당시엔 이미 국내에서도 이음소시어스가 먼저 시작해 막 성과를 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보기엔 소개팅 시장은 분명 비전이 있었다. 일단 확실한 수익 모델이 있고, 아직은 크지 않지만 분명한 타깃층이 존재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쉽게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듣고 이를 구체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2011년 1월 사업화를 결심한 이들을 불과 3개월여만에 뚝딱하고 코코아북 서비스를 런칭했다. 

 이미 시작한 업체가 있는 상황에서, 어떤 차별화를 고민했을까. 남 대표는 “3가지 포인트가 다르다”라고 말했다. 돈 쓰는 포인트가 우선 다른 소셜데이팅 업체와 다르다는 게 남 대표의 설명. 다른 사이트는 해당 사람과 연결을 할 지 말지 오케이 사인을 보낼 때 돈을 지불하는 구조인데 코코아북에서는 상호 연락처를 확인할 때 돈을 지불한다. 1 대 1로 만남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3대 3 단체 미팅이 이뤄진다는 점도 차별화 포인트다. 한 사람을 보고서 오케이를 할 지 말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세 사람 중에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다는 장점이 있다. 소개를 낮이 아니라 밤에 한다는 점도 특이한 부분이다. 

 이런 점이 어필해서일까. 소셜데이팅분야에서 코코아북은 25만여명의 회원을 모으며 이음에 이어 2위에 올라섰다. 남 대표는 코코아북을 그냥 소개팅 관련 서비스에만 머무르게 할 생각이 없다. 커플 위한 사업으로 확대한다는 것이 1차적인 구상이다. “소셜 데이팅 관련 서비스의 특징은 여기서 커플로 맺어지면 회원들이 떠나거든요. 목적을 달성했으니까요. 하지만 커플들이 계속 머무르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관리하게끔 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사용자 기반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VCNC가 서비스하고 있는 '비트윈' 같은 서비스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연인들, 커플들의 관계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부가 서비스도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시급한 것이 앱을 업그레이드하는 것. 남경식 대표는 올해 안에 코코아북 앱을 업그레이드, 다른 앱들과 연계성을 강화할 수 있도록 전면 개편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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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프로야구 각 구단의 1루수 중에는 유난히 강타자가 많았다. 삼성라이온스의 이승엽 선수가 그렇고, 한화이글스의 김태균 선수, 롯데의 이대호 선수(현 오릭스 버팔로스) 등이 우선 떠오른다.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기아타이거즈의 최희섭 선수, SK의 박정권 선수도 만만치 않은 1루수 출신 선수들이다. 통계적으로 역대 타자 MVP 18명 가운데 11명이 1루에서 배출됐다는 것을 봐도 1루수는 검증받은 선수들의 자리였다.

 그래서 회사명을 ‘일루수’로 지은 황지영 대표를 만났다. “일루수처럼 모바일 시대의 강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담았다. 회사 이름에 야구의 특정 포지션을 쓴, 재미난 상상력의 팀이다. 회사가 잘 되면 사업을 넓혀가면서 이루수, 삼루수, 유격수 등으로 이름을 단 회사를 세우는 등 확장할 수 있다며 즐거워하는 일루수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뻔한 것은 못 참는 여성 공학도

황지영 대표. 오랜만에 이 코너에 등장한 여성 CEO다. 화학공학을 전공으로 한 그는 “뻔히 안 될 것이 분명한 일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고 본인을 설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처음부터 윗선의 여러가지 지시와 그에 맞춰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게 싫었다고 한다.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 일이 떨어졌을 때 회사를 나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소신이 뚜렷하고 강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도 있고, 조직형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 덕에 여러 회사를 옮겨다녔다. 부산 출신으로 부산의 모 종금사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가 IT(정보기술) 분야로 발을 옮기게 된 것은 필명 도이모이(Doimoi)라는 사람이 쓴 칼럼을 읽고 난 후였다. 

인터넷이 앞으로 세상의 변화를 주도할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 글을 읽고, 황 대표는 IT업계로 옮겼다.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곳에 자신을 던진 것이다. 

 다모임, 조이온, 엔씨소프트, 한컴 씽크프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그런 회사들에서 주로 프로젝트 단위로 움직이며 일을 했다. 직접 프로그래밍을 하는 일 보다는 기획 업무를 맡았지만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하다보니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회사를 옮기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일을 싫어하는 성격도 크게 작용했다. 이런 경력이 샐러리맨으로 계속 그렇게 살려고 한다면 단점이 되겠지만, 회사를 창업했으니 현재로선 딱히 단점이 될 일도 없을 듯하다. 

 이야기가 잘 이어지지만, 여기서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회사 생활이 지겨워져서 창업을 했다?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창업에 원래 관심이 엄청 많았던 거 아닌가요?” 아니나 다를까, 혼자서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검증받으러 여러번 다닌 경력이 있었다.

