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은 2007년 NHN을 나와 당시 아이위랩이라는 실험적 성격이 짙은 회사를 차리면서 장기적인 목표로 “벤처기업인 100인을 육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카카오를 설립하고 포도트리에 투자하면서 그의 이런 아이디어는 구체화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2010년 두 회사에 이어 다른 회사에 대한 추가적인 투자나 육성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최근 김 의장을 만났을 때도 그는 “방법을 고민중”이라고만 했었다.

그랬던 김 의장이 방법을 찾은 것 같다. 김범수 의장은 3월 28일 IT분야 초기단계의 벤처기업(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케이큐브벤처스(K Cube Ventures)를 설립한 것으로 확인됐다. 법인 등록을 마치고 투자조합결성에 나선 이 회사는 다음달부터 본격적인 투자 활동을 시작한다. 29일 케이큐브벤처스 대표를 맡은 임지훈 사장과 만나 회사 설립 배경과 향후 계획 등을 들었다. 김주완 한국경제신문 IT모바일부 기자가 동행했다.

◆결국은 엔젤투자가 답

김범수 의장을 작년에 만났을 때만 해도 “벤처투자회사를 설립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인큐베이팅 회사를 설립하는 가능성에 묻는 질문에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만의 다른 방법을 찾고 있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계속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것. 그의 이런 고민은 임지훈 소프트뱅크벤처스 수석심사역을 만나면서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김범수와 임지훈 두 사람이 만난 것은 공식적으로는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프트뱅크벤처스에서 일하고 있던 임지훈 대표는 카카오에 대한 투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2010년 여름 김범수 의장을 만나러 갔다. 사용자가 200만명이 채 안되던 시절이었다. “카카오톡이 대박이 날 거란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당시엔 외부 투자를 받기엔 적절한 때가 아니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 뒤로도 몇 번을 찾아갔지만 투자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작년 10월 카카오가 모바일 소셜커머스업체 로티플 인수에 나서면서 소프트뱅크벤처스에 있을 때 이 회사에 대한 투자를 결정했던 임지훈 대표와 김범수 의장이 다시 만나게 됐다. 임 대표는 개발력이 뛰어난 로티플의 가능성을 보고 이 회사가 생긴지 한 달만에 3억원을 투자했고 서비스를 내놓기 전에 10억원을 추가로 투자했다. 로티플은 설립 8개월만에 카카오에 인수됐다. 소프트뱅크벤처스가 로티플 지분을 상당부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임 대표와 김범수 의장이 마주 앉게 된 것이다. 

 만남이 이어지면서 김 의장은 임 대표의 안목을 평가하게 되지 않았을까. 물론 이것은 김범수 의장이 직접 설명한 부분은 아니다. 임 대표의 이야기를 종합해봤을 때 그럴 것 같다는 추론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공학과 99학번인 임 대표는 졸업후 엑센추어, NHN 등에서 병특으로 병역을 마쳤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을 거쳐 2007년 6월 소프트뱅크벤처스에 합류, 최근까지 여기서 투자심사역으로 활동했다. 경력은 10년이나 됐지만 여전히 30대 초반이다. 국내 창업투자회사 대표들이 대부분 40세 이상인 것을 감안하면 30대 초반인 그의 발탁은 이례적이다. 임 대표는 벤처투자업계에서 선구안이 좋기로 소문난 인물이다.그는 소프트뱅크벤처스에서 5년여 동안 KINX, 처음앤씨, 한텍엔지니어링 등을 초기에 발굴, 투자해 IPO(기업공개)까지 성공시켰다. 또 선데이토즈, 두빅, 바이미닷컴, 인포마크 등 현재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벤처기업들을 초기에 투자하기도 했다. 

 임 대표가 수석심사역으로 일할 때 두드러졌던 점은 창업가들의 창업 동기, 백그라운드 등을 투자를 결정할 때 중요한 요소로 평가했다는 점이다. 특히 창업자의 됨됨이를 가장 많이 따졌다고 한다. 창업자와 창업 멤버를 10번 이상 매번 두 시간 정도 만나 그들의 열정과 집요함을 확인한다. 임 대표는 “특출나고 끈기 있는 창업자라면 실패를 하더라도 다음에 뭔가를 분명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고 말했다. 또 인류를 좀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서비스와 제품을 내놓을 창업자를 선호하다. 이런 사업에는 돈도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결국 연초에 김범수 의장은 임 대표에게 자신이 설립할 투자회사의 대표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 투자회사의 성격을 결정지을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다. 임 대표는 아주 초기 단계의 벤처 투자가 전문인 인물. 결국 엔젤투자가 답이라는 결론을 김 의장이 내렸다는 뜻이다.

◆기업가는 가르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엔젤투자회사이지만 기존 엔젤투자와는 좀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투자 금액. 임지훈 대표는 “보통 엔젤투자자들은 1억에서 3억원 정도를 투자하지만 케이큐브벤처스에는 사실상 투자 상한선이 없다”고 설명했다. 업종의 성격에 따라, 또 필요하다면 5억원, 10억원이라도 투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임 대표는 장병규 사장이 만든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가 매우 좋은 선례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케이큐브벤처스는 인큐베이팅도 할까. 인큐베이팅은 하지 않는다. 

 “아직 사업에 서투르고 잘 모르는 사람들은 조언을 해주고 가르쳐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임 대표는 단호했다. “기업가는 가르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의 이런 생각은 김범수 의장의 기본 인식과 일맥상통한 것 같다. 케이큐브벤처스는 사업 방향을 잡아주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하는 그런 작업은 하지 않는다. 통상의 엔젤투자자보다 큰 금액을 투자하고 네트워킹을 형성하는 것을 도와준다. 

 “우리는 마케팅을 강의로 배우는 사람에게는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보다는 훨씬 뛰어난 사람에게 투자하고 싶습니다. 기업가는 그런 것을 스스로 깨쳐서 알게되는 사람입니다.”

 케이큐브벤처스 사무실은 서울시 역삼동의 카카오 사옥인 C&K 빌딩 4층에 마련됐다. 펀드 규모는 100억~150억원. 처음에는 김 의장과 그의 지인이 투자한다. 투자조합을 결성해서 펀드의 3분의 2 가량을 투자하면 바로 그 다음 투자조합을 결성하는 식이다. 케이큐브벤처스는 투자에만 그치지 않는다. 김 의장은 스타트업 기업에 구체적인 조언도 하고 필요하면 자신의 IT업계 인맥을 동원해 ‘원포인트레슨’도 할 계획이다. 또한 매달 1~2번씩 투자받은 회사들의 구성원들과 함께 난상 토론을 하는 등 같이 고개를 맞대는 자리도 만들 예정이다.

 이름을 왜 케이큐브벤처스라고 지었을까. K는 세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김범수의 K, 카카오의 K, 그리고 코리아의 K다. 정육면체, 세제곱 등의 뜻이 있는, 뭔가 아주 이공계적인 냄새가 나는 큐브


를 여기에 붙였다. 케이큐브벤처스는 엔젤투자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을까. 아직 엔젤투자가 열악한 국내 환경에서 초기기업 발굴의 고수인 임지훈 대표와 큰 그림을 잘 보는 김범수 의장이 어떤 모델을 만들어갈 지 기대된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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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이 창립 1주년 행사로 3월 22일 서울 양재동 포스코센터에서 창업희망토크콘서트를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는 김정주 넥슨 창업자(NXC 대표), 신현성 티켓몬스터 대표가 나와 대담을 나눴습니다. 공개석상에서 잘 모습을 보기 힘든 김정주 대표의 멘트를 따로 뽑아서 정리를 했습니다. 한국경제신문 정소람 기자가 전달한 메모를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사회자의 질문에 김 대표가 답변하는 형식입니다) 김정주 대표가 단상에 등장할 때 박수와 환호성이 텨지는 등 현지 분위기는 '아이돌'의 등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은둔의 창업가라는 별명 맘에 드시나요?
 “맘에 들진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별명이?(웃음) 
 “회사에서 너무 열심히 해서 이런 별명 붙은 것 같다.”

-성공의 키워드
 “꾸준히 오래 해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할 것 같고요. 새로 시작하는 분들도 길게 할 수 있는 일 찾아서 길게 하는 것 그게 성공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

-기업가정신이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처음 시작할 때 도전정신 중요하지만 회사 규모가 커지면 사람들과의 조화가 있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 내외부 고객이 고객으로서 뿐만 아니라 파트너 1년 2년이 아니라 10년 20년 같이 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유저가 가족 만들어서 가족까지 같이 갈 수 있는 것 그게 기업가 정신입니다.”

-창업의 계기를 꼽자면?
 “계기라고 할 만한 것은 따로 없습니다. 집안이 사업가 집안이라서 회사 조직 회사가 만들어내는 가치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 넥슨이 처음 만든 게 아니라 하다 망하고 또 하다 망하고 망하면 학교로 돌아가서 잠깐 있다 다시 나오고 그런 식으로 계속 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회사에서 일하는 게 즐거웠어요.”

-왜 다른 업계가 아니라 온라인게임 선택했나요
 “제가 공부했던 분야하고 일치했다. 저희가 마침 접하고 공부하고 바꿔갈 수 있는 것으로써 좋은 사업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땐 성공 예상했나요
“아직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20대 때와 창업 환경이 달라졌는데요
 “창업 인프라 달라졌습니다. 당시엔 인식 제도 지원이 없었습니다. 회사를 바라보는 시각 달라져서 맥킨지를 그만두고 사업도 할 수 있고 사업 시작하고 봐도 큰 회사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습니다. 90년대 초엔 창업환경 어려웠죠. 하지만 펀더멘털은 변한 게 크게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변 도움 있을 순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 없습니다.

-창업의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했나요?
 “95년부터 2012년이 됐으니 15년이 됐습니다. 20년 해보니까 회사는 3년, 10년이 지나든 여전히 어렵고 하루하루가 힘듭니다. 작년에 일도 많았고 올 초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굉장히 힘들고. 하지만 맷집이 생겨서 혼나면 극복해야지.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생각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삼성 갈 수 있는 좋은 기회 있는데 안 가고 창업하다가 5년 뒤 다시 LG 갈 수 있을까?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극복하는 게 어렵습니다. 굉장히 위험하지만 해보면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창업초기부터 다른 시도, 다른 회사에서 안하는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우린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회사에 학교 같은 시스템이 있죠. 프로그래머인데 악기를 가르치거나 디자이너인데 전혀 다른 문화를 접하고 배우고 그렇게 풍성하게 가는 것이 모토입니다. 회사의 기본 펑션이라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산업이 15만원 10만원 경쟁하는....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면 다르게 갔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업계는 이게 팔리면 팔리고 아니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차별화할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그게 우리 회사일이고 제 일입니다.”

-일본에서 상장돼서 거래 시작했는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서 보면 코스피 코스닥에 상장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상장할 수 있는 시장 많습니다. 게임 회사는 일본에서 상장해보자 하는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아시아에서 더 잘 팔리는 게임이고 그러면 인더스트리의 원류는 일본 게임회사들이고. 선택이었죠. 디자이너가 이탈리아에 가고 싶은 것처럼 말입니다.”

-해외시장 진출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데요, 준비해야 될 게 있다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넥슨의 경우 매출의 반이 해외에서 나온 지가 꽤 됐습니다. 작년에 70%-80% 정도는 해외매출이었습니다. 지금 해외를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저희는 96년에 처음 게임서비스를 천리안에서 시작했어요. 미국 법인이 97년이고 일본 법인이 99년에 시작했죠. 우린 특히나 한국 서비스 갖고는 굴러갈 수 없다고 초기부터 생각해서 해외진출 생각했습니다. 해외를 더 집중적으로 가야되는 업계 선택하는 분들이 꾸준히 하고 오래하면 결국은 해외에서 물건을 팔아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메이플스토리하고 있는 미국법인이나 동경증시에 상장돼 있는 일본 법인은 가서 2-3번 다시 만든 겁니다. 계속해서 다시 두드려야 합니다. 결국은 사주는 사람이 있을 거다라고 믿고 하십시오.

