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세탁서비스네

솔직히 그런 생각이 강했다. 요즘 세탁앱 서비스가 왜 이렇게 많지? ‘그럴만한 시장이 될까. 그리고 그만한 차별화가 가능할까.’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을 하고 워시온 채주병 대표를 만났다.

채 대표는 백그라운드가 좀 달랐다. 서비스가 지향하는 점도 확실히 다른 회사들과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이런 차이점이 이 사업의 본질적인 영역일까? 그리고 이것이 차별화된 서비스로 나타날 수 있을까. 채 대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업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아는 것이 서비스의 경쟁력을 높이고 차별화를 가져올 수 있는 핵심 요인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워시온 채주병 대표(왼쪽)와 노성산 이사가 세탁물 배달에 나서기 앞서 포즈를 취했다.>

세탁공장장, IT에 도전하다

그는 말이 별로 없었다. 취재원으로서는 취재하기 쉽지 않은 상대다. 불필요한 얘기는 가급적 삼가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세탁업의 변화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말투가 강해졌다.

채주병 대표는 다양한 일을 했다고 했다. (그것이 뭔지는 자세히 얘기하질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5년 전 세탁업에 처음 발을 디뎠다는 것이다. “1년 정도 세탁소에서 일을 배웠어요. 그리고 세탁공장을 4년 정도 직접 운영을 했죠.”

그는 세탁공장을 하면서 별로 일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만큼 일이 힘들었기도 했고, 별로 변화가 없는 분야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마음에 안든다고 그냥 접어버릴 수는 없다. 1년간 일을 배우고 자신이 세탁공장을 차려서 4년간이나 운영했다.

세탁공장을 운영한 지 3년쯤 지났을 때였을까. IT분야의 한 인터넷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그를 찾아왔다. “세탁 시장이 변할 수 밖에 없다는 게 그 친구의 얘기였어요. 처음엔 그냥 흘려들었죠.”

역시 IT 분야에 있어서인지 그 친구는 세상의 변화를 빠르게 알고 있었다. 현재의 세탁 서비스업이 별 경쟁력이 없다는 것, 무엇보다 점점 늘어나는 1인 가구와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그런 변화에 현 서비스 방식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꿰뚫고 있었다. 바쁜 생활이 이어지고, 예전처럼 가족 중에 누군가 드라이크리닝을 대신 맡겨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빨래나 세탁은 기본적으로 골치아픈 문제다. 며칠 동안 제대로 빨래를 하지 못하다보면 입고 갈 옷이 없다거나 괜히 불필요한 지출을 하는 등 곤란한 상황이 이어진다. 앱을 통해서 서비스를 신청하게 하고 언제든 고객에게 맞춰서 세탁을 해주고 물건을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업의 근간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

저도 기본적으로는 동의했어요. 하지만 그런 서비스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별로 없었던 거죠. 저는 기본적으로 IT쪽은 전혀 문외한이었으니까요.”

그래도 그가 결국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 업의 본질이 IT가 아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는 세탁서비스의 근본은 IT가 아니라고 봤다. 배달이 본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보다 근본적인, 세탁을 넘어서는 의류에 대한 종합 관리라고 판단했다. 지엽적인 불편함이 아니라 사람들의 진짜 어려움을 해결해주자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세탁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자!

보통 세탁 서비스들은 배달에 초점을 맞춰요.”

채 대표의 말이다. 그런 것 같다. 일단 현재까지는. “어떤 서비스는 아예 약관에 세탁 품질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문장까지 명시를 했더라구요.”

그것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탁소를 차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 대표는 그렇게 해서는 고객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업체는 배달만 한다고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죠. 그걸로 차별화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객은 그렇지 않아요. 고객은 토탈 세탁서비스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세탁물을 배달해주는 업체가 어디서 세탁을 하던 신경쓰지 않아요. 그냥 품질 좋고, 가격 싸고, 만족하면 되요. 그런데 이게 배달만 잘 한다고 해결될까요?”

201412월 채 대표는 워시온을 창업했다. 경쟁업체에 비해 한발 늦게 시작한 셈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있다고 한다. “세탁을 좀 편하게 해 주자, 뭐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저희는 세탁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려고 하고 있어요. 그게 워시온의 목표입니다.”

<배달 대기중인 워시온 차량.>

이용 방법은 다른 서비스와 비슷하다. 앱을 다운받고 지역을 선택해 호출을 하면 된다. 사람이 오면 세탁물을 맡기고 원하는 시간에 받을 수 있다. 세탁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바로 다음 세탁물을 맡길 수도 있다. 가격은 크린토피아와 유사하면서도 일반 동네 세탁소보다 좋은 세탁품질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워시온은 우선 성남 분당 판교 등 수도권 남부권에서 우선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후 용인, 평촌, 서울 송파, 수원, 안양 등으로 서비스를 확대해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처음에 서비스 지역명을 듣고 약간 의아했다. ‘강남이 아니고?’

채 대표는 품질을 초기에 일정 수준 이상 확보하기 위해 우선 서울 수도권 남부 지역에 한정했다고 설명했다. “워시온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자동차로 세탁물을 배달합니다. 오토바이가 위험하기때문이기도 하고, 고객의 소중한 세탁물을 오토바이로 배달하는 게 좀 그래서요.”

물론 그의 이런 생각은 세탁 공장을 하면서 겪은 체험에서 온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하챦은 세탁물이라도 당사자에겐 내일 입고 나가야할 소중한 옷일 수 있다. 차를 이용해서 배달을 하자니 강남은 현재로선 쉽지 않다. 주차가 어렵고, 차가 많이 막혀 제때 배달이 어려울 수 있다.

자 그러면 배달은 그렇다치고, 세탁 품질을 어떻게 담보한다는 걸까. 이 문제는 세탁공장을 운영해본 그의 노하우와 네트워크가 해결한다. 다양한 세탁공장과의 네트워크가 있는 채 대표는 업계의 생리도 잘 알고 있다. 품질을 담보할 수 있으면서도 저렴하게 세탁물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게 그의 결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워시온은 세탁물 배달이 주목적이 아니다. 채 대표는 옷 보관 서비스도 가능합니다. 세탁물 배달은 출발에 불과한 거죠. 옷에 대한 모든 고민을 덜어줄 서비스가 되겠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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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물류대란의 시대다. 거꾸로 보면 물류혁명의 기회가 왔다. 창고형 마트와 대형 아울렛이 엄청나게 들어서고 있는 한 켠에서는 무거운 짐을 들고 쇼핑하러 다니기 싫어 인터넷과 모바일로 쇼핑을 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온라인 쇼핑이 늘어날수록 누군가 물건을 실어 옮겨야하기에 택배업은 날이 갈수록 성장세다. 자신이 갖고 있는 잡다한 물건을 팔거나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 물건을 만들어 팔고자 하는 개인들도 많다. 이들은 카페24 등의 서비스를 통해 판매업자로 변신하고 있다. 이런 소규모 판매상까지 가세하면서 물류 폭발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204회의 주인공 손민재 마이창고 대표는 이런 물류대란의 시대에서 기회를 발견했다.

기자-편집장-IT업계를 거쳐 공무원까지

처음 손민재 대표를 만났을 때부터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만만치 않은 스토리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기에 상당히 사연이 있으신 분 같네요라고 운을 뗐다. 손민재 대표 역시 자신의 살아온 날들에 대한 이야기가 목적은 아니었을 거다. 식사나 하면서 새로 시작한 일에 대한 소식을 알리겠다는 의도가 당연히 우선이었을 터. 하지만 내가 사연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분위기는 초반 그렇게 흘러갔다.

정부나 이런 쪽에서는 저를 잡지 분야나 미디어 전문가로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정작 언론계에서는 저를 IT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할 거에요. 막상 IT업계에서는 와인 전문가로 규정할 겁니다.”

그의 첫 마디는 이랬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의 삶을 살았다는 뜻일까. 그는 서울문화사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우먼센스로 알려진 그 잡지사다. 그러다가 경향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문기자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적성에 안 맞더라구요.”

그는 다시 잡지로 돌아왔다. 이영혜 사장을 만나 디자인하우스에서 일했다. 워킹우먼 편집장의 그의 직함이었다. 그러던 중 19982월 조모상을 당하게 된다. “종손이어서 장례식장을 계속 지키는데, 문득 잡지 일을 계속 하기가 싫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바로 그만 뒀어요.”

여기까지만 들어도 독특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IMF(국제통화기금) 한파가 한창이던 때에 그냥 문득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니. 다른 여러 가지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19981년 가까이 선물투자에 돈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의 결말이 흔히 그렇듯, 거의 전 재산은-그의 표현에 따르면 갖고 있던 모든 돈을-다 날렸다.

돈이 다 떨어졌으니 일을 다시 해야할 수밖에. 1999년 그는 쿠켄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요리 잡지는 요리 전문가가 하는 게 좋을까요, 잡지를 잘 아는 사람이 맡는 게 좋을까요.”

그의 느닷없는 질문. 둘 다 잘하면 좋겠지. 하지만 그의 질문은 아마도 우선순위랄까, 아니 기본을 말하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잡지를 잘 아는 사람이 만들어야 합니다. 요리 전문가는 요리 잡지에는 적합지 않아요.”

그가 이런 말을 한 까닭은 동양매직이 하는 잡지였던 쿠켄은 잡지에 대한 전문성보다는 요리나 주방기기 등을 바탕으로 자본이 축적된 기반 위에서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즉 출발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그 역시 들어가서 알게 된 것. 그는 결단이 빠른 것 같다. 문제가 있고 자신과 맞지 않음을 알고 바로 나와 이번에는 당시 창간한 지 얼마 안 된 파이낸셜뉴스의 문화부 학술팀장으로 일하게 된다. 회사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아웃소싱 방식으로 기사를 제작하던 그 언론사의 시스템에 맞춰 기사를 아웃소싱하는 일을 한 것.

200011월에는 삼보컴퓨터, 조선일보, 코리아나화장품, 대우기술 등이 합작해 만든 여자와닷컴이라는 유명 여성포털에 들어간다. 여성포털이었지만 이 회사는 오프라인사업도 구상하고 있었고 손민재 대표는 오프라인사업본부장을 맡았다. 회사가 어려워진 뒤 총괄COO까지 됐지만 네이버가 장악한 포털 시장에서 차별점을 내세워 살아남기란 어려웠다. “2004년까지 있었어요. 그러다가 나와서 베스트레스토랑이라는 잡지사 발행인을 했는데, 집까지 날렸죠. 허허

파란만장한 그의 스토리가 이쯤되면 숨을 좀 고를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롤러코스터 타듯 인생의 굴곡을 맛보면서 그는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가장 잘 하는게 뭘까.”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뭐든 잘 하는 게 한 가지라도 있고, 그것을 자신있게 내세우면 된다. 그 업에 종사하고 있다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잡지 만드는 것, 책 만드는 것을 제일 잘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2007년 동아일보로 갔죠. 빈티지 잡지를 제안했어요. 남성지 시장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게 저의 생각이었죠.”

