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브스쿨’에서 맛봤던 그 달콤한 꿈을 잊을 수 없었나보다. 마치 한여름밤의 꿈처럼 찰나의 순간에 지나가버렸지만 2000년 아이러브스쿨에 있을 때 이들은 행복했었다. 매일 밤을 세고 사람들이 모이고 스토리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인생도 새롭게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예상치 못했던 것처럼,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아이러브스쿨은 성공의 문턱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다른 일을 하면서도 그때 그 기분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돌고 돌아 다시 창업의 자리에 섰다. 엔키노 성기범 대표와 임준규 이사의 이야기다. 인터넷 벤처 초기 시절 못 다 이룬 그 꿈을 이들은 이제 모바일 시대를 맞아 다시 이루려 하고 있다.

◆아이러브스쿨에서 벤처의 꿈을 꾸다

홍익대 산업공학과 89학번인 성기범 대표는 졸업직후 고려대 산업공학과 대학원에 들어갔다. 홍익대에서 당시 막 군대에서 제대한 김영삼 대표(홍익대 87학번)를 만났다. 나이차도 얼마 안 나고 성향도 비슷했던 이들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MIS(경영정보시스템) 과정을 김영삼 대표와 함께 이수하게 됐고 여기서 프로그래머가 되는 기반을 닦았다.

 97년 삼성전자 정보통신연구소 기술기획팀에 입사해서 만난 사람이 당시 임준규 과장이었다. 임준규 과장은 LBS(위치기반서비스)를 개발하면서 창업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성기범 대표 역시 김영삼 대표와 함께 만났다 하면 창업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기에 임준규 과장과도 번죽이 잘 맞았다. 

 때마침 김영삼 대표가 아이러브스쿨을 창업하고 증가하는 트래픽으로 정신이 없던 시절이었다. 2000년초 성기범, 임준규 두 사람은 삼성을 그만두고 나와 아이러브스쿨에 합류했다. 성기범은 마케팅 홍보팀장으로, 임준규는 기획팀장으로 각각 입사했다. 

 이들이 처음부터 대박만을 노렸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회적 분위기가 젊은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너무나 눈앞에 빤히 보이는 엄청난 기회들을 그냥 지나치기도 힘들었다. 사용자들의 열광적인 반응과 주변의 부추김도 이들에게 대박의 꿈을 꾸게 했다. 실제로도 아이러브스쿨의 사회적 파장효과는 엄청났다. 하지만 회사를 어떻게 경영할지, 어떤 식으로 확장시켜나갈지, 매각한 뒤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감이 없었던 이들은 결국 회사를 잃었다. 

최종 결정이 나기 전, 2001년 1월 성기범, 임준규 두 사람은 먼저 아이러브스쿨을 떠났다. 하지만 손에 얼마간의 돈은 쥔 상태였다. 2001년 4월 성 대표는 밸류랩이라는 벤처 인큐베이팅 회사를 차렸다. 자신은 완결짓지 못했지만 벤처의 꿈을 후배들을 통해 이루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성기범, 임준규 뿐 아니라 김영삼 대표도 합류했다. 그야말로 아이러브스쿨 출신들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실패로 지쳐있던 이들은 미래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달랐다. 밸류랩에는 성기범 대표 혼자 남아있게 됐다.

◆다시 시작해보자

밸류랩은 2002년 북모임이라는 일종의 사이버 서재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다. 가상의 도서관에 내가 정보를 직접 등록하고 이 정보를 사람들과 공유하는 컨셉트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등록하자’를 기치로 내 걸고 시작했다. 이런 것을 하면 어떤 편리함이나 이득이 있을까.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 DVD를 등록했다고 합시다. 나와 친구든 온라인에서 어떤 관계를 맺은 사람은 상대방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쉽게 그것을 빌려달라고 하거나,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다른 것과 교환할 수 있죠. 서로 상대방이 무엇을 갖고 있고, 그 중 어떤 것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지까지 알면 여러가지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Who has what?”을 주제로 한 북모임 서비스는 당초 모든 물건을 등록할 수 있게 하자는 개념에서 출발했지만 우선 가장 등록이 쉬운 책으로 출발을 하면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고 한다. 지역 정보가 결합되면 지역을 기반으로 어떤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갖고 있는지가 파악이 된다.

 한동안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입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2005년 코리아닷컴과 제휴를 맺으면서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확장, 8000여명의 사람들이 5만5000권의 책 정보를 올려놓게 됐다. 

 “서비스가 막 확장하고 있던 시점에 당시 인기를 끌던 미니홈피 스타일로 변경을 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이 방식을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국내에서 성과가 빨리 나오지 못하면 글로벌에서 승부를 봐야했는데 글로벌화를 못한 것도 아쉬웠구요.”

 한국에서 사업하는데 한계를 느낀 성기범 대표는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거기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7년 다시 귀국해 IT와 전혀 무관한 분야에서 일했다. 그래도 그는 마음 속에 계속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때 계기가 마련됐다. 

◆사람들의 스마트폰 ‘홈’을 장악하겠다

2010년말 성 대표는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연세대컴퓨터공학과 88학번 출신인 문현정씨를 2010년말 다시 만나게 된다. 그때 문현정씨는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비자발급 관련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류를 미리 정해진 양식으로 작성을 해서 대사관에서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게 해주는 방식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문현정씨는 미국 국무부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 그런데 저작권이 본인의 소유가 아니라 미국 정부 소유가 되면서 미국의 전혀 엉뚱한 업체가 이것을 활용해 돈을 벌게 된다.

이것을 보고 분노한 성기범, 문현정. 두 사람은 “우리가 만든 것을 우리가 떳떳하게 팔아서 자립하자”고 의기투합, 2011년 8월8일 창업했다. ‘아빠의 자격’이라는 이름으로 두 사람의 팀을 만들고 SK텔레콤의 상생혁신센터에 아이디어를 제안해 1인 창조기업으로 선정됐다. 이때 ‘환전왕’이라는 앱을 만들어 5만건이 다운로드되는 등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어떤 은행에서 환전을 하면 가장 싼 지, 얼마나 이득을 보는지, 해당 은행 중 내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딘지 등을 알려주는 앱이었다. 

 이들의 다음 프로젝트는 ‘꽃 인식 앱’. “꽃에다 앱을 갖다대면 무슨 꽃인지 바로 알려주면 재밌지 않을까? 확장되면 꽃이 아닌 다른 분야로도 얼마든지 넓힐 수 있고, 그러면 사용될 곳이 많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임준규 부사장이 합류했고 디자인을 맡을 손범진 팀장이 새로 들어오면서 팀 구성이 완료됐다. 그런데 인식을 한 이미지를 프로세싱 하는 과정에서 이것을 배경화면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착안하게 된다. 

 “이제 모두들 PC를 손에 들고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배경화면에서 모든 것을 바로 하는 그런 시대가 될 거라고 생각했죠. ‘스마트폰의 홈을 장악하자! 배경화면은 결코 그냥 배경화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게 출발점이 됐습니다. ”

 그렇게 해서 나온 앱이 키노(Kino). 처음엔 동영상으로 배경화면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앱으로 출시됐다. 어떤 동영상이든 키노 앱을 활용하면 스마트폰 배경화면으로 바꿀 수 있다. 배경 화면을 여러가지 자신의 입맛대로 변화시키거나 복수의 배경화면을 깔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다만 아이폰에서는 안된다. 안드로이드폰에서만 가능하다. 

 사람들이 각자 찍은 동영상으로 배경 화면을 만들고 자신의 배경화면을 남과 공유도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바탕화면에서 이미지와 동영상을 주고 받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될 수 있다는 게 엔키노의 구상이다. SNS 기능이 추가된 새 버전의 키노 앱은 3개월 뒤 출시될 예정이다. 궁극적으로는 특정 앱이 아니라 바탕화면이 개인적인 미디어 공간이 될 것이란 게 성 대표의 가정. 즉 광고업체들이 이제 특정 앱을 실현해야 하는 그런 광고판이 아니라 개개인의 휴대폰 바탕화면에서 직접 광고를 하고자 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앞서 스마트폰 홈을 미리 장악하겠다는 계획. 인식 앱을 만들려고 했다가 일이 커졌다. 아이러브스쿨 출신들의 재미있는 실험이 무르익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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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명이서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공동운명체로 살아왔단다. 그 정도면 강산도 변하는 시간인데 한 두명도 아니고 일곱명이 똑같이 일관되게 마음을 지켰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이래서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 아무 이유없이 그냥 같이 지낼 순 없으니까. 그러기엔 젊은 날의 마음은 너무 변덕스럽고 세월이 흘러 나이가 조금만 들어도 지치거나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기 쉬우니까. 같이 오래 지내다보니 이들 중에는 두 커플이나 결혼하는 일도 생겼지만 그러면서 더 친밀해지고 결속력은 더 강해진 것 같다. 2000년에 처음 뭉쳐 지금껏 초심으로 게임을 만들고 있는 레드픽게임즈의 7인. 그 중 나는 이들을 이끌고 있는 신봉철 대표를 만났다.

◆그 정도는 우리도 만들 수 있어!

부산대 시각디자인학과 93학번 신봉철 대표는 군 제대 후 학부를 졸업하던 즈음인 2000년,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한다. 부산대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고 있던 선배가 온라인게임을 같이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게임은 CCR의 포트리스. 포트리스를 보고 디자이너로서 어떤 느낌이 들었냐고 했더니 그의 대답이 이랬다. “인기를 많이 끌던 게임이었죠. 하지만 우리도 그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게임 만들어보겠다고 2000년에 회사를 차렸죠.”

 그로서는 첫 창업이었다. 회사 이름은 드림미디어. 신봉철 김진의 정현옥 임영우 노현태 구자만 신훈교 등 7명에 처음 제안을 한 선배 등 10여명이 이때 모였다. 대학 선후배로 구성된 모임이었다. 회사도 부산에 차렸다. 잠수함이 주인공인 ‘배틀마린’이라는 온라인게임을 뚝딱 만들어 창업한 첫 해에 세상에 내놓았다. 이들이 처음에 생각했던 자신감이 근거없는 게 아니었음이 입증됐다. 나오자마자 이 게임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기록인 동시접속자수 2만명을 돌파하는 등 인기를 끌었고 회원수도 250만명을 넘어섰다. 단기간이었지만 이들이 게임을 만드는 계기가 됐던 포트리스의 성적을 앞서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감이 생긴 이들은 턴제 슈팅게임 ‘비틀윙’을 개발했다. 이들의 실력을 본 CCR이 찾아와 이 게임을 퍼블리싱 했다. 드림미디어는 2003년까지 총 3개의 온라인게임을 만들었고 새로운 게임 개발을 시도하고 싶었던 신봉철 대표(그는 드림미디어에선 대표가 아니었음)를 비롯한 창업멤버들이 나와 2004년 2월 탑픽이라는 온라인게임 개발사를 설립했다. “2년 뒤엔 서울 가자!” 부산에서 시작했지만 서울 입성을 노린 이들은 2006년 분당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그 이듬해 첫 작품을 출시했다.

