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게임 분야의 일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 개발이든, 마케팅이든, 기획이든,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차이가 너무나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한다고 하더라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데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한국의 스타트업 일백쉰일곱번째 주인공은 컴투스프로야구매니저를 만든, 에이스프로젝트의 박성훈 대표다.

◆채팅방 만남으로 시작된 엔텔리전트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고려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한 학생 박성훈은 이듬해인 1999년 1학기까지는 착실히 학교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질풍노도의 시기인 20대 초반에 진득하게 학교를 다니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는 법. 게다가 1999년은 전국에 벤처열풍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휴학을 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1999년 11월19일 나우누리 채팅방에서 경희대 영문과에 재학중이던 소태환을 만나게 된다. 

 채팅방에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다들 나가버리는 바람에 두 사람만 남게 된 상황. 어색한 마음에 이것저것 얘기하던 둘은 단번에 서로가 상당히 상대방을 보완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창업을 결심하고 사업 아이디어와 함께 기획을 하고 있던 소태환은 개발자를 찾고 있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은 박성훈은 그 다음날 바로 짐을 싸서 부산 집을 나와 양재역으로 갔다고 한다. 정말 대단하다. 두 사람의 뜻이 정말 잘 통했거나, 박 대표가 놀라운 판단력의 사람이거나, 아니면 너무 무모한 사람일 수 있다. 물론 그 뒤의 사업을 보면 (결과적으로는) ‘무모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어쨌든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처음엔 웹서비스를 기획했었어요. 커뮤니티 사이트 이런 것을 만드는 것도 기획했었구요. 그런데 잘 안됐죠.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자고 얘기를 했죠.”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게임. 게임을 정말 좋아하는 두 사람은 게임 사업을 하기로 했다. 열심히 게임 사업을 기획해서 우선 테스트를 받아보기로 했단다. 두 사람은 경희대 창업보육센터에서 하는 창업경진대회에 자신들의 기획안을 갖고 도전했다. 그리고 여기서 권준모 교수(전 넥슨 대표, 현 네시삼십삼분 의장)를 만나게 된다.

 게임 회사 창업에 의기투합한 권준모, 소태환, 박성훈 등은 2001년 엔텔리전트를 만들었다. 그런데 잠깐. 여기에 내가 몰랐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 있었다. 엔텔리전트는 훗날 넥슨에 인수되면서 권준모 대표는 넥슨 대표도 지낸다. 모바일 게임업체로 널리 알려진 이 회사의 시작은 모바일게임이 아니었다고 한다. 

 “원래는 아케이드 게임을 하려고 했어요.”

 “그럼 모바일게임은 어떻게?”

 “에이스프로젝트 창업멤버인 이성일이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저랑 친구였거든요. 만날 때마다 모바일게임의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계속 얘기를 했어요. 그러면서 모바일게임 세상을 알게 됐죠.”

 이렇게 해서 시작된 엔텔리전트의 모바일게임 사업. 이 회사가 무럭무럭 성장해 넥슨에 인수되고 엔텔리전트 창업멤버들은 모두 넥슨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야구를 좋아하는 세 친구

넥슨 생활은 2009년 끝났다. 엔텔리전트 창업멤버들은 권준모 의장을 필두로 고스란히 나와 네시삼십삼분을 만들게 된다. 권 의장의 한마디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제 다시 새로운 것을 해볼 때다!”

 사실 넥슨에 들어가기 전 이들은 모바일게임에 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큰 회사에서는 그들이 맡아야 하는 역할이 있었다. 이름부터 궁금증을 자아내는 네시삼십삼분을 만든 것은 이들이 하고 싶었던 것을 제대로 다시 한번 해보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네시삼십삼분도 풀어갈 이야기가 만만치 않은 회사이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므로 이 정도에서 넘어가고, 다시 박성훈 대표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네시삼십삼분에서의 생활은 막상 박 대표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의 관심은 모바일게임산업을 장기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콘텐츠였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 자신이 만들고 싶은 콘텐츠를 직접 해보고 싶었다.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동창이었던 전우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부산이 고향이 전우진은 프로야구 롯데의 열혈팬이자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나온 게임매니아. 박 대표의 고려대학교 컴퓨터공학과 동기동창인 이성일까지 세 사람은 야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들이 정말 좋아하는 것. 처음부터 야구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에이스프로젝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2010년 회사를 만들고 1년 반 동안의 노력 끝에 네이버앱스토어를 통해 ‘플레이볼’이라는 소셜야구게임을 출시했다. “컴투스프로야구 매니저의 전신인 셈이죠. 그런데 별로 신통치 않았어요” “왜?”

 “출시 직전에 네이트 개인정보 유출사건이 일어나면서 앱스토어 자체가 얼어붙었어요. 생각보다 사람이 모이지 않았고 이걸 장기적인 주력 콘텐츠로 하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시점에선 대안이 많지 않았을텐데”

 “그쵸 좀 더 좋은 플랫폼을 찾아야겠다. 이런 생각이 우선 들었구요. 확실히 모바일게임 플랫폼이 제대로된 것이 나올 거란 생각이 들어서 모바일판 플레이볼 게임 기획안을 만들고 1년 동안 준비를 했죠.”

 그래도 플레이볼 시도는 나쁘지 않았다. 우선 기대만큼 고객이 많이 들어오진 않았지만 1인당 매출(객단가)이 높았고, 고객 충성도가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게임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컴투스와 손잡고 해외로!

2012년 여름부터 2013년 가을까지는 박성훈 대표의 창업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을까. 왜? 매출이 없었으니까. 매출이 없었던 이유는 물론 모바일에 적합한 야구게임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회사는 투자도 받지 않았다. 돈이 없는데 콘텐츠 개발엔 돈이 필요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럼 그 시기를 어떻게 버텼나요?”

 “대표이사 가수금으로 꾸려나갔어요.”

 “투자를 받지 않고?”

 “투자를 받기엔 저희가 너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때문이었죠. 콘텐츠도 없이 투자를 유치하려고 하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겠죠. 투자를 받으면 지분 관계가 너무 복잡해질 것 같다는 점도 있었구요.”

 에이스프로젝트가 개발하고 있었던 프로야구 게임은 기존 야구게임과 좀 달랐다. 그런데 파트너사를 구하는 과정에서 그게 걸림돌이 됐다. 유저가 매니저가 되는 스타일의 야구게임의 전형을 따르지 않은 것. 흥행을 우려한 다른 게임업체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컴투스만 저희 생각을 알아주더군요. 그 덕에 컴투스와 손을 잡을 수 있었죠.”

 컴투스와 함께 반년동안 게임을 조정하는 작업을 하고 작년 10월 드디어 컴투스프로야구매니저가 출시됐다. 1년반동안 매출이 없어서 고생했고, 대표이사 가수금으로 회사를 꾸려나갔지만 게임 출시하고 4개월도 안 돼 대표이사 가수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컴투스는 퍼블리싱만 맡은 게 아니라 아예 10% 지분 투자도 단행했다. 확실히 피를 섞어 공동운명체가 된 것이다.

 이 회사의 두번째 작품도 야구게임이다. MLB매니저를 개발중인데 올 9월께 미국 시장에서 출시할 예정이다. 이것 역시 미국 시장 경험이 풍부한 컴투스와 함께 한다. 

 “주로 야구 게임을 만들건가 봅니다?”

 “천만에요. 그럴 리가 있나요. 에이스프로젝트는 이제 시작인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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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생각 못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결정한 선택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창업의 순간에도 당연히 그런 일이 많다. 이번 일백쉰여섯번째 스타트업의 주인공인 윤영중 에바인(Evain) 대표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인생의 진로가 바뀌면서 삶의 목표과 방향이 모두 달라진 케이스다. 

◆가지 않은 길

1991년 항공대 항공기계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기체 자동제어 분야를 전공으로 했다. 그가 생각한 진로 역시 기체 자동제어와 관련된 업무를 계속해 정비면장을 받아 그 분야에서 일하는 것. 이 분야 전공자들이 그러하듯 그는 공군에 입대해 정비 업무를 하려고 했으나 뜻밖에 전혀 상관없는 분야로 보직이 변경됐다. 

“티오가 없다고 하면서 갑자기 작전 관제로 가게 됐어요. 정비면장을 받으려면 군에서 경험치를 쌓아야 하는데 그걸 못하게 된 거죠. 군에서 이걸 해결 못하면 나와서 면장을 받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거든요. 진로가 바뀔 수 있는 그런 순간이었죠.”

 뜻하지 않게 업무가 바뀌게 된 그는 낙심할 법도 했지만 곧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관제 분야에 근무하면서 컴퓨터 프로그램의 중요성에 눈 뜬 것이다. “물론 당시엔 시스템 운영에 필요한 프로그래밍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정도였어요. 하지만 이게 나중에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계기가 됐죠.”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이 억울하지는 않았을까. 그냥 시간을 좀 더 들이더라도 원래 생각했던 길을 가는 게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까. “처음엔 당연히 막막하고, 답답하고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군에서 작전관제 업무를 하게 된 것에 대해 아쉬움이 없습니다.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게 됐고, 순간적인 판단력이나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능력 이런 것을 배우게 됐으니까요. 이런 분야는 제가 이전에는 배우거나 훈련하지 못했던 일이거든요.”

 2001년, 그에게 색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IT인재를 일본으로 파견해 현장 근무를 하게 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가 지원해 뽑힌 것. 그는 제국데이타뱅크라는 일본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또 다시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게 됐다. 

◆마음먹기에 따라 사회에 기여하는 일 할 수 있다

제국데이타뱅크라는 회사는 기업들의 정보, 각종 데이터 등을 수집·분석해 이 정보를 원하는 기업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윤 대표는 5년간 일하게 된다. 