 “주로 게임 쪽에서 사업 아이디어가 좀 있었어요. 제가 프로그래머가 아니었기 때문에 게임을 직접 만드는 것과 관련된 아이디어는 아니었구요, 게임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대한 아이디어였죠.”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아이디어를 다듬은 그는 국내 한 유명 게임회사 창업자를 찾아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 회사의 사업 방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기좋게 거절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완전히 꿈을 접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혼자서 시작한 창업

회사를 많이 옮겨다녔지만 계속 뜻을 함께 하면서 호흡을 맞췄던 사람들도 주위에 생겼다. 그런 사람들 5명이서 창업을 모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아서인가. 생각과 달리 추진이 잘 되지 않았다.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고,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무작정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거쟎아요. 그래서 창업을 할 때 초창기 멤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인 것 같아요. 그런 열정이 없으면 일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는 혼자가 됐다. 혼자가 됐어도 그는 시작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한테 말했죠. 창업 자금 좀 빌려달라고. 사실 결혼하고 둘이 같이 모은 돈이었지만,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 사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의 지지를 얻은 그는 2012년 5월 혼자서 회사를 설립했다. 당장의 현실때문이지, 1인 창업을 해서 회사를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가장 시급한 인물은 CTO(최고기술책임자). 믿을 만한 사람에게 CTO를 맡아달라고 청을 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줬다. CTO가 확정되면서 디자이너, 마케팅 담당자 등 다른 멤버들도 채워졌다. 프로젝트 방식으로 회사 생활을 해 온 그는 창업도 그렇게 했다.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그 프로젝트를 이 멤버들과 하는 식이다. 성과나 함께 일을 하는 과정에 따라 계속해서 같이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느슨한 형태의 창업멤버들이다.

◆자연스럽게 ‘공감’을 나누는 ‘비타민’

이들의 첫 작품은 공감을 나누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비타민’. 10월중 서비스가 출시된다. 아이폰 용으로 먼저 나오고, 안드로이드 버전은 추후 출시될 예정이다.

 출시되기 전의 비타민 서비스를 살짝 맛봤다. 이름처럼, 이 서비스는 고된 하루에 지친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거나 외로운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그런 공감형 서비스다. 

 서비스를 실행하면 자신의 그날 기분을 표현할 수 있는 창이 뜬다. 그날 내 기분을 입력하는 방식은 아니다. 너무 다양하게 기분을 표현하면 오히려 소통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16가지로 제한했다. 그 정도만 되도 대략 그 날의 자신의 기분을 알리는 데 부족함은 없을 것이란 판단이다.

 내 기분을 표현하면 소통과 공감을 위해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것이다. 많은 다른 앱들이 그렇듯, 이 앱도 역시 다운로드하는 순간 스마트폰 주소록에 있는 지인들과 자동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무작정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기분을 표현해야 네트워킹이 시작된다. 내가 그날 그 어떤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고 싶지 않으면 기분을 표현하지 않으면 된다. 

 나는 기분을 표현하지 않지만 친구 중에 그날의 기분을 표현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아주 우울한 친구가 있다고 치자. ‘오늘 술이나 한잔 할까’, ‘힘내 내가 있쟎아’, ‘힘든 일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야’ 등 위로의 멘트를 날리고 싶다. 여기서 통상적인 SNS와 다른 비타민의 특징이 나타난다. 비타민은 텍스트를 입력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없다. 슬쩍슬쩍 미는 방식으로 나의 기분을 표현한다. 즉 미리 준비된 멘트를 선택해 이를 상대방에게 보내는 것이다. 어떤 말을 해줄까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나만의 독특한 멘트를 보내긴 어렵지만 쉽고 편안하게 상대방에게 한 마디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SNS가 발전하고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익숙해질 수록 개개인의 일상 생활은 더욱 외로워지는 경향이 있다. 주소록에 친구는 넘쳐나지만 막상 힘들때 내 기분을 표현하고 위로받기는 힘든 것이다.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 등에 기분을 남길 수 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볼 우려가 있다. 기분이 우울하다는 글에 ‘좋아요’를 누르기도 그렇다. 바쁘게 살다보니 일일이 텍스트를 입력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런 이들을 위한 SNS다. 

 ‘하루에 한 번 감정 터치’ 황지영 대표가 내세운 비타민의 캐치프레이즈다. 감정 표현에 서툰 사람들도,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수월하게 표현해 소통할 수 있다. 악플을 달 수 없는 구조라는 장점도 있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NHN 밴드 등 기존 모바일 기반 SNS가 놓치고 있는 최소한도의 심플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빈틈을 파고들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서비스를 소개하고 다니다보니 헬스클럽이나 회원제 운영 서비스 등에서 회원 관리에 아주 좋은 서비스라는 말을 들었어요. 많은 사람들과 복합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 대화 시간이 부족한 사람 등에게 유용할 것 같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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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자들의 구성이 이 정도 된다면 아마 ‘드림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표이사는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사업 기획과 영업까지 경험해 비즈니스 마인드가 확실하고 최고기술책임자(CTO)와 디자이너는 서로 절친이어서 신뢰가 깊다. 대표와 CTO는 같은 과 선후배 사이이면서 오래 알고 지내 호흡이 잘 맞는다. 이런 멤버들이 각자 열심히 경험을 쌓다가 모여서 창업을 했다. 뭔가 될 것 같지 않은가? 그런 예감이 크게 빗나가지 않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회사는 카카오톡 게임하기에서 스타로 떠오른 ‘아이러브커피’를 만든 파티스튜디오다.