-자금 압박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A가 있으면 B도 있고. 이런게 저희 땐 없었어요. 국내에서 실제로 벤처캐피탈 생겨서 제안서 가져가서 들어주는 게 90년대 말이었습니다. 저는 90년대 초반에 사업을 시작했어요. 당시엔 은행에서 빌리지 않으면 돈을 빌릴 데가 없었죠. 준비해서 시작하고 쌈짓돈으로 하면 집안이 망할 수도 있는데 뭐 그렇게도 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큰 공장 지어서 처음부터 제품 만들어서 하려면 대출받아야 하지만 최근처럼 1인창업 웹 개발 하면 작은 규모로도 할 수 있죠.”

-멘토가 있다면?
“회사를 하고자 하는 분한테 질문 받아보면 막연합니다. 제 생각에 세상에 항상 정답지는 아니지만 참고자료 이런게 항상 있었던 것 같고 어떤 일을 하시든지 분명히 있습니다. 컨닝페이퍼가 있었죠. 일본의 스퀘어가 있고. 그런 알려진 회사들을 뒤져보면 의외로 자료가 있었습니다. 이런이런 행동을 하고 인센티브 시스템이 있고, 이런 규모일 때 이런 정책을 펴서 벗어나더라. 항상 비교할 수 있는 게 있고 저희가 온라인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패키지 하게 되면 역시 참고할 수 있는 게 있는 거죠. 연감 같은 것 1년에 500타이틀 가까이 됩니다. 내가 하려는 업계에서 그 규모와 비슷한 회사를 찾아보면 예상문제지를 찾아보면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

-넥슨의 도전정신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은데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혁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지적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 회사는 밖으로 나가서 창업하는 것을 적극 지원합니다. 우리는 인하우스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회사입니다. 90%이상 인하우스에서 하니까, 오히려 밖으로 나가서 창업하는 것을 지원하려고 합니다. 밖으로 나가서 창업하는 사람이 도끼 들고 적이 돼서 나가는 게 아니라 도전하려고 가는 거거든요.

 넥슨 밖의 도전이지만 실제로는 저희가 한다고 봐주시고요. 한 번 나가서 메이플스토리 같은 경우 성공하면서 다시 우리회사로 들어왔어요. 근데 또 나갔습니다. 네오위즈인가. 결국 그 친구가 다시 회사로 와서 신규사업본부장 다시 하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만 특별한 게 아니라 미국에서 흔히 나오는 거죠.” 

-힘들 때가 언제인가요? 
“정말 친한 친구가 떠날 때 힘들죠. 게임 안 팔릴 때 힘들지는 않습니다. 사실 게임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팔리는 게 너무 당연한 상품이어서 나갔는데 안 팔려서 괴로웠던 적은 없습니다. 지금 저희가 인하우스를 90% 한다고 했잖아요. 실제로 저희가 라인업이라고 준비했던 것은 30개 정도입니다. 실제로 이것을 바라보는 기댓값은 제로에요 ‘저거 잘 될 것 같애’ 하고 기대하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 때마다 상심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한 마디 해 주셨으면.
“살면서 모든 것에 이분법을 적용해서 이건 어려운 일이고 이건 안정적인 일이고.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를 가는 게 전통적이고 훨씬 편안한 길이다, 좋은 길이다, 그러니까 창업은 이상한 사람들이 하는 길이고 망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안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좋은 회사 안정적인 회사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절대 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 회사 가도 문제가 있어요. 동료 마음에 안들 수 있고 심심할 수 있고. 큰 회사에 속해서 일을 할 때는 자기 결정권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이거 하고 싶은데 그건 안 된다고 한다든지. 이게 위험하고 힘든 일이고 저건 안정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회사는 다른 무엇보다 내 결정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해보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죠. 잘 판단하시고 후회안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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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무심코 내뱉는 말이 사실 자신의 속 마음이나 심리 상태를 여과없이 드러낼 때가 있다. 계속해서 일관되게 가면을 쓰고 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계속 가면을 쓰고 산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면을 쓴 그 모습도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특정 정체성의 반영인 경우가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내뱉는 말을 분석하면 어떤 특정 사안이나 현상에 대한 대중의 생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보다 방대한 데이터, 보다 정확한 분석틀이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왜 많은 사람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해 보다 수긍할 만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 가능하다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매우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다. 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으로는 집단적 행동에 대한 예방, 진단, 치료 등이 가능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불가능에 가까웠던 이런 일들이 이제는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방대한 데이터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스타트업 코너에서 이번에 만나는 회사는 바로 SNS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대화, 반응,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욕구와 여론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트리움이라는 회사다.

<왼쪽부터 트리움 김도훈 대표, 이종대 이사, 손상원 이사>

◆사회 현상에 나타난 사람들의 집단 심리
창업자인 김도훈 대표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96학번 출신이다. 사회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정경대(LSE)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회사의 비즈니스란 것도 결국은 대표이사, 창업자들의 관심과 역량, 의지의 반영이다. 그는 사회 현상에서 나타나는 대중들의 심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것을 연구하고 있었다. 황우석 사태가 터졌을 때였다.

 “황우석 지지자들은 왜 언론 등에 의해 황우석 교수의 연구 결과가 거짓임이 밝혀진 뒤에도 계속 그를 지지하고 공식적인 기관의 발표를 믿지 않는 것일까”

 그는 이런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사회심리 분야에서 이것을 연구했다. 애국심? 시기심? 국민성? 무엇 때문일까.

 “군중 심리 중에 황우석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그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일상의 분노를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자기 삶에 대한 항변도 깔려 있었구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인이 노력해도 안된다는 그런 생각이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음모론도 제기됐구요.”

 그는 이런 분석 결과를 정리해 이것을 한국에 있는 후배 이종대 씨에게 보냈다. 상문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후배인 이종대(연세대 경영학과 04학번)씨는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와 삼성전자 영플러스멤버십이 산학협력으로 하고 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현지화 전략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선배의 논문을 영플러스멤버십에서 알게된 손상원(홍익대 산업디자인 02학번)씨에게 보여줬다. 손상원씨는 이 논문을 굉장히 인상깊게 봤다고 한다. 삼성의 영플러스멤버십은 삼성이 주최하는 공모전에 입상한 사람들로 구성된 멤버십이다. 손상원씨는 2007년 최우수상을 받을 정도의 인물이었으니 여러가지로 사업에 대한 생각을 안했을 리 없다. 논문을 통해 세 사람은 일차적으로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연결고리를 발견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세 사람은 김도훈 대표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좋은씨앗’이라는 음식점에서 만났다. 김도훈 대표는 공부를 하면서 얻은 영감을 사업화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고 두 사람과 뜻이 통했다. “좋은씨앗에서 만나 좋은 씨앗을 뿌린 셈이 됐죠” 웃으면서 김 대표가 한 말이다.

◆경영 컨설팅 회사로 출발
2010년 9월 회사는 우선 개인사업자 형태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경영컨설팅으로 사업 방향을 잡았다.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이것을 기업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컨설팅의 새로운 분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분석한 경영컨설팅이 이들이 처음 잡은 사업이었다.  

 그런데 경영 컨설팅을 하다 보니 자동화하는 작업이 점점 많아졌다. 분석 결과를 유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디자인 작업의 필요성도 늘었다. 디자인 분야와 기술을 총괄할 사람들이 더 필요했다. 개인사업에서 2011년 3월 회사를 법인으로 전환하던 시점에 필요한 사람들이 회사에 왔다. 김태준씨와 정영화씨다. 김태준씨는 모든 제품 디자인을 맡게 됐고 정영화씨는 비주얼 디렉터가 됐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김남혁씨는 인턴으로 회사에 입사했지만 탁월한 능력으로 회사의 기술 분야를 총괄하는 최고기술책임자(CTO)의 자리에 올랐다.

 돈은 어떻게 조달했을까. 법인을 설립할 때 자본금 3000만원으로 시작했다. 그 뒤로 한번도 투자를 받지는 않았다. “투자받지 않고 매출 계속 내면서 버틴 거죠. 지금은 투자받는 것을 고민하는 시기입니다.”

 창업멤버 중 이종대 이사는 비즈니스 허브 리드를, 손상원 이사는 크리에이티브 허브 리드를 맡았다. 사장인 김도훈 대표는 리서치 허브 리드를 맡고 이 세가지를 이어보자는 뜻에서 회사 이름을 트리움으로 지었다. 법인 전환 후 이 회사는 경영컨설팅에 머물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인 주제에 대한 폭넓은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 회사 경영 컨설팅 뿐 아니라 정부기관, 언론사와의 일도 수행한다.

◆관계 분석에서 언어 분석으로
사회심리학을 전공으로 한 김도훈 대표는 시맨틱분석방법론을 이용해 논문을 썼다. 관계 분석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SNS 분석을 하면서 점차 언어 분석이 중심이 되고 있다. 언어 분석은 훨씬 깊은 난이도를 요구하기 때문에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 

 “예를 들어 새누리당이 당명을 개정했을 때 소셜분석을 해보니 75%가 찬성했다고 나온 그런 결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보니 이런 결과는 언어의 맥락, 반어법 등이 전혀 분석이 안됐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습니다. 언어 분석에는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맞는 말이다. 같은 말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언어 분석을 하려면 그래서 문장이나 단어 자체보다 대화나 글이 오가는 상황을 더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그런 것을 계량화해서 분석 틀을 만들 수 있을까. 현재로선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게 트리움의 몫이다. 

 트리움은 굉장히 민감한 분야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분석하기로 작정한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대부분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민감한 이슈인 경우가 많고, 이런 것들을 분석한다는 이유만으로 돌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트리움은 사업을 할 때 명확한 원칙을 세우고 출발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리 결론을 짜맞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존 소셜분석 회사들 중에는 틀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 짜 맞추게 되죠. 우리는 문제를 어떻게 하면 잘 해결할 것인가에 중점을 뒀습니다. 그러면 틀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자는 그런 원칙도 세웠죠. 마지막으로 정당한 대가를 받겠다는 원칙도 세웠습니다. 그냥 공짜로 해 주고, 싼 게 비지떡이라는 그런 사업은 하지 않겠다고 한 거죠.”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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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WC 2012 전시장 방문 후기

뉴미디어 세상 2012. 3. 12. 08:58 Posted by wonkis
현지에선 졸음과 싸우며 당일치기로 기사 막고, 돌아와서는 시차로 헤롱거리느라 진작에 올린다는 것을 못 올렸습니다. MWC가 폐막하고도 열흘 정도 시간이 지났지만 이번 MWC2012에서 보여진 중요한 흐름들을 간단하게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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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 하루 전날 전시장을 방문해 부스를 잠깐 둘러볼 수 있었지만 제한된 곳이 대부분이어서 사실 이번 MWC2012에서 온전히 전시장을 둘러본 것은 27일과 28일, 이틀이었다. 이틀 동안 보기에는 전시장 규모가 너무 컸고, 참가한 업체들도 너무 많았다. 그래서 직접 볼 수 있는 곳은 직접 확인하고 규모가 작거나 크게 눈길을 끌 만한 것이 많지 않은 부스는 전시장을 찾은 업계의 다른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었다. 28일 오후 5시경, 삼성전자와 ZTE 부스 사이에서 부스에 참여한 국내외 기업 관계자들(삼성전자 퀄컴 SK텔레콤 소니 LG전자 LG유플러스 등)과 모여서 MWC2012에 대해 견해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약간씩 엇갈리는 부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의견들이 비슷했다.

