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도 빌릴 수 있다. 집이나 사무실에 그림 하나만 바꿔 걸어도 기분이 달라지고 분위기가 싹 바뀌는데 그림 값이 비싸서, 사러 가기 귀챦아서, 들고 오기가 힘들어서, 가져왔다가 맘에 안 든 경험이 있어서 등등 다양한 이유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싼 값에 빌릴 수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적정한 시기에 바꿔서 걸 수도 있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그림을 빌릴 수도 있다는 것을, 눈앞에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림 빌려주는 사업을 하는 회사, 오픈갤러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득 세상의 어떤 것이든 빌릴 수 있게 되는 그런 세상이 오지 않을까 이런 상상의 나래도 펼쳐봤다. 

 ‘그림을 빌려준다’는 그런 독특한 발상을 하기까지는 물론 창업자 본인의 독특한 경험이 작용했다. 하지만 경험 그 자체보다는 그것에서 기회를 발견하고 대범하게 실천에 옮긴 실행력이 더 돋보인다. 아마 이런 것을 우리는 기업가 정신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이 좋은 곳에 왜 사람이 없을까

박의규 대표는 컨설턴트 출신이다. 부즈앨런과 딜로이트에서 5년을 일했다. 컨설팅 업계는 일이 많은 곳이다. 거의 휴일도 없이 일하고 많은 보수를 받지만 그만큼 빨리 지치는 이들도 많고 그래서 조기 이직 비율이 높다고 한다. 

 그래도 어쨌거나 그는 컨설팅 일도 재밌게 했다. 다만 앞으로 무엇을 할 지 계속 고민했을 뿐. 의도하지 않았던 환경이지만 그는 미술 전시회를 갈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갤러리에 갈 때마다 느꼈던 낯설고 기이한 느낌. 왜? “이렇게 좋은 자리에 멋진 미술관이 들어서 있는데, 사람이 너무 없어요.”

  박 대표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다. 그가 갤러리, 전시회를 자주 갔던 것은 친구가 작가였기 때문. 친구 작품을 감상할 겸, 친구도 만나러 자주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를 통해서나 주변 지인 중 작가인 사람들 통해서나 듣는 이야기는 한결같았다. “지인들만 찾아와. 갤러리는 대부분 텅 비어있어.”

 굳이 박 대표의 경험을 빌리지 않더라도 주위를 둘러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갤러리를 찾아가 미술 작품 감상을 하고 여유롭게 사색에 잠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것을 별로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럴만한 환경에 노출되지도 않았다.

 현실이 이러니, 미술 작품을 그린 작가들의 작품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도 힘든 게 당연하다. 시장이 없고, 현재로선 뭔가가 만들어질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마 0.1%? 그 정도 비율도 안 될 겁니다. 우리나라 국민 중에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갤러리를 다니는 사람의 비율이 말입니다. 이 비율을 10% 정도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굉장한 시장이 만들어질텐데 하고 생각했죠.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고, 작가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죠.”

 그래서 창업이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던 박의규 대표는 새로운 미술 작품 시장에 대한 창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술 쪽으로는 전혀 문외한인 그가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창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 대표의 표현에 따르면 '전형적인 사진 양식을 극도로 싫어하는(?)' 홍 디렉터의 제안에 따라 이런 포즈의 사진이 완성됐다. 이들 12명이 현재 오픈갤러리의 멤버들이다. 아마 오른쪽에서 두번째쯤?에 박 대표가 있을 것이다.>

◆힉회에서 만나 팀을 만들다

박 대표를 만난 자리에 함께 자리했던 미모의 여성 홍지혜 이사. 창업멤버인 그녀는 큐레이터였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한때 미술계의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찾던 그녀는 미술경영을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한다. “외부 전시회를 열어도 지인들만 찾아와요. 왜 이럴까. 저도 박 대표와 마찬가지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거죠. 이걸 어떻게 풀어볼까 고민했어요. 저한테는 인생이 걸린 문제였으니까요.” 

 홍 이사가 생각한 것은 ‘미술작품도 소통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미술작품의 소통을 인생의 사명으로 삼기로 했다고 한다. 미술경영 전공은 서울대 미대 안에 있는 일종의 협동과정이었다. 홍 이사는 미술쪽 경력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대 미술관에서 연구원으로 2년 있었지만, 워드스케치, 슈거딜, 매직테이블 등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벤처기업에 대한 관심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같은 고민을 안고 있던 두 사람이 만난 곳은 경영전략학회(SND)라는 대학 연합 동아리. 미술을 전공으로 한 홍 이사가 여기에 참여한 것이 흥미롭다. 새로운 시각의 문제의식을 기대한 게 아니었을까.

 박 대표는 홍 이사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미술 시장의 현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해도 작가가 되는 비율은 10%도 채 되질 않는다는 것, 유통 채널이 매우 제한돼 있을 뿐 아니라 유통 플랫폼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 등등. 결국 젊은 작가들은 작품을 유통할 수 있는 채널이 없어서 대중을 만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적나라한 현실은 전국 곳곳의 갤러리에서 매일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채널을 만들어주자!” 이게 출발점이 됐다. 컨설턴트와 큐레이터의 절묘한 조합으로 미술 작품 유통 분야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그래도 준비하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렸다.

<오픈갤러리 홈페이지 http://www.opengallery.co.kr>

◆미술작품 유통 시장의 개척자

 미술품 유통 시장에 렌탈(대여)이 없다는 것을 박 대표는 간파했다. 해외에 이와 유사한 비즈니스가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가 생각해냈던, 상당히 독창적인 아이디어다. 미술품의 수요가 많지 않지만, 잠재적 수요마저 없지는 않다고 판단한 것. 그리고 약간의 자극, 즉 가격적인 부담을 낮춰주면서 미술을 사다가 거실에 거는 불편함을 해소해준다고 하면 잠재적 수요가 움직일 것이라고 본 것이다.

 미술작품 판매와 렌탈을 모두 다 하지만, 결국 렌탈이 주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10호 크기의 그림, 즉 가로 50㎝, 세로 45㎝㎝인 그림을 거실에 걸어놓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림을 찾으러 시장에 나가야 하고, 골라서 결제를 하고 배달을 부탁하던 직접 가져오던 가져와서 걸어놓게 된다. 그렇게 수십-수백만원, 때론 수천만원 이상의 돈을 들여서 그림을 사서 만족하면 다행이지만 집에 걸어놓고 보니 별로라고 하면, 달리 방법이 없다. 참아야 한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주거나.

 오픈갤러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미술작품을 렌탈해준다. 10호 그림은 한달 대여료가 3만5000원. 10만원이면 석달 동안 그림을 집에서 감상할 수 있다. 싫증이 날 만하면 그림을 바꾸면 된다. 계절에 따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그림 한 두개를 바꿔 달아서 집안이나 사무실 분위기를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림을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도 많다. 걱정 없다. 오픈갤러리는 전문 큐레이터(예를 들어 홍 이사)가 방문해 집안 또는 사무실 분위기에 맞는 그림을 추천해 준다. 설치도 해 주고 기간이 지나면 알아서 철거도 한다.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다.

 이 그림들은 오픈갤러리가 작가들과 직접 계약을 체결하고 확보한 그림들이다. 렌탈용의 경우 작가들이 전시하는 기간을 피해서 활용되곤 한다. 작가와 오픈갤러리, 소비자 모두가 윈윈하는 구조다. 

 오픈갤러리 이전에 미술 작품의 유통에 관련된 사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 그런 시도들이 많지는 않지만, 있었다. 

 박 대표는 사업을 하면서 기존의 사례들을 참고했다. 왜 이런 시도들이 있었는데도 잘 안 됐는가를 따져본 것. “사람들이 아직 미술작품에 대해 친숙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너무 많은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아직 시기상조가 아닐까 생각했죠. 그래서 저희들이 어느 정도 작품을 좀 간추려서 대중들에게 제시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작품을 무작정 많이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진 않았다고 한다. 100여명의 작가들로부터 1000여점의 작품을 확보한 상태. 이 작품들은 모두 작가의 작업실 등 개인 공간에 있기 때문에 오픈갤러리가 공간을 많이 가져갈 필요도 없다. 물론 작품을 옮겨야 하는 일이 많아 위험도 따른다. “이런 비즈니스가 별로 전례가 없어서요.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신경써야 할 것도 많고, 안개 속을 헤쳐가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는 즐겁고, 활기차 보였다. 오픈갤러리의 당면한 첫째 목표는 일단 시장 진입에 안착하는 것. 매출은 이미 작년 연말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현재 홍지혜, 김도연 두 큐레이터가 활동하고 있으며 시장이 확대되면 이들의 역할이 더욱 많아질 것 같다. 해외에서도 충분히 통할 모델 같다. 제휴 등을 잘 한다면 해외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을까. 미술 시장을 한번 바꿔보고 싶다는 박 대표의 출사표. 관련 분야에 있는 많은 사람을 자극할 것 같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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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 중에 버리자니 아직 쓸 만하고, 남을 주자니 대상이 마땅치 않은, 그런 물건을 팔려는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중고품 거래 시장이 급성장하는 것 아니겠는가. 업계에서는 시장 규모가 10조원 이상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급성장하는 시장이지만, 시장을 장악한 서비스는 아직 없는 희한한 시장이기도 하다. 물론 중고차 거래의 강자가 있고 중고나라라는 강력한 카페가 있긴 하지만 특수한 자동차 시장을 제외하고 본다면 중고품만을 전문으로 취급해서 시장을 장악한 곳은 없다. 아마도 중고품 거래 시장이 아직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덜 성숙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기존의 유통망을 장악한 곳에서 중고물품 거래를 부속 서비스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제대로된 서비스가 없기 때문 아닐까. 개인간의 거래는 불편하거나 위험하기 짝이 없고 업체를 통한 거래는 제 값을 못받기 일쑤다. 이런 중고거래 시장의 약점이 해소되면 시장이 더욱 확대될 수 있을까. 중고시장이 활성화되면 소비자가 받는 혜택이 늘어나게 된다. 셀잇은 이 점에 주목하고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중요한 것은 창업자가 이 시장에 매우 준비됐을 뿐 아니라 특화된 사람이라는 점이다. 

<서울 강남 역삼동 더벤처스에 입주해 있는 셀잇의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김대현 대표(왼쪽)와 김철우 이사.>

◆첫 중고거래에서 겪은 사기

고등학교 시절 MP3플레이어를 사고 싶었지만 돈이 충분치 않았던 김대현 학생. 중고를 알아보니 13만원에 살 수 있었다. 기쁜 마음에 힘들게 모은 13만원의 거금을 보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물건은 오지 않았다. 순진했던 고등학생이 첫 중고거래에서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가 운이 나빴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직도 이런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 중고거래 시스템이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탓이 더 크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나름 충격적인(?) 경험을 한 셈이었고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는 그때부터 ‘중고거래를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물론 중고거래의 첫 사기경험이 (결과적으로) 인생을 바꿨다고는 하지만 당시엔 그도 그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로 인해 중고거래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게 나중에 중고물품 거래 서비스를 창업하게되는 긴 여정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중고물품 거래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자신이 직접 거래상이 되는 길을 택했다. 알음알음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의 중고물품을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판매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2005년 대학에 입학하고 본격적으로 중고물품 거래를 시작, 5년여 시간동안 600여건에 달하는 중고거래를 성사시켰다. 한 개인이 했다고 하기엔 정말 엄청난 숫자다. 1년에 120여건의 중고품 매매를 했다는 건데 공휴일, 명절 제외하고 2~3일에 한번 꼴로 중고 거래를 했다는 뜻이 된다.