“회사정보를 C1, 임원정보를 C2, 결산 정보를 C3라고 해요. 여기서 결산정보는 분식회계 가능성까지 분석하게 됩니다. 상당히 고급 정보인 셈이죠. ”

 제국데이타뱅크는, 윤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일본 중소기업의 50% 가량에 대한 이런 정보를 축적, 분석해 놓고 있었다. C3의 경우 계정과목을 표준화해 단독재무제표 기준으로 257개로 집약해 결산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당연히 업계에서 영향력이 있고, 이에 대한 상당한 수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정보의 수집과 가공, 그리고 표준화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어요. 그게 가장 큰 소득이었죠. ””

 2006년까지 이 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한국으로 다시 들어오게 된다. 물론 그는 무작정 들어오지 않았다. 일본 회사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썩힐 마음도 없었다. 한국에 들어와서도 일본에서 하던 업무를 그대로 한 것이다. 본사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일본보다 싼 비용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고, 윤 대표로서는 모국에서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2009년엔 고향인 광주 광역시로 아예 사무실을 옮겼다. 마침 직원들 대부분이 이 지역이 고향인데다 일본과 주로 온라인으로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일을 하기에 굳이 서울에 사무실을 둘 필요가 없어서였다.

 비교적 평온했던 그의 사업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12년부터였다. “그 무렵부터, 뭐랄까 일본에서 반한 감정이 눈에 띄게 커진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일감 자체가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한국에 일을 잘 안맡기게 된 거죠. 100엔당 1400원까지 갔던 환율도 100엔당 1000원까지 떨어지면서 일본에서 일감을 받아오는 메리트도 감소했죠. ”

 위기는 순식간에 닥쳐왔다. 그러면서 그는 ‘IT를 버려야 하나’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10년 넘게 IT분야에서 일을 해 왔는데, 지금까지 뭘 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막막하더군요.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든 거에요. 나이 마흔이 되서 다른 것을 해야하나 고민도 하고 그랬죠.”

 그때 그는 우연히 박원순 서울 시장이 쓴 ‘세상을 바꾸는 1000개의 직업’이라는 책을 읽게 된다. ‘마음먹기에 따라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구절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책에서 사회적기업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그리고 ‘내가 가진 IT기술을 세상을 위해서 써 보자’는 생각이 처음 들었죠. ”

◆마케팅 툴로 키운다

사회적 기여와 자신이 잘하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온 노하우 등 세가지 측면에서 교집합을 찾던 그의 아이디어는 ‘전화번호 식별’. 발신자 전화번호 표시는 오래전부터 제공되고 있지만 저장된 번호가 아니면 상대방이 누군지 알 방법이 없다. 휴대폰의 경우 그마나 알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070으로 시작되는 번호, 사업장 번호 등은 알 수가 없다. 전화를 거는 사람 입장에서도 답답하다. 상대방이 내가 누군지 알면 반드시 전화를 받을텐데, 그걸 알려줄 수가 없으니 모르는 번호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일부러 안받는 일도 생긴다. 중요한 비즈니스를 앞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일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일본에서의 경험때문. 전화번호 식별 하나만 해도 엄청난 정보가 된다는 것을 체험했던 그다. 이 서비스를 위해 그는 2012년 에바인을 설립했다. 서비스 이름은 ‘뭐야 이번호’로 정했다. 모르는 전화가 왔을 때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 서비스명이 된 셈. 전화번호 식별을 위해 우선 공개된 전화번호의 경우 해당 DB를 쓰되 비공개전화번호에 대해선 집단지성을 활용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회사 대표번호 이런 거는 전화번호부 책이나 인터넷 이런 데 다 공개가 돼 있어요. 하지만 내부 부서번호, 이를테면 마케팅팀 번호 이런 것은 알 수가 없거든요. 개인 사무실 번호 중에도 파악이 안되는 게 많죠. ”

 처음에 그 역시 긴가민가했다고 한다. 집단지성이 제대로 작동하면 모르는 번호가 걸려왔을 때 뭐야이번호 앱을 설치한 사람들이 앱에다 등록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스팸성 전화라던가, 스팸이 아니라던가, 스팸인데 구체적으로 보험사의 가입권유 전화라던가, 통신사 마케팅 전화라던가 등등. 이걸 할까. 놀랍게도 사람들은 이 수고로운 작업을 마다하지 않고 했다. 물론 사람들의 이타심만 작용한 것은 아닐꺼다. 최소한 등록을 하면 자신은 그 다음에 같은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고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500만명의 사람이 앱을 다운로드했고, 100만건이 넘는 전화번호의 아이덴터티가 등록됐다. ‘뭐야 이번호’ 앱이 나온 뒤 KT와 NHN도 유사한 앱을 만들어 시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의 다음 숙제는 수익모델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전에 더 시급한 게 있다면 뭐야 이번호 앱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지금 뭐야 이번호는 스팸전화 예방앱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그렇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 우리는 이 앱을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알게 해 줄 뿐 아니라 전화를 거는 나는 누구인지를 상대방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만들었어요. 그게 서로간에 예의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이를 통해 자신을 마케팅할 수 있는 방법도 되구요.”

 물론 소비자들의 쓰임새를 막거나 바꿀 방법은 없다. 다만 더 다양한 쓰임새가 있음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관련 상품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사용자가 몰리면서 한때 서버부하가 걸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대단해요. 서버부하로 번호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창이 조금만 늦게 떠도 바로 알아차려요. 그러니까 더욱 시스템 안정을 위한 개발에 총력을 다할 수 밖에 없었어요. ”

 윤 대표는 상반기 중 스미싱 방지 기능이 포함된, 뭐야 이번호 1.4버전을 출시할 계획이다. 기존의 기능에 더해 자신을 마케팅할 수 있는 기능이 강화됐다. 궁극적으로는 전화를 거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대방에게 알리거나 각종 상품 등의 정보도 제공할 수 있는 마케팅 툴이 되겠다는 게 그의 비전이다. 소비자로서는 상대방의 의중을 명확히 알 수 있어서 좋다. 어떤 전화일까 고민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도를 명확히 미리 파악하고 전화를 받을지 말지 결정할 수 있다. “물론 수익모델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현재로선 영업비밀이죠. 더 구체화되면 공개하겠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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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정말, 확실한 시장이다. 모바일에서도 게임 시장은 분명히 존재하고, 수많은 게임들이 쏟아져나와도 여전히 유망하며, 아직도 더 성장할 것이 분명하다. 생산보다는 소비가, 물론, 그렇기에 더욱 경쟁이 치열하다. 살아남아 꾸준히 히트작을 내는 업체들에겐 그들만의 노하우와 철학이 있다. 아이디어박스게임즈는 이 험난한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히트작을 만들고 있는 회사다. 이들의 비결은 뭘까. 아이디어박스게임즈 박진배 대표를 만났다.

◆동갑내기 세 남자의 창업

아이디어박스를 창업한 세 사람은 친구 사이다. 박진배 대표와 이치우 이사는 고등학교 동창. 김종진 이사(기술총괄)까지 셋이서 만나게 된 것은 2004년경 농어촌홈페이지 제작 동아리였다. 이 동아리는 각종 농수산물을 판매할 온라인 판매망을 구축하지도, 다른 판매처를 찾기도 힘든 그런 농가나 어가를 지원해주는 게 목적이었다. 즉 자신들이 생산한 농수산물을 소비자들에게 직거래로 판매할 수 있도록 온라인 사이트를 구축해주는 게 주된 일. 2002년경부터 이치우는 이 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었고 2004년 이후 박진배, 김종진이 합류했다. 

 홈페이지 구축을 하면서 세 사람이 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각자의 특기가 달랐기 때문. 박 대표는 경영학을 전공으로 했고 웹 기획에 관심이 많았다. 이치우는 디자인이 전공이었다. 동서울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웹 디자인 뿐 아니라 게임 디자인 등에도 관심을 보였다. 김종진의 경우 숭실대학교 산업정보시스템공학부에 입학해 엔지니어의 길을 가고 있었다. 

 기획과 개발, 디자인 등 3박자가 맞아떨어진 이들은 창업을 하기에 가장 좋은 조합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좋은 일을 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동아리에서 함께 모였다는 것도 서로를 상당히 신뢰하는데 도움이 됐을 게 분명하다. 이들은 창업이라는 최종 결론에 도달하기 전 여러차례 호흡을 맞춰보는 실험을 해 본 것 같다. 함께 웹페이지를 만든 것에 그치지 않고 2009년부터는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 물론 각자의 특기를 살려서다. 

 경력상 게임과는 별 인연이 없어보이는 박 대표에게 하드코어 게이머인지 물었다. ‘아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게임과 관련된 직접적인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단초는 있었죠. 홈페이지 제작업체에서 병역특례로 군복무를 대신한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서 디자인도 하고 개발하는 일도 하다가 사진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디자인을 하고 기획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됐죠.”

 2009년에 이들이 처음 만든 게임은 아이박스. 취미삼아 만들었다고 하는데 발상이 재밌다. 택배박스가 달려가 택배 주문을 하는 게임이다. 그러고보면 게임이라는 것은 상상력에서 나오고, 그 상상력의 원천은 무한하다.

 간단한 게임 몇 가지를 만들어보던 이들은 2010년 본격적으로 게임 개발에 나섰다. 기획에 특기가 있는 박진배 대표가 비를 주제로 한 게임을 기획했다. 비를 피하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단순한 게임이지만, 몰입도를 극대화한 재미가 있었다. 단순한 게임이었지만 200만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하는 등 인기를 끌었다. 때마침 바다플랫폼 대회에 출품해 수상을 하면서 상금 3000만원을 확보한 이들은 셋이서 게임 회사를 창업했다. 아이디어박스게임즈는 이렇게 2011년 5월 설립됐다.

<아이디어박스게임즈 창업 멤버들. 맨 왼쪽이 박진배 대표>

◆옥탑방에서 만들어진 플랜츠워

이들이 창업을 할 당시 사무실은 성남 수진동의 한 옥탑방. 좁고 고립돼 있는 곳이지만 몰두해서 뭔가를 만들어내기엔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밖으로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마케팅을 하는 것보다는 좋은, 그들 자신이 우선 만족할 수 있는 그런 게임을 만드는 게 과제였다.