◆더 이상 전시회에 신제품은 없다?
 “왜 이렇게 볼 게 없지??”  일단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분명히 작년까지는 ‘어디어디 부스를 가봤냐’는 멘트를 하는게 MWC 전시장에서 만난 사람들 간의 첫 인사이곤 했다. 아무래도 처음 등장하는 제품들도 많고 눈길을 끌거나 흐름에 변화를 줄 만한 제품, 서비스 등이 출품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는 그런 게 없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에게 ‘어디를 가봤더니 뭐가 재밌더라’는 투로 이야기할 만한 게 거의 없었다.”

 마치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듯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이 전시장 부스에 나타나 재미있는 발언을 했다. 최 부회장은 MWC 2012 SK텔레콤 부스에 나타났다가 기자들과 마주쳤다. 갤럭시S3를 이번 전시회에서 왜 공개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중국업체들이 전시장에 나와 있으니) 긴장도 되고 그렇지만 (이들은) 과거 10년 전에 우리가 했던 일을 그대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중국업체들이) 바로 베끼지 않는가. 지금 온 사람 대부분이 경쟁사 사람일 것이다. 안은 못 베끼지만 외관은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내놓는다”고 말했다.

<중국 화웨이는 MWC 2012에서 삼성전자, SK텔레콤 사이에 부스를 마련하고 참가업체들 중 가장 다양한 단말기를 전시했다. 아몰레드(AMOLED) 디스플레이를 갖춘 초슬림 어센드P 시리즈 스마트폰 ‘어센드P1’은 세계에서 가장 얇은 스마트폰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삼성전자의 우려가 기우는 아닌 것 같았다.>

 중국 업체들의 약진에 대해선 많은 매체들이 지적을 한 바 있다. 그로 인해 직접적인 신제품 출시가 줄어든다는 효과가 있는데, 현장에서 보면 맥이 좀 빠지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엄청난 전시장을 차려놨는데 별로 새로운 게 없다면 너무 김빠지는 것 아닌가.

 물론 여기에는 MWC의 성격 자체가 좀 변화되고 있다는 것도 꼽을 수 있다. 한달 전에 열리는 가전 박람회 CES에서 미리 관련 내용들이 공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MWC에서 추가로 보여줄 것이 없다는 뜻이다. CES는 신제품을 보여주는 곳, MWC는 본격적인 비즈니스가 이뤄지는 곳으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세주 눔(과거 워크스마트랩스) 대표는 “CES는 예전에 비해 비즈니스 미팅은 훨씬 줄어들었다”며 “최근엔 MWC에서 비즈니스 미팅이 활발한 것 같다”고 말했다.

 최지성 부회장도 비슷한 멘트를 했다. 그는 “MWC는 기본 성격이 제품 발표하는 자리 아니다. 사업자와 미팅하는 자리다”라며 “앞으로 제품이 준비되면 그때 가서 공개하는 등 제품 공개와 출시 시기의 시간적 간격이 짧아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LTE 시대
신제품이나 서비스로서 눈길을 끌 만한 것은 많지 않았지만 모바일의 주된 흐름이 LTE라는 것은 전시장에서도 확연했다. 아직 그닥 많은 나라에서 상용화된 것은 아니지만 LTE는 대세이자 부인할 수 없는 흐름이다.

 주요 글로벌 통신사, 장비업체, 단말기 제조업체들이 LTE 관련 최신 기술들을 대거 선보였다. 이들은 기존 LTE의 한계를 뛰어넘는 속도와 용량을 강조하며 기술 발전을 과시했다. 일부 업체들은 LTE에서 인터넷전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VoLTE(Voice over LTE)의 진화된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퀄컴은 소형 기지국의 네트워크 도달 범위를 확장, 이동 중에도 기존 LTE 기지국 대비 2.2배 더 많은 용량을 전송할 수 있는 기술을 선보였다. 퀄컴은 또 LTE에서 인터넷전화를 하다가 3G망으로 전환해도 통화가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는 VoLTE 기술을 전시했다. 스웨덴의 에릭슨, 일본의 NTT Docomo는 LTE에서 멀티미디어 방송을 전송할 수 있는 기술을 시연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태원 퀄컴코리아 부사장은 “LTE보다 한단계 진화된 LTE-A와 관련된 기술과 장비들이 선보이고 있다”며 “내년만 되도 LTE 다음 세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SK텔레콤은 세계 최초로 이동통신망과 와이파이를 동시에 사용해 데이터를 전송하는 하이브리드네트워크(이종망 묶음 기술)을 전시장에서 시연했다. 이 기술은 서로 다른 통신망을 활용해 데이터를 빠르게 전송하는 방식이다. 이론적으로는 두 통신망의 속도를 합한 것 만큼의 빠른 속도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와이파이와 LTE 망을 묶을 경우 와이파이 속도와 4G LTE 속도를 더한 속도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데이터를 두 망으로 분산해 보내면서 그만큼 빨리 전송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의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최적화된 단말기가 나와야 한다. 앱을 다운로드 받아 구현할 수도 있고 폰을 만들때 소프트웨어에 내장시키는 방법이 있는데 후자가 훨씬 안정적이다. 안정적으로 구현되지 않으면 통신사는 서비스를 하지 못한다. 

◆RCS, 아직도 갈 길 먼 통신사들
이번 MWC에서 가장 알쏭달쏭했던 주제 중 하나가 RCS다. RCS는 아주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Rich Communication Suite의 약자인 RCS는 (번역하기가 상당히 애매하지만) 일종의 모바일통합커뮤니케이션 서비스다. 음성 통화를 하다가 재밌는 동영상이나 사진을 상대방에게 바로 전송해 같이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주소록만 봐도 상대방이 통화중인지, 전화를 꺼 놨는지 켜 놨는지, 회의중인지 부재중인지 알고 실시간 채팅을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냥 카카오톡과 같은 모바일메신저에 음성통화, 파일전송 등을 추가해 확장한 개념으로 보이기도 한다. 

 MWC 2012의 주최측인 전 세계 통신사 및 장비업체 제조사들의 연합인 GSMA는 RCS의 글로벌 브랜드를 이번 MWC에서 공개했다. 이름은 JOYN. 상용화한다는 계획도 나왔다. 스페인의 첫 상용화에 이어 올해 안에 한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상용화가 시작된다. RCS가 장착된 폰을 쓰게 되면 따로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 전 세계에서 RCS가 상용화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서비스가 정착되면 이론적으로는 단말기의 제약도, OS(운영체제)나 통신사의 제약 없이 서로 번호만 알면 채팅하고 동영상을 공유하고 사진을 전송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정착되려면 어마어마하게 험난한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해 당사자들이 너무 많아서 순발력있게, 공통의 이익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지 상당히 불확실하다. RCS가 어느 정도 효과를 보려면 글로벌하게 많은 사용자를 확보해야 할 것인데 이를 위해선 우선 각 국에서 의미있는 사용자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까지는 국내 시장만 보더라도 카카오톡 틱톡 라인 등 벤처기업이나 인터넷 회사들이 만든 모바일 메신저와 경쟁하기에도 힘이 부친 상황이다. 작년에 이슈가 됐던 통신사들의 공통 앱스토어 WAC은 올들어 벌써 시들해져 버렸다. RCS에 통신사들이 얼마나 협력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이유때문에 한편에서는 통신사들이 다른 방법을 모색하려 한다는 추측도 나온다. 한편으론 RCS를 추진하면서도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도 할 수 있다. 최근 SK플래닛이 틱톡을 개발한 벤처기업 매드스마트를 인수하려한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는데 통신사들의 복잡한 심정을 대변해주는 사례라고 보여진다. 이름만 들어도 친숙한 여러 모바일메신저를 비롯, 외부 개발자들이 만드는 다양한 서비스들에 비해 RCS는 이름부터 너무 어렵다. 한 통신업계 관계자는 “RCS는 일단 이름부터 친숙하지 않다”며 “소비자들이 얻을 수 있는 혜택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반면 접근하기는 어려워 회원 모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부스에는 이번에도 사람이 많았다. 갤럭시노트 10.1과 갤럭시노트가 전부였지만 체험해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갤럭시노트 10.1은 펜 쓰기 기능 등이 갤럭시노트에 비해 향상됐지만 아직은 체험판이다보니 제품 자체에 에러가 많았다.>

◆그래도, 모바일을 재정의하다
 단말기 부문에 있어서 감동이 확 줄어들고 있는 것은 스마트폰의 형태에 벌써 식상해졌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가끔 해본다. 휴대폰 업계에서 10년 동안 휴대폰 상품 기획을 했던 신의현 키위플 사장은 “지금 스마트폰의 모습은 너무나 획일적”이라며 “지금은 이것이 대세인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 그것을 예상하고 주요 휴대폰 제조업체들은 내부적으로 다양한 기획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똑같은 스타일의 폰을 쓴다는 것은 사실 조금 생각해보면 이상할 수 있다. 분명 다른 수요나 욕구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누가 먼저 찾아낼 것인가. 이번 전시장에서 삼성전자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극대화하는 노트 시리즈를 내밀었다. LG전자는 화면 비율을 달리했다. 하지만 이것이 단말기의 획일성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여러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MWC 2012는 당초 내세웠던 모바일을 재정의하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하다. 기술 일변도의 발전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에 근접하면서 보다 자유롭고 더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더해가는 것, 스마트함을 초월하는 것. 모바일은 이렇게 달라지고 있다. MWC 2012 모바일 재정의에 대한 글은 '모바일을 재정의하다-MWC 2012 참관기'를 참고해주시길.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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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출장을 갔다가 현지에서 감귤을 사 갖고 온 적이 있었다. 정말 맛있었다! 얼마 뒤 동네 마트에 갔더니 마침 같은 상표의 감귤이 있길래 냉큼 사다 먹었다. 그런데 그 맛이 나질 않았다. 왜 그럴까.
 
 같은 지방에서 난 농산물을 먹었을 때 현지에서 먹었을 때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유통 과정에서 상품의 신선도가 떨어졌거나 같은 산지에서도 품질이 좀 떨어지는 것을 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산지직송 상품을 찾는다. 하지만 산지 직송 물품을 구매해서 집에서 받아보기란 아무때나 편하게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일단 그 상품에 대한 신뢰가 없다. 얼마나 품질이 좋은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가격이 정말 싼 것인지 회의감도 든다. 시행착오를 계속 하느니 귀챦다는 생각에 그냥 마트에 가서 사먹고 만다.

 헬로네이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들이 그저 농수축산물의 산지 직거래 사이트 정도를 오픈할 거였으면 아마 거창하게 사업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는 차별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좀 다른 방향성을 갖고 출발했다.

◆왜 이렇게 비싸고 맛이 없지?
서울대 농경제학과 05학번 좌종호씨는 전공 수업 과제 때문에 시장조사에 나섰다가 깜짝 놀랐다. 산지에서 10㎏ 당 3500원에 불과하던 경기도 여주산 가지가 소매시장에선 3만6000원이나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복잡한 유통과정 때문이었다. 가격은 10배가량 높아졌는데 농민들 손에 쥐어진 돈은 몇 푼 되지 않았다. 신선도는 되레 떨어지고 맛도 없어졌다.  

 “제가 시골 출신이라서 산지에서 과일을 자주 먹어요. 그런데 서울에 와보니 똑같은 과일이 오히려 맛은 떨어져 있는데 값은 두 배가 된 거에요.”

 좌종호씨가 계산해보니 유통 마진은 평균적으로 80%에 달했다. 많은 고정 소비자를 확보한 유통 매장일수록 이 마진이 커졌다. 유통 마진이 원가를 넘어가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그와 고민을 같이 한 사람이 포항공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AT커니를 거쳐 쿠팡에서 일하고 있던 박병열씨였다. 

