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을 하면서 힘든 점은 정말 많겠지만, 그래도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창업 단계에서부터 꼭 함께 해야 하는 그런 사람과 팀을 이뤄 같이 창업을 하는 것도 힘든 일이고, 필수적인 인재를 채용하는 것도 힘든 일이며, 이들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 등 조화를 이룬 팀 멤버로 창업을 했을 때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팀을 이룰때까지 마냥 기다릴수도 없는 법. 때로는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해서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도 방법이다. 운이 좋으면,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때마침 채워줄 다른 좋은 팀을 만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팀이, 새로운 회사가 탄생한다. 유쾌한 형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모인 유쾌한형제 창업멤버들. 왼쪽부터 김용주 이사, 전준수 대표, 김동욱 CTO, 이용길 대표>

◆미디어를 꿈꾼 뮤지션

현재 유쾌한형제의 대표이사 사장이자 최대주주인 전준수 대표는 음악을 좋아하고, 아이디어가 많고,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새로운 것을 기획하는 데 재능이 있는 인물인 것 같다. 영화 두사부일체의 타이틀곡 ‘꼬마달건이’를 작곡했고, 그 밖의 여러 음원 작사작곡에 참여했다. 

그의 첫 직장은 인터넷포털 다음의 검색광고 자회사인 나무커뮤니케이션. 2003년 나무커뮤니케이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전 대표가 검색광고 업무를 하던 이 시기는 한국의 인터넷산업에서 다음과 네이버, 야후가 치열하게 경쟁을 하던 시기다. 1위였던 야후가 다음에게 자리를 내 준지 얼마 안돼 이번엔 네이버가 선두로 치고 올라갔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장, 성장하는 회사에 있으면서 본인도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게 전 대표의 회상이다.  

 “2007년까지 나무에 있었어요. 그런데 다음이 검색에서 네이버를 도저히 못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어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회사를 나왔죠.”

 그는 2008년 자신이 직접 회사를 차렸다. 그가 배운 것이 검색광고였으니, 만든 회사도 광고회사였다. “첫달에만 매출 7억원을 올렸어요.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얼마 못 가 사업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는 말을 아꼈지만, 계약을 잘못 체결한 문제도 있었고, 무엇보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여간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2009년 1월 다시 코마스인터랙티브라는 광고회사에 들어가 광고부장으로 일을 했지만 곧 자기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2010년부터 그는 카덱스라는 자동차 정보 서비스를 만들게 된다. 처음엔 개인사업으로 시작했다. 자동차에 대한 진짜 정보를 제공하자는 게, 카덱스의 취지였다. 그런데 정말 제대로 했다. 스튜디오에 취재기자, 촬영팀까지 갖춰놓고 제대로 했다. 카덱스는 미디어였다. 그리고 카덱스를 하다가, 사업상의 목적으로, 정말 우연히 ‘딩동뉴스’라는 화제의 앱을 개발한 팀을 만나게 된다. 이 팀이 이용길, 김동욱, 김용주였다. 

◆앱개발에 뛰어든 세 남자

고려대학교 경영정보학과 동창인 이용길, 김동욱, 김용주 세 사람은 대학시절부터 껌딱지 같이 붙어 다니던 사이. 죽고 못사는 선후배사이인 이들의 공통점은 같은 과라는 것 외에도 함께 밴드동아리에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전준수 대표까지 유쾌한형제 창업자 넷은 모두 음악으로 한가락하는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사회생활을 했다. 김동욱은 네이버에서, 이용길은 IT개발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용주는 현대정보기술에 재직했다. 경영정보학과는 공대는 아니고, 경영대에 속한 과다. 즉 굳이 따지자면 문과쪽 전공인데, 이들은 모두 IT분야에서 일을 했다. 밴드 활동도 하고, 경영학과 공부를 하면서 이들은 틈틈이 공대쪽 수업을 들었고, 그냥 수업만 들은 게 아니라 코딩도 배웠다. 졸업하던 학기엔 대부분의 수업을 공대쪽으로 채우기도 했다.

 “개발사에서 일하면서 KT나 마이크로소프트 등 대기업들의 외주를 받아 일을 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그러면서 내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얘기를 동기동창인 김동욱하고 한 거죠. 뜻이 맞아서 둘이서 낮에는 각자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만나서 우리가 만들어보고 싶은 것을 만든거죠.”