그는 정치 기사는 한 줄도 안 쓰고, 오로지 경제 기사를 완전히 색다르게 쓰겠다고 다짐하고 동아일보로 갔다. 아니, 그게 그의 제안이었다. 독립된 회사로 분사해 나오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20081월까지 동아일보에 있다가 나왔고 창업을 하기 전 그의 마지막 직장은 문화체육관광부였다. 국정홍보처가 폐지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국정의 홍보 기능을 총괄하게 되면서 국민들에게 정부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줄 매개체가 필요해졌다. 그는 그런 일을 맡을 적임자로 꼽혀 난데없는(?)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된 것. 2013년말까지 그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문화부에 몸을 담았지만 정작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물류혁신이 다가온다

인터넷과 유통, 물류가 가져오는 혁신에 뭔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 확신했어요. 사실 전 메신저 사업이 하고 싶었죠.”

실제로 그는 공직 생활을 하기 전 아이몽(I’m on)이라는 메신저를 만든 경험이 있다. 음성메신저가 뜰 거라고 생각했어요. “문자로 치지 말고 그냥 말로 하게 하자 그러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이게 기본 컨셉이었어요.”

그는 급성장하는 인터넷 분야의 일을 하고 싶었다. 공직 생활 중에도 다음 일을 생각했다.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카페24와 같은 쇼핑몰 서비스 덕분에 누구나 인터넷 쇼핑몰을 차리기는 쉬워졌다. 택배도 엄청나게 진화했다. 그런데 그 중간 과정의 어려움은 별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의 문제 의식은 물류, 그 중에서도 작은 쇼핑몰을 운영하는 수많은 seller들의 고통에 초점이 모아졌다.

작은 쇼핑몰을 창업했다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 뭔지 아세요? 반품입니다. 반품 때문에 좌절하는 판매상들이 정말 많아요. 처음에 시작할 때는 누구나 물건을 파는 것만 생각하거든요. 반품이 들어오는 부분은 생각도 못하죠. 그러다가 판매한 물건이 쏟아져 들어오면 당황하는 거죠. 물류창고요? 어림도 없죠. 그렇게 작은 쇼핑몰들이 어떻게 물류창고를 만들겠어요.”

창고를 소유하고 있는 이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창고를 소유하고 있는 이들의 어려움. 사실 나는 손민재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런 세계를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하여간 국토교통부 자료를 찾아봐도 전국적으로 창고 숫자는 4500여개에 달한다. 이들은 대형 화물 등을 보유한 화주들과 제곱미터 단위로 계약을 체결한다. 당연히 안정적인 거래를 선호할 터. 대량의 화물을 보유했거나 장기적으로 안정적으로 창고를 쓸 만한 화주를 선호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소규모 쇼핑몰 사업주들이 찾아오면 반가울 까닭이 없다. 화물 자체가 많지가 않기 때문에 여러 명의 화주와 계약을 체결해야 하고 그러면 빈 공간이 많아지거나 불확실성이 커진다. 이래저래 피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큰 화주를 잡기 쉬운 것도 아니다. 창고는 그렇게 계속 빈 채로 남아있게 된다.

창고주와 셀러. 이들의 괴로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안이 있지 않을까. 양쪽 다 행복할 수 있는. 그렇게 되면 판매상은 더욱 활성화되고, 셀러들이 늘어나면서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도 넓어지고, 창고주들도 행복해진다. 그는 이 둘을 연결할 방법을 찾았다. 이름하여 마이창고다.

클라우드 창고 시스템 마이창고

손민재 대표는 마이창고2014820일에 설립했다. 마이창고는 소규모 쇼핑몰 사업자들의 물품을 모아서 창고주와 계약하는 방식이다. 하나하나는 규모가 작지만 모이면 사이즈가 커진다. 화주 입장에선 대규모 화주와 계약하는 것과 규모는 비슷해질 수 있다. 소규모 화주들은 안정적으로 화물 적재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것을 관리할 통합 시스템이다.

창고가 얼마나 전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글쎄. 잘은 모르지만 기본적인 전산 시스템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들어가고 나가는 기록이라던가, 재고 수량이라던가, 그리고 이것을 주단위, 월단위 등으로 집계하는 시스템 정도? 그런데 손민재 대표는 그런 기능을 갖추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마이창고의 플랫폼은 이런 창고들을 위한 솔루션이다. 하루 1만개 화물을 보유한 화주나 100개짜리 화물을 보유한 100명의 화주나 결국 숫자로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100명의 화주를 컨트롤하고 이들 각각의 화물을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전산시스템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결국 매니지먼트가 안돼 감당이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창고주가 일일이 그런 시스템을 만들긴 쉽지 않다.

창고주들은 창고 관리 프로그램에 대해 안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는 게 손 대표의 전언. 창고관리솔루션인 WMS는 대체로 어렵고 돈만 들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도움이 되질 않는다. 항상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고 정작 필요할 때는 정비를 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기존 창고관리시스템의 주인은 화주였지, 창고주가 아니었다. 손 대표는 화주가 주인이 될 수 있는 창고관리시스템을 구축했다.

소호몰을 위한 물류 대행.” 손민재 대표는 마이창고의 업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소호몰들의 창고 공동구매나 창고프랜차이즈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본질은 물류 대행이라는 것. 그 말은 그냥 창고를 같이 이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기존 3자 물류의 서비스들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물류, 택배, 반품도 대행해주고, 컨설팅은 물론 전산 솔루션 호스팅 업무까지도 해 준다.

내년에는 하루 2만개의 물량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면 연간 최대 500만개까지 물량이 늘어난다. “기존 창고와 화주들은 창고의 면적당 계산을 했지만 마이창고는 화물 개당 정산을 합니다. 공간을 파는 사업을 작업을 파는 사업으로 바꾼 거죠. 이렇게 함으로써 빈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고 단기 보관도 가능해졌습니다. 대형 화주의 틈새 화물도 받을 수 있죠.”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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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재능이 사회와 연결돼 빛을 보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관련 시장이 확실히 있던가, 그걸 나서서 해보겠다고 하는 기업이 있던가, 아니면 기업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선구자가 있어야 한다. 특히 예술쪽으로 가면 이런 현상은 더욱 많은 것 같다.

재능있는 작가들의 작품들(소설, 만화, 캐릭터, 애니메이션, 그림 등등)이 이것을 필요로 하는, 또는 즐기는 소비자층을 만날 수 있을까. 전자책이나 카툰 분야에서는 이미 상당부분 현실화되고 있다. 그러면 다른 분야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국의 스타트업 203번째 주인공은 캐릭터팜을 만든 리슨투의 이장연 이수환 대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만들어보고 싶다

리슨투의 창업자 이장연 대표는 개발자다. 경력이 그렇고, 관심사도 그러하다. 세종대 정보통신공학과 04학번인 이장연은 재학중 학교에서 실시한 데일카네기 프로그램에 갔다가 같은 학교 영어영문학과 03학번(호텔경영학 복수전공) 이수환을 만난다. 항상 컴퓨터를 만지고 프로그램이 관심이 있으면서도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이장연은 데일카네기 프로그램을 통해 소통에 대해 배우고 싶었다고 한다. 경영쪽 관심이 많았던 이수환은 이 프로그램을 이수한 뒤 아예 이 회사(데일카네기코리아)에 들어갔다.

반면 이장연은 개발자의 길을 걸었다. 2010SK커뮤니케이션즈에 입사해 검색엔진 관련 개발을 하던 그는 8개월여만에 팬택으로 옮기게 된다. 휴대폰 분야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는 게 주된 이유. PC기반이 아니라 스마트폰 기반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쪽으로 옮기고 싶었던 것이다. 회사가 어려워지고 그의 진로는 결국 바뀌게 되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보면 이 결정은 옳았던 셈이 된다. 팬택에서 그는 안드로이드 네트워크 및 멀티미디어를 개발했다. 어느새 그는 모바일 시대를 위한 준비를 착착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그는 조용히 업무만 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틈틈이 개발자 대회에도 나가며 실력을 다졌던 그는 2013년에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주최하는 DB매쉬업 공모전에 나가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창업의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공모전에 나가면서 여러 가지 아이템을 생각하게 되쟎아요. 미래부 주관 공모전에 나갈 때 패션 관련 앱 서비스를 기획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제가 개발을 할 수 있으니까 누구와 함께 하면 좋을까 고민했구요.”

그가 이런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 벌써 2014. 그때는 이미 수많은 벤처들이 창업을 하고 있던 시기였고 그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개발자들끼리 창업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그런데 저는 꼭 그게 정답은 아니라고 봤어요. 개발만 잘 하는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개발자들만 보이면 편견이 생기거나 시야가 좁아질 수 있다고도 생각했구요.”

그래서 그는 이수환을 떠올렸다. 대단히 친한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영업을 하는 데 적격인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2014년 당시 조선에듀케이션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던 그에게 연락을 하게 된다. 물론 둘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종종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처음 연락을 받고 당연히 저도 고민을 했죠.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정말 좋은 기회라는 판단도 됐구요.” 이수환 대표의 설명이다.

이렇게 뜻을 모은 두 사람은 2014년 창업을 했다. 9월에는 강북청년창업센터에 입주를 했다.

<리슨투코퍼레이션 창업자 이장연(왼쪽), 이수환 대표>

첫 실패..그리고 반전

이들은 쇼핑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앱을 만들기로 했다. 회사 이름은 리슨투코퍼레이션으로 했다. 고객, 사용자의 목소리를 잘 듣고 그들의 마음을 잘 아는 회사가 되겠다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애초에 이장연 대표가 기획했던 아이템이고 어느 정도 기본 구상도 돼 있었기 때문에 제품은 금방 나왔다. 그런데 반응이 신통치가 않았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사실 얼마쯤 실패가 예정돼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고 한다. 이 팀의 결정은 빨랐다. “왜 실패했을까를 생각해봤어요. 일단 쇼핑을 잘 아는 사람이 내부에 없었죠. 그리고 여성 패션 관련 앱을 만들면서 남성 둘이서 한다? 이것도 시장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시장이 원하지 않는 아이템이라는 생각도 했구요.”

