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글의 창업자 호창성 대표와 문지원 대표는 오랜만에 만나는 부부 기업인이다. 물론 이들을 너무 늦게 만난 감이 있다. ‘빙글’이라는 회사는 분명 아직 스타트업이지만 창업자인 호창성 문지원 대표는 이미 한 차례 성공을 거두고 벌써 세번째 창업을 한 베테랑 창업가들이다. 13년에 걸쳐진 이들의 창업 스토리를 어찌 짧은 시간에 다 들을 수 있겠으며, 이 짧은 글에 다 녹일 수 있겠는가.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실패도 겪어보고, 방황의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들은 그 기간을 통과해 다시 자신들의 기업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기업가 정신’이라는 말 외에 이를 달리 표현하긴 쉽지 않을 것 같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학시절부터 함께 꿈을 키워온 이들이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신뢰했고, 함께 손잡고 계속해서 새출발을 했다는 점이다. 

<빙글 사무실 1층 커피숍에서 만난 빙글의 호창성(오른쪽)-문지원 대표.>

◆IT여 안녕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 93학번인 호창성 대표와 이화여대 특수교육학과 94학번인 문지원 대표가 만난 것은 1994년 대학 연합동아리 엠티(M.T.)에서였다. 첫 만남에서 바로 연인이 됐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졸업을 앞두고 대학생 호창성이 졸업 프로젝트를 제출했는데 이걸 본 서울대 고형석 교수의 한마디 말이 호창성의 인생을 바꿨다. “이거 창업하면 아주 잘 되겠는걸?”

 호창성 대표는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창업을 골똘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졸업 프로젝트 당시 여자친구로서 디자인을 도왔던 대학생 문지원은 정말 머리 속에 ‘단 한번도 창업을 떠올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도대체 뭐길래 고 교수가 창업을 독려했을까. “지금으로 치면 세컨드라이프 같은 거였어요. 아이디어는 분명 좋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너무 경험이 없었고, 창업에 대해 너무 무지했죠.”

 어쨋든 우연챦게 두 사람은 2000년 2월 회사를 시작했다. 소프트웨어진흥원의 창업진흥센터에 당당히 입주도 했다. 이들이 첫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는 1999년 불기 시작한 벤처 광풍의 끝자락이었다. 경험이 부족했던 이들은 투자를 받는 것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센터에 입주하자마자 주위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됐는데 그렇게 생각할 법 하더라구요. 그 당시엔 매일 들려오는 말이, 어떤 회사가 몇 십억을 투자받았다는 둥, 주식 가치가 몇백억이 됐다는 둥 그런 얘기가 넘쳐났거든요. 게다가 처음 사업을 해서 우리는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잘 모르고 있었어요. 하하”

 그리고 채 두달도 안 돼 버블이 꺼졌다. 주식 시장이 폭락하고 투자가 급속하게 얼어붙었다.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자금을 조달할 길이 막막해져버렸다. “그 뒤로 외주도 하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별 걸 다 했죠. 사업 방향도 틀었어요. 세컨드라이프처럼 만들기 위해선 돈이 너무 많이 필요했는데 당장 운영비도 없었거든요. 다행히 이걸 아바타 관련 사업으로 전환했는데 돈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뭐가 잘 되고 있다는 그런 건 아니었죠. 그냥 연명하는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 문 대표의 설명이다.

 자금난은 계속됐고 사업은 앞이 보이질 않았다. 버블이 꺼지고 3년을 버텼지만 한계가 왔다. 결국 이들은 회사를 헐값에 넘겼다. 그러고도 부채가 남았다. 1억원이 넘었다. 당장 빚을 갚기 위해 기업체에 취직이라도 해야 했다. “IT라면 지긋지긋했어요. 그 당시엔 창업에 대한 미련도 없었죠. ‘IT여 안녕’하고 인사를 하고 회사에 들어갔어요.” 2003년, 호 대표는 한화리조트에 취직했다. 

◆암흑기에 피어난 희망

자기 사업을 하던 사람이 답답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의외로 일은 재밌었다. “신사업 기획을 하는 일을 맡았는데, 성패에 연연하지 않고-실패해도 월급이 나오니까-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시도하는 게 나름대로 재밌었어요.” 호 대표의 말이다. 

 반전은 아내로부터 왔다. 창업은 생각도 안했다가 남편을 만나 사업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한 문지원 대표는 회사를 넘긴 뒤에도 창업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창업을 하고픈 마음이 다시 슬금슬금 드는 거에요. 그런데 어떤 분야에서 할까 하다가 제 전공을 생각하게 됐죠. 교육쪽 시장이 크지 않을까. 그런데 좀 더 넓은 세계에서 지식과 경험을 쌓고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느날 남편한테 선언을 했죠. 나 유학갈 거라고.”

 그 말을 듣고 한편 깜짝 놀랐지만 이내 뜻이 통한 남편 호창성. 이왕 가는 거 같이 가자고 했다. 아내는 사업아이템을 찾고, 남편은 경영을 더 공부해 최강의 콤비 체제를 구축하기로 한 것이다. ‘부창부수’라고, 정말 못 말리는 부부다. 

 준비를 먼저 시작한 문 대표가 먼저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났다. 전공은 교육공학. 이어서 호창성 대표도 스탠포드 MBA 유학길에 올랐다. 문 대표는 하버드대에서 공부를 하면서 콘텐츠와 학습의 접목에서 사업 기회를 찾아보기로 했다. “영어 공부엔 모두들 관심이 많쟎아요. 그런데 사실 고급 과정에서는 영어권에서 생활을 해야 실력이 향상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죠. 그래서 가상의 컨텍스트(Context)에서 가상의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나 드라마를 잘 활용하면 놀면서 학습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는 게 문 대표의 생각. 자막을 만드는 사람은 공부도 하면서 재밌는 문화를 즐길 수 있고, 누리는 사람은 자막을 통해 공부를 할 수 있어 어려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의 생각은 맞았다. 문제는 저작권을 해결한 적법한 콘텐츠를 얼마나 조달할 수 있느냐였다. 2007년 실리콘밸리에서 비키를 창업하고 일단 공개된 콘텐츠에 대한 번역을 하면서 유저들의 반응을 살폈다. 유저들은 확실히 드라마나 영화에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유튜브에 공개된 콘텐츠만 갖고 번역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저작권 문제를 해결한 콘텐츠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한국 드라마에 대한 수요가 있다고 판단, 방송사를 찾아갔다가 핀잔만 들었다. “아무리 한류라고 해도 한국드라마는 기본적으로 교포들만 보는 거 아닌가요? 시장이 없을 거 같은데.” 이게 방송사의 반응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이들은 이번엔 제작사를 찾아갔다. ‘꽃보다 남자’ 제작사인 그룹에이트를 방문, 저작권을 해결한 콘텐츠를 처음 따냈다. 첫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드라마가 나가고 1시간 안에 자막이 완성됐고 24시간 안에 36개국 언어로 번역이 됐다.  

 하지만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이트를 운영하는데는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다. 사용자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기술적인 부분의 투자와 보완도 필요했다. 그런데 돈을 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늘어나는 사용자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때마침 터진 금융위기도 한 몫했다. “처음 창업했을 때는 바로 벤처붐이 꺼지더니 이번에는 미국발 금융위기였죠. 어쩌면 창업할때마다 이럴까 싶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첫창업때와 다른 일이 생겼다. 100만명에 달하는 이용자들이 ‘비키 살리기’ 운동을 자발적으로 하면서 한달에 1000만원씩 돈을 모아 회사에 보내준 것이다. 1년 가까이 이용자들의 도네이션에 힘입어 비키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렇게 2009년을 보내고 2010년 드디어 430만달러에 달하는 투자자금을 유치하게 된다. “기분이 어땠어요?” “이제 살았다 싶었죠. 하하” 2011년에는 1800만 달러의 투자를 받으면서 완전히 거듭나게 된다. 2010년 투자와 함께 호 대표의 스탠포드 MBA 동기생인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라즈믹(Razmig)이 비키 CEO로 오게 된다. 그는 NBC유니버설 출신으로 콘텐츠사업인 비키를 위해 최적의 인물이었다. 라즈믹을 영입하고 호창성 문지원 두 대표는 경영에선 한 발 물러나게 된다.

◆‘좋아하는 마음’의 힘

이 부부가 천상 창업가인 것은 비키로 성공을 거둔 뒤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것. “비키는 이용자들이 번역된 자막을 만드는 시스템이었죠. 돈을 받지도 않는데 그렇게 노력과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건 팬으로서의 열정 때문이에요.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모이고, 비키를 살리기 위해 기부를 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이 뭔가를 좋아할 때 엄청난 힘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됐고 이 분야를 좀 더 본격적으로 해 보고 싶었어요.”

 두 사람이 처음에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키는 사실 드라마나 영화 등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일종의 커뮤니티가 됐다. 이게 꼭 영화 등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팬이 생길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커뮤니티 플랫폼을 만들면 된다. 이런 생각에서 2011년 11월 ‘빙글’을 설립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유니크한 관심사가 있기 마련이다. 이걸 공유하고픈 욕구도 있다. 그런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나와 다양한 친분이 있는 이들이 모여있는 SNS에선 이것을 제대로 해소하기 힘들다. 그 안에서 별도의 방을 만들어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주된 목적이 아니다. 그래서 빙글은 관심사 기반 네트워크로 만들어졌다.  