◆비즈니스 경험을 쌓은 엔지니어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99학번으로 입학한 이대형은 입학 후 얼마 안 있어 선배인 김정주 넥슨 사장을 만난다. 김정주 사장이 넥슨의 초기작 중 하나인 ‘퀴즈퀴즈’를 알리고 후배들을 뽑기 위해 컴퓨터공학과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짧지만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그리는 미래를 봤는지도 모른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다날에 입사, 병역특례를 시작한 그는 처음엔 휴대폰 결제 쪽에서 자신의 전공인 프로그래밍 업무를 했다. 그때 그가 개발한 것이 ‘컬러링 플러스’라는 서비스. 자신의 상태를 문자로 기록해두면 부재시 전화가 왔을 때 컬러링(전화연결음) 서비스에서 자신의 상태를 상대방에게 알려준다. 회의중이라던가, 운전중이라던가 등등. 서비스는 사람들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돈은 제법 벌었다. 통신사들이 이 서비스를 약정 조건에 일종의 끼워팔기로 집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뭐랄까. 좀 허탈했어요. 개발자로서 약간의 좌절감도 있었구요. ‘아무리 잘 만들면 뭐하나. 영업이 훨씬 중요하지 않나’ 이런 생각도 했죠.”

 2005년 병특은 끝났지만 그는 학교로 복학하지 않았다. 때마침 다날이 중국에 진출했는데 그는 중국지사 근무를 자청해 나갔다. 새로운 시장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다날 중국지사에서 그는 결제사업을 총괄했지만 이때부터 엔지니어가 아닌 사업기획자로서의 인생이 시작된다. 중국 업체들과 결제 계약을 따내기 위해 특히 중국 게임업체들을 줄기차게 만나고 다녔다. 지금은 최대 게임 회사로 성장했지만 그때만 해도 게임에 막 입문하기 시작했던 텐센트와 일을 하면서 사업 기획을 하기도 했다.

 2007년 귀국한 그는 제이투엠소프트라는 게임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된다. 내심 그는 게임 개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박종흠 사장이 이번에도 그에게 비즈니스 일을 맡겼다. 그덕에 그는 이번엔 제이투엠의 대표작 ‘레이시티’를 들고 전 세계를 누비며 영업을 했다. “전 세계의 게임 전시회는 다 가본 것 같아요.”

◆환상의 창업팀

 2008년말 미국 게임회사 EA가 제이투엠을 인수하면서 그는 갑자기 현금을 손에 쥐게 된다. 제이투엠의 지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EA에서의 생활이 썩 즐겁지만은 않은 것 같다. 벤처에 계속 있다가 글로벌 대기업에 들어간 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다가 시키는 일만 하는데 진력이 난 이대형은 답답한 마음에 2010년 EA 리크루팅을 자청해서 하다가 2010년엔 커피숍을 인수했다. 답답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직접 고객을 오프라인에서 만나면서 그는 새로운 세계에 눈뜬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진로가 다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커피숍 운영에 대한 어떤 로망이 있는 것 같았어요. 커피숍을 운영하면서 그걸 느꼈죠.”

 사람들의 이런 로망을 실현하게끔 해주면 어떨까. 비록 가상의 공간에서라도 말이다. 게임을 만들어서 하면 되지 않을까. 시장 상황을 살펴보니 싸이월드와 네이버 등이 앱스토어를 웹페이지에서 서비스하면서 소셜게임이라는 장르가 국내에서도 형성되고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하지만 EA를 나오긴 쉽지 않았다. 4년 계약을 하고 들어갔기에 그냥 나올 경우 보유하고 있던 주식 상당수를 포기해야 했다. 잠깐 동안 그는 고민을 했다. 그래도 대기업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훨씬 컸다. 결국 그는 보유 주식 중 절반 이상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회사를 나왔다.  

 창업에 대한 결심을 굳히자 사람이 떠올랐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2년 후배이자 메이플스토리를 만든 위젯이라는 게임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했던 임태형이 생각났다. 이대형 대표 본인도 의식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제이투엠 시절부터 창업을 하겠다고 곧잘 주위에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때 그가 내심 찍어놓고 있던 상대가 임태형이었다. “제가 볼 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게임 개발자입니다. 올림피아드 출신으로 실력은 미이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이죠. 저와 뜻도 통하니 더욱 좋구요.”

 임태형은 혼자 오지 않았다. 위젯에 있으면서 그와 함께 메이플스토리를 개발했던 심정섭씨를 설득해 함께 왔다. 심정섭은 아트디렉터를 맡기로 했다. 비즈니스와 개발자, 디자이너로 구성된 3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창업진이 구성됐다. 서로 다른 장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들이 공통적으로 인터넷과 게임이라는 분야에서 계속 일했다는 것도 이들의 화학적 결합을 용이하게 했다.

◆실전 경험을 녹였다!

이대형 대표가 소셜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하던 시점은 사실 국내에서는 소셜게임이 이미 기울고 있던 때였다. 2011년초 법인을 설립하고 바로 게임 개발에 들어갔지만 하필이면 그 때는 싸이월드 앱스토어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국내 소셜게임 시장이 정체되던 시기였다. 당시 선데이토즈, 피벗스튜디오, 고슴도치플러스 등 소셜게임 개발사들이 수백만명의 사용자를 확보하며 활약하고 있었지만 돈이 안된다는 게 점차 입증되고 있었다. 싸이월드 플랫폼에서는 사용자들에게 돈을 쓰게 하는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싸이월드 자체에 있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점점 간단한 게임은 PC를 떠나 스마트폰에서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즉 시장이 PC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동하고 있는 게 소셜게임의 진짜 어려움이었다. 하지만 파티스튜디오에게는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기대치를 좀 낮추고 시작했습니다. 국내 시장은 테스트베트 정도로 하자고 했죠.”