불과 3개월만에 피보팅을 하기로 결심한 이 팀. 그런데 사실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어떻게, 무엇으로 피보팅을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함께 사무실을 나눠 쓰고 있던 한 캐릭터 디자이너와 대화를 하게 됐다. 당시 강북청년창업센터엔 많은 팀이 입주해 있어서 리슨투 팀과 같이 팀원이 적은 팀은 다른 팀과 사무실을 쉐어하고 있었다.

이수환과 이장연 두 대표는 이 캐릭터 디자이너와 대화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수조원대에 달하는 캐릭터 비즈니스 사업이 매년 10% 이상씩 성장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이중 스마트폰 캐릭터 시장은 2000억원에 불과하다는 것. 사람들이 스마트폰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고 시장이 커지고 있는데, 앞으로 더 성장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스마트폰 캐릭터 시장 대부분은 카톡 이모티콘 판매가 대부분인데 캐릭터를 그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판매할 곳이 없어서 힘들다는 얘기에 힌트를 얻었다. “그럼 그런 장터를 만들어주자. 고객들은 재능있는 작가들의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수 있어서 좋고 작가들은 소비자들과의 접점이 생겨서 좋고.”

뜻밖의 아이디어를 얻은 이들은 캐릭터 위젯을 만들기로 한다. 이름은 캐릭터팜이라고 지었다. 작가들과 계약을 맺고 날씨, 알람 등 각 분야의 재미난 캐릭터 위젯을 만들어 올려놓고 이것을 판매하는 장터를 만든 것. 작가들이 소비자들과 소통하는 공간도 된다. 무료로 써 보다가 유료 상품을 구매할 수도 있게 만들었다.

아티스트와 상생해 판 키운다

내가 이 팀을 만나 9월 중순 현재 이들은 30명의 작가들과 계약을 맺고 캐릭터팜을 운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출시 한 지 한 달도 안 된 상태. 8월에 서비스를 오픈했으니 여전히 서비스 출시한 지 한 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사용자들이 캐릭터팜 앱을 다운받아 수자의 날씨봐요캐릭터 위젯을 30일 동안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 그날그날의 날씨를 위젯이 스마트폰 화면에서 항상 알려준다. 귀여운 캐릭터가 실감나게 날씨를 표현해주기 때문에 여성들이나 어린 학생들이 좋아할 것 같다. 나름대로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꾸미는 기능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알람이나 배터리를 알려주는 기능도 있다.

현재로선 유명 작가와 계약을 체결하거나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캐릭터 상품을 넣어 소비자들의 선택지를 넓히고 인지도를 높이는 게 최우선이다. 유료로 제품을 구입해도 1000원에서 2000원 사이이기 때문에 사용자들 부담은 적은 반면 캐릭터 작가들은 소비자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를 열었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작가들의 반응은 좋다는 전언.

캐릭터 위젯에 끝나지 않고 작가와 고객이 만나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다보면 팬층도 형성되고 새로운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갖고 있다. 언어의 장벽 등이 없기 때문에 글로벌 비즈니스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게 이들의 판단. “스마트 워치와 연동해 한번 깔면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 등 다양한 기기에서 귀엽고 특색있는 캐릭터들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게 할 겁니다. 작가들이 해외 진출도 할 수 있고, 재능있는 작가들과 함께 더 많은 고객을 만나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고 싶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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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원하고 기꺼이 지갑을 여는 일을 찾기란 어렵다. 그런 일을 찾아도 자신이 할 수 없는 분야라면 별 소용이 없다. 우먼스톡을 서비스하는 크라클팩토리의 김강일 대표는 그런 일을 찾은 사람이었다. 마침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다. 그래서 그런지 의욕과 패기가 넘쳤다. 포이동 사거리 인근 허름한 사무실에서 만났지만 그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다시 시작하는 창업

가수를 꿈꿨다. 10대 때는 실제로 활동도 했다고 한다. 래퍼로 활약을 하고 열심히 했지만 별로 도드라지는 재능이 없다는 걸 어느 순간 알게 됐다. 할 수 없이 그만두고 마음을 다잡고 대학에 들어갔다. 경영학을 전공으로 택해 진학한 뒤 결국 자기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김강일. 나이 스물여섯에 첫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캐릭터 라이센싱 사업으로 출발했다. POKO라는 캐릭터였다. 첫 도전은 쉽지 않았다. 의사 결정 과정의 어려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결국 실패하게 된다. 다시 사업을 하지 않고 그는 취직을 택했다. 배워야 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싸이더스HQ에 입사했다.

싸이더스HQ에서 김강일은 신규사업 기획 일을 맡았다. 일은 적성에 맞았다. 가수를 꿈꿨을 만큼 끼가 있었고, 실제 활동도 했던 그였기에 연예계에 약간의 인맥이 있었다. 돌아가는 생리도 알고 있었으리라. 불과 4년을 일했을 뿐이지만 이 기간 중 초고속으로 승진해 신규사업 팀장까지 올랐다. 서울시내의 한 카페베네 지하에 싸이더스 아카데미 학원을 차렸다. 연예 지망생인 학생들이나 막 데뷔한 연예인들이 배우는 곳이다. 이런 사업을 하면서 그의 연예인 인맥은 더욱 넓어졌다. 하지만 인맥이 넓어진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생활과 마음을 알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갈증이 있고, 실제 생활은 어떤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를 옆에서 보면서 알게 되지 않았을까.

싸이더스HQ에서 그는 카페베네 브랜드 마케팅을 진행했다. 소속 연예인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브랜드의 제휴 사업 제안이 들어오는데 대부분이 뷰티 분야였다. 화장품이라는 분야와 연예인만큼 잘 어울리는 조합도 없다. 영상제작을 하면 어떨까. 그의 첫 아이디어였다. 회사 내에서 해 볼까.

그래도 애시당초 자기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결국 4년간의 싸이더스HQ 생활을 마치고 회사를 나왔다. 2012년이었다. 하지만 당장 시작하진 않았다. 1년여 기간 동안 여기저기 다른 사람 일을 조금씩 도와주면서 고민을 했다. 화장품과 연예인, 영상제작을 엮어서 유통구조를 만들면 돈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냥 브랜드 사업을 할 것인지, 플랫폼으로 확장을 할 것인지가 그의 주된 고민이었다. 실패를 경험한 뒤 두 번째 사업이었기에, 그에겐 출발선이 정말 중요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을 해보자

브랜드 사업을 하면 그냥 간단하게 영상 제작을 해서 판매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초기 안착도 빠르고 매출도 금방 나온다. 대신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시장이 작다. 플랫폼을 하면 새로운 영역의 커머스 시장을 만드는 쪽으로 가야했다. 더 큰 시장이지만 더디게 성장하거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던져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상을 바꿀 만한 그런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 시장에서, 기회를 만들어가면서 더 성장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하고 싶었던 거죠.”

결국 플랫폼으로 정한 그는 2013년말, 크라클팩토리를 설립하게 된다. 영어 크레이지(crazy)와 미라클(miracle)의 합성어였다. ‘미쳐서 만들면 기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그의 기본 아이디어는 결국 커머스도 콘텐츠가 된다는 거였다. 모바일 시대가 오면서 모바일 시대에 최적화된 커머스는 콘텐츠 형태를 띨 것이란 예상이었다. “사실 아마존의 궁극적인 경쟁자는 다른 쇼핑몰 사이트가 아니라 유튜브가 될 것이란 외신 보도를 본 적이 있어요. 저의 생각과 마찬가지의 견해인거죠. 콘텐츠를 경험한 사람은 구매로 이어질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결국 커머스라는 것은 소비자들에게 정보를 나열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매로 이어지게끔 효율적이고 매력적으로 상품을 어필하는 것인데요, 콘텐츠는 이런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화장품을 그냥 사진이나 기본 정보 정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사용하는 영상을 찍는 것이다. 그것도 연예인이 나와서 사용하는 모습을 광고처럼 찍기도 하고, 아주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효과에 대한 설명도 곁들인다. 15-20초의 짧은 시간 동안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6개월 동안 열심히 준비해 201469일 드디어 앱을 출시했다. 시장의 반응을 보기 위해 베타서비스 형태로 내놓았다. 소비자들은 분명 앱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앱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결제가 잘 안됐고 앱 자체에 결함도 많았다. 에러가 잦았다. 이래서는 서비스를 계속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고심 끝에 그는 서비스를 일단 내렸다. 이대로는 오히려 소비자들에게 안좋은 인식만 심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비디오 커머스로 쿠팡 이긴다

절치부심한 그는 개발진을 새롭게 꾸리고 처음부터 다시 개발했다. 그래도 7개월 가까이 걸렸다. 29일에서야 다시 선보일 수 있었다. 일단 모바일 웹과 PC버전만 출시했다. 우먼스톡은 이렇게 진통을 겪은 끝에 나왔다. 다행히 1차 시도때와 같은 그런 에러는 없었다. 77일에 앱도 내놨다. 앱을 내놓은 이후 사용자들이 급증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PC버전만 처음에 출시했을 때는 하루에 5000명씩 들어왔는데 이제는 2만명씩 서비스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서비스를 비디오 커머스라고 불렀다.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고 그것을 통해 소비자들이 정보를 알게 한 뒤 물건을 사고팔 수 있게 하는, 한국에서는 최초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오 물건을 동영상으로 판매하는 건데요. 미국에는 벌써 2011년 창업한 조이어스라는 기업도 있습니다. 구글 창업멤버 출신들이 만든 회사죠. 미국에서는 동영상을 보여주면 그냥 사진이나 텍스트로 된 정보를 접할 때보다 소비자들이 5배나 더 많이 구매한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우선 비디오 영상을 잘 찍는다는 것. 그에게는 그만의 노하우가 있는 듯 했다. 넓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상당히 저렴한 비용에 연예인이 등장하는 화장품 관련 동영상을 촬영한다. 물론 영상 수준도 대단히 높다. 립스틱 하나를 사더라도 알법한 연예인이 쓰고 있는 장면을 확인하고, 효과나 특징 등에 대해 동영상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지갑을 열 확률이 높아진다.

쿠팡을 이겨야죠. 저도 커머스 분야에 뛰어들었는데, 쿠팡을 이긴다는 목표 정도는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하하그는 당차게 목표를 밝혔다. 비디오커머스라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무엇보다 글로벌 진출이 용이하다는 게 그의 생각. 영상을 보면 굳이 말이 필요없습니다. 어떤 제품인지 바로 알아요. 그래도 영상에 자막을 달아서 글로벌로 진출하는 것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먼스톡은 화장품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판매하는 것이다. 영상을 찍고 물건을 파는 것은 우먼스톡의 몫이지만, 이게 가능하려면 좋은 화장품 업체들이 많이 입점을 해야 한다. 처음엔 인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영상을 찍어줄테니 입점하라고 요청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연예인이 나오는 상품 영상을 찍어줄테니 입점을 해달라고 했죠. 지금은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많은 업체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먼스톡의 강점은 입점하는 업체에 대해 영상제작과 연예인 섭외 비용의 혜택을 준다는 것. 즉 입점하면 영상제작과 연예인 섭외 관련 비용을 일체 우먼스톡에서 감당한다. 대신 물건을 싸게 팔아야한다는 조건을 붙인다. 업체들로서는 마케팅 리소스를 얻게 되고 자신들의 화장품에 대한 양질의 영상 콘텐츠를 확보하게 된다.