 학교에서 축구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함께 창업을 하게 되는 김철우 이사를 만났다. 김철우 이사는 02학번으로 3년 선배지만 축구를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아이팟 중고를 팔고 싶었는데 이것저것 알아보는게 귀챦고 해서 김대현에게 맡겼어요. 그랬더니 수수료 10%만 받고 제가 원하는 가격에 팔아주더군요. 그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뒤로 중고품 거래를 하는 모습을 유심히 봐 왔죠.” 김철우 이사는 이처럼 김대현 대표가 중고품 거래를 하는 모습을 학창시절부터 봐 왔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그저 친한 동아리 선후배에 그치지 않았다. 결국 2011년 여름 김철우가 창업팀에 합류하면서 김대현을 부르게 된다. ‘함께 일하자’는 제의였다. “그때 사실 취직을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거절했는데, 진심으로 함께 일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게 됐죠. ” 당시 창업 아이템은 리뷰기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같이 일하게 된 것이다. 

◆좋아하고, 잘 하는 것에 집중하자

그런데 처음 같이 한 일은 결과가 좋지 못했다. 사업이 잘 안되고 당시 부산에 있던 김대현은 2012년 4월 서울로 올라왔다. 취직에 마음을 접은 그는 창업 아이템을 찾다가 휴대폰 케이스 사업을 시작했다. “제작과 유통을 모두 했어요. 사실 내심 제조업을 해 보고 싶기도 했고 나름 자신도 있었거든요. ”

 그런데 포인트가 약간 어긋났다. 그는 제조업을 해보고 싶었지만 휴대폰 케이스 사업은 사실 유통 비즈니스였다. 그리고 이게 유통망 싸움이 정말 치열한 사업이었다. 그걸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업에 뛰어들었고, 경험도 부족하고 유통망 싸움에서 우위에 설 방법이 없었던 그로서는 어려운 상황이 계속됐다.

 그때 김철우 이사를 다시 만났다. 김철우 이사는 그에게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을 해보자’고 했다. 당시 김철우 이사는 직장에 취직해 일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각자의 길을 가고 난 뒤 취업을 한 것이다. 2013년 6월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결국 다시 창업을 논의했다. “잘 모르는 것을 하니깐 잘 안되는 것 같았어요. 제가 보기에 김대현 대표는 중고물품을 거래하는 쪽은 정말 잘 하거든요. 경험도 많구요.” 

 두 사람은 주말에 만나 파트타임으로 사업을 준비했다. 8월부터 본격적으로준비가 시작됐다. 중고물품 거래 서비스를 앱으로 만들어 내놓는 것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잘 아는 분야이기 때문에 준비는 척척 됐다. 8월31일부터 서비스가 시작됐다. 물론 엉성했다. 하지만 ‘일단 해보자’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이 서비스가 어떻게 돌아갈 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완벽한 서비스를 만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일단 해보자고 했죠.”

 처음엔 의류, 신발, IT기기, 책 등 온갖 제품을 다 받아서 거래했다. 그러다가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IT제품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IT제품은 비교적 제품 가격이 어느 정도 형성돼 있고 기본적으로 가격이 투명한데다가(옷의 경우 가격 차가 심하다) 상대적으로 기존의 중고물품 거래 시장을 활용하지 않는 사용자들이 많을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2014년 2월17일 법인 셀잇(Sell it)을 설립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사명에 IT가 들어가면서 IT 중고제품을 거래한다는 서비스 컨셉트와도 맞아떨어졌다.

◆기존 중고거래의 모든 불편함 해결했다

이미 중고나라와 쇼핑몰의 중고품 거래 서비스가 우후죽순으로 나와 있는 상태에서 한참 후발주자로 시작한 셀잇의 경쟁 포인트는 뭘까. 우선 셀잇은 기존 서비스업체들과 다른 관점에서 소비자군을 잡았다. “기존 중고거래에 질린 사람들 그리고 중고거래를 안해 본 사람들을 타깃으로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 서비스로 끌어들이자는 게 일차적인 목표였죠.”

 기존 중고거래에 질렸거나, 안하는 사람들에겐 어떤 공통점이 있을거다. 거래의 위험성, 물건을 보내는 불편함, 너무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게 귀챦아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 그리고 이들이 느끼는 이런 어려움이 바로 현재 중고품 거래 시장이 당면한 문제점이기도 하다.

 셀잇은 빠르고 편하고 안전한 중고거래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중고물품 거래 시장의 3대 불편함, 즉 송금-입금에 대한 불안감, 가격에 대한 불신, 배송의 불편함 등을 모두 해결하겠다는 게 이들의 포부다.

 셀잇을 통해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셀잇 앱을 깔고 사진을 올리고 제품 정보를 입력하면 끝이다. 너무 쉽다. 가격이나 제품의 홍보를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가격은 셀잇이 제안을 한다. IT제품이기 때문에 시세표가 있고 셀잇은 이것에 기반에 가격을 제안한다. 최소한 터무니없게 낮은 가격에 속여서 팔거나 말도 안되는 가격에 물건을 사는 일은 없게 하겠다는 취지다. 셀잇의 가격 제안을 판매자가 받아들이면 최소 하루, 최대 14일 동안 판매가 진행된다. 이 기간 중에 구매자가 나타나면 그 물건을 그 가격에 팔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안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도 판매자는 걱정이 없다. 셀잇이 물건을 사주기 때문이다. 물론 가격이 이 과정에서 약간 깎이게 된다. 

 배송과정의 불편함도 대폭 줄였다. 중고품을 팔려고 시도했다가 포기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물건을 보내기 위해 적당한 상자를 사고 제품을 담아서 들고 우체국을 찾으러 다니는 수고를 감당하기 버거워했다. 셀잇은 이런 불편을 없애고자 제품 택배 발송을 위해 상자까지 보내준다. 셀잇이 배달해 준 상자에 담아 인근 편의점에 되돌려주면 끝이다. 

 안전성과 편리성이 부각되면서 셀잇은 사용자들의 충성도가 높은 서비스로 부각되고 있다.한 번 판매를 경험한 사용자가 또 다른 제품을 판매하는 재판매율이 40%를 넘었다. 셀잇은 2014년 7월 현재 월간 거래액이 4000만 원에 이르고, 1만 대 이상의 스마트폰과 노트북, 태블릿PC등 다양한 전자기기가 등록된 중고시장으로 성장했다. 사용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면서 최근엔 더벤처스로부터 투자도 유치했다. 

 셀잇은 말 그대로 빠르고, 편하고, 안전하다. 이것을 쓰면 불편한 것은 그야말로 하나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셀잇에 만족하지 못하는 소비자들도 있을 수 있다. 가격 문제 때문이다. 셀잇의 가격이 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사용자간의 직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격 흥정을 하게끔 하면 어떨까. 하지만 셀잇은 가격흥정이 없는게 매력이라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물건을 빨리 치워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에겐 정말 매력적인 서비스다. 다만 이런 사람들이 가격에 민감한 사람들에 비교해 어느 정도 시장을 형성할 지 궁금하다. 셀잇의 판단대로 기존 거래에 질린 사람들, 중고거래를 안해본 사람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면 셀잇은 충분히 빠르게 성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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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번에도 형제 창업가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러차례 형제 창업가들을 소개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 소개하는 형제들도 남이 모른 채 보면 정말 형제인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모든 면에서 판이하게 달랐다. 대학교수이자 뇌 과학의 전문가인 형과 창업 경험이 있고 IT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동생이 힘을 합쳐 뇌과학분야에서의 창업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 뉴로게이저다. 

◆다른 길을 가던 형제의 의기투합

서울대 경제학과 85학번인 이대열 교수는 대학 시절 심리학을 부전공으로 하면서 정신분석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과학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정신분석에 한계를 느낀 그는 신경과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석사과정 진학을 준비하던 중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미 일리노이대에서 신경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미네소타대학교에서 박사후과정(포닥)을 한 뒤 2006년부터는 예일대학교에서 신경생물학과 교수로 재직을 하고 있다.

 형이 열심히 학업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동생 이흥열은 사업에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경영학(87학번)을 전공으로 한 이흥열은 광고마케팅 분야에 종사하다가 칸커뮤네케이션이란 회사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다. 2011년부터는 크라우드긱스라는 회사를 창업하는 등 IT 분야도 경험했다. 이 무렵부터였다. 이대열 이흥열 두 형제가 만나서 뇌과학의 활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시점이. 

 이대열 교수는 뇌신경과학, 즉 뉴로사이언스와 IT의 접목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3년동안 하면서 고민했다고 하니, 상당한 시간동안 이런 저런 아이디어가 오갔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뇌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 “스킨케어는 열심히 하쟎아요. 그런데 왜 Brain Care는 없을까. 이런 생각을 했죠.”

 사실 이런 생각을 안해봤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는 왜 이런 기상천외한(?) 생각을 했을까. 물론 자신의 전공이 뇌과학이기때문이다. 그래도 학문의 길을 가던 사람이 사업에 대한 꿈을 갖게 되는 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뇌가 크면 머리가 좋을까요. 나쁠까요.” 이 교수가 갑자기 물어왔다.

 글쎄. 내심 뇌가 큰 사람이 머리도 좋을 것 같지만 왠지 너무 1차원적인 생각인 것 같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뇌가 크면 머리도 좋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이것은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뇌의 크기와 지능은 상관관계가 있죠.”

 그는 10년 동안 원숭이 뇌를 연구했다. 물론 인간의 뇌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뇌과학분야에선 원숭이 뇌 연구를 통해 오랜 시간동안 연구결과를 축적해 간접적으로 인간의 뇌를 파악해왔다. 그동안 뇌에 대한 연구는 매우 천천히 발전해왔다. 과거 해부학적인 뇌는 죽은 사람의 뇌를 통해서만이 파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뇌의 작동원리를 이해하는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훗날 뇌파 연구가 가능해졌고 씨티촬영을 하게 되면서 살아있는 사람의 뇌를 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뇌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1990년대 들어와 FMRI가 대중화되면서 뇌의 어느 부분이 에너지를 많이 쓰는지 알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느렸어요. 2초 이상 지연이 됐거든요. 사실상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는 뜻이죠.”

 그래도 뇌파와 MRI 등을 통한 연구가 진행되고 데이터가 쌓이면서 인간의 뇌에 대한 그림이 그려졌다. 이대열 교수는 축적된 연구결과물을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뇌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인간이 처한 어려움이나 의사결정의 상당 부분을 해결해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문제의식이 싹텄다. “자 이걸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려서 삶에 도움이 되게 할까.”