 빙글의 웹 서비스는 2012년 7월 시작됐다. 연예, 스포츠, IT 등 관심이 있는 분야에 글을 올릴 수 있다. 크게 ‘카드’와 ‘파티’로 구성 돼 있다. ‘카드’는 게시판이나 블로그에 올리는 글이다. 주로 사진기반 SNS처럼 사진·영상 등을 짧은 글과 함께 올린다. ‘파티’는 주제별로 모임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다. 

 안드로이드 버전 앱은 2월중에, 아이폰 버전은 3월중에 출시된다. “‘관심사로 세상을 잇는다’가 빙글의 모토에요. 관계를 단순하게 확장하는 게 아니라 관심사를 기반으로 인간 관계의 새로운 차원을 형성하고 싶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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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를 기반으로 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줄기차게 개발이 된 분야다. 해외에서 포스퀘어가 인기를 끌었던 것을 시발점으로 해서 많은 서비스들이 출현했고 국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서비스들이 줄을 이었다. 서비스는 제법 나왔었고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속된 말로 ‘대박’을 친 회사는 별로 보이질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직 특정 지역이라는 것을 매개로 한 서비스에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지역이라는 것 만으로는 어떤 네트워크가 형성되기는 힘든 것일까. 또는 그저 시기적으로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어떻게 해석을 하고 판단을 내리든 지역 기반의 서비스는 아직도 유망한 분야 중 하나다. 지역이 서비스의 핵심이든, 매개체든 말이다. 최근 서비스를 출시한 이노윙(INOWING)이라는 회사는 이 ‘지역성’이라는 것을 좀 더 커뮤니티적으로 접근했다. 지역에 우연성이 아닌 좀 더 친밀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고 서비스를 기획했다.

◆창업에 대한 오랜 열망

이노윙의 창업자 서진철 대표는 직선 대로를 따라 창업을 하진 않았다. 비교적 좀 돌아왔고 직장에서, 학교에서 여러 경험을 하면서 준비를 해 왔다.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창업을 한 것이 아니라 좀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계속 마음 속에 생각을 갖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생각을 실현해볼 수 있을까를 골몰했기 때문이다. 

 충남대 전자재료공학과 92학번인 서 대표는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후지쯔에 입사했다. 전자재료공학과는 컴퓨터 프로그래밍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그는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학과 공부와 별개로 혼자 컴퓨터를 공부했고 후지쯔에 입사해 시스템 엔지니어링 일을 맡아서 했다. 2002년까지 이 회사를 잘 다니다 그는 뜻밖에 좀 엉뚱한,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된다. “컨벤션 있죠, 국제 회의를 국내에 들여오고 이에 필요한 각종 실무를 했죠. 꽤 오래 했어요. 2007년까지 꼬박 5년을 한 셈이죠. ”

 그가 이 일을 한 이유는 좀 다른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공대를 나와 엔지니어로 일하다보니 그에겐 다른 경험을 하고픈 욕구가 있었다. 회사를 경영하고픈 생각이 있었지만 그러기엔 엔지니어라는 백그라운드만 갖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대에 진학해 MBA(경영학석사) 과정을 마친 뒤 BMD(Best Marketing Development)라는 컨벤션기획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기도 했다. 그가 창업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은 서울대 MBA에 있으면서부터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무언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궁리를 하기 시작했죠.” 그래도 바쁘게 직장 생활을 할 때에 비해선 시간이 좀 있었다. 서비스를 구상하고  일종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구상해 특허 등록까지 했다. 

 그가 BMD에 있을 때 한국에서도 아이폰이 출시됐다. 이어 안드로이드 폰이 나오고 세상이 스마트폰 열풍에 휩싸이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사업 구상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사실 저는 처음부터 스마트폰을 생각하면서 사업을 구상한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스마트폰이 나오고 그것을 써 보니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생각지도 못했는데 최적의 환경이 만들어진 셈이었죠.”

◆동지를 찾다

2010년말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서진철 대표. 하지만 막상 창업을 하려니 막막했다. 스스로 코딩도 할 줄 알고 경영에 대한 지식도 쌓았지만, 그는 혼자였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는 일.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템도, 창업 노하우도 아닌 함께 창업할 수 있는 동지 또는 파트너였다.

 특히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기술 쪽 부분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왕이면 최고의 사람을 찾아보자고 생각한 그는 무작정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찾아갔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찾아가서 불쑥 파트너를 찾아달라고 했어요. 조교실을 통해 공고도 했죠. ”

 그는 처음에 서울대 재학생 중에 만나도 좋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많은 경력을 가진 사람을 찾기엔 자신의 창업 경력이 없고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물론 다양한 개발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그렇게 많은 기대를 할 수는 없다는 게 처음의 생각. 그런데 뜻밖에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을 다니고 있던 사람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만난 사람이 송수현 팀장.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으로 당시 삼성SDS에서 일하고 있던 송 팀장을 만나서 서 대표는 직접 찾아갔다. 두 사람은 만나 몇 마디 말을 나누자 뜻이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비전을 공유하고 함께 할 만하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사업을 함께 하기로 결정, 송 팀장은 CTO(최고기술책임자)를 맡았다. 

 2011년 1월 이노윙을 창업할 당시만 해도 혼자였던 서 대표였지만 창업 동지를 찾으면서 사업 진행에 탄력이 붙었다. 그 해 3월에는 정부의 청년 창업 지원 프로그램인 청년창업사관학교에 선정됐다. 그 덕에 사무실도 구하고 멤버들 충원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약 6개월에 걸친 개발 끝에 첫 서비스 얌모를 세상에 내놓게 됐다. 2013년 1월 15일이었다.

◆소셜 앱카페, 얌모

얌모는 쉽게 말하면 지역 기반 SNS라고 할 수 있지만 서 대표는 얌모를 ‘소셜 앱카페’ 서비스라고 설명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얌모가 지역과 관심이라는 두가지 키워드로 웹 서비스에서 유행했던 카페와 같은 기능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역은 일회성으로 방문하는 그런 지역이 아니다. 내가 거주하는 곳, 내가 자주 방문하는 곳, 그래서 그 지역에 대해 잘 알고 관심이 있고 애정도 생기는 그런 곳이다. 친구들과 거의 매일 가다시피하는 카페가 있다면, 혹은 식당이나 공원이 있다면 그 지역 주변이 그들의 관계에서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다. 그 지역의 소식에 궁금해하고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될 확률이 높다. 이런 사람들이 얌모 서비스에 들어오면 로그인을 하고 자신의 관심 지역을 설정하고 타운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관심지역내의 일상이나 생활주변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타운내 구성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예를 들어 보자. 얌모를 다운받아 가입하면 집이나 직장, 강남역처럼 주로 생활하는 지역이나 관심 지역을 ‘타운’으로 설정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나와 같은 지역을 타운으로 설정한 다른 회원들과 자동으로 ‘지역커뮤니티’로 묶이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지역커뮤니티에서 회원들은 일상이나 지역 정보, 지역 내 이슈 등을 주고받을 수가 있다. 

 앱카페는 타운 내에서 공통된 취미나 관심사를 갖는 사람들이 모여 보다 깊이 교류하고 네트워킹 할 수 있도록 제공되는 서비스. 앱카페의 신뢰성과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방장 권한을 대폭 강화한 것도 특징이다. 방장은 앱카페를 생성하면서 일반방과 비밀방 중 선택할 수 있고 사용자 벙어리 기능이나 강퇴 기능을 행사할 수가 있다. 서대표는 “앱카페를 생성하고 운영하는 방장에게는 멤버수에 따른 포인트를 제공, 향후 그에 따른 다양한 혜택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소상공인들을 위한 ‘셀프 광고서비스’도 있다. 여기서 얌모가 의도하는 바가 좀 더 분명해진다. 관심이 있는 그런 지역에서 형성된 커뮤니티를 그 지역의 소상공인들과 연계하는 것이다. 사실 지역의 오래된 상점 등은 해당 지역의 지역성과 빼놓을 수 없는 관계를 지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수익 모델도 이런 지역 커뮤니티와 소상공인의 매개체인 광고에서 비롯된다.

  “요즘 효과도 증명되지 않은채 광고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쟎아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소상공인들이 지역 내 소비자를 대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광고하고 이를 통해 실질적 매출을 올릴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에서 셀프 광고서비스를 기획했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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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60만개가 넘는 음식점이 있지만 막상 집이나 학교, 사무실 등에서 음식을 시켜 먹으려고 하면 어디에다 주문을 할 지 마땅치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일단 어디가 배달이 가능한 지 모르고, 음식이 맛있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떤 종류의 음식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2010년 이후 이런 어려움을 해소해주는 서비스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배달 가능한 업소를 띄워주고, 음식에 대한 평가도 확인할 수 있다. 전화 한 통화만 걸면 음식을 시킬 수 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전화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전화를 걸어 주문하는 방식을 고수하면 여전히 불편함이 남을 수 있다. 주소를 말해야 하고, 원하는 조건을 이것저것 확인해야 하며, 아차 까먹고 얘기 한 것이 있으면 다시 전화해서 말해야 한다. 그 와중에 통화중이거나 하면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요기요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전화통화의 불편함을 없앴다. 굳이 통화를 하지 않고도 주문과 배달의 과정을 해결해준다. 이 차이가 얼마나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컨설턴트 출신의 창업가

요기요를 이끌고 있는 나제원 대표는 2008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맥킨지앤 컴퍼니 컨설턴트로 재직했다. 엘리트 코스를 착실하게 밟고 있던 그의 진로가 수정된 것은 창업 전선에 뛰어들면서부터.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그는 확실하게 알게 된 것 같다. 자신의 적성이 남의 일을 참견하고 코칭하는 것이 아니라 작아도 자신의 일을 하나씩 해 나가며 성취감을 느끼는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박은상씨와 함께 소셜커머스 회사 슈거딜을 창업했다. 