 서울 도심과 멀리 떨어진, 성남시의 이 옥탑방에서 지금도 이들을 이 이름으로 기억하게 하는 게임이 기획되고 만들어졌다. 800만 다운로드를 기록한 ‘플랜츠워’다.

 플랜츠워는 전략시뮬레이션과 역할수행게임을 결합한 장르의 게임이다. 거창하게 이름을 붙였지만 캐릭터와 그가 이끄는 팀원들을 잘 활용해 적의 진지를 부수는 게 기본 컨셉트다. 물론 모바일게임답게 아기자기한 느낌을 살렸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상상력이 넘친다. 인간들이 버리고 떠난 지구에 남은 동물들이 지배를 하기 시작한다. 동물들에 맞서 식물들이 영웅을 키워내고 이 영웅을 중심으로 동물들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임 이름도 플랜츠워다. 영웅을 컨트롤하고 키우는 재미가 크고 영웅에 의해 게임의 좌우되는 요소가 다분하다. 

 이들의 다음 게임은 바로 이 영웅에 초점을 맞췄다. 아예 영웅들을 대상으로 한 게임을 만든 것이다. 플랜츠워는 게임빌을 통해 서비스했지만 신작 게임은 직접 개발하고 직접 서비스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역시 새로운 도전이다. 페이스북에도 올려놨다. 3월 1일 출시된 이 게임이 ‘마스터오브크래프트’다.

◆시장에 없는 게임을 만들겠다

마스터오브크래프트는 역할수행게임(RPG)이자 마을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세계 영웅들의 마을을 경영하고 육성하는 3D 모바일 게임이다. 수백 종류의 무기와 방어구 등의 아이템을 만들어 영웅들에게 판매를 하고 마을을 확장하거나 운영하는 방식이다. 마을에 상점이나 능력치를 올려주는 여러 종류의 건축물을 지을 수도 있으며 자신만의 부대를 육성하고 운영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제작에 필요한 아이템도 수집할 수 있으며, 경험치와 금화도 얻을 수 있다.

 이 게임은 페이스북, Google플러스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연동돼 있다. 지인들과 함께 전투를 하거나 아이템을 거래할 수 있는 협업이 가능하다. 또 약 300종의 특수장비와 영웅이 등장하며 130여개의 다양한 마을 생산물이 등장, 여러가지 아이템을 수집하고 제작하는 쏠쏠한 재미도 제공한다.

 그는 마스터오브크래프트를 5월 영어버전으로도 출시할 계획이다. 아시아권 국가로 서비스를 넓히는 것도 준비하고 있다. 올 8월에는 플랜츠워2도 출시될 예정이다. 

  박 대표에게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기존 시장에 없는 차별화된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즉각 답했다. 어찌보면 재미나 중독성 등의 다른 요소를 희생하더라도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뜻으로도 들린다. 물론 그만큼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는 뜻일거다.  

 이를 한 마디로 그는 전인미답의 경지라고 표현했다. 욕심이 지나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목표도 없이 어찌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겠는가. 창작가는 욕심이 좀 있어야 한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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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투페이퍼는 광고를 활용해 대학생들에게 공짜 출력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돈을 내야 인쇄물을 출력할 수 있다는 상식을 깨고 광고주들로부터 광고를 받아 인쇄물에 광고를 올리는 대신 학생들은 공짜로 프린트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사진은 어떨까. 사진도 이런 방식을 적용해 공짜로 사진을 출력할 수 있을까. 씨에프닷이퀄톤은 사진 공짜 출력 서비스에 도전했다. 온라인에서 서비스 주문을 받는 방식이 아니라-물론 그것도 곧 가능하겠지만-오프라인에서 공짜 사진 출력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코닥과 제휴도 체결했다. 공짜 사진 출력 시대에 도전한 씨에프닷이퀄톤의 최민수 대표를 만났다.

◆세번째 창업

씨에프닷이퀄톤. 이 길고 어려운 이름을 가진 회사의 최민수 대표는 이번 창업이 벌써 세번째라고 했다. 그의 첫 창업은 지난 2003년. 당시 그는 유무선연동 채팅 서비스라는 분야를 시도했다고 한다. 상당히 앞서서 서비스를 하지 않았나 싶은데 돈이 잘 안되서 사업을 오래 지속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두번째로 그가 한 사업은 제휴마케팅 분야. 현재 이른바 리워드앱의 2000년대 중반 버전이 아니었을까. “제휴마케팅은 정산시스템이 핵심이에요. 그래도 당시엔 제법 정산시스템을 잘 구축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래요. 요즘 리워드앱들이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정산시스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정산이 몰리면 감당이 안되죠. 제때 정산해주지 못하면 사용자들의 불만이 쌓이고 서비스의 신뢰 문제와 직결되거든요. 그래서 당시 아무리 힘들어도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정산을 해 줬어요.”

 생각보다 사업은 잘 됐는데,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일이 꼬였다. 웹하드 사업에 투자를 했다가 돈을 날리고 사업을 접게 된 것. 두번째 사업이 실패로 끝나고 그는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개발자랑 말이 안통하는게 답답하더라구요. 그래서 개발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공공기관에서 하는 강좌를 들었죠.”

 개발을 배우고 그는 2013년 9월 퓨처로봇이라는 회사에 입사했다. 이 회사는 일종의 서비스 로봇을 만들어 파는 회사였다. 로봇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것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로봇은 디스플레이가 달린 움직이는 컴퓨터다. 터치 기능이 있어서 식당에 설치하면 주문을 받을 수도 있고 전시장에 설치하면 관람객들에게 각종 정보도 제공해줄 수 있다. 그는 이것을 키오스크 서비스 로봇이라고 표현했다. 광고 비즈니스도 해 봤고 개발도 할 줄 알았던 최 대표는 여기에 광고를 넣어서 수익모델을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했다. 이 회사에서 그는 함께 창업을 하게 되는 이민석을 만났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로보월드에 서비스로봇을 출품, 전시하면서 그의 세번째 창업의 전기가 마련됐다.

◆광고 기반 무료 사진 출력 아이디어

“거리를 다니다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쟎아요. 맨날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 가져올까. 이거 참 고민 많이 했어요.”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 끌까 고민하다가 로보월드에서 한가지 시도를 했다. 키오스크 서비스 로봇에 프린터를 연결한 것이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줄을 서서 로봇을 구경하고 사진도 출력하고 그러더군요. 굉장히 많은 관심을 끌었어요.”

 이때부터 그는 로봇에 프린트 기능을 연결하는 것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애시당초 고민하고 있던 광고와 프린트를 연계하는 것에 착안했다. 원래 키오스크서비스 로봇에 광고를 넣는 것을 고려하다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키오스크로봇에 프린트 기능을 넣었다가, 프린트물에 광고를 삽입하면 되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때마침 애드투페이퍼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출력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도 좋은 본보기가 됐다. 

 “처음에 디스플레이에 광고를 넣는 방안을 찾아봤지만, 그건 잘 안됐어요.”

 “왜 그랬을까요.”

 “광고가 붙으려면 매체로서의 가치가 있어야 했는데 키오스크로봇은 너무 제한돼 있어서 광고주를 찾기 쉽지 않았거든요. 한마디로 대중적이지 않았죠. 하지만 사진은 달라요. 누구나 사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게다가 광고로 인해 사진을 뽑는데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이용하려고 하겠죠. 그러면 그만큼 매체로서 가치가 높아지는 거죠.”

 원래 최민수, 이민석 두 사람은 퓨처로봇 사내에서 이 사업을 진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리소스가 제한돼 있는 회사는 다른 분야에 주력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시작해서 한창 의욕적으로 해보려는데 그만둘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따로 밖에 나가서 하기로 하고 퓨처로봇으로부터 사업권을 양수해 새로 회사를 차렸죠.” 그렇게 해서 이퀄톤(Equaltone)이라는 회사가 만들어졌다. 같은 톤으로, 즉 같은 마음으로 사업을 하겠다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사진 출력 서비스는 이퀄톤의 자회사 성격으로 씨에프이퀄톤이라는 회사를 만들고 최민수 대표가 맡았다. 이민석 대표의 지인이자 플로리다대학교에서 전산학과 석사학위를 받고 아이리버 등을 거쳐 일본계 회사 지사장을 맡고 있던 강태윤씨가 모회사 이퀄톤의 대표이사가 됐다.

◆사진 인화 시장 흔들겠다

광고와 마케팅 분야의 일을 해 온 최민수 대표는 사진 출력 서비스에 광고를 붙여 소비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할 수 있으면 분명히 뜰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서비스가 되려면, 우선 사진 품질이 좋아야 하고(공짜라고 해도 품질이 나쁘면 아무도 안 쓴다), 어디서나 비교적 쉽게 사진을 뽑아야 한다. 우선 소비자 입장에선 이 2가지 요건이 충족돼야 했다. 이를 위해 한꺼번에 대용량의 사진을 출력할 수 있는 프린터를 알아봤다. “코니카와 코닥 두 곳 밖에 없더라구요. 그런데 코닥은 한번에 인화지 750매를 넣을 수 있는데 코니카는 350매 정도였어요. ”

 최 대표는 즉시 코닥과 접촉했다. 반응은 뜻밖에 매우 좋았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고전하고 있던 코닥은 광고를 활용한 공짜 출력서비스를 통해 대반전을 꾀하겠다는 전략을 내비쳤다. 물론 사업을 확대하기 전에 소비자들의 반응을 보고, 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시범서비스를 위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장소를 물색, 영화관으로 정했다. 메가박스와 계약을 체결하고 강남역점, 센트럴시티점, 분당점, 대전점, 창원점 등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 10곳에 키오스크로봇과 코닥의 사진인화프린터를 갖춘 무료 사진인화 시설을 들여놨다. 