 아무래도 연구결과물을 대중적으로 알리려면 사업화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 이런 걸 같이 고민하기엔 사업가 경험이 많은 동생이 최적이었다. 함께 머리를 맞댄 형제는 이 아이템으로 창업을 하기로 한다.

◆자신의 뇌에 대해 알 필요와 권리가 있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뉴로게이저(Neurogazer). 이름이 좀 어렵다. 하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이흥열 대표에 따르면, 이 이름은 스타트렉이라는 SF시리즈물에서 따 왔다고 한다.

 “스타게이저(stargazer)라는 우주를 항해하는 우주비행선이 나오거든요. 우주를 항해하는 스타게이저처럼 뇌의 무한한 영역을 항해하는 사람들이 모인 우주모함을 상상하며 ‘뉴로게이저’란 이름을 짓게 됐습니다.”

 이름은 상당히 거창하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사실 심플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뇌에 대하 알 권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뇌에 대해 알게 되면 생활의 많은 부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뉴로게이저는 이 작업을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선 기업이 되겠다는 게 이들의 목표로 여겨진다.

 2013년 10월 이대열 교수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사업화 작업이 본격화됐다. 이대열 교수는 뇌과학, 또는 인지신경과학이라는 이 분야의 연구결과물이 제대로 (과장되지 않고) 사업화되려면 전문가들의 자문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우선 과학자문위원회를 결성했다. 2014년 4월이었다. 

 과학자문위원회에는 우선 이대열 교수가 들어갔고,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 심리학(뇌행동 심리학) 박사인 김학진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가 참여했다. 여기에 팀 비커리 (Timothy John Vickery) 미 델라웨어대 심리학과 교수(하버드대학교 심리학 박사), 강효정 중앙대 생명과학과 교수(아주대 의과대학 신경약리학 박사)도 참여, 총 4명으로 구성된 과학자문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과학자문위원회는 뉴로게이저가 하는 인지신경분야의 사업이 과학적으로 얼마나 타당한지는 검증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맡는다. 쉽게 말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그런 것은 사업화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올 5월20일에 드디어 뉴로게이저 법인을 설립했다. 현재는 프로토타입의 서비스가 나와 있는 상태다. 4분기께 정식 서비스를 출시할 계획이다. “개인 및 기업 등에게 특화된 뇌 분석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1차적인 목적입니다.” 이흥열 대표의 설명.

 뇌 분석 정보라는 게 뭘까. 그걸 어떻게 전달한다는 것일까. 뉴로게이저가 추구하는 정보전달이란, 난해한 과학의 결과를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앱과 미디어를 통해 한다는 것. 이를 이흥열 대표는 ‘인지신경과학 기반 자동화 인포테인먼트’라고 말했다. 간단하게 말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어렵게 받아들일 수 있다. 뉴로게이저의 가장 큰 숙제는 이것일 것이다.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다. 편리하고 재밌고 직관적(intuitive)인 정보 사용자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지만 뇌 정보를 얻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뭔가 도움이 돼야 한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이보다 훨씬 재미있는 것들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뇌 정보 서비스의 개척자

이흥열 대표와 이대열 교수가 준비중인 서비스 일부를 보여줬다. MRI로 촬영한 뇌 사진 정보를 입력하면 자신의 뇌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제공된다. 물론 이 뇌 정보는 MRI 촬영을 한 사람이 각자 동의한 상태에서 개별적으로 입력돼야 한다. 입력 주체야 병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개인이 동의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기본적인 MRI 사진정보가 들어가면 뇌의 크기(용량)가 어떻게 되는지, 뇌의 부위별 나이가 실제 나이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등의 정보를 제공해준다. 뇌의 특정 부위 또는 기능이 실제 나이보다 많다면 그 부분의 기능이 저하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 즉 건강이 나빠지거나 신체 특정 부분의 기능이 저하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이런 정보를 알면 주의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런 정보는 건강 뿐 아니라 교육 서비스나 교육관련 프로그램에 활용될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이 되는 건가요?”

 “뇌는 몸의 모든 활동을 제어합니다. 피아노를 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테니스를 치고 글씨는 쓰는 등 우리가 평소에 하는 많은 활동들이 사실 운동신경과 시신경이 연결되고 제어되어야 할 수 있는 일들이죠. 그런데 이게 뇌가 발달하고 성숙해지면서 함께 발달하고 원활해지는 거거든요. 이 기능이 제대로 발달하기 전에 뭘 해봤자 잘 안되는 게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음. 그러니까 예를 들면 피아노를 배운다고 칩시다. 어떤 사람은 5살 때 배워도 잘 따라오지만 어떤 사람은 10살이 넘어도 피아노를 잘 배우지 못합니다. 이게 흥미나 재능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뇌 신경의 발달이 아직 이뤄지지 않아서 그런 경우도 많다는 겁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런 정보는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한국에서 제법 많은 수요를 창출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런 정보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와 함께 이런 정보를 어떻게 가공해서 상품화하느냐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이흥열 대표는 신뢰성을 해결하기 위해 자문위원회를 뒀다고 설명했다. 가공해서 상품화하는 문제는 앞으로 풀어가야할 일이다. 

 “뇌 영상 정보를 활용하면 정신건강상의 취약성, 폭력범죄에 대한 선호성, 외향성, 신경증, 위험회피, 비관, 고집,  공감능력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개인의 지능이나 문제해결능력, 같은 학습과정을 겪고도 학습효과와 성취의 차이가 나타나는 요인, 사고방식 및 의사결정 프로세의 차이, 예술적 기질이나 특화된 분야의 탁월한 천재성 등과 관련해서도 뇌영상을 분석해 신경해부학적인 근거를 파악하는데 활용하기도 합니다.”

 뉴로게이저가 엄청난 잠재된 시장의 가능성을 열어젖힌 것일까. 아니면 논란의 근원이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일까. 물론 이들은 전자라는 확신을 갖기에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뇌 정보가 현재 우리가 접한 문제들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런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과학계에서 논의되고 연구된 수많은 이와 관련된 정보들 중 일부만 의료계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을 뿐 일반인들의 영역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기에 이들이 뇌정보 서비스에 도전하는 것이다.

 “뇌의 성장기에 있는 유아, 청소년의 적성과 성장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 혹은 많은 스트레스에 노출되어있는 장년층의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서나 연장되어가는 인간의 수명에 따라 보다 건강한 뇌의 관리를 위해서 기업의 특수한 의사결정을 위해서든 뇌의 정보는 우리의 삶에 있어 많은 시간적 비용을 줄이는데 기여할 것입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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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멀리서 한 남자가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한 눈에도 그가 아이엠박스 남성훈 대표임을 알 수 있었다. ‘박스의 실제 크기를 보여주고 싶어 들고나왔노’라는 그에게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랑스럽고 매우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박스는 도대체 뭐에 쓰이는 박스일까. 그와 그의 회사는 어디에서 기회를 찾은 것일까. 이제부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두 번의 실패

고심끝에 과를 선택해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전공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건국대학교 영상학과 남성훈 학생의 경우가 그랬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영화판에서 일을 해보기도 하고 어떻게 진로를 잡아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랬으리라. 

 그래서 그는 일찍 창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름의 돌파구를 창업에서 찾은 것일까. 지금 사업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래도 일찌감치 자신의 적성을 잘 찾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는 그렇게 말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는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하여간 그는 대학의 수업과정을 활용했다. 창업 관련 수업도 듣고 어떻게 창업을 할 것인지도 고민했다고 한다. 졸업하고 바로 창업에 나선 것은 진짜 해봐야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처음엔 창업도 전공과 관련이 있는 분야에서 시작했다. 캐릭터 디자인이나 일러스트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또는 회사)과 디자이너를 연결해주는 사업이었다. 2010년의 일이었다. 이런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있었지만, 당시의 그에겐 절실함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는 “기업가 정신이 부족했다”고 표현했다. 물론 경험이 적었다는 것도 한가지 이유였다.

 첫 창업이 (비록 개인사업자 단계였긴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난 뒤 그는 회사에 취직했다. 사회생활에 대한 필요성을 느껴서였다. 그런데 왠걸. 이 회사가 6개월만에 망해버린다. 방송·영상 분야의 벤처기업이었는데 그의 표현에 따르면, ‘벤처였지만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전도가 유망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회사였다고 한다. 

 취직에서도 뜻밖의 암초를 만난 그는 다시 스타트업에 도전했다. 이번엔 보다 IT(정보기술)에 특화된 분야였다. 전기공학부 친구들이 만든 오픈와이즈라는 회사에 초기 멤버로 들어갔다. 여러명과 함께 일하면서 일을 배워가는 재미가 쏠쏠했다고 한다. ‘얼굴빨개지는 영어’라는 교육용 앱을 만들어 한때 국내 영어 앱 중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성과가 나오고 일이 재밌어지면서 성공에 대한 꿈에 부풀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길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프라인에 더 큰 시장이 있다

오픈와이즈는 단순히 앱 개발사가 아니었다. 앱도 만들었지만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아웃소싱도 했다. 그 중에는 웨어러블 기기에서 TV나 모니터 등을 동작센서로 제어하는 소프트웨어 제작을 맡기도 했었다. 서비스 앱도 개발하고,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외주를 맡을 수도 있는 그런 회사였다. 다양한 업무 처리가 가능했지만 그러다보니 회사의 비전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이견도 존재했다. “하드웨어 쪽을 계속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는 서비스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서로 생각이 다르다보니 각자 갈 길을 가게 됐죠.”

 이렇게 그는 그 팀을 나왔다. 그가 합류한 지 1년 남짓 지난 2013년 11월의 일이었다. 남 대표는 모바일 사업을 하면서 오히려 모바일의 한계를 느꼈다고 했다. “아무리 기술력이 있고 운영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바일만 해서는 스타트업이 한계가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기술력이 정말 특출나지 않고는 어려운 분야더군요. 결국 모바일 서비스를 제대로 하려면 오프라인의 요소를 접목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이런 생각에 그는 오프라인 관련 업무를 하는 회사에 취직해 일을 배우기로 했다. 자신이 아는 게 너무 적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그가 들어간 곳은 배달주문 앱 회사. 완전히 오프라인쪽은 아니다. “수익모델이 어떻게 나오나, 일이 어떻게 돌아가나 이런 게 궁금했어요. 이런 걸 모르고 창업할 순 없죠.”

 올초 넉달간 이 회사에서 경험을 쌓으면서 그는 자신의 사업 아이디어도 구상했다. “처음엔 공유 관련 사업모델을 고민했어요. 그런데 선배들의 조언도 얻고 사업아이템도 고민하다보니 공유는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죠.”

 그러다가 도달한 것이 물품보관. 자신의 자취생활 경험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물론 외국에는 이미 관련 서비스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그를 자극한 측면도 있다. “제가 자취를 하다보니 이사 날짜가 맞지 않거나 해외 여행 등의 이유로 물건을 잠깐씩 맡겨야 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미국에서는 메이크스페이스나 박스비(Boxbee)와 같은 물품보관 서비스가 이미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그런 서비스가 없는 것 같아요. 점점 이동이 많아지고 1인 가구가 늘어나고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이 늘어날수록 물품보관 수요는 증가할 게 분명하거든요.”

