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프로야구 각 구단의 1루수 중에는 유난히 강타자가 많았다. 삼성라이온스의 이승엽 선수가 그렇고, 한화이글스의 김태균 선수, 롯데의 이대호 선수(현 오릭스 버팔로스) 등이 우선 떠오른다.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기아타이거즈의 최희섭 선수, SK의 박정권 선수도 만만치 않은 1루수 출신 선수들이다. 통계적으로 역대 타자 MVP 18명 가운데 11명이 1루에서 배출됐다는 것을 봐도 1루수는 검증받은 선수들의 자리였다.

 그래서 회사명을 ‘일루수’로 지은 황지영 대표를 만났다. “일루수처럼 모바일 시대의 강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담았다. 회사 이름에 야구의 특정 포지션을 쓴, 재미난 상상력의 팀이다. 회사가 잘 되면 사업을 넓혀가면서 이루수, 삼루수, 유격수 등으로 이름을 단 회사를 세우는 등 확장할 수 있다며 즐거워하는 일루수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뻔한 것은 못 참는 여성 공학도

황지영 대표. 오랜만에 이 코너에 등장한 여성 CEO다. 화학공학을 전공으로 한 그는 “뻔히 안 될 것이 분명한 일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고 본인을 설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처음부터 윗선의 여러가지 지시와 그에 맞춰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게 싫었다고 한다.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 일이 떨어졌을 때 회사를 나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소신이 뚜렷하고 강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도 있고, 조직형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 덕에 여러 회사를 옮겨다녔다. 부산 출신으로 부산의 모 종금사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가 IT(정보기술) 분야로 발을 옮기게 된 것은 필명 도이모이(Doimoi)라는 사람이 쓴 칼럼을 읽고 난 후였다. 

인터넷이 앞으로 세상의 변화를 주도할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 글을 읽고, 황 대표는 IT업계로 옮겼다.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곳에 자신을 던진 것이다. 

 다모임, 조이온, 엔씨소프트, 한컴 씽크프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그런 회사들에서 주로 프로젝트 단위로 움직이며 일을 했다. 직접 프로그래밍을 하는 일 보다는 기획 업무를 맡았지만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하다보니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회사를 옮기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일을 싫어하는 성격도 크게 작용했다. 이런 경력이 샐러리맨으로 계속 그렇게 살려고 한다면 단점이 되겠지만, 회사를 창업했으니 현재로선 딱히 단점이 될 일도 없을 듯하다. 

 이야기가 잘 이어지지만, 여기서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회사 생활이 지겨워져서 창업을 했다?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창업에 원래 관심이 엄청 많았던 거 아닌가요?” 아니나 다를까, 혼자서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검증받으러 여러번 다닌 경력이 있었다.

 “주로 게임 쪽에서 사업 아이디어가 좀 있었어요. 제가 프로그래머가 아니었기 때문에 게임을 직접 만드는 것과 관련된 아이디어는 아니었구요, 게임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대한 아이디어였죠.”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아이디어를 다듬은 그는 국내 한 유명 게임회사 창업자를 찾아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 회사의 사업 방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기좋게 거절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완전히 꿈을 접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혼자서 시작한 창업

회사를 많이 옮겨다녔지만 계속 뜻을 함께 하면서 호흡을 맞췄던 사람들도 주위에 생겼다. 그런 사람들 5명이서 창업을 모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아서인가. 생각과 달리 추진이 잘 되지 않았다.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고,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무작정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거쟎아요. 그래서 창업을 할 때 초창기 멤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인 것 같아요. 그런 열정이 없으면 일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는 혼자가 됐다. 혼자가 됐어도 그는 시작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한테 말했죠. 창업 자금 좀 빌려달라고. 사실 결혼하고 둘이 같이 모은 돈이었지만,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 사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의 지지를 얻은 그는 2012년 5월 혼자서 회사를 설립했다. 당장의 현실때문이지, 1인 창업을 해서 회사를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가장 시급한 인물은 CTO(최고기술책임자). 믿을 만한 사람에게 CTO를 맡아달라고 청을 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줬다. CTO가 확정되면서 디자이너, 마케팅 담당자 등 다른 멤버들도 채워졌다. 프로젝트 방식으로 회사 생활을 해 온 그는 창업도 그렇게 했다.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그 프로젝트를 이 멤버들과 하는 식이다. 성과나 함께 일을 하는 과정에 따라 계속해서 같이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느슨한 형태의 창업멤버들이다.

◆자연스럽게 ‘공감’을 나누는 ‘비타민’

이들의 첫 작품은 공감을 나누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비타민’. 10월중 서비스가 출시된다. 아이폰 용으로 먼저 나오고, 안드로이드 버전은 추후 출시될 예정이다.

 출시되기 전의 비타민 서비스를 살짝 맛봤다. 이름처럼, 이 서비스는 고된 하루에 지친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거나 외로운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그런 공감형 서비스다. 

 서비스를 실행하면 자신의 그날 기분을 표현할 수 있는 창이 뜬다. 그날 내 기분을 입력하는 방식은 아니다. 너무 다양하게 기분을 표현하면 오히려 소통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16가지로 제한했다. 그 정도만 되도 대략 그 날의 자신의 기분을 알리는 데 부족함은 없을 것이란 판단이다.

 내 기분을 표현하면 소통과 공감을 위해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것이다. 많은 다른 앱들이 그렇듯, 이 앱도 역시 다운로드하는 순간 스마트폰 주소록에 있는 지인들과 자동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무작정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기분을 표현해야 네트워킹이 시작된다. 내가 그날 그 어떤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고 싶지 않으면 기분을 표현하지 않으면 된다. 

 나는 기분을 표현하지 않지만 친구 중에 그날의 기분을 표현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아주 우울한 친구가 있다고 치자. ‘오늘 술이나 한잔 할까’, ‘힘내 내가 있쟎아’, ‘힘든 일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야’ 등 위로의 멘트를 날리고 싶다. 여기서 통상적인 SNS와 다른 비타민의 특징이 나타난다. 비타민은 텍스트를 입력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없다. 슬쩍슬쩍 미는 방식으로 나의 기분을 표현한다. 즉 미리 준비된 멘트를 선택해 이를 상대방에게 보내는 것이다. 어떤 말을 해줄까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나만의 독특한 멘트를 보내긴 어렵지만 쉽고 편안하게 상대방에게 한 마디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SNS가 발전하고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익숙해질 수록 개개인의 일상 생활은 더욱 외로워지는 경향이 있다. 주소록에 친구는 넘쳐나지만 막상 힘들때 내 기분을 표현하고 위로받기는 힘든 것이다.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 등에 기분을 남길 수 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볼 우려가 있다. 기분이 우울하다는 글에 ‘좋아요’를 누르기도 그렇다. 바쁘게 살다보니 일일이 텍스트를 입력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런 이들을 위한 SNS다. 

 ‘하루에 한 번 감정 터치’ 황지영 대표가 내세운 비타민의 캐치프레이즈다. 감정 표현에 서툰 사람들도,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수월하게 표현해 소통할 수 있다. 악플을 달 수 없는 구조라는 장점도 있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NHN 밴드 등 기존 모바일 기반 SNS가 놓치고 있는 최소한도의 심플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빈틈을 파고들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서비스를 소개하고 다니다보니 헬스클럽이나 회원제 운영 서비스 등에서 회원 관리에 아주 좋은 서비스라는 말을 들었어요. 많은 사람들과 복합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 대화 시간이 부족한 사람 등에게 유용할 것 같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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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자들의 구성이 이 정도 된다면 아마 ‘드림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표이사는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사업 기획과 영업까지 경험해 비즈니스 마인드가 확실하고 최고기술책임자(CTO)와 디자이너는 서로 절친이어서 신뢰가 깊다. 대표와 CTO는 같은 과 선후배 사이이면서 오래 알고 지내 호흡이 잘 맞는다. 이런 멤버들이 각자 열심히 경험을 쌓다가 모여서 창업을 했다. 뭔가 될 것 같지 않은가? 그런 예감이 크게 빗나가지 않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회사는 카카오톡 게임하기에서 스타로 떠오른 ‘아이러브커피’를 만든 파티스튜디오다.

◆비즈니스 경험을 쌓은 엔지니어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99학번으로 입학한 이대형은 입학 후 얼마 안 있어 선배인 김정주 넥슨 사장을 만난다. 김정주 사장이 넥슨의 초기작 중 하나인 ‘퀴즈퀴즈’를 알리고 후배들을 뽑기 위해 컴퓨터공학과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짧지만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그리는 미래를 봤는지도 모른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다날에 입사, 병역특례를 시작한 그는 처음엔 휴대폰 결제 쪽에서 자신의 전공인 프로그래밍 업무를 했다. 그때 그가 개발한 것이 ‘컬러링 플러스’라는 서비스. 자신의 상태를 문자로 기록해두면 부재시 전화가 왔을 때 컬러링(전화연결음) 서비스에서 자신의 상태를 상대방에게 알려준다. 회의중이라던가, 운전중이라던가 등등. 서비스는 사람들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돈은 제법 벌었다. 통신사들이 이 서비스를 약정 조건에 일종의 끼워팔기로 집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뭐랄까. 좀 허탈했어요. 개발자로서 약간의 좌절감도 있었구요. ‘아무리 잘 만들면 뭐하나. 영업이 훨씬 중요하지 않나’ 이런 생각도 했죠.”

 2005년 병특은 끝났지만 그는 학교로 복학하지 않았다. 때마침 다날이 중국에 진출했는데 그는 중국지사 근무를 자청해 나갔다. 새로운 시장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다날 중국지사에서 그는 결제사업을 총괄했지만 이때부터 엔지니어가 아닌 사업기획자로서의 인생이 시작된다. 중국 업체들과 결제 계약을 따내기 위해 특히 중국 게임업체들을 줄기차게 만나고 다녔다. 지금은 최대 게임 회사로 성장했지만 그때만 해도 게임에 막 입문하기 시작했던 텐센트와 일을 하면서 사업 기획을 하기도 했다.

 2007년 귀국한 그는 제이투엠소프트라는 게임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된다. 내심 그는 게임 개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박종흠 사장이 이번에도 그에게 비즈니스 일을 맡겼다. 그덕에 그는 이번엔 제이투엠의 대표작 ‘레이시티’를 들고 전 세계를 누비며 영업을 했다. “전 세계의 게임 전시회는 다 가본 것 같아요.”