 2011년 7월11일. 싸이월드 앱스토어에 아이러브커피를 출시했다. 자신이 커피숍을 운영하면서 겪은 노하우를 게임에 담았다. 그냥 커피숍을 운영하고 키우는 것에만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디테일을 살렸다. 사람들이 커피숍을 운영하는 것은 손님을 만나고, 서비스를 하고, 매장을 가꿔 나가고 커피를 만드는 그런 과정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커피숍 운영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손님이든, 주인이든 커피숍에 들어갔을 때 할 법한 행동, 동선, 과정 등을 충실하게 그대로 담으려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이미 기울고 있던 시장에서 아이러브커피는 40만명 가량의 사용자를 확보했다. 하지만 시장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선데이토즈가 겪었던 것처럼, 파티스튜디오 역시 사용자에 비해 수익이 나질 않는 시장을 보며 그해말 중국 시장에도 게임을 선보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용자는 400만명이 넘게 확보했지만, 역시 돈이 되질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대표는 확신했다. “모바일로 가자.”

◆진짜 승부는 해외 시장에서

사실 아이러브커피는 이미 검증된 게임이다. 돈을 비록 예상만큼 많이 못 벌었다고 할 지라도, 당시 이유 중 상당수가 플랫폼 문제라면 모바일에 와서 플랫폼은 카카오톡이라는 거대한 플랫폼이 해결해줬다. 판이 깔리면 준비된 자가 도약하기 쉬운 법이다.

 올들어 모바일 게임 개발에 나서기 시작했지만 콘텐츠가 탄탄하다는 장점을 앞세워 아이러브커피는 순식간에 스타 게임이 됐다. 2012년 8월 서비스를 시작해 사흘 만에 일 매출 1억원을 찍었고 9월에는 일 매출이 2억원 가까이 치솟았다. “처음에 서비스를 하면서 3개월 안에 일 매출 1억원을 기록하는 게 목표었는데 그걸 사흘 만에 달성할 줄은 몰랐죠.” 20, 30대 젊은 여성을 타깃으로 한 것도 주효했다. 현재 가입자 150만명, 일일 사용자수 70만명, 동시접속자 수는 13만명을 기록하고 있다.

 아이러브커피는 시작일 뿐이다. 파티스튜디오는 차기작 개발과 함께 해외 진출도 계획하고 있다. 아이러브비트를 9월 중 비공개 시범서비스 형태로 시작하고, 연말께 대중에 공개할 예정이다. 내부적으로 검토하다가 아이러브커피가 속칭 대박이 나면서 인력 부족 등으로 중단했던 프로젝트 아이러브팜도 10월 중 재개해 내년 2분기 중에는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일본 시장은 이미 어느 정도 판이 깔렸다. 아직 공개 시점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서비스업체를 정해놓고 논의 막바지 단계에 와 있다. 10월부터는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아이러브커피를 즐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중국 시장은 이대형 사장의 궁극적인 지향점 중 하나다. 다날 시절에, 제이투엠 시절에, 그는 중국 시장을 계속 두드렸지만 실패를 맛봤다. 카카오톡 조차 나중을 기약하고 있는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이대형 사장은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 시장에서 겪었던 시행착오가 그에게 보약이 될 수 있을까.

 뮤지컬 ‘페임(Fame)’의 한 대사를 살짝 바꿔 인용, 이대형 사장과 파티스튜디오가 보여줄 모바일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해본다.  “You ain‘t seen the best of him yet.”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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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디지에코(www.digieco.co.kr)의 '스타트업 스토리' 코너에 지난 주 실린 글입니다. 이정웅 사장과 선데이토즈에 대해선 2010년에 한 차례 작성한 바 있지만 2년여의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내용이 추가돼 업데이트합니다. 기존 글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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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에 2012년을 기억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까.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IT(정보기술) 산업에만 국한해 본다면 모바일 시장이 대폭발을 한 시기라고 역사에 남지 않을까. 마치 10여년전 PC기반의 인터넷 광고와 온라인 게임 시장이 급성장을 하기 시작한 시점이 떠오를 정도로 2012년은 과연 언제 올까하고 수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모바일 분야의 급성장이 본격화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대를 연 회사 중 가장 대표적인 회사로 이 글은 선데이토즈라는 한 벤처기업을 지목한다. 네트워크는 통신사가, 사람들 간의 연결은 카카오톡과 같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모바일 시대를 열었지만, 선데이토즈는 이 시장을 기대하던 많은 이들이 가장 목말랐던 이른바 순수 모바일을 통한 대박의 역사를 쓰고 있다.

 선데이토즈가 만든 스마트폰용 게임 애니팡은 카카오톡 게임하기를 통해 안드로이드 마켓에 출시한 지 5주만에 1000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일일 사용자는 600만명을 돌파했다. 동시접속자수는 무려 200만명에 달했다. 동시접속자수 기록은 온라인게임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엄청난 숫자다. 선데이토즈의 또 다른 게임 아쿠아스토리도 모바일에서 100만명이 넘는 사용자가 즐기고 있다. 두 게임을 통해 이 회사는 매일 수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기존 온라인게임을 기준으로 해도 이미 대박의 반열에 올라선 이 회사는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스타트업으로서는 제법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모바일 시대를 주도하는 회사로 떠올랐다.