 사실 비슷한 서비스를 이미 이삿짐 센터나 포장이사 업체에서 제공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대부분 대용량 짐만 처리한다는 것. 그리고 이 사업을 포장이사의 부수적인 업무로 여기고 있다는 점.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여기에 자신의 물건을 맡기길 꺼린다. 훼손될 것을 우려하기도 하고 소중히 다뤄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경험상 이런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는 것이 입증되기도 했다.

◆찾아가는 물품보관 서비스

아이엠박스의 차별화 포인트는 여기에 있다. “아이엠박스는 이삿짐처럼 막 보관하지 않습니다. 프리미엄서비스로 기획됐습니다. 박스에 담아 소중하게 보관해드립니다.”

 그가 회사를 설립한 것은 올 5월. 처음엔 가격경쟁력을 생각해 싸게 내놨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더 주고서라도 자신의 사연이 담긴 물건들을 소중하게 보관해주길 원했다. 그래서 아이엠박스는 즉시 프리미엄 서비스로 변신했다.

 첫번째 고객군은 대학생이다. 교환학생으로 나갈 때, 이사 날짜가 어긋날 때, 기숙자 재배치 시기에, 방학 기간 중에 대학생들의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중국에서 오는 유학생들이나 여행객들도 이 서비스를 찾는다고 한다. 짐을 맡기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가 짐의 규모와 기간에 따라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게 남 대표의 설명. 맡길 물건이 있는 사람이 홈페이지나 전화 등을 통해 요청을 하면 직원이 직접 찾아가 계약서를 작성하고 물건을 맡아 보관해주는, 간단한 방식이다.

  지금까지는 찾아가는 프리미엄 물품보관 서비스가 아이엠박스의 모토. 주로 학생과 이사 수요를 겨냥한 서비스로 보여진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다. 최근 남 대표는 매장을 운영하는 개인사업자들이 재고관리와 물품보관에 애로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중소매장과 계약을 체결해 평소엔 물품보관을 해주는 것은 물론 재고관리까지 해주면 B2B 매출이 고정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단숨에 회사의 캐시카우가 될 수도 있다. 중고품 판매 대행도 가능하다. 중고품을 매입한 후 튜닝을 통해 제품의 가치를 높여 되파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아직 투자를 받지 않은 그는 서비스 안착에 우선 힘쓴 다음에 투자를 받겠다고 한다. 시장수요나 예상 시장 크기 이런 것들을 페이퍼워크를 통해 만들어내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그 시간과 돈을 차라리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데 쓰겠다는 것이다. “점점 물건을 보관하는 시간과 장소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부담은 커질 겁니다”라며 “앞으로 물품보관과 관련된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하겠다”고 덧붙였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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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스마트폰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만드는 대기업들이 여기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과 소재까지 다 만드는 것은 아니다. 특히 소재 분야는 상당수가 일본에서 건너온다. 한국 스마트폰의 약진 뒤에서 일본의 수많은 소재·부품 분야 중소기업들이 웃고 있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소재 분야를 일본 등 타국 기업들이 장악해버린다면 현재 한국이 누리고 있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강자의 위치도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자본은 국적이 없다지만, 이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졌을 때 국내기업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국내에서 소재, 부품 분야의 기업들이 자생적으로 성장해 세계 기업들과 경쟁하는 것이 대기업들을 위해서도 좋다. 하지만 이건 누가 강제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미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선발업체들과 엄청난 경쟁을 해야 하는데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엔트리움은 이런 분야에 도전한 벤처기업이다. 대표이사가 관련 분야에서 오랜 업력을 쌓았고, 시장을 확신하고 기술력으로 도전해 승부를 걸려고 하는 회사다. 오랜만에 약품 냄새가 배어나오는, 실험도구가 즐비한 연구소 타입의 스타트업을 찾아갔다.

◆새로운 회사가 세상을 바꾸는 꿈

서울대학교 융합기술원에 자리잡고 있는 엔트리움에 갔더니 자켓에 넥타이까지 갖춰 맨 정세영 대표가 맞아준다. 얼핏 대기업 연구소의 연구원처럼 보였는데, 그는 창업하기 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서 연구원으로 오래 근무를 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 91학번인 정 대표 역시 어느날 갑자기 창업을 생각하진 않았다. 남몰래 창업에 동경을 갖고 있었던 그의 대학 시절 이메일 첫 아이디가 snuven. 서울대(SNU)와 벤처(Venture)의 결합이다. 언젠가 벤처기업을 창 업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고 한다. 

 “너무 멋져 보였어요. 새로운 회사가 만든 새로운 기술, 새로운 서비스가 세상을 바꾸는 것을 저도 언젠가 해보고 싶었죠. 그래서 창업에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됐고, 그때를 준비하자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뜻은 있어도 일단 뭘 배워야 뭐든 할 수 있는 법. 학교를 마치고 박사과정까지 한 그는 삼성전자에 취직을 하게 된다. 전공 분야가 있기 때문에 연구소에서 근무를 하게 된 정세영 대표. 그가 주로 일을 한 분야는 반도체 패키징 기술 분야였다. 

 여기서는 아이폰 A7 등 삼성의 모바일 AP 칩셋을 만들고 있었다. 삼성이 만들어 전 세계 휴대폰 업체들에게 판매하는 그런 사업이다. 그는 결국 발열이 가장 중요한 이슈라는 걸 알게 됐다.

 “스마트폰에서 칩셋이 구동하면서 많이 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을 최대한 빨리 밖으로 배출하는 게 점점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발열을 제어하지 못하면 폰의 성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거든요. 아무리 성능좋은 칩셋을 만들어도 발열이 효과적으로 제어되지 않으면 칩의 성능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발열 문제에 심취하게 된 그는 TIM방열소재로 창업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특허도 3개나 출원을 했고 10년간 다녔던 삼성전자에서 독립할 채비도 갖췄다. 2012년 2월이었다.

◆방열 신소재 개발에 도전

대학시절부터 생각했던 창업에 드디어 나서게 된 정세영 대표. 그가 창업 아이템으로 고려했던 TIM방열 소재는 모바일 AP 칩셋과 방열판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물질이다. “AP가 작동하면서 발생하는 열이 방열판에 전달되면 스마트폰 본체까지 뜨거워지는 게 느껴지죠? 열이 잘 배출되면 본체가 뜨거워지는 현상이 완화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AP의 열이 방열판에 전달되고 이것이 스마트폰 케이스 배출구를 통해 잘 빠져나가게 하는 것인데 중간에 쓰이는 접착제에서 열이 배출되지 못하고 기기 내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걸 얼마나 줄이느냐가 관건이죠.”

 즉 TIM방열소재는 AP와 방열판 사이에 쓰이는 접착제에 들어가는 방열소재인 셈이다. 방열접착소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존 제품에 비해 3배 이상 열 전도율을 높였다. 

 그런데 그는 이 소재를 첫 사업 아이템으로 하지는 않았다. 이 소재 개발의 경우 시간도 많이 필요하고 거쳐야 할 검증과정도 많았기 때문이다. 초기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을 했다가 자리잡지 못할 경우의 리스크를 우려한 그는 바로 다른 아이템을 찾았다. TIM방열소재 사업 전 내공을 기르면서 자신의 전문분야를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될 만한 시장이라는 게 그의 판단. 그가 택한 첫 아이템은 디스플레이를 터치했을 때 발생하는 전기를 액정화면 뒤에 있는 메모리칩으로 연결해주는 접착소재. 

 정 대표는 이것을 직접 교보재(?)를 들고 와서 열성적으로 설명해줬다. 그의 말을 듣기 전엔 스마트폰 액정과 액정 뒤에 있는 각종 칩이 어떻게 연결돼있을까에 대해 사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것을 연결하는데 접착제가 쓰이고 이 접착제에 어떤 소재가 활용되느냐에 따라 열 및 전기 전도율이 달라진다니!

 그는 우선 접착소재에 쓰이는 도전성 입자의 시제품을 만들고 국내 모 대기업의 관련회사에 제출, 승인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2012년 8월에는 중진공 청년창업사관학교에 선발됐고(그의 표현에 따르면 나이제한을 가까스로 통과해 문을 닫고 들어갔다고 한다) 이듬해인 2013년 1월에는 IGM 창업기업가 사관학교 1기에 선발됐다.

 시제품을 만들고, 1차 고객군도 확보한 그는 2013년 2월 법인 엔트리움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개발 및 판매에 착수했다. 엔트리움(Ntrium)의 N은 나노(Nano)를 뜻하고, 트리움(Trium)은 그리스 신화를 각색한 영화에서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하늘을 나는 말 페가수스를 타고 무적의 크로노스를 무찌를 때 썼던 창을 뜻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나노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는 기업이 되겠다는 염원을 담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부품소재 세계 1위 된다

엔트리움이 보유한 핵심기술은 세 가지. 나노입자 제조기술, 입자 코팅 기술, 입자 분산 기술 등이 그것이다. 이 기술은 고방열 고접착성 Nano Ag 접착제를 개발할 수 있는 핵심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엔트리움의 첫 사업인 도전성 입자 분야는 일본 기업 2개가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다. 90%를 점율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분야에 뛰어들다니, 너무 무모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정 대표는 자신감이 있었다. 직접 경쟁사의 제품과 비교도 했다. 시제품끼리의 비교에서는 엔트리움의 도전성 입자가 오히려 더 나은 품질을 보여줬다. “입자를 같은 크기로 만들고, 똑같은 두께로 코팅을 한 다음에 입자를 균등하게 분포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열이 똑같이 전도가 되고 에러가 발생하지 않거든요.”

 자체 비교에서는 엔트리움이 만든 입자가 더 우수했다. 물론 반복적인 작업 속에서 계속해서 균일한 제품을 만들어야 진짜 승부를 가릴 수 있다. 그리고 진짜 승자는 실제 제품에 적용됐을 때 고객의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 승부에서 이기려면 물론 기술력이 있어야 하지만, 자금력과 함께 인재가 뒷받침되야 한다. 고객사 확보는 필수다. 2012년초 시작할 당시엔 혼자였지만 2012년 여름무렵 2명의 인턴사원을 뽑으면서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외국계 기업과 삼성전기 등에서 16년의 경력을 가진 고교 시절 친구 김효진 이사(영업담당)와 삼성전자 등에서 경력을 쌓은 대학 과 선배 박주욱 부사장, 재무와 전반적인 운영을 맡은 강미라 책임 등이 합류하면서 경영진이 완성됐다. 여기에 6명의 순수 R&D(연구개발) 인력을 충원했고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원, 재료공학부와 협업을 통해 연구개발이 진행됐다. 