 이들의 첫 작품은 나나이모. 캐주얼 비행슈팅 역할수행게임(RPG)였다. 당시로선 재미있는 시도였고 가능한 모든 게임 기능이 구현됐다.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러다보니 개발 기간은 좀 오래 걸렸다. 2007년에야 출시된 이 게임은 넥슨에서 처음 서비스를 시작했고 중국에 진출해 텐센트가 서비스를 했다. 텐센트가 서비스를 맡으면서 중국 현지에서 최고 동접 13만명을 기록하는 등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텐센트가 개입하면서 게임 개발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내키는 걸 해야지

텐센트는 나나이모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좀 더 크게 히트를 치려면 좀 더 성인들이 즐길 수 있는 대형 작품을 만들어야한다고 판단했다. 텐센트가 주문한 것은 본격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나나이모는 청소년과 여성에 타깃이 맞춰진 캐주얼게임이었다. 돈이 더 되고 시장성이 좋은 분야는 MMORPG였고 텐센트의 주문으로 NX 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개발2본부장을 맡고 있던 신봉철 대표는 20여명에 달했던 개발2본부 직원 중 14명과 함께 회사를 나오는 결정을 하게 된다. 대신 탑픽이 투자를 하는 형식을 택했다. 탑픽에 있었으면 어쩌면 좀 더 편하게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선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 힘들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었다. “탑픽은 NX 프로젝트를 계기로 본격 MMORPG에 집중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해 2개발본부 식구들 중 상당수, 특히 드림미디어 시절부터 함께한 일곱명은 흔히 말하는 MMORPG 장르보다는 캐주얼 게임에 강점이 있었습니다. 개개인들의 성향이 그쪽을 훨씬 좋아하기도 했구요. 잘 하는 것, 좋아하는 분야를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내키지 않는 것을 하는 게 싫기도 했구요.”

 14명이 나와서 2011년 11월 설립한 회사가 레드픽게임즈(REDPIG GAMES). 직역하면 ‘빨간 돼지’이지만 아기자기한 이미지를 위해 만든 이름인 것 같다. 빨간 돼지가 표현하는 상징이 이들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장난꾸러기 같으면서 귀여운 형상이다.

 탑픽 출신들이 추가로 합류하면서 직원은 19명으로 불었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 지구에 새로 사무실을 얻었다. 이들의 강점은 오랫동안 함께 해오며 호흡을 맞춰왔다는 것. 5, 6년은 기본이고 10년이 넘게 같이 있던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새로 합류한 사람들도 대부분 탑픽 출신들이어서 서로의 스타일을 잘 안다. 자신들의 장점이 있는 분야에 올인하기로 한 것도 이런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처음에 3억5000만원의 자본금으로 시작했지만 게임 개발을 하려면 이 정도 자본금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이들은 최근 투자 유치를 위한 작업도 하고 있다.

◆한국판 앵그리버드는 우리가 만든다

레드픽게임즈가 처음으로 만든 게임은 스마트폰용 모바일게임 정글벨(Jungle Bell)과 주크로스(Zoo Cross). 둘 다 퍼즐 게임이다. 퍼즐을 맞추듯이 모양을 상하좌우로 움직여 모양이 3개 이상 맞으면 점수가 생긴다. 6월초에 출시될 예정이다. 

 탑픽이 PC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 레드픽게임즈는 스마트폰용 게임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출시가 임박한 2개의 게임 외 개발중인 3개의 게임도 모두 스마트폰 및 태블릿PC용 게임이다. “요즘 저희들의 생활만 봐도 개발할 때가 아닌 평소에는 PC를 잘 켜지도 않쟎아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로 필요한 대부분의 일상을 처리할 수 있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이 시장이 향후 PC 기반의 게임 시장보다 훨씬 커질 것 같습니다.”

 한국판 앵그리버드를 노리는 그런 게임도 개발중이다. 아주 쉽고 직관적으로 각도만 잘 맞춰 잡아당겨 쏴서 타깃을 맞추는 그런 게임이지만 색다른 재미 요소를 주기 위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레스토랑을 경영하면서 실내 장식이나 캐릭터를 키우는 재미가 쏠쏠한 모바일 소셜네트워크게임도 개발중이다. 내년 6월 출시를 목표로 개발중인 스마트폰용 역할수행게임(RPG)도 있다. 마을을 확장하고 캐릭터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게임 속 세계의 숨은 영웅들을 모아 나만의 군단을 만들어 악마에게 잠식당한 세계를 구하기 위해 한판 싸운다는 내용이 줄거리다. 5개 개발작들이 차례차례 출시되면서 지금은 개발 전문업체이지만 게임 서비스도 함께 하는 회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위해 서비스 분야의 인력 충원도 준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신봉철 대표에게 왜 창업을 했는지 물었다. 

“사람을 믿었습니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있으면서 그들의 가능성을 믿었고, 그들과 함께하면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그의 창업동기였다. 많은 다른 창업자들처럼 그도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에 이끌렸다. 같은 뜻을 갖고 여럿이 힘을 합하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룰 수 있다는 것. 이런 부분에서도 생각이 일치하기에 이들의 팀워크는 단단한 것 같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고? 지난 12년의 생활이, 그들이 만든 게임이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해주는 듯 하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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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내가 말만 하면 모든 스마트기기가 아니, 전자제품이 척척 움직이고 반응하는 그런 세상이 오지 않을까. 인식만 잘하고 그것을 변환하는 정보처리만 잘 되면 가능할테니. 한 걸음 더 나가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그런 IT(정보기술) 세상도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하면 한편으론 ‘너무 편리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될 지 모른다’는 걱정도 하게 된다. 터미네이터를 비롯해 수많은 공상과학(SF)영화에서 보여졌던 그런 장면들이 오버랩되면서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가까운 곳에서 관련 서비스들이 마구 나오고 있기 때문. 구글이 안드로이드폰에서 시작했던 음성검색이나 아이폰4S에서 처음 선보였던 시리(Siri)가 대표적이다. 

 막연하게 생각해도 앞으로 생활 뿐 아니라 산업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 같은 이런 기술은 아직까지는 해외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그것도 대부분 미국 회사들이다. 오랫동안 축적된 기술력과 서비스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앞서 나가는 이런 외국 업체들과 맞짱을 뜰 만한 한국 기업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이알로이드는 이처럼 아주 드물지만 중요한 기술을 개발하는 국내 회사다. 이 회사를 설립한 이상호 대표는 2010년 12월 NHN이 네이버 모바일 앱에서 음성검색 서비스를 출시했을 때 그 서비스를 만든 4명 중 한 명이었고 이들 중 가장 선임자였다. 그는 사업에 잔뼈가 굵은 사람은 아니다. 그런 사람이 오랜 직장 생활 끝에 새로운 도전을 결심했다면,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뭔가 아주 큰 계기가 있었거나 자신감이 생겼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재밌을 것 같아서’ 시작한 음성 검색

이상호 대표는 국내에서 100명이 채 안될 것으로 추산되는 음성 검색 기술 관련 전문가다. 특이한 전공을 한 셈이다. 동국대학교 전산학과 89학번인 이 대표는 1993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사과정에 입학하면서 자연어처리를 전공으로 했다. 그가 음성 검색과 관련된 분야를 전문적으로 하게 된 것은 1995년부터. 박사과정에 들어가면서 그는 전공으로 음성합성을 택했다. 졸업후 LG전자를 간 그가 일한 곳은 음성인식팀. LG전자에는 이미 그 때부터 음성인식과 관련된 팀이 있었다고 한다. 음성 합성, 즉 text를 voice로 바꿔 기계가 인간처럼 말 할 수 있게 하는 운율생성 기술을 전공으로 했던 그가 음성 인식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LG전자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공교롭게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검색의 필수인 자연어처리, 음성 합성, 음성 인식을 모두 터득하게 됐다. 

 이 대표가 음성 합성 분야에서 박사 과정을 밟기로 한 것에는 아주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재밌을 것 같아서” 선택했다고 한다. 

 “벌써 20년 전부터 음성 인식, 음성 검색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 나와 있었습니다. 다만 당시엔 기술적으로 처리할 만큼 중앙처리장치의 속도가 빠르지 못했고 관련 음성 DB(데이터베이스)도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음성 합성을 통해 기계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운율을 생성할 수 있다면 재미도 있고, 쓰일 곳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죠.”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음성 인식을 상업화하는 모델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함도 많았다. 시장은 아직 멀어보였다. 2004년 LG전자를 나온 이상호 대표는 한국산업기술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교수생활을 하던 시절, 국내에서 NHN의 검색 포털 네이버가 다음을 제치고 1위에 올랐고 해외에서는 구글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아직 늦지 않았으니 검색 분야에 다시 도전을 해 볼까”는 생각을 하던 차.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장병규 네오위즈 창업자였다.

 2005년 장병규 사장은 검색 기술 개발업체 첫눈을 설립하면서 이상호 대표에게 함께 하자고 했다. 첫눈에 합류하면서 그의 인생은 다시 달라졌다. 검색 기술을 개발하는 일을 직접 하고 첫눈에 NHN에 팔리면서 그는 NHN에서 본격적으로 검색 업무를 맡게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의 전공 분야에서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네이버 음성검색을 만들다

NHN에 있던 2010년 7월. 이준호 NHN CTO가 ‘음성검색 기술을 새로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상호 대표를 비롯, 4명이 투입됐다. 4개월여의 기간동안 씨름한 끝에 그해 말 네이버 음성검색이 나왔다. 물론 네이버에서는 그 이전부터 음성검색을 제공하고 있었지만 품질이 좋지 않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왔다. 하지만 이상호 대표팀이 만든 음성 검색에 대해선 외부의 평가 뿐 아니라 그도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훌륭했다.

 “제가 석사 1학년때인 1993년 IBM에서 인터넷문서를 통계적 방식으로 돌려 번역을 하는 그런 Frame에 대한 논문이 나왔어요. 그런데 사실 처음에 그걸 봤을 때는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죠. 통계만으로 가능할까 싶었던 거에요. 당시에 그만큼 DB가 많지 않았던 탓도 있었죠. 그런데 그 뒤로 20년이 흐른 지금은 아직 완벽하진 않더라도 인터넷에서 쉽게 문서를 번역할 수 있거든요. 당시의 이론적인 틀이 그대로 구현이 된 셈이죠.”

 그가 볼 때는 음성 인식, 음성 합성, 음성 검색도 마찬가지다. 결국 결과물은 통계로 결정된다. 통계를 위해선 데이터가 필요하다. 20년 전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조건이 다 갖춰졌다. 진짜 음성검색을 해 볼 만한 시기가 된 것이다.