현재 우먼스톡에는 2000여개의 딜이 올라와 있다. 이 중 1200개가 국내 최저가라는 게 그의 설명. 이처럼 영상 제작을 우먼스톡이 부담하면서 최저가 판매를 유인한 것이 통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재 우먼스톡은 하루에 하나씩 방송 딜 영상을 띄워놓고 있다. 최저가 제품이다. 하지만 곧 시간대별로 새로운 영상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카테고리도 화장품에서 다른 군으로 확장한다. 중국 등 해외진출도 준비하고 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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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노의 사무실을 찾아 들어간 순간 고소한 밥 냄새가 풍겼다. 이날은 마침 다노의 풀파티가 있는 날...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다노의 풀파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맞춰서 이 회사를 찾아갔다. 풀파티는 밥에 풀을 비벼먹는 날이다. 갈월동 현 사무실로 옮겨온 후 올 4월부터 매달 한 차례씩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밥에 풀을 비벼먹다니..다이어트 정보 회사 답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정말 풀만 비벼 먹는 것은 아니고, 참치에 소고기 장조림 등 다양한 야채와 고기를 마음껏 넣고 아주 맛있게 해서 비벼먹는 행사였다. 즉 건강식을 먹겠다는 게 목표가 아니다. 회사의 10명이 넘는 전 직원이 함께 식사를 한다는 의미가 더 컸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다이어트노트라는 회사 이름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반전이 이미 시작된 셈이다.

<다노 풀파티 준비 장면. 정범윤 대표(오른쪽)와 이지수 대표(맨 왼쪽)가 열심히? 밥을 비비고 있다. 사진=꼬날>

평균 연령 27세의 이 젊은 회사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한국의 스타트업 201회를 맞아 젊고 발랄한 꿈을 꾸고 있는 다이어트노트, 다노의 창업자 이지수, 정범윤 대표를 만났다.

첫 실패, 그리고 만남

연세대 경영학과 06학번인 정범윤은 2010년 자신의 첫 창업을 한다. 그의 나이 불과 만 스물네 살 때였다. 업종은 로컬광고사업. 의욕적으로 출발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아니, 뭔가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멤버들이 깨지고 말았다. 멤버들의 조합이 뭔가 잘 못 됐다는 것을 깨달은 것. “사업의 목적이 다들 제각각이었어요. 그냥 일단 경험을 쌓고 싶어서 사업을 시작한 사람, 돈을 빨리 벌고 싶었던 사람, 돈을 많이 버는 게 중요하다는 사람 등등. 서로 생각하고 있는 목표치가 달랐죠.”

이들은 어느 날 자신들이 각자 생각하는 사업의 목표가 다르다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각자 추구하는 그 목표들이 굳이 사업이 아니어도 달성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맞는 말이긴 하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라면 사업을 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 결국 뿔뿔이 흩어졌다.

약간 조급했던 것 같기도 해요.”

당시를 돌이켜보며 정범윤 대표가 말했다. ‘왜 그랬을까를 수십번도 더 생각해봤으리라. 집안 대대로 사업을 했던 정 대표는 사업을 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할 사업, 성공경험을 빨리 쌓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조급한 마음에 무작정 시작하게 된 것. 그는 첫 사업 실패를 겪고 나서 창업멤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리고 다음번엔 꼭 예측 가능한 사람과 창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그러다가 정범윤은 학교 후배 이지수를 만나게 된다. 이지수는 연세대 실내건축공학과에 재학중이었는데 경영학과 수업을 복수전공으로 하고 있었다. 2011년 가을학기 학교 수업에서 만나 이지수의 살아온 얘기를 듣던 정범윤은 이지수야말로 자신이 찾던 예측 가능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고 한다.

대학생 이지수는 창의적인 일을 꿈꿨다. 창업은 생각해본 적이 없고 취직을 할 생각이었지만 어떤 일을 하느냐가 그에겐 중요했다. “디자인컨설팅회사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꼭 가고 싶다고 찍어 놓은 회사도 있었죠. 그 회사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어요. 그래서 그 회사를 가서 현지조사까지 했어요. 알아보니까 그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특정 학교를 들어가는 거였더라구요. 그러려면 돈이 좀 필요했어요. 그래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돈을 모아서 이 학교에 들어가자. 그리고 디자인컨설팅 일을 하자 이렇게 계획을 짠 거죠.”

정범윤은 일찍이 이렇게 계획적이고 예측가능한 삶을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창업이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이지수를 설득하고 설득해 같이 창업을 하기로 했다.

중요한 전환

처음에 이들은 지극히 자신들이 하고 싶은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 음악, 책 등에 대한 각종 콘텐츠를 올려놓는 사이트를 구축했다. 리뷰 등이 주를 이루지 않았을까 싶다. 아카이빙에 주력했다. 서비스명은 인투잇. 미디어였는데, 수익 모델 없이 시작했다고 한다.

아마 노정석 대표 조언이 없었으면 계속 그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정범윤 대표는 대학에 강연을 하러 온 노정석 대표를 처음 만난 뒤 종종 그에게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창업 선배이자 활발하게 투자 활동을 하고 있는 노정석 대표는 수익모델이 있는 사업을 하라고 한마디 했다고 한다. 2013년초였다.

창업 선배의 뼈있는 충고에 고심을 거듭했지만 당장 무슨 아이디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동창업자인 이지수의 인생에 중요한 변화가 온 것이 이 무렵이었다. “그 전까지 아무리 해도 살을 빼기가 힘들었어요. 유명하다는 다이어트 비법을 그대로 따라해보기도 하고, 운동도 하고 음식도 조절하고 했지만, 잘 안되더라구요. 그런데 2013년초 그 때 다이어트에 처음 성공했어요.” 이 대표가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이지수 대표는 세상에 얼마나 잘못된 다이어트 정보가 난무하는지, 사람들(본인을 포함해)이 얼마나 잘못된 접근 방식으로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지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다이어트 정보로 사업이 될까?’ 반신반의하며 주저하는 정범윤 대표에게 큰소리치며 설득, 사업을 전환하기로 했다. 20134월이었다.

처음엔 페이스북 페이지로 가볍게 출발했다. 이름은 다이어트 노트. 다이어트에 대한 정보를 모아놓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페이지였다. 반신반의했던 초기와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빨리 왔다. 10만명으로부터 like를 얻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20137월 법인을 설립했다. 페북 페이지에서 자신감을 얻은 이들이 본격적으로 사업화에 나선 것이다. 이 역시 미디어였지만 다이어트라는 분야에 특화된 미디어였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확실한 수익모델이 있었다.

이들의 행보를 지켜보며 조언을 해주던 노정석 대표와 패스트트랙아시아(FTA)201311월 이 회사에 투자도 집행했다. 사용자들이 늘어나면서 팬들이 형성됐다. 미디어의 가장 중요한 생존 요건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 열혈 사용자들은 다이어트노트를 다노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사이트 확산에 열성적이었다. 사용자들의 반응을 보며 이들은 아예 회사명, 서비스명을 다노로 했다.

다이어트에 관한 미디어라면 가장 쉬운 수익모델은 역시 광고일터. 하지만 이들은 광고 유치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수없이 들어오는 광고 제안을 물리쳤다. “다이어트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과 커뮤니티 형성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어요. 광고로 서비스를 지저분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차별화가 안된다고 본거에요.”

<다노의 창업멤버. 정범윤 대표(왼쪽)와 이지수 대표. 사진=꼬날>

이들은 각종 다이어트 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들이 상품 광고와 연결되면서 다이어트 관련 업체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이로 인해 시장이 확대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자신들은 다른 접근 방식을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신 식품커머스를 붙였다. 이름하여 다노샵. 그런데 이 샵은 판매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게 핵심적인 목적이 아니다. 물론 이윤이 있겠지만 다이어트를 돕는답시고 판매되는 시중의 각종 건강 관련 제품들에 과도한 당분 등이 포함된 것에 분노(?)한 이지수 대표가 직접 기획, 주문해 생산한 제품이었다. 영양성분표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제품을 추천해준다. 고객에 따라 제품을 큐레이션해준다. 프리미엄 푸드마켓을 지향하지만 일단 처음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목적이다.

운동 프로그램도 붙였다. 마이다노. 다이어트에 운동은 필수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차피 미디어만으로는 실천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마이다노는 30명의 외부 트레이너와 제휴를 맺었다. 전문 강사들이 식단부터 하루 식생활, 운동습관까지 바로잡아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더 나아가 건강한 생활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의 하나다. 당연히 유료모델. 4주에 99000원이다. ‘하루에 커피 한 잔 값으로 매일매일 트레이닝받으세요이게 이들이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

스마트폰을 이용해 매일매일 점검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게 포인트다. 음식, 운동, 생활습관을 체크할 뿐 아니라 다이어트의 필요성에 대한 마인드 레슨을 해준다. 그날의 미션이 계단뛰기라고 하면 계단을 뛰는 장면을 찍어서 트레이너에게 보내줘야 한다. 한편으로는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응원도 해 준다. “내 편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응원하고 도와주는 그런 자세가 중요해요.” 역시 여러 번 실패를 해 본 이지수 대표의 설명이다.

다노한 사고방식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이지수 대표는 계속 실패했던 다이어트에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던 걸까였다. 다른 사람도 이 대표를 만나면 그게 제일 궁금하지 않을까.

다시 한번 그를 쳐다보니 체조선수라고 해도 믿겨질 정도였다. 엄청나게 식단을 관리하면서 끊임없이 운동을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대표는 다이어트의 가장 큰 적은 완벽해야한다는 마음이라고 잘라 말했다. “음식 먹을 때마다 칼로리 계산하고, 먹으면서 괴로워하고, 항상 식단을 관리해야 한다고 스트레스 받고, 운동 때문에 걱정하고. 그러면 다이어트가 잘 안되는 것 같아요. 스스로 불행하면 다이어트에 실패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누군가 다이어트를 하려고 한다고 하면 이렇게 물어봐요.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행복하신가요? 그러면 굳이 하시지 마세요. 하면서 불행한 다이어트는 소용 없습니다라고요.”