 아직 첫 매출은 나오지 않았다. 올 하반기께 매출이 현실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후엔 그에게 당초 창업을 결심하게 했던 TIM방열소재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대표이사 본인의 투자금액과 엔젤투자, 정부 지원금 등이 주된 자금원천이었다. 그는 2012년 8월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청년창업사관학교에 선발된 것을 자신의 창업과정에서 결정적 계기로 꼽았다. 이후 중소기업청 TIPS 프로그램에 선정되면서 약 10억원 가량의 자금이 확보되면서 지금까지 개발에 주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삼성을 다니면서 10년간 겪었던 경험이 자신에게 큰 자산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품소재를 개발하는 사업은 기술개발 못지 않게 고객사와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거든요. 고객사는 단순히 제품을 사는 상대방이 아니라 제품에 대한 피드백을 해 주고 소재 개발 과정에 협력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실 고객사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소재를 얼마든지 골라서 쓸 수 있거든요. 친절하게 이러이러한 점이 문제니까 이런 점을 더 개선해줬으면 좋겠다라는 피드백을 일부러 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만드는 업체를 골라서 납품을 받으면 되니까요. 하지만 고객사와 신뢰, 협력 관계가 잘 돼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관계가 중요한거죠.”

 그가 삼성에서 구축한 인맥과 경험은 매우 유용했다. 그래서 더욱 그가 대기업을 나와 창업한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뛰쳐나오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많이 배웠죠. 하지만 제가 관심있는 것과 회사가 하려고 하는 게 꼭 일치하는 게 아니죠. 나는 이런 것을 더 하고 싶은데 이 사업이 앞으로 회사에서 어떻게 될지는 전혀 알 수가 없거든요. 그런 게 싫었어요. 제가 진짜 하고 싶은 걸 찾아서 나온 셈이죠.”

 그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을까. 도전성 입자 분야 뿐 아니라 TIM 방열소재 등 관련된 소재 분야로 시장을 넓히면 수조원대 시장이 펼쳐진다. “소재 분야에서만 1년에 대일무역에서 16조원의 적자를 보고 있습니다. 이게 한국의 현실이죠. 한국의 기업이 이 분야에서 성장해간다면 무역적자를 줄이고 일본 의존도를 크게 낮출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구글이 있다면 부품소재 분야에서는 엔트리움이 있다. 이런 회사로 만드는 게 꿈입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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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바로 이거야!’

토스(Toss)라는 서비스를 처음 접했을 때 든 느낌은 딱 이랬다. 정말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일상 생활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행동이지만 할 때마다 불편하고 귀챦기 짝이 없는 일을 편하게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이런 서비스란 생각이 들었다.

토스는 쉽게 말해 계좌이체를 모바일에서 아주 쉽게 할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앱 서비스다. 그런데 이게 기존에 나와있던 모 통신사의 주머니(Zoo Money) 이런 것들과는 편리함이라는 측면에서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을 만든 사람이 치과의사 선생님이라는 것. 이번 주인공은 토스를 만든 비바리퍼블리카의 이승건 대표다.

◆창업에 뛰어든 치과의사

요즘 의사 선생님들을 이 코너에 소개하는 사례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통계를 뽑아보진 않았지만 창업을 하는 의사선생님들에게 분명히 어떤 흐름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승건 대표는 서울대학교 치대를 졸업하고 실제 치과의사 생활을 했던 의사선생님이다. 01학번인 이 대표는 2007년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삼성의료원에서 6개월, 민간 장애인 병원에서 6개월의 인턴을 거쳐 이 후 3년 동안 공중보건의로 군 생활을 대신하게 된다. 

 사실 그를 만나면 아마도 누구나 이런 질문을 먼저 할 듯 싶다. “아니, 치과 의사가 왜 그 좋은 직업을 놔두고 아무 상관도 없는 분야에서 창업을 했나요?”

 “물리학이나 철학 이런 것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때 그랬죠. 대학도 그런 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집안 형편상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그런 전공을 택해야 했어요. 집안 사정이 아주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치대를 갔죠.”

 그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여러가지로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때는 프로그래밍 대회에 나가기도 했단다. 그런데 꼴등을 하는 바람에 좌절하고 그 뒤로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그리고 결정적으로 20대가 되서 환경이 달라지면서 그는 또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갑자기 집안 형편이 폈어요. 제가 돈을 빨리 벌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되는 그런 상황이 된 거죠.”

 그래서 그는 스물셋부터 뭘 하고 살까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막연하게나마 그가 생각한 것은 만날 수 없는 범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것. 의사는 내가 만나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는 더 폭넓은 활동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기술혁신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 그런 걸 처음 생각하게 됐어요. 그 당시에. 공보의 기간 중에 독서모임을 가지면서 생각을 많이 했죠. 그리고 제대하고 아이폰을 써보고 무릎을 쳤어요. ‘이런 게 세상을 바꾸는 거구나!’하고 말이죠.”

 제대하고 선배가 하는 치과병원에서 일하던 그는 2011년 4월, 약 4년간의 의사생활을 뒤로 하고 드디어 결심, 개인사업자로 등록하면서 사업가의 첫 발을 내딛었다.

◆Ghost protocol

2011년 준비 기간을 거쳐 그가 처음 내놓은 것은 모바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2012년 선보인 ‘울라블라’는 구상 단계에서 당시 스타트업 컨퍼런스인 제 1회 비런치(beLaunch)에 나가 Top20에 뽑히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서비스는 어떻게 됐을까. “페이스북이 친구 태깅을 할 수 있게 하면서 그냥 정리됐어요. 사실 지금은 SNS들이 다 할 수 있는 그런 서비스이지만, 당시엔 일종의 틈새 시장으로 나왔던 거거든요.”

 카카오톡과 채팅플러스 제휴를 맺기도 했고, 2013년에는 설문조사 앱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집단 투표 앱이라고 설명을 했는데, 내가 듣기엔 주로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설문조사앱으로 보였다.) 아이디인큐가 만든 오픈서베이의 좀 덜 심각한 버전이라고나 할까. 다vote for Kakao. 카카오톡에서 작동하는 앱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 극우 정치인의 발언이 문제가 됐을 때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한다든지, 국내 정치인의 처신이 도마위에 올랐을 때 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앱이다. 그룹투표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사실은 특정 주제에 대한 대중의 생각을 들어보는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카카오톡이라는 대형 메신저를 통해 서비스를 했는데도 초기 반응에 비해 성장세는 신통치 않았다. 20만명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순항하는가 싶었지만 돈이 되질 않았다. 카카오톡과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한 경우가 많아지면서 다른 서비스에 의존해서 성장해야 하는 숙명적인 어려움도 겪었다.

 잇따라 실패를 겪으면서 그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애시당초 그가 도전했던 서비스들을 보면 소비자들이 원하는게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모바일에서 뭔가 세상을 바꿀 만한 것을 해보고 싶었고, 자신이 보기에 재미있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시도했지만 시장의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 상당히 힘들었을 것 같다. “엔지니어들이 힘들어했죠. 정말 뭐라도 만들고 싶은데 할 게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계속 사람들이 좋아하지도 않는 그런 서비스를 만들고 있을수도 없었죠.”

 여기서 그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문득 내가 하고 싶은 것 위주의 사업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대목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뭘까. 이걸 생각해보기 시작한 거죠. 그걸 찾아보자.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고 말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Ghost protocol’이라는 암호명같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아이디어를 무작정 모으는 거였다. “한달 반 정도 시간을 투자했어요. 아이디어 100개를 모았죠. 그 중 여덟개가 사업화할 만한 아이디어더라구요. 그래서 일주일만에 다 만들어서 일주일 동안 테스트를 해 봤어요. 그런데 이것 역시 다 안됐죠. 여덟개 중 마지막 아이디어가 토스였어요.”

 토스는 제품을 만들어보지도 못하고 실험용 홈페이지만 오픈한 상태로 사람들의 반응을 보기로 했다. 이게 2013년 12월.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상당했다. 어? 이거 되겠는걸? 이런 뜨거운 반응은 처음이었다. 연초 클로즈베타서비스를 거쳐 3월초 오픈베타를 시작했다.

<비바리퍼블리카 창업멤버들. 가운데가 이승건 대표. 예전에 찍었던 사진을 받았더니...다들 좀 더워보인다.>

◆금융에 서비스 마인드로 접근

토스는 서비스를 출시한 뒤 매 주 50%씩 성장했다. 그는 처음부터 기존의 실패 경험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비즈니스모델도 갖고 시작했고, 철저하게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소해주는 그런 서비스로 만들었다. 

 토스는 간단히 말해 계좌이체서비스. 그런데 이런 서비스들은 이미 기존에 많이 있다. 모든 은행들이 인터넷뱅킹을 통해 계좌이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지인들간에 돈을 편하게 보내기 위해 이통사들이 만든 이체 서비스도 이미 시중에 나와 있었다. 그럼, 토스는 어떻게 뜰 수 있었을까.

 뜻밖에 비결은 매우 단순했다. 그냥, 사람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것을 해소해준 것이다. 계좌이체를 해 본 사람들은 안다. 큰 돈을 보낼때는 상관없지만, 매달 내는 가스비, 통신비, 전기료, 각종 곗돈, 회비 등 몇만원 또는 몇천원 단위의 비교적 소액의 금액을 보낼 때마다 온갖 보안프로그램 깔고 은행 홈페이지 들어가서 수많은 번호 입력하고 돈을 보내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를... 

 이걸 편하게 해준답시고 나온 이통사들의 이체 서비스는 더 복잡하기만 했다. 포인트나 캐시 이런 것을 따로 구매해서 현금이 아닌 이런 포인트를 보내는 방식을 쓰고, 게다가 나 뿐 아니라 상대방도 앱을 반드시 깔아야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하니 쓰는 사람이 늘어날 턱이 없다. 돈 한번 주고받으려면, 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게다가 상대방에게 앱 깔으라고 연락하고 보내야하니...

 토스는 이 모든 과정을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단순화했다. 금액을 입력하고, 받을 사람 계좌번호를 입력하고 보내기 버튼만 누르면 끝난다. 당연히 사람들의 반응은 열광적이다.

 여기서 잠깐! 보안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이승건 대표는 은행이나 결제업체들과 계약을 체결해 그들이 보안을 담당하고 비바리퍼블리카와 토스는 간편한 계좌이체라는 서비스 영역만 맡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받는 사람이 앱을 깔 필요도 없다. 받는 사람 계좌번호를 몰라도 상관없다. 이 경우 문자메시지로 보내는 돈에 대한 내역이 전송되고, 이걸 받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계좌번호를 입력하면 해당 계좌로 돈이 들어오게 된다. 이 서비스는 오픈베타를 끝내고 현재 서비스 고도화 작업을 하고 있다. 7월말께 정식 서비스를 오픈할 계획이다. 

 이 대표는 기존 서비스들이 금융업 마인드로 접근했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것으로 분석했다. 계좌이체는 분명히 금융이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일상 생활이고 이에 대한 서비스로서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터넷기업이 서비스 마인드로 접근하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런 판단은 적중했다.

 “계좌이체는 UX나 화려한 디자인,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프로세스를 바꿔야 사람들에게 가치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거죠. 아주 단순하면서도 확실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그런데 기존 서비스들은 너무 복잡하고 진입장벽이 높아 사용자들이 쓰려고 하다가 포기하게끔 만들었죠.”