 “20년 전에는 리얼타임의 10배 원칙이 적용됐었죠. 즉 2초동안 말하면 그것을 인식하는 데 20초가 걸렸던 거에요. CPU 성능때문이기도 하고 단말기의 문제도 있었죠. 그런데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통계를 돌릴 만한 데이터가 축적되면서 거의 실시간에 가까운 음성 검색이 가능해진 거에요. 단말기에서는 음성을 수집만 하고 실제 음성 인식 및 합성은 서버에서 다 이뤄지면서 오늘날의 음성 검색 서비스가 완성된 겁니다.”

 네이버에서 제대로 된 음성검색 서비스를 만든 이상호 대표. 2011년엔 아이폰이 시리를 출시하면서 음성인식과 관련된 서비스 시장이 본격적으로 문을 열었다. 그로서는 본격적으로 실력발휘를 할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 돼 회사를 나왔다. 왜 그랬을까.

 “NHN이 예전만큼 음성 검색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어요.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내가 만든 기술을 모든 사람이 쓰는 것을 보고 싶었다

‘내가 만든 기술이 사람들에게 널리 쓰이고 싶다는 것. 그것을 책임지고 해 보고 싶다는 것’ 이것이 이상호 대표가 NHN을 박차고 나와 창업을 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물론 시리가 나오고 사람들이 이에 열광하는 것을 보며 “아 이제 시장이 열렸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도 중요했다.

  다이알로이드(Dialoid)라는 회사 이름은 대화(Dialogue)와 로봇(Android)의 조합으로 만든 말이다. 말 그대로 대화를 하는 로봇이란 뜻. 스마트폰에서의 음성 인식이나 검색 수준을 뛰어넘어 인간과 대화를 나누고 문맥을 파악하고 공감을 하는 그런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꿈이 서려 있다. 그래서 이 회사는 기술 개발에 올인한다. 구체적인 서비스를 직접 만들지는 않는다. “원천 기술을 확보하는 게 제일 급합니다.”

 멤버는 이상호 대표를 비롯해 4명의 NHN 출신 개발자 등 총 5명으로 구성됐다. 9월에 1차적으로 기술을 개발해 완성하는 게 목표다. 이 기술은 API형태로 공개된다. 이 기술을 이용해 다양한 서비스에 활용하는 것은 다른 업체들의 몫이다. 

 과거 PC 시대에는 명령어를 입력해야 했다. 명령어를 외워 입력하지 않으면 컴퓨터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대화를 나눌수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이콘 방식으로 클릭하면 되는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가 나오면서 컴퓨터와의 대화는 좀 더 쉬워졌다. 터치형은 아이콘을 기반으로 하되 추가적인 부가물이 없이 바로 쓸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 대세가 된 방식이다. 시각과 촉각 다음으로는 인간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음성기반의 유저인터페이스가 이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이알로이드는 바로 이 대화형인터페이스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한국의 아주 드문 벤처기업이다.

“최소한 한국어에 있어서만큼은 세계 어떤 회사가 만든 것보다 우수한 음성 인식 기술을 만들어야죠. 원천 기술만 확보하면 할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다만 기본에 충실한 게 어려운 거죠. 인간을 유심히 탐구하면 답이 나옵니다. 결국 인간에 대해 깊이 탐구를 해 이를 컴퓨터에 가장 유사하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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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훈 위메이드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외모에 걸맞는 뚝심과 추진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지난날이 말해준다. 아주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갖고 있기도 하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게임을 좋아했고 그쪽 한 분야에서 계속 자신의 길을 만들어왔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그가 멋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그를 만나면서 그런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2005년 당시 NHN에서 한게임 본부장을 하고 있던 그를 처음 봤을 때 그가 말했던 자신의 이야기, 어렸을 때의 꿈,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생각 등이 다시 떠올랐다.

 원래 나의 관심사는 좀 다른 곳에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이유는 이렇다. 남궁 대표는 지난해 CJ E&M 게임 부문 대표를 하다가 그만둔 뒤 1년 동안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그가 올 봄 위메이드엔터테인먼트 대표로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편으론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하고 싶은 다른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하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왜 복귀했는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등을 듣고 싶었다. 그가 예전에 말했던 자신의 오래된 소망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했다. 대화는 뜻밖의 지점에서 시작됐다.

◆요즘 학교 다닙니다

“요즘에 학교 다닙니다”  대화의 시작은 학교였다. 

“학교? 강의하러 가시나요?”

“아뇨 공부하러 다닙니다”

남궁훈 대표는 서강대 교육행정학과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올해 처음으로 시작했단다. 서강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흘러 모교로 복귀한 셈이다. 학교는 왜 갔을까.

“제가 어릴때부터 선생님이 꿈이었쟎아요. 선생님이 되기엔 지금은 좀 그런 것 같고 학교를 설립하려구요. 학교를 세우려면 교육행정을 좀 알아야할 것 같아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CJ E&M 게임 부문 대표를 그만두고 나왔을 때부터 장기 계획으로 학교를 만들 생각을 했다고 한다. 모교로 복귀할 계획도 세우고 전공도 정했다. CJ에 있을 때 너무 많은 이슈가 한꺼번에 터져 거의 쉬지를 못했는데, 재충전의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한 듯 하다. 

그의 말을 듣고보니 예전에 ‘네이버 성공신화의 비밀’ 책을 쓰기 위해 인터뷰를 할 때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남궁 대표는 대학에 입학한 뒤 택시 운전도 하고 해외 여행 가이드도 하고 한게임을 창업하고 미국 법인에 나가있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일을 해 왔지만 선생님에 대한 꿈을 내려놓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세우고 싶은 학교는 고등학교. 그것도 게임 관련 학교다. 게임 인력을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고 싶단다. CJ에 있을 때 그는 유독 좋은 인재 확보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그 애착이 이제는 게임 학교 설립으로 옮겨간 거다. 게임 학교를 설립하려면 최소한 학교 행정에 대해선 알아야 할 것 같아 공부를 더 하기로 했다.

 “좋은 사람들하고 같이 일한다는 게 얼마나 복인지 예전엔 몰랐습니다. 전문성을 가진 훌륭한 인재에 목마른 회사들이 많을 겁니다. 특히 게임회사의 경우 더 그럴 겁니다. 고등학교에서부터 전문적인 지식을 충분히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 학교를 만들어 게임산업을 더 키우는 데 보탬도 되고 제 꿈도 이루고 그러면 좋죠. 하하”

◆너무 좋은 게임을 보고 참을 수 없었죠

물론 지금 당장 게임 학교를 설립하는 게 그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아니다. 위메이드엔터테인먼트 대표로 게임업계에 복귀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어쩌다 다시 게임업계에 복귀했는지 물어볼 만하다.

“저도 몰랐어요. 이렇게 다시 돌아올줄은. 학교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박관호, 김남철 대표와 만나 게임 하나를 본 뒤 마음이 달라졌죠.”

 그때 박관호 대표가 ‘어떻게 생각하냐’며 슬쩍 보여준 게임이 바이킹아일랜드. 그는 이 게임을 보고 다시 가슴이 뛰었다. 이걸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박관호 대표를 찾아갔다. “이 게임 저한테 파세요. 제가 한번 해 볼랍니다.”

 그 말을 들은 박관호 대표의 대답. “우리 회사로 들어와서 같이 하시죠.”

 너무 좋은 게임으로 사업을 해보고 싶었던 남궁훈 대표는 위메이드엔터테인먼트로 들어갔다. 그가 위메이드로 들어가면서 한게임을 공동창업했던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의 카카오 관련 사업과 더욱 긴밀해지는 것도 그에게나 김범수 의장에게나, 새로운 시도다.

 2009년 미국에 있을 때 NHN USA 대표에서 물러난 남궁훈 대표를 캘리포니아주 얼바인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스마트폰 게임 얘기를 했었다. “스마트폰을 들고다니면 사람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는 게임을 만들면 아주 큰 시장이 될 것 같습니다. 건강분야에 응용이 될 수도 있고,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데.”

 진작부터 스마트폰 게임을 해보고 싶어하던 남궁훈 대표에게 (그걸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박관호 대표가 게임을 슬쩍 보여준 타이밍이 아주 절묘했다. 꼭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사람에게 너무 좋은 콘텐츠가 눈 앞에 나타났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제 첫 직장이 삼성SDS였는데 그때는 PC통신 유니텔 천리안 하이텔 등이 경쟁했습니다. 하지만 그 경쟁은 곧 무의미해졌습니다. 인터넷이 나타나면서 PC통신 시장은 사라졌거든요. PC통신을 이용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네티즌들이 생겨났죠. 지금은 그 인터넷을 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스마트폰 이용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바일 시장이 PC 인터넷 시장을 능가할 정도로 커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는 겁니다.”

 모바일 시대에 기회를 잡았다는 게 그에겐 중요한 것 같았다. 이미 PC 시대에 큰 수혜를 입었던 남궁훈 대표지만, 모바일 시대에 와서 다시 가능성을 발견했다. 행운아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분야에 매진하는 그에게 기회가 계속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행운이라면, 그 기회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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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살이 없는 청년들이었다. 이들의 창업과정, 그리고 서비스를 만들고 운영해나가는 모습에는 허영이 없었다. 영리한 젊은이들이다. MEEPLE을 만든 Tangible Idea 팀은 뜻이 맞는 사람들을 우선 모았고 서비스를 잘 만드는 것에만 힘을 썼다. 창업자 모두가 아직 대학생이라는 점에서 대학생들의 현실에 맞는 서비스 모델을 만든 것도 이들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아직 사무실도 따로 갖추지 않은 채 학교에서 만나 창업을 준비했고 서비스가 출시된 지금도 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는, 말 그대로 진정한 ‘캠퍼스 스타트업’이다. 

◆가볍게 시작하면 오래 고민할 필요 없다

이들의 특징은 너무 오래 생각하지 않고, 실행이 빠르다는 것. 이들이 만나서 창업에 이르는 과정이 그랬다. 창업자인 변형규, 백인균 두 사람은 서울대 경영학과 07학번이다.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이름이 같은 ‘ㅂ’으로 시작하지 않았으면 만나기 힘들었을 정도로 두 사람은 다른 곳에서 다른 인생을 살았다.

 변형규 대표는 2세때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자랐다.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에서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국인이지만 외국에서 오래 생활을 했고 한국 대학에 오기 위해 공부를 하면서 그는 대학 입학에 필요한 정보나 인생에 대한 조언 등의 부분에서 남들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백인균 대표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때는 사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게 거의 유일한 목표처럼 생각하고, 그런 말을 주위에서 들으면서 살쟎아요. 좋은 사람이 이끌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었죠.” 백인균 대표의 말이다.