 박병열씨는 국내에서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고 있었다. 명문대를 나와 유명 컨설팅회사에 다니고 있었던 그는 아마 창업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외국에 나가 공부를 더 하거나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경험을 쌓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다. AT커니에 있으면서 그는 일이 너무 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죠. 그런데 저에게는 컨설팅 일이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컨설팅을 받는 회사들을 보면 대부분 답을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걸 다만 외부에서 확인을 하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맥이 빠질 때가 많았습니다. 한편으론 별로 세상 경험도 없는 제가 무슨 컨설팅을 하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AT커니를 6개월여만에 나온 그는 소셜커머스업체 쿠팡에 취직했다. 소셜커머스 사업은 그에게 컨설팅보다 훨씬 큰 재미와 보람을 줬다. 하지만 소셜커머스라는 영역은 이미 많은 업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경쟁이 치열한데 마진이 박한 곳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그는 때마침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좌종호씨를 만났다. 그의 사업 아이디어를 듣고 무릎을 쳤다. 둘은 창업을 하기로 했다.

◆농촌으로 달려간 네 명의 총각들
뜻은 세웠지만 사람이 더 필요했다. 좌종호씨가 사람을 데리고 왔다. 서울대 농경제학과 10학번인 조태환씨다. 같은 학교 같은 과 후배인데다 마음이 잘 통한다는 게 장점이었다. 조태환씨는 서울대학교 학생 온라인 커뮤니티인 스누라이프에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을 간략하게 올렸다. 그런데 뜻밖에 이 글을 보고 서울대 경제학과 05학번 유준재씨가 같이 일을 하고 싶다며 이들을 찾아왔다. 창업 멤버 4명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구성원을 완료한 이들은 일단 사업 기획을 하고 헬로네이처라는 사이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
엔 변변한 사무실조차 없어 친구 사무실과 커피숍을 전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무실이 아니었다. 처음 농산물 직거래를 하기 위해선 공급자를 확보하는 게 필수였다. 그것도 믿을 만한 공급자를. 사업 의지는 충만했지만 노하우는 없었다.

 “어떻게 공급자를 섭외했나요?”
 “딱히 방법이 없더라구요. 무작정 시골로 내려갔죠.”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강원도, 제주도를 중심으로 농산물 산지를 누비고 다녔다. 그런데 이들은 시골에서 어슬렁거리기엔 너무 젊었다. 아니 어렸다. 젊은 청년들이 떼지어 다니니 사기꾼 취급을 하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이러다간 안되겠다 싶더라구요. 그래서 사람들 속을 파고들기로 했어요. 강원도 산골에 가서 농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도왔죠. 김장 김치를 함께 담그고 막걸리도 나눠 마셨어요. 그러면서 하나 둘 씩 사람들 마음을 얻었죠.”

 이렇게 계약한 농가가 20여곳에 이르렀다. 농가를 확보하면서 서비스를 오픈했다.  계속 변변한 사무실도 없이 지내다가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 주관한 창업보육프로그램에 선정되는 행운이 주어졌다. 100여개 팀 중 4팀을 뽑는데 헬로네이처가 선정된 것이다. 덕분에 지난해말 무료로 상암동DMC(디지털미디어시티) 누리꿈스퀘어에 사무실도 얻었다. 2012년 1월에는 정식으로 법인도 설립하고 공식 출범했다.

◆농촌과의 상생모델 만들겠다
믿을 만한 농가를 어떻게 확보하느냐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사람 얼굴 보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좀 친해졌다고 아무 물건이나 들여올 수도 없다. 그런 식으로 하면서 검증되지 않은 농산품이 마구 들어오면 소비자들이 떠나게 된다.

 인터넷에서 직거래 상품을 찾을 때 소비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상대방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좀 비싸도 마트에 가서 사 먹는 이유는 그래도 대형 마트들은 품질 검수를 거쳐 어느 정도 수준 이상 되는 제품을 들여온다. 그래서 헬로네이처는 자체 품질위원회를 만들었다. 구성은 물론 외부인으로 했다. 1기 품질위원회는 요리블로거 김진옥씨와 전통음식 조리사 김선미씨. 3월5일부터 시작된 2기 품질위원회는 김선미씨와 이용자 중 지원을 받아 2명을 선정, 총 3명이 활동하고 있다.

 헬로네이처가 삼고 있는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 헬로네이처에서 상품을 판매할 때 ‘헬로네이처의 ***’이 아니라 판매자의 실명을 걸고 판매를 한다는 점. 그리고 판매가 일어날 때마다 달린 질문이나 후기 등을 취합해 생산자에게 직접 전달한다. 소비자들의 제품에 대한 피드백을 직접적으로 받은 생산자는 이를 참고해 다음 농사를 지을 때 개선할 수 있다. 또 생산자는 자신들이 생산하는 농산물에 대한 각종 정보를 원칙적으로 게시해야 한다. ‘내가 먹는 농산물이 누가 어떻게 생산한 것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스마트한 소비자들의 수요에 발맞춰 친환경농산물 인증 여부와 더불어 농약과 화학비료 사용 여부 등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단순 ‘판매’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와 생산자가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채널을 열어준 것이다. 헬로네이처는 수확철이 되면 농촌관광 서비스를 기획해 수확 체험 등을 제공할 계획이다. 

 이처럼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자신의 브랜드를 걸고 헬로네이처에서 농산품을 판매하는 것이 다른 CJ오쇼핑 등 대기업들이 하는 직거래 서비스와 다른 점이다. 헬로네이처는 직거래 쇼핑몰을 넘어선 또 다른 지향점을 갖고 있다.

“직거래만 갖고는 안정적인 매출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희는 2단계로 정기 배송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매주 또는 매달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 등을 일정 분량 정기적으로 구매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품질이 보증된 농산품을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상품을 기획중입니다.”

 3단계도 있다. 일명 패키징 서비스다. 직거래 상품은 보통 한꺼번에 물건을 많이 구매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 그나마 배송비라도 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로네이처는 소량으로도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을 개발중이다. 정기 배송과 패키징이 결합되면 안정적인 매출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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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가 연내 4G(세대) 이동통신 롱텀에볼루션(LTE) 연내 가입자 400만명을 모으겠다는 목표를 사실상 철회했다. KT는 LTE 부문에서 가입자 확대보다 서비스 품질 향상에 중점을 두겠다고 설명했다.

 표현명 KT 개인고객부문 사장은 28일(현지시각)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12’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연초 이석채 KT 회장이 밝힌 LTE 가입자 400만명은 경쟁사들 상황에 맞춰 얘기한 것”이라며 “내부적으로는 따로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KT는 지난 1월3일 LTE 상용화를 했다. 상용화에 앞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석채 회장은 연내 400만명 가입자를 모으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KT는 현재 서울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LTE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으며 오는 4월까지 전국 84개시에 LTE를 구축할 계획이다.

 표 사장은 목표가 수정된 것이냐는 질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 원래 내부적으로 목표가 설정된 적이 없었다”며 “다만 연초 간담회때 기자들이 목표를 물어보니 경쟁사들과 비슷하게는 하지 않겠냐는 뜻에서 400만명 수준이라고 얘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LTE 가입자 모집을 위해 보조금 많이 풀고 밀어내기로 파는 방식 안하겠다”며 “그 돈을 서비스 품질 향상에 투자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품질 향상을 내세웠지만 표 사장의 이런 발언은 LTE 가입자가 좀처럼 늘지 않고 있는 KT의 초조함을 반영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KT는 현재 LTE 가입자 숫자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10만명이 안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면 경쟁사인 SK텔레콤은 이미 지난달 100만명 가입자를 돌파했고 LG유플러스도 100만명에 도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KT가 현 상태에서 연내 400만명 가입자 목표를 달성하려면 매달 40만명에 가까운 가입자를 유치해야 한다. 네트워크 구축 속도가 가장 느린 KT에게는 버거운 목표일 수가 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LTE를 서비스하고 있는 KT에 비해 SK텔레콤은 이미 전국 30여개 도시에서 서비스를 하고 있고 LG유플러스는 84개 도시에서 서비스가 진행중이다.

 개인고객부문을 책임지고 있는 표 사장이 LTE 가입자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다고 뒤늦게 해명(?)을 함에 따라 당초 400만명이 목표라고 했던 이석채 회장이 머쓱해지게 됐다. 물론 한편에서는 이 회장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표 사장이 나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현재로서는 KT가 당초 목표를 달성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무리하게 달성하려고 할 경우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어야 하는 등 만만치 않은 출혈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해프닝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연초에 당당하게 목표치를 얘기했다가, 그것도 회장이 이야기한 것을 개인고객부문 사장이 뒤집는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니다.

 이런 해프닝의 근원은 KT가 처음부터 LTE 서비스를 무리하게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KT가 올초 LTE 서비스를 시작할 때 서울 시내, 그것도 고작 3개 구 정도에서만 서비스가 가능한 상태에서 시작했다. 이 정도면 사실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시범 서비스 정도? 물론 이것은 역시나 무리를 해가며 LTE 서비스를 한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 등 경쟁사들이 먼저 치고 나간 상황에 쫓긴 측면도 있다. 그래도 KT의 경우는 유난히 좀 심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아직 서울시내에서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KT의 LTE 서비스는 여전히 본격적인 시작도 안했다고 봐야 한다.  
 
KT의 LTE 서비스 목표 설정이 표 사장의 말처럼 이 회장이 질문에 대답하다 우발적으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표 사장이 예상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는 LTE 가입자 현황에 시달리다 그런 답변을 한 것인지는 KT의 행보를 보면 곧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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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 2월27일(월)자 1면에 실렸던 김영삼 아이러브스쿨 창업자 인터뷰 내용의 전문을 싣습니다. 신문에는 지면 사정상 일부만 게재됐습니다. 임정욱 라이코스 대표님을 비롯해 여러분들이 전문을 요청하셨습니다만 제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MWC 2012 취재차 체류하고 있었던 관계로 블로그에 전문을 올리는 게 좀 늦어졌습니다. 그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모두 올립니다. 신문에는 제목을 뽑기 위해 특정 대목을 앞으로 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이 글에는 시간 순서대로 제가 그를 만나 대화한 내용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이번 취재는 윤희은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1차 내용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줬습니다.
(혹시 김영삼 사장이 누군지 모르시는 분은 아마 좀 어리둥절하실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읽지 마시고 이 글 끝으로 스크롤해 내려가면 김영삼 사장이 누구인지 제가 간략히 써 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걸 먼저 본 후 읽으시는게 나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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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아이러브스쿨 창업자를 만나러 가는 길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한 벤처기업가가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문턱에서 좌절한 스토리는 무엇일까. 마음 한 구석에 착잡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를 어떻게 풀어쓸까에 대한 고민은 둘째였다. 너무 자세히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괜한 과거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컸다. 한편으로는 그저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자리가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하면서 나는 점차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는 인터뷰 도중 뜻밖에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저는 금양 정현철 전 사장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의 의도가 어찌됐던 결과적으로 나를 속였고 그로 인해 큰 손해와 엄청난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덕에 저는 사람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 그대로 돈을 벌고 세상이 말하는 대로 성공을 거뒀다면 저는 인간 말종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경영 철학도 없이 남이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사업을 하고 으스대고 돈을 마음껏 쓰면서 기업가가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 아니 그 전에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살았겠죠. 지금 돌이켜보면 금양과 주식 매각 계약을 체결하던 전후의 시점, 저는 인간으로서는 망가진 존재였습니다. 진실한 사랑도 없었고, 삶에 대한 고민도 없었죠. 그러고 보면 그런 일을 겪은 후 저는 오히려 그때보다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말종이 되지 않도록 기회를 준 정현철씨에게 감사합니다.”

 정말 뜻밖이었다. 지난 11년이라는 세월은 그에게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돈도 잃고, 친구도 잃고, 가정도 잃고, 자존심과 명예까지 모두 잃었다. 너무나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며 그냥 생을 마감해버릴까하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인터뷰를 수락한 것은 자신의 실패담이 창업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때문이었다고 한다. 내가 대화 내용 전문으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흔쾌히 동의했다. 많은 것을 초월한 듯한 그런 모습도 보여줬다. 그와 장장 3시간에 걸쳐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원래 창업에 뜻이 있었습니까.