◆첫 번째 결단=잘하는 것을 하자

선데이토즈 창업자는 이정웅, 임현수, 박찬석 등 3명. 세 사람은 명지대 컴퓨터공학과 00학번 동기생들이다. 세 사람은 학교 때부터 친했고, 자주 모였다고 한다. 학창 시절 친밀감이 있었기에 졸업 후 서로 다른 직장을 다니면서도 계속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이정웅 사장은 트랙나인, 신텍정보시스템, NHN 등을 거쳤다. 병역특례로 군 문제도 해결하고NHN에서 4년간 게임 개발자로 일했다. 임현수 기술이사(CTO)는 고슴도치플러스, 엔씨소프트 등에서 일했다. 박찬석 운영이사는 T3엔터테인먼트에서 한때 국민게임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했던 오디션을 개발했던 인물이다.

81년생 동갑내기인 세 사람은 각자의 회사를 다니면서도 연락을 해 자주 모였다. 처음엔 그저 친분이었지만 점점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계속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런 주제를 놓고 이야기하다 창업을 하자로 결론이 났다. “회사에서 참 열심히 게임을 만들었는데, 어차피 게임 만들 거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거죠. 만약 잘 안되더라도 잃을 게 많지 않다는 데도 생각이 미쳤구요.” 그래서 그들은 2007년부터는 토즈라는 곳에서 만나 창업을 계획했다. 일요일마다 토즈에 모여서 창업 논의를 했다고 해서 회사 이름도 선데이토즈가 됐다.

비슷비슷한 백그라운드를 갖고 있는 이들이었지만 저마다의 특색은 조금씩 있었다. 이정웅은 플래시게임을 3년 넘게 만들어와 작고 아기자기한 게임의 사이클과 운영 노하우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임현수는 소셜게임과 게임플램폼 전반에 대한 기술이 풍부했고 프로그래밍에 대한 전문성이 가장 뛰어났다. 박찬석은 캐주얼게임에 일가견이 있었다.

창업을 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장점은 셋 다 게임 개발을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서로 말이 통하고 팀워크가 잘 된다는 점이었다. 반면 경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전무하고 인맥이 제한돼 있고, 게임 외에 다른 분야에 대해선 모른다는 것은 단점이었다. 자신들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최소화하면 대박은 아니더라도, 시장에 안착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정웅 사장은 이제 갓 서른의 젊은 사장이지만 서두르거나, 쉽게 흥분하거나, 과욕을 부리지 않는 스타일이다. 창업할 때 그는 자신을 이렇게 규정했다고 한다.

 “게임 개발은 많이 해봤지만, 창업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니깐 내가 모르는 것은 하지 말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전념하자.”

그의 이런 생각은 다른 창업자들과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자신들이 잘하는 게임 분야에서, 특히 순발력있게 게임을 출시하는 분야에서 승부를 보면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사장은 한게임에 있던 시절 1년에 50개씩 플래시 게임을 만들 정도로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규모가 작으면서 재미있는 게임들을 끊임없이 계속 만드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작은 게임을 빨리 만드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소규모 게임들을 오픈플랫폼과 결합해서 승부를 자고 다짐한 게 출발이 됐다. 돌다리도 두세번 두드리고 건너갈 그런 스타일의 신중한 이정웅 사장이 첫번째 결단을 내린 것이다.

창업자 세 사람은 2년 동안 셋이서 모든 것을 하기로 했다. 성과를 확실히 낼 때까지 직원을 뽑지 말고 눈에 보이는 성과가 확인된 이후 회사를 확장하는 것이 선데이토즈의 계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 닥쳐온 실패

치밀한 계획, 자신의 재능과 한계에 대한 명확한 분석, 짜임새 있는 역할 분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데이토즈의 첫 작품은 실패하고 말았다.

 필자가 이정웅 사장을 처음 만났을 때는 2008년 겨울, 마이크로소프트가 주최하는 비즈스파크 행사장이었다. 그는 그때 ‘친구에게 게임을 만들어서 선물하자’는 컨셉트로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즉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UCC(사용자제작콘텐츠)가 결합된 형태의 게임 비즈니스였다. 그가 소셜RPG(역할수행게임)이라 규정한 이 게임은 페이스북을 통해 서비스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시도는 무참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회사 문을 닫을 뻔한 위기가 왔다. 신중하게 시도를 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다행히 이들은 다 총각이었다. 책임질 누군가가 없었다. 그들 자신만 챙기면 됐던 이들은 첫번째 실패에서 교훈을 찾고자 했다. “첫 실패를 겪고 나서 우리가 왜 실패했는지를 돌아봤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부족한 게 참 많더라구요.”

뭐가 부족했을까?

 “창업자들이 모두 개발자 출신이라는 게 일단 약점이었습니다. 제품을 만들 줄은 알지만 그것을 어떻게 마케팅을 할 지, 그리고 이후에 어떻게 고객 관리를 하고 서비스를 해 나갈지에 대해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실 소셜게임은 개발 이후의 단계가 중요한데 말입니다. 너무 큰 게임부터 시작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거창하게 ‘페이스북에 없는 것을 만들자’라고 한게 무리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는 ‘선데이토즈 전략’이라는 것을 2009년 상반기에 수립했다. 첫 실패의 교훈이 반영된 게임이 ‘애니팡’과 ‘사천성’이다. 사실 기업체에 전략이 없다는 것이 문제 아니었을까. 어쨌든 경영 경험이 없던 이들은 뒤늦게 회사의 중장기 전략, 단기 전술이라는 것을 한 차례 사업을 실패하고, 첫 시작을 한 뒤 1년이 훌쩍 넘어서야 수립하게 된다. 그래도 그 필요성을 알았다는 점에서 실패가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대규모로 투자를 받지 않고 보수적으로 시작해 손실이 적었다는 것도 이들에게는 다행이었다.