 2010년 6월 만든 이 회사는 비교적 초기에 만들어진데다 창업자들의 열정에 힘입어 꾸준히 성장을 해 나갔다. 하지만 그가 창업멤버로 처음 시작한 이 회사는 오래 가진 않았다. 소셜커머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난 덕에 2011년 4월 위메이크프라이스에 인수가 됐다. 

 슈거딜이 허민 사장이 하는 위메이크프라이스에 인수가 된 뒤 나제원 대표도 그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맡은 일은 위메프의 경영전략담당 실장. 그런데 갑자기 힘이 쭉 빠진 것 같았다고 한다. “물론 위메이크프라이스도 벤처회사지만 그래도 슈거딜에 비하면 큰 회사쟎아요. 큰 조직에 들어와 일을 해서 그런지, 내가 창업때부터 같이 한 회사가 아니라, 그런지 일이 재미가 없더라구요. 그러다 보니 내가 뭘 할지, 앞으로 어떻게 할 지 등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어느날 ‘이렇게 살지는 말자’, 하고 회사를 나오게 됐죠.”

 ‘그럼 창업을 새로 하기로 하고 나온건가?’ 그에게 물었다. 물론 다시 창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사실 아무 대책은 없었다고 한다. 그냥 나왔기 때문이다. 슈거딜을 같이 창업했던 박은상은 위메이크프라이스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지금 위메이크프라이스의 대표이사가 됐다.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에 대해 다양한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박은상 대표는 경영에 대해 ‘의사결정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저는 좀 달랐어요. 저에겐 오너십이랄까, 그런게 중요했어요. 회사 이름을 짓고, 직원을 직접 뽑고, 사업을 하나씩 계획해서 해 나가고 그런 과정을 통해 회사와 내가 함께 성장한다는 느낌? 그런게 좋았거든요.”

 그가 회사를 나와 이런 막연함 가운데 있을 때 유럽의 인큐베이팅 업체 팀유럽은 딜리버리 히어로라는 배달 전문회사의 한국 버전 ‘요기요’를 국내에 설립하고 경영진을 물색하고 있었다. 나 대표가 팀유럽의 연락을 받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2012년 여름이었다.

◆통화를 하지 않고 주문을 한다

당시 요기요 대표는 루돌프 정. 그의 연락을 받고 처음엔 좀 망설였지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나제원. 생각보다 회사의 일은 훨씬 재미있었다. “제가 생각했던 기업 경영의 핵심적인 부분을 경험하고 제가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요기요라는 이름은 ‘시장기를 면할 정도로 먹다’는 뜻의 한자어 ‘요기’(療飢)에 음식점에 들어가 주문을 할 때 통상 쓰는 말 ‘여기요’를 더해 조합한 말이다. 두 가지 의미 모두 ‘요기요’의 ‘빠르고 편하게 주문할수 있는 배달음식 주문서비스’의 성격과 맞다고 판단돼 채택됐다.

 요기요는 다른 배달음식 주문서비스와 달리 별도의 전화통화 없이 웹사이트나 모바일 앱을 통해 음식을 빠르고 편리하게 주문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배달 가능한 음식점을 검색하고 메뉴를 선택한 뒤 주문까지 5번 정도 클릭하거나 터치하면 주문이 완료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화를 걸 필요가 없다는 것과 복잡한 회원 가입 절차가 없다는 것. 주민등록번호 등을 입력할 필요 없이 웹사이트나 모바일 앱에서 이메일만 입력하면 회원가입이 가능하다.

 5월에 합류한 나제원은 2012년 10월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대표가 된 뒤 그는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현재 서울, 수도권, 부산 지역에 제공되고 있는 요기요 서비스는 올해 2분기까지 전국 확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요기요는 서비스 개시 6개월만인 지난해 12월 애플의 앱스토어가 선정한 ‘2012년을 빛낸 최고작’중 ‘올해의 파격적인 서비스 앱’에 선정되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나제원 대표는 “기존의 배달 서비스와 가장 큰 차이점은 소비자가 음식점과 통화를 할 필요가 없이 음식점 검색, 메뉴 선택에서 주문 완료까지 모든 과정을 요기요 플랫폼 안에서 빠르게 완료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또 요기요는 다른 업체와 달리 광고가 존재하지 않고 클린 리뷰 기능을 통해 음식점에 대한 신뢰 높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기존 배달앱들과 다른 점이 또 있다. 지금까지의 배달 관련 앱이나 서비스들은 광고를 주된 수익모델로 하고 있다. 광고를 상위에 노출해주거나 추천업체 선정 등의 시스템을 운영해 돈을 버는 방식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요기요는 사용자들이 얼마나 사용하고 주문을 했는지 등을 기준으로 랭킹 기능을 도입해 사용자들에게 인기있는, 또는 평가가 좋은 그런 업체들을 바로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요기요는 업소들로부터 수수료를 받고 있다.

◆국민의 배달습관을 바꾸겠다

이처럼 수수료 방식의 서비스가 가능한 것은 요기요가 사람들의 검색, 주문, 결제 등을 모두 파악할 수 있기 때문. 기존 배달 앱들은 앱을 실행해 음식점 정보를 찾은 뒤 전화를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어느 지역의 어떤 사람이 정보를 찾았는지, 실제 이 사람이 주문을 했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요기요에서는 이런 정보를 모두 알 수 있다. 음식점에 대한 리뷰도 실제 배달을 시켜본 사람이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정보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다는 뜻이다.

 서울과 수도권, 부산을 중심으로 배달 가능한 식당 6000여개가 등록돼 있고 약 6만여명이 요기요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다. 수십만개에 달하는 음식점 수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요기요의 존재와 편의성을 알리는 게 급선무. 그런 점에서 보면 나제원 대표의 합류 직후 입사한 박지희 부사장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박 부사장은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다. 업계에서 최초로 IPTV 뿐 아니라 공중파에도 광고를 내보냈고 온라인마케팅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요기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람들의 배달에 대한 인식과 주문 방식을 바꿔보겠다’는 것. 전단지를 찾고, 전화를 걸고, 일일이 설명을 하고, 통화중이면 다른 집에 걸고, 잘못 얘기해서 다시 전화를 거는 등 불편하고 귀챦은 일련의 주문배달 과정을 요기요에서 간편하게 해결하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바꿔보겠다는 것이다. 

 전국의 음식점 중에는 배달이 안되는 곳도 상당수 있다. 이런 곳에는 배달 전문 업체와 연계해 배달을 대신 해주는 서비스도 준비하고 있다. 전화 한통화 걸지 않고, 배달이 안되는 음식점에서 배달을 시켜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 대표는 “현재는 일부 업소에 한해 온라인·모바일 결제를 시범서비스로 제공하고 있는데 2월중 전체 등록 업소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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눔(Noom)의 창업자 정세주 대표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오래오래 숨겨두고 싶었다. 그의 창업 스토리는 ‘언젠가 벤처업계의 신화와 전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이미 여러 매체에 여러차례 다뤄졌지만 나 만큼은 꼭꼭 숨겨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제대로 다뤄보고 싶었다. 사실 눔이 워크스마트랩스였던 시절, 2011년초에 그의 이야기를 블로그와 신문 지면에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짧게 썼다. 아마 그때도 많은 이야기를 숨겨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새 워크스마트랩스는 눔이 됐고, 미국에서 출발한 눔은 한국에도 진출하고 아시아 진출도 시작했다. ‘더 이상 안쓰고는 못 버티겠다’는 느낌으로 그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련다. 물론 이것 역시 앞으로 오랫동안 펼쳐질, 눔과 창업자 정세주 대표의 길고 긴 이야기 중 아주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사업으로 시작한 20대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아직 눔(Noom)이라는 회사에 대해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을 위해 워크스마트랩스(workSmartLabs) 시절을 간단하게 얘기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워크스마트랩스가 국내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창업자가 한국인이어서라기 보다는) 구글이 이 회사를 2009년과 2010년 연이어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뽑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원 4명으로 시작한 이 작은 회사가 구글 안드로이드 마켓 출범 후 줄곧 헬스·피트니스 부문 순위 1위를 달리는 앱을 만들었고, 내놓는 앱마다 히트를 쳤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인데도 구글 출신 유명 개발자들을 직원의 절반으로 고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끌 만했다. 이 회사를 창업한 이가 정세주 대표였다.

 정 대표의 창업 스토리는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익대 전기전자공학부에 입학한 그는 대학 공부에서 큰 동기부여를 받지 못했다. 학교 공부에서 크게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숱하게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들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창업을 한 스티브 잡스의 사례에서 보듯, 대학생 정세주도 스무살 때 해외 희귀 음반을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본인도 놀랄만큼 잘됐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나서부터 급격하게 어려워졌다. 소리바다 등 공짜 음악 다운로드 서비스(P2P)가 나온 뒤 매출이 예전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건강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암에 걸려 돌아가셨고 가정이 어려움에 빠졌다. 2003년 병역특례로 군생활을 대신한 그는 2005년 병역특례가 끝날때쯤 한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미국으로 가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하신 “더 큰 세상이 있다”는 말씀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스물다섯살이 된 청년 정세주는 비행기표와 사업을 정리할 때 남은 돈 500만원만 달랑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어떤 책에서 그런 내용을 봤습니다. 남을 통해서 자신을 확인하려고 하면 사람들의 진짜 생각으로부터 멀어진다구요. 자신의 내면에서 원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고 사회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에 인생을 건다는 게 안타까왔고,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도 그는 당차게 사업을 벌였다. 음악을 좋아했기에 이번엔 뮤지컬 관련 일을 했다.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제작해 한국 무대에 올리려고 했다. 일은 잘 풀리는 듯 했다. 미국과 한국에서 투자금을 받아 사업은 더 커졌다. 그런데 한국쪽 투자자들이 갑자기 투자하지 않기로 하면서 쫄딱 망했다. 뮤지컬 제작의 다리를 놨던 에이전시 회사가 그를 고소했고 그는 빚만 작뜩 짊어지게 됐다. 갈 데가 없어진 그는 뉴욕 할렘가로 쫓기듯 숨어들어갔다. 2006년의 추운 겨울날이었다.