 “창업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정보학과 연구실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었는데 같은 연구실 옆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싸이월드를 만들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인맥 기반으로 하려면 학연이 최고인데 그걸 안하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내가 해보자’고 어느날 결심하고 만들었죠. 연구실에 같이 있던 이춘석, 최병구 두 사람과 같이 각자 50만원씩 내서 150만원으로 PC 사서 개발했습니다.”
▶학교에서 시작한 건가요?
 "그렇죠. 당시 카이스트는 국내에서 손꼽힐 정도로 인터넷 환경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카이스트 출신들 중 많은 IT 창업자들이 나올 수 있었죠. 저희도 학교 밖에서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이트를 오픈하고 나서 얼마 안돼 (회원이 몇 없던 시절인데) 비만 오면 사이트 접속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알아보니 당시 학교에서 건물이 낡아서 누전 우려가 있다고 비만 오면 전기를 내려버렸더군요. 이래선 서비스를 유지하기 힘들겠다 싶어서 PC를 들고 밖으로 나오게 됐죠." 
▶운영비가 많이 들텐데 자금은 어떻게 조달했나요
 “창업하고 얼마 안돼 사무실 전화비를 낼 돈이 없더군요. 집에는 쌀이 떨어졌죠. 할 수 없이 아버지를 찾아가 3000만원을 빌렸어요. 그런데 회원이 아직 1만명도 안됐던 1999년말에 KTB와 금양 두 회사가 저를 찾아왔어요. 투자할 의향이 있는 것 같길래 10억만 투자해 달라고 했죠. 지분 40%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동시에 투자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왜 금양을 택했나요?
 “KTB는 권성문 대표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투자하겠다고 하더군요. 문제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반면 금양쪽은 회사 차원의 투자였습니다. 우호적으로 다가왔기에 좋게 해석했습니다. 금양은 발포제 만드는 중소기업인데, 부산에 근거가 있고 나름 견실한 회사로 알고 있었습니다. 금양이 회원 1만명일 때 10억원을 투자하면서 지분 40%를 가져갔어요.“ 
▶창업 후 얼마 안 돼 최대 주주가 변경됐네요?
 “금양이 단일 최대주주가 된 거죠. 1999년 가을에 창업했는데 그해 말에 투자를 받았어요. 저는 30% 좀 넘는 지분이 있었고 다른 창업자와 직원 등 우호지분을 합쳐 60% 가량 있었어요. 창업자 쪽 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별 문제 없을거라고 봤어요. 제가 너무 경영을 몰랐던거죠. 나중에 알고보니 창업자들이 최대주주 자리는 회사를 매각하기 전까지는 내놓지 않더군요.”
▶다른 회사도 만나 봤습니까.
 “삼성 LG 효성 등 다른 대기업도 만나 투자를 타진해 봤습니다. 다들 투자 의사는 있었어요. 그런데 다들 조금씩만 투자하려 했습니다. 외국 회사들을 만나면서 국내 회사들은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걸 알게됐죠. 국내 기업들, 투자자들은 투자를 했을 때 기존 다른 대주주와 지분 싸움을 해서 이길 정도로만 지분을 확보하려고 하더군요. 회사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해서 인수 뒤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없는 것 같았아요.”
▶외국 기업들은 어떻게 다른가요
 “외국 기업들은 벤처기업을 인수할 때 지분 전체를 인수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리고 창업자의 공로를 인정해 줘요. 지분을 다 인수하고 오히려 스톡옵션을 주고 경영권을 보장해 줍니다. 야후가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금양과 사전 조율이 없었나요
 “금양이 투자하고 5개월이 안돼 2000년 5월에 25만명 돌파했어요. 회원이 너무 빠른 속도로 늘어 추가 투자가 필요해 금양을 찾아갔는데 돈을 더 투자 못한다고 거절하더군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회원이 150만명이 됐어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요. 당황스러웠죠.”
▶야후는 어떤 조건을 제시했나요.
 “야후는 회원 한명당 얼마씩 계산하는 그런 기준이 있었어요. 300만명일 때 야후가 왔는데 300억원으로 시가총액을 산정했어요. 그런데 한달 만에 회사 회원수가 450만명이 되니깐 야후가 그걸 보고 놀라서 일단 가치를 500억원으로 하고 투자하겠다고 하더군요. 야후코리아는 당시 한국 증시에 상장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커뮤니티가 약하다는 게 항상 약점이었어요. 아이러브스쿨을 인수해서 커뮤니티를 키우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금양이 태도가 바뀌었어요.”
▶가치를 그 정도로 평가해준 것에 반응한 거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원래 야후와는 2000년 8월31일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는데 14일에 금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경영권을 보장하고 야후와 같은 기준으로 투자를 한다는 거였어요. 일부 돈을 현금화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도 했죠.”
▶그 말대로 했나요.
 “아닙니다. 그냥 순리대로 하자는 생각에 이미 늦었다고 하고 야후와 계약을 맺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금양을 만나보니 야후와 계약을 안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야후가 100% 지분을 인수하려면 금양 지분도 사야하는데 금양은 팔 생각이 없었어요.”
▶금양이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계약을 무산시킬 수 있는 상황 아니었나요. 처음부터 무리한 계약을 추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후가 저희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정 안되면 창업자들이 갖고 있는 60% 지분이라도 사겠다고 했어요. 금양과의 지분 매각 협상은 그 뒤에 해도 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런데 제가 그걸 거절했어요.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했죠.”
▶금양과는 어떻게 됐나요.
 “최종적으로 야후와 모든 협상이 결렬된 뒤 9월6일 금양과 계약을 했습니다. 지분 11%를 81억원에 금양이 샀어요. 저는 지분을 매각해 당시 30억원을 현금화했는데 이 중 3억원을 직원 몇명에게 나눠줬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확고한 철학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게 멋있는 줄 알았어요. 겉멋만 부린 거죠. 금양은 지분이 51%가 되면서 아이러브스쿨을 자회사로 편입했습니다.”
▶그때 그럼 회사 주인이 금양으로 바뀐 거네요.
 “그런데 그걸 제가 몰랐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제가 아이러브스쿨의 실질적인 최고경영자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현실을 몰랐죠. 경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회원이 너무 빨리 늘어서 당황했고 쫓아가기 바빴습니다. 하루에 몇십만명씩 가입하기도 했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금양 자회사로 편입되자마자 회사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창업자들은 다 회사를 나갔고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도 뭐하러 이 회사에 있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바로 회사를 나갔나요.
 “2000년말에 금양을 찾아갔더니 보유 지분 전부를 사주겠다는 제안을 하더군요. 그러면서 2001년 2월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장 돈을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구요. 2달 정도 뒤에 주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걸 믿었다는 게 이상하네요.
 “믿었습니다. 그 전에 지분을 판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돈을 잘 받았거든요.그런데 그 뒤로 돈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 합치면 160억원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정말 큰 돈이었는데 말입니다.”
▶지분을 팔고 뭘 할 계획이었나요.
 “그냥 학교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회사는 커졌지만 일은 경영은 제 뜻대로 안됐고 이참에 사업하느라 못다한 공부를 마저하려고 했죠. 그런데 결국 돌아가지도 못했어요. 너무 창피했습니다. 학교에서는 내가 돈을 많이 번 것으로 알았고, 심지어 기부 요청도 들어왔는데 저는 매각 대금도 못 받고 세금때문에 빚만 잔뜩 진 상황이었거든요. 그런 걸 왜 그리 신경썼는지. 철학이 없어서 중심도 못 잡았고 그냥 체념하는 심정으로 집에 있었습니다.”
▶세금 문제는 어떻게 된 건가요.
 “세금을 간과한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주식을 양도했으니 세금을 내야하는데 돈을 못 받아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2004년 세금부과 예비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원래 낼 돈은 8억원인데 연체료, 미신고가산세 등이 붙어 24억원으로 불었어요. 잘못하면 있는 재산을 전부 빼앗길 것 같아서 아내에게 이혼을 하자고 했어요. 일종의 위장이혼인데, 얼마 안 가 진짜로 이혼을 했어요. 아내와 처가쪽 식구들이 결국 그 힘든 시기를 견디지 못했어요. 나에게 돌아서는 걸 보면서 피눈물이 났습니다.” 
▶재기 시도를 계속 한 것으로 압니다.
 “돈 벌어서 세금 내 보겠다고 2004년에 아파트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공동구매 사이트 아이티아를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투자 받으러 가도 아무도 투자를 하지 않았어요. 아이러브스쿨을 만들어 그렇게 키워본 경험이 있다는 제 경력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더군요. 시기적으로도 좋지 않았어요. 당시엔 벤처 거품이 완전히 꺼지고 난 뒤 벤처 투자에 대한 반감이 심하던 시절이었어요. 벤처 차리고 3년 지나면 다 사채업자한테 가는 거 모르냐며 외면했습니다. 결국 2005년말 사업을 완전히 접었죠.”
▶그 뒤로 공백이 많았습니다.
 “죽으려고 했습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다시 재혼하지 않았으면 아마 진작에 자살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내는 나와 함께 아이티아를 설립했던 사람이었는데. 처음엔 아이티아를 포기 못하겠다고 하다가 나까지 살려보겠다고 했습니다. 2006년 아는 분에게 오피스텔을 빌려 사업을 하려고 했지만 신용불량자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국내에선 안되겠다 싶어 2010년 중국에서 사업을 시도했지만 잘 안됐구요.”
▶왜 벤처기업에 투자를 안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국내에서는 IT벤처를 아이디어사업이 아니라 단순한 돈벌이수단으로만 생각합니다. 투자를 하고 장기적으로 추이를 봐서 회사를 키워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투자하고 빨리 이익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만 해요. 산업을 장기적으로 못 보니 결국 IT사업이 ‘빨리 피고 빨리 죽는’ 사업이 된 겁니다.”
▶벤처 창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성공을 대비하라’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대개의 사람들이 실패를 대비하지요. 대신 성공에 대해서는 ‘성공하면 성공하는 거지’하고 맙니다. 하지만 성공을 준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성공을 준비하지 않아서 실패했습니다.”

by wonkis


<김영삼 사장은 누구>
김영삼 사장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정보공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1999년 연구실에서 동료 2명과 함께 아이러브스쿨을 창업했다. 아이러브스쿨은 초등학교 친구들을 연결시켜주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란 새로운 개념을 앞세워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회사를 설립한 지 1년도 안돼 500만명의 회원을 모으며 세계 인터넷 사이트 순위를 매기는 알렉사랭킹에서 한국 1위, 세계 3위까지 올랐다.
 2000년 8월 야후코리아가 500억원에 인수를 추진했으나 계약이 무산된 뒤 그는 금양에 지분을 넘기고 2001년초 회사를 떠났다. 하지만 금양측이 지분 매각 대금을 주지 않으면서 주식 양도세를 내지 못한 그는 미납 세금, 이자 등이 더해져 개인 빚이 20억원까지 불어났다. 2004년 아이티아라는 아파트 기반의 SNS를 설립했지만 실패했고 중국에 가서 사업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아 귀국했다. 금양 전 대표이사였던 정현철씨를 상대로 주식매각대금 청구 소송(민사) 1심에서 승소했고 현재 형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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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지난 달 KT경제경영연구소가 운영하는 디지에코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디지에코 측의 양해를 얻어 원문을 제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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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년부터 2000년에 걸쳐 한국 사회를 폭풍처럼 휩쓸었던 벤처붐이 10여년이 지난 지금 재현되고 있다. 신규 창업 기업의 숫자가 10년 전의 기록을 갱신하고 새롭게 도전하는 이들의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하지만 10여년 전과 지금의 벤처붐은 동일선상에서 놓고 비교하기엔 힘든 측면이 존재한다. 10년 전의 벤처붐이 일종의 무분별한 광기가 시장을 지배했다면 최근의 벤처붐은 보다 조심스러운 합리적인 선택에 힘이 쏠리고 있다.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는 “10여년 전의 지나친 투자 열풍으로 인한 쪽박의 경험이 투자자와 기업가 모두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전히 정부 차원의 무분별한 지원에 대한 우려가 높지만 소규모 자본과 적은 인력으로 합리적인 수준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과거 한탕주의식 벤처 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 섞인 예측을 가능케 한다.