 학생이 많은 서울대 경영학과에서 두 사람은 성이 ㅂ으로 시작한다는 이유로 같은 반이 됐다. 사람은 겪어보면 아는 법. 나이는 변형규씨가 한 살 더 많았지만 과 동기인 둘은 금방 친해졌다. 그냥 좋은 친구를 넘어 함께 사업을 하면 좋겠다는 것도 생활하면서 신뢰가 형성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제안은 변형규 대표가 먼저했다. “고등학생들에게 친구 같고 선배 같은 대학생 조언자를 소개해주자” 이게 시작이었다. 백인균 대표가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다. “대학생 멘토와 고등학생 멘티를 연결해주면 되겠네.” 

 아이디어를 바로 실행에 옮겼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사람이 필요했다. 변 대표는 인도네시아에서 고반닷컴이라는 아르바이트 매칭 시스템 서비스를 운영하는 등 경영에서는 경험을 갖고 있었다. 백 대표도 경영학과이기 때문에 기술 전문가가 필요했다. 디자인 분야의 선수도 필수적이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류재성(22), 배성렬(22) 두 동갑내기가 합류했고 서강대 게임소프트웨어개발학과 최준혁(22)씨, 상명대 실내디자인학과 전소린(26)씨 등 대학생 6명으로 구성된 팀이 완성됐다.

<서울대 경영학과에서 포즈를 취한 백인균(왼쪽), 변형규 대표>

◆나도 멘토가 있었으면 좋겠다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반을 넘어선 지금. 수많은 이들이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끼고 살고 그것을 통해 누군가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정보나 꼭 필요한 조언을 듣기는 쉽지 않다. 수요와 공급이 서로 엇갈리면서 엉뚱한 소통에서 힘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지 모른다. 스마트폰을 통해 조언과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서비스를 만들어보자는 게 변형규 백인균 대표의 아이디어였다. ‘나도 멘토가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한번쯤 살면서 생각해볼법한 그런 것을 고등학생-대학생간의 멘토링 서비스로 구현한 것이다.

 이들이 지난해 8월 말부터 개발에 착수, 4개월여 만에 완성한 앱이 미플(MEEPLE)이다. 아이폰용으로 먼저 나왔다. 학교포털과 연동돼 아이디를 입력하면 해당 대학교 학생인지 확인이 된다. 고등학생들과의 관계 형성을 악용하려는 이들을 차단하고 애초의 목적대로 건전한 방향으로 서비스를 운영하기 위해선 상호간의 인증 절차가 중요하다. 신고하기를 통해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이들을 감시하는 시스템도 만들었다. 멘토가 먼저 등록되면 멘티가 추천된다. 이 중에서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이를 승인하고 다시 멘티도 최종 확인하면 둘 간에 대화가 가능해진다. 

 한 사람의 대학생은 여러 사람에게 멘토 역할을 할 수 있다.중고생 멘티들은 친구나 부모님, 선생님에게 얻을 수 없는 도움을 대학생 멘토에게 구해 어려운 점을 해결할 수 있고, 멘토들은 중ㆍ고등학교에서의 경험을 살려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다. 대신 멘토들은 포인트를 비롯해 여러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상업화 모델은 사용자가 늘어가는 추세를 보면서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이달 중 안드로이드 버전이 출시되면 어떤 방향으로 갈지가 보다 명확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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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맞는 사람과 인생을 건 모험을 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여기 소개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트너가 있다. 동향 사람, 고등학교 친구도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꼭 무슨 거창한 공통점이 있어야 뜻이 맞는 것은 아니다. 인간 관계의 화학적 결합이란 이래서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수많은 우연 가운데 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으로 인해 인생이 변하기도 한다. 하긴, 결혼도 인생을 건 모험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는 그닥 다르지 않다. 

 크라우드캐스트를 창업한 박성렬, 이홍규 두 대표는 머나먼 미국 땅에서 만났다. 서로 다른 학교, 다른 전공을 택해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미국의 좁은 한인 사회에서 서로를 잘 알게 됐고 각자의 실력을 지켜보면서 함께 하면 뭔가 해 낼 수 있다는 소망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들의 동행은 한국에 와서 실현됐다. 새출발을 하기 위해 각자 잘 하고 있던 기득권을 버렸다. 배수진을 친 셈이다. 이들은 함께 뭘 하고 싶은 걸까. 

<크라우드캐스트의 창업자, 박성렬 대표(왼쪽)와 이홍규 대표>

◆직장 그만두고 한국 가자

코넬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있던 박 대표가 뉴욕대(NYU)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이홍규 대표를 처음 만난 것은 뉴욕에서 인턴 경험을 쌓고 있을 때였다. 박 대표는 메릴린치에서 금융 분야의 일을 배우며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다. 공학을 전공했지만 그는 금융 쪽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반면 이홍규 대표는 기자의 꿈을 키워가던 학생이었다. ABC 방송국에서 인턴으로 일하기도 했던 이 대표는 졸업후 위성라디오업체에서 editor(편집기자)로 입사했다. 

 85년생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학생 때 만나 금방 친해졌다. 처음부터 창업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치 운명처럼,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조금씩 만들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대표가 들어간 위성라디오 회사가 입사한 지 6개월여 만에 망했다.(정확히는 처음엔 재정난으로 부서가 없어졌고, 나중에 이 매체는 결국 다른 미디어에 흡수됐다고 한다) 기자의 꿈을 갖고 회사에 입사했지만 그가 열심히 배운 일은 웹 프로그래밍이었다. 에디터로서 그런 역할이 주어졌는데, 생각보다 재미있고 자신에게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회사를 나온 이 대표는 외환트레이딩회사 FXCM에 들어갔다. 처음에 그는 웹사이트 구축과 관련된 일을 더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에 여기서 온라인마케팅을 배웠을 뿐 아니라 프로그래밍을 위한 컴퓨터 언어 전반에 대해 배울 수 있게 된다. 미래 먹거리를 위한 무기들을 하나씩 갖추는 과정인 듯 하다. 2년이 지나 그는 MLB.com에 들어갔다. 그리고 당시 추신수 선수가 활약하고 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온라인마케팅을 담당하겠다고 자청해 나섰다. “추신수 선수가 좋아서 시작했죠. 무엇보다 마케팅을 더 전문적으로 할 수 있게 될 것이란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저널리즘을 전공해 미디어에 대한 감이 있는데다 프로그래밍, 온라인 마케팅으로 영역을 넓히는 그에게 어느날 친구 박성렬이 찾아왔다.

 “미래가 보장된 안정된 직장 때려치우고 나랑 같이 한국 가서 사업 하자” 박 대표는 이 대표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이 대표는 당장 선뜻 확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좀 더 일을 배운 다음, 한국에 들어가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생각보다 그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Fab.com에서 아이디어를 얻다

박 대표가 창업을 생각한 것은 역설적으로 메릴린치에서 생각보다 쉽게(?) 돈을 벌면서부터다. “군 문제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야 했는데 한국에 들어와서 과연 이렇게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어느날 들었죠. 왠만한 대기업에 들어가서는 어림도 없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죠. 돈을 벌기 위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됐구요. 그래서 젊을 때 원하는 것을 한번 해보자. 이렇게 된 거죠.”

 건축을 공부하면서 그는 많은 실력있는 디자이너나 건축가의 작품을 접했다. 그러면서 세상의 정말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상품을 사람들에게 판매하거나 알릴 공간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때마침 미국에서 벤처기업 Fab.com이 만들어져 기록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뉴욕에서 시작된 Fab.com은 역사상 가장 빨리 크고 있는 온라인 e-커머스 업체 중 하나다. 이른바 ‘디자인’ 소셜 커머스를 표방하는 이 사이트는 2010년 6월 서비스를 시작, 불과 5개월여 만에 300만명의 사용자를 모으는 등 급성장하고 있다. Fab.com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사용자 50%이상이 SNS(소셜 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유입되고 있기 때문.

 “그루폰에서 물건을 샀을 때 그루폰에서 샀다고 사람들은 말을 잘 못합니다. 하지만 Fab.com에서 좋아하는 디자인 상품을 샀을 때는 친구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소셜커머스에서 물건을 사는 이유는 싼 가격에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질 좋은 상품일 때 패턴이 달라진다는 뜻이죠.”

 그는 한국에서 디자인 상품에 특화된 소셜커머스가 없다는 것에 착안, 친구 이홍규 대표를 설득하는 한편 자신은 바로 한국으로 들어와 사업을 시작했다. 가격이 아니라 디자인을 내세우자, 소비자들에게 기존에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디자인을 갖고 어떤 상품이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자. 이런 생각에서 시작됐다. 메릴린치에서 인턴을 하면서 모은 돈 5000만원이 자본금이 됐다. 2011년 9월 크라우드캐스트가 설립됐다. 

◆전문가들이 연예인이 될 수 있는 공간

 “한국에 돌아와서 놀란 것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세계 굴지의 저변을 가지고 있는 한국 디자이너들의 창의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디자인을 효율적으로 유통하거나 세계 시장으로 수출하는 통로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박 대표는 “디자이너들을 포함한 전문가들이 연예인이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한다. 전문가들이 연예인이 된다. 무슨 뜻일까. 

 “예전엔 미술을 배우려면 유명 미술가나 유명한 미술 선생님에게 사사를 받아야 화가가 될 수 있었죠. 하지만 요즘엔 한달만 배워도 포토샵을 합니다. 하지만 진짜 전문가들은 한 달 배운 사람들과는 분명 다릅니다. 실력이 출중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죠.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전문가가 부각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해 봤어요. 결국 전문가들은 개개인이 브랜드가 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인데, 그런 공간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것은 전문가들이 자신의 상품을 판매하는 공간을 만들자는 것. 처음엔 디자인 분야의 전문가들부터 시작하지만 확장되면 꼭 디자이너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중요한 것은 고상한 작품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구매할 수 있는, 하지만 전문가들의 내공이 담긴 제품을 크라우드캐스트가 선보인 온라인 디자인 박람회 디블로(www.dblow.com)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 상품을 구매하는 사람은 그 전문가의 fan이 된다. 다음 상품이 나오면 fan은 이를 먼저 알게 되고 판매자는 자신의 상품 단골을 확보할 수 있다. 소셜커머스적인 요소를 도입한 것은 120시간 동안 전시할인판매한다는 것. 다만 판매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브랜드를 걸고 판매한다는 점은 기존 소셜커머스와 다른 점이다. SNS를 더 활발히 쓴다는 것도 다르다. 