◆환상의 창업팀

 2008년말 미국 게임회사 EA가 제이투엠을 인수하면서 그는 갑자기 현금을 손에 쥐게 된다. 제이투엠의 지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EA에서의 생활이 썩 즐겁지만은 않은 것 같다. 벤처에 계속 있다가 글로벌 대기업에 들어간 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다가 시키는 일만 하는데 진력이 난 이대형은 답답한 마음에 2010년 EA 리크루팅을 자청해서 하다가 2010년엔 커피숍을 인수했다. 답답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직접 고객을 오프라인에서 만나면서 그는 새로운 세계에 눈뜬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진로가 다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커피숍 운영에 대한 어떤 로망이 있는 것 같았어요. 커피숍을 운영하면서 그걸 느꼈죠.”

 사람들의 이런 로망을 실현하게끔 해주면 어떨까. 비록 가상의 공간에서라도 말이다. 게임을 만들어서 하면 되지 않을까. 시장 상황을 살펴보니 싸이월드와 네이버 등이 앱스토어를 웹페이지에서 서비스하면서 소셜게임이라는 장르가 국내에서도 형성되고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하지만 EA를 나오긴 쉽지 않았다. 4년 계약을 하고 들어갔기에 그냥 나올 경우 보유하고 있던 주식 상당수를 포기해야 했다. 잠깐 동안 그는 고민을 했다. 그래도 대기업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훨씬 컸다. 결국 그는 보유 주식 중 절반 이상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회사를 나왔다.  

 창업에 대한 결심을 굳히자 사람이 떠올랐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2년 후배이자 메이플스토리를 만든 위젯이라는 게임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했던 임태형이 생각났다. 이대형 대표 본인도 의식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제이투엠 시절부터 창업을 하겠다고 곧잘 주위에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때 그가 내심 찍어놓고 있던 상대가 임태형이었다. “제가 볼 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게임 개발자입니다. 올림피아드 출신으로 실력은 미이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이죠. 저와 뜻도 통하니 더욱 좋구요.”

 임태형은 혼자 오지 않았다. 위젯에 있으면서 그와 함께 메이플스토리를 개발했던 심정섭씨를 설득해 함께 왔다. 심정섭은 아트디렉터를 맡기로 했다. 비즈니스와 개발자, 디자이너로 구성된 3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창업진이 구성됐다. 서로 다른 장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들이 공통적으로 인터넷과 게임이라는 분야에서 계속 일했다는 것도 이들의 화학적 결합을 용이하게 했다.

◆실전 경험을 녹였다!

이대형 대표가 소셜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하던 시점은 사실 국내에서는 소셜게임이 이미 기울고 있던 때였다. 2011년초 법인을 설립하고 바로 게임 개발에 들어갔지만 하필이면 그 때는 싸이월드 앱스토어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국내 소셜게임 시장이 정체되던 시기였다. 당시 선데이토즈, 피벗스튜디오, 고슴도치플러스 등 소셜게임 개발사들이 수백만명의 사용자를 확보하며 활약하고 있었지만 돈이 안된다는 게 점차 입증되고 있었다. 싸이월드 플랫폼에서는 사용자들에게 돈을 쓰게 하는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싸이월드 자체에 있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점점 간단한 게임은 PC를 떠나 스마트폰에서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즉 시장이 PC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동하고 있는 게 소셜게임의 진짜 어려움이었다. 하지만 파티스튜디오에게는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기대치를 좀 낮추고 시작했습니다. 국내 시장은 테스트베트 정도로 하자고 했죠.”

 2011년 7월11일. 싸이월드 앱스토어에 아이러브커피를 출시했다. 자신이 커피숍을 운영하면서 겪은 노하우를 게임에 담았다. 그냥 커피숍을 운영하고 키우는 것에만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디테일을 살렸다. 사람들이 커피숍을 운영하는 것은 손님을 만나고, 서비스를 하고, 매장을 가꿔 나가고 커피를 만드는 그런 과정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커피숍 운영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손님이든, 주인이든 커피숍에 들어갔을 때 할 법한 행동, 동선, 과정 등을 충실하게 그대로 담으려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이미 기울고 있던 시장에서 아이러브커피는 40만명 가량의 사용자를 확보했다. 하지만 시장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선데이토즈가 겪었던 것처럼, 파티스튜디오 역시 사용자에 비해 수익이 나질 않는 시장을 보며 그해말 중국 시장에도 게임을 선보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용자는 400만명이 넘게 확보했지만, 역시 돈이 되질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대표는 확신했다. “모바일로 가자.”

◆진짜 승부는 해외 시장에서

사실 아이러브커피는 이미 검증된 게임이다. 돈을 비록 예상만큼 많이 못 벌었다고 할 지라도, 당시 이유 중 상당수가 플랫폼 문제라면 모바일에 와서 플랫폼은 카카오톡이라는 거대한 플랫폼이 해결해줬다. 판이 깔리면 준비된 자가 도약하기 쉬운 법이다.

 올들어 모바일 게임 개발에 나서기 시작했지만 콘텐츠가 탄탄하다는 장점을 앞세워 아이러브커피는 순식간에 스타 게임이 됐다. 2012년 8월 서비스를 시작해 사흘 만에 일 매출 1억원을 찍었고 9월에는 일 매출이 2억원 가까이 치솟았다. “처음에 서비스를 하면서 3개월 안에 일 매출 1억원을 기록하는 게 목표었는데 그걸 사흘 만에 달성할 줄은 몰랐죠.” 20, 30대 젊은 여성을 타깃으로 한 것도 주효했다. 현재 가입자 150만명, 일일 사용자수 70만명, 동시접속자 수는 13만명을 기록하고 있다.

 아이러브커피는 시작일 뿐이다. 파티스튜디오는 차기작 개발과 함께 해외 진출도 계획하고 있다. 아이러브비트를 9월 중 비공개 시범서비스 형태로 시작하고, 연말께 대중에 공개할 예정이다. 내부적으로 검토하다가 아이러브커피가 속칭 대박이 나면서 인력 부족 등으로 중단했던 프로젝트 아이러브팜도 10월 중 재개해 내년 2분기 중에는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일본 시장은 이미 어느 정도 판이 깔렸다. 아직 공개 시점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서비스업체를 정해놓고 논의 막바지 단계에 와 있다. 10월부터는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아이러브커피를 즐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중국 시장은 이대형 사장의 궁극적인 지향점 중 하나다. 다날 시절에, 제이투엠 시절에, 그는 중국 시장을 계속 두드렸지만 실패를 맛봤다. 카카오톡 조차 나중을 기약하고 있는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이대형 사장은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 시장에서 겪었던 시행착오가 그에게 보약이 될 수 있을까.

 뮤지컬 ‘페임(Fame)’의 한 대사를 살짝 바꿔 인용, 이대형 사장과 파티스튜디오가 보여줄 모바일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해본다.  “You ain‘t seen the best of him yet.”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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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디지에코(www.digieco.co.kr)의 '스타트업 스토리' 코너에 지난 주 실린 글입니다. 이정웅 사장과 선데이토즈에 대해선 2010년에 한 차례 작성한 바 있지만 2년여의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내용이 추가돼 업데이트합니다. 기존 글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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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에 2012년을 기억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까.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IT(정보기술) 산업에만 국한해 본다면 모바일 시장이 대폭발을 한 시기라고 역사에 남지 않을까. 마치 10여년전 PC기반의 인터넷 광고와 온라인 게임 시장이 급성장을 하기 시작한 시점이 떠오를 정도로 2012년은 과연 언제 올까하고 수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모바일 분야의 급성장이 본격화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대를 연 회사 중 가장 대표적인 회사로 이 글은 선데이토즈라는 한 벤처기업을 지목한다. 네트워크는 통신사가, 사람들 간의 연결은 카카오톡과 같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모바일 시대를 열었지만, 선데이토즈는 이 시장을 기대하던 많은 이들이 가장 목말랐던 이른바 순수 모바일을 통한 대박의 역사를 쓰고 있다.

 선데이토즈가 만든 스마트폰용 게임 애니팡은 카카오톡 게임하기를 통해 안드로이드 마켓에 출시한 지 5주만에 1000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일일 사용자는 600만명을 돌파했다. 동시접속자수는 무려 200만명에 달했다. 동시접속자수 기록은 온라인게임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엄청난 숫자다. 선데이토즈의 또 다른 게임 아쿠아스토리도 모바일에서 100만명이 넘는 사용자가 즐기고 있다. 두 게임을 통해 이 회사는 매일 수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기존 온라인게임을 기준으로 해도 이미 대박의 반열에 올라선 이 회사는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스타트업으로서는 제법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모바일 시대를 주도하는 회사로 떠올랐다.

◆첫 번째 결단=잘하는 것을 하자

선데이토즈 창업자는 이정웅, 임현수, 박찬석 등 3명. 세 사람은 명지대 컴퓨터공학과 00학번 동기생들이다. 세 사람은 학교 때부터 친했고, 자주 모였다고 한다. 학창 시절 친밀감이 있었기에 졸업 후 서로 다른 직장을 다니면서도 계속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이정웅 사장은 트랙나인, 신텍정보시스템, NHN 등을 거쳤다. 병역특례로 군 문제도 해결하고NHN에서 4년간 게임 개발자로 일했다. 임현수 기술이사(CTO)는 고슴도치플러스, 엔씨소프트 등에서 일했다. 박찬석 운영이사는 T3엔터테인먼트에서 한때 국민게임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했던 오디션을 개발했던 인물이다.

81년생 동갑내기인 세 사람은 각자의 회사를 다니면서도 연락을 해 자주 모였다. 처음엔 그저 친분이었지만 점점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계속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런 주제를 놓고 이야기하다 창업을 하자로 결론이 났다. “회사에서 참 열심히 게임을 만들었는데, 어차피 게임 만들 거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거죠. 만약 잘 안되더라도 잃을 게 많지 않다는 데도 생각이 미쳤구요.” 그래서 그들은 2007년부터는 토즈라는 곳에서 만나 창업을 계획했다. 일요일마다 토즈에 모여서 창업 논의를 했다고 해서 회사 이름도 선데이토즈가 됐다.