 물론 시범서비스이기 때문에 이들의 핵심 구상인 광고를 다 구비한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무료로 사진을 출력할 수 있다는 최초의 인상을 심어주는 한편 경험을 하게 하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게 다가 아니다.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하기 위해선 플랫폼이 필요했다. “얼마나 사진을 무료로 출력을 하는지, 어디서 잘 되는지를 파악하고 출력 관련 문제를 컨트롤하거나 광고상품, 가격 정책 등을 변경하려면 중앙에서 이를 제어할 플랫폼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광고주들에게 데이터를 보여주고 협상을 할 수도 있죠.”

 현재 시범서비스 중인 메가박스 강남역점 등에 가면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을 무료로 출력할 수 있다. 코닥 정품 인화지와 잉크를 사용하기 때문에 품질도 좋다. 물론 사진의 절반은 광고다. 광고를 오려내면 사진만 보관할 수도 있다. 플랫폼을 완성하고 나면 앱과 온라인 웹사이트를 3월중 선보일 예정이다. 사진을 활용한 다양한 서비스도 4월 이후 출시할 계획이다. 현재 영화관 일부 지역에서만 시범서비스를 하고 있지만 역이나 터미널 등 사람들의 이동이 많은 지역에서 서비스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 코닥과의 협상 결과에 따라 전국에 300여개 코닥익스프레스 매장에서 사진 출력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경우 무료 뿐 아니라 유료 서비스, 집에서 받아보는 사진 서비스, 앱을 이용한 원격 주문 및 결제 등 다양한 서비스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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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모바일 광고 시장에 혜성처럼 신예가 등장했다. 자체 미디어를 보유하지 못했고, 자금력이 풍부하지도 못했지만 출시 1년여만에 모바일 광고 시장의 강자 카울리를 제치고 다음의 아담과 맞짱을 뜰 정도로 성장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모코플렉스는 광고를 통해 돈을 벌고 싶어하는, 아니 하다못해 최소한 운영비라도 벌고 싶어하는 많은 앱 개발사들의 가려운데를 긁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빠르게 부상했다. 앱 개발사들에게 광고가 막연한 기대치가 아니라 수익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수의 광고 플랫폼과의 연계를 통해 보여준 것이 먹힌 것. 모코플렉스는, 이 도저히 새로울 것 없어보이는 ‘광고’라는 분야에서 어떻게 자신의 길을 찾아냈을까.

◆한게임에서 시작된 인연

모코플렉스 창업자 박나라 대표는 흔히 공대 출신 창업가들이 그렇듯 창업을 염두에 두고 준비를 해 왔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대학 재학 시절이던 지난 2001년 NHN 한게임에서 아르바이트 겸 일을 하러 갔다가 거기서 최병민씨를 만나게 된다. 어쩌면 창업을 생각해오지 않았던 박나라 대표가 창업이라는 길에 들어선 것은 이 사람을 만났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은 나이차가 10살이나 됐지만 오히려 그런 차이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창업을 함께 하게 된다. “저는 사실 지금까지 계속 개발자로서 살아왔어요. 그런데 최병민 이사는 정말 기획력과 비즈니스 사업화가 탁월한 분이죠. 저는 처음에 이분이 생각한 것을 그냥 만들었어요. 그러다보면 사업이 되더라구요. 그러면서 배워나갔죠.” 최병민은 삼성SDS 유니텔사업부에서 일하다 NHN 한게임, 소리바다 등을 거쳐 훗날 창업을 하면서 박나라 대표와 힘을 합치게 된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간 박 대표는 가톨릭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그래텍에서 병역특례로 군 복무를 대신했다. 병특을 마치고 2007년 박나라 대표는 최병민과 힘을 합해 오픈베이라는 중고장터를 열었다. “당시 penny auction이 유행을 탔었어요. 우리식으로 말하면 10원 경매죠. 국내에서는 저희가 그런 방식을 처음으로 했어요. ”

 이게 꽤 인기를 끌었다. 한달 매출이 5억원을 거뜬히 넘기기도 했다. 벤처기업으로서는 굉장한 숫자다. 당시 대표는 최병민, CTO(최고기술책임자)를 박나라가 맡고 있었다. 기술 개발을 총괄했던 박나라 대표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작 돈은 포털업체들이 다 벌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광고를 집행하는 데 몇천만원씩 돈이 들어가는데 이 돈이 결국 포털로 가더라구요. 매출은 많이 발생했지만 마진율이 낮았어요. ”

◆나에게 가장 필요해서 시작한 일

2009년 애플 아이폰 도입 직후 모바일 열풍이 불자 박나라 대표도 직접 앱 개발에 나섰다. 그런데 앱을 잘 만들어도 앱을 알리는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를 만나, 어떤 매체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광고를 하는게 좋을지 알기 쉽지 않더라구요. 제가 광고 시장에 경험이 없어서 그런 측면도 있었겠죠. 이걸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하다가 아예 광고 비즈니스를 하기로 한 거에요.”

 회사의 필요성에 의해 시작한 광고 사업. 2011년 5월 박나라 대표는 모코플렉스를 설립하고 최병민 이사가 COO(최고운영책임자)를 맡았다. 모코플렉스가 주목한 것은 자신들의 ‘필요’를 다른 앱 개발사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거라는 점. 광고를 하고 싶어도 어디에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는게 좋은지 모르고, 효과를 알기도 어렵다는 것을 다른 앱개발사도 절감하고 있을 것이란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모바일 광고 메디에이션(mediation)이라는 분야를 택했다. 다수의 모바일 광고 플랫폼을 하나로 통합해 앱 개발 및 운영의 편의를 제공하는 게 이들의 주된 사업 영역이었다.

 2012년 2월 첫 선을 보인 이후 불과 5개월여만에 500여개 업체들과 제휴를 맺었다. 그가 스스로 광고 초짜라고 말하는 것에 비하면 빠른 성장세다. 이 즈음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로부터 3억원의 투자도 받았다.

 박 대표는 “상대적으로 경쟁에서 비켜나 있었던 덕분에 견제를 덜 받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죠”라고 설명했다. 네이버, 다음 등 직접 매체를 갖고 있는 기업이나 카울리와 같이 광고 플랫폼을 갖고 있는 회사들과 달리 광고를 원하는 기업들에게 다양한 매체를 연결해주고, 컨설팅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 “쉽게 말해 좀 더 효율적으로 광고를 집행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서비스인 거죠.” 박 대표의 설명.

◆어디로 갈 것인가

모코플렉스의 최대 강점은 뭘까. 앱 개발사 뿐 아니라 광고주의 불편함도 상당히 해결해줬다는 것. 앱 개발사는 여러 광고플랫폼을 직접 앱에 연동할 필요가 없어 간편하고 광고주 입장에서는 더 많은 앱에 광고가 노출되기 때문에 양쪽 모두 이득이다. 

 모코플렉스의 비즈니스는 철저하게 아이디어와 기술력에 기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의 한계를 알기에 앱 개발사나 광고주를 일일이 섭외하려고 하지 않고 기존의 광고플랫폼을 끌어다가 이를 분석해 최적의 광고플랫폼과 광고주를 연결해준다는 것. 이를 위해선 기술력도 뒷받침되야 하는데 여기에는 10여년간 엔지니어로 일해 온 박 대표의 역할이 컸다. 

 물론 광고는 기술력만으로 되는게 아니다. 영업을 해야 한다. 아무리 플랫폼을 잘 연결해주는 탁월한 기술력과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그래서 모코플렉스는 지난해 4월 애드립과 유사한 모바일 광고 중개업체 ‘시쿠이스’를 인수, 영업 인력을 확충했다.

 엔지니어 베이스의 그에게 광고 영업을 어떻게 해 왔는지 물었다. 그는 CTO가 아니라 CEO이기 때문에 결국 영업과 관련된 일도 최종적으로는 그가 나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광고쪽 경험이 전혀 없는데다 지식도 부족해서 정말 힘들었죠.”

 “이 분야가 미디어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도 꽤 복잡한 영역인데요.”

 “맞습니다. 그리고 벤처기업이 흔히 하기 쉬운 오류가 기존의 광고 산업 질서를 송두리째 무시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려고 하는 건데, 그게 잘 통하지 않거든요. 당장은 사업이 되는 듯 해 보이지만 금방 한계가 드러나요. 그래서 현재 광고산업의 분위기를 최대한 익히고 그들의 룰을 존중하면서 기존 틀에서 부족한 것, 필요로 하는 부분을 채워주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의 이런 생각은 시장에서 통한 것 같다. 내가 박 대표를 만났던 1월말경 모코플렉스의 광고 서비스 애드립의 페이지뷰는 한달에 무려 60억. 이제 국내에서는 아담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수준으로 성장했지만 그의 목표는 미디에이션으로서 회사의 영역을 플랫폼으로 더욱 넓히는 것. 아울러 해외 시장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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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멤버십과 포인트 적립을 가장 쉽고 간편하게 하는 것은 뭘까. 아무것도 필요없이 그냥 나를 알아주는 게 최고일 것이다. 얼굴이든, 지문이든, 목소리든 그 사람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뭔가를 통해 나를 인식하고 알아서 멤버십도 가입해주고 포인트 적립도 해 주는게 가장 편리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편리한 만큼 개인 정보가 노출되는 위험도 커진다. 나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터치웍스는 개인을 식별하는 방식으로 이보다는 한 단계 불편한 방식을 택했다. 개인 정보 유출을 최소화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편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전화번호와 NFC 또는 RF 칩만 있으면 소비자를 인식, 멤버십과 포인트를 처리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어 보급에 나섰다. 

◆무난하고 재미없는 인생

터치웍스 강승훈 대표는 스스로 “무난하고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한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그는 이른바 ‘엄친아’다. 1998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해서 대학을 졸업한 뒤 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병역특례업체에 들어가 일했다. 당시 들어갔던 회사는 KEB테크놀로지. 지금은 코나아이라는 이름으로 사명이 변경된 회사다. 비록 대기업은 아니지만 코스닥 상장사로 그는 이 회사에 들어가서 11년 동안 일하면서 인정도 받고 회사에서 많이 성장했다고 한다. 창업자이사 대표이사의 직속 부서 팀장으로 일하면서 여느 대기업 못지 않은 좋은 대우를 받았다. 