지극히 타당한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정말 가능할까. 이 대표는 시중에 뜨고 있는 다이어트 방식(***다이어트 등)을 들으면 반드시 세 가지 포인트를 체크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그는 다노한 사고방식이라고 이름붙였다.

다노한 사고방식의 첫째. 지속 가능한가? 둘째. 정보의 출처는 어디인가? 셋째. 즐길 수 있는 방식인가? 예를 들어 (실제 그런 다이어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근 다이어트가 있다고 하자. 좀 극단적으로 가정해서 당근 다이어트는 유명 영화배우 A씨의 다이어트 성공방식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매일 당근만 먹는 다이어트라고 하자. 다노한 사고방식은 지속 가능성부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매일 당근만 먹으면서 며칠을 견딜 수 있을까. 첫 번째 질문에서부터 이 다이어트 방식은 탈락. 그러면 뒤도 돌아볼 필요 없다.

결국 다노는 강제적인 다이어트, 당장의 효과만 기대하는 다이어트가 아니라 행복한 다이어트,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다이어트를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원래 다이어트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더 갖고 싶고, 더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하는 것. 그런데 그 과정이 온통 불행하다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으로 다노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나도 모르게 열심히 주변에 다노 앱을 다운받아 써 보라고 권유하는 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by wonkis

                <이 사진은 두 공동 창업자의 공식적인 사진입니다. 사진 제공= 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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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혁명이 오고 있다. 하루 이틀 정도 소요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배송이 언제부턴가 당일배송으로 바뀌었는데 이제는 1~2시간이면 오는 배송이 가능해진 시대다. 아마존은 한걸음 더 나가 배송시간 제로를 천명하고 나섰다. 드론을 띄운다는 둥, 주문을 하면 3D프린터로 고객 가까이에서 즉석에서 만들어준다는 둥, Drive Through 지점을 만든다는 둥, 다양한 방안이 나오고 있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가능할지 여부를 떠나서 얼마나 배송 분야가 난리길래 이 같은 엄청난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 경기가 침체해도 계속 늘어나고 환율이 요동치고 주식시장이 꼬꾸라져도 계속 성장하고 있는 산업. 바로 택배·물류산업이다.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 시장에서 한국의 한 작은 벤처기업이 발상의 전환으로 시장 혁신을 꾀하겠다며 나섰다. 한국의 스타트업 이백번 째 스토리 주인공은 파슬넷의 최원재 대표다.

30대 지사장을 꿈꾼 공학도

최원재 대표는 자신의 인생의 꿈을 대학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렴풋하게나마 그렸다. 30대 외국계 기업 한국 지사장이 되는 것. 물론 일을 하면서 생긴 목표일 것이다.

인하대 기계공학과 85학번인 그는 지금 한국의 한국의 ICT(정보통신기술) 산업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그 유명한 80년대 중반 학번들과 같은 세대다. 한국에서 벤처창업 붐을 일으킨 원조세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이들과 함께 생활도 했고, 같은 고민을 하면서 직장 생활을 했다. 다만 약간씩 서 있는 길목이 달랐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SK건설에 입사해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2년 남짓한 첫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는 엄청난 변화를 목도했다고 한다. “건설사니까, 설계 도면을 그렸죠. 입사할 때만 해도 제도판에 그렸는데 나중에 오토 CAD로 했고, 회사를 나오기 직전엔 워크스테이션에서 작업을 했죠.”

3D 워크스테이션에서 설계한다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었다. “제도판에서 설계를 하는 것과 3D 워크스테이션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뭐랄까, 뭔가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차원이 아니에요. 그건 완전히 세계관이 달라지는 거였어요.”

3D 워크스테이션으로 작업을 한다는 것. 세계관이 달라진다는 것. 무슨 뜻일까. 약간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위해 최 대표가 예를 들어줬다. “300분의 1짜리 도면을 설계한다고 가정해 보면, 내가 그린 설계 도면을 300배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작업이 잘 안되요. 그게 상상이 잘 안되거든요. 그런데 내가 300배 큰 거인이 돼서 아주 작은 물건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어요. 세계관이 달라진다는게 이런 겁니다.”

기술의 발전이 그에게 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IT(정보기술)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다. “IT는 사실 효율화가 전부가 아니에요.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는 게 훨씬 중요한 거죠.”

1995년 삼성SDS에 입사한 그. 3년 후에는 SAS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만 서른아홉이 되던 해에 목표를 이루게 된다. 호주기업 엑스트랄리스의 한국 지사장이 된 것이다. 목표를 이루고 나서 그는 극도로 허탈했다. 크게 실망도 하게 된다. 지사장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걸 되고 나서 알았기 때문이었다. “초반에 몇 달 지나고 나니까 별로 할 게 없더라구요. 제가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달랐죠. 아 나가서 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1995년 삼성SDS로 가면서 IT에 대해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지 12년만에,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꼬박 14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는 첫 창업에 나섰다. 2007. 그의 나이 이미 마흔이 넘어 있을 때였다.

<물류와 배송 혁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최원재 대표.>

40대 늦깎이 창업

2007년 그는 룩타운이라는 영상 편집 솔루션 회사를 세웠다. 사람들이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당시 싸이월드 등에 올려놓던 시기였다. 룩타운은 디지털 이미지를 사용자가 스스로 편집해 책으로 만들어나 출력해서 보관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디지털 카메라의 유행을 타고 사진을 출력해서 보려는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해주는 것이 1차 목표. 하지만 출력해서 보려는 사람들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아니 이 회사의 기술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기에 선택받지 못했다고나 할까. 첫 창업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첫 창업의 실패가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그는 룩타운에서 축적한 영상 편집 솔루션을 이용해 명함 사업에 뛰어들었다. 회사 이름은 네이미. 명함을 기반으로 한 링크트인과 같은 서비스였다. 종이명함을 기반으로 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고안했다. 직장이나 직책, 직급이 변경되면 상대방이 바로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능도 있었고 직장인들간에 명함을 주고받으면 이를 기반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서비스였다.

수익원이 종이명함을 주문하면 만들어주는 그런 거였어요. 수익원이 명함 제작인 셈이었죠. 어쨌든 그러다보니 명함 만드는 분야도 공부를 좀 했어요. 그런데 이게 결국 인쇄 시장이더라구요.

그는 인쇄업이 세 가지 분야로 나뉘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출판인쇄, 기업인쇄, 포장인쇄가 그것이다. 출판인쇄는 책과 신문 등이 해당되고, 기업인쇄는 카달로그나 달력 등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포장인쇄는 각종 포장을 비롯해 택배용 박스 생산 등도 포괄하고 있는 시장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재미있는 걸 발견한다. “사실 포장인쇄는 가장 보잘것없는 시장 취급을 받아요. 그런데 세 가지 시장 중 이 시장만 성장을 하더라구요.”

그는 원인을 파고들었다. 왜 하향세를 보이는 인쇄산업에서 포장인쇄 시장만 꾸준하게 성장을 하는 걸까. 원인은 택배 시장의 성장세 때문이었다. 택배를 많이 보내니까 관련 시장이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

사실 처음엔 눈을 의심할 정도였어요. 이게 사실일까하고 생각할 정도로 경기침체나 외부변수에 상관없이 택배 시장이 계속 성장하더라구요. 지표로 다 나와요.”

네이미에 있으면서 택배 시장에 완전 몰입하게 된 최원재 대표. 택배 분야가 왜 성장하는지 자료도 찾아보고, 기사도 읽어보면서 이건 될 수밖에 없는 시장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모바일쇼핑의 급성장이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 게다가 이제 모든 것은 집이나 사무실 등 실내에서 주문해서 받아보는 것을 선호하고 힘들게 돌아다니는 것을 귀챦아하는 풍조 때문에 모바일쇼핑을 필두로 한 온라인 배송주문이 갈수록 늘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택배 물량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관련 산업이 발달하는 것은 자명했다. 여기서 그는 택배 등 포장인쇄에서 택배와 배송 자체로 눈을 돌렸다.

그는 택배업이 성장과 함께 변화가 필연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엄청나게 증가하는 택배업이 여전히 11 대면배송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는 것. 언제까지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해봤을 때 곧 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왜 꼭 만나서 물건을 받아야 하나?

그가 던진 질문은 이거였다.

왜 택배에서 꼭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물건을 전달받아야 할까.”

물론 그가 이런 생각을 했을 때 이미 많은 무인택배보관함을 만드는 락커업체들이 난립해 있었다. 같은 문제의식을 일찌감치 갖고 택배업체들이 물건을 락커에 넣어 놓으면 나중에 사람이 찾아가는 구조가 기존의 락커방식이었다. 그는 이것이 틈새시장에 불과하다고 봤다. 택배 시장의 변화 관련, 근본적인 해결 방식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락커를 만들어봤자 택배 물건의 종류에 따라서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물건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무한정 크게만 만들 수도 없구요. 물량이 너무 늘어나니까 무인택배보관함 때문에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해결은 안되는거죠. ”

그럼 근본적인 해결책은 뭘까. 일단 사람이 직접 물건을 가져다줄 필요는 없다는 건 기본. 하지만 락커만 갖고는 해결이 안된다면?

그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택배 시장의 현황은 어떨까. 200554000만 건이었던 연간 택배물량은 올해 18억건으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루 택배 물량으로 따지면 147만건에서 500만건으로 늘었다는 것. 물론 평일이냐, 주말이냐, 명절이냐 등에 따라 물량은 크게 출렁인다. 명절 때의 경우 하루 1000만건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그런데 택배 기사는 같은 기간, 10년 동안 21000명에서 35000명으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물량은 3배가 넘게 늘었는데 이것을 전달할 사람은 채 2배가 늘지 않았다. 결국 택배 기사 1인당 배송 물량은 85건에서 170건으로 증가했다. 혹사를 하면서 배송 관련 잡음이 많아질 수도 있고 배송이 안되는 물품이 늘어날 수도 있다.

최 대표는 락커도 아니고, 대면 배송도 아닌, 물류센터 혁신에서 답을 찾았다. 즉 소비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공유형 배송사서함을 만들고 여기서 소비자들이 물건을 찾아가게끔 한다는 것이다. 이곳은 락커와 다른 공간형태로 돼 있기 때문에 물건의 크기와 상관없이 보관이 가능하다. 11 대면배송이 아니기 때문에 배송기사가 고객을 만나러 여러차례 왔다갔다 하고 집에 사람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그 때문에 소비자들과 배송기사 모두 불안해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택배 전문업체와 관련 전문가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그는 자신이 세운 가설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하나를 더했다. 이 모든 것을 플랫폼화하는 것이었다. 즉 배송센터를 만드는 게 다가 아니라 이를 고객과 배송기사 모두 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물건이 사서함을 통해서 오가는 현황을 온라인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

이후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20127월 이같은 아이디어로 특허를 출원한 뒤 바로 다음달에 당시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글로벌유망IT기업에 지원, 선정됐다. 처음엔 네이미 내부의 한 사업부로서 사업을 하려고 했지만,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선 독립 법인으로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리고 그는 10, 세 번째 창업법인, 파슬넷을 설립했다. 소포나 꾸러미라는 뜻의 ParcelNet을 더한 이름. 그리고 11월엔 정부 지원을 받아 실리콘밸리에 가서 현지 VC(벤처캐피털)와 창업기업들을 만나기도 했다.