 계좌이체는 은행들이 돈을 버는 주요 수단 중의 하나인데, 은행이나 금융업체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이런 거대기업들을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은행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죠. 하지만 은행들 역시 이런 부분을 오랫동안 고민해왔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솔루션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서로 협력할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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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을 하면서 힘든 점은 정말 많겠지만, 그래도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창업 단계에서부터 꼭 함께 해야 하는 그런 사람과 팀을 이뤄 같이 창업을 하는 것도 힘든 일이고, 필수적인 인재를 채용하는 것도 힘든 일이며, 이들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 등 조화를 이룬 팀 멤버로 창업을 했을 때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팀을 이룰때까지 마냥 기다릴수도 없는 법. 때로는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해서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도 방법이다. 운이 좋으면,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때마침 채워줄 다른 좋은 팀을 만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팀이, 새로운 회사가 탄생한다. 유쾌한 형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모인 유쾌한형제 창업멤버들. 왼쪽부터 김용주 이사, 전준수 대표, 김동욱 CTO, 이용길 대표>

◆미디어를 꿈꾼 뮤지션

현재 유쾌한형제의 대표이사 사장이자 최대주주인 전준수 대표는 음악을 좋아하고, 아이디어가 많고,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새로운 것을 기획하는 데 재능이 있는 인물인 것 같다. 영화 두사부일체의 타이틀곡 ‘꼬마달건이’를 작곡했고, 그 밖의 여러 음원 작사작곡에 참여했다. 

그의 첫 직장은 인터넷포털 다음의 검색광고 자회사인 나무커뮤니케이션. 2003년 나무커뮤니케이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전 대표가 검색광고 업무를 하던 이 시기는 한국의 인터넷산업에서 다음과 네이버, 야후가 치열하게 경쟁을 하던 시기다. 1위였던 야후가 다음에게 자리를 내 준지 얼마 안돼 이번엔 네이버가 선두로 치고 올라갔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장, 성장하는 회사에 있으면서 본인도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게 전 대표의 회상이다.  

 “2007년까지 나무에 있었어요. 그런데 다음이 검색에서 네이버를 도저히 못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어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회사를 나왔죠.”

 그는 2008년 자신이 직접 회사를 차렸다. 그가 배운 것이 검색광고였으니, 만든 회사도 광고회사였다. “첫달에만 매출 7억원을 올렸어요.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얼마 못 가 사업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는 말을 아꼈지만, 계약을 잘못 체결한 문제도 있었고, 무엇보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여간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2009년 1월 다시 코마스인터랙티브라는 광고회사에 들어가 광고부장으로 일을 했지만 곧 자기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2010년부터 그는 카덱스라는 자동차 정보 서비스를 만들게 된다. 처음엔 개인사업으로 시작했다. 자동차에 대한 진짜 정보를 제공하자는 게, 카덱스의 취지였다. 그런데 정말 제대로 했다. 스튜디오에 취재기자, 촬영팀까지 갖춰놓고 제대로 했다. 카덱스는 미디어였다. 그리고 카덱스를 하다가, 사업상의 목적으로, 정말 우연히 ‘딩동뉴스’라는 화제의 앱을 개발한 팀을 만나게 된다. 이 팀이 이용길, 김동욱, 김용주였다. 

◆앱개발에 뛰어든 세 남자

고려대학교 경영정보학과 동창인 이용길, 김동욱, 김용주 세 사람은 대학시절부터 껌딱지 같이 붙어 다니던 사이. 죽고 못사는 선후배사이인 이들의 공통점은 같은 과라는 것 외에도 함께 밴드동아리에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전준수 대표까지 유쾌한형제 창업자 넷은 모두 음악으로 한가락하는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사회생활을 했다. 김동욱은 네이버에서, 이용길은 IT개발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용주는 현대정보기술에 재직했다. 경영정보학과는 공대는 아니고, 경영대에 속한 과다. 즉 굳이 따지자면 문과쪽 전공인데, 이들은 모두 IT분야에서 일을 했다. 밴드 활동도 하고, 경영학과 공부를 하면서 이들은 틈틈이 공대쪽 수업을 들었고, 그냥 수업만 들은 게 아니라 코딩도 배웠다. 졸업하던 학기엔 대부분의 수업을 공대쪽으로 채우기도 했다.

 “개발사에서 일하면서 KT나 마이크로소프트 등 대기업들의 외주를 받아 일을 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그러면서 내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얘기를 동기동창인 김동욱하고 한 거죠. 뜻이 맞아서 둘이서 낮에는 각자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만나서 우리가 만들어보고 싶은 것을 만든거죠.”

 자, 이렇게 해서 나온 게 딩동뉴스다. 딩동뉴스는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한국에서도 열렸을 당시 초창기 화제가 됐던 앱이었다. “2009년 5월1일 개인사업자로 시작했어요. 그리고 딱 1년이 지난 2010년 5월24일에 딩동뉴스를 오픈했죠.” 개발자 두 명만 있던 이 회사에 2010년 7월 후배인 김용주가 합류했다. 김용주는 현대정보기술에서도 솔루션 영업을 하던 인물이라 기술비즈니스의 영업을 하기에 적합했다. 개발과 비즈니스 파트의 인력이 갖춰진 셈이 됐지만 사업을 할수록 이들은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이 하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를 갖고 승부를 보려고 한 것인데 서비스로 승부를 보기엔 콘텐츠가 너무 약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신랑신부모여와 같은 커뮤니티를 만들면서도 이들은 콘텐츠 부족에 갈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때마침 콘텐츠로 무장한 전준수 대표가 이들 앞에 나타났다. “원래는 같이 할 사업문제때문에 만났는데 서로가 필요한 것을 채워줄 수 있겠더라구요. 한쪽은 콘텐츠가 부족하고 한쪽은 실력있는 개발자가 없고. 합치면 최강의 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겁니다.” 전 대표와 이 대표가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다. 

◆개인와화 큐레이션

카덱스는 미디어였다. 하지만 미디어는 포털에 의존해야만 하는 한계가 있었다. 카덱스가 네이버에 콘텐츠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카덱스가 전문적인 사이트로 성장할 수는 있지만 독자적인 그들만의 고객을 모으고 자체적인 수익모델을 개발하고 더 크게 성장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딩동과 카덱스가 합쳐진 이 회사는 자동차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를 만들돼 포털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서비스를 만들기로 했다. 카덱스의 콘텐츠에 딩동뉴스의 개발진이 합쳐지면 안 될게 무어랴! 단 한 번의 전화통화와 만남으로 이들은 의기투합했다. 회사를 합치기로 하고 이름을 고민하다가 유쾌한 것을 만드는 유쾌한 남자들이 되자는 뜻에서 유쾌한형제로 했다고 한다. 주가가 뜨고 있는 우아한형제들에게 모티브를 얻은 측면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이들이 만든 ‘카넥트’(Carnect)는 일견 카덱스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보였다. 자동차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자동차 포털이라는 게 첫 인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 단계 더 나갔다. 개인화와 큐레이션을 추구하고 있었다. 모바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카넥트는 기본적으로 온갖 자동차 정보를 담고 있지만, 이 앱을 다운받아 쓰는 사람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도 가능하다. 그 사람이 어떤 자동차에 관심이 있는지, 자동차의 주로 어떤 부분을 보는지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클럽 코너를 통해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동차 애호가들의 네트워크에 들어가거나 이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기존 포털에서 운영되는 수많은 자동차 클럽이나 동호회들이 매우 폐쇄적으로 운영돼 실제로는 잠재적인 소비자들에게 매우 배타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일. 카넥트는 이런 클럽의 장벽을 낮추고, 클럽 활동이 사용자 뿐 아니라 제조사, 딜러 등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우선 제조사나 딜러사, 딜러, 자동차 금융업체 등은 브랜드 광고 등을 할 수 있다. 직접적인 자동차 업체 뿐 아니라 유관 분야, 즉 튜닝, 장비, 렌터카, 용품샵 등과의 제휴나 이들과의 연결도 가능하다. 소비자들은 시승신청부터, 견적, 보험견적 등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선 사용자를 확보하는 게가장 중요한 일. “일단 사람을 많이 모아야죠. 서비스 확대를 위해 투자도 필요하구요. 올 초에 엔젤투자를 받았고 이제 시리즈A 투자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중고차 코너도 기획해서 자동차가 유통되고 소비되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런 장이 되고자 합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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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병원, 종합병원일수록 힘들게 찾아가 오랜 시간 기다려놓고 정작 의사선생님을 만나는 시간은 턱없이 짧다. 물어보고 싶은 말은 끝도 없이 많지만, 환자나 보호자가 갖고 있는 수많은 궁금증의 대부분은 해결되지 못한다. 뒤에 엄청난 수의 환자가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의사선생님의 준비된 멘트(?)만 일방적으로 듣고 병원문을 나서기 일쑤다.

 이런 현상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다만 좀 더 심할 뿐. 그리고 꼭 해당 의사의 문제만이라고 보기도 힘들다.(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아무리 자상하고 상세히 설명을 하고 싶은 의사라고 하더라도 환자나 보호자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대목에서 한국의 의료 현실, 즉 건강보험 수가나 의사의 수, 병실의 수 등을 논하는 것은 이야기를 너무 확대시킬 소지가 있다. 일단 이 정도로 하고,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선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런 병원 진료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걸 근본적으로 고치기 위해선, 의료시스템 전체를 바꿔야 하는데 이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실제 개선을 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알고, 불편해하면서도 이런 현상에 변화를 줄 만한 힘이 없다. 이걸 바꾸기 위해선 병원이 돌아가는 시스템 뿐 아니라 심지어 의료지식까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있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헬스웨이브를 세운 의사, 정희두 대표다.

◆10년간 의사로 살다

록앤올 박종환 대표를 소개하면서, 내비게이션 분야에서 10년 넘게 한 우물을 판 인물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정희두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10년 넘게, 마치 운명이 이끌듯이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하기위한 준비를 해왔다. 그 과정에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그만둬야하는 결단도 있었고, 불확실한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가 이 일을 하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희두 대표는 의사다. 그것도 외과의사. 1997년부터 2006년까지 꼬박 10년 동안 그는 의사로서 살았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서 살아왔지만 그는 인턴으로서 첫 출발을 할 때부터 다른 길에 대한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고 했다.

 “외과의사는 문제를 진단하고 솔루션을 찾는, 그런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솔루션에 대해 환자나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안내해야 하는 경우가 정말 많죠. 커뮤니케이션이 하는 일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왠걸. 그는 이런 커뮤니케이션에 보람을 느꼈다. “외과 분야는 사실 상당히 심각한 내용이 많습니다. 상처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구요. 그런데 저는 직접 수술을 하는 것보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동의를 구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그런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에게 문제의식이 없을 리 없다. 10년간 의료현장에서 그가 느낀 것은 한국의 의료현실이 지나치게 최종결과물에만 집착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최종 결과물은 물론 ‘완치’다. “모두가 완치에만 집중합니다. 병을 낫게 하는 분야에선 한국이 경쟁력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서 병을 치료하면 되는거 아니냐. 그거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사실 저는 병을 치료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중간 과정에 대한 설명이나 케어, 상담 등이 전혀 없다는 것. “수술했는데 재발했을 때 수술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항암치료만 해야되는 거죠. 결과에만 집중한다면 그냥 이 환자를 외과로 보내면 됩니다. 또는 수술후 재발해 의학적 조치가 전혀 불가능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엔 그냥 요양병원에 보내야하죠. 결과만 따지자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환자나 보호자는 정말 궁금한게 많죠. 다시 재발하는 건 아닌지, 치료에 얼마나 걸리는지,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왜 병원을 옮겨다녀야하는지 등등. 그런데 못 물어봅니다. 물어봐도 대답을 하기 힘들어요.”