비슷비슷한 백그라운드를 갖고 있는 이들이었지만 저마다의 특색은 조금씩 있었다. 이정웅은 플래시게임을 3년 넘게 만들어와 작고 아기자기한 게임의 사이클과 운영 노하우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임현수는 소셜게임과 게임플램폼 전반에 대한 기술이 풍부했고 프로그래밍에 대한 전문성이 가장 뛰어났다. 박찬석은 캐주얼게임에 일가견이 있었다.

창업을 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장점은 셋 다 게임 개발을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서로 말이 통하고 팀워크가 잘 된다는 점이었다. 반면 경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전무하고 인맥이 제한돼 있고, 게임 외에 다른 분야에 대해선 모른다는 것은 단점이었다. 자신들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최소화하면 대박은 아니더라도, 시장에 안착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정웅 사장은 이제 갓 서른의 젊은 사장이지만 서두르거나, 쉽게 흥분하거나, 과욕을 부리지 않는 스타일이다. 창업할 때 그는 자신을 이렇게 규정했다고 한다.

 “게임 개발은 많이 해봤지만, 창업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니깐 내가 모르는 것은 하지 말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전념하자.”

그의 이런 생각은 다른 창업자들과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자신들이 잘하는 게임 분야에서, 특히 순발력있게 게임을 출시하는 분야에서 승부를 보면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사장은 한게임에 있던 시절 1년에 50개씩 플래시 게임을 만들 정도로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규모가 작으면서 재미있는 게임들을 끊임없이 계속 만드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작은 게임을 빨리 만드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소규모 게임들을 오픈플랫폼과 결합해서 승부를 자고 다짐한 게 출발이 됐다. 돌다리도 두세번 두드리고 건너갈 그런 스타일의 신중한 이정웅 사장이 첫번째 결단을 내린 것이다.

창업자 세 사람은 2년 동안 셋이서 모든 것을 하기로 했다. 성과를 확실히 낼 때까지 직원을 뽑지 말고 눈에 보이는 성과가 확인된 이후 회사를 확장하는 것이 선데이토즈의 계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 닥쳐온 실패

치밀한 계획, 자신의 재능과 한계에 대한 명확한 분석, 짜임새 있는 역할 분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데이토즈의 첫 작품은 실패하고 말았다.

 필자가 이정웅 사장을 처음 만났을 때는 2008년 겨울, 마이크로소프트가 주최하는 비즈스파크 행사장이었다. 그는 그때 ‘친구에게 게임을 만들어서 선물하자’는 컨셉트로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즉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UCC(사용자제작콘텐츠)가 결합된 형태의 게임 비즈니스였다. 그가 소셜RPG(역할수행게임)이라 규정한 이 게임은 페이스북을 통해 서비스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시도는 무참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회사 문을 닫을 뻔한 위기가 왔다. 신중하게 시도를 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다행히 이들은 다 총각이었다. 책임질 누군가가 없었다. 그들 자신만 챙기면 됐던 이들은 첫번째 실패에서 교훈을 찾고자 했다. “첫 실패를 겪고 나서 우리가 왜 실패했는지를 돌아봤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부족한 게 참 많더라구요.”

뭐가 부족했을까?

 “창업자들이 모두 개발자 출신이라는 게 일단 약점이었습니다. 제품을 만들 줄은 알지만 그것을 어떻게 마케팅을 할 지, 그리고 이후에 어떻게 고객 관리를 하고 서비스를 해 나갈지에 대해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실 소셜게임은 개발 이후의 단계가 중요한데 말입니다. 너무 큰 게임부터 시작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거창하게 ‘페이스북에 없는 것을 만들자’라고 한게 무리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는 ‘선데이토즈 전략’이라는 것을 2009년 상반기에 수립했다. 첫 실패의 교훈이 반영된 게임이 ‘애니팡’과 ‘사천성’이다. 사실 기업체에 전략이 없다는 것이 문제 아니었을까. 어쨌든 경영 경험이 없던 이들은 뒤늦게 회사의 중장기 전략, 단기 전술이라는 것을 한 차례 사업을 실패하고, 첫 시작을 한 뒤 1년이 훌쩍 넘어서야 수립하게 된다. 그래도 그 필요성을 알았다는 점에서 실패가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대규모로 투자를 받지 않고 보수적으로 시작해 손실이 적었다는 것도 이들에게는 다행이었다.

◆두 번째 결단=소셜 게임 1등이 되자

실패를 겪으면서 그들은 미국에서 일고 있는 소셜게임 열풍이 한국에서도 현실화될 것이란 가정을 하게 된다. ‘처음부터 미국에 나가서 승부를 걸려고 하면 너무 힘들다. 한국에서 우선 자리를 잡고 나서 해외 시장에 다시 도전하자는 게 이들의 결론이었다.

뼈아픈 실패를 겪고 나서 이정웅 사장은 두 번째 결단을 내린다. 한국형 소셜플랫폼을 겨냥한 게임을 만들고 이 시장에서 1등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기존의 모든 게임 개발 작업을 중단한 것이다. “아직 싸이월드 앱스토어가 구체화되기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시장이 열릴 거라고 본 거죠. 그래서 다 접고 한국 소비자들에게 먹힐 소셜게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게임을 만들고 있는 중에 SK커뮤니케이션즈가 싸이월드에 앱스토어를 연다. PC기반의 소셜게임 시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선데이토즈는 사이트가 오픈되자마자 소셜게임 애니팡, 애니사천성, 아쿠아스토리를 차례로 출시했다.

 싸이월드 앱스토어는 마치 선데이토즈를 위해 준비된 무대 같았다. 물고기를 키우는 단순한 게임인 아쿠아스토리는 국내 소셜게임 최초로 200만 회원을 기록하는 등 폭발적으로 회원수를 늘려나갔다. 애니윷놀이, 애니사천성 등도 100만 회원을 돌파하며 인기를 끌었다. 2010년 선데이토즈는 5개의 게임을 앞세워 국내 소셜게임 시장을 평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성과를 냈다. 자신감을 얻은 이정웅 사장은 2011 1, 야심작 정글스토리를 출시했다. 아울러 정글스토리를 뛰어넘을 블록버스터급 소셜게임 개발에도 착수했다.

◆시장의 변화

이정웅 사장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던 것은 이 무렵부터다. 아쿠아스토리, 애니윷놀이, 애니팡 등의 인기에 힘입어 무난히 안착하리라 예상했던 정글스토리의 초반 성적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아쿠아스토리도 회원수는 갈수록 늘었지만 수익성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이 정도 회원이 모이면 결제가 상당히 이뤄져야 하는데 번번이 그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지표를 꼼꼼이 뜯어봤어요. 그랬더니 싸이월드 리뉴얼을 전후해 방문자수, 이용자수, 결제비율 등 모든 지표가 정체되기 시작한 것을 알게 됐죠.”

회사 안팎에서 싸이월드의 리뉴얼 탓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정웅 사장은 국내에서 PC기반의 소셜게임이 벌써 수명이 다했음을 직감했다. 채 펴보지도 못하고 사용자들이 모바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갈까를 고민해 봤죠. 스마트폰이 1000만대를 돌파하는 등 확산되면서 스마트폰 재미에 빠진 사람들이 PC앞에 앉아 소셜게임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사람들은 웬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면 PC 앞에 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무실에 출근해서 일은 여전히 PC로 하죠. 하지만 간단한 게임을 하려고 PC 앞에 앉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싸이월드에 2011년 7월 대규모 해킹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 때문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좀 줄어들었고 결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장은 선데이토즈의 전략을 다시 한번 수정한다.

◆세 번째 결단=모바일에 올인

당초 이정웅 사장은 2011년 여름께 차기작을 PC용 웹 버전으로 선보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시장의 변화를 보면서 전략을 전면 수정한다. 기존의 모든 개발 라인업을 중단한 것이다.

“시장이 모바일 중심으로 변화되고 있는데 그것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버전을 모바일용으로 완전히 바꾸기로 했죠. 선데이토즈의 최고 인기작인 아쿠아스토리를 모바일 버전으로 출시하기로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두 번째 결단을 내릴 때와 상황은 유사했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급증한 것은 분명했지만 돈을 벌고 있는 회사는 거의 없었다. 아직 너무나 초기인 시장에 또다시 모험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소셜게임으로의 전환 때 승부수를 던졌듯이 이정웅 사장은 이번에도 승부수를 던졌다. 신작 개발을 중단하고 기존 게임의 모바일화 전환을 시도했다.

  문제는 모바일 경험이 아무도 없다는 것. 시행착오가 따랐다. 1년 넘게 좌충우돌하며 배우는 학습의 시기가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동안 모바일 시장에서 먼저 치고 나가는 회사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이 헤매고 있을 때 다른 회사들도 대부분 헤매고 있었다.  

“이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소셜게임으로 전환하던 시절에는 실패를 겪은 뒤의 결단이었기에 사실 잃을 게 없었어요. 그런데 모바일 시장을 맞이하면서는 비장함마저 있었죠. 약간의 성공을 거둔 뒤였기에 불안감도 더 컸구요.”

애니팡, 아쿠아스토리, 애니사천성, 정글스토리, 애니윷놀이 등 이미 기존 소셜게임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던 게임 콘텐츠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모바일용 앱으로 만들어 출시하는 것 자체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어려운 작업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정웅 사장은 서두르지 않았다. 가장 자신있고 실패 위험이 적다고 생각되는 아쿠아스토리를 우선 앱으로 만들어 출시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기대에 미치진 못했다. 유료 결제 비율도 높지 않았다. 이보다 더 큰 한방이 필요했다.

때마침 카카오톡이 게임플랫폼을 준비하고 있었다. 6000만명에 가까운 이용자를 갖고 있는 카카오톡을 플랫폼으로 한다면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수익 모델이 절실한 카카오톡은 혼자 살아남는 것보다 플랫폼에 올라오는 다양한 게임들이 장점을 발휘하고 최대한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힘을 실어주는 방향을 택했다. 이정웅 사장은 카카오톡의 특성상 간단하고 빨리 끝낼 수 있는 애니팡이 최적의 콘텐츠라고 결론짓는다.

730, 선데이토즈의 애니팡은 카카오톡의 게임 플랫폼 게임하기를 통해 서비스를 시작한다. 약 일주일 동안은 잠잠했다. 점차 입소문이 퍼져나갔다. 재밌다. 쉽다. 즐길 거리가 많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한 달여 만에 다운로드 1000만건 돌파, 하루 평균 게임 이용자수 600만명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게 된다.