 11년 동안 그가 일한 분야는 임베디드소프트웨어. “신용카드나 교통카드, 유심카드, 각종 카드에 작은 칩이 들어가는 거 아시죠? 그런 칩의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죠. 원래는 병특으로 들어갔는데 계속 눌러앉아서 일을 했어요.”

 여기까지 보면 어림짐작할 수 있지만, 그는 애초부터 창업을 하려는 생각을 하거나 창업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그런 스타일은 전혀 아니었다. 그럼 이랬던 그가 왜 창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카드IC칩, 유심카드 이런 거 아무리 만들어도 아무런 피드백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당연하죠. 제가 한 분야가 B2B 분야였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제가 만든 것들을 사람들이 쓸 때 어떤지 궁금했거든요. 그런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죠.”

 결정적인 것은 좀 재밌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 

 “혹시 온라인게임 좋아하세요?”

 그가 불쑥 묻더니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게임에 보면 레벨이 있쟎아요. 만랩에 도달하면 더 이상 레벨을 키울 수는 없죠. 저에게 그런 상황이 곧 닥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지금 있는 이 곳은 만랩의 제한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 좀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만렙의 제한없이 승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건거죠. 마침 큰 아이의 돌을 맞이하면서 아이에게 어떤 아빠가 될 것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다고 얘기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

 2012년 3월. 강승훈 팀장은 11년간 몸담았던 코나아이를 나왔다.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 사이에서

회사를 나올 당시의 상황은 사실 좀 막막했다. ‘창업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나온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 그는 막연히 B2C 비즈니스를 해보고 싶었지만, 온라인이든 모바일이든 B2C 비즈니스는 그가 잘 알지 못했다. 몇가지 아이디어가 있었던 그는 코나아이 시절 함께 일하다가 그보다 먼저 나와 투자은행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던 박형순에게 연락을 했다. “형이 하려고 하는 사업이 왜 안되는지 설명해주겠다”는 박형순의 말에 약이 오른 강 대표는 그를 만나 자신의 구상을 말했다. 카이스트 전산학과를 나와 KTF에서 일하다가 나와 다른 일을 하고 있던 나준채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가 구상했던 아이템에 대해 번번이 안된다는 비판을 하던 두 사람이 기존 인프라를 활용한 ‘오프라인 개인화 서비스’에는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될 것 같다’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함께 하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신중한 강 대표는 예전 코나아이 시절에 함께 일했던 이참솔 로티플 창업자도 만나 그의 아이디어를 말해 ‘합격점’을 받았다. 

 그의 아이디어는 우연히 나왔다. 회사를 나와서 커피숍에 있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결제를 하고 포인트를 적립하는 과정을 보면서 ‘사람들은 쉽게 포인트를 적립하고 매장 주인들은 고객의 성향을 파악해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즉시 현재 매장의 멤버십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관련 오프라인-모바일 연계 서비스들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조사했다.

 시장 조사를 통해 그는 자신이 생각한 방식이 통할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그가 생각한 것은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NFC, RF 등의 단말기나 카드 등을 서비스의 인프라로 활용, 오프라인 개인화 식별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것. 이 분야는 그가 예전에 있었던 코나아이에서 종사했던 분야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결국 잘 아는 분야로 돌아온 거네요?”

  “그렇죠. 좋아하는 것과 잘 할 수 있는 게 다르더라구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로 온 거죠.”

 2012년 9월 법인을 설립하고 이듬해 3월, 모바일멤버십 서비스 ‘터칭’이 출시됐다. 

◆오프라인의 개인화 식별 끝판왕

터칭은 중소상공인들과 수많은 멤버십카드 때문에 지갑이 복잡해진 소비자들을 위한 서비스. 터칭이 있으면 새로운 카드를 발급받을 필요도 없고, 앱을 깔 필요도 없다. 특별한 조작을 하거나 상대방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뭔가를 보여줄 필요도 없다. 

 매장에서 물건을 산 다음, 교통카드나 사원증, 스마트폰을 갖다 대기만 하면 매장의 포인트를 적립할 수 있다. 매장 입장에서는 이것을 도입하는 데 큰 돈이 들지도 않는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터칭 서비스를 직접 써 봤다. NFC 기능이 있는 스마트폰을 터칭 단말기에 대자 관리자 PC에 ‘등록이 안 된 카드’라며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등록할 것을 요구하는 화면이 떴다. 전화번호만 입력하자 바로 등록이 됐다. 스마트폰 입력하면 그 매장의 회원이 되고 앞으로는  갖다 전국 어디서든 해당 매장을 방문해서 스마트폰을 대기만 하면 포인트가 적립된다. 물론 꼭 스마트폰이 아니어도 된다. 회사 사원증도 등록이 가능하다. 개인 정보를 가져가는게 아니라 해당 단말기 칩과 전화번호를 동기화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멤버십 등을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통신사들도 전자지갑을 만들었다. 결제도 가능한 서비스다. 그런데 아직 쓰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강 대표는 이에 대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무리 그런 서비스가 있어도 앱을 다운받거나 앱을 실행해야 하고 실행한 다음 뭔가를 열고 보여주고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죠. 불편해요. 사람들에게 자꾸 여러가지 행동을 요구하면 불편해서 다음엔 안쓰게 되거든요.”

 매장이 터칭 단말기를 도입하는데 비용이 적게 든다는 점도 장점. 몇십만원짜리 아이패드 등 별도의 단말기가 없어도 된다. 기존 노트북이나 PC에 3만원짜리 RF리더기만 연결하면 된다.

 당장은 전자지갑 등과 경쟁해야할 처지. 해피포인트나 오케이캐시백과 같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멤버십은 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 중소 매장의 멤버십 등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수준.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얼마든지 확대해나갈 수 있다는 게 강 대표의 생각.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결제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오프라인에서 개인화 서비스의 끝판왕이 되는 게 목표. “정보 유출의 걱정없이 개인을 식별하는 게 가능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매장 주인들이 많은 서비스를 할 수 있죠. 소비자들은 그만큼 편해질 수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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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병원이나 외과, 응급실 등 병원 곳곳에서 비교적 흔하게 접하는 초음파진단기기를 쉽게 휴대할 수 있게 되면 어떤 장점이 있을지, 무엇이 달라질 지, 류정원 힐세리온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나는 이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지금 생각한들 딱히 신통한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류 대표는 물론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하게 됐을까.

 ‘먼 길을 돌고 돌아 자신의 길을 찾았다’고 할 만큼 그는 복잡하고 굴곡진 삶을 살았지만, 그리고 자기 길을 찾기 위해 자주 멈춰서서 생각에 잠기고 방황해야 했지만, 그래도 어느 것 하나 헛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연속에서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인생의 길이 열렸다.

◆엔지니어-벤처 창업-의사

1992년. 학생 류정원은 동국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군대에 가기 전에 1년 동안 학교 수업에 그닥 성실하지 않았던 그가 빠지지 않고 열성을 보였던 것은 로봇동아리 활동. “미로 탐색하는 마이크로 마우스 로봇, 이런 것도 직접 만들고 그랬어요. 대충 한 게 아니었죠.”

 그는 대학 입학 이듬해인 1993년부터 벤처기업에서 일을 하면서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 계기는 아주 우연히, 그의 실수에 의해 만들어졌다. “입대 지원서를 내려고 병무청에 갔더니 휴학생은 안된다는 거에요. 그 당시엔 그랬나봐요. 군대를 가려고 휴학했더니 입대지원서를 못 내는 상황이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휴학하고 좀 기다리면 입영통지서가 날아온다네요. 그래서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죠.”

 갑자기 시간이 붕떠버린 류정원 학생. 마냥 놀 수는 없어서 1993년 나눔기술이라는 벤처기업에 들어가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다. 

 “사장님이 처음엔 좀 황당해했죠. 대학교 1학년짜리 학생에게 기술회사에서 무슨 일을 시켜야 하나 고민이 됐는지, 복사하고 전화받고 등 잔심부름을 하면 어떻겠냐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거 싫다고, 프로그래밍하겠다고 했어요.”

 “원래 프로그래밍을 잘 하셨나봐요.”

 “아뇨, 몰랐어요. 새로 배웠어요. 책이랑 뭐 이런 걸로 배워서 했죠.”

 8개월간 일을 하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를 가기 전에 그는 제대를 하고 어떻게 살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 당시엔 보통 삼성 현대 등 대기업에 들어갔어요. 선배들이 주로 그랬는데 나한테는 잘 안 어울릴 것 같았어요. 뭐랄까. 답답할 것 같았죠.”

 그래서 그는 자신만의 인생 50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내가 잘 하는 것은 뭘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고 살아갈까. “따져보다보니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군대 갈 때도 책을 싸들고 들어갔어요.”

 군대에서 당연히 생각한 것 만큼 공부할 시간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결심을 한 것이 도움은 됐다. 나오자마자 그는 ‘공부를 제대로 한 번 해보자’고 대성학원에 들어갔다. 1996년. 그리고 그는 97학번으로 서울대 자연과학부에 입학했다. 진짜 공부를 ‘제대로’ 한 셈이다. 

 다시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는 여전히 벤처에 관심이 많았다. 1999년, 3학년이 되면서부터 다시 벤처 회사에 들어갔다. “짧게 여러 회사에서 일한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00년에는 Embeded System Forum(ESF)를 만들었어요. 이게 나중에 창업하는 기반이 됐죠. 이를 통해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거든요.”

 2001년 그는 디지젠(Digigen)이라는 회사를 처음으로 창업하게 된다.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등을 제작하는 사업을 하는 회사였다. “벤처에서 계속 일을 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나도 창업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창업을 하게 됐어요.”