 왜 그럴까. 물론 우리가 모두 아는 이야기다.

 “한국의 대학병원들은 급성환자만 다룹니다. 즉 매우 급박한 상황에 처한 환자들만 다루는 거죠. 그리고 그 환자들이 엄청나게 대기하고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내용을 3분안에 이야기해야 합니다. 30분 동안 환자 10명이 예약돼 있거든요. 이 정도로 예약을 받아 진료를 하니 이 가격에 그런 수술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목적 달성에는 세계 최고 수준이죠. 하지만 중간 과정의 케어는 안되는 겁니다.”

◆환자와 의사간 매체를 만들자

매일 같이 이런 일을 겪으면서 그는 참 많은 생각을 했을게 분명하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환자들이 많아 그에겐 자신도 모르게 ‘연민’과 ‘공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의 성품이 유독 남달랐기 때문일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병원에서 이런 상태론 의사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게 문제였다. 남들보다 훨씬 오래 설명하고 이해와 동의를 구하면, 느릴수밖에 없다. 밤을 새워가며 설명을 한 적도 있고, 장장 사흘에 걸쳐 설득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내 가족이라면 수술을 하게끔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끔 이런 경우 가족들은 되레 수술을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술을 안했다가 나중에 상호간에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죠. 일단 수술을 하고 보려는 심리가 있어요. 그런데 수술한다고 다 되는게 아니거든요.” 결국 그는 이 환자에게 수술을 받지 않는 쪽으로 설득했다.

 수술보다 커뮤니케이션, 진료보다 상담과 케어에서 더 보람을 찾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2000년부터 서서히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 물론 그때 명확한 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림을 그려서 설명을 하면 더 쉽게 이해하고 환자나 보호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된 뒤 그는 처음으로 매체에 대한 생각을 했다. 환자들에게 병의 상태와 진료 과정 등을 알려주는 매체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어머니가 미술학원을 하셨어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환경에 있었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공보의로 있으면서 의료계의 이원복이 되자는 생각도 했었죠. 먼나라 이웃나라 있쟎아요? 그런 것을 저도 하고 싶었어요.”

 사실 그는 대학때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도 홍보부장을 맡아 틈틈이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공보의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만화를 그렸다. 그런 그의 실력을 알고 정부에서 의뢰를 해 공보의 시절 대국민 홍보카툰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그가 만화 그리는 실력때문에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대형병원일수록 병의 개념과 치료, 검사 동의서 및 이에 필요한 설명 등을 자세한 설명한 자료가 다 있었어요. 저는 그걸 알고 있었죠. 그 원자료를 갖고 만화를 그리거나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정말 쉽게 환자들에게 설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가 충북 음성 보건소에서 공보의로 있던 2003년, 조류독감이 전국을 강타했다. 마침 조류독감이 처음 시작된 곳이 음성 보건소 관할 지역이었다. “질병관리본부와 함께 공동으로 조류독감의 대처법 등을 알리는 만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일을 했어요. 그게 경험이 됐죠.”

 조류독감 애니메이션은 그에게 실전을 방불케 한 기회였다. 이 애니메이션때문에 그는 공보의들 사이에 일약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이 덕에 충북대 의대 교수팀과 공동작업을 할 기회도 생겼고, 연구 과정이 전해지면서 충북대 의대엔 애니메이션 연구팀도 신설됐다.

 준비를 하고, 반응까지 확인한 그는 공보의를 마치고 서울대병원 의료정보센터에서 1년여간 연구교수 생활을 한 뒤 2009년 5월, 헬스웨이브를 창업했다.

◆파산 직전에 투자를 받다

정 대표가 염두에 둔 것은 병원들이 갖고 있는 각 질병에 대한 3000개의 원천자료. 이 자료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아주 쉽게, 비교적 짧은 시간에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생각이었다. 이 애니메이션 역시 일종의 의사가 제공하는 처방전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Information Transcription(설명처방)이라는 말이 별도로 있다.

 정 대표는 이것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의사들의 전자차트에 넣는 게 핵심이라고 봤다. 우선 이 처방전을 이해해야 하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줄 알아아하며, 전자차트에 넣어서 작동하게끔 해야 했다. 의학적 지식과, 애니메이션 분야와, IT(정보기술) 분야의 지식까지 다 있어야 한다!

 헬스웨이브를 차리기 전 그는 오래전부터 닥터두애니&일러스트라는 회사를 차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작업을 전문적으로 해 왔다. 사실 2009년에 차린 헬스웨이브는 애니메이션이 전자차트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시스템적으로 구현하는 일을 하는 회사다. 정희두 대표는 2010년 두 회사를 합병, 헬스웨이브로 합쳤다.

 하지만 사업은 역시 녹록치 않았다. 우선 전문의가 참여한 고품질 애니메이션이었지만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병원들도 환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애니메이션 사용료 정도는 내겠다는 의지는 물론, 예산도 없었다. 

 파산 직전까지 가는 위기를 수차례 거듭하던 중 기적같이 투자자를 찾았다. 유전체 분석업체 마크로젠 서정선 회장이 헬스웨이브의 잠재력을 보고 7억원을 투자한 것이다. 때마침 국내에서 스마트폰 시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병원들이 차츰 디지털 콘텐트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2011년 서울대병원을 시작으로 삼성서울병원, 강남차병원 등 대형병원들이 월 500만원 안팎의 이용료를 내고 헬스웨이브 프로그램을 찾기 시작했다. 현재 병원이 20여개까지 확대됐다. 

 헬스웨이브 프로그램은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인 대표적인 서비스다. 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한번 보여주자 금방 이해가 됐다. 환자 입장에서는 의사에게 수십번을 물어봐야 알 만한 내용이지만, 헬스웨이브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환자는 의문을 해소해 만족감이 높아지고, 의사는 보다 진료 행위에 집중하면서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픈 스튜디오 준비

 헬스웨이브의 사업은 글로벌 시장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장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의사가 환자에게 설명하는 의료 지식의 내용이나 의사·환자 사이의 소통 스트레스는 비슷하기 때문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의료진들은 올해 초부터 헬스웨이브와 시범사업으로 헬스웨이브의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진료에 활용하고 있다. 일본·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의 유명 병원 의료진들도 시범 서비스에 참여했다. 

 “사실 국내에선 리베이트로 의심받을까봐 광고 기반 사업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지만, 해외에서는 병원과 환자들에게 의료 애니메이션을 무료로 제공하고 광고를 통해 수익을 내는 방식이 훨씬 자유롭습니다.”

 자금 측면에서도 호재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2월에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설립한 스타트업 전문투자사 케이큐브벤처스가 헬스웨이브에 5억원을 투자하기도 했다. 그동안 이 시스템을 쓰겠다는 의료진이 많았음에도 자금이 부족해 사업을 확장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그로서는 날개를 단 격. 

 그는 이 서비스에 ‘오픈 스튜디오’ 개념도 도입할 계획이다. 즉 의료진이 자기가 원하는 정보 안내 프로그램 콘텐츠를 애니메이션으로 직접 만들 수 있게 하겠다는 것. 환자 교육 자료를 의료진이 자유롭게 만들어 활용하면 의사와 환자간의 커뮤니케이션이 더욱 원활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직접 하기 힘든 의사들도 있기 때문에, 출판사 개념의 서비스도 제공할 계획. 이 출판사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출판사다. 즉 제작사라고 할 수 있다. 의사와 병원 등이 소스를 제공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교육자료를 이 출판사를 통해 만들 수 있게 된다. 마치 저자와 책 판매 수익을 나눠갖듯이 이 애니메이션에 광고를 붙여서 수익을 나누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의 사업 계획은 거침이 없다. 2000년 이후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이 길을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14년간 준비한 셈이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중단하거나, 사업을 그만둘뻔한 위기가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면서 내공도 탄탄해졌다. 그리고 14년의 노력의 결과물은 이제야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저는 여전히 제가 의사로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딴 길을 고민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 역시 의사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이 일 자체가 외과 의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의사 중에는 저같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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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기업가의 창업이 살아나야 합니다. 기술창업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싶습니다”

아마 1년도 훨씬 전이었을거다. 류중희 퓨처플레이 대표가 아직 인텔코리아(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는 올라웍스 창업자로 올라웍스를 인텔에 매각한 뒤 인텔에서도 일을 했다)에서 상무로 재직하고 있을 때 만났다가 이런 얘기를 들었다. 구상중이었던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뒤 기술창업이 화두가 되고,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창조경제 바람이 불면서 나는 더욱 궁금해졌다. 그가 이 구상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지.

 아산나눔재단이 서울 강남 역삼동에 세운 ‘마루180’에 자리를 잡은 퓨처플레이 사무실을 찾아가 그의 구상이 구체화되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마루180에서 만난 류중희 대표>

◆Company-building company

역시 만나자마자 예전의 그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다. 그에게서 받은 명함에는 퓨처플레이란 회사명이 적혀 있었다. 

“기술창업 활성화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기술창업을 도와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기계가 더 나은 방법으로 쓰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더 이상 편하지 않거든요. 사람이 더 쓰기 편한 기계, 스마트폰을 보다 더 직관적으로 쓸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퓨처플레이는 포스트 스마트폰 시대를 만들어가는 회사입니다.”

 그는 기술창업에 4가지 축이 있다고 말했다. 인터페이스, 하드웨어(웨어러블기기 등), 기술기반 서비스, 그리고 빅데이터분석 등이 그것이다. 그는 4가지 분야가 다 중요하다고 봤다. 어느 분야에서건 창업을 해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각각의 분야에서 창업을 하는 회사를 찾아 투자를 하면 될까. 처음 그의 구상을 들었을 때 떠오른 건 ‘액셀러레이터’였다. 그런데 그는 그게 너무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이 각각의 아이템을 다 하나씩 회사로 만드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그런 회사를 찾아 투자하는 일은 더욱 힘든 일이죠. 이런 분야에서 창업을 하는게 힘들어서 기술분야 창업이 많지 않은 것인데, 투자만 하려고 하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죠.”

 그럼 그는 어떻게 해결책을 찾았을까. ‘함께 회사를 만들어가는’ 게 그가 찾은 해결책이었다. 함께 회사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는 지금의 액셀러레이터나 인큐베이터가 하는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모습을 그렸다. Company-building company. 이것이 퓨처플레이의 정체성.

 “퓨처플레이는 그냥 액셀러레이터가 아니라 우리 역시 스타트업입니다. 다만 우리의 product는 스타트업이죠. 즉 회사가 프로덕트인 그런 스타트업입니다. 항공모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항공모함은 수많은 비행기를 띄워 올립니다. 하지만 항공모함 역시 바다로 나가야 하죠. 똑같이 사업을 해야 합니다.”