◆'신념'을 갖고 '실력'을 키우며 '때'를 기다렸다

이정웅 사장과 선데이토즈는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 대박의 초입부에 와 있다. 앞으로 거둘 수확이 더 많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설혹 모바일 게임 시장이 기대만큼 그렇게 크지 않거나 선데이토즈가 예상만큼 성장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이정웅 사장)에겐 다시 기회가 올 것이고 다시 도약할 것을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예상할 수 있을까.

이정웅 사장과 선데이토즈는 벼락 스타가 된 케이스가 아니다. 온갖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실력을 키워가면서 자신들이 실력발휘를 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매번 그들에게 기회는 왔고, 그 기회를 반드시 잡았다. 그 기회가 자신들의 예상보다 크든, 작든 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다만 신념이 부족해 그 기회가 자신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뿐이다.”


이정웅 사장은 이 말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신감과 신념을 갖고 시장 변화에 대처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준비해왔다. 기회가 왔을 때 그가 누구보다 먼저 이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준비하며 때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항상 성공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공을 한 과정은 그 이후를 짐작케 한다. 모바일 시대를 열어젖힌 선데이토즈에게 앞으로 더 큰 기회가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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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하는 데 역시 가장 어려운 것은 함께 할 사람을 찾는 것, 그리고 그들이 함께 꿈꿀 만한 비전과 목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레이삭스도 그랬다. 하드웨어 제조업체에서 시작해 외주 작업도 하고 다양한 스마트폰 앱을 개발해오다 SNS에 도전하는 현 모습에 이르기까지 모였다가 헤어지고, 아이템을 수정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창업자가 일관되게 사업에 대한 비전을 품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음악을 좋아한 엔지니어

포항제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 기계정밀공학과에 입학한 ‘학생’ 이승이는 음악을 좋아했다. 연주도 좋아했지만 특히 음악 감상에 취미가 있었다. 첫 학기에 그는 음악 동아리방에 가서 거의 살다시피한 것 같다. 좋아하는 음악도 마음껏 들을 수 있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리에서 그는 나중에 함께 창업을 하는 방무석을 만난다. 

 첫 학기만 마치고 그는 바로 군에 입대했다. 나 역시 그랬지만,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군 복무를 앞두고 있는 20대 초반의 남성은 좀 다급해지기 마련이다. ‘매를 먼저 맞자’는 심정으로 그 역시 일단 군 문제를 해결하러 입대했다.

 제대하고 그는 학교에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라도 미국에 가서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작은 결정이 그의 인생 진로를 바꿔놓을 줄을 그가 알았을까. 4개월짜리 어학연수를 갔는데 돌아가려고 하니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그는 귀국을 1년 늦추기로 햇다.

 1년의 시간이 주어지자 다시 주위를 차분히 둘러봤다. 그전까지 그는 다만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미국 학생들을 보며 부러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Boston에 있었던 그는 현지 유학생들과 대화를 하다가 용기를 얻게 된다. “선배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너도 이곳 좋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너보다 훨씬 영어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왔다. 너는 할 수 있다’ 라구요. 그래서 그 말에 입학 준비를 시작했죠.”

 공부한 시간은 고작 6개월. SAT를 보고 서류도 준비할 게 많았다. 정신없이 시간은 지나갔다. 반신반의한 가운데 결단의 시간이 왔다. 한국에서 학교 복학 최후통첩이 온 것이다. 그동안 군대 등으로 휴학을 많이 해 더 이상 휴학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내고 복학신청을 하지 않으면 제적이 된다는 통보였다. 하필이면 미국 대학 합격자 발표가 복학신청 마감일 이후였다. 그로서는 미국 대학 합격을 확인한 뒤 편안한 마음으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이다.

 “부모님께 전화를 했어요. 복학하지 않겠다구요. 그리고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합격할 지 확신이 없었거든요. 잘못하면 스물넷의 나이에 고졸로 다시 출발해야한다는 생각도 했죠.”

◆다만, 후회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10여개 대학에 원서를 냈는데, 줄줄이 합격 통지가 날아왔다. 기대치 않았던 아이비리그에서도 합격장이 왔다. 그는 뿌듯한 마음으로 코넬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첫 1년은 학교 생활 적응과 생존이 오로지 목표였던 시절이었다. 코넬대 당시 입학생 중에서 그는 외국에서 학교를 다닌 경력없이 바로 입학한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고 한다. 그가 겪었을 고초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세월이 흘러 코넬대 전자공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그가 선택한 직장은 삼성전자. 미국에서 면접을 보고 바로 입사해 금의환향,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 그때가 2002년이었다. 2007년까지 그는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무선사업부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것이 ‘블랙잭’이었다.

 좋은 직장에서 5년 이상 일하면서 그는 ‘인생의 시나리오’를 계속 생각했다. “50이 넘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 이 회사에서 탄탄대로를 밟아 제일 잘 됐을 때를 생각했을 때 내 모습은 어떨까.”

 직장에서 가장 성공했을 때를 떠올려봐도 그는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언젠가는 내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후회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어요. 내 일이 아닌 것을 계속 하면 언젠가 지칠 것이고 그렇게 살아온 자신에게 실망하고 후회할 것 같았죠. 힘들겠지만 내 일을 찾아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삼성전자에서 알게 된 2명과 함께 나와 창업을 했다. 한양대 시절 알게 된 방무석도 창업멤버로 합류했다. 2007년 3월 그의 첫 창업 회사 ‘브레인쿼드’를 설립했다. 브레인쿼드는 전자악기를 만드는 업체였다. 하드웨어 회사다.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한 전자키보드를 만들었다. 1년반 동안의 개발 기간을 거쳐 2008년 10월 프로토타입이 나왔다. 이승이 대표는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제품을 들고 투자자를 물색하고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리만브라더스 사태가 터졌다. 미국발 금융위기에 투자 심리는 얼어붙었다. 투자자를 찾지 못했고 그렇게 그의 첫 창업 작품은 흐지부지되고 있었다.

◆아이팟터치에 놀라다

2009년초 음악을 들으려고 아이팟터치를 구매한 이승이 대표는 깜짝 놀랐다. “제가 스마트폰을 만들어봐서 원리나 기계적인 장치 등에 대해서도 알쟎아요. 그런데 사용해보는 순간 ‘이 정도 퍼포먼스가 어떻게 가능할까’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손으로 키보드를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이런 기기를 이용해 터치만 하면 악기 연주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사업을 수정했다. 하드웨어 제조업체에서 앱 개발사로 변신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서 창업 멤버는 방무석 이사와 둘 만 남게 됐다. 변변한 사무실도 없어 고생하던 차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 김진형 교수가 사무실을 빌려주는 대신 일을 좀 도와달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일이 잘 풀리려니 때마침 더팟이라는 디자인 회사가 새로운 개발팀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회사 김홍균 대표와 만난 이승이 대표는 서로 뜻이 통한다는 것을 알고 회사를 합치기로 했다. 2009년 7월 통합회사 그레이삭스가 설립됐다. 이승이 대표가 그레이삭스의 대표를 맡고, 김홍균 더팟 대표는 그레이삭스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기로 했다.

 그레이삭스는 한동안 음악 관련 앱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성과도 냈다. Finger Stomp, Drum Meister, String Trio, Aquarist 등 앱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드럼 앱과 스트링 트리오 등은 특히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수익성이 신통치 않았다. “이렇게 해서 돈을 벌려면 정말 앱을 10개 이상 만들어야겠더라구요” 처음에 이렇게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 이상이었다. 

 물론 운영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외주 사업을 하면서 회사 운영비는 차질없이 벌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회사의 대표작을 만들고픈 마음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음악 앱을 들고 투자받을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 기회가 왔다. 이승이, 김홍균 등 회사 주력 멤버들이 밤늦게 회사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사진을 활용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거다!’ 싶은 생각에 이승이 대표가 작업을 시작, 불과 이틀만에 뚝딱하고 기본 컨셉트를 만들었다. 이제 투자를 받고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설 때가 됐다.

◆미디어를 지향하는 사진SNS, ‘해프닝’

2011년 이승이 대표는 한국인터넷진흥원에서 주최하는 한 조찬모임에서 회사를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장병규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 대표와 만난 게 계기가 돼 2011년 11월 엔젤 투자를 받게 된다.

 사진을 활용한 SNS 이름은 해프닝(Happen.in). 올해 입사한 이승이 대표의 코넬대 후배 박지현씨가 이름을 지었다. 얼핏 보기엔 사진을 올려놓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이를 통해 사람들을 사귀어 가는 여느 SNS와 유사하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우선, 지금 찍은 사진만 올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트위터처럼 리트윗을 해서 전파하는 방식으로 모르는 사람에게도 사진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대상은 얼마든지 제한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하면 실시간으로 찍은 사진만 올려놓고 이것을 통해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가는 서비스다. 

 “사진을 전세계에 실시간으로 브로드캐스트할 수 있는 서비스가 없습니다. 사진을 이용한 미디어가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거죠.”

 처음부터 실시간 사진이라는 컨셉트로 간 것은 아니었다. 만들다보니 현재 찍은 사진만 올릴 수 있게 했는데, 거기서 의외의 즐거움을 찾은 것이다. “실시간 사진만 올려놓게 하니까 3가지가 달라지더군요.”

 그게 뭘까. 우선 올라오는 사진이 달라진다는 점. 그리고 댓글이 아니라 사진으로 사람들이 대화를 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실시간으로 사진을 검색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사진을 공유하면서 전세계의 뉴스를 공유하는 식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위치를 추가하면 서비스가 한층 더 발전한다. 위치를 정해놓고 해당 지역에서 올라오는 사진을 실시간으로 볼 수도 있고 그 지역의 그동안의 사진을 검색할 수도 있다. 아직 내부적으로 베타테스트중인 해프닝은 9월 중 베타서비스를 시작하고 10월중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개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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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대형 마트 인근에 있는 SK텔레콤 대리점을 들렀다가 우연히 듣게 된 대화 한 토막.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딸 뻘로 짐작되는 학생과 함께 대리점 직원을 붙들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는 애니팡을 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지금 이 휴대폰이 너무 오래되서 그런지 애니팡이 안되네요.”

“아 게임을 많이 하세요? 게임 하시기에 좋은 요금제와 폰을 알려드릴까요.”

“아뇨, 게임 안해요. 게임 안 좋아하는데, 딸이 해서 같이 애니팡을 하려고하는데, 안돼서..”