◆Connecting the Dots

그런데 첫 창업은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예정됐던 대규모 딜이 깨지면서 2002년 사업을 정리하게 된다. “저한테는 첫 좌절이었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하고자 했던 일을 다 하면서 살아왔는데, 안되는 일이 있네요.” 2003년 유학 준비를 시작했지만 몸이 근질거렸다. 그래서 또 다시 벤처기업에 들어가 일을 했다. 이번엔 CTO(최고기술책임자)로 들어가 신호처리기술을 개발했다. 소음제거솔루션, 음성인식 솔루션, 이미지퀄리티제어기술 등이 그가 한 일. “원래 인공지능쪽에 관심이 계속 있었어요. 신호처리 관련 일을 하다보니 신경분야를 배워야겠더라구요.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의대를 가야 배울 수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의대 진학 준비를 했습니다.” 2005학번으로 그는 가천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의전원 1기로 들어간 그가 생각한 것은 의학지식과 비즈니스를 연결하는 사업을 하는 것. 남들이 안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자는 게 그의 목표였다고 한다. “남들이 안하는 게 뭘까. 그래서 얻은 결론이 두 가지, 우주와 뇌였어요. 이제 자유롭게 우주로 가는 시대가 올 것 같아서 2006년엔 우주인에 지원도 했지만, 아시다시피 안됐죠. 그래도 그쪽 분야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접은 건 아니에요.”

 의대에 재학중이던 시절에도 계속 의학지식과 비즈니스화를 궁리하던 그는 2009년 졸업후 KMI 검진센터에서 일하게 된다. 물론 의사로서 말이다. 이어 한 지역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다가 그를 창업으로 이끈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날 응급실에 만삭의 임신한 여성이 실려왔어요. DOA(Dead on arrival)였죠. 응급실에선 그런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이 분이 지체장애가 있는 분이었어요. 같이 따라온 남편도 그랬죠.”

 그가 이들 부부의 상황을 유독 안타깝게 느낀 것은 당시 그의 아내도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 아마도 감정이입이 됐을 터였다. 둘 다 지체장애로 인해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 못하는 것도 안타까움을 더했다. “심폐소생술로 일단 살렸지만 큰 병원으로 옮겨야 했어요. 20분 걸려 대학병원으로 가는데 데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병원으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 참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의사들이 각자 초음파진단기를 들고 다니면 문제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가 이런 생각을 한 것도 병원으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였다. 종합병원으로 옮겨주고 그는 돌아왔지만 나중에 그 여성과 뱃 속의 아이는 결국 모두 숨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물론 휴대용 초음파진단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삶과 죽음의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고 장담은 못하죠. 하지만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의사가 현상을 좀 더 빨리 제대로 파악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최소한 장비가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탄식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가 창업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살아온 삶의 과정들이 아무 의미없이 흩어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연결돼 오늘날 그가 하는 사업의 하나하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료 분야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그는 전자공학을 배웠고, 벤처에서 일했으며, 신호처리분야에서 일했고, 의대를 졸업하고 의료 현장에서 실무를 경험했다. ‘Connecting the Dots’가 멀리 남의 얘기가 아니다.

<힐세리온은 아직 제품 출시전이라 홈페이지 이미지를 캡쳐해 올렸다. 맨 왼쪽이 류정원 대표.>

◆휴대용 무선초음파진단기, 상반기 출시

자, 이렇게 해서 의사로서의 삶은 중단되고 벤처기업가로서 인생이 다시 펼쳐졌다. 자신이 필요해서, 그는 휴대용 무선초음파진단기 개발을 시작했다. 의료에 IT 기술을 접목해 좀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출발점이 됐다.

 2012년 2월, 류 대표는 힐세리온(Healcerion)을 설립했다. 휴대용 무선초음파진단기를 만드는 게 첫번째 일이다. 물론 현재도 휴대용 초음파진단기가 있지만, 현재 제품보다 크기가 훨씬 작다.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 무선으로 작동한다는 것도 차별화된 점. 그러면서도 가격은 기존 제품들의 10% 수준으로 저렴하게 책정할 계획. 제품이 상반기 내에 출시될 예정인데, 보안을 위해서 자세한 내용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앱으로 건강을 체크하고 관리할 수 있는 그런 서비스들도 다수 만들어갈 계획. 모바일 헬스케어 시장은 이제서야 태동기에 있다는 게 그의 판단. 

 그는 궁극적으로는 해외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초음파진단기 얘기를 꺼내면 의사들이나 일반 소비자들도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거 병원에 가면 다 있쟎아?’ 하지만 사실 현실은 일부 극소수 잘 사는 나라들에서나 그렇다는 겁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아직도 임산부 배에 고깔을 대고 아이 상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필요로 하는 곳은 무궁무진합니다. ”

 그는 무선초음파진단기를 의사들의 개인장비로 만들겠다고 한다. 그래서 초음파진단기를 ‘제2의 청진기’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 사업 확장 못지 않게 그는 사람을 살리는 사업,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했다. 그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까.

 “물론 사업도 잘 돼야지요. 잘 할 수 있을 거라 확신이 있기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합니다. 직원들하고도 이런 얘기를 많이 하죠. ‘만약에 우리 사업이 잘 안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가 개발한 이 제품이 누군가의 삶을 살리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그걸로 또한 족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살아난 사람은 누군가의 아버지일 것이고,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어머니일 수 있으며, 누군가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녀일 수도 있다. 그거면 되지 않나.’ 이렇게 말입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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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인터넷에 연결돼 있지만 스마트폰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하면 사용 패턴이 좀 달라지는 것 같다. 뭔가 생산하고 자료를 찾는 이런 것보다는 소비하고 즐기고, 잠깐씩 해도 별 상관이 없는 그런 것들을 주로 하게 된다. 차분하게 자리 잡고 앉아서 집중해야 하는 일은 여전히 PC나 노트북 앞에서 한다.  

 결국 모바일에서 살아남으려면 재밌어야 하는 것 같다. 아니면 아주 필수적으로 꼭 필요하던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찾고, 열심히 배우거나 사용방법을 익히지 않아도 그냥 느낌으로 하게 되는 그런 게 결국 통한다. 좀 더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것들이 PC시절보다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 사진이나 관련 글, 동영상 등을 보는 것은 어떨까. 진정 좋아한다면 자발적으로 서비스를 찾아 들어가지 않을까. 어디서 알았는지 정보를 기가막히게 찾고 요청하지 않아도 알아서 지인들을 끌어모으면서 말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몬스터플래닛은 바로 이런 서비스, Fansome(팬섬)을 개발했다.

<몬스터플래닛 임직원들. 가운데가 이성학 대표>

◆넥슨 출신의 창업 멤버들

서울대 전기공학부에 입학한 이성학 대표는 2004년 병역특례로 군 복무를 대신하기 위해 넥슨에 입사했다. 2006년 넥슨에서의 근무가 끝나고 학교로 돌아갔지만 이듬해 바로 다시 넥슨에 입사하게 된다. 어느날 옛 직장인 넥슨에 잠깐 들렀다가 만난 (당시) 민용재 본부장이 ‘신규사업을 같이 해 보자’고 제안했기 때문. 끝난 줄 알았던 넥슨 생활은 이렇게 다시 시작됐다. 

 당시 그가 맡았던, 이른바 ‘신사업’은 캐릭터, 애니메이션, 도서 등 주로 오프라인 관련 사업. 넥슨이 게임 콘텐츠를 기반으로 2000년대 중반부터 원소스멀티유즈의 일환으로 오프라인 비즈니스도 활발하게 추진했는데 그가 그 일을 맡았던 거였다. “2007년 2008년엔 게임회사로서는 처음으로 캐릭터페어를 나가기도 했어요.” 하여간 그 정도로 열성적으로 했다는 뜻. 

 넥슨 신사업팀에서 만난 6명이 창업 멤버가 됐다. 처음부터 창업이 목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게임이 주력인 넥슨이라는 회사에서 신사업을 한다는 것이 내부에서 진행하기엔 어떤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이 대표는 독립법인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넥슨 신사업부에서 하던 일을 나와서 별도 법인에서 하면 오히려 사업 영역도 확장하고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고 한다. 넥슨의 일을 중심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초기 리스크도 줄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 대표와 넥슨 신사업팀 멤버들은 2010년 몬스터플래닛을 창업했다. 이 대표가 상당수 지분을 투자했고, 넥슨의 지분은 없다. 시작은 넥슨에서 하던 캐릭터 사업이 위주였다. ‘대학·학과 선택 고민하고 있니’라는 책을 출간하는 등 출판업도 했다. 오프라인에서 그야말로 온갖 사업을 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플랫폼 개발의 꿈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결합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그런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기존 플랫폼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방식이쟎아요. 그런데 좀 다른 방식의 네트워크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가 생각한 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페이스북에 수많은 사람이 연결돼 있다. 하지만 그 중 막상 나와 오프라인에서 친한 사람이라도 그가 올리는 글 중 상당수가 나에겐 별 관심없는 일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정치적 견해라든가, 종교에 대한 의견이라든가, 사회 현상에 대한 시각 등이 그것이다. 아니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인간적으로는 친해도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별로 그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이 대표는 사람과 사람의 연결 못지 않게 ‘관심’과 ‘관심’의 연결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물론 이런 결론에 아무런 고민 없이 도달한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플랫폼을 구상하는 가운데 시행착오도 겪었다. 2011년 9월 몬스터플래닛은 ‘offline 술래잡기’라는 앱을 개발했다. ‘일상 생활에서 마주치는 주위 사람들과 술래잡기를 즐겨보자’는 개념. 앱을 설치하고 어떤 지역에 가서 실행했을 때 지 역 주위에 있는 앱 이용자들이 표시가 된다. 즉 이용자들끼리 술래가 되고 도망자가 되서 서로 쫓고 쫓기는 게임을 하는 것. 단순해 보이지만 초반에 크게 인기를 끌었다. 출시한 지 사흘만에 1만명이 다운로드하고 이용자들이 몰렸다. “그런데 준비가 안 돼 있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너무 몰리니 에러가 나더라구요. 경험이 없다보니까 예상을 뛰어넘게 사람이 몰리자 서버를 리셋해야 되는 상황이 왔죠. 에러가 자꾸 나서 결국 3개월 뒤 서비스를 접었어요.”