◆두 번째 결단=소셜 게임 1등이 되자

실패를 겪으면서 그들은 미국에서 일고 있는 소셜게임 열풍이 한국에서도 현실화될 것이란 가정을 하게 된다. ‘처음부터 미국에 나가서 승부를 걸려고 하면 너무 힘들다. 한국에서 우선 자리를 잡고 나서 해외 시장에 다시 도전하자는 게 이들의 결론이었다.

뼈아픈 실패를 겪고 나서 이정웅 사장은 두 번째 결단을 내린다. 한국형 소셜플랫폼을 겨냥한 게임을 만들고 이 시장에서 1등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기존의 모든 게임 개발 작업을 중단한 것이다. “아직 싸이월드 앱스토어가 구체화되기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시장이 열릴 거라고 본 거죠. 그래서 다 접고 한국 소비자들에게 먹힐 소셜게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게임을 만들고 있는 중에 SK커뮤니케이션즈가 싸이월드에 앱스토어를 연다. PC기반의 소셜게임 시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선데이토즈는 사이트가 오픈되자마자 소셜게임 애니팡, 애니사천성, 아쿠아스토리를 차례로 출시했다.

 싸이월드 앱스토어는 마치 선데이토즈를 위해 준비된 무대 같았다. 물고기를 키우는 단순한 게임인 아쿠아스토리는 국내 소셜게임 최초로 200만 회원을 기록하는 등 폭발적으로 회원수를 늘려나갔다. 애니윷놀이, 애니사천성 등도 100만 회원을 돌파하며 인기를 끌었다. 2010년 선데이토즈는 5개의 게임을 앞세워 국내 소셜게임 시장을 평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성과를 냈다. 자신감을 얻은 이정웅 사장은 2011 1, 야심작 정글스토리를 출시했다. 아울러 정글스토리를 뛰어넘을 블록버스터급 소셜게임 개발에도 착수했다.

◆시장의 변화

이정웅 사장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던 것은 이 무렵부터다. 아쿠아스토리, 애니윷놀이, 애니팡 등의 인기에 힘입어 무난히 안착하리라 예상했던 정글스토리의 초반 성적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아쿠아스토리도 회원수는 갈수록 늘었지만 수익성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이 정도 회원이 모이면 결제가 상당히 이뤄져야 하는데 번번이 그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지표를 꼼꼼이 뜯어봤어요. 그랬더니 싸이월드 리뉴얼을 전후해 방문자수, 이용자수, 결제비율 등 모든 지표가 정체되기 시작한 것을 알게 됐죠.”

회사 안팎에서 싸이월드의 리뉴얼 탓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정웅 사장은 국내에서 PC기반의 소셜게임이 벌써 수명이 다했음을 직감했다. 채 펴보지도 못하고 사용자들이 모바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갈까를 고민해 봤죠. 스마트폰이 1000만대를 돌파하는 등 확산되면서 스마트폰 재미에 빠진 사람들이 PC앞에 앉아 소셜게임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사람들은 웬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면 PC 앞에 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무실에 출근해서 일은 여전히 PC로 하죠. 하지만 간단한 게임을 하려고 PC 앞에 앉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싸이월드에 2011년 7월 대규모 해킹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 때문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좀 줄어들었고 결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장은 선데이토즈의 전략을 다시 한번 수정한다.

◆세 번째 결단=모바일에 올인

당초 이정웅 사장은 2011년 여름께 차기작을 PC용 웹 버전으로 선보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시장의 변화를 보면서 전략을 전면 수정한다. 기존의 모든 개발 라인업을 중단한 것이다.

“시장이 모바일 중심으로 변화되고 있는데 그것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버전을 모바일용으로 완전히 바꾸기로 했죠. 선데이토즈의 최고 인기작인 아쿠아스토리를 모바일 버전으로 출시하기로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두 번째 결단을 내릴 때와 상황은 유사했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급증한 것은 분명했지만 돈을 벌고 있는 회사는 거의 없었다. 아직 너무나 초기인 시장에 또다시 모험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소셜게임으로의 전환 때 승부수를 던졌듯이 이정웅 사장은 이번에도 승부수를 던졌다. 신작 개발을 중단하고 기존 게임의 모바일화 전환을 시도했다.

  문제는 모바일 경험이 아무도 없다는 것. 시행착오가 따랐다. 1년 넘게 좌충우돌하며 배우는 학습의 시기가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동안 모바일 시장에서 먼저 치고 나가는 회사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이 헤매고 있을 때 다른 회사들도 대부분 헤매고 있었다.  

“이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소셜게임으로 전환하던 시절에는 실패를 겪은 뒤의 결단이었기에 사실 잃을 게 없었어요. 그런데 모바일 시장을 맞이하면서는 비장함마저 있었죠. 약간의 성공을 거둔 뒤였기에 불안감도 더 컸구요.”

애니팡, 아쿠아스토리, 애니사천성, 정글스토리, 애니윷놀이 등 이미 기존 소셜게임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던 게임 콘텐츠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모바일용 앱으로 만들어 출시하는 것 자체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어려운 작업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정웅 사장은 서두르지 않았다. 가장 자신있고 실패 위험이 적다고 생각되는 아쿠아스토리를 우선 앱으로 만들어 출시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기대에 미치진 못했다. 유료 결제 비율도 높지 않았다. 이보다 더 큰 한방이 필요했다.