일견하기에도 게임에 별 관심이 없고, 해 본 적도 없는 분인 듯 했다. 그런데 대리점에 와서 게임이 되는 폰을 찾고 있는 모습이라니!

 2005년에 카트라이더가 대박을 치고, 국민 게임의 반열에 오를 때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생전 게임을 안하던 사람들-여학생이나 주부 등-이 게임을 하러 PC방에 가고 친구들하고 게임 이야기를 하는 일이 일어났다. 기존에 게임을 안하던 사람들을 대거 게임 시장으로 끌어들이면서 카트라이더는 그야말로 대박을 쳤고, 개발·서비스 업체인 넥슨의 실적과 이 회사에 대한 평가도 껑충 뛰어올랐다.

 현상만 놓고 보면, 애니팡은 이보다 더 한 것 같다. 카트라이더를 하기 위해 PC를 살 사람은 많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애니팡을 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바꾸거나 스마트폰을 고르면서 애니팡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이처럼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숫자로 봐도 명확하다. 7월30일에 출시된 애니팡은 그 후 1주일 동안은 소비자들의 큰 변화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1주일뒤부터 사용자가 급증하기 시작해 4주차에 500만 다운로드를 달성했고, 5주차가 지나자 다운로드 건수가 1000만을 돌파했다. 하루 평균 이용자수는 무려 600만명, 동시접속자수는 200만명이다. 일일 매출의 경우 다운로드 1000만을 달성하기 전에 이미 1억원을 돌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동안 접속이 잘 안되고 게임을 하다가도 에러가 나는 상황이 수시로 발생할 정도로 사용자 폭주로 몸살을 앓기도 했다. 

 사실 이런 모습은 과거 온라인게임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신작이 나올 때마다 대기하던 사람들이 몰려들 때 흔히 봤던 모습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숫자는 아니었다. 그나마 최근 온라인게임 분야에서는 이와 유사한 현상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말이다.

 콘텐츠를 만들고, 모바일 분야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런 모습을 선데이토즈가 만든 애니팡이라는 게임이 해냈다. 애니팡 정도는 아니지만, 이 게임의 뒤를 이어 파티스튜디오의 아이러브커피 등도 인기를 끌면서 ‘모바일 앱 게임’이라는 하나의 시장을 완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물론 애니팡이나 아이러브커피의 성공은 6000만명이 사용하는 카카오톡이라는 거대한 플랫폼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카카오톡에 이 게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게임들도 많았다. 카카오톡이라는 플랫폼이 나오기 전에 앱스토어라는 공간에서 스마트폰 열풍에 힘입어 선전했던 팔라독과 같은 게임들도 있었다.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로비오사의 앵그리버드같은 게임도 있었다. 

 여러 사례들이 있음에도 애니팡을 주목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확산됐다는 점, 여러가지 에러에도 불구하고 사용자가 지속적으로 늘었고 개발사와 카카오톡이 이를 결국 감당해냈다는 점, 카카오톡이라는 강력한 플랫폼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애니팡이라는 게임을 만든 회사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점 등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요인은 이번 흥행이 일회성에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상을 가능케 한다.

 앱개발자들을 비롯해 모바일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모두가 바랬던 모바일 시장이 드디여 열렸다. 그 시장을 연 상징적인 현상의 첫번째가 카카오톡이었다면, 두번째는 애니팡 열풍이다. 카카오톡은 사용자 기반 측면에서, 애니팡은 모바일에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정표를 세웠다.

 모바일로 광고를 하던, 스폰서를 모으던, 음악 영화 책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던,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시장이지만 결국 게임이 열었다. 사람들이 모이고, 즐기고, 열광해야 시장이 만들어진다는 아주 단순한 것을 애니팡이 다시 일깨워줬다. 애니팡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제 시장이 열리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이로 인해 파급될 효과는 지금 생각하는 수준 이상일 것이다. 지금 애니팡이 보여주고 있는 수치가 이미 온라인게임 시절 겪었던 경험치를 한참 초과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애니팡은 낮도깨비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게임이 아니다. 매니아들을 중심으로 알려졌지만 2009년 싸이월드가 앱스토어를 PC기반 웹 서비스에서 오픈했을 때 선데이토즈는 소셜게임 형식으로 애니팡을 서비스했었다. 그때도 사용자수 100만명을 넘기며 인기 몰이를 했었다. 스마트폰 게임보다 훨씬 작은 시장에서 한 차례 검증된 게임을 갖고 모바일에 들여와 제대로된 승부를 펼친 게 주효한 것이다. 즉, 족보가 있는 게임이다. 공교롭게도 애니팡이 출시되던 날 이정웅 사장을 분당 사무실 근처에서 만났었다. 나 역시 그랬지만, 그 역시 애니팡이 이렇게 대박이 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 1000만을 돌파하고 나서 전화를 걸었다. 

“생각해보니 역사적인 날 만났었네요.”

“그러게요. 언젠가 모바일 게임에서 대박이 하나 나올 줄은 알았지만, 첫 게임이 우리가 될 줄은 전혀 몰랐네요. ”

선데이토즈와 이정웅 사장의 스토리는 예전에도 한번 한국의 스타트업 코너에서 다룬 적 있지만 조만간 최근의 스토리까지 업데이트한 풀스토리를 올려놓을 생각이다. 그 이야기 전체를 본다면, 이 회사와 모바일게임 시장이 가는 방향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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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국내 기술로 만든 국내 최초의 음성인식 문자전송 서비스가 나왔다. 음성인식 전문업체 다이알로이드(www.dialoid.com)가 만든 음성인식 문자전송 앱 ‘다이알로이드’가 11일 구글플레이를 통해 출시됐다.

 다이알로이드가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내 연락처 정보에 전화번호가 등록되어 있는 ‘이강토’라는 친구에게 ‘오늘 드라마 내용이 감동적이었어’라는 문자를 보내고 싶을 경우, 1)스마트폰에서 다이알로이드 앱을 찾아 실행한 후 2)“이강토 문자 오늘 드라마 내용이 감동적이었어”라고 말만 하면 끝이다. 앱을 실행하는 손동작 이외에는 어떤 작동도 필요없이 음성만으로 문자 전송이 완료된다. 방금 온 문자에 대한 답장을 발송할 때에도 ‘답장 문자 확인했다 있다 보자’라고 말만 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문자 전송을 하기 위해서는 휴대폰에서 문자 메세지 보내기 메뉴로 들어가 전송할 메세지를 입력한 후 연락처 정보에서 수신자를 찾아 ‘전송’ 버튼을 누르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현재 나와 있는 음성 인식 애플리케이션에서 제공하는 문자 보내기 기능 역시 애플리케이션 실행 후 문자 보내기 선택, 문자 전송 등 수차례의 손동작이 필요하다. ‘다이알로이드’는 이 모든 과정을 ‘앱 열고 말하면 끝’인 ‘2 Step 문자 전송’으로 단순화 시켰다.

 이상호 대표는 처음부터 ‘앱을 실행하면 바로 되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서비스를 개발해 왔다. 음성 인식 기술 자체에 대해선 자신감이 있었다. 다만 소비자들이 이것을 편하게 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 작동의 편의성에 더 초점을 맞춘 셈이다.

 이상호 대표와 다이알로이드 개발진에 대해선 한국의 스타트업 여든두번째 이야기에서 다룬 바 있다. 그들의 자세한 스토리는 이 글을 참고하시는 게 좋을 듯 하다. 여기서 간략하게만 설명하자면, 개발사인 ‘다이알로이드’는 NHN 기술연구팀 출신 4인이 2012년 2월에 설립한 음성인식 전문기업이다. 창업자 4인 모두 15년 이상의 음성 처리 및 검색 분야 경력을 보유한 국내 최고의 음성인식 개발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독보적인 한국어 연속 음성인식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특히 한국어가 보유한 특징들을 보다 세심하게 기술 개발에 적용하고 있다.

 앱이 출시되기 전 이상호 대표를 잠깐 만나 개발 과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개발중이었던 서비스를 직접 시연도 해봤다. 출시 2주전이었기 때문에 아직 완벽하게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음성을 인식하는 부분에 있었던 어떤 다른 음성 인식 관련 앱보다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엔 문자전송에 있어서 일부 에러가 있었지만 개선을 했기에 출시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음성 인식이라는 것은 문자전송 정도가 아니라 활용할 여지가 무궁무진한 기술이다. 전문 인력도 많지 않고 재정적인 지원이나 시장이 부족한 상태에서 의지와 신념, 자신들의 실력에 대한 믿음만 갖고 묵묵히 기술 개발을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쨌든 서비스 자체야 시장에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지만, 다이알로이드의 기술 개발은 이것이 완성형이 아니다. 지금의 서비스는 운전을 하면서 문자를 보내야 할 때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음성 인식 기술이 고도화되면 생활의 모든 곳에서 활용이 가능하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공익적인 서비스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다이알로이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도 이런 것이다. 이제, 다이알로이드는 출발선에 섰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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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창업을 하는 이들은, 사업을 일궈 일가를 이루고 싶은 이들은, 몇년 간의 준비 과정을 거쳤다. 프로그램스의 창업자인 박태훈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영악하다고 할 정도로 그는 창업을 일찌감치 결심한 뒤 딴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 왔다. 그런 박 대표도 사람을 모으고, 아이템을 선정하고, 성과물을 내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그가 결국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아 갈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7년을 준비한 창업

서울과학고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 03학번으로 입학한 박 대표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창업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학교 분위기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창업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 똑똑하다고 소문난 선배들이 졸업하고 의대를 가거나 고시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엔지니어들이 정말 다니고 싶은 회사’를 만들고 싶은 게 그의 꿈이었지만 사실 롤 모델이 없었다. “그 당시엔 구글도 아직 지금처럼 알려지기 전이었고 구글코리아가 설립되지도 않은 시절이어서 막연한 이상만 있지 뚜렷한 타깃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장 창업을 하기엔 부족한 게 많다고 판단돼 여러가지 방면의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고 우선 다짐했죠.”

 역할모델도, 창업모델도 찾지 못한 대학생 박태훈이 선택한 것은 창업을 위한 내공을 쌓는 것. 공대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카이스트 내 방송동아리인 VOK를 한 것도 그런 경험쌓기의 일환이었다. 