<눔의 창업자 정세주 대표(왼쪽)와 아텀 대표.>

◆할렘가에서 재기를 꿈꾸다

한때 그는 삶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었다. 허드슨 강가에 나가 강물을 쳐다보며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할렘가로 들어갔지만 거기서도 하루하루는 불안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엄청난 빚을 짊어졌다는 것이 갖고 오는 파장은 상상 이상이었다. 불안한 나날을 이어가던 중 할렘가에서 알게 된 어떤 흑인이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세주. 그냥 여기서 계속 살 거 아니지? 이렇게 있지 말고 투자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 봐.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어.”

 정세주 대표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돌이켜 자기를 고소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바로 행동에 옮긴 게 변화의 원동력이 됐을지 모른다. 솔직하게 모든 얘기를 털어 놨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고 심지어 어떤 이는 적극적으로 다시 그의 재기를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다.

 “실패했다가 재기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대화를 하면 반드시 방법이 생긴다는 것을. 물론 그게 미국이라서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아텀 페타코프(Artem Petakov)를 만난 것은 그의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만난 아텀은 20년 경력의 베테랑 엔지니어였다. 구글에서 일하고 있던 아텀과 정세주는 금방 친해졌다. 마음이 가난했던 정세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했고 아텀은 그런 정세주에 대해 호감과 함께 가능성을 발견한 것 같다.  

 두 사람은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는 게 너무 재미없고, 관리도 잘 안된다는 것에 착안했다. 운동량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주고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강에 초점을 맞추면 사업이 될 것 같았다.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정세주의 소망과도 맞아 떨어졌다. 

 아텀은 그동안 모아 둔 돈을 몽땅 투자했다. 정세주 대표는 자신의 재기 발판이 된 할렘가에 사무실을 열고 사람을 모아 앱 개발에 몰두했다. 회사 이름을 워크스마트랩스로 지었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생활이 편해진 건 아니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앱 기획과 개발에 몰두했다. 밥 사먹을 돈이 없어서 구글 식당으로 가 식사를 하고 오기도 할 정도였다.

◆10년의 승부

그런 과정을 거쳐 2008년말 구글의 온라인 앱 장터인 안드로이드마켓에서 ‘카디오 트레이너’가 출시됐다. 출시된 이후 카디오 트레이너는 줄곧 안드로이드 마켓 헬스 분야에서 1위를 달렸다. 지금까지 다운로드 건수는 1000만이 넘었다. 

 카디오 트레이너는 휴대폰을 몸에 지니고 운동을 하면 알아서 거리, 속도, 경사도, 칼로리 소모량 등을 측정해 주는 앱이다. 이어서 출시한 칼로리픽이라는 칼로리 관리 앱도 나오자자마자 돌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워크스마트랩스는 구글이 선정한 가장 혁신적인 앱 개발사에 꼽혔다.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2011년에는 ‘카디오 트레이너’의 운동량을 측정하는 기술과 ‘칼로리픽’의 식단 관리 기술을 결합, 다이어트에 필요한 모든 트레이너를 제공하는 ‘눔 다이어트코치’를 선보였다. 이 앱은 출시된 뒤 2년 가까이 구글플레이 건강 분야 톱10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료 모델이 출시된 이후론 구글플레이 건강 분야에서 매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 600만명이 넘는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2011년에는 세계 최대 벤처캐피털업체인 클라이너퍼킨스코필드앤바이어스(KPCB) 등으로부터 28억원을 투자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워크스마트랩스 투자를 결정·집행한 KPCB의 모바일 분야 투자펀드 아이펀드(iFund) 대표를 맡고 있는 맷 머피를 만났을 때 왜 정세주 대표와 그의 회사에 투자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템도 물론 좋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실패를 포함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해 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창업 멤버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과 사업 비전이 좋았다”

 미국 시장에서 크게 인기를 끈 뒤 정세주 대표는 회사 이름을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은 눔(Noom)이라고 바꾸고 최근엔 한국 시장에도 진출을 했다.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돼 다운로드 300만건을 기록했다. 

 그에게, 한국 사업은 ‘아시아 진출을 위한 출사표’다. 그의 꿈은 최고의 앱 회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건강이라는 키워드로 전 세계인의 건강한 생활을 이끌어주는 최고의 회사, 최고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 시작이죠 처음부터 ‘최소 10년의 시간을 두고 자리를 잡자’는 생각으로 회사를 만들었습니다.그리고 구글이 진출하기 어려운 시장에서 승부를 보려고 했죠.긴 호흡으로 회사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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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이 삶인 사람들이 있다. 주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쉽게 창업을 하고, 빨리 적응하며, 잘 안될 때는 미련없이 정리한다. 그들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거나 분석하려고 해 봤자 머리만 아프다. 그렇다고 이들이 괴상하거나 이상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생각하는 바가 다를 뿐이다. 미미박스 창업자인 하형석 대표는 이런 스타일에 가깝다. 오래 고민하기보다는 몸을 던지고, 빨리 배운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떠오른 생각을 즉각 행동에 옮긴다. 거침없다.

◆군고구마 장사에서 쇼핑몰 운영까지

‘나는 창업형 인간’이라거나 ‘꼭 창업을 해야겠다’ , 이런 식으로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 식의 자기확신형 규정이 그에겐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냥 행동했다. 

 2002년 경희대학교 환경공학과에 입학한 학생 하형석. 대학생이 되면 다들 용돈도 벌 겸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그는 쇼핑몰에서 운동화를 파는 일을 했다. 프리챌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운동화가 매매되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 고가 운동화에 대한 수요가 많던 시절, 정가보다 싸게 제품을 받아다 쇼핑몰에서 팔았는데, 제법 잘 됐다. ‘

 8개월 정도 하던 그가 사업을 그만 둔 것은 학업때문이 아니라 건강 때문. “제가 그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나 봐요. 건강이 나빠졌는지, 의사가 뭘 하든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중단하라고 하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보면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그때는 돈을 집어 넣어서 바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했어요.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랬죠.”

 그래놓고선 그는 그 다음해 바로 다른 사업을 했다. 이번엔 군고구마 장사. 왜 이걸 하려고 했는지, 본인도 모른다. 그저 남들이 보기엔 기상천외한 발상이다. “현금을 벌기에 이것만큼 좋은 사업이 또 있을까 싶어요. 고구마 한 박스를 팔면 14배가 남는 장사였어요. 초기에 이것저것 투자 비용 감안해도 장사 시작한 바로 그날 BEP를 돌파했죠.”

 강남역 인근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도 잘 잡았다. 구청직원들이 가끔 나왔지만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라 생각했는지 강하게 단속도 하지 않았다. 친구하고 둘이서 시작했는데 한달만에 800만원을 벌고 둘이서 중고차를 한대 뽑았다. 장사는 무지하게 잘 됐다. 오후 6시부터 8시30분까지 2시간30분만 하면 충분했다. 아무리 많이 구워놔도 다 팔렸다고 한다. “나중엔 아파트 전단지 붙이고 배달까지 했어요. 친구 하나가 더 달라붙었죠. 너무 장사가 잘 됐는데, 겨울이 끝나서 그만뒀죠. 군대도 가야했구요(웃음)”

◆아프간에서 인생이 달라졌다

군대에서 그는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나가게 된다. 거기서 미국 병사들과 알게 됐는다. 그런데 이 병사들이 그를 미국에 있는 집으로 초대를 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초대를 받아서 갔다! 

 처음으로 미국 생활을 경험한 휴학생 하형석.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별로 나질 않았다. 그런데 부모님을 설득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설득하기보단 ‘어쩔수 없게라도 남아야겠다’고 생각, 미국 친구(미군 병사)네 집에 머무르면서 진학 준비를 했다. 그리고 뉴욕의 패션스쿨에 입학했다. 학교에 들어가게 됐으니 미국에 남아 있겠다고 부모님께 통보를 하고 그는 그대로 미국에 눌러 앉았다. 

 한국에서는 공대에 입학했던 그가 미국에서는 패션을 전공으로 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자신의 관심사를 발견하고 그 쪽에 승부를 던져본 셈이다. 그리고 그게 통했다. 패션마케팅을 전공으로 한 그는 2009년 학교를 졸업한 직후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인 톰 포드가 설립한 톰포드사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 들어온 그는 2010년 8월 한국에서 다시 회사를 설립했다. 이번엔 패션디자인 분야였다. 군고구마와 운동화를 팔던 청년이 패션 사업가가 되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물론 하 대표는 패션디자이너는 아니었다. 그가 하는 일은 패션디자이너들을 위한 효과적인 마케팅. 그는 회사를 차려 국내 유명 디자이너들의 해외 진출을 기획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티켓몬스터에서 연락이 왔다. 티몬의 창업자 중 하나인 김동현 이사가 패션·뷰티 분야 서비스 런칭을 위해 그를 찾은 것이었다. “회사 대 회사로 계약을 맺었어요. 제가 일주일에 2~3번 정도 티몬에 가서 패션·뷰티 관련 업무를 하는 내용이었죠. 일종의 인하우스 컨설팅이라고 할까요. 팀 세팅도 하고 마케팅 기획도 했어요. 그런데 티몬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나중엔 티몬 일이 주된 일이 될 정도였죠.”