 이런 시스템이 되려면 좋은 전문가 집단이 확보되야 한다. 이들이 자신의 작품을 올려놓고 소비자들에게 추천해줄 수 있어야, 그리고 소비자들이 이에 관심을 보일만한 작품들이 있어야 한다. 준비 과정에서 좋은 디자이너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박 대표에겐 행운이었다. 박 대표가 가장 처음으로 만난 전문가는 잡지 ‘디자인’과 ‘메종’,  CJ브랜드샵을 거쳐온 강정원 현 ‘엘르 데코’ 편집 디렉터와 ‘행복이 가득한 집’ ‘마리 끌레르’ 등의 잡지를 거친 김윤수 편집 디렉터. 디자인, 패션, 스타일 잡지에서 경력을 쌓은 두 디렉터를  통해 디자이너, 빈티지 컬렉터, 사진가들을 만난 박 대표는 그의 아이디어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이들을 보며 해볼만 하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박 대표는 웹사이트가 만들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아이디어와 비전만을 가지고, 김명한 aA 뮤지엄 대표, 국종훈 세컨드호텔 대표, 박진우 ZD Lab 대표, 등을 설득시켜 디블로의 큐레이터 시스템을 완성했다.

 웹사이트 구축은 이홍규 대표가 올해 초 합류하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디블로는 5월1일, 첫 베타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6월 1일부터는 공식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5월 한 달 동안에는 팝업스토어 형태로 운영하며 한 번에 8개의 상품군을 올린다. 6월 공식 오픈 이후엔 매일 4가지 이상의 상품이 판매된다. 

 두 동갑내기 친구가 가진 포부는 제법 크다. 온라인라는 매개체를 통해 장인 정신과 감각으로 무장한 가능성 있는 디자이너와 문화인을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 소개하려고 한다. 박 대표는 준비 과정에서 싱가폴, 인도네시아 등의 나라를 방문해 ‘한국’을 수출하기보다 ‘한국인’을 수출하는 것의 가능성을 봤다.

  “건축, 인테리어, 액세서리, 가구 등 디자인은 이미 현대인의 삶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류가 단순히 연예인과 방송으로 접근했다면 이젠 아시아와 세계로 문화인으로서의 한류가 자연스레 스며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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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의좋은 3형제를 보는 듯 했다. 위시앤위시라는 벤처기업 창업자 3인방을 만났을 때의 느낌이다. 나이가 같다는 점을 제외하곤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이들이었지만, 대화를 하다보니 상당한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들은 ‘꿈’이 같았다. 각자 한 차례씩 창업을 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었고 실패를 딛고 함께 가고자 하는 동기 부여가 분명했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도 계속 꿈을 키워왔기에 특유의 공감대도 형성돼 있었다. 그래서 ‘함께 한다면 무엇을 못하랴!’는 정신으로 다시 창업에 나섰다. ‘달타냥’은 안 보이지만 삼총사를 연상케 한다. 이들의 구호도 ‘One for All, all for one!’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

<위시앤위시 창업멤버들. 왼쪽부터 홍용기 CDO, 박지환 대표, 박진성 CTO>

◆웹에이전시에서 만난 3명의 동갑내기들

위시앤위시 창업자인 박지환 대표는 한서대 전자공학과 99학번으로 입학했지만 학업보다는 창업에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입학한 그 다음 해에 K벤치와 유사한 하드웨어 리뷰 사이트를 만들어 첫 창업에 나섰다. 그 때 그는 친구들 2명과 함께 창업을 했는데 당시 급증하는 IT(정보기술) 하드웨어에 대한 관심과 웹사이트를 접목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하드웨어 수급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지금이야 하드웨어가 넘쳐나는 시기지만 당시만 해도 리뷰를 해서 쓸 만큼 하드웨어 제품이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제대로 된 리뷰를 쓰는 게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는 것도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됐다. 결국 홈페이지 외주 제작을 하며 근근이 버티다가 군 입대를 하게 된다. 제대 후 2006년 ACG라는 웹 에이전시에 입사를 했다가 지금 창업을 같이 하게 되는 전우들을 만나게 된다.

 그가 만나게 된 인물 중 한명은 경기대 국제통상학과 99학번인 박진성씨. 그는 컴퓨터소프트웨어 기술 분야 자격증을 획득, 교육업체에서 병역특례로 군 생활을 했다. 상경계열 학교에 들어갔는데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혼자서 계속 공부했다고 한다. 그는 그 뒤로도 정통개발자에 준하는 경력을 밟아간다. 그가 병특을 마치고 2006년 ACG에 입사했다가 만난 사람이 박지환 대표다. 

 서울산업대 시각디자인과 99학번으로 입학한 홍용기씨는 집안이 갑자기 어려워지면서 대학 시절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들게 학교를 다녔다. 디자인 분야를 전공하면서 웹 분야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던 그는 당시 이름이 제법 알려졌던 ACG에 2007년 입사했다. 그가 회사에 왔을 때 이미 박지환, 박진성 두 사람은 ACG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이들이 이때부터 발로 창업 모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ACG에서 짧게 같이 있었던 이들은 2008년 뿔뿔이 흩어졌다.

◆셋이서 뭉치면 못할 게 없다

박 대표는 2008년 NHN에 입사했다. 처음 6개월 동안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를 맡았다가 NHN재팬에 넘어가 일을 했다. 최근까지 NHN에 있었으니 만 4년을 NHN에서 일한 셈이다. “NHN 다니면서 너무 좋았죠. 배우는 것도 많았고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도하지 않으면 못하겠다 싶더라구요. ACG에서 만나 함께 일했던 두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박 대표가 창업을 처음 결심한 것은 2010년말. 그때 홍용기는 캐나다어학연수를 거쳐 ACG에서 디자인일을 좀 배운뒤 디자인스튜디오를 창업, 내공을 쌓았다. 생각과 달리 사업이 여의치 않자 그는 KTH를 거쳐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무렵 박진성씨는 ACG를 나와 LG데이콤에서 일하다가 중견 SI업체로 이직해 공공관리분야 SI일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생각나면서 셋이 힘을 합하면 못 할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 사람은 개발, 한 사람은 디자인 전문가라서 최적의 조합이기도 했구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세 사람은 각자 회사를 다니면서 밤에, 또는 주말에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토론을 했다.

 이들의 창업 아이템은 위시리스트. 쇼핑 사이트별로 각자 흩어져 있는 위시리스트를 한 곳에 모아 관리하면 어떨까 하는 게 생각의 출발점이었다. 쇼핑에 관심이 많은 이들인지라 사업을 구체화하기도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즉 지저분한 즐겨찾기, 불편한 관리, 기억조차 하기 힘들만큼 많은 쇼핑 관련 사이트 이런 것들에서 오는 불편함을 해결하자는 차원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들은 그냥 위시리스트를 모아놓기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를 친구들에게 공개하고 위시리스트라는 것을 통해서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장바구니 큐레이팅 위시앤위시

위시앤위시가 가진 기본적인 장점은 자신의 위시리스트를 찾아 각 쇼핑몰을 찾아다니는 불편함을 없애고 한곳에서 멋진 카탈로그로 위시리스트를 관리할 수 있다는 점. 여기에 취향이 비슷한 회원과의 친구 맺기로 서로의 쇼핑 리스트를 공유할 수도 있고 위시리스트 상품을 직접 구매할 수도 있게 했다.

 2011년 5월 처음 시범서비스 형태로 출시됐다. 이때 창업자 3인방은 각자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 구도를 당장 어떻게 바꿔보겠다는 아이디어가 없이 낮에는 회사원 생활, 밤과 주말에는 창업을 준비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래도 투자가 필요해 투자자금을 받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고 한다. “사람들을 만나다가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직접 하지 왜 남의 돈을 갖고 하려고 합니까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이때부터 이들은 법인을 준비, 2012년 2월 위시앤위시를 설립, 등록했다. 이 때 세 사람 모두 다니던 회사를 나와 벤처 창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최근 4월 16일에 사이트를 대대적으로 리뉴얼해 오픈했다. 

 박지환 대표는 자신들의 사업을 ‘장바구니 큐레이팅’이라고 설명한다. 해외에서는 어느 정도 검증된 모델이다. 장바구니 큐레이팅이라고 하면 큐레이션된, 그런 쇼핑리스트를 통해 쇼핑의 재미와 효율성을 높여주는 사업이다. 그야말로 요즘 뜨고있는 큐레이팅(추천)을 앞세웠다. 나와 취미가 비슷한 사람들이 큐레이팅하고, 내 친구들이 큐레이팅하는 정보들을 통해 나의 쇼핑 목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SNS 기능을 좀 더 강조해 사용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판매업체들, 웹사이트들의 광고 플랫폼이 될 수도 있다. 기존 쇼핑 사이트들과 굳이 일일이 제휴를 맺을 필요도 없다. 그 사이트 입장에서도 미디어 채널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고 판매 채널이 늘어나는 셈이 되니 손해 볼 게 없기 때문이다.

 수익 모델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이 서비스의 강점이기도 하다. 광고 뿐 아니라 제휴 쿠폰 등을 제공할 수도 있다. 위시리스트에 담으면 포인트를 주거나 할인 헤택을 제공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사용자는 물건을 사고픈 생각을 하게 된다. 싸게 살 수 있으니까. 물건 구매가 이뤄질 때 수수료 등 수익 모델이 생길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사용자를 더 확보해야 한다. 사람들이 장바구니 큐레이팅이라는 방식에 더 익숙해지면 제품이 늘고 연결 사이트가 늘어나면서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위시앤위시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런 선순환 구조를 통해 이 시장이 커지는 것이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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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아 델리마운트 대표를 처음 봤을 때 ‘꿈 많은 청년’같다는 생각을 했다. 대화를 나눠보면서 그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는 어릴 때부터 꿈을 갖고 있었고 그 꿈을 오랫동안 간직한 사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꿈의 실체를 대학생때 발견했다. 일찍 발견한 꿈의 실체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 도전했지만 아직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 아직은 그는 꿈꾸는 청년 CEO다.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막연했던 꿈과 실행방안은 점점 구체성을 띄고 있다. 

◆엔씨소프트에서 꿈을 찾다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94학번으로 입학한 김 대표는 고등학교때부터 창업을 생각했다고 한다. 왜? 자유로운 생활을 갈망했던 그는 직장생활을 통해 추구할 수 있는 바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컴퓨터공학과에서 벤처동아리를 만들었다. 당시 공대를 아우르는 벤처동아리가 있었지만 그는 컴공과에서 따로 벤처동아리를 만들고 자신이 회장을 맡았다. 

 1997년 동아리에서 그는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을 소개받았다. 1997년 3월 설립된 엔씨소프트는 창업자인 김택진 사장이 똘똘한 학생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아주 초창기에 김 대표는 김택진 사장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 셈이다. 김대아 대표가 졸업할 때 벤처 붐이 일었다. 1998년, IMF 외환위기가 일어난 직후였다. 벤처붐을 보면서 김 대표는 1998년 엔씨소프트에 들어갔다. 입사 순서로 서른여섯번째였다. 처음엔 아르바이트처럼 일했고 다음엔 인턴으로 입사했다. 99년부터는 병역특례로 군생활을 대신해 엔씨소프트에서 근무했다. 엔씨소프트에서 그는 마법학교라는 채팅서비스를 개발했다. 쉽게 말해 메신저에서 이모티콘이 움직이는 그런 서비스를 개발한 것이다. 엔씨소프트에서 게임쪽 보다는 인터넷 사업부에서 일했다. 엔씨소프트의 급성장과 대표이사의 활약을 본 게 그의 창업 길잡이가 됐다.