질을 바꾸는 양의 임계점을 돌파한 택배시장

파슬넷은 제가 창업해서 만든 회사가 아니에요. 만들어진 회사죠.”

그는 자신의 창업 과정을 설명하던 중 문득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한 것이 아닌, 그냥 일이 되려고 하는 것처럼 술술 진행됐다는 뜻이다. 처음 아이디어가 나온 뒤 3개월만에 특허출원하고 법인설립하고 사람들을 모아 사업을 시작했다. 때가 되면 비즈니스가 만들어지는 것. 그게 파슬넷이 하는 비즈니스였다. “큰 트렌드에 올라타면 그렇게 됩니다.” 될 일은 된다는 뜻이다.

그는 IT기업의 성장 히스토리에 대한 그만의 평도 곁들였다. “흔히들 IT 기업은 기술력이 있어야 성공을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기술력도 중요하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트렌드를 따라가야 합니다. 비즈니스에는 질을 바꾸는 양의 임계점이라는 게 있는 거 같아요. 어떤 트렌드가 생겨서 산업의 질적인 측면까지 변화시키는 양의 임계점이 있는데, 지금 택배시장은 그런 임계점을 지난 것 같습니다.”

임계점을 지난 택배시장은 이제 기존 택배업체들이 기존의 방식, Door to Door로 물건을 고객에게 직접 가져다주는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폭증한 상태다. 모바일 쇼핑이 대중화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파슬넷은 그래서 거점배송과 근거리 배송을 택했다. 그리고 이것을 모바일로 통합 관리하고 제어하고 확인하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배송기사는 배송기사용 앱으로, 소비자는 자신들을 위한 앱으로 배송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파슬넷은 미유박스라는 통합배송센터를 구축했다. 전국 3만여개에 달하는 아파트 단지 중 1%300개 단지에 일단 구축하는게 목표다. 현재 20개를 구축했다. 이 통합배송센터는 기존의 대면 배송, 고객의 방문확인 등이 모두 가능하다. 파슬넷은 CJ대한통운 등 주요 택배회사들과 제휴를 맺고 미유박스에 여러 택배회사들의 물건을 배송해 갖다 놓는다. 대면 배송을 원하는 소비자에게는 직접 물건을 가져다주고, 배송센터에 방문해 상품을 찾아가길 원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된다. 내 물건이 도착했는지, 고객이 물건을 찾아갔는지 등을 앱으로 다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그치면 혁신이라는 말을 쓰기에 부족하다. 그래서 파슬넷은 한걸음 더 나가 초단기 유통 상품을 위한 근거리 배송센터도 구축하고 있다. 중고물품을 사용자들끼리 배송센터나 미유박스를 통해 사고팔 수 있는 시스템도 만들 예정이다. 근거리 창고는 음식이나 빨리 처분해야 하는 물건을 거래하는 데 적합하다. 내가 쓰던 가방이나 보던 책 등을 미유박스에 넣어 놓고 앱에 등록을 하면 그걸 원하는 사람이 결제를 한 뒤 비밀번호를 열고 찾아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오프라인 유통의 근거리 배송망을 장악, 택배업 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비즈니스가 가능하다는 게 최 대표의 설명이다.

파슬넷의 사업계획에서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물건과 사람이 만나는 가장 행복한 방법의 제공자, 미유박스.’ 가장 편하게, 가장 행복하게 물건을 찾고 상품을 받게 해 준다면 그 서비스는 반드시 성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슬넷은 그걸 알고 있는 듯 하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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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3월에 시작한 한국의 스타트업이 어느덧 200회째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게으를 때는 한 달에 한 명 인터뷰하기도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만 5년이 되는 올해 그래도 200번째 스타트업 창업가에 대한 인터뷰 기록을 남기게 된 것에 대해 기쁘고 보람있게 생각합니다.

저의 작은 블로그가 요청한 인터뷰에 기꺼이 응해주시고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아낌없이 풀어놓아 주신 창업가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번째 창업가 정도 인터뷰 하면 이제 그만해도 될 때가 되지 않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날이 갈수록 (제 깜냥에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듯 하고, 예기치 못한 사업모델이나 히스토리를 들으면서 오히려 본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하여간 한국의 스타트업은 계속됩니다. 더 진솔하고 꾸밈없는, 솔직한 창업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변함없는 성원 부탁드립니다.

임원기 드림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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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의 스타트업을 취재하면서 만났던 스타트업 창업가들의 여러 모습 중 특히 기억에 남고, 제 노트북에 있는 사진을 몇 장 올립니다. (주의! 스크롤 압박)

<2011년 9월1일 처음 만났던 스타일쉐어 윤자영 대표. 당시 스쿠터를 타고 온 모습이 인상적.>

<2011년 7월14일 찍힌 사진. 김봉진 우아한 형제들 대표와 김광수 CTO.>

<2011년 12월11일. 추운 겨울날. 당시 아블라컴퍼니 창업했던 노정석 대표, 꼬날 이미나 이사.>

<2012년 1월. 취재에 많은 도움을 주신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와 함께. 사진은 봉간님이.>

<2014년2월. 지금은 알토스벤처스에 계신 박희은님. 당시만 해도 이음 대표.>

<올리다보니 시간순서대로가 아니네요. 2010년10월12일. 심여린 이비호 스터디맥스 대표>

<이것도 2010년12월. 취재방향을 잡는데 도움주신 장병규 본엔젤스 대표.>

<2010년11월. 당시 레블릭스 창업멤버들 윤종일, 신화용, 김진수(오른쪽부터>

<2010년 포도트리 이진수 대표 창업초기 사진.사진은 봉간님께서.>

<2011년 10월 VCNC 박재욱 대표 창업 초기. 사진은 꼬날님께서.>

<2010년 씽크리얼즈 창업팀과 함께 찍은 사진.>

<넥스알 시절의 한재선 대표, 정주환 이사. 2010년 11월12일.>


<2013년2월14일. 펫츠비 심종민 이다혜 창업자(오른쪽부터).>

<2011년 10월 이큐브랩스 권순범 대표 및 창업멤버들, 그리고 꼬날님과 함께.>

<2010년 10월 티몬 초기 창업자들 한 컷.>

(2013년 핸드스튜디오 안준희 대표와 함께.>

<2014년 6월. 비바리퍼블리카 이승건 대표. 올해 간편송금서비스 Toss를 출시했다.>

<2015년 6월30일. 렌딧 김성준 대표, 꼬날과 함께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사진은 행인께서.>

<그리고..200회의 주인공 파슬넷 최원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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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나 출장시 개개인의 필요와 특성에 맞춰 최적화된 숙박 예약은 어느 정도까지 진화하게 될까. 이미 많은 서비스들이 최적의 숙박예약을 표방하며 나와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편하다고 느끼는 이들도 많은 것 같다. 사진으로 보면서 상상했던 호텔의 분위기와 달리 실제로 갔을 때 전혀 달라 실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 수많은 호텔 정보가 올라오지만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호텔은 여전히 찾기 힘들다는 불편함도 상당하다.

파브리카는 직장 생활 도중 출장을 숱하게 다니면서 호텔 예약에 있어 불편함을 느끼고 이를 바꾸고 싶은 한 직장인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설우재 대표가 한국의 스타트업 스토리 일백아흔아흔번째 주인공이다.

직장생활 12년만에 창업을 결심하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느 순간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아 언젠가는 내 일을 해야겠구나. 이 분야에서 내 길을 찾아봐야겠구나.

사람에 따라선 그 마음을 실천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대부분 실천을 못한다), 당연히 이 블로그에서 소개하는 인물들은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이다. 설우재 대표 역시 그랬다.

설우재 대표가 1994년 한양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입학하던 당시, 그리고 대학생활을 거쳐 SK텔레콤에 입사할 때만 해도 그에겐 창업이란 화두는 없었다. 물론 항상 이런 의문은 갖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 회사에서 끝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계기가 찾아오진 않았지만 일을 하면서 서서히 그런 생각이 굳어졌다. 그가 SK텔레콤에서 한 일은 신규사업 발굴 및 기획. 창업가를 만나고 다니고 그들과 사업을 기획하기도 하고 함께 할 일을 찾아보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벤처 창업가들이 비즈니스를 만들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서 그들이 느낄 법한 그 엄청난 희열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는 것. 그것은 아마 뭔가 남이 시키는 일을 해서가 아닌, 자신이 뭔가를 이뤄냈다는 기쁨과 보람에 대한 열망 아니었을까. 그리고 서서히 언젠가 자신의 일을 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그래서 그는 SK텔레콤에서 SK플래닛이 분사를 할 때 주저없이 손을 들고 SK플래닛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SK에서 근무하면서 알게 된 기업가와 함께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모바일 결제와 관련된 사업이었다. 그가 SK텔레콤 시절부터 했던 업무가 NFC, 모바일 결제 등의 업무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144. 그는 SK플래닛에서 퇴사했다. 2002년에 입사했으니 꼬박 12년간 이어진 직장생활이었다.

<스테이포커스를 개발한 파브리카 창업멤버와 직원들. 뒷줄 왼쪽 끝이 설우재 대표. 일부 직원은 스스로의 초상권 보호를 위해 즉석 가면을 만들어 썼다.>

여전히 불편한 호텔 예약

그런데,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니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 아이템에 대해 고민하던 중 모바일 결제가 아닌 다른 분야를 찾게 된 것이었다. “회사에 있으면서 배운 게 뭘까.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사람들의 행동패턴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걸 배웠다는 게 생각나더라구요.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 말고 기존에 사람들이 이미 많이 하고 있는 행동 중에 불편하고 개선이 잘 안되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을 찾아보자고 마음을 먹게 됐어요.”

결국 일단 무작정 나와서 아이템을 찾는 셈이 됐다. 고심을 하던 그는 SK 재직 시절 출장을 다니면서 겪었던 경험을 떠올렸다. “출장을 떠나면서 비행기표와 호텔을 예약할 때 직장인들 대부분은 그냥 회사와 연계된 여행사를 써요. 별 메리트도 없는데 말이죠.”