때마침 카카오톡이 게임플랫폼을 준비하고 있었다. 6000만명에 가까운 이용자를 갖고 있는 카카오톡을 플랫폼으로 한다면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수익 모델이 절실한 카카오톡은 혼자 살아남는 것보다 플랫폼에 올라오는 다양한 게임들이 장점을 발휘하고 최대한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힘을 실어주는 방향을 택했다. 이정웅 사장은 카카오톡의 특성상 간단하고 빨리 끝낼 수 있는 애니팡이 최적의 콘텐츠라고 결론짓는다.

730, 선데이토즈의 애니팡은 카카오톡의 게임 플랫폼 게임하기를 통해 서비스를 시작한다. 약 일주일 동안은 잠잠했다. 점차 입소문이 퍼져나갔다. 재밌다. 쉽다. 즐길 거리가 많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한 달여 만에 다운로드 1000만건 돌파, 하루 평균 게임 이용자수 600만명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게 된다.

◆'신념'을 갖고 '실력'을 키우며 '때'를 기다렸다

이정웅 사장과 선데이토즈는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 대박의 초입부에 와 있다. 앞으로 거둘 수확이 더 많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설혹 모바일 게임 시장이 기대만큼 그렇게 크지 않거나 선데이토즈가 예상만큼 성장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이정웅 사장)에겐 다시 기회가 올 것이고 다시 도약할 것을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예상할 수 있을까.

이정웅 사장과 선데이토즈는 벼락 스타가 된 케이스가 아니다. 온갖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실력을 키워가면서 자신들이 실력발휘를 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매번 그들에게 기회는 왔고, 그 기회를 반드시 잡았다. 그 기회가 자신들의 예상보다 크든, 작든 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다만 신념이 부족해 그 기회가 자신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뿐이다.”


이정웅 사장은 이 말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신감과 신념을 갖고 시장 변화에 대처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준비해왔다. 기회가 왔을 때 그가 누구보다 먼저 이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준비하며 때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항상 성공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공을 한 과정은 그 이후를 짐작케 한다. 모바일 시대를 열어젖힌 선데이토즈에게 앞으로 더 큰 기회가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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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하는 데 역시 가장 어려운 것은 함께 할 사람을 찾는 것, 그리고 그들이 함께 꿈꿀 만한 비전과 목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레이삭스도 그랬다. 하드웨어 제조업체에서 시작해 외주 작업도 하고 다양한 스마트폰 앱을 개발해오다 SNS에 도전하는 현 모습에 이르기까지 모였다가 헤어지고, 아이템을 수정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창업자가 일관되게 사업에 대한 비전을 품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음악을 좋아한 엔지니어

포항제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 기계정밀공학과에 입학한 ‘학생’ 이승이는 음악을 좋아했다. 연주도 좋아했지만 특히 음악 감상에 취미가 있었다. 첫 학기에 그는 음악 동아리방에 가서 거의 살다시피한 것 같다. 좋아하는 음악도 마음껏 들을 수 있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리에서 그는 나중에 함께 창업을 하는 방무석을 만난다. 

 첫 학기만 마치고 그는 바로 군에 입대했다. 나 역시 그랬지만,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군 복무를 앞두고 있는 20대 초반의 남성은 좀 다급해지기 마련이다. ‘매를 먼저 맞자’는 심정으로 그 역시 일단 군 문제를 해결하러 입대했다.

 제대하고 그는 학교에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라도 미국에 가서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작은 결정이 그의 인생 진로를 바꿔놓을 줄을 그가 알았을까. 4개월짜리 어학연수를 갔는데 돌아가려고 하니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그는 귀국을 1년 늦추기로 햇다.

 1년의 시간이 주어지자 다시 주위를 차분히 둘러봤다. 그전까지 그는 다만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미국 학생들을 보며 부러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Boston에 있었던 그는 현지 유학생들과 대화를 하다가 용기를 얻게 된다. “선배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너도 이곳 좋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너보다 훨씬 영어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왔다. 너는 할 수 있다’ 라구요. 그래서 그 말에 입학 준비를 시작했죠.”

 공부한 시간은 고작 6개월. SAT를 보고 서류도 준비할 게 많았다. 정신없이 시간은 지나갔다. 반신반의한 가운데 결단의 시간이 왔다. 한국에서 학교 복학 최후통첩이 온 것이다. 그동안 군대 등으로 휴학을 많이 해 더 이상 휴학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내고 복학신청을 하지 않으면 제적이 된다는 통보였다. 하필이면 미국 대학 합격자 발표가 복학신청 마감일 이후였다. 그로서는 미국 대학 합격을 확인한 뒤 편안한 마음으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이다.

 “부모님께 전화를 했어요. 복학하지 않겠다구요. 그리고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합격할 지 확신이 없었거든요. 잘못하면 스물넷의 나이에 고졸로 다시 출발해야한다는 생각도 했죠.”

◆다만, 후회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10여개 대학에 원서를 냈는데, 줄줄이 합격 통지가 날아왔다. 기대치 않았던 아이비리그에서도 합격장이 왔다. 그는 뿌듯한 마음으로 코넬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첫 1년은 학교 생활 적응과 생존이 오로지 목표였던 시절이었다. 코넬대 당시 입학생 중에서 그는 외국에서 학교를 다닌 경력없이 바로 입학한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고 한다. 그가 겪었을 고초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세월이 흘러 코넬대 전자공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그가 선택한 직장은 삼성전자. 미국에서 면접을 보고 바로 입사해 금의환향,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 그때가 2002년이었다. 2007년까지 그는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무선사업부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것이 ‘블랙잭’이었다.