  “98년 처음 입사할 때 역삼동 엔씨소프트 사무실에는 서른다섯명이 전부였죠. 그런데 2003년 엔씨를 나올 때는 직원이 3000명이었습니다. 저는 엔씨소프트에서 꿈의 실체를 본 것 같았습니다. 창업을 해서 이렇게 사업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걸 처음 본 거죠. 그 뒤로 그렇게 사업을 하는게 목표가 됐습니다.”

◆계속되는 시행착오

김대아 대표가 엔씨소프트를 나와 델리마운트를 설립한 시점이 2004년이다. 델리마운트라는 법인은 벌써 설립된 지 8년이 됐다. 물론 설립 당시에는 지금과 하는 사업이 판이하게 달랐다. “한국의 아마존같은 그런 서비스를 지향했어요. 쇼핑몰인데 동영상을 접목했죠.”

 동영상 쇼핑몰은 지금 보면 확실하게 시대를 앞서간 서비스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얼마나 제대로 구현했는지는 미지수다. PC 환경이나 사람들의 인식이 이를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쨋든 잘 안됐다. 특히 비디오 게임 사용자들을 위한 쇼핑몰이었는데 김 대표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고 했다. “사업을 할 때 시장을 잘 알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죠. 그 서비스는 2년 만에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첫 시도에서 실패를 경험한 그는 두번째 아이템으로 블로그 스킨 편집 서비스를 준비했다. 태터툴즈와 워드프레스 기반 스킨을 만드는 일을 했다. 끝내 태터툴즈와 계약을 체결하진 못했다. 태터툴즈에서 작동할 수 있는 스킨을 개발했지만 이번에도 사업이 신통치 않았다. “적절한 기술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지 못하면서 델리마운트는 핵심 인력이 자주 바뀌었다. 블로그 스킨 편집 개발이 제대로 안된 뒤 골프장 ERP 사업을 하기도 했다. 당초 6개월짜리 계약을 맺었는데 1년 4개월이나 걸렸다. “원래 이 사업을 한 것은 운영 자금도 좀 벌고 시간을 두고 그 다음 사업을 구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 걸린데다가 제때 대금을 받지도 못하면서 소송이 오가는 등 골치아픈 문제가 계속 생겼죠.”

 핵심 사업은 방향을 못 잡고,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은 막상 돈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니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이 일하던 열명 남짓한 직원들이 모두 나가고 김대아 대표는 혼자 남게 됐다. “8개월동안 혼자 고민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도 했구요. 사무실 유지할 돈이 없어 처음에 역삼동에 마련했던 사무실을 용산을 거쳐 왕십리로 옮기기도 했죠.”

 그가 실패를 거듭하며 고전하고 있을 때 그의 부산중앙고 후배인 서수현 이사도 동부화재를 거쳐 신영증권에서 일하다 나와 장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서수현 이사는 1999년 10월 엔씨소프트에 입사해 1년여 동안 일했는데 그때 고등학교 선배인 김대아 대표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서울대 기계공학과 96학번인 서 이사는 경영, 회계 분야에 관심이 많아 CPA를 준비하기도 했고 2006년초 동부화재에 입사해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신영증권을 퇴사한 그가 한 일은 선물옵션 트레이더. 개인투자자였다. “거대한 조직과 싸우는 개인선물옵션투자자가 되겠다고 나름 포부를 갖고 시작했죠. 그런데 도저히 그 압박감을 배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힘들어하고 있을 때 학교 선배인 김대아 대표가 연락을 했어요. 제가 가장 마음이 가난할 때였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델리마운트에 합류했습니다.”

◆모바일 시대 SNS로 새롭게 도전

 김대아 대표는 사람들을 다시 모았다. 2010년 LiiPii(리피)라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출시했다. 한국형 트위터를 지향한 서비스였다. 2009년 한국에서 애플 아이폰이 출시되는 것에 자극받았다고 한다. 사람들의 소통에 대한 욕구가 점점 더 커질 것이니 한국형 트위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현실을 그렇지 않았다. 리피는 또다시 실패했다.

 이 정도면 실패에 지칠만도 하다. 리피는 왜 실패했을까. “채널 기반의 SNS였습니다. 주제(관심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했죠. 그런데 사용자들에게 채널을 강제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생각은 트위터에서 사람들의 관계가 너무 느슨하다고 생각해 이걸 시작하게 됐죠. 끼리끼리 그룹을 짓게 하면 되겠다고 본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냥 트위터를 썼어요. ”

 그래도 리피의 실패는 SNS의 본질을 배우게 했다는 점에서 소득이 있었다는게 김 대표의 판단이다. 그는 TV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우결)’을 보다가 온라인에서 가상의 커플을 맺을 수 있게 하면 이것이 실제 오프라인 관계로까지 이어지는 등 확산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즉시 개발에 착수해 지난 달 커플로그라는 새로운 서비스를 출시했다. 커플로그는 10대 20대에 초점을 맞춘 가상커플 SNS다. “10대 20대들은 부담없는 연애에 관심이 많고 그래서 온라인에서 가상의 역할 놀이를 하기도 합니다. 이들이 놀 수 있는 장을 만들어보자고 한 거죠.”

 커플로그에 가입하면 다른 SNS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네트워크가 기본 형성된다. 프로필이나 올린 글, 사진 등을 보고 1인 커플을 신청할 수 있다. 상대방이 수락하면 두 사람은 만 24시간동안 커플로 따로 대화방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거나 역할놀이 등을 할 수 있다. 커플들이 즐길 수 있는 재미요소들을 많이 만들겠다는 게 델리마운트의 계획이다. 온라인에서 데이팅을 하지만 오프라인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아직은 베타 서비스 중이라 1일 커플 신청만 있지만 기간을 늘린 서비스도 추가된다. 커플이 되는 순간 두 사람의 네트워크가 통합되는 것도 커플로그의 특징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무작정 모르는 사람과 커플이 되지는 않는다. 대체로 아는 친구의 친구와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 관계가 다양해지고 네트워크가 확장되며 새로운 재미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어야죠. 저희는 가상의 커플 놀이가 그저 놀이에 그치지 않고 기존 인간 관계를 기반으로 모바일 환경에서 새로운 SNS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들간의 건전한 만남과 네트워크 확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면 모바일에서 인간관계의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낼 수 있지않을까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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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지난 달 디지에코(DIGIECO)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김길연 엔써즈 사장의 창업 스토리는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던 이야기였습니다. 지면 상에는 여러가지 제약 조건때문에 쓰지 못했는데 길이 제한 없이 한번 맘껏 써 봤습니다. 길어서 자칫 지루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이야기는 충분히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혹 너무 길게 느껴지신다면, 전적으로 제 글솜씨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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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벤처업계에서 최고로 화제가 됐던 기업은 단연 엔써즈였다. 창업자들이 400억원대에 회사를 KT에 매각했다는 이유가 첫번째였다. 같은 해 세계 2위 소셜커머스 업체 리빙소셜에 회사 주식을 넘긴 티켓몬스터를 제외한다면 정말 오랜만에 들려온, 성공적으로 창업후 회사를 팔아 현금화를 한케이스였기 때문이다. 2006년 검색업체 첫눈이 NHN 350억원에 매각된 이후 5년만에 들려온 벤처업계의 낭보였다.

 하지만 현금화에 성공했다는 것이 다가 아니다. 이 회사를 화제의 중심에 있게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회사를 만든 김길연 사장이 가진 남다른 스토리 때문이다. 김길연 사장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크게 실패한 뒤 절치부심 창업에 재도전해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그가 처음 창업을 했다가 실패했던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두 번째 도전과 성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김길연 사장으로부터 들은 그의 두 번에 걸친 창업 스토리를 소개한다

◆벤처 열풍 타고 첫 도전

김길연 사장은 포항공대 컴퓨터공학과 95학번으로 입학했다. 99년 졸업하자마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에 99학번으로 들어갔다. 대한민국에서 이공계 출신이 밟을 수 있는 대표적인 엘리트코스를 거쳤다. 좋은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고 있던 그는 2000, 벤처 창업에 뛰어들었다. 벤처 붐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SK에 가나, ETRI에 가나라고 말할 정도로 실제 프로그램 코딩 실력 있는 학생들은 전부 다 벤처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저 역시 그런 분위기 속에 벤처 창업에 몸을 던진 셈이었죠.”

그는 아이템에 자신이 있었다. 그가 잡은 아이템은 음성 인식 기술이었다. 음성을 인식해 자동으로 작동하게끔 하는 기술이다.

성공만 하면 대박이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불 켜’, ‘불 꺼같은 명령어만 돼도 수익이 괜찮을 것 같았죠. 아이템 자체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데다 이걸 제대로 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었거든요.”

처음부터 김 사장은 사업 계획을 공격적으로 책정했다. 해외 시장에도 나가면 크게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생각만큼 간단치 않았다. 예를 들어 스페인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해법이 없었다. 계속 따로 만들어야 하니 리소스가 많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 시장을 일단 잡고 가자는 전략을 세웠는데, 결과적으로는 한국 시장도 잡기 어려웠다.

기술 자체가 너무 첨단이었다. 2011년 애플이 음성인식서비스 SIRI를 출시했는데 이것도 가끔씩 에러가 발생할 정도다. 한국의 벤처기업이 무려 10년도 더 전에 이와 유사한 서비스를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무엇보다 10여년 전에는 컴퓨터의 성능도 크게 떨어졌다.

기술 개발이 뜻대로 안되다보니 사람 관리가 잘 안됐다. 똑똑한 직원이 나가자 핵심 인력들이 줄줄이 나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술이 핵심인 회사에서 기술 개발에 제대로 안됐고, 핵심 인력을 잡아두지도 못했다. 성공은 요원해보였다.

그래도 이대로 사업을 접을 수는 없었다. 김길연 사장은 SL2에서는 기술총괄(CTO)를 맡고 있었다. 그는 이 기술에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업을 접게 되기까지 음성 인식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응용을 시도해 봤다. 처음 2년 동안은 기술 개발에 주력했지만 기술을 적용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이후 휴대폰에 넣어 보기도 하고, 영어 발음 교정에 활용도 해 봤다.