맞는 말이긴 하다. 그렇게 하는 게 편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정말 만족할 만한 호텔을 추천해주는 지는 의문이다. 12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40회가 넘게 해외 출장을 다녔던 설우재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회사에서 출장비로 인정이 되는 가격대의 호텔을 찾아준다는 게 가장 편리한 점이라고나 할까요. 개인 취향은 물론, 많이 이용한다고 다른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면 개인적으로 다른 여행사를 알아보거나 호텔 예약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서비스를 이용해보면 어떨까. 이 역시 주로 가격 중심이다. 싸다고 광고는 하지만 사실 가격이 절대적으로 싼 상품은 극소수에 한정돼 있다. “대부분 주력 상품이나 미끼 상품만 최저 가격에 판매하고 나머지 상품들은 가격들이 비슷비슷한 수준에서 형성돼 있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가격도 가격이지만 여행자들에게 꼭 필요한 정확한 정보가 확보되지 않은 게 더 큰 문제라고 설 대표는 생각했다. 즉 역이나 공항 등에서 이동시 소요 시간, 방의 분위기나 사이즈에 대한 정보, 편의 시설의 수준 등이 그것이다. 5분 걸린다고 했는데 걸어서 5분이 아니라 자동차로 5분이라던가, 홈페이지에는 방 사진이 환하게 나와있는데 실제로는 해가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이라던가 등등.

설 대표는 이런 출장자들을 위한 맞춤형 호텔예약 서비스를 생각해냈다. 회사 이름은 파브리카. 뭐든 만들어보겠다는 각오로 스페인어로 공장을 뜻하는 파브리카를 회사명으로 붙였다. 첫 서비스 스테이포커스는 이렇게 시작됐다.

개인화된 호텔 큐레이션 서비스

스테이포커스는 제품이 아니라 고객에 초점이 맞춰진 서비스다. 기존 호텔 예약 서비스들은 제품 가격을 낮추는 데 주안점을 뒀다. 가격이 낮은 상품을 다량으로 확보하면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스테이포커스는 처음으로 고객의 특성에 초점을 맞췄다는 게 설 대표의 설명. 물론 신혼부부에게 특화된 상품, 개별여행객에게 특화된 상품 등은 분명히 기존에도 있었지만 출장가는 직장인들을 위한 서비스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들을 위해 어떻게 최적화된 서비스를 제공해준다는 것일까. 우선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비즈니스 호텔을 엄선한다. 기존의 서비스들이 제공하는 가격 맞춤은 기본이다. 여기에 현지 호텔을 직접 방문해 사진을 찍고 직장인들이 관심가질 만한 정보를 상세하게 제공해준다. 물론 현지의 살아있는 진짜 정보. 주요 비즈니스 시설과 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조식은 제공하는지, 방 분위기나 편의시설은 어떤지, 교통편은 얼마나 좋은지 등등.

이런 정보를 얻는 것이 많은 시간과 발품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선 7대 도시에 국한하고 있다. 한국 직장인들이 출장을 가장 많이 가는 7대 도시다. 일본 도쿄와 오사카, 중국 상하이, 태국 방콕, 홍콩, 마카오, 그리고 싱가포르.

발품을 파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수 있다. 그래서 2년 이상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파워블로거들과 제휴해 호텔 정보 뿐 아니라 다른 여행 정도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지금까지 호텔 정보는 가격과 편의성에만 초점을 맞췄지, 고객에 타겟팅하지는 않았습니다. 저희는 바쁜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들의 출장과 이들이 짬을 내서 가는 여행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서비스에 모여들면 이들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플랫폼도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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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업을 시작했는가. 왜 창업을 하는가. 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불확실한 세상에 뛰어드는가. 어차피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무엇을 한다고 해도 누구도 결과를 보장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이왕이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아니 꼭 그렇진 않다. ‘인생에 확실한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보다 안전한, 또는 보다 편한 길은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길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마다하고 굳이 어려운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그런 일들이지만 매일 벌어지고 있고, 이 블로그에서는 그런-어찌보면 정말 이상한-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소개하고 있다.

이상한 듯 보이는 이런 이야기들의 주인공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물결이 사실 세상에 변화를 줄 수 있는 힘이 아닐까.(‘이상한이라는 말을 자꾸 썼다고 해서 특정 통신사 광고를 떠올리지는 마시길...) 이번에 소개하는 예스튜디오 최원만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의 창업 과정과 인생역정에 특별한 공감을 느꼈다. 그가 결정을 내리면서 했을 수많은 고민들이-아주 일부분이겠지만-마음에 와닿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그는 뻔하게 전개될 자신의 인생을 예지했고, 다른 길을 택했다. 자신의 삶을 바꿔보기 위한 노력이었겠지만, 그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말없이 지지해주신 부모님

최원만 대표의 이야기는-지금까지의 다른 스토리와 달리-가족들, 특히 그의 부모에서 시작해야겠다. 그가 의식적으로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창업 아이템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 문득 나왔다.

부모님이 두 분 다 말씀을 못하시고, 듣지도 못하세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고로 그렇게 되셨죠.”

그런 환경이다보니 그는 어릴적부터 부모님의 간섭보다는 자율적인, 요즘 말로 하면 자기주도적인삶을 살아야했다. 어린 시절엔 그런 환경에 불평이나 원망이 적지 않게 있었으리라.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어야 했어요. 그때는 잘 몰랐죠. 부모님에 대해 제가 감사할 그런 일이 있을지..”

어지간한 일은 자신이 결정하고 고민해야 했다. 부모님은 다만 계속 그를 응원하고, 말없이 지지해줬다. 썩 쉽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니 부끄럽지는 않은 과정들이었다. 그래도 그것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었다. 방황한 날도 적잖게 있었지만 그래도 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했고 그와 그의 형, 여동생 등 삼남매가 모두 대학에 갔다.

의정부에 있는 한 전문대학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한 최원만은 대학 졸업 후 삼성카드에 입사를 하게 된다. 처음에 그가 맡은 업무는 채권추심. 험한 일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게 알려져 있다. 이 일을 2년반 넘게 했다. 인생을 배웠다고 한다. 각종 사연을 지닌 사람들에게 채권추심을 하러 다니면서.

일이 험하거나 어려워서 창업을 결심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번듯한 직장을 다니면서 불확실한 자신의 미래에, 어떤 일이 올지 그도 막막한 채로 그냥 있었다. 계기라는 것은 역시 느닷없이 찾아왔다.

10년 앞을 보다

“2004년인가, 그때였죠. 그때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받았어요. 아니, 그 당시 용어론 희망퇴직이었죠. 그런데 사실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는 선배들이 꽤 됐어요. 업계가 어려워지면서 구조조정을 하던 시기였는데 아이 둘이 키우고 있는데 갑자기 나가야 하는 처지에 된 사람들이 주변에 꽤 있었던거에요. 위로도 하고 같이 얘기도 나누고 그러는데, 거기서 문득 제 10년 후 모습이 보이더군요.”

자신도 언젠가는, 그것도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같은 처지가 될 것 같다는 생각. 그 생각 속에 그려진 모습이 자신의 10년 후 미래였다. 그래서 6년차 이하 직원이었던 그는 대상도 아니었지만 회사에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마침 조건도 좋았다. 퇴직금을 받아서 나온 그는 PC방을 차렸다. 첫 개인사업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2005년 이었다.

자신이 자랐고 익숙한 동네인 동두천에서 PC방 사업을 시작한 최원만. 고객을 응대하는 일이 그는 즐거웠다. 단골 고객만 300, 수시로 오가는 고객이 1000여명에 달하는 대형 PC방으로 성장했다. 그는 1000명의 이름을 모두 외웠다고 한다. “고객들이 패턴이 있더라구요. 어떤 시간대에 방문해서 몇시간 정도 이용을 하고, 어떤 자리를 좋아하고, 주로 어떤 게임을 즐겨하는지를 쉽게 알게 됐죠. 그래서 고객별로 정리를 해 봤어요. 그리고 손님이 오기 전에 세팅을 다 해놓고 음료수도 한 잔 준비해놓고 오면 바로 이용하고 싶은 바로 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준비를 끝내놓죠. 그러면 거의 어김없이 그 분이 와요. 준비가 다 돼 있는 것을 보면 참 고마워 하시더라구요.”

첫 사업은 순항했다. 사업을 하면서 결혼도 했고 아들도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PC방 사업을 언제까지 계속 할 수 있었을까. 5년쯤 했을 때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자신이 이 변화를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2009년이었죠. 사업이 뭔지 좀 감을 잡았을 때인데, 그때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접하게 됐어요. 정말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잠이 안왔어요. 게임산업에 엄청난 변화가 올텐데, PC방 사업을 계속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한거죠.”

아내와 상의를 했다. 자영업자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이들은 결론을 내렸다.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 하지만 이런 결정을 내리고 바로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었다. 2010년 당시 그는 일산에서 우유사업을 하고 있던 친척분의 제안으로 우유배달전문점도 하고 있었다. 일단 집중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PC방을 정리하고 우유배달전문점을 하면서 스마트폰과 연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아 나섰다. “우유배달 시장만 15000억원에 달하더군요. 이게 뭔가 스마트폰 시대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서 하진 않았다. 우선 아내가 함께 했다. 아내는 모바일 디자인 쪽 일을 배웠다. 부부는 우유배달을 모바일에 접목하기로 했다.

돈을 좇았더니 돈이 달아나더라

20127. 드디어 법인을 설립했다. 첫 자본금은 100만원. 법인명은 예스튜디오. 여전히 모든 게 불확실한 상태에서 뭐든 만들어보자는 의미에서 회사명에 스튜디오를 붙였다. 최원만 대표가 기획을 맡고, 공동대표인 아내는 디자인을 총괄하기로 했다. 서비스명은 헬로밀크.

이들이 헬로밀크를 기획했던 초기에 선릉역 디캠프에서 최원만 대표를 처음 만났다. 아이템은 우유배달 중계 서비스. 대리점주들은 스마트폰으로 고객을 관리하고 소비자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우유 배달을 신청할 수 있게 했다. 우유업체인 대기업과의 협조도 필요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대리점주들이 활용을 잘 해야 하는 일이었다.