 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넥슨에서 벽역특례로 근무를 할 때도 그는 동아리 활동을 꾸준히 했다. 대학들의 연합 동아리인 S&D는 경영과 관련된 공부를 하는 동아리였다. “기업을 경영하려면 경영에 대한 공부도 좀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심산. 경영학과 학생도 아니었지만 동아리 활동을 주도적으로 한 그는 여기서 회장까지 지냈다. 병특 시절 1년6개월 정도 S&D에서 활동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사람. 경영학을 전공으로 한 강석훈, 김민석, 원지현 등 훗날 창업을 함께 하는 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가 함께 창업을 하고 싶어 점찍어 놨던 인물은 서울과학고, 카이스트 1년 후배인 오경윤. 2009년 병특을 마치고 복학을 했지만 창업 열풍이 일던 시대적 분위기와 그의 오랜 열망이 맞아 떨어지면서 그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2010년 6월 12일. 박태훈은 후배 오경윤을 불러내 둘이서 강남역 빕스(VIPS)에서 식사를 하면서 제안을 했다. “우리 같이 앱 만들자”

◆소셜커머스에서 얻은 두 가지 교훈

오래전부터 박태훈의 창업에 대한 열정을 알고 있던 오경윤이 두말할 것 없이 찬성하면서 둘의 창업 여정이 시작됐다. 하지만 처음엔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마침 국내에 소셜커머스 열풍을 불러일으킨 티켓몬스터가 서서히 뜨고 있던 시점이었다. “소셜커머스를 모아서 보여주는 메타서비스를 만들자” 그들은 이렇게 시작했다.

 회사이름을 프로그램스의 철자를 변형한 Frograms로 짓고 개인 사업으로 시작했다. 둘이 만나 결심을 하고 3개월만인 2010년 9월 소셜커머스 메타사이트인 ‘쿠폰잇수다’를 뚝딱 만들었다. 소셜커머스에서의 제품 품질 문제나 가격 문제를 지적하는 도발적인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눈길을 끄는데 성공하면서 매체에 보도는 많이 됐다. 그렇지만 사이트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소셜커머스 사업은 비용 투입이 많이 필요한 사업이었다. 무엇보다 이 사업의 핵심은 영업과 마케팅이었다. 

 “창업자들이 영업이나 마케팅에 특화되지 못했는데 그런 역량이 가장 필요한 분야에서 창업을 하니 쉽지 않았죠. 그래서 8개월여만인 2011년 4월 소셜커머스 사업을 접었습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업을 접었지만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우선, 사람을 건졌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도 핵심 창업 멤버인 오경윤 CTO(최고기술책임자)가 끝까지 함께 했다는 것, 그리고 경영 동아리 시절 알게된 강석훈, 김민석, 원지현 등 세 사람이 소셜커머스 사업 초창기 사업에 합류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함께 운명을 개척하는 일에 계속해서 동참했다는 거였다.  

 사람 말고 건진 게 있다면 뭘까. “두 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우선 파트타임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거였죠. 당시 우리가 고용했던 직원들 중에는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한 목적도 있었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치열한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더군요. 인생을 걸고 덤벼들어도 될까말까한 데 말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사업을 하자는 거였습니다. 소셜커머스 사업을 시작하면서 내가 강점이 있는 분야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했습니다. 뜨고 있는 사업이니 이 분야에서 돈을 벌어 나중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생각이었죠. 내가 하고 싶고, 잘 하는 분야에 인생을 걸고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개인화 서비스가 미래다.

이런 교훈을 얻은 이들이 심기일전해 만든 서비스가 영화 추천 서비스인 왓차(www.watcha.net)다. 8월 16일 첫 선을 보인 이 서비스는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면 할 수록 좋은 영화를 추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는 서비스다.

 이 서비스를 만들게 된 계기는 영화를 좋아하는 창업자들이 검색창에서 영화를 검색하다가 나왔다. “좋은 영화를 추천해달라는 검색을 사람들이 정말 많이하더라구요. 그런데 검색 서비스에서는 개개인의 취향이나 성별, 성격 등에 전혀 관계없는 영화 추천이 무작위로 올라옵니다. 개인에 특화된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죠. 가장 접근성이 용이한 영화를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왓차는 사람들의 영화에 대한 평가 DB(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한다. 네이버 등 기존 사이트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사이트 방문객으로부터 직접 수집한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그래도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름 재미도 있다. 영화를 10개 이상 평가하면 그때부터 그 DB를 기반으로 내 취향 분석이 시작되고 나에게 적합한 영화를 추천받을 수 있다. 

 여기서 개인의 취향을 분석해 추천할 영화를 선택하는 알고리즘이 서비스의 핵심. 개발력이 중요한 이유다. 그래서 현재 회사 직원 13명 중 7명이 엔지니어로 구성돼 있다. 영업과 마케팅에는 자신이 없다고 스스로를 평가절하했지만, 개발에는 자신이 있다고 스스로 평가했던 박태훈 대표다. 이런 점이 다른 사람들 눈에도 띄었나 보다. 올 봄 그는 김범수 의장이 설립한 벤처투자회사 케이큐브벤처스의 1호 투자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개발력으로 승부를 좌우할 수 있는 그런 서비스를 하기로 방향을 전환한 뒤, 그런 자신감 때문인지 그는 향후 계획까지 착실하게 세워놓고 있었다. 우선, 조만간 영화추천 서비스의 뒤를 이을 또 다른 추천 서비스가 출시될 예정이다. 이런 서비스를 출시하는 것은 그가 ‘서비스의 개인화’에 미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시간은 제한돼 있는데 쏟아지는 정보는 너무 많고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많쟎아요. 그런데 포털이나 개별 사이트들이 제공하는 개인 맞춤형 서비스가 아직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 거죠.”

 우선은 사용자들을 모아 DB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 그 다음엔 이를 기반으로 개인 취향에 맞춘 광고를 하거나 다운로드 링크 연결시 수수료를 받는 등 몇가지 수익 모델이 가능하다는 게 박 대표의 구상이다. 벤처업계에서 좋은 개발자들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로 손꼽히는 프로그램스. 박 대표가 꿈꾸는 개인화 서비스의 모델은 이들의 손과 머리에 달려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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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경제매거진 6월 둘째주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사이러스 황룡 대표의 이야기는 한국의 스타트업 코너에 아주 초창기에 실린 적이 있는데 과거에 썼던 내용은 여기 를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썼던 내용의 업데이트 버전이라 따로 숫자를 붙이지는 않았습니다. 사진은 한경매거진 서범세 팀장님께서 찍어주셨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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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재학중일 때부터 창업을 했다. 창업이 몸에 배인 사람이다. 청년 취업난이다, 창업 정신이 필요하다 어쩐다 하지만 그처럼 창업DNA로 투철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는 살아가면서 느낀 불편함, 불합리한 점 등을 개선하는 것을 창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불편한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이 그만큼 크다고도 할 수 있고, 겁이 별로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인디밴드 음악 사이트 블레이어와 페이스북 기반 음원 오픈마켓 라우드박스를 운영하는 사이러스의 황룡 대표다.

◆문제가 있으면 바꿔야지

애견을 좋아하는 황룡 대표. 고등학교 재학중이던 시절, 애견을 사고파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애견 애호가들은 종자가 좋고 관리가 잘 된 애견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가 어려워 시중에서 비싸게 구매하는 반면, 좋은 애견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꾸로 적절한 애견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건강과 관리 상태를 확신할 수 없는 애견을 구매하는 일이 많았다. 정보의 부족에 따른 소비자 선택이 제한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분야가 애견일 뿐이다. 동물을 좋아하고 동물을 키우는 것에 관심이 많았기에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언젠가 이 문제를 한번 해결해보리라고 생각한 황룡 대표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관련 분야에서 창업을 준비했다. 대학 2학년때인 2004년 애견 직거래 사이트를 열었다. 개인간에 애완견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많아서였을까. 오픈하자마자 야후 관련 카테고리에서 순위에 오르는 등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돈이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무료로 서비스를 해왔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는 모델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코스프레를 직접 하는 것은 좀 뻘쭘해하쟎아요. 하지만 좋아하는 애견을 코스프레하는 것에는 적극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죠. 애견이 코스프레를 하면 사람들의 눈길도 끌 수 있을테구요.”

 이런 생각에서 애견코스프레 서비스를 갖다 붙였다. 큰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유료 서비스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문제점을 발견하면 개선하고 고쳐 나가려는 습관은 어딜 가지 않았다. 군에 복무해서도 마찬가지였다. 9사단에서 전산병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그가 맡았던 일은 서플라이에 있는 각종 부품 및 정보를 찾아주는 일. 여느 전산병과는 하는 업무가 사뭇 달랐던 듯하다. 전화가 하루에 100통이 넘게 걸려왔다고 한다. “정보 검색이 너무 불편하더라구요. 그래서 직접 정보 검색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복무중이었던 부대에만 적용하려고 했는데 확산되면서 전 군에 뿌리게 됐죠.”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9글’. “그때 구글에 한창 빠져 있었어요. 9사단의 9에 구글의 글을 붙여서 만들었습니다.”  이름 짓는 거 하나만 봐도,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위트가 대단했던 것 같다. 

◆음악 서비스로 세번째 도전
2007년 3월9일에 제대를 한 황 병장. 제대 다음날인 3월10일부터 바로 사무실을 얻으러 다녔다. 창업 아이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한 것은 인디음악 음원 관리 서비스. 이 역시 자신이 느낀 생활의 불편함에서 힌트를 얻었다. 

 “인디 음악 중에도 정말 좋은 음악들이 많은데 인디밴드들은 알리기가 힘들고, 소비자들은 잘 찾기가 힘들쟎아요. 그걸 한 번 해결해보면 시장이 있을 거라 생각했죠.”