거실 탁자 위에 놓고불 꺼라고 말해 봤는데, TV의 소리에 반응해 다시 켜지거나 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집 밖에서 명령하는 시스템도 생각해 봤죠. 전화를 걸어서불 켜, 불 꺼하는 명령을 하는 경우인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잘 쓰지 않았습니다. 이 서비스에 대해 돈을 10만원이라도 더 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죠. 대단지 아파트의 경우 1000세대 정도가 있는데, 각 집마다 10만원 정도 받으면 1억이쟎아요. 그리 큰 시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사람들이 10만원라도 더 낼 것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회사가 수익을 내지 못하고 4년째에 접어들자 회사 분위기가 침체되고 인원이 자꾸 나가면서 뒤숭숭해졌다. 회사 내에서 논란이 계속됐다. 하다 보니 음성 인식 자체보다는 음성 합성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는데 회사의 주력 사업을 갑자기 전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최고 경영자의 의사결정이 필요했지만 본질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모르는 분야는 함부로 하면 안된다

SL2가 시도한 음성 인식 기술은 일종의 소프트웨어였다. 소프트웨어를 잘 팔아 봐야 10만원인데, 답이 안 나왔다. 1000세대면 1억밖에 안 되는데 아파트 공사는 2년 걸리니 2년에 1억짜리라는 결론이다SL2는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하드웨어 사업을 시작했다. 소프트웨어가 작동하는 하드웨어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드웨어를 같이 하면 소프트웨어와는 달리 가격을 쳐주니까..그런 막연한 생각에 하드웨어를 했습니다.”

SL2는 우선 띵동 누르면 통화하는 거랑 전화 걸면 전화 받는 음성 인터페이스를 100만원 패키지에 만들어 팔았다. 1000세대에 10억이니 어느 정도 규모가 됐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하드웨어를 처음 만들어 보니 초인종을 누르는 부분이 불량이 잘 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 SL2가 당시 들어간 곳은 도곡동의 고급 아파트. 입주하기 전 절반이 아파트 키를 받아간 상태에서 벌써 불량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과외하려고 과외 선생이 왔는데 띵동 누르는데 소리에 잡음이 껴서 들리지 않는 거였어요. 그래서 휴대폰으로 전화 걸어서 문 열어달라고 해야 했죠. 이 정도면 심각한 버그였습니다. 하드웨어 장비는 거실에 박혀 있었는데 이것을 떼서 수정을 해야 했어요. 키를 안 가져간 곳은 그냥 가서 가져오면 되는데 키를 가져간 곳은 일일이 약속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500가구나 되니까. 그래서 그냥 밤 7시반-8시쯤 갔습니다. 사람 있을만한 시각에. 띵동 누르는 것이 안 되니 문을 두드려야 했다. 그런데 집이 크니까 약하게 두드려서는 안 됐어요. 주먹으로 세게 쳐야 했죠. 그런데 새 집이니 그렇게 두들기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직접 현장에 나가 책임을 졌어요. 10억원 어치 납품했지만 손해배상 나오기 시작하면 2, 3배로 물어줘야 하니깐 회사가 무너지게 되므로, 수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새 집에 들어가서 뜯고, 1층에서 납땜 고친 뒤 다시 올려서 끼워 넣었습니다.

이런 걸 누가 좋아하겠는가. 새 집에서. 드라이버로 뜯고 다시 넣는 일인데. 1차 수정은 됐지만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수정은 됐다. 그런 작업을 하면서하드웨어는 함부로 만드는 것이 아니구나. 소프트웨어는 수정하면 되는데하는 것을 배웠다. 이 작업은 SL2에서 한 일종의 마지막 AS였다.

 ‘, 사업이 정말 쉬운 게 아니구나.’ 그는 그때 사업의 어려움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지금도 휴대폰이 고장나도 욕 많이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지. 만든 사람의 아픔이 느껴졌기 때문이란다.

사업을 한다는 것은 처음 생각했던 가정들이 계속해서 처참하게 무너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하드웨어까지 끼워서 하면 더 잘될 거라 생각했지만 더 안 되고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무엇보다 매일 사람을 대면해야 한다는 게 힘들었고 그와 몇 명의 창업자들이 그런 문제 전부를 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었다. 문 두드리고 500개를 수거하며 욕먹을 생각하면 싫었다. 하필 때도 겨울이었다.

불쌍해 보이려고 잠바도 더럽게 입고 진동 드라이버 가지고 갔어요. 2005년이었죠.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면 도배하는 아줌마가 있었어요. 같이 차를 마시기도 했죠..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는데 집에 들어가서 욕 안 먹으려면, “101동부터 108동까지 다녔는데, 여기 107동이 전망이 제일 좋다고 말하면 굉장히들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욕 안 먹는 방법까지 터득했죠. 동별로 팀을 짜서 도는데 누가 하고 싶었겠습니까. 밑에 있는 직원들은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을 겁니다. 40명에서 50명 정도였고 하드웨어 팀은 납땜을 했고 AS는 전 직원이 했습니다. 그거 하면서 사업에 대해 아이템을 무턱대고 시도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음성인식이 만만치 않게 느껴졌구요. 사업하다 처음으로 회사가 이렇게 무너질 수 있겠구나, 무너지면서 손해배상까지 오면 정말 어려워질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때 잠 못 자고, 아침에 일어나기 싫은 기간을 몇 개월간 보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고,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끈기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2005. 김길연 사장은 결국 SL2를 정리했다.

첫 창업에 실패했지만 청년 김길연은 여전히 젊었다. 2005년 회사를 정리한 뒤 그는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에 입사했다. 대학 시절부터 프로그램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직장 생활에서도 자신의 기술분야 전문성을 살리는 일을 하면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큰 조직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에게 (비록 실패했지만) 창업 시절의 자유로움에 대한 그리움만 더 크게 했다. 결국 짧은 직장 생활을 청산하고 그는 2006년 다시 회사를 차렸다.

아이템을 뭘로 할까 생각하면서 그는 기술 분야이면서도 여러 분야로 확장이 가능하고 핵심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가 어딘지 고심했다. 일단 돈을 좀 벌어야 했기 때문에 소위 SI라고 불리는 외주 용역도 닥치는 대로 맡아서 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날 문든 동영상이 점점 중요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색을 하다 보니 동영상이 쌓이는 데 사람들이 이런 동영상을 찾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거죠. 물론 동영상도 검색하는 것이 있긴 하지만 동영상의 제목, 즉 텍스트를 보고 찾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은 글로벌이 안되고 남의 회사 SI밖에 안될 것이라고 판단했죠. 그러면 결국 동영상 화면만 갖고도 검색이 가능해야 하는데 그게 되려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다

정보기술 업계에서 많이 이야기하는, 컴퓨터로 돈을 버는 원칙이 있다. ‘나는 잠을 자도 컴퓨터는 돈을 벌어오는 구조여야 한다는 것. 글로벌로 가려면 기술적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 확장성 있고, 기술적 차별성 있으며 SI가 아니어야 한다. 김 사장은 창업 실패를 겪은 뒤 두번째 창업에서는 이런 원칙을 하나씩 세워갔다.  

 이만하면 되겠다 싶었지만 창업을 하면서 검증을 받고 싶었다. 카이스트 출신으로 벤처 창업계의 전설로 통하는 장병규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 대표를 찾아갔다. 당시 장 대표는 본엔젤스를 정식으로 설립하기 전 엔젤 투자를 진행하고 있었다. 장 대표를 찾아갔을 때 김 사장은 얼마쯤의 기대가 있었다. “그래도 학교 선후배고,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이런 기대는 첫 만남부터 여지없이 깨졌다. 장 대표는 김 사장을 만나자마자 대뜸 물었다.

이 분야에서 대표적인 경쟁사가 어디죠?”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별로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100% 없다고 확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 자리에서 답이 나오질 않았다. 사업 검증 및 투자 요청차 찾아갔던 첫 만남은 이렇게 5분여 만에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두 번째로 찾아갈 때 김 사장은 단단히 준비를 했다. 경쟁사들의 동향에 대해 나름대로 심도깊은 조사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만나자마자 장 대표는 경쟁사는 묻지도 않고 다른 것을 먼저 물었다.  “특허 문제는 어떻게 할 건가요?”

이 질문에도 김 사장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그대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세 번째 만날 때부터는 장 대표가 어떤 질문을 할 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팀이 어떻게 구성돼 있나요그래도 이번 질문에는 답변할 거리는 있었다. 하지만 장 대표는 팀 구성을 듣더니 팀 구성원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점을 일깨웠다. 그 부족함을 메우는 게 다음 번 만남의 조건이었다.

처음엔 오기가 생겼지만 계속 퇴짜를 맞으면서 오히려 마음을 비울 수 있게 됐다. 네 번째로 찾아가자 장 대표는 기술 개발 계획을 물었다. 질문의 양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다섯 번째로 찾아가자 장 대표는 향후 발생할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 시나리오를 어떻게 세웠는지 확인했다. 다섯 번의 확인이 지나고 나서도 장 대표는 바로 투자를 결정하지 않았다. 장 대표는 소프트뱅크벤처스의 문규학 대표를 소개시켜줬다. 문 대표는 오랫동안 벤처 기업을 인큐베이팅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 대표의 기대대로 문 대표는 소프트뱅크 소속이면서 엔써즈에 들어가 일을 하고 양사의 관계를 이어줄 청년 두 사람을 파견했다. 이 두 사람이 스탠퍼드 대학 출신의 셔먼 리와 에빅사라는 벤처 기업을 창업한 경험이 있는 카이스트 출신의 이준표 이사였다. 코딩 능력 뿐 아니라 비즈니스 감각이 탁월한 두 사람이 들어오면서 엔써즈는 팀 구성에 있어서도 균형을 잡게 됐다. 

◆웹하드 문제를 해결하다

엔써즈의 원천기술은동영상 검색’. 동영상의 DNA를 분석해 같은 동영상을 판별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검색엔진에서 검색을 하면 제목만 다른 똑 같은 동영상이 수십 개 올라와 있어 필요한 영상을 찾는 것이 어려운데, 엔써즈는 동영상 당 하나씩만 결과를 얻기 때문에 필요한 동영상을 쉽게 찾게 해 준다.

엔써즈는 이런 기술을 기반으로 2008년 하반기부터 동영상 검색 포털 엔써미(Enswer.Me), 온라인 동영상 유통관리 플랫폼 애드뷰(AdView), 콘텐츠 모니터링 및 유통 관리 솔루션 플랫폼-V(Platform-V) 등을 차례로 시장에 선보였다.

이중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플랫폼-V. 엔써즈가 이 플랫폼을 개발한 이유가 중요하다. 엔써즈는 본래 동영상 검색에 특화된 회사였다. 하지만 검색을 위해선 그에 걸맞는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기껏 검색을 했는데 그 동영상이 불법콘텐츠라서 보는데 제약이 있거나,그걸 다운받았다가 문제가 생기거나 아니면 나중에 찾아보니 사라지거나 하면 되겠습니까?”