◆대학생 벤처 기업가 대거 등장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대학생 벤처 기업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대말 한국 최초의 벤처붐을 일으켰던 인물들은 80년대 초중반의 학번들이었다. 이들은 대기업 등에서 직장 생활을 하거나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와서 창업을 하곤 했다. 그 당시라고 대학생 창업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주류는 아니었다.

 그런데 2010년부터 불기 시작한 제2의 벤처붐 현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대학생 벤처 기업인들이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 윤자영 스타일쉐어 대표, 전해나 애드투페이퍼 대표, 김태우 모글루 대표, 권순범 이큐브랩 대표, 이참솔 로티플 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고등학교때부터 창업을 한 양준철 온오프믹스 대표, 표철민 위자드웍스 대표 등도 있다. 이비호 스픽케어 부사장은 대학시절부터 창업을 해 온 인물이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창업을 하긴 했지만 심여진 스픽케어 사장은 대학 1학년때부터 창업을 준비한 사람이다.

 왜 대학생 벤처기업가들이 이렇게 많아진 걸까? 취업이 어려워지자 창업에 나선 이들이 많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찍부터 창업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이 많아졌다는 점, 이들이 비교적 쉽게 창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는 점을 주된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대학이나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창업 스쿨을 열고 창업 지원을 약속하는 것은 분위기 형성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학생들이 과거보다 훨씬 창업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비교적 쉽게 창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모바일, 인터넷 분야 등에 한정된다. 기존 굴뚝 창업에는 그리 관심이 높지 않다. 20, 30대 창업가들, 특히 20대 대학생 벤처기업인들은 돈 탭스콧이 그의 저서 ‘Digital Native’에서 지적한 바 있는 바로 그 디지털 네이티브들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만지고 자라고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휴대폰을 쓰는데 익숙했던 이 세대들은 모바일이나 컴퓨터 분야에서의 창업을 아주 대단히 어려운 분야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창업에 대한 거부감을 낮춰준다. 

◆처음부터 해외 시장 노린다
그동안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은 국내에서 서비스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다음에 도전한다는 게 정석처럼 여겨졌었다. 투입할 수 있는 리소스가 극히 제한돼 있는 벤처기업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최근 스타트업들은 회사를 설립하면서 거의 동시에 해외 사업을 준비한다. 특히 스마트폰용 앱을 만들거나 모바일 분야의 비즈니스를 하는 경우가 더욱 그렇다. 이런 분야에서는 과거 웹을 기반으로 한 사업을 할 때와 달리 해외 사업과 국내 사업의 차이가 크게 없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마켓과 애플 앱스토어라는 대표적인 두 개의 큰 생태계가 마련된 뒤 해외 사업을 하더라도 굳이 대규모 인력을 외국에 파견한다든가 막대한 리소스를 투입하지 않고도 앱을 만들어 해외 사용자들에게 제품을 알릴 수 있게 됐다. 추가로 들어가는 비용은 그리 많지 않은데 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다면 해외에 진출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앱을 국내외에 동시 출시했는데 해외에서 더 좋은 반응을 얻는 경우도 꽤 있다. 브리드가 만든 어썸노트는 유료 앱이고 비교적 애플 앱스토어에 늦게 진입했지만 해외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젤리버스라는 벤처기업이 만든 큐브로라는 사진 편집 앱은 국내 사용자 못지 않게 해외 사용자를 모았다. 김무궁 사장이 설립한 OGQ에서 만든 배경화면 앱은 대부분의 사용자가 해외 소비자들이다. 언어로 이해할 필요가 없는 말 그대로 배경 화면에 관련된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장벽이 없다고 해도 어느 정도 해외에서 인기를 끌면 소규모라고 하더라도 해외에 사무실을 내거나 현지 업체와 제휴를 할 필요성은 점점 커질 수 밖에 없다. 소득이 발생할 경우 세금 문제를 비롯해 현지 사업자가 갖게 되는 다양한 혜택 등 때문이다.

 국외에 법인을 설립하고 외국 업체들과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최근의 창업자들이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다. 노정석 아블라컴퍼니 대표는 최근 제2의 벤처붐 시기 젊은 창업자들이 선배 창업자들과 다른 점은 외국어에 능숙하다는 점이라며 이들은 해외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말헀다.

 인터랙티브 e북을 제작하는 모글루는 회사 설립 초창기부터 미국 법인 설립을 함께 추진했다. 김태우 대표와 함께 창업한 멤버 중 미국 뉴욕 출신의 공동창업자가 미국 법인을 맡았다. 뉴욕에 상주하며 사무실도 내고 해외의 전자책 유통업체나 IT업체들과 일을 하고 있다. 패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지향하는 스타일쉐어도 2011년 창업과 동시에 해외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경우다. 이 밖에 이음소시어스, 아블라컴퍼니, 페이즈캣, 포도트리 등 설립한 지 1-2년이 채 안된 신생 스타트업들도 각각 진출 국가는 다르지만 초기부터 해외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해외 VC도 국내 진출
해외 벤처캐피털(VC)의 국내 진출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2000년을 전후로 한 시기 1차 벤처붐때는 해외 VC들이 국내 대형 VC가 투자하는 기업에, 그것도 적은 지분이나 소규모로 투자 참여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해외 VC가 적극적으로 국내 기업을 발굴해 투자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국내에서 거의 투자 활동이 없었던 퀄컴벤처스는 지난 2010년 한국에 사무소를 낸 뒤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2010년 펄서스라는 벤처기업에 투자한 데 이어 2011 6월에는 증강현실 SNS 오브제(Ovjet) 개발사 키위플에도 15억원을 투자했다. 폴 제이콥스 퀄컴 회장은 한국은 증강현실을 비롯한 신기술 벤처가 많은 편이고 젊은이들의 창업 열기도 높아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을 발굴, 육성하기에 좋다중장기적으로 한국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 규모를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알토스벤처스, 매버릭캐피털, DCM, 인사이트벤처파트너스 등도 최근 국내에서 투자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회사들이다. DCM은 한동안 국내 시장에 대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다가 최근 카카오에 투자를 하는 등 한국 시장에서 다시 움직이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게임 분야에서는 중국 최대 온라인게임업체 텐센트의 활약이 눈부시다. 국내 중소규모 온라인 게임 개발사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해 왔던 이 회사는 최근에는 모바일 게임업체 페이즈캣, 모바일 광고 플랫폼 업체 퓨처스트림네트웍스 등에도 투자하는 등 영역을 넓히고 있다.

 국내에서 10년 이상 투자를 하면서 벤처 기업 육성에도 힘을 쏟아온 소프트뱅크코리아와 소프트뱅크벤처스 역시 최근 투자 활동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벤처 인큐베이팅 분야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해외 VC들이 한국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이유는 뭘까. 우선 많은 투자 회사들이 한국의 모바일 환경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은 4세대 이동통신 롱텀에볼루션(LTE)를 전 세계에서 16번째로 시작한 나라다. 순서상으로는 그리 빠르다고 할 수 없지만 서비스 커버리지 범위는 놀랄만큼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주요 통신 3사가 2012 4월께면 모두 전국 서비스망을 갖추게 된다. 주요 통신서비스업체들이 모두 LTE로 전국 서비스를 하게 되는 유일한 나라가 된다. 모바일 앱 이용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맷 머피(Matt Murphy) 클라이너퍼킨스 코필드 앤 바이어스(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 아이펀드(iFund) 대표는 한국은 2011년 기준 안드로이드 마켓에서 이용자들의 앱 다운로드 수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고 1인당 기준으로 보면 세계 1라며 모바일 앱 이용이 가장 활발하고 스마트폰 확산 속도도 빨라 전 세계 모바일 분야 투자회사들이 한국을 주목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 확산 속도도 빠르다. 2009 11월 아이폰이 도입된 뒤 2년도 되지 않아 스마트폰 사용 인구가 2000만명을 돌파했다. 2012년 상반기 중에는 전 국민의 60%에 해당되는 3000만 명이 스마트폰을 쓰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스카이 등 휴대폰 분야의 세계적인 강자들이 이 좁은 나라에 몰려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런 세계적인 제조업체들과 관련된 제조 분야, 소프트웨어 분야의 창업이 많기 때문이다.

 

해외 투자 회사

투자 기업들

소프트뱅크벤처스

플라이팬,VCNC,두빅,데브시스터즈,스냅스 등

알토스벤처스

이음소시어스,쿠팡,스피쿠스

스톰벤처스

비타민MD,컴투스 등

매버릭캐피털

쿠팡,카카오 등

인사이트벤처파트너스

티켓몬스터

DCM

카카오,판도라TV

싸이버에이전트

카카오

텐센트(간접 투자 포함)

레드덕,퓨처스트림네트웍스,탑픽,아이덴티티,스튜디오혼 등

퀄컴벤처스

펄서스,키위플 

◆성공한 벤처기업인의 경험 전수
‘투자와 창업,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벤처 생태계형성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소프트뱅크벤처스 문규학 대표는 최근 국내 벤처산업의 움직임을 보여 이같이 평했다. 과거 벤처붐이 일었던 1990년대 말과 1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을 비교한 것이다. 한탕주의가 휩쓸었던 10여년 전의 버블 시기와 달리 지금은 좀 더 합리적인 기업가들과 신중한 벤처투자자들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가장 주목할 만한 움직임은 벤처 1세대들이 후배 벤처인들을 육성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다. 프라이머, 본앤젤스벤처파트너스 등이 대표적이다. 이택경 다음 창업자, 권도균 이니시스 창업자, 이재웅 다음 창업자, 장병규 네오위즈 및 첫눈 창업자 등이 뭉친 프라이머는 매년 스타트업 기업들을 발굴한다. 이들이 매년 하는 데모데이는 스타트업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다. 컨설팅 한번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와이컴비네이터처럼 스타트업이 비즈니스로 데뷔하는 그런 창구가 되려는 게 이들의 지향하는 바다. 이택경 프라이머 공동 대표는실리콘밸리의 와이컴비네이터(Y combinator)처럼 그들이 주최하는 데모데이에서 발표만 해도 15만 달러 투자 유치가 보장되는 그런 인큐베이터가 되는 것이 단기적인 목표라며장기적으로는 이런 노력으로 국내에서도 벤처생태계라는 것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장병규 블루홀스튜디오 이사회 의장은 2010년 본앤젤스벤처파트너스라는 초기 벤처 투자회사를 차렸다. 투자도 하고 상담도 해 주고 필요한 인력을 구해다주기도 한다.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는 오이씨(OEC)라는 벤처 인큐베이팅 및 컨설팅 업체도 따로 만들고 직접 후배 벤처기업인들을 챙기고 있다.

최근에는 벤처 1세대들의 움직임이 좀 더 조직화되고 있다. 노정석 아블라컴퍼니 사장, 신현성 티켓몬스터 사장, 스톤브릿지캐피털, 인사이트벤처파트너스 등은 패스트트랙아시아(Fast Track Asia) 라는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회사를 설립했다. 미국과 한국의 벤처기업인, VC들이 연합해 만들었다는 의미도 있지만 대상을 전 국민으로 확대한 것도 차별화되는 점이다. 아이디어만 갖고 오면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 벤처창업 분야에 있어서의 오디션과 같이 지원자들을 모두 심사하고 엔지니어가 부족한 팀에는 전문 기술 인력을, 마케터가 필요한 팀에는 마케팅 인력을 지원하는 일도 한다. 사업화 뿐 아니라 해외진출 IPO(기업공개), M&A 등도 모두 도와주는 것으로 내세웠다.