 티몬과 일을 하면서 그는 소셜커머스라는 분야에 눈을 떴다고 한다. 아프간에서 만난 미국 병사로 인해 패션과 뷰티 마케팅이라는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된 그는 이제는 소셜커머스를 알게 됐다. 그러면서 그가 생각한 것이 정기 배송 서비스. 특히 화장품 분야의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생각했다. 화장품 샘플을 업체로부터 무료로 받아 소비자에게 유료로 판매하는 것. 물론 대신 업체의 마케팅을 해주는 사업이다. 소비자는 저렴한 비용으로 신상품을 계속 써 볼 수 있고 화장품 업체는 고객을 늘릴 수 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했을 때 국내에서는 이미 글로시박스가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후발주자라도 괜챦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아직 시장이 아주 초기라고 봤기 때문이다.

◆올해의 과제, 모바일과 해외 진출

삼성증권 리테일브로커 출신의 김도인 이사, 화장품 브랜드 유통업을 했던 이재호 이사 2명이 공동창업자로 합류했다. 아이디어를 제안한 하형석 사장이 대표이사를 맡았다. 초기에 이들의 사업 자금은 3500만원. CTO(최고기술책임자)도, 디자이너도 없이 서비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법인 설립이 2011년 12월1일. 서비스가 출시된 것은 2월7일이었다. 69일이 걸렸다. “홈페이지 제작은 외주에 맡기고 저희는 서비스 기획만 한 거죠. 시작은 소호 사무실을 빌려서 했어요.”

 후발주자인 미미박스는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해나갔다. 2월에 여성 대상 화장품을 출시한 뒤 3월에는 아기용품을 출시했고, 4월에는 남성 용품으로 확대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의류와 면도기 등 다른 용품으로도 확장을 했다. 그런데, 화장품을 제외한 다른 분야는 잘 안됐다. 그래서 결국 화장품을 빼고는 전부 접었다. “너무 빠른 시일 내에 너무 많은 카테고리에서 사업을 했던 것 같아요. 화장품을 제외하곤 시장의 반응도 그때 그때 오지 않았구요. 직원은 늘어나고 비용은 급증하는데 돈이 안 됐죠. 이때가 제일 어려웠던 것 같아요.”

 빨리 결정을 내린 하 대표는 화장품 분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선발주자인 글로시박스와 차별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샘플만 팔지 않고 정품을 팔기로 했다. 예를 들어 이번 달에 샘플을 받아본 사람은 다음 달에 그 제품을 써 보고 마음에 들면 미미박스 홈페이지에서 정품을 구매할 수 있는 식이다. 

 그는 미미박스의 화장품 box 판매가 월5000개 정도에 이르렀을 때 어떤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회원 수 증가 속도가 급격히 둔화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CJ E&M과 제휴를 맺고 On Style에서 매주 정기적으로 방송을 내보낼 수 있게 됐다. 겟잇뷰티라는 코너를 통해 2주에 28회씩, 한달에 56회 상품을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방송이 나가고 1주만에 회원이 8000명이 늘면서 그는 미디어 파워를 실감했다. “이때 1차 한계를 극복했다는 느낌이 오더군요. 그 뒤로 회원이 계속 늘어 지난해말 현재 지금은 월 정기배송 물량이 2만 박스 정도 됩니다. 연말에는 5만 박스로 늘어날 것 같아요.”

 그는 올해 모바일 진출로 두번째 도약을 노리고 있다. 이를 위해 모글루 출신의 김남수 CTO를 영입했다.  김 CTO는 모바일 서비스를 위해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을 총괄하게 된다. 3월에 모바일 서비스가 시작되면 회원들이 앱을 통해 서비스를 주문하고 결제를 하고 상품정보를 확인하고, 정품까지 구매할 수 있게 된다. 하반기에는 해외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작년에 제품을 확대하다가 잘 안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제가 아직은 경영자로서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요. 모바일 시장에 대한 기대는 크지만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그래도 분명한 것은 우리 서비스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입니다. 소비자는 정품이나 다름없는 샘플을 싸게 쓸 수 있고, 업체는 온라인 마케팅 뿐 아니라 방송 등 미디어와 오프라인 마케팅까지 저희와 함께 할 수 있어요. 마케팅 파트너인 셈이죠. ”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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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률 높아졌지만 청년 고용률은 되레 떨어져..

-50대 창업자수 최대라지만..대부분 영세자영업

-국민의 절반, ‘나는 중하위계층’이라고 인식. 

-경제성장률, 2년 연속 잠재성장률 밑돌 듯.

-급속한 고령화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률

-복지혜택 늘지만 저임금 근로자에 대한 복지는 없어


최근 몇 달 동안 신문·방송·인터넷의 경제분야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뉴스들이다. 고용, 성장, 복지 등 실물경제 주요 부문 중 어디에서도 긍정적인 뉴스를 발견하기 힘들다. 1차적인 원인은 대외 변수에 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유럽발 재정위기가 갈수록 심화되면서 수출이 감소하자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의 성장률이 급격하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성장률이 떨어지자 기업들은 투자를 축소하고, 고용을 줄이고 있다. 물론 구조조정 규모는 늘어난다. 

 이 결과가 20대 청년 고용률의 하락과 50대 이상 장년층의 고용률 상승이다. 청년들은 취업을 못하고 장년층은 실직을 한 뒤 퇴직금으로 준비안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복지 혜택은 늘어나고 있지만 최저생계비 수준의 소득을 간신히 벗어난 이들에 대한 혜택은 거의 없다. 

◆성장률은 떨어지는데, 근본적인 대책은 없다

학계와 언론에서는 그동안 이런 문제점을 줄기차게 지적해 왔다. 언론에서 계속 이런 기사가 나갔다는 것은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곳곳에서 관련된 제언을 하기 때문이다. 즉 기본적으로 언론들이 자신들만의 생각을 적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여러가지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청년 고용을 높이거나 창업을 독려하기 위해 관련 지원 제도를 만들고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취업할 수 있도록 고졸 채용을 적극 장려하기도 한다. 저임금근로자의 소득을 보전하고 근로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EITC(근로장려세제)를 확대시행하기로 했다. 기획재정부는 갈수록 떨어지는 성장률을 방어하기 위해 상반기에 전체 예산의 72%를 배정하기로 했다. 하반기에는 추가경정예산 편성의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출산률을 높이기 위해 각종 보육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셋째를 가지면 현금으로 지원해주고,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고 맞벌이를 할 수 있도록 보육 지원을 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안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문제가 터진 사안이나 예상되는 불안감에 대비해 개별적인 대책들을 마련해 막기에 급급한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근본적인 대책은 뭐가 있을까.

◆중소기업 대책이 핵심

이런 모든 해결책을 포괄하는 종합 대책을 이 글에선 ‘중소기업에 정책적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라고 본다. 스타트업, 벤처기업을 포함해 중소·중견기업이 차별을 받거나 불필요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정책을 만들어가는 것은 기본. 여기에 더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는 중소기업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를 위에서 제기한 각 문제별로 살펴보자. 우선 고용 측면.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따르면 지난 2010년 기준 한국의 기업 수는 312만5457개. 이 중 대기업이 187개로 0.00006%, 중견기업은 1291개로 0.04%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99.9% 이상이 모두 중소기업이다. 고용 규모로 따져보면 대기업은 106만명을 고용, 전체 근로자 1413만명 중 7.5%를 차지했다. 중견기업의 경우 108만명을 고용하고 있어 7.6%였다. 중소기업은 나머지 1199만명을 고용해 비율이 84.9%에 달했다.

 숫자로 보나, 고용 규모로 보나 중소기업은 한국의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수출이 대기업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정부는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을까. 고용창출투자세액공제, R&D투자세액공제 등 대표적인 비과세·감면 조항을 보면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혜택을 받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조세지출예산서에 따르면 지난해 각종 비과세·감면 조치로 인한 조세지출(기업 대상) 가운데 대기업이 가져간 몫이 절반에 달했다. 물론 정부가 점차 중소·중견 기업에 대한 혜택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지만 이는 비교적 최근에 수정된 방향이다.   

 일자리의 대부분을 중소기업이 만들고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중소기업이 더 고용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대기업이 고용을 더 하도록 하는 것보다 효과가 클 것은 자명하다. 비율로만 따지면 대기업에서 고용을 늘리는 것이, 일부 엘리트 층이나 고학력층에겐 기회를 넓혀줄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일자리 파이를 늘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벤처→중견→대기업의 사다리가 없다

벤처기업은 중소기업이 되고,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가 대기업이 된다. 꼭 모든 기업이 이런 공식을 따를 필요는 없겠지만 경제가 성장하려면 기업도 같이 성장해야 하는 게 맞다. 그리고 사업이 잘되면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몸집이 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엔 극히 소수의 대기업이 있고, 엄청나게 많은 수의 벤처 및 중소기업이 있는 반면 중견기업의 수는 매우 적다. 중소기업 중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드물고, 중견기업 중 대기업이 되는 사례는 더욱 더 희귀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자. 이번에도 KOTRA 자료를 인용해보겠다. 독일의 경우 전체 기업 중 중견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숫자 기준)이 11.8%에 달한다. 중국이나 일본도 각각 4.4%, 3.7%다. 스웨덴은 무려 13.2%에 이른다. 이 비율이 비교적 낮은 영국이나 이탈리아도 각각 0.7%, 0.5%로 한국에 비해선 월등하게 높다. 미국도 0.17%로 우리의 4배가 넘는다. 중견기업에 대한 기준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감안해도 한국은 전체 기업 중 중견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낮다.