허가받지 않은 채 불법으로 복제돼 유통되는 방송 콘텐츠를 비롯해 불법물이 판을 치는 동영상 시장을 이대로 두고선 동영상 검색 시장은 꿈도 못 꾸겠다고 생각한 김 사장은 아예 합법적인 동영상 시장을 만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웹하드가 가장 문제였다. 2009년 초까지 국내 130-140여개에 달하는 웹하드는 대부분 방송사나 영화사 등 콘텐츠 제작사에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서 유통되는 영화,드라마,뉴스 등 다양한 동영상이 합법적으로 거래되고 이를 통해 방송사를 비롯한 저작권자,유통사가 모두 이익을 볼 수 있다면 이 시장이 열릴 것으로 판단한것이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 일을 엔써즈는 해냈다. 80여개에 달하는 웹하드와 방송사,엔써즈가 계약을 맺고 엔써즈의 독자적인 저작권 관리 솔루션을 웹하드에 2009년말부터 적용키 시작한 것이다.웹하드는 방송 콘텐츠를 합법적으로 유통할 수 있게 됐고 이용자들은 안심하고 다운로드할 수 있게 됐으며 방송사들은 뜻하지 않은 수익을 얻게 됐다. 엔써즈도 솔루션 사용료 및 일정 수수료를 얻게 됐음은 물론이다.

 엔써즈는 한 분야의 기술에서 가장 앞서면 새로운 시장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엔써즈의 동영상 검색 및 저작권 관리 솔루션에 대한 기술은 저작권 문제를 해결함은 물론 인터넷에서 동영상과 관련된 각종 통계치를 잡는데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최근까지 동영상 분야의 가장 큰 애로 사항 중 하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얼마나 뿌려지고 어떻게 소비되는지 전혀 파악이 안된다는 거였다. 대용량 데이터를 모니터할 수 없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엔써즈의 기술로 동영상을 통계화, 온라인시청률을 수치화할 수 있게 됐고 여태 모호했던 광고단가도 매길 수 있게 됐다. 엔써즈는 불법 동영상을 정식 수익 채널로 삼을 수 있는 길을 연 셈이다. 

◆구글 이기는 회사 만들어 보자

엔써즈는 2011년 영어권 최대 커뮤니티 숨피를 인수했다. 한류를 기반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한류 콘텐츠의 핵심은 사진과 동영상. 엔써즈는 특히 동영상에 강했다. 하지만 막상 사업을 확장하려고 하니 벤처기업의 역량으로는 서비스 개발과 인프라 구축, 네트워크 확장 등을 한꺼번에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점점 명확해졌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와 김일영 KT 부사장이 갑자기 찾아왔다. 2011년 봄이었다.

두 사람은 김길연 사장에게 다짜고짜 말했다고 한다.

구글을 이길 수 있는 회사를 같이 만들어 봅시다.”

뜻밖이었지만 그 큰 뜻에 마음이 움직였다.

내심 동영상 분야에서는 우리가 세계 최고 기술을 갖고 있어 잘하면 유튜브를 뒤집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KT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얘기에 무척 놀랐죠.”

KT를 만나면서 김길연 사장의 꿈이 일단락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갖고 있던 꿈은 더 커졌다. 매각 관련 자료에 상세히 나오진 않았지만 김 사장이 자신의 지분 전부를 KT에 판 것은 아니다. 소프트뱅크 역시 갖고 있던 지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엔써즈는 KT와 김 사장, 소프트뱅크의 균형 아래 세계 시장에서 동영상으로 구글을 뛰어넘는 회사를 만들어나갈 꿈을 품고 있다.

김길연 사장의 취미는 조깅이다. 갈 때는 뛰고 올 때는 걷는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뭘까.

대망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말을 타고 가다가 오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이 생각나서 나름의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저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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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이라고 하기엔 업력이 꽤 됐다. 이미 돈을 벌어서 자체적으로 조달해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 하루하루 돈 한 푼이 아쉬운 스타트업들하고는 많이 다르다. 그런데도 이 회사를 스타트업 코너에 소개하는 것은 이 회사가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창업 후 지금까지 고객사들의 브랜드 디자인 작업을 해 왔던 이 회사는 최근 자체 서비스를 준비해 자사 브랜드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회사로 변신하고 있는 데어즈 윤반석 사장을 만났다.

◆디자인으로 세상에 공헌하고 싶다

윤반석 사장은 단국대학교 시각디자인과 02학번이다. 창업을 한 인물들을 만나다보면 자신의 전공에 천착해서 그 분야에서 고수가 된 뒤 세상에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윤 사장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창업을 할 때 확실한 주특기가 있는 경우인데 윤 사장의 경우는 디자인이었다.

 그는 삼성의 양대 멤버십으로 통하는 삼성소프트웨어멤버십과 삼성디자인멤버십 중 디자인멤버십 출신이다. 서류부터 면접까지 4차례에 이르는 전형 과정을 거쳐 삼성디자인멤버십이 됐다. 자신의 전공을 살리면서 디자인 능력에 대해 검증을 받는 방법으로 그는 국제 대회에 도전하는 길을 택했다. 레드닷, iF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상 등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 진출, 5차례나 상을 받았다. 국제대회 수상자로 이름이 알려지고 실력있는 사람들과 경쟁하고 교류하면서 문득 그는 시각디자인 솔루션이 사업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디자인에 대한 수요는 많지만 이것을 제대로 풀어내는 사업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다. “횡단보도를 미처 못 보고 지나치는 바람에 딱지를 뗀 적이 있어요. 그런데 횡단보도가 의외로 운전자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죠. 당시 경찰도 인정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때부터 횡단보도를 연구하기 시작했죠.”

 윤 사장은 2008년 12월 그의 말에 따르면 ‘무작정’ 창업을 했다. 창업의 첫 아이템이 횡단보도 디자인. 현소민 팀장 등 단국대 시각디자인과 후배들이 합류했다. 이들은 지금의 횡단보도 시스템이 정작 횡단보도를 잘 보고 주의해야할 운전자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착안해 다른 나라의 사례들을 들여다봤다고 한다. 횡단보도 하나만 봐도 나라별로 색, 모양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꺽쇄 모양의 새로운 횡단보도를 고안한 그는 관청을 다니며 횡단보도 사업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고 한다.

 “그때 관공서를 상대로 일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알게 됐어요. 횡단보도를 바꾸는 문제에 대해 모두들 깊이 공감은 했지만 실제 일을 진행하기 위해선 너무 많은 단계를 거쳐야했고 허락을 받아야 할 곳이 너무 많더군요. 선뜻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구요.”

 횡단보도를 바꾸는 일은 잘 안됐지만 이 일로 그는 교훈을 얻게 됐다. 민간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 디자인을 혁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이 크다는 것이었다.

◆브랜드와 미디어

삼성디자인멤버십 출신들은 삼성 입사가 ‘보장’까지는 아니지만, 훨씬 간소화된 절차로 상대적으로 쉽게 삼성에 입사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국제대회에서 상을 받은 윤반석 사장 역시 삼성에 입사하는 것은 그의 선택의 문제였을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장담할 수 없는 창업의 길을 택했다. 그와 함께 창업을 한 현소민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삼성디자인멤버십의 일원이었다. 선배를 따라 같이 창업을 한 것이다.

“대기업에 입사하고 나서 열정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제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길이 뭘까 고민하다 창업을 하게 됐어요.”

 물론 쉽지는 않았다. 횡단보도 사업은 관공서를 뛰어다니다 제대로 해 보지도 못했다. 그가 생각해 온 것은 디자인을 세상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알릴까였다고 한다. 윤반석 사장을 만났을 때 그가 회사를 소개하면서 제일 먼저 보여준 것은 ‘브랜드’와 ‘미디어’라는 두 글자였다. 디자인은 결국 브랜드로 귀결된다는 것, 이 때 디자인은 겉 모양을 뜻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와 해당 기업과 제품의 지향하는 바, 가치까지 포함한다. 결국 브랜드 전략으로 가야 하고 이것은 미디어로 표출된다.

 브랜드 전략과 미디어를 핵심으로 삼은 사업이 시작됐다. 데어즈는 주요 대기업들의 e-매거진, 전자책, 마케팅 기획, 브랜드 전략 등의 사업을 했다. 2009년부터 제일기획, LG패션, 고려대학교, 삼성전자 등의 디자인 협력업체가 되면서 사업은 꾸준히 성장했다. 일반 대중들이야 이런 작업을 데어즈가 하는 지 모를 수도 있지만 B2B로 브랜드 전략과 미디어를 담당하면서 사업은 순항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윤 사장은 고객사의 일을 하는 것만으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업의 변화가 필요해졌다. 

◆희대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데어즈는 창업 후 3년 동안 탄탄하게 수익을 내며 회사를 운영해 왔다. 그냥 현재 직원들의 수준을 유지하고 현 사업을 계속할 생각을 한다면 별로 다른 시도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데어즈와 윤반석 사장은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냥 편하게 살 수도 있을텐데, 왜?

 “모바일 혁명이 오는 것을 보면서 이대로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절도 들더라구요. 두번 다시 오기 힘든 엄청난 기회와 시장이 열리고 있어서 할 수 있는게 정말 많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이들이 준비하는 서비스는 모바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터넷이 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아니 살면서 언제 어디서나 부닥치는 ‘선택’이라는 문제에서 서비스를 시작한다. 윤반석 사장이 준비중인 사업 모델을 살짝 보여줬다. 사람들이 결국 네트워킹을 확대하는 것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정보를 얻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것도 결국은 선택을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최종적인 선택은 개인에게 남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많은 것이 결정된다. 그런데 선택을 할 때 좋은 것들 가운데 선택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믿을 수 있는 정보들 가운데 선택을 한다면 리스크도 줄어들고 과정도 더욱 즐거울 것이다. 

 이런 시도는 다른 업체들도 한 바 있다.소셜커머스가 빅히트를 칠 수 있었던 것은 선택을 극도로 제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꽤나 설득력이 있다. 너무 바쁜 현대인들은 그렇게 많은 것, 사소한 것들을 매순간 결정하면서 살 수가 없다. 피곤하다. 선택의 고민을 할 필요없이 좋은 상품을 싸게 살 수 있게 해 주면 그만이다. 데어즈가 준비하는 서비스의 컨셉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커머스에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설명을 듣다보니 선택이라는 키워드만으로도 참으로 여러가지 다양한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준비한 새로운 인터넷 서비스는 5월에 출시된다. PC와 스마트폰에서 모두 쓸 수 있고 소셜커머스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 기존의 다른 서비스와 연결성이 높은 서비스로 고안됐다. 이 서비스를 준비하면서 사람도 두배 가까이 늘었다. 지금까지 투자가 필요없었지만 이제는 외부 투자도 고민해봐야할 시점이 왔다.

 “정보는 무작정 널려 있을 땐 오히려 피곤함만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의 SNS에서는 보다 걸러진, 큐레이션된 정보가 필요합니다. SNS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새로운 시도가 곧 나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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