이들의 이런 움직임은 지금 벤처산업을 10년 전과 다르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벤처기업가들이 했던 시행착오를 줄일 뿐 아니라 1세대나 경험많은 이들의 지원이 벤처 생태계를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벤처생태계 조성 나서는 벤처기업인들>

인물

회사

주요 활동

노정석

아블라컴퍼니

패스트트랙아시아 주도, 스타트업 개별 투자도 진행

장병규

본앤젤스벤처파트너스

스타트업 투자 및 벤처인큐베이팅 사업

김범수

카카오

스타트업 개별 투자 및 벤처기업가 발굴

이택경

프라이머

벤처인큐베이팅 및 컨설팅

권도균

프라이머

벤처인큐베이팅 및 컨설팅

이재웅

프라이머, 소풍

스타트업 개별 투자 및 벤처인큐베이팅

송영길

부가벤처스

벤처인큐베이팅 및 컨설팅

신현성

티켓몬스터

패스트트랙아시아 주도, 스타트업 개별 투자도 진행

허민

위메이크프라이스

스타트업 개별 투자 진행


◆소규모 자본, 합리적 선택
이 블로그에서 1 10개월째 진행하고 있는 한국의 스타트업에 게재된 70여개의 국내 스타트업 기업 중 70% 이상은 2억원 안팎의 소규모 자본으로 시작됐다. 이들은 창업 인원도 2명에서 5명 사이가 대부분이다. 적은 인원이 크지 않은 자본금으로 스타트업을 하는 것이다.

 서둘러 투자를 받지 않는다는 것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투자를 받고 싶어도 그러기가 어려워 시간이 오래 걸린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상당수는 사업 시작 후 바로 외부 투자를 받는 것보다는 제품을 내놓고 어느 정도 검증을 받은 후에 외부 투자를 진행하는 길을 택했다. 과거 이름만 걸어놓고 뻥튀기 식으로 포장만 하는 등 투자 받는 것을 제품 개발보다 우선시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외부투자를 지나치게 일찍 진행하거나 너무 많은 금액을 받을 경우 오히려 원래 생각했던 사업을 계속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마저도 있었다. 즉 외부투자자들에게 휘둘릴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어느 정도 자생력을 키운 뒤 투자를 진행하는 쪽을 택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초반에 무리하게 벌리지 않고 핵심 영역에 집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선데이토즈를 설립한 이정웅 사장의 경우 설립한 뒤 한동안 투자를 받지 않다가 2년이 지나서 투자를 받았지만 그 돈을 1년 이상 쓰지 않고 계속 갖고 있었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경영을 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알뜰하게 사업을 꾸려나간 것이다.

 물론 여전히 많은 국내의 벤처 투자자들이 아주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것을 꺼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는 하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멘토링이나 인큐베이팅, 컨설팅 등 조언자가 많아진 것도 경험이 없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조급하게 투자받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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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김정주 넥슨 회장을 만났을 때 그의 창업 이야기를 잠깐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공개된 거창한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의외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고 단편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간략하게나마 정리를 해 봤습니다.
이 글은 블로그에 올라오기 전 월간 '머니' 2월호에 먼저 게재됐습니다. 클릭하시면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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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년 일본을 방문한 서른살 벤처기업가 김정주 넥슨 사장( NXC 대표)은 전자제품 매장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는 장면을 본다. 족히 100미터는 넘어 보이는 그 줄에 서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닌텐도 게임기를 사기 위해 모여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충격에 빠졌다. 그날 밤 일본에 연수중이던 최승우씨를 만나 식사를 함께 하며 두 사람은 의기투합을 했다. “닌텐도를 이기는 게임 회사를 만들자

 당시 넥슨은 게임 사업을 막 시작했지만 게임보다는 소프트웨어 개발 용역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회사였다. 김 대표는 한국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게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최승우씨도 넥슨에 합류했다. 그렇게 13년이 흘렀다.

 2011 1214. 넥슨재팬이 게임의 본고장 일본 증시에 상장하며 김정주 대표의 꿈은 첫 발을 내딛었다. 넥슨의 매출액은 2010년 기준 1조원 수준으로 21조원에 달하는 닌텐도의 2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순이익도 닌텐도 33000억원, 넥슨 3100억원으로 10분의 1 수준이다. 그럼에도 일본 증시에 상장된 넥슨의 시가 총액은 8조원으로 닌텐도(25조원) 3분의 1에 달했다. 실적에 비해 훨씬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창업자이자 최대주주인 김정주 대표의 지분을 환산한 개인 재산은 3조원으로 불어났다. 증시에서 넥슨의 가치가 높게 평가받은 것은 성장성때문이었다. 넥슨의 영업이익은 2010 49.9% 증가했지만 닌텐도는 35.8% 줄었다. 2011년에도 넥슨은 30% 이상 성장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닌텐도는 실적이 후퇴한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닌텐도를 이기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김정주 대표의 꿈은 이렇게 조금씩 현실이 되가고 있다.

◆수재 청년, 온라인 게임을 최초로 만들다
김정주 대표의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덕분에 그는 돈 걱정이 없는 집에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집안도 좋고 머리도 비상했던 그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86학번)를 졸업한 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학원 전산학과에 들어갔다. 기숙사에서 그는 이해진씨(NHN 창업자)와 같은 방을 썼다. 그들의 방 옆에 송재경(XL게임즈 대표), 김상범(넥슨 이사) 등이 있었다. 이들 네 명은 거의 붙어다니다시피 하며 진로를 고민했다.

 송재경, 김상범 두 사람은 카이스트에서도 소문난 괴짜였다. 송재경은 천재 프로그래머로 벌써부터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김상범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교수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김정주 대표는 송재경, 김상범, 이민교 등과 함께 1994 12월 넥슨을 창업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살 때였다.

 넥슨이 처음부터 게임업체는 아니었다. 웹 오피스라는 인터넷 솔루션을 개발하는 회사였다. 기업체 내부의 인트라넷을 개발하는 용역 업무도 했다. 아시아나 항공의 예약 시스템을 1995년 개발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주 대표는 이런 인트라넷 솔루션으로 계속 사업을 영위할 생각은 없었다. 외주 개발 업무는 현금 확보를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 넥슨의 창업자들은 당시 PC통신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온라인게임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봤다.

 1994년 마리텔레콤이 개발한단군의 땅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여러 사람이 접속해 온라인으로 즐기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이 게임은 그래픽이 없는 텍스트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텍스트로 제시되는 상황 설명을 보고 키보드로 명령어를 입력해 게임을 했다. ‘텍스트로 제시되는 상황 설명 대신 그래픽을 넣으면 어떨까.’ 지금은 게임에 그래픽이 들어가는 게 너무나 당연하지만 당시만 해도 낮은 PC 사양에 복잡한 개발 과정, 비싼 서버 비용 등으로 인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김정주 대표와 넥슨은 이런 아이디어를 최초로 실현시킨 것이다.

 넥슨은 1995년말 고구려 대무신왕의 정벌담을 그린 온라인게임바람의 나라개발을 완료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4월 이 게임의 유료 서비스를 시작했다. 최초의 그래픽 기반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는 게이머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당시 동시에 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고작해야 몇십명 수준이었지만 온라인에서 여러명이 한꺼번에 접속해 게임을 즐기도록 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시도였다. 넥슨은 이듬해인 1997 10월 두번째 작품어둠의 전설을 출시했다. 

◆시대의 흐름을 타다
김정주 대표가 일본을 방문해 닌텐도 게임기를 사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봤을 때는 바람의 나라와 어둠의 전설을 출시한 직후였다. 그는 일본에서 소니와 닌텐도 같은 콘솔 업체가 만든 게임을 보며 절망했다. 몇명이 모여 뚝딱 만든 넥슨의 게임과 수백억원을 들여 수천명이 만든 소니와 닌텐도의 게임은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다. 조잡한 그래픽과 열악한 개발 환경 속에서 포기하고픈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끈기있게 계속해서 새로운 게임을 만들었다.

 1998 12월에는일랜시아라는 게임을 출시했고 이어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게임을 내놓았다. 90년대에 넥슨은 매년 새로운 게임 타이틀을 내놓는 국내 유일한 게임회사였다. 게임을 직접 개발하는 게 힘들 때는 좋은 게임을 사들이기도 했다. 넥슨의 이름으로 국내 게임 산업의 흐름을 바꿔놓을 만한 인기 게임들이 계속 출시됐다. 퀴즈퀴즈, 크레이지아케이드, 메이플스토리, 마비노기, 카트라이더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게임들이 줄을 이었다.

 김정주 대표에게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를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그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운 좋게 시대의 흐름을 잘 탔습니다

콘솔 게임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한쪽에서 PC 시장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넥슨이 만든 게임은 PC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즐기기에 가장 좋은 콘텐츠였다.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없이 할 수 있다는 것도 최대의 장점이었다. 그는실력보다는 시대가 우리 쪽으로 흘렀습니다.”라고 넥슨의 성공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게임 콘텐츠를 내놓고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지치지 않고, 자신이 파악한 시장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를 읽으면서 꾸준히 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넥슨은 해냈다.

◆게임만 잘 하기도 어렵다
넥슨과 관련해 자주 도는 소문이 있다. 제주도에 테마파크를 건설한다거나 영화 사업에 진출한다거나 하는 등의 소문이다. 넥슨이 향후 디즈니랜드 같은 기업을 꿈꾸고 있다는 얘기도 종종 들린다. 이럴 때마다 김정주 대표는 이런 말을 한다. “넥슨은 영화나 음악 등 그 어떤 다른 산업에도 진출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게임에만 집중할 겁니다. 미디어 회사가 될 생각도 없구요, 그럴 여력도 없습니다. 게임만 잘 하려고 해도 어렵습니다. 아직 넥슨이 개척하지 못한 해외 시장도 많고 넥슨은 스포츠게임에서 성과를 보인 게 없습니다. 게임 분야에서도 넥슨은 더 노력해야 합니다.”

 넥슨이 오늘날 미국의 액티비전블리자드에 이어 세계 2위권 온라인게임업체가 된 것은 게임 한 분야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넥슨은 특히 국내외 다른 어떤 게임 회사보다 콘텐츠 개발과 서비스 유지에 공을 많이 들이는 회사다. 이것은 김정주 대표의 사업 철학이자 그가 넥슨에 대해 가장 중요한 원칙 중의 하나다. 넥슨의 게임 중 바람의 나라는 출시된 이후 지금까지도 국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96년에 출시됐으니 벌써 16년이 됐다. 메이플스토리 던전앤파이터 마비노기 카트라이더 등 넥슨의 인기 게임들은 모두 꾸준히 오랫동안 높은 인기를 유지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많은 타이틀에 있어서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넥슨이 유일하다.

 넥슨은 플랫폼에 욕심을 낸 적도 없다. 자신들의 게임을 집대성해 그것만 즐길 수 있는 자체 플랫폼을 만들고 싶은 생각도 들 법 한데 플랫폼 쪽으로는 별다른 시도를 하지 않는다. 김 대표는 작년 여름 기자와 만나 회사의 경영 방침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콘텐츠 회사입니다. 콘텐츠 회사는 플랫폼 영역을 넘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플랫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갑니다. 넥슨은 많은 게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바일이나 소셜용으로 변환하는 것도 엄청난 작업입니다. 앞으로도 플랫폼이 점점 다양해지고 사람들은 다양한 기기,플랫폼에서 게임을 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런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습니다.”