 여기엔 중소기업이 지나치게 많다는 문제점도 숨어있긴 하다. 일본의 경우 전체 기업의 수는 180만개, 대만은 127만개다. 대만은 그렇다쳐도 일본은 우리보다 경제규모가 월등하게 큰데 전체 기업 수는 우리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우리가 중소기업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중소기업이 많지만 대부분 영세하다. 소규모 창업이 많은 이유도 있다. 어디서나 빛과 그림자가 존재하는데, 창업이 많은 것은 새로운 도전이 많아 경제가 그만큼 활력이 넘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계에 쫓겨 원치않는, 또는 준비 안된 창업을 하는 이도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중소기업이 유독 많은 이유에 대해선 보다 면밀한 조사가 필요한 영역이다.

 창업을 해서 이 기업들이 커갈 수 있는 사다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 사다리가 없다. 이 사다리는 상당 부분 자본화를 통해서 조달된다. 이 블로그에서 KDI의 김기완 연구원의 보고서를 인용한 적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 김기완 연구원의 글 인용이 다시 필요할 것 같다. 

 김 연구위원은 지난해 11월 발간한 ‘제2의 벤처붐을 맞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벤처 수는 갈수록 늘지만 코스닥 상장 벤처기업은 오히려 줄어드는 현상을 지적했다. 2005년 전체 9732개 벤처기업 중 405개 기업(4.2%)이 코스닥에 상장돼 있었지만 2010년에는 2만4645개 벤처기업 중 1.2%에 불과한 295개만 상장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벤처기업 수는 분명 5년새 2배 넘게 늘었는데 상장사는 오히려 줄었다. 

 왜 이럴까. 시장이 작아 자본화가 쉽지 않다는 점, 정부에 의존한 벤처가 많다는 점, 벤처캐피털이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점, 혁신적인 기술 기업이 없다는 점, 생태계가 없다는 점 등 이유는 무수히 많다. 이 글에서 이 주제까지 다루는 것은 범위를 넘어가는 일이다. 하지만 시장이나 기업가들의 문제를 제외하고 정부 정책만 놓고 보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정부 정책의 전문성이 너무 떨어져 정책의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다리가 존재하지 않다시피하는 지금의 생태계가 됐다. 이 사다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것이 중소기업 정책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복지, 출산정책의 핵심도 중소기업

복지 문제를 우리는 자꾸 사람들에게 돈을 퍼줘서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생활의 어려움은 정부가 각 집에 돈을 갖다 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일자리가 있으면 사람은 열심히 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즉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다. 그리고 물론, 그 일자리의 수준도 중요하다.

 이제 국내 대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거칠게 말하면, 중산층의 삶을 이미 누리고 있거나 그런 삶을 꿈 꿔 볼 수 있는 그런 단계에 와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중소기업은 사정이 다르다. 같은 직종에 종사한다고 하더라도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과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의 임금 격차는 상당하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누리는 행복감에도 상당한 격차가 있다.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일자리만 생겨도 기뻐하겠지만 막상 일을 하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일자리의 질을 따지게 된다. 국내 근로자의 대부분이 일하는 중소기업은 임금이나 사회적 지위, 노후 보장 등에 있어서 대기업에 훨씬 미치지 못한 조건을 갖고 있다. 대기업에게 고용을 아무리 늘리라고 해도 별 소용이 없다. 그들이 아무리 커도 고용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벤처기업이 중견기업이 되고 중견기업이 될 수 있는 그런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산의 문제도 일자리와 관련이 있다. 물론 양가 집안의 관계, 개개인의 가치관 등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 있지만, 출산을 하지 않고, 해도 늦게 하며, 적게 아이를 낳는 것의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는 일자리다. 일자리가 불안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하면 아이를 낳는 것이 사치가 된다. 아이를 낳는다고 아무리 돈을 주고 해도 해결이 안된다. 근본적인 문제에 일자리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작지만 좋은 회사에 다닌다고 생각하고, 이 회사가 전망이 있으며, 임금도 대기업 못지 않으면, 출산을 마다할 이유가 그닥 많지 않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이와 딴판이다. 출산 문제의 핵심에도 양질의 일자리 창출, 특히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늘려가는 것이 있다. 

◆경제성장률 회복도 중소기업에 달렸다

우리는 핀란드의 사례에서 개별 기업이 한 국가의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클 때 그것이 그 국가에 얼마나 재앙이 되는지를 똑똑히 봤다. 한 국가의 운명이-기업보다 훨씬 오래 가야할 민족의 운명이-기업의 판단 미스나 경영상의 실수, 경쟁자의 출현 등으로 인해 좌우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이 어느새 비슷해지고 있다. 대기업이 많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삼성전자와 현대차다. 그 외 대기업들은 이 두 회사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특정 대기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은 국가 뿐 아니라 이들 기업에도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이들의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지우면 안된다. 부담이 너무 크면 혁신을 하지 못한다. 과감한 도전을 하기 힘들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기보다는 

현재 갖고 있는 장점과 자산을 기반으로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하기 마련이다.

 1,2년은 편할 지 모른다. 잘 먹고 잘 사는 데 문제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간다. 어느새 고통을 지려고 하지 않았던, 흘러 보냈던 그 시간들로 인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질 수 있다. 누군가는 고통스럽다고 새로운 도전을 해야하고 누군가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런 도전을 응원하고, 그들이 커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들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다리를 만들어주고, 각종 통행료를 없애거나 낮춰서 부담을 줄여야 한다. 

 도전하는 이들이 있어야 새로운 성장의 가능성도 생긴다. 대기업은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도전을 하고 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그런 뚝심과 끈기를 지닌 이들을 지원하고, 이런 이들을 알아볼 눈을 가져야 한다. 거기서 새로운 10년, 20년의 성장이 시작된다. 다만 정부 지원에만 기대려고 하고, 중소기업에 안주하려고 하는 경우와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경우를 구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중소기업이 살아나는게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중소기업 대책이 만병통치약은 분명 아니다. 이것 말고도 더 중요한 정책이나 고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 ‘균형’은 필요하다. 한 국가의 경제가 지나치게 대기업에 쏠려 있다는 것은 대기업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특히 한국과 같은 현실에서 책임을 대기업에만 돌리는 것은 곤란하다. 대기업을 때려잡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균형을 찾기 위해선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대기업을 강력하게 규제하면 저절로 중소기업이 살아날 것으로 기대해서도 안된다. 

 그 방법은 분명 어려울 것이다. 한 두 사람의 머리 속에서 해결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고, 지금부터라도 장기 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실현해야 한다. 새로운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지만 그 임기 5년 내에 기대치를 달성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래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오래 유지할 중소기업 장기 플랜을 세워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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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무지와 비참함이 있는 한 이런 성질의 책 역시 쓸모 없지는 않을 것이다’

빅토르 마리 위고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을 출간하면서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인도주의적 세계관으로 일관된 이 파란만장한 장편소설에서 빅토르 위고는 인간 세상의 비참함을 낱낱이 고한다. 

 책에 묘사된 프랑스 하층민들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세상은 악으로 가득차 있고, 구원을 바라는 이들의 기도 소리는 세상의 쾌락과 지배층의 핍박에 묻혀 들리지 않으며, 신은 세상을 버린 것 같다. 이런 세상에서 법률과 풍습으로 인한 냉혹하고 가혹한 처벌이 지옥을 만들어냈고, 그리고 그로 인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 인물이 장발장이다. 

 레미제라블을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지녔으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 읽는 이에게 저마다 다른 느낌과 깨달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주인공인 장발장은 숭고한 사랑의 화신이라고 할 정도로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사랑을 베푼다.

 조카들을 위해 빵 한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살이를 한 그는 미리엘 주교의 단 한번의 사랑과 자비로 어둠에서 벗어난다. 그 뒤로 그는 일면식도 없었던 거리의 여자의 아이를 맡아 기르고 죽는 순간까지 세상에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산다.

 프랑스 혁명과 장발장의 모습은 조화를 이루는 듯 하면서도 기묘하게 어긋난다. 소설에 등장한 ‘6월 민중 봉기’는 실패로 끝난다. 여기에 장발장은 참여를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주도하지는 않는, 애매한 역할을 한다. 이런 장면을 통해 빅토르 위고는 혁명이 아니라 사랑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빅토르 위고는 그의 첫 유언장에 이렇게 썼다. ‘신과 영혼, 그리고 책임감, 이 세가지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가 말한 사랑은 영혼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이었던 것 같다.  

 레미제라블이 영화로나, 뮤지컬으로나, 책으로나 어떤 버전으로 나오든 감동과 탄식을 자아내는 것은-그렇게 수없이 읽고 감상해도 계속해서 감동을 주는 것은-빅토르 위고가 설파한 대로, 적나라한 인간 세상의 비참함이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부유해진다고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말해준다.