 이런 생각에서 오픈한 음원 관리 서비스 블레이어(www.blayer.co.kr). 그에겐 세번째 창업 도전인 셈이다. 그는 인디밴드의 음원을 유통하기 위해 150여명의 인디밴드를 직접 만나 1500곡을 확보했다. 인디뮤지션들은 자신의 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관계를 맺는 게 쉽지 않았지만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하고 계속해서 설득하는 그에게 결국 하나둘씩 공감을 했다. “힘들 게 얻어야 관계를 오래 이어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설득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그렇게 때문에 신뢰가 쌓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블레이어’는 쉽게 말하면 인디음악을 모아놓은 사이트다. 블레이어에는 저작권협회에 등록하지 않은 뮤지션만 음악을 올릴 수 있다. 처음에는 인디 음악가들이 자신의 음악을 다른 사람의 블로그나 미니홈피 배경음악으로 쓸 수 있게 해 대중들과 접점을 넓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로 출발했다. 인디음악을 즐기고 싶은 이용자는 자신의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스킨을 설치해 언제든 들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블레이어에는 ‘스트리밍 무제한’이나 ‘정액제’ 상품이 없다. MP3 파일로 한 곡당 블레이어 내 가상 화폐인 씨앗1로 가격이 고정됐다. 미리듣기는 전곡 무료이고 전체 분량을 다 들을 수 있다. 구매한 곡에 한해 재생목록을 만들어 들을 수도 있다.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는 곡도 있다. “음악가들이 먼저 요구해 도입한 기능입니다. 자기 음악을 무료로 제공하고 싶은 음악가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분들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블레이어는 인디밴드 음악의 유통 공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지만 좀 더 대중적인 서비스를 위해선 다른 유통방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황 대표는 지난해부터 전세계 음악가를 대상으로 페이스북 응용프로그램(앱)으로 서비스하는 라우드박스를 서비스하고 있다. 

 라우드박스는 페이스북 내 가상 화폐인 ‘페이스북 크레딧’을 이용해 전세계 어디에서나 음원을 구매하기 쉽게 했다. 판매 가격은 음악가가 직접 정한다. 블레이어와 마찬가지로 관리 페이지에서 음악가가 음원과 앨범 재킷을 직접 올리도록 했다. 블레이어는 판매자로 등록하면 음원에 대해 제지하는 규정을 두지 않았지만, 라우드박스는 사이러스쪽에서 승인을 해야 판매하게 했다. 사이러스는 라우드박스에 이용자의 취향을 바탕으로 적절한 음악을 추천하는 서비스를 도입할 계획이다. 최근에는 블레이어나 라우드박스에 등록된 음악을 일반인뿐 아니라 게임업체나 독립영화사에 제공하는 등 B2B 사업으로 확장하고 있다.

◆해외 시장에서 길을 찾다
최근 황 대표는 눈길을 해외로 돌리고 있다. 라우드박스를 서비스하면서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페이스북을 동남아에서 많이 쓰고 있는데 동남아에서는 아직 온라인과 모바일에서의 음원 유통이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한국 시장에서 쌓은 경험을 갖고 들어가면 승산이 있을 것 같습니다.”

 황 대표는 우선 태국 시장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동남아와 페이스북, 음악을 같이 떠올리면 연상되는 단어가 있다. ‘한류’. 그럼 황 대표는 한류 열풍에 기대려는 걸까? 그는 고개를 젓는다.
 “지금의 K-POP으로 대표되는 한류 열풍이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당장은 그쪽의 인기를 활용할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동남아에서 K-POP이 인기가 있다고 하지만 태국만 봐도 시장 점유율이 17% 정도밖에 안되거든요. K-POP을 포함해 현지 음악까지 SNS에서 유통하는 플랫폼이 되려고 합니다.”

 동남아 시장에서 긍정적인 부분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광고를 보는 것에 익숙하다는 점. 한국에서는 음악을 재생할 때 광고가 나오거나 위 아래로 광고가 붙는 것을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태국만 해도 사람들이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게 황 대표의 분석이다. “광고 모델을 기반으로 무제한 스트리밍과 다운로드 상품을 연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죠. 콘텐츠를 잘 확보하면 조기에 안착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가 음악 플랫폼을 통해서 꿈꾸는 것은, 의외로 좀 철학적이다. 그는 ‘같은 필터로 걸러진 음악은 개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천편일률적인 음악이 마치 사회의 다양성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좀 더 다양한 음악을 제약없이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저작권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익을 가져가면 더 다양하고 개성있는 음악들이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사회와 문화에 많은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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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직장인들은 대개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다. 철마다 와이셔츠를 사러 백화점이나 할인마트에 가야 하는 경험을. 면도기나 양말, 속옷 등을 사러 수시로 마트에 가기도 한다. 물론 이런 걸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도 있긴 하다. 아내나 어머니가 사 주는 것을 그대로 쓰는 경우다. 이럴땐 어머니나 아내, 즉 여성들이 대신 선택의 부담을 진다. 

 어쨌거나 몹시 귀챦은 일들이다. 와이셔츠의 경우 생각보다 가격도 만만치 않다. 색상과 브랜드만 보고 샀다가 의외로 별루인 경우도 태반이다. 시간낭비, 돈 낭비에 마음까지 상해버린다. 덤앤더머스는 이런 생활의 불편함을 겪고 있는 남성들을 위한 서비스다. 대기업을 다니던 남자들이 모여 창업했다. 그 불편함과 고민을 가장 잘 알 법한 이들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정주영 회장을 홍보하다 창업의 꿈을 갖다

덤앤더머스의 조성우 대표는 2007년 현대중공업 홍보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00학번인 그가 졸업후 입사한 현대중공업에서 맡은 일 중 하나가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관련된 홍보 업무였다. 올해초까지 현대중공업에 있던 그는 “회사 생활을 정말 후회없이 했다”고 말한다.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했기에 미련이 남지 않는다고 했다. 

 정주영 회장과 관련된 홍보도 담당했기에 그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이 땅에 태어나서’ 등 정주영 회장이 쓴 책도 모두 봤을 터였다. 그런 책을 읽으면서 그의 창업 스토리에 감동을 받고, 그의 인생 역정에 가슴을 치면서 공감을 하기도 했을 법하다. 자극을 받아 더욱 열심히 일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회사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이것은 내 일이 아니라는 거였다. 소중한 사람들도 많이 만났겠지만 자신이 홍보하고 있던 정주영 회장의 삶과 자신의 삶의 괴리는 너무 컸다. 젊은 이들의 창업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오면서 그를 자극했다. 그가 조금이나마 경영에 대한 꿈, 동경을 갖고 있었던 것도 창업동기에 힘을 보탰다. 

 “더 늦기 전에 내 일을 하자.”

 창업을 하는데 의지와 아이디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같이 할 사람을 모으는 것이다. 거의 예외없이, 모든 창업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창업을 함께 하는 이들이 어떻게 모이게 됐느냐일지도 모른다.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결과때문에 이 과정은 잊혀지거나 간과되곤 하지만 말이다.

◆雲從龍 風從虎

그에겐 때마침 함께 창업을 하고픈 같은 과 후배들이 있었다. 다른 회사를 다니고 있던 이들을 떠올린 그가 연락을 하자 즉시 동참하겠다는 화답이 왔다. 그가 창업을 함께 할 생각을 했을 정도로 뜻이 잘 통했던 이들은 즉시 자신들과 뜻이 맞는 사람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대우인터내셔널에서 철강 영업을 담당했고, 특히 중국어에 능통한 정원선 이사가 영업 담당자로 영입이 됐다. SK이노베이션에 있으면서 IR 업무, 특히 해외쪽 일을 했던 이승주 이사는 해외 담당으로 영입이 됐다. 소프트웨어업체 알투소프트, SI(시스템통합) 업체인 대우정보통신 출신의 이승호 이사가 CTO(최고기술책임자)로 합류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비슷한 나이 또래에 3~5년 대기업을 경험해 봤다는 것. 직장생활을 하면서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공감하는 분야가 많다는 점이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후회없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라고 한다. ‘용 가는 데 구름 가고 범 가는 데 바람 간다(雲從龍 風從虎)’라고나 할까.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서로 구하고 좇으면서 더욱 긴밀해지듯이 이들도 그랬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손에 확 잡히는 그런 분명한 아이디어를 갖고 사업을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초창기, 이들은 아무것도 안보이는 그런 일보다 확실하게 시장이 존재하는 사업에서 자신들의 사업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들이 처음 택한 것은 소셜커머스였다. 

 소셜커머스를 시작하면서 이들이 내세웠던 것은 소비자들에게 제품 이상의 가치를 주자는 것. 즉 싸게 살 수 있다는 정도의 가치 말고 다른 게 필요하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었다. 지난해 10월 창업한 회사 이름을 덤앤더머스(DUM & DUMMERCE)로 지은 것도 이때문이다. 덤앤더머스라는 서비스명(회사명)에는 고객들에게 주문했던 것보다 부가적인 가치(덤)를 더 주고, 이를 통해 더 보다 윤택하고 편리한 삶을 제공하며(더머 ; 덤의 비교급), 이를 커머스(상업)을 통해 구현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런 포부를 갖고 서비스에 자신들의 뜻을 구현해 올 2월 문을 열었다. 소셜바우처를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소셜바우처란 예를 들어 50% 할인된 가격에 물건을 사고 해당 지역의 오프라인 매장 할인쿠폰을 쓸 수 있는 혜택을 추가로 더 주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덤앤더머스의 소셜커머스 사업은 금방 한계에 부닥쳤다. 일차적으로는 티켓몬스터, 쿠팡, 그루폰, 위메이크프라이스 등 이른바 빅4가 차지하고 있는 점유율이 너무 높아 후발주자들이 파고들 여지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표현에 따르면 ‘돈을 계속 태워야 하는’ 소셜커머스의 사업에 이들이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내부적인 회의가 점점 커졌어요. 소셜이 없는 소셜커머스를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는 걱정이 있었죠. 그래서 6월부터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직장인을 위한 ‘일상다반사’ 커머스

이때부터 덤앤더머스 창업팀은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이 잘 하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고 싶은 분야는 알겠으니 잘 하는 것을 하자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모두들 직장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직장 생활의 애환과 남성 직장인들의 고민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요즘엔 남성 직장인들이 충분히 구매력이 있는데도 귀챦거나 정보가 없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착안했습니다.”

 기존 소셜커머스가 여성, 그것도 주로 젊은 여성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는 점에 주목한 이들은 성인 남성, 그것도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최적화된 서비스를 만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거라 판단했다. 남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조성우 대표는 자신이 재학중인 연세대학교 MBA(경영학석사) 과정에서 설문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와이셔츠, 면도날, 양말, 속옷 등 구체적인 품목이 나왔다. 이런 제품들을 주로 어디서 구매하는지도 파악했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백화점 가판대(와이셔츠), 할인점 가판대(양말 속옷 등) 등에서 물건을 샀다. 면도기와 면도날의 경우 계획적인 구매보다는 필요성을 느껴 즉석에서 판단해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장 조사를 나갔다. 백화점의 가판대에서는 유명 브랜드의 와이셔츠를 할인판매한다면서 4만원~5만5000원에 팔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오래된 이월상품을 제외하고 대부분 가판대 판매 상품은 할인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가판대 전용 상품으로 출시된 것들이었다. “브랜드는 같지만 디자인이나 섬유 재질이 본 매장 상품보다 떨어지는 제품들이 대부분입니다. 면도기와 면도날도 마찬가지에요. 다들 마트에서 사면 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비싸게 구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비자들이 가격을 모른다는 점을 이용하거든요.”