최원만 대표 본인이 우유 대리점을 했었기에 이쪽 바닥의 생리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기회가 있다고 그는 철썩같이 믿었다. 시장은 충분히 있고,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면 올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업은 잘 안됐다. 사용이 좀처럼 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예스튜디오 창업멤버 및 직원들. 앞줄 왼쪽 앉은 이가 최원만 대표.> 

일단 표면적인 가장 큰 이유는 대리점주들의 스마트폰 사용률이 낮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스마트폰을 쓰는 비중이 낮았다. 아니, 생활에선 쓰지만 이것을 통해서 고객을 관리하고 앱으로 고객을 응대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도 많지 않았고, 익숙치 않았기에 불편할 뿐이었다. 그는 편리하다는 가치를 제공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들은 별로 편리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엔 각종 배달앱 서비스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스마트폰으로 배달을 편하게 해준다는 개념이었지만, 그 중 소수만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잘 안될 때는 분명 이유가 있다. 우유를 먹어야 하는 사람과 배달을 하는 대리점 모두가 필요성을 느껴야하는 서비스였다. 그런데 대리점에선 불편해하고, 우유를 배달시켜 먹는 사람들은 그 정도의 효용을 느끼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정말 대박이 날 줄 알았어요. 시장이 보이는 듯 했죠. 사실 돈을 벌려고 했어요. 돈 욕심이 생겼고, 돈을 좇았죠. 그런데 돈을 따라가려고 하니 돈이 달아나버리네요.”

엄밀히 말하면 우유배달 중계라는 분야는 그저 기회만을 찾은 거였다. 그가 이 분야에서 딱히 문제의식을 갖거나 고객에게 줄 차별화된 가치를 찾아낸 것도 없었다.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시기적인 문제도 있었고, 효용 자체의 가치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문제도 있지 않았을까. 대기업을 계속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 확장성이 떨어진다는 사업 자체의 한계도 분명히 있었다.

절체절명의 시기에 나온 주니몽

2013년 여름이 지나면서 최 대표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는 헬로밀크 사업을 지속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사업을 접느냐, 아니면 다른 사업으로 전환하느냐의 갈림길. 다른 사업으로 전환하기 위해선 자금이 필요했다. 이미 회사 자금은 바닥난 상태.

마지막이라는 심정이었어요. 그래도 직원들을 설득했죠. 한번 더 해 보자고. 사람들에게 가치를 줄 수 있는 일을.”

삼성카드를 나오지 않고 그냥 회사를 다녔으면 어땠을까. 아내와 그런 얘기를 한 적도 있었다. 사업이 어려울 때마다 그냥 회사를 다녔으면 어떻게 살았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그를 다잡아줬다. “새출발을 위해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제가 좋았다고 하네요. 그냥 대기업 다니고 있었으면 저랑 결혼 안했을거라고도... 하하

그는 힘들 때 부모님댁을 찾아갔다. 아무 말 없지만 묵묵하게 아들을 지원해주시는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 절로 힘이 났다고 한다. “그래, 나는 몸 건강하고 경험도 있는데 뭔들 못 하겠나.”

어느 날 부모님 댁에 갔다가 아들과 부모님이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 문득 그림으로 소통하는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그림으로 대화를 나누고, 손짓발짓으로 대화를 나눴던 그였기에 충분히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직 글을 모르는 아이들, 또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면 충분히 통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4세부터 13세까지의 아이들은 그림을 정말 많이 그려요. 그때 평생 그릴 그림의 70% 이상을 그린다는 연구결과도 있죠. 이 시기에 아이들의 그림은 정말 순수하고 편견이 없죠. 이들이 그림으로 대화를 하게 하면 정말 숨어있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이렇게 해서 주니몽이 나왔다. 컨셉트는 간단했다. 아이들이 쉽게 그림을 그리면서 소통을 하는 SNS였다. 댓글처럼 그림으로 답을 할 수 있는 댓그림을 가능하게 했더니 아이들이 참여도가 높아졌다.

그의 이런 아이디어에 대해 외부에서 응답이 왔다. 개발 과정중 프로토타입만 보고 매쉬업엔젤스의 이택경 대표가 엔젤투자를 했고 빅베이슨캐피털에서 초기 투자를 했다. 지난달에는 동문파트너스와 빅베이슨으로부터 추가 투자도 유치했다.

주니몽 서비스를 이용하면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구경하면서 전 세계의 또래 어린이들을 친구로 사귈 수가 있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전 세계 12개국의 언어가 지원되기 때문에 색을 배우고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친구도 사귀고 간단한 언어도 배울 수 있는 서비스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가 그린 그림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아이들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서 그림을 그려서 올려놓고 친구들과 그림으로 소통을 할 수도 있고, 오프라인에서 손으로 그린 그림을 저장해서 두고두고 간직할 수도 있다.

2015년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불과 몇 개월만에 100만 다운로드를 달성했고 211개국에서 사용하는 서비스가 됐다. 미국 고객이 54%로 가장 많고 한국과 아시아에서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분석하는 프리미엄 서비스도 준비중이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사용한 색을 토대로 자녀의 현재 감정 등을 분석하면 교육쪽으로도 활용될 가치가 높고 부모들의 관심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1000만 이용자를 확보하는 게 목표에요. 이를 위해선 중국에서 서비스가 활성화되야할 것 같습니다. 3년 내에 전세계 1억명의 어린이들이 쓸 수 있는 그런 서비스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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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스타트업을 찾아 유럽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멘토링을 해 주고, 현지 엑셀러레이팅까지 해준다? 이런 회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특이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고많은 나라의 수많은 스타트업 중에 왜 하필이면 한국의 스타트업을 그 멀고 먼 유럽으로 데리고 가서 멘토링을 한다는 걸까. 이들은 한국의 스타트업 문화에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또는 무엇을 기대하기에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걸까.

더운 여름날 만났지만 독일 베를린에서 날아온 이들과의 대화가 매우 유쾌했기에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만난 지 한달 가까이 지났는데 이제야 포스팅을 올리는 게으른 필자를 용서해주길 바라며.

<왼쪽부터 Apora Ventures의 Carlo Jacobs, Alina Gratschner, Steve Lee.>

Korea, next start-up hub

Apora Ventures(아포라벤처스)는 투자와 멘토링, 인큐베이팅을 함께 하는,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다.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독일, 인도는 물론,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각국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올초 한국에도 지사를 설립했다!

내가 만난 두 사람은 카를로 제이콥스(Carlo Jacobs)와 알리나 그라츄너(Alina Gratschner)였다. 미팅 막바지에 시니어 파트너인 스티브 리가 합류했다.

당시 이들의 최대 현안은 한국에서 5개의 스타트업을 선정해 독일로 함께 가는 것. 이들의 프로젝트명도 엑셀러레이트 코리아-베를린이었다. 만났을 때 한국 스타트업 5개 선정이 막 끝났을 때였다. 이들은 왜 하필이면 한국이냐?’는 나의 질문에 오히려 뜨악해했다. “한국이 다음 세대 스타트업의 허브가 될 것이라는 게 카를로의 자신만만한 예측. 그가 이런 예측을 하는 이유는 뭘까.

아시아는 스타트업을 해서 성장하고 사업을 확장하기 정말 좋은 곳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장성이 높은 곳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한국은 아시아에서 포지셔닝이 아주 좋습니다. 일본은 성장이 정체돼 있고 중국에서는 스타트업이 자신의 브랜드를 알리기 쉽지 않죠. 반면 한국은 매우 익사이팅(!)한 나라이고 정말 많은 젊은이들이 스타트업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열기도 뜨겁고 좋은 팀도 정말 많습니다.”

물론 당연히 그는 이렇게 생각했기에 한국에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한국의 기업들과 5년 전부터 비즈니스를 하면서 겪은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는 한국 기업들과 광고 업무를 하면서 처음 접촉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특히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인더스트리 관련 기업을을 많이 접하게 됐고 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한국의 변화와 발전을 알게 됐다고.

알리나 역시 한국의 스타트업을 보면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다만 이들은 한국 스타트업의 경우 창업가의 기업가 정신이나 사업모델에 비해 유럽에서 사업을 하기엔 우선 문화적인 지역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해외 진출을 도와주겠다고 하는 수많은 액셀러레이터나 멘토링 프로그램들이 있지만 Culture Localization에 초점을 맞추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저희는 전 세계를 다니며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해외 진출 핵심은 Malleability

자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5개의 스타트업을 뽑았을까. 우선 온라인으로 접수를 한다. 이건 당연한데, 이 과정에서 이들이 핵심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게 좀 남다르다. 카를로는 이것을 ‘mentally able to adapt to new situation and culture’라고 표현했다. 즉 이들의 적응성과 기꺼이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본다는 뜻으로 들렸다. 이를 더 짧게 표현하면 cultural malleability. 이걸 한눈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질문도 던지지만 팀원들의 백그라운드, 창업가의 사업 동기, 자세 등을 면밀히 살펴본다고. 스무명의 한국인 심사원과 마흔명의 다국적 심사위원들이 지원 스타트업들에 대한 온라인 심사를 진행하게 된다.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면 서른 명의 다국적 심사위원들이 다시 이들을 평가한다고 한다. 다국적 심사위원들은 투자자, 기업인들 등 다양하게 구성되는데 이들은 사업 모델만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강점이 있는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협업을 얼마나 잘 하는지, 소셜 PR의 능력이 있는지, 외부의 비판이나 평가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등도 평가의 요소가 된다. 이렇게 해서 top 15이 결정되는데 마지막으로 데모데이가 열린다. 그리고 이 데모데이에서 최종 10위의 순위가 전부 뒤바뀌기도 한다는 게 알리나의 설명.

이렇게 선정된 스타트업들은 한국에서 한 달 동안 pre-incubation을 거친 뒤 독일 베를린에 가서 3개월짜리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에 돌입한다. 낯선 외국에서 3개월의 기간이 충분하진 않겠지만, 장소를 제공받고 현지 적응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선정된 다섯 개 업체들은 이미 지난달 독일로 떠나 현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이 독일에서 모든 과정을 마친 뒤에는 알룸나이 프로그램에 자동 가입되게 된다. 투자와 인큐베이션으로 연결하거나, 투자만 하거나, 사업 기회 및 파트너를 확장하는 것을 도와주는 게 알룸나이 프로그램이다. 그야말로 현지에서 사업을 본격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게 최대의 장점인 것이다. 무엇보다, 어차피 한국에서만 머물 수 없고 해외 시장을 노려야하는 한국의 스타트업들로서는 이들의 말처럼 미리 선제적으로 해외에 나가 적응해 가며 시장을 배우면서 공략해야 하지 않을까.

자리를 정리하기 전 카를로와 알리나, 그리고 스티브 리는 (물어보지도 않았건만) 스타트업과 창업가를 보는 기준을 알려줬다. 표현 그대로 말하자면, (1)malleable, (2)adaptable, and (3)willing to change and grow라고 한다. 이들은 사실 카카오톡도 이렇게 성장하고 발전했다투자자나 엑셀러레이터 입장에서는 이런 팀이나 창업가를 만나 가려낼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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