 운영 미숙으로 실패한 셈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감도 얻었다는 설명. 재미삼아 한 서비스가 인기를 끌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올 5월에는 소셜파티UP이라는 앱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 역시 지역을 기반으로 같이 있는 사람들끼리 가상의 파티를 즐기는 것. 남녀간에 대쉬하거나 모르는 사람을 새로 사귀는 데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이런 서비스들을 선보이면서 사람들간에는 공통의 관심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 관심사 중 가장 강력한 게 뭘까. 서로가 좋아하는 스타가 아닐까. 팬섬(Fansome)은 그래서 나왔다. 

◆관심과 관심의 연결

팬섬은 관심을 갖고 있는 스타의 사진과 정보를 공유하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기존에도 한류 관련 서비스가 있지만 집중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모바일에 최적화돼있지도 않구요. 콘텐츠 번역 관련 서비스들도 SNS쪽으로 확장되고 있지만 유저들끼리 실시간 소통을 하는 부분은 확실히 부족합니다. 팬섬은 기존 서비스들이 가진 이런 약점 부문에서 확실한 강점이 있습니다.” 

 앱을 실행하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를 선택해 팔로우하면 스타와 관련된 콘텐츠만 볼 수 있다. 기본은 사진. 내가 좋아하는 스타가 없다면? 그 스타를 등록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팬섬은 유저들이 요청하고 찾는 스타를 등록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페이스북 아이디를 이용하면 쉽게 로그인이 된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연예인이 이민호라고 하면 선택만 해도 바로 이민호와 관련된 갖가지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다. 올리는 사진은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도 가능하다. 한국어 뿐 아니라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4개국어를 지원한다. 유저들이 쓰는 스마트폰 OS(운영체제)에 따라 자동으로 언어가 설정된다.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하고 만들었습니다.” 이 대표의 설명. 말이 된다. 마침 지난해 미래창조과학부의 글로벌창업지원센터 지원 대상에 선정돼 1500만원을 중국 시장을 겨냥한 글로벌 홍보마케팅에 쓸 수 있게 됐다. 

 1월 둘째주부터는 대대적인 변화도 예고돼 있다. 우선 팬섬에 사진을 올리면 위챗, 카카오톡, 라인, 웨이보 등 글로벌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공유할 수 있다. 스타들이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랩, 유튜브 등에 직접 올리는 자신의 사진과 동영상을 가져오는 기능도 추가된다. 즉 팬섬을 통하면 스타들의 사진과 동영상을 다 보게 된다는 뜻이다. 

 “한류를 통해 전 세계인들을 관심네트워크로 엮어 보겠습니다. 지금의 절호의 기회죠. 전세계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류콘텐츠 마케팅 플랫폼이 될 생각입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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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 제품을 보내주고 이를 광고와 마케팅의 채널로 삼는 서비스들은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까. 혹자는 화장품 샘플 판매 서비스, 즉 무슨무슨 박스류의 서비스의 한계에 대해 말하기도 하지만(대량 생산에 제한이 있다는 등의 지적) 지금 이런 종류의 서비스만큼 빠르게 확장해가는 정기배송 서비스도 없다. 특히 화장품 분야에 있어서는 신상품을 바로바로 써 보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와 업체의 필요성을 잘 연결시킨 절묘한 영역을 잘 파고든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샘플 배송 서비스는 신제품 마케팅이 필요한 업체로부터는 공짜로 샘플(사실상 신상품의 미니어처 수준)을 받아서 이를 써보고 싶은 고객들에게는 돈받고 파는 모델이다. 신상품 마케팅 대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신상품을 돈받고 파는게 아니라 공짜로 보내준다면? 시장의 판도를 흔들 수 있을까. 그러면 어디에서 돈을 벌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이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번에 소개하는 회사는 ‘써봐야 알지!’를 내세운, 프리캐치 개발사 스타캐치의 우철규 대표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청년

우 대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영화판으로 갔다. “그땐, 참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어요. 아니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던 거죠. 온갖 일을 다 했어요. 영화 촬영장에서 스탭으로 일한다는 건 촬영 현장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장소 준비, 사람 섭외, 하다 못해 식사 준비까지. 3년 동안 있었어요.”

 촬영장 스탭 일로 생활비를 감당하긴 역부족이었다. 평소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고, 촬영이 있는 기간이 되면 촬영장에서 일을 했다. 그가 영화판에서 스탭으로 일하고 있을 때 그에게 공부를 더 할 것을 권유한 사람들도 있었다. 영화 감독이 되고 이 분야에서 일을 계속 하려면 더 배워야 한다는 거였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는 공부를 왜 더 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없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지나고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생활도 마친 그는 한 전문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나서도 방황은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그는 시나리오를 쓸까 하고 책을 보던 중 ‘다른 나라 사람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경험을 넓혀야 뭐든 할 수 있겠구나’는 게 그의 당시 판단. 그는 훌쩍 인도로 떠나게 된다.

◆인도여행 중 자신을 발견하다.

 “아니 왜 하필이면 인도에?”

 “글쎄요. 그냥 그 쪽에 뭔가 동경 같은게 있었어요. 스티브잡스도 인도 여행 중에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쟎아요. 저에게도 뭔가 도움이 될 것 같았죠.” 

 “경비는 어떻게 마련했어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아둔 돈을 전부 다 쏟아 넣었어요. 사실 인도 여행이 경비가 싼 이유도 컸어요. 경비의 대부분이 비행기값이었죠. 현지에선 돈이 거의 들지 않았어요.”

 인도를 얼마나 다녔을까. 무려 8개월을 있었다고 한다! 델리 뭄바이 캘커타 등 인도 전역의 도시를 전부 다 다녔다. 대한민국 좁은 땅도 그렇게 다 돌아다니긴 힘들텐데. “한국은 그렇게 다닌 적 없었죠?” 나의 이런 질문에 그가 답했다. “그쵸. 그때까진 그랬죠.”

 8개월을 다니다가 돌아오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어느 날 시골 마을에 들어갔는데 어떤 남루한 소년이 신발을 사 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사 줬어요. 아무 생각없이 한 행동이죠. 그런데 그 다음날 이 녀석이 친구들을 데리고 오더라구요. 그러면서 자기네들도 사달래요. 얘네들 신발 값이 한국 돈으로 치면 정말 터무니없이 싸거든요. 그래서 그 몇명에게도 신발을 사 줬어요. 그게 저한테는 별로 부담이 되는 돈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랬더니 그 다음날엔 정말 동네 애들을 다 데리고 온 거에요. 거기서 제가 여러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제가 가진 돈을 다 주면 처음에 신발 사줬던 그 아이가 대학까지 다닐 수 있는 교육비와 생활비가 다 되겠더라구요. 그러면서 제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든 거죠. 빈부의 엄청난 격차에도 놀라고, 한편으론 내가 괜히 이 사람들이 그냥 이렇게 사는 곳에 나타나 평지풍파를 일으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남의 인생에 개입하지 말자. 나는 빨리 내가 사는, 치열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그는 바로 한국에 들어가진 않았다. 이번엔 중국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중국 여행은 보다 현실적으로 택했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 있는, 대도시로 갔다. 베이징과 상하이. 두 대도시에서 두 달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마음을 굳혔다. “‘창업을 하자. 이공계로 대학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엔지니어가 되서 내 힘으로 창업을 하자’ 이렇게 결론을 냈어요.”

 2007년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일년간 준비를 해 2008년 가천대 소프트웨어학과에 입학(편입)했다.

◆쓰라린 첫 실패

2010년 2월 졸업을 하자마자 그는 바로 사업을 시작했다. 인도와 중국 여행 중에 한 결심을 지킨 것이다. 당시 그가 시작한 사업은 온라인 교육용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SNS를 통해 친구도 사귀고 영어 공부도 할 수 있게 한다는 컨셉트로 시작했다. 하지만 경험없이, 열정만으로 시작한 사업은 3개월만에 끝나고 말았다. 너무 빨리 찾아온 실패였다. 이게 약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는 사업을 접고 바로 여행을 떠났다. 이번엔 국내를 한바퀴 도는 한달짜리 프로젝트였다.

 그 뒤로도 그는 위시쿠폰이라는 소셜커머스 사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2012년에는 리워드앱을 개발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 스타캐치를 설립하고, ‘프리캐치’라는 서비스 개발에 착수했다.

 프리캐치(free catch)는 단어에서 오는 느낌 그대로 공짜로 물건을 잡을 수 있는 서비스. 기본적인 개념은 샘플을 고객들에게 배송해준다는 것이다. 샘플 서브스크립션 커머스와 유사하다. 즉 화장품 등 업체로부터 샘플을 제공받아 이것을 고객들에게 보내주는 것이다. 기존의 미미박스, 글로시박스 등과 다른 점은 어디에서도 비용이 청구되지 않는다는 점. 즉 기존 서브스크립션 서비스는 업체로부터는 공짜로 받아서 소비자들에게는 돈을 받고 판매했지만 프리캐치는 말 그대로 소비자들에게도 공짜로 제공된다. 소비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기 때문에 이름이 프리캐치다. 소비자들에게 공짜로 제공하기 때문에 되레 업체들로부터는 일부 비용조로 지원을 받는다. 업체들이 마케팅 차원의 비용을 대는 셈. 

 소비자들은 제품을 써보고 간단한 후기 정도를 올리면 된다. 후기가 활성화돼있다는 게 특징. 소비자들이 써 보고 느낌을 올리기 때문에 업체들로서는 반응을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스타캐치 창업멤버 및 임직원들. (앞줄 왼쪽부터)박혜진 MD, 우철규, 김지웅 전략이사.  (뒷줄 왼쪽부터) 최태준 영업총괄, 김한열 매니저>

◆한가지 상품에 집중!