 좋은 직장에서 5년 이상 일하면서 그는 ‘인생의 시나리오’를 계속 생각했다. “50이 넘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 이 회사에서 탄탄대로를 밟아 제일 잘 됐을 때를 생각했을 때 내 모습은 어떨까.”

 직장에서 가장 성공했을 때를 떠올려봐도 그는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언젠가는 내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후회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어요. 내 일이 아닌 것을 계속 하면 언젠가 지칠 것이고 그렇게 살아온 자신에게 실망하고 후회할 것 같았죠. 힘들겠지만 내 일을 찾아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삼성전자에서 알게 된 2명과 함께 나와 창업을 했다. 한양대 시절 알게 된 방무석도 창업멤버로 합류했다. 2007년 3월 그의 첫 창업 회사 ‘브레인쿼드’를 설립했다. 브레인쿼드는 전자악기를 만드는 업체였다. 하드웨어 회사다.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한 전자키보드를 만들었다. 1년반 동안의 개발 기간을 거쳐 2008년 10월 프로토타입이 나왔다. 이승이 대표는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제품을 들고 투자자를 물색하고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리만브라더스 사태가 터졌다. 미국발 금융위기에 투자 심리는 얼어붙었다. 투자자를 찾지 못했고 그렇게 그의 첫 창업 작품은 흐지부지되고 있었다.

◆아이팟터치에 놀라다

2009년초 음악을 들으려고 아이팟터치를 구매한 이승이 대표는 깜짝 놀랐다. “제가 스마트폰을 만들어봐서 원리나 기계적인 장치 등에 대해서도 알쟎아요. 그런데 사용해보는 순간 ‘이 정도 퍼포먼스가 어떻게 가능할까’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손으로 키보드를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이런 기기를 이용해 터치만 하면 악기 연주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사업을 수정했다. 하드웨어 제조업체에서 앱 개발사로 변신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서 창업 멤버는 방무석 이사와 둘 만 남게 됐다. 변변한 사무실도 없어 고생하던 차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 김진형 교수가 사무실을 빌려주는 대신 일을 좀 도와달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일이 잘 풀리려니 때마침 더팟이라는 디자인 회사가 새로운 개발팀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회사 김홍균 대표와 만난 이승이 대표는 서로 뜻이 통한다는 것을 알고 회사를 합치기로 했다. 2009년 7월 통합회사 그레이삭스가 설립됐다. 이승이 대표가 그레이삭스의 대표를 맡고, 김홍균 더팟 대표는 그레이삭스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기로 했다.

 그레이삭스는 한동안 음악 관련 앱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성과도 냈다. Finger Stomp, Drum Meister, String Trio, Aquarist 등 앱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드럼 앱과 스트링 트리오 등은 특히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수익성이 신통치 않았다. “이렇게 해서 돈을 벌려면 정말 앱을 10개 이상 만들어야겠더라구요” 처음에 이렇게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 이상이었다. 

 물론 운영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외주 사업을 하면서 회사 운영비는 차질없이 벌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회사의 대표작을 만들고픈 마음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음악 앱을 들고 투자받을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 기회가 왔다. 이승이, 김홍균 등 회사 주력 멤버들이 밤늦게 회사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사진을 활용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거다!’ 싶은 생각에 이승이 대표가 작업을 시작, 불과 이틀만에 뚝딱하고 기본 컨셉트를 만들었다. 이제 투자를 받고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설 때가 됐다.

◆미디어를 지향하는 사진SNS, ‘해프닝’

2011년 이승이 대표는 한국인터넷진흥원에서 주최하는 한 조찬모임에서 회사를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장병규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 대표와 만난 게 계기가 돼 2011년 11월 엔젤 투자를 받게 된다.

 사진을 활용한 SNS 이름은 해프닝(Happen.in). 올해 입사한 이승이 대표의 코넬대 후배 박지현씨가 이름을 지었다. 얼핏 보기엔 사진을 올려놓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이를 통해 사람들을 사귀어 가는 여느 SNS와 유사하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우선, 지금 찍은 사진만 올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트위터처럼 리트윗을 해서 전파하는 방식으로 모르는 사람에게도 사진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대상은 얼마든지 제한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하면 실시간으로 찍은 사진만 올려놓고 이것을 통해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가는 서비스다. 

 “사진을 전세계에 실시간으로 브로드캐스트할 수 있는 서비스가 없습니다. 사진을 이용한 미디어가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거죠.”

 처음부터 실시간 사진이라는 컨셉트로 간 것은 아니었다. 만들다보니 현재 찍은 사진만 올릴 수 있게 했는데, 거기서 의외의 즐거움을 찾은 것이다. “실시간 사진만 올려놓게 하니까 3가지가 달라지더군요.”

 그게 뭘까. 우선 올라오는 사진이 달라진다는 점. 그리고 댓글이 아니라 사진으로 사람들이 대화를 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실시간으로 사진을 검색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사진을 공유하면서 전세계의 뉴스를 공유하는 식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위치를 추가하면 서비스가 한층 더 발전한다. 위치를 정해놓고 해당 지역에서 올라오는 사진을 실시간으로 볼 수도 있고 그 지역의 그동안의 사진을 검색할 수도 있다. 아직 내부적으로 베타테스트중인 해프닝은 9월 중 베타서비스를 시작하고 10월중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개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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