 김 대표는 다시 시작된 시장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그이지만 지금은 잠도 못 이룰 만큼 고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PC를 외면하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넥슨의 성공 기반은 PC였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PC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확 줄었다. 아무리 좋은 게임을 만들어도 시대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걸 김정주 대표는 잘 알고 있다. 어쩌면 10여 년 전 소니가 했던 고민을 지금 그가 하고 있다.

<2011년 5월 김정주 넥슨 회장을 만났을 때 사진. 갑작스레 만나 예고없이 사진을 찍었지만 흔쾌히 사진을 찍는 것을 허락했다. >

◆사람, 사람, 사람
2011 11 16일 오후 KAIST 정문술관 2층 강의실. 세계적인 색소폰 연주자 케니 지의 연주 동영상이 화면에 떴다. 케니 지가 자신의 밴드 구성원을 한 명씩 청중에게 소개하며 칭찬하는 10분 분량의 동영상이었다.

 김정주 대표가 강단에 서 있었다. 그는 2011년 9월부터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에서기술벤처라는 과목을 맡아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이 동영상을 보여준 뒤 학생들에게이 동영상을 보고 오래 생존하는 기업의 특징을 맞혀보라고 문제를 냈다. 한 학생이 손을 들고는팀원들의 유대감을 유지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20년 전에도 잘나가던 회사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속가능한 기업이 되려면 오랫동안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을 고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 회장은오랫동안 함께할 만한 사람으로 좋은 사람과 유능한 사람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좋은 사람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그는유능한 사람은 컴포넌트(부품) 역할이 끝나면 나가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면서앞으로 이 사람이 나와 20년을 같이 일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것이 경영자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승우 넥슨재팬 대표, 서민 넥슨코리아 대표, 다니엘 김 넥슨아메리카 대표, 박경환 넥슨차이나 대표, 한경택 CFO(최고재무책임자) 등은 그가 손꼽는오래 일을 같이 할 만한 좋은 사람들이다.

 그는 항상 사람을 강조해왔다. 게임을 종합 작품으로 생각하는 그로서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넥슨은 흔히 자체적으로 게임을 잘 만들었다기 보다는인수합병(M&A)을 잘 해서 큰 회사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다. 넥슨의 히트작 메이플스토리는 이승찬 씨가 설립한 위젯이라는 작은 게임개발사가 만들었다. 던전앤파이터는 허민 위메이크프라이스 대표가 만든 네오플에서 개발한 게임이다. 군주온라인, 아틀란티카는 엔도어즈에서 만들었고, 국내 최고 인기 총싸움게임 서든어택은 게임하이의 작품이다. 넥슨은 이런 좋은 게임 개발사들을 모두 인수하면서 덩치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넥슨이 M&A를 계속 해 왔던 것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좋은 콘텐츠 못지 않게 좋은 사람을 찾는 그의 경영 스타일 때문이다.“오래 같이 즐겁게 일할 사람을 항상 찾고 있습니다. 사업에는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언젠가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그는 오늘도 또 다른 대박 신화를 일궈낼뛰어난 인재가 아닌, ‘좋은 사람을 찾아 다니고 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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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스물 여섯의 나이에 벌써 사업을 해 보고 두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이것 만으로 큰 자산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세번째 사업에 도전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런 사람에게 투자를 하겠는가 안하겠는가. 정수환 앱디스코 대표는 대학생 시절 창업을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 시작한 사업에서 짧은 시간 안에 정착하고 있다.

대학생 시절에는 젊은 혈기와 청년다운 이상주의적인 사고로 사업에 접근했던 그는 쓰라린 경험을 겪은 뒤 현실에서의 사업이 무엇인지에 대해 몸으로 완전히 체득한 인물 같았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두 번 실패를 겪은 사람이 세번째 시작하는 사업에는 반드시 투자하라고 말을 하곤 하는데 그의 경우가 이에 해당될까. 애드라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정수환 대표를 만났다.

◆태권도 선수에서 고대 총학생회장까지
창업자들을 만나다보면 별별 사람이 다 나오지만, 이제는 드디어 운동선수 출신까지 나왔다! 정수환 대표는 중학생까지 태권도 선수였다.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고 하니, 대단한 실력의 보유자였던 것 같다.(사실 그 당시 전국체전 금메달이면 아마 해당체급에선 세계 랭킹에서 손가락에 꼽힐 수준이 아니었을까) 곱게 자란 청년같은 외모지만 운동선수였다는 경력은 꽤나 이채롭다.

 그의 부모는 부유하진 않았지만 아들의 판단과 나름의 삶을 존중하는 분들인 것 같다. 운동을 시작했을 때도, 잘 하던 운동을 그만두고 성과가 불확실해보이는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를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뭐든 하면 죽을 힘을 다해 하는 것이 정수환이라는 사람의 스타일일까.

 태권도를 할 때도 그랬다. 태권도 선수 초기 시절 그는 자신의 체력이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훨씬 달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술도 부족했다. 그냥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남들보다 2배 이상 연습을 했다. 타이어도 끌고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별 걸 다해봤다고 한다. 태권도를 만만치 않게 해 본 기자가 봐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공부를 해도 그는 제대로 했다. 요즘처럼 아주 어릴때부터 영재교육이다 과외다 하는 분위기에 비하면 한참 늦은 셈이다. 그래도 열심히 해 고려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2005년이었다. 

◆하고 싶은 건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그가 느낀 것은 학생들의 목소리가 학교에 잘 반영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는 자신이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고심했다. 나이 차이 때문인지 기자가 대학에 다닐 때 본 학생회 인물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른바 대의명분에도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는 ‘정치적 인간’의 모습도 띄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하고 싶은 건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했다. 이런 성격은 나중에 사업을 하면서도 여러가지 모습을 나타난다. 고집스럽다는 단점이 있지만 판단이 맞을 경우 확실한 의지와 방향성을 갖고 일을 추진할 수 있다.

 학생회장이 된 것도 가장 큰 이유는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 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뭐든 악착같이 달라붙어 제대로 하고야 마는 그 성격과 추진력이 그를 학생회장으로 만들었다. 2008년 그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됐다. 하지만 총학생회장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숙제를 안겨줬다.사회공헌 활동과 이 활동을 청년들의 단체를 통해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더 강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추진하기에 1년이라는 총학생회장 임기는 너무 짧았다. 물론 뭐든 어떤 것을 책임지는 자리에 가면 시간이 짧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2009년 청년 단체 활동을 시작한 그는 어찌보면 처음으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게 된 것 같다. “금전적인 필요성을 느꼈어요. 돈이 없으면 사회 공헌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거죠. 그래서 외주 개발일을 맡아서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러다가 기업을 통해 사람들에게 가치를 주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라는 걸 알게 됐죠.” 2010년, 대학생 정수환은 그래서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두 번의 실패
사업 경험이 없이 개발 용역만 동료들과 해본 경험이 전부였던 그에겐 경험자의 조언이 필요했다. 카카오 이제범 대표는 그에게 사업을 위한 멘토가 돼줬다. 잠시 카카오에서 일하며 사업을 한다는 것, 대표이사가 된다는 것에 대해 어깨너머로 배운 그는 법인을 설립했다. 청년 단체 활동을 하면서 외주개발을 해 모은 돈 3000만원이 사업 밑천이 됐다. “개인 사업으로 시작하면 흐지부지될까봐 주식회사로 시작했어요. 처음엔 왕십리에 하루에 만원 내면 사무실 대여해주는 곳을 썼죠. 결국엔 안암동 학교 앞에 사무실 차리게 됐습니다.”

 경험이 없다는 것, 그리고 사업을 하기로 했지만 아직 현실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다는 것은 그에게 실패를 경험하게 했다. 사회공험 쪽에 관심이 많아 ‘선행을 릴레이하자’라고 하는 사회적 기업의 성격을 지닌 사업이 그의 첫 일이었다. 자본도 없고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고객 CS부터 사진 및 편집까지 그가 다 맡아서 했다. 경험 부족에 사업 성격이 모호한 점이 맞물려 첫 사업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바로 다시 도전에 나섰다. 2010년 10월 소셜커머스 서비스 해피즌을 시작했다.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고 한다. 첫 사업을 실패한데다 소셜커머스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이미 티켓몬스터 쿠팡 위메이크프라이스 등이 펄펄 날고 있었고 글로벌 1위 기업 그루폰이 한국에 진출하네 마네 하는 소문이 돌던 시점이었다. “저도 힘들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긴 했죠. 그런데도 해 보고 싶어라구요. 그래서 무작정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주위 사람들의 만류때문인지 그는 친구들과 함께 시작하면서 시한을 걸었다. “3개월 해 보고 안되면 접자”  늦게 하다보니 투자 받기도 쉽지 않았고 지출만 늘었다. 게다가 소셜커머스라는 영역은 마케팅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어느 정도 규모가 되고 ROI가 나오기 힘든 구조다. 그루폰도 아직 BEP를 맞추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결국 3개월 만에 사업을 접게 됐다. 2011년 초였다 이것저것 합하면 1억 넘는 빚만 지게 됐
다. 같이 일하던 친구들도 모두 그를 떠났다.

◆애드라떼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실패는 혹독했다. 힘들 거라 예상은 했지만 훨씬 힘들었다. “정말 아침에 일어나 해를 보기가 싫더라구요. 생각해보면 그때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빚 문제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떠나갔다는 것이 그를 더 힘들게 했다.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의 특징은 힘든 가운데도 뭔가 활동을 하면서 재기를 모색한다는 점이다. 그 역시 그랬다. 대학동기인 황원준씨를 만나 창업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최신 트렌드를 공부했다. 둘은 결국 창업을 하게 된다.  “해피즌 당시에 정말 열심히 했지만 기본적인 경험이 부족해서 초기에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비즈니스모델에 대한 판단 같은 게 부족했던 것 같아요. 시장을 리드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실패를 곱씹던 그는 문득 그는 소셜네트워크에서 광고를 하는 것이 아직 국내에서 본격화되지 않았고 해외에서는 가능성을 이미 보여준 분야라는 것에 착안했다. 그래서 그는 2011년 7월 앱디스코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뭔가 신나게 해보고 싶다는 뜻에서 작명했다. 사업 직전 학교를 그만뒀다. 졸업을 불과 한학기 남겨뒀는데 말이다.

 “졸업은 하지 그랬어요?”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 약해지고 결단을 못 내릴 것 같아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승부사적인 면도 엿보인다. 물론 빚을 갚아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그는 그래서 ‘이 사업에 목숨을 걸었다’고 했다. 애드라떼의 키워드는 영업이었다.사업 시작 전 투자를 받으려고 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직접 영업을 뛰면서 광고를 받았다. CJ 등에 직접 컨택해서 20여개의 대기업으로부터 미리 광고영업을 수주받은 상태에서 시작했다. 확실히 수월했다. 즉 분명하게 돈이 되는 분야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광고를 보고 카페라떼 한 잔’이 처음 내세운 모토였다. 그래서 이름도 애드라떼로 지었다.

 “해피즌처럼 수익이 나지않는 사업을 경험하고 아예 처음부터 바로 매출이 생길 수 있는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애드라떼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광고의 흐름이 소비자에게 혜택을 돌려주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독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발로 뛰는 영업력으로 사업을 본 궤도에 올려놨다는 평을 듣고 있다. 애드라떼 앱을 실행하면 광고주들이 올린 광고를 볼 수 있다.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기 때문에 단순 광고는 아니다. 광고를 보면 적립금이 쌓인다. 친구를 초대하면 500원씩 현금이 생긴다. 이것으로 진짜 커피를 사먹을 수 있다. 이런 보상성때문에 애드라떼는 지난해 8월 출시된 이후 4개월여만에 누적 다운로드 수 100만건을 달성했다. 일본에도 진출해 앱스토어 무료분야 전체 순위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해외에서 성공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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