◆스타트업의 성공은, 고생에 대한 보답이 아니다

그가 이렇게 일을 벌인 것은, 멘토링은 그가 할 분야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멘토링이 아니라 회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일에 무게를 뒀다. “뭔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잘못된 점을 알려주고,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하고, 이런 것은 사실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회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건 진짜 전문가가 달려들어야 하는 겁니다.”

 CFO가 필요하면 좋은 CFO를 추천해주거나, 소개해주는 게 아니라 직접 달려들어서 한다. 마케팅이 필요하다면, 마케팅을 잘하는 외부회사를 소개해주는 게 아니라 안에서 직접 해결해준다. 평가나 비판, 조언이 아니라 직접, 같이 하는 게 퓨처플레이의 스타일. 

 그의 말처럼 이런 것을 하려면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6명의 파트너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 밖에 5명의 스페셜리스트, 그리고 5명의 인벤터(예비창업자)가 있다. 이 5명의 예비창업자들은 퓨처플레이의 직원들이다. 직원으로 회사에 입사해 일을 배우고 파트너, 스페셜리스트들과 함께 사업을 준비한다. 그는 기술 창업이 가능한, 엔지니어링을 전공으로 한 석박사급 인재들만 간추려서 예비창업자로 뽑았다고 했다.

 “제가 창업을 한 과정을 돌이켜봤어요. 지나고 보니 그 중에는 정말 저에게 피가되고 살이되는 그런 경험들도 있었던 반면, 해봤자 별 도움도 안되는 고민과 경험들도 많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창업자들, 특히 기술창업을 하시는 분들이 핵심 이슈가 아닌 자잘한 고민들을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려고 퓨처플레이를 만든 거구요. 고생을 해서 보상을 받는게 스타트업이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화해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세상에 자신의 뜻과 꿈을 펼치는게 스타트업이지요.” 

◆막강 투자자와 파트너진 구축

 그는 6명의 파트너들 면면을 소개했다. 우선 넥스알 창업자였던 한재선 박사, 그리고 발명가로 유명한 황성재 박사, 윤경민 변리사, 그리고 HCI(휴먼컴퓨터인터페이스) 분야 전문가 1명과 변호사 1명, 여기에 류 대표 본인까지. 스페셜리스트들 5명의 면면도 화려하다. 세계적인 증권사 출신의 금융전문가는 창업경험까지 갖추고 있고, 해외마케팅 전문가, 하버드대학교 박사과정에 있는 operation 담당, 상품기획자, 지적재산권 전문가 등등. 

 일이 되려면 외부의 조언과 자문, 인정 역시 필수. 그래서 쟁쟁한 투자자들도 모셨다고 한다. 이택경 프라이머 대표를 비롯, 호창성·문지원 빙글 대표, 박지영 컴투스 대표, 김길연 엔써즈 대표, 김상범 넥슨 공동창업자 등으로부터 40억원의 펀딩까지 받아냈다. 퓨처플레이의 첫번째 Company-building 회사는 카이스트 박사출신의 채용욱씨가 하는 Brain-Computer Interface 분야. 

 그는 내년까지 100억원을 펀딩할 계획. 기술창업가들이 창업을 하면서 겪는 애로 사항을 해결해줄 뿐 아니라 창업을 해서 훨훨 날아오르게 하겠다는 것. 목표가 크고, 출발은 탄탄하다. 퓨처플레이를 통해 기술 창업의 새로운 장이 열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루180을 나섰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스타트업 창업가들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창업도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진로이고,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행복해야죠. 무작정 고생만 한다고 성공이 다가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by wonkis

<퓨처플레이 사무실 안쪽에서 밖을 바라본 모습. 맨 윗층이라 옥상 정원과도 통한다. 구조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대표가 디자인했다고 한다.>

<퓨처플레이 사무실을 밖에서 본 것.>

<사무실에 들어가면 벽에 이렇게 책장이 있는데..>

<책장이 문처럼 열리면서 안쪽에 회의실 공간이 등장한다!!!!>

<수납공간처럼 보이는데, 화이트보드로도 쓸 수 있다. 매우 실용적인 쓰임새들이 곳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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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이유에서나, 직업적인 이유에서나, 사진을 정말 많이 찍는다. 그런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일이 많으면서 사진을 관리하는 일이 엄청나게 번거로운 일이 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진은 편리하기 때문에 수시로 찍게 되지만, 그만큼 사진의 양이 너무 많아서 관리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사진만 그런 것은 아니다. 폰에 있는 각종 문서나 동영상 역시 마찬가지. 

 여기서 핵심은 관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에서는 아직까지는 관리보다는 전송의 문제가 더 크다고 봤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 나와도 수천장씩 되는 사진이나 문서를 스마트폰에서 직접 관리하기는 힘든만큼 이를 죄다 PC나 노트북으로 옮겨서 관리해야 한다. 스마트폰 하드를 비워줘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이를 위해 케이블로 연결도 해보고 블루투스도 사용해봤지만 나름대로 다 불편함이 있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이스트몹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파일을 옮기는 게 왜 이렇게 불편하지?’

<서울 강남 마루180에 있는 이스트몹 사무실에서 창업멤버들이 포즈를 취했다. 앞줄 오른쪽이 오윤식 대표.>

◆이스트소프트에서 싹튼 창업

이스트몹 창업자인 오윤식 대표는 소프트웨어 회사 이스트소프트에서 12년을 일했다. 10년을 넘게 직장생활을, 그것도 한 회사에서 하다가 창업을 한 것은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흔한 케이스는 아니다. 

 그가 처음에 이스트소프트에 입사를 하게 된 것은 군복무때문. 항공대 통신공학과 98학번인 오 대표는 2000년 6월 병역특례로 이스트소프트에 입사했다. 그는 병특 시절부터 창업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스트소프트에 입사할 당시 이 회사 직원은 20명. 2~3명으로 시작하는 요즘의 스타트업에 비한다면 큰 회사였지만 그래도 사장부터 갓 입사한 직원까지 서로를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벤처기업이었다. 창업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초창기부터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가 알게 된 것은 ‘창업을 해서 한 회사를 이끌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점이었다. 결국 12년 동안 소프트웨어 개발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이 정도로 오래 일할 줄은 몰랐죠. 12년동안 개발을 했어요. 처음에 20명이었던 직원이 나중엔 500명이 넘을 정도로 회사가 커지는 과정을 겪었어요. 이 기간동안 김장중 이스트소프트 대표가 고생하는 것도 봤죠.”

 그래도 회사를 차리고 싶었던 그는 2010년 회사를 나와 독립하려고 했다. 입사한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때마침 이스트소프트는 줌이라는 포털 사업을 준비하고 있던 시점. 개발자인 그가 중간에 나가기는 어려운 상황이어서 그는 이 프로젝트를 끝내고 2012년 7월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엔 이스트소프트 내에서 사내벤처 형태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독립을 했다.

◆세상에 도움을 주는 소프트웨어 만들자

첫 시작 멤버는 오윤식과 이경호. 이경호는 오 대표의 대학교 동기동창이다. 두 사람이 개발하기 시작한 앱이 지금 회사의 주력인 센드애니웨어(Send Anywhere). 이름 그대로 파일을 어디에서 어디로든 편하게, 빠르게, 쉽게 보낼 수 있는 그런 앱이다. 오 대표가 이런 앱 개발에 착수한 것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파일을 전송할 때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자주 느꼈기 때문. 특히 서로 다른 기기간에 파일을 주고받을 때 불편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가 많아 이것을 해결해보고픈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처음에 창업을 하면서 세상에 도움을 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자 이렇게 다짐을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엔지니어이기 때문에 IT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그런 소프트웨어를 서비스 형태로 제공하자고 했죠.”

 사실 그는 창업을 하기 2년 전부터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봤고, 이를 정리했다고 한다. 모바일을 좀 더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소프트웨어를 고안해온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고안을 했기 때문에 금방 만들었다. 3개월여만에 ‘Send Anywhere’를 출시했고 이듬해인 2013년 5월 박해일이 합류했다. 박해일은 이스트소프트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였다. 개발이 핵심인 회사이긴 했지만 엔지니어만의 조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투자를 받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의 강석흔 이사가 다리를 놔서 강수혁 이사가 합류하게 되다. 강수혁 이사는 전기전자공학를 전공으로 했지만 비즈니스 관련 업무를 하면서 엔지니어 백그라운드에 마케팅, 전략기획 등의 업무까지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강 이사가 합류하면서 앱을 외부에 알리는 일이 본격화됐다. 작년 연말 10만명이었던 월간 활성 사용자 수는 올들어 30만을 돌파했다.

◆라쿠텐 손잡고 세계시장으로

Send Anywhere의 장점은 뭘까. 클라우드 방식으로 파일을 옮긴다거나 블루투스로 공유를 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우선 일반적인 클라우드 스토리지 서비스와 달리 두 기기간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네트워크 전송경로를 찾아 안전하게 직접전송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서비스입니다.” 오 대표의 설명이다. 쉽게 말하면 P2P 방식을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 클라우드처럼 별도의 공간을 확보할 필요 없고, 회원가입이나 로그인 과정도 필요없다. 앱을 다운로드 받거나 웹 페이지에 들어가 일회용으로 발급되는 6자리 숫자 키를 이용해 간단하게 파일을 전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을 PC에 보내거나, 노트북에 있는 문서를 스마트폰으로 전송하거나, 스마트폰 동영상을 태블릿으로 보낼 수 있다. 물론 모든 전자기기는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어야 한다. 와이파이가 됐던, 3G나 4G LTE가 됐던, 네트워크에 접속해 있어야 한다. 

 편리한 만큼 발생할 수 있는 그런 문제점도 얼마든지 예측 가능하다. 우선 보안 문제가 거론된다. 일회용 비밀번호는 한번만 사용되고 없어지기 때문에 유추될 가능성은 적지만 해킹에는 취약할 수 있다. 항상 사용하는 기기간에 매번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것이 나중엔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상시 활용 기기간에는 로그인을 통해 묶어주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보안문제가 더 중요해진다.

 최근 이스트몹은 일본 IT기업인 라쿠텐으로부터 1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라쿠텐은 지난해 한국인 호창성, 문지원 대표가 설립한 미국 벤처기업 비키를 인수한 바 있고 싱가폴에 라쿠텐 벤처스(Rakuten Ventures)를 설립한 뒤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초기 스타트업 벤처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스트몹은 한국 스타트업으로는 최초로 라쿠텐벤처스로부터 투자유치에 성공한 회사가 됐다.

 이스트몹이 라쿠텐의 투자를 유치한 것은 전략적인 목적이 크다. 언어의 장벽없이 전 세계 어디서나 쓰일 수 있는 이 서비스를 해외 시장으로 확대하는데 라쿠텐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본 것이다.

 “처음부터 유료모델을 냈기 때문에 수익이 계속 발생했지만 사업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나니 투자를 받을 필요성이 커지더군요. 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사용자 기반을 넓혀야한다는 생각도 커졌죠. 그런 의미에서 라쿠텐의 투자는 두가지 목적을 다 충족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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