더 큰 차이는 한 가지 상품에 집중한다는 것. 즉 단일 브랜드 상품을 배송한다. 배송 횟수에도 특별한 제한이 없다. 월 1회가 아니라 매주 1회씩 보낼 수도 있다. 신상품이 나왔을 때 보다 적기에 샘플을 체험해볼 수 있다는 장점이 될 수 있는 것. 단일 브랜드를 보내기 때문에 다른 브랜드에 묻혀서 원하는 제품의 마케팅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딱 하나씩만 가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그것에 집중하게 된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프리캐치는 박스에 포장한 소포 방식이 아닌 비닐 등으로 포장한 일반 우편물로 샘플을 보내고 있다. 물론 이로 인한 제약도 있다. 제품의 용기나 용량의 제약이 생긴다. 너무 샘플 티가 나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지금 화장품 서브스크립션이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은 저렴하게나마 비용을 지불하면 ‘샘플이지만 사실 샘플이 아닌’ 상품을 받아 쓸 수 있다. 즉 싸구려 느낌이 비교적 안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짜라도 막상 진짜 샘플 같은 샘플이 오면 어떨까. 물론 그것을 원하는 소비자들도 있겠지만(공짜니까) 시장 확장에 제약이 있지 않을까. 더구나 용기 등의 제한마저 있다면 말이다.

 프리캐치의 또 다른 전략은 화장품 말고 다른 다양한 상품군으로 확대한다는 것. 이미 액세서리를 샘플 배송군에 추가했고 식음료 분야로도 전선을 확대할 계획이다. 간단한 스낵이나 쉽게 상하지 않는 음료수 등 음식표품 분야에서도 샘플 상품을 필요로 하는 분야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우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금방 떠오른 생각은, 마트나 백화점 음식료품 코너에서 하는 시식을 집으로 가져다준다는 개념도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식을 하는게 제품에 대한 접근을 높여서 판매량을 늘리겠다는 것인데, 시식을 아예 집에서 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것.

 현재 프리캐치는 모바일 웹 사이트로만 출시된 상태. 앱 서비스는 내년 1월에 출시된다. 모바일 웹 페이지 http://m.freecatch.co.kr 에 들어가 샘플을 신청하면 받을 수 있다. 신청하면 누구나 받는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됐지만 뜻밖의 호응도 얻고 있다. “저희 샘플이 소포가 아니라 우편함에 꽂히는데요, 여성분들의 반응이 의외로 좋더라구요. 우편함에는 항상 스팸이나 돈 내라는 고지서만 들어오는데 샘플을 써 볼 수 있는 우편물이 오니까 기분이 좋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프리캐치는 해외 시장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 소포 방식이 아닌 우편물 배송 방식을 택한 것도 일본 시장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 일본에서는 소포냐 우편물이냐에 따라 10배 이상의 가격 차이가 난다. 우대표는 “내년에 일본 시장 공략도 본격화할 것”이라며 “SNS 기능을 강화해 소비자들이 샘플을 써보고 후기를 올리고 공유하는 부분이 활성화되면 업체들이 보다 마케팅 효과를 체감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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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시대가 오면서 필수품처럼 되버린 액정 보호필름에 대해 소비자들은 얼마 만큼의 기대를 갖고 있을까. 별 생각이 없거나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구입하면서 통신사 대리점에서 붙여주는 보호필름을 그대로 쓸 것이다. 상당수 사람들이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지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액정이 한번쯤 깨지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액정 보호를 해주는 보호필름의 중요성을 보다 확실하게 깨닫고 특수 기능이 있는 보호필름을 돈을 좀 내고서라도 구매해 쓴다. 그런 경험이 없이 액정 보호필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쓰고 있는 필름에 불만이 있던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액정 보호 필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직접 구매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남아있다. 액정보호필름을 직접 자신이 붙이는 것에 자신없어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것. 직접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보호필름이란게 붙이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즉 액정보호필름에 대해선 이런 제법 복잡한 상황들이 있고, 그래서 한편으론 하챦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스마트폰이 확산될수록 관심과 중요도가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삼성전자나 애플이 아예 깨지지 않는 액정, 눈에 피로를 주지 않는 디스플레이를 만들지 않는 한 말이다.  

◆뭘 하든 뜻을 펴려면 돈이 필요하다

이번에 소개하는 제드(JED)라는 회사의 서강진 대표는 액정보호필름을 제조해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좀 거칠어보였지만, 야생에서 생존 훈련을 한 그런 인물처럼 보였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사업가가 꿈이었어요. 돈 걱정없이 배울 수 있는 그런 학교를 세우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학교를 세우려면 돈이 있어야하쟎아요? 돈을 우선 벌어야겠더라구요.”

 그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 중학교때부터 신문배달은 기본이었고 새 문제집이 생기면 아무 표시도 나지 않게 문제를 풀고 다시 팔아서 용돈으로 썼다. 중학교때부터 주식에 관심을 가졌고, 어떻게 하면 내 사업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서울산업대 기계공학과에 진학을 했지만, 창업 생각이 간절했던 그에게 학교 공부는 왠지 공허하게 느껴졌다. 결국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휴대폰 온라인 판매로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다. 그런데 휴대폰을 온라인에서 판매하려면 기존 대리점의 벽을 넘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대형 대리점의 온라인 담당 부장을 계속 따라다녔어요. 처음엔 만나기도 힘들었지만 결국 한 달 만에 온라인에서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받을 수 있었죠.”

 이렇게 해서 나이 스물넷에 처음 시작한 사업. 그 뒤로 4년 가까이 일을 했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것. 돈을 벌어야겠다는 당초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휴대폰 온라인 판매에서 그가 특별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해서인 것 같다. “어떤 달에는 단숨에 3000만원을 벌었다가 그 다음달에는 손실이 나기도 하고, 너무 등락이 심하더라구요. 그래도 영업을 배운 소득은 있었어요. 그래서 좀 더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업이 뭔지 궁리하기 시작했죠.”

◆두번째 창업 도전

그는 혼자 집에서 고민하지 않고 창업스쿨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한달에 최소한 한번씩은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통화를 했어요. 아이디어도 얻고, 사람도 사귀고, 배짱도 키우려고 그랬죠.”

 인천정보산업진흥원의 ‘JST 창업스쿨’을 수료하고 나니 교육 시간 중에 만난 사람 중에 함께 창업하자는 제안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 사람은 액정보호필름 관련 특허를 갖고 있었는데 함께 창업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처음에 서강진 대표는 일단 제품성과 시장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다른 브랜드를 납품받아 판매하는 일만 해봤다. 잘 됐다. 시장이 꾸준한 점이 좋았다. JST 창업스쿨에서 만난 염경덕이 자본을 투자하고 서강진 대표가 사장을 맡았다. 디자이너로 신은혜 실장이 합류했다. 세 사람의 이름 이니셜을 따서 회사 이름을 JED(제드)라고 지었다.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작은 액정화면을 계속해서 나오는 인체에 유해한 블루라이트로 인해서 안구건조증과 두통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도 늘어났다. 

 JED의 첫 작품 폴스킨스(Paulskins)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방탄보호와 항균기능을 가진 필름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블루라이트 차단 기능까지 갖춘 제품이다. 블루라이트 차단 기능까지 갖춘 제품이 주력. 가격이 1만8000원을 상회하는 고가 제품이다. 하지만 그만큼 확실하게 차별화된 장점이 있다는 설명. 사실 이 제품을 접하기 전까지는 블루라이트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 “블루라이트라는게 있습니다. 가시광선 중 가장 강한 에너지를 가진 파장이 380~495nm인 청색광으로 각막이 수정체에서 흡수되지 않고 망막까지 도달해 안구건조증, 눈의 피로, 불면증, 어깨 결림, 요통 등을 유발하는 인체에 유해한 광선입니다. 제드에서 나온 안티블루라이트 제품은 방탄보호 기능과 항균 기능에 더해 블루라이트 차단기능까지 갖춘 제품입니다.”

◆Scars into Stars, Tears into Vision

가격이 제법 되는 액정보호필름을 써 본 적도 있지만 확실히 폴스킨스는 붙였다 뗐다 하기가 쉬웠다. 혼자 붙이기 어려운 애로사항은 확실히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액정을 보호하는 기능도 탁월한 편에 속한다.은은한 푸른색 빛이 돌아 폴스킨스를 붙이면 스마트폰이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장점도 있다. 

역시나 문제는 가격과 유통망. 990원짜리 저가 제품과 싸우기 위해선 소비자들에게 장점을 어필해야 하는데 스타트업이 하기엔 만만치 않은 과제다. 일단 액정보호필름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파고 드는 수밖에 없다. 가격이야 제품성으로 극복한다고 해도 유통망을 뚫는 것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현재는 주로 온라인몰을 통해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에서도 구매할 수 있게 확장하고 있지만 일단 시급한 것은 통신사 대리점을 개척해나가는 거죠.”

 말뿐인 자랑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항균시험테스트(SGS), 유해물질제한규제준수(RoHS) 등 공식 기관의 테스트도 받았다. 경도 부분은 좀 더 실질적인 테스트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제품 설명에 보면 3H 라고 하는데, 보통 접하는 3H 제품보다 더 두툼하게 느껴진다. 

 서 대표는 JED를 액정보호필름 회사로 규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한다. 처음엔 이렇게 시작하지만 유통망을 뚫고 자리를 잡으면 IT분야 중소기업의 제품을 유통하는 종합 쇼핑망을 구축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를 만났을 때 자켓에 반짝이는 장식물이 달려 있는게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Scars into Stars, Tears into Vision’라고 써져 있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입니다. 상처가 별이 되고 눈물이 비전이 된다는 뜻이죠. 처음 창업했을 때 어려움도 많이 겪었고, 뜻대로 일이 안돼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IT종합 쇼핑몰을 만들고 싶다는 비전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두고 보세요. 판매망을 구축하는 게 1단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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