 인간의 본질적인 고독함과 쓸쓸함이 비참함의 원천이고, 스스로는 절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 비참함이 지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기 못지 않은 삶의 비참함을 우리는 지금도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신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레미제라블 말미에 장발장은 이렇게 기도하고 그가 회심한 후의 인생을 바쳤던 꼬제뜨의 품 안에서 죽는다. 그의 기도는 사실 시대를 뛰어넘는, 우리들의 기도가 아닐까. 2013년 새해엔, 우리들 모두에게 신의 자비가 임하길. 인간 세상의 이 타락과 비참함이 완화되기를. 좀 더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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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한국의 벤처 붐 현상이 부럽습니다. 젊은이들이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한국에서는 이런 현상에 대한 우려도 있는 것 같지만 아예 젊은이들의 벤처 창업을 보기 힘든 일본에 비하면 훨씬 낫습니다. 뭔가가 있어야 그 중에 제대로 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에비하라 히데유키 사이버에이전트벤쳐즈(CyberAgentVentures)코리아 대표는 이렇게 운을 뗐다. “한국의 벤처 열풍이 놀랍고 부럽다”는 게 그의 첫마디 말이었다. 열정을 가진 한국 벤처들의 일본 시장 진출을 돕고 동시에 사이버에이전트가 아시아,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데 한국이 교두보가 되고자 하는 바람도 피력했다. (만나자마자 즉시)그가 내민 사이버에이전트벤쳐즈 회사 소개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이버에이전트벤쳐즈와 함께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서 세계로!’

 한국에서 좋은 회사들을 발굴, 투자해 성장시킨 뒤 한국 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아시아와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키우고 싶다는 뜻이다. 사이버에이전트벤쳐즈는 지난 10월 한국에 진출했다. 지난해 카카오에 투자해 성과가 좋았다. 그 뒤로 카카오를 통해 한국 벤처 상황을 파악하고 한국 진출 기회를 모색해온 것 같다. 

 한국 벤처 기업의 발굴이라는 미션을 갖고 입국한 에비하라 히데유키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동안 컨설팅 업체에 입사해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다가 2005년 사이버에이전트벤쳐즈에 합류했다. 한국에 들어와 언론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와 사이버에이전트벤쳐즈가 현재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교육과 오프라인-온라인 연계 사업. 교육은 주로 영유아를 위한 교육 콘텐츠 업체에 관심이 간다고 했고, 오프라인 비즈니스 중 온라인과 연계되거나 온라인화되고 있는 사업이 향후 발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사이버에이전트는 현재 한국 벤처기업들의 잠재 성장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있다고 그는 전했다. “한국에서 경험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7년 동안 계속해서 벤처기업들을 찾아다니고 시장 조사를 하고 투자를 해 왔습니다. 제 경험상 일본에 비해 한국은 훨씬 역동적이고 성장 잠재력이 큽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한국의 벤처기업들은 위기의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시장이 바뀌는데 소외될 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있는 것 같고 이것이 기업을 강하게 해 줍니다. 반면 일본은 안주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위기의식도 훨씬 덜하죠. 이것이 이들을 더욱 약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스타트업에 원화로 1사당 5억원에서 15억원 정도를 투자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세웠다고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이드라인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많이 투자하거나 더 적은 금액을 투자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는 한국에서 투자할 회사를 찾으면 사이버에이전트의 국내외 네트워크를 총동원, 적극적으로 도울 방침이다. 한국 벤처기업들의 해외 시장에서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는 비교적 후한 점수를 주고 있었다. 

“미국에 있는 VC들로부터 소식을 듣고 있는데 한국 벤처들의 미국 진출이 최근 부쩍 활발하다고 들었습니다.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한국 스타트업은 많지만 일본 스타트업은 없습니다. 그런 점이 좀 답답했는데, 한국의 벤처기업들이 사이버에이전트와 함께 커나갈 여지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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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을 쫓아갔더니 미래가 보였다”

글로시박스 최홍준 대표는 일관된 길을 가지는 않았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근무를 했지만 미국에 건너가 장사를 경험하는가 하면 투자와 관련된 업무를 하기도 했다.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그 역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미래를 걱정할 때는 앞날이 보이지 않았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 대신 열정을 쫓았을 때 새로운 세상이, 미래가 열렸다. 편한 길을 마다하고 꿈을 쫓아, 열정을 쫓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글로시박스 최홍준 대표를 만났다.

◆어떻게 살아야할까

서울대 경제학과 95학번인 최 대표는 학교를 졸업하고 IBM에서 근무를 했다. 5년동안 그는 세일즈와 사업 개발 분야의 일을 했다. 명문대를 나와 좋은 회사에서 근무를 한 사람답게 그는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고민했다. 그래서 UCLA로 건너가 MBA(경영학석사)를 했다고 한다. 이때까지의 최홍준 대표는 항상 ‘다음 단계’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많은 수재들이 그렇듯, 그 역시 자신을 계속 단련하고 자신에게 투자해 실력을 점점 키워서 더 높은 자리로 가는 그런 목표를 세우고 앞을 향해 달려갔다. “계속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생각을 한거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아졌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했어요. 그랬더니 기왕이면 내가 가진 것으로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고 싶어지더라구요. 물론 돈도 벌어야겠죠. 하지만 좀 더 가치있게 살고 싶었어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는 MBA 과정 중에 LA(로스앤젤레스)에서 중고 옷을 판매하는 등 창업 예비 훈련을 나름대로 했다. 미국에 건너가 공부를 하는 당장의 목적은 물론 학위를 따는 것이었지만 그는 다른 동기들과 달리 직접 장사를 하는 것을 포함해 현지 기업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경험을 쌓고 견문을 넓히는 것에 주안점을 뒀다. 라이트미디어라는 회사에서 광고 네트워크 관련 일을 하다가 야후에서 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그는 야후 본사에서 일을 하는 기회도 얻었다.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온 그는 SK텔레콤에서 1년반 정도 투자 관련 업무에 종사했다. 하지만 그가 대기업에서 느낀 것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게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제가 저의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할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제 능력의 한계까지 일해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로켓인터넷을 통해 창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화장품 정기 체험 서비스 1호

로켓인터넷은 한국의 패스트트랙아시아(FTA)와 유사한 벤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그는 로켓인터넷을 UCLA MBA 중 지인을 통해 알게 됐다. 독일에서 태동한 로켓인터넷은 인터넷·모바일 분야의 스타트업 창업을 인큐베이팅하고 초기 투자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마치 매월 잡지를 구독하듯 화장품 최신 제품을 담은 ‘박스’를 정기적으로 받아 이를 써 본다는 개념의 ‘글로시박스’ 사업 아이디어를 로켓인터넷은 글로벌 서비스로 확산하고 싶어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한국, 브라질 등 5개국에서 비슷한 시기 일제히 서비스가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최홍준 대표가 이 사업을 맡아 시작하게 됐다. 사업 기획안을 만들고 2011년 3월 28일 법인을 설립했다. 5월에 첫 상품을 출시했다. 

 글로시박스(Glossy Box)는 화장품 시장의 허점, 즉 여성들이 화장품을 쓰면서 느끼는 불편함에 착안했다. 일상 생활의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서비스로 출발한 것이다. 전 세계의 모든 여성들은 누구나 화장품에 관심이 많고 새 제품이 나오면 이를 써보고 싶어한다. 누구나 더 예뻐 보이고 싶어, 피부가 더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새 제품이 나오면 그 중 자기에게 더 적합한 제품이 있을지도 모를 일. 하지만 매월 쏟아지는 신제품 사이에서 정작 자신에게 맞는 제품을 고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사실 뭐가 나오는지도 잘 모른다)

 최 대표가 이 사업을 하면서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계기는 미용실에서 우연히 여성 잡지를 보면서부터다. 한 권의 여성 잡지에 300개가 넘는 화장품 브랜드가 있었고 이들이 500종이 넘는 화장품 신제품 광고를 하고 있었다. 광고를 하는 제품만 그 정도였다. ‘이렇게 수많은 제품이 쏟아져나오는데,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자’ 이런 생각이 사업의 출발점이 됐다. 

 선택을 강요할 순 없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새 제품을 써 보고 그 중 자신에게 맞는 제품을 선택하게 한다면 업체나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화장품 정기 체험 서비스라는 카테고리로 글로시박스는 국내에서 첫 선을 보였다. 글로시박스는 매월 여성 회원들에게 필요한 (화장품을 포함한)뷰티아이템 5가지를 큐레이팅, 핑크색 박스에 담아 보내준다. 소비자는 화장품을 하나하나 발견해야 하는 수고를 덜고 화장품 브랜드는 자사의 제품을 타게팅된 소비자의 손에 쥐어줄 수 있다. 그리고 글로시박스는 소비자들로부터 정기 서비스료를 받아 돈을 번다. 3자가 모두 이익이다.

◆하나를 성사하기 위해 아흔아홉번 거절을 당할 수 있다

글로시박스는 독일의 로켓인터넷으로부터 초기 1억원의 투자를 받았다. 맨땅에 헤딩하듯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통상적인 스타트업에서 비해선 비교적 수월하게 시작한 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창업 아이템도 분명하고 수익 모델도 확실히 갖췄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웠다.

 “제품은 매달 쏟아져 나오지, 소비자와 업체에게 모두 이익이지, 비교적 쉽게 풀어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일단 화장품 업체들로부터 제대로된 물건을 조달하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화장품 회사에 별다른 인맥이 있을리 없는 30대 남성이 무턱대고 화장품 회사를 찾아가 사업 내용을 설명하고 화장품을 공짜로 달라고 했으니 선뜻 신뢰하기 힘든 게 당연했을지 모른다. 한 두 곳은 실험삼아 해보자는 생각으로 계약을 하기 시작했지만 소비자들이 충분히 체험할 만한 물량을 확보하는데 3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소량이나마 화장품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5월에 제품이 나왔지만 500박스 밖에 만들 수 없었다. 일단 초기 물량은 그냥 공짜로 뿌렸다. 흔히 말하는 샘플 제품을 받지 않고 일주일 정도는 써 볼 수 있게 제대로된 용기에 담긴 제품을 받았다. 스킨, 메이크업, 바디 등 다양한 제품으로 구성하되 이를 또 피부타입과 톤 등에 따라 구성했다. 화장품 회사는 이를 통해 소비자 반응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중 구매로 전환하는 소비자를 기대할 수 있다. 소비자는 그냥 선심성으로 주는 샘플 제품을 얻어 쓰는 차원이 아니라 매달 신제품을 체험해 볼 수 있다. 단 1만6500원을 내고 쓴다. 이 사용료가 고스란히 글로시박스의 수입이 된다. 