 자체적으로 이들은 백화점 수준의 고급 와이셔츠를 백화점보다 오히려 더 싸게, 예를 들어 소비자들이 2만원대에 구매할 수 있는 상품 공급선을 확보했다. 면도기는 최대 40%까지 싸게 판매한다. 덤앤더머스는 이 상품들을 정기 배송 방식으로 공급한다. 이름하여 에브리먼스. 매달, 또는 2-3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필요한 생활의 잡다하지만 꼭 필요한 물건들을 받아볼 수 있다. 면도날, 면도기, 마스크팩 등으로 시작한 서비스가 8월 13일 공개됐다. 9월에는 직장인들의 탈모 문제에 도움을 주는 서비스도 기획하고 있다. 

 정기배송 서비스가 다는 아니다. 직장인들의 회식장소 섭외 고민을 해결해주는 대동회식도라는 검색 서비스도 개발했다. 앞으로도 할 게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해외 진출. 해외 서비스를 위해 해외 시장 조사를 하는 한편 해외 인력도 확보했다. “직장인들에게 꼭 필요한 서비스들은 생활 잡화의 정기 배송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밖에도 만남, 가족관계, 직장내 모임 등을 위해 다양한 서비스들을 출시할 계획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세계 직장인들의 필수 종합 포털로 자리 잡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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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은 예상보다 훨씬 넓고 활기가 넘쳤다. 문이 반쯤 열린 회의실에서는 회사를 방문한 손님들과의 토론이 한창이었다. 사무실 안쪽에 마련된 휴게실에는 간단하게 식사를 하려는 여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김정현 대표를 만나러 서울 당산동에 있는 딜라이트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그는 마침 자리를 잠깐 비운 상태였다. IT(정보기술) 분야의 벤처를 주로 취재해온 나에게 딜라이트 사무실의 풍경은 신선했다.  사람과 PC로만 가득찬 적만한 그런 사무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 대표를 기다리면서 찬찬히 사무실을 둘러봤다. 한쪽 구석에서는 보청기를 만드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고 포장과 판매를 하는 공간도 마련돼 있었다. 

그를 만나자마자 든 생각은, 그를 너무 늦게 만났다는 점이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창업을 하고, 돈을 벌고, 사회에 어떻게 환원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 본 그는 창업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사회적 기업이 유행이나 일시적인 붐에 그치지 않고 영속성을 가질 수 있을지. 아마 딜라이트의 가는 길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당초 사회적기업을 취재하기 위해 소개를 받고 받다가 그를 만나게 됐지만, 그와 그의 사업에 대해 꼭 소개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고등학생때 첫 창업

고등학교 2학년때인 2003년, 김 대표는 첫 창업을 했다. 그의 첫 사업은 온라인쇼핑몰. 당시 한창 유행하던 MP3플레이어, 전자사전 등을 싸게 구입해다가 마진을 붙여서 온라인에서 파는 일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돈을 제법 벌었다고 한다. 

 “정말 쉴 새 없이 일했어요” 

 그가 대학에 가지 않은 것은 첫 대입 시험에서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부에 대한 큰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도 영향을 미쳤다. 돈이나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던 것이다. “어차피 대학에 못 간 거 돈이라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말 미친듯이 돈을 벌었죠. 한 달에 천만원씩 벌기도 했어요.”

 하지만 오직 돈을 버는 것만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은 꽤나 공허했다. 학교에 가서 학업을 마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대학 입시가 끝나고 동기들이 대학에 들어간 뒤 1년이 지난 뒤였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 2007년 학번으로 가톨릭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동안 모아둔 돈이 있어서 돈 걱정은 좀 덜하고 공부에 전념하려고 노력했다는 김정현 대표. 하지만 막상 공부를 해 보니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진 못했지만 학업을 통해서 진리랄까, 아니면 삶의 의미? 이런 것에 좀 더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그래서 다시 창업을 기웃거리게 됐죠.”

 1년반 정도 공부를 하다가 그는 2008년 사회적기업 연구모임 넥스터스를 만들었다. 넥스터스는 당시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던 사회적기업에 대한 스터디를 하고 이를 어떻게 국내에 적용할지를 고민하는 그런 모임이었다. 한 학교에 국한되지 않고 대학 연합 동아리 성격을 띄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돈’ 버는게 목적인 인생에 지쳤다

우선 드는 생각은 ‘그는 왜 이런 걸 시작하게 됐을까’다. 그에게 물어보니 ‘돈 버는게 목적인 인생에 회의를 느꼈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회적 기업 기업가다운 답변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역시 구체적인 동기가 궁금했다. 

 “돈을 벌어서 내가 잘먹고 잘사는 것 말고 뭔가 다른 게 없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정말 공허하더라구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나중에 뭐가 남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됐고. 그래서 뜻이 맞는 친구들과 넥스터스를 만들고 여기를 통해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사업을 하는 그런 일을 추진하게 됐죠. 때마침 외국에서 사회적 기업과 관련된 연구가 활발하고 해외 사례들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동기부여가 됐죠.”

 레인보우브릿지라는 회사를 시작한 게 2008년. 8명이서 창업을 했다고 한다. 장애인들이 생산한 과자 등 제품을 사다가 판매를 하는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큰 규모의 사업이 아니었고, 조금씩 하면서 방향을 모색하고 확장을 검토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초기 창업 규모가 너무 컸던 것도 문제였고 사람이 많다보니 의견 조율이 쉽지 않은 것도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그래도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은 아니었다. 김 대표는 넥스터스를 통해 경로당에 봉사활동을 다니다 귀가 잘들지 않는 노인들이 150~200만원을 호가하는 보청기를 구입하는 것을 보게 됐다. 청각장애인에 대한 보청기 사업을 구상하고 있던 김남욱씨를 알게된 것도 계기가 됐다. 김 대표는 보청기 사업을 구상하면서 인도의 사회적기업인 아라빈드 안과병원을 롤모델로 떠올렸다. 지난 1976년 설립된 아라빈드 병원은 최고의 안과전문의들이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면서 명성을 떨쳤고 부자 환자들이 앞다퉈 병원을 찾게 됐다. 지난 2005년 기준으로 연간 수입 1534만 달러, 영업이익은 680만 달러다.

 비록 직접적인 의료행위는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모델이 한국에서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김정현 대표는 김남욱, 원준호, 그리고 넥스터스 멤버인 김정헌씨와 함게 넷이서 보청기 사업에 뛰어들었다. 본격적으로 시작을 하기 전 20094년 4월 중소기업청에 저가보청기 사업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사업지원금 20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보청기 기술력 확보를 위해 연세대 내 의료기기 연구센터와 함께 파트너쉽을 구축했다. 

◆세상을 향한 따뜻한 혁신, 딜라이트

미리 사업제안서도 썼고, 몇 차례 창업 경험도 있었고, 창업 동기도 뚜렷했지만 역시 사업은 쉽지 않았다. 보청기를 자체 기술로 만들려다보니 첫 모델이 나오기까지 1년이 걸렸다. 그래도 대학생 청년이 사회적 기업을 한다는 소식에 도와주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2011년 3월에는 기술보증기금에서 사회적기업 최초로 벤처기업 인증을 받았고 같은 해 6월에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로부터 사회적기업 부설 기술연구소 설립 인증을 받기도 했다.  딜라이트가 지향하는 것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보청기 지원 금액인 34만원에 제품의 가격을 맞춰 소외계층 등 형편이 어려운 수요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는 것. 시중에서 보청기 가격이 한쪽에 100~200만원씩 하는 것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보청기 지원금액을 훨씬 뛰어넘는 이런 고가의 보청기를 구매할 형편이 안되는 청각장애인이나 난청인들이 경제적인 고민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자는 뜻이다.

 이를 위해 직접 보청기 생산시스템을 만들었다. 솔라이어라는 보츠나와 기업으로부터 태양열을 이용한 충전기술을 전수받아 저렴한 생산이 가능해졌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 기존 보청기업체들의 유통 경로를 파괴했다. 중간에 거치는 수많은 유통상을 건너뛰고 직접 소비자들에게 유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이 보청기 구매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지난해 15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50억원대의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회사 이름은 알리는데 성공했지만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보청기 사업만으로는 결코 기업 존재의 이유, 즉 이윤추구를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윤추구라는 목적만 놓고 보면 이런 가격에 이런 사업을 결코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사회적기업이 할 일이죠. 어쨌든 기업이 지속가능성이 있어야 이런 사회적 사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을 꾸준히 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딜라이트는 저가형 보청기만 만들지는 않는다. 고가형, 프리미엄급 제품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금전적 도움 필요한 이들 연결하는 서비스 준비 

사실 딜라이트의 보청기 사업은 그가 하려는 일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보청기 사업을 통해 한국에서도 소셜벤처, 또는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한 그는 다른 분야의 사업을 모색하고 있다. 어찌보면 보청기 사업으로 그는 사회적 기업의 첫 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다음 단계의 일은 금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업. 물론 지금의 고금리 악질 대부업체와 같은 모델은 아니다. 청년들에게 자금을 빌려주되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일이다. 

 “매월 소액의 자금을 기부를 해도 경제적으로 전혀 무리가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만 정보가 부족해서 또는 시간이 없어서 그것을 못하는 사람이 분명히 많이 있습니다. 반면 도움을 받고 싶어도 통로가 없는 사람들도 있구요. 그런 사람들을 온라인을 통해서 연결하는 사업을 구상중입니다. 특정 개인이나 단체에 기부를 할 수도 있고, 저금리로 돈을 빌려줄 수도 있습니다. 딜라이트는 그런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일을 하는 것이죠. 방글라데시의 그라민뱅크를 모델로 하되 좀 더 현 상황에 맞게 소셜 요소를 도입해서 해 볼 계획입니다.”

 이 사업은 내년 하반기께나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출을 했을 경우 상환율 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에 올 하반기 사업을 시작하더라도 베타 서비스 형태로 제한적으로만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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