 하면서 사업 노하우가 터득이 됐다. “미백제품은 3월부터 판매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2월에 섭스크립션을 하는 게 좋죠. 써 보고 주문하게 되거든요. 겨울에는 보습제품을 많이 쓰니깐 가을부터 체험을 하도록 하는 게 좋습니다. 여기서 더 세분해서 통계를 내고 사람들의 생활과 화장품 사용습관을 분석하는 일이 필요하죠. 어쩌면 그게 핵심 경쟁력일지도 모릅니다.”

 현재 매달 10여개 브랜드가 참여하고 있고 지금까지 120개 화장품 브랜드와 제휴를 맺었다. 제품 미니어처와 백화점 방문 안내장을 같이 보냈더니 방문율이 14%에 달하기도 했다. 통상 샘플 보냈을 때 방문율이 2%에 비하면 굉장히 높은 수치다. 매달 엄청난 신제품이 쏟아지기 때문에 제품 조달 걱정은 없다. 오히려 너무 홍보가 되서 회원이 급증하면 물량 조달이 안될까 그게 걱정이다. 함께 할 직원을 뽑는 것도 가장 어려운 작업 중 하나였다.

 “사람을 내보내는게 가장 힘든 일이더군요. 매달 물품을 맞춰야 하는 스트레스도 있죠. 하다보니 자기 가치관이 있고 그것을 실현해나가는 사람이 함께 벤처를 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때도 있지만 그래도 창업을 해서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를 성사시키기 위해 아흔아홉번 거절을 당하기도 하지만 내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게 되고, 모자라는 것을 도움을 받아 채워가는 법도 터득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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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윈워드(Twinword)는 얼핏 보면 영어단어 학습용 앱이나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처럼 보인다. 실제 서비스는 그런 종류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일 뿐이고 이 회사가 지향하는 바는 따로 있다. 

 수많은 단어의 연결을 통해 빅데이터를 구축하는 것이 트윈워드가 지향하는 것. 빅데이터를 구축, 언어가 활용되는 많은 서비스-검색엔진, 문맥광고, 음성인식 등-에 활용하려는 게 목표다. 창업자인 김건오 대표는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 왔고 이를 위해 고집스러울 정도로 일관되게 준비해왔다. 단어와 단어의 연결성이 어떤 조합을 만들고 이것이 인류의 삶을 개선시킬 기술의 발전에 얼마나 다양하게 쓰일지 ‘너무나 궁금하고 너무나 하고 싶어’ 계속 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의 접점은 찾은 셈이다. 이제 그에겐 이것이 ‘시장에 얼마나 필요하고 잘 쓰일 수 있는가’의 문제만 남아 있다.

◆언어처리에 특화된 엔지니어

김건오 대표는 성균관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삼성SDS에 ‘기술영업직’으로 입사했다. 그런데 들어가서 엔지니어로 전환하게 된다. 원래 컴퓨터를 좋아했던 그는 대학교 4학년때 따로 컴퓨터 언어 수업을 들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때마침 삼성SDS에서는 부족한 사내 엔지니어를 보충하는 한편 전 사원에게 기술 마인드를 심어주기 위해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9개월 동안 유닉스, C언어 등 컴퓨터 언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고 한다. 컴퓨터를 좋아한 김 대표였으니 ‘물 만난 고기’였을 게 틀림없다.

 회사에서 컴퓨터를 배운 그는 1999년 퇴사해 서강대 컴퓨터공학과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한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국문학과를 나와 컴퓨터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더니, “자연어 처리 관련 연구를 하는데 최적의 조합이네!”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서강대 컴공과 입학 후 자연어처리연구실에서 자연어처리를 기반으로 한 대용량 이메일 분류 시스템 등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기술의 한계를 느꼈다. “원하는 품질이 나오질 않더라구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언어 지식을 컴퓨터에 전달하기 위해선 언어 지식 정보체계를 구축해야 하는데, 그래야 대화가 되는데 그 정보체계가 구축이 되 있지 않았죠. 이걸 어떻게 하면 해결할까 고민했어요.”

 그가 생각한 것은 연상어. 어떤 단어를 들었을 때 연상되는 단어의 조합이 모이고 모이면, 어휘 정보로 축적되고 그 단어의 조합 DB가 일정 수준 이상 쌓이면 인간의 언어를 컴퓨터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Human Computation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구글이 이미지 라벨러라는 서비스를 만든 적이 있어요. 이미지를 봤을때 연상되는 단어를 작성하도록 해 이것을 데이터로 축적하면 이미지를 갖고 검색 등 다양한 곳에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거죠. 이미지에 태깅을 할 수 있기 때문인데 문제는 악용하는 이들이 많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작업에 참여하게할 유인이 없어서 실패로 끝났죠.”

◆연상되는 언어가 만드는 새로운 빅데이터

구글도 해내지 못한 것을 어떻게 할까. 2003년부터 쓰리소프트라는 회사에 있다가 2006년에는 솔트룩스에 있던 김건오 대표는 2010년 회사를 나와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생각할 때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그가 찾은 방식은 공부를 하게 하면서 그 공부하는 과정이 DB가 되도록 하는 것.

 2010년 회사를 창업하면서 회사명을 트윈워드라고 한 것도 연상되는 단어가 핵심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게끔 하는 방법으로 그가 생각한 게 영어단어 학습 서비스. 그래서 그는 일종의 깜박이 영단어 학습기 스타일의 ‘거미줄 영단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잘 되질 않았다. 비슷한 앱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온 탓도 있고 학습 앱을 처음 만들다보니 시행착오를 겪은 탓도 있었다.

 방법을 찾던 그는 우연히 2011년 정부의 실리콘밸리 진출 지원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정부가 주관해 20여개 벤처기업을 뽑아 실리콘밸리에 보내주고 여기서 VC(벤처캐피털), 엔젤투자자 등을 만나는 프로그램이었다. 여기서 투자자들로부터 그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레벨테스트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일 것 같았다. 2012년 3월 청년창업사관학교로 지정되면서 정부의 각종 지원 사업 대상자가 될 수 있었고 그러면서 개발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사람들의 동기 부여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연상되는 단어의 조합으로 학습을 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두루마리 영단어’라는 책을 올 9월 출간하기도 했다.

 트윈워드가 내년 1월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는 ‘Level Pump’는 일종의 연상 어휘 사전이다. 앱으로도 나오고 웹 서비스로도 나온다. 무료로 레벨테스트를 할 수 있고 레벨에 맞는 영어단어를 이메일로 받아보며 학습을 할 수 있다. 물론 앱에서 레벨테스트와 학습을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유명 영영한 사전에 이 서비스가 적용되는 것도 내년 1월이다. 국내외에서 출시되는 각종 단말기에 제작시점부터 기본 탑재되는 그런 세일즈 작업도 하고 있다. 목표가 영어 학습 앱을 팔아서 돈 버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DB를 구축하고 여기서 알고리즘을 만들어 디지털 세계의 단어 빅데이터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많은 사람들이 써야 하고 여기서 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서 내년 3월에는 모바일 교육용 게임(앱)인 잉글리쉬 알케미(English Alchemy)도 출시할 계획이다. 연상어를 선택하는 게임인데, 국내보다는 글로벌 시장을 노리고 개발하고 있다. 내년 4월에는 학원 프랜차이즈에 영어 어휘레벨테스트를 공급하는 사업도 시작할 예정이다. 

◆아무도 안 가본 길, 끝까지 가고 싶다

Level Pump는 10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난이도가 점점 어려워진다. 간단하게 설명을 해 보자면 Dog라는 단어를 보여주고 animal, tail, lion 등 세 단어가 주어진다. dog라는 단어를 봤을 때 연상되는 가장 밀접한 연관단어를 선택하면 된다. 

 수많은 사용자들의 이런 선택이 모아지면 ‘연상어 맵’이라는 게 만들어진다. 이런 연상어 맵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언어가 어떻게 구조화되 표현되는지, 이를 통해 기계가 어떻게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지를 파악하는 기본 데이터가 된다. 현재 홈페이지(http://www.twinword.com) 에서 시범 서비스를 체험해 볼 수 있다. 

 김건오 대표는 레벨펌퍼를 각종 교재, IT단말기(전자책, 전자사전, 태블릿PC 등), 학원 솔루션, 모바일게임, 이러닝, 마케팅 솔루션 등 다양한 영역에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구글이나 야후, 네이버 등의 검색엔진이나 애드몹, 아이애드, 애드포스트 등 광고플랫폼, 시리나 보이스와 같은 질의 응답 엔진 또는 음성인식 엔진에 B2B로 활용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일종의 문맥 정보이기 때문에 다양한 IT서비스의 지식베이스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게 김 대표의 판단이다.

 “오래전부터 이거 하나만 생각하고 살았어요. 연상어의 조합을 통해서 단어의 빅데이터를 구축한다는 것. 이를 통해 사람과 기계가 대화를 나누는 베이스를 만들겠다는 것. 일부 회사들이 시도하긴 했지만 완성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도 안 가본 길이라 끝까지 가보고 싶어요. 제가 생각했던 가정들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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