 자, 이렇게 해서 나온 게 딩동뉴스다. 딩동뉴스는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한국에서도 열렸을 당시 초창기 화제가 됐던 앱이었다. “2009년 5월1일 개인사업자로 시작했어요. 그리고 딱 1년이 지난 2010년 5월24일에 딩동뉴스를 오픈했죠.” 개발자 두 명만 있던 이 회사에 2010년 7월 후배인 김용주가 합류했다. 김용주는 현대정보기술에서도 솔루션 영업을 하던 인물이라 기술비즈니스의 영업을 하기에 적합했다. 개발과 비즈니스 파트의 인력이 갖춰진 셈이 됐지만 사업을 할수록 이들은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이 하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를 갖고 승부를 보려고 한 것인데 서비스로 승부를 보기엔 콘텐츠가 너무 약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신랑신부모여와 같은 커뮤니티를 만들면서도 이들은 콘텐츠 부족에 갈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때마침 콘텐츠로 무장한 전준수 대표가 이들 앞에 나타났다. “원래는 같이 할 사업문제때문에 만났는데 서로가 필요한 것을 채워줄 수 있겠더라구요. 한쪽은 콘텐츠가 부족하고 한쪽은 실력있는 개발자가 없고. 합치면 최강의 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겁니다.” 전 대표와 이 대표가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다. 

◆개인와화 큐레이션

카덱스는 미디어였다. 하지만 미디어는 포털에 의존해야만 하는 한계가 있었다. 카덱스가 네이버에 콘텐츠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카덱스가 전문적인 사이트로 성장할 수는 있지만 독자적인 그들만의 고객을 모으고 자체적인 수익모델을 개발하고 더 크게 성장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딩동과 카덱스가 합쳐진 이 회사는 자동차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를 만들돼 포털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서비스를 만들기로 했다. 카덱스의 콘텐츠에 딩동뉴스의 개발진이 합쳐지면 안 될게 무어랴! 단 한 번의 전화통화와 만남으로 이들은 의기투합했다. 회사를 합치기로 하고 이름을 고민하다가 유쾌한 것을 만드는 유쾌한 남자들이 되자는 뜻에서 유쾌한형제로 했다고 한다. 주가가 뜨고 있는 우아한형제들에게 모티브를 얻은 측면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이들이 만든 ‘카넥트’(Carnect)는 일견 카덱스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보였다. 자동차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자동차 포털이라는 게 첫 인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 단계 더 나갔다. 개인화와 큐레이션을 추구하고 있었다. 모바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카넥트는 기본적으로 온갖 자동차 정보를 담고 있지만, 이 앱을 다운받아 쓰는 사람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도 가능하다. 그 사람이 어떤 자동차에 관심이 있는지, 자동차의 주로 어떤 부분을 보는지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클럽 코너를 통해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동차 애호가들의 네트워크에 들어가거나 이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기존 포털에서 운영되는 수많은 자동차 클럽이나 동호회들이 매우 폐쇄적으로 운영돼 실제로는 잠재적인 소비자들에게 매우 배타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일. 카넥트는 이런 클럽의 장벽을 낮추고, 클럽 활동이 사용자 뿐 아니라 제조사, 딜러 등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우선 제조사나 딜러사, 딜러, 자동차 금융업체 등은 브랜드 광고 등을 할 수 있다. 직접적인 자동차 업체 뿐 아니라 유관 분야, 즉 튜닝, 장비, 렌터카, 용품샵 등과의 제휴나 이들과의 연결도 가능하다. 소비자들은 시승신청부터, 견적, 보험견적 등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선 사용자를 확보하는 게가장 중요한 일. “일단 사람을 많이 모아야죠. 서비스 확대를 위해 투자도 필요하구요. 올 초에 엔젤투자를 받았고 이제 시리즈A 투자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중고차 코너도 기획해서 자동차가 유통되고 소비되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런 장이 되고자 합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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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병원, 종합병원일수록 힘들게 찾아가 오랜 시간 기다려놓고 정작 의사선생님을 만나는 시간은 턱없이 짧다. 물어보고 싶은 말은 끝도 없이 많지만, 환자나 보호자가 갖고 있는 수많은 궁금증의 대부분은 해결되지 못한다. 뒤에 엄청난 수의 환자가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의사선생님의 준비된 멘트(?)만 일방적으로 듣고 병원문을 나서기 일쑤다.

 이런 현상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다만 좀 더 심할 뿐. 그리고 꼭 해당 의사의 문제만이라고 보기도 힘들다.(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아무리 자상하고 상세히 설명을 하고 싶은 의사라고 하더라도 환자나 보호자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대목에서 한국의 의료 현실, 즉 건강보험 수가나 의사의 수, 병실의 수 등을 논하는 것은 이야기를 너무 확대시킬 소지가 있다. 일단 이 정도로 하고,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선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런 병원 진료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걸 근본적으로 고치기 위해선, 의료시스템 전체를 바꿔야 하는데 이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실제 개선을 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알고, 불편해하면서도 이런 현상에 변화를 줄 만한 힘이 없다. 이걸 바꾸기 위해선 병원이 돌아가는 시스템 뿐 아니라 심지어 의료지식까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있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헬스웨이브를 세운 의사, 정희두 대표다.

◆10년간 의사로 살다

록앤올 박종환 대표를 소개하면서, 내비게이션 분야에서 10년 넘게 한 우물을 판 인물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정희두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10년 넘게, 마치 운명이 이끌듯이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하기위한 준비를 해왔다. 그 과정에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그만둬야하는 결단도 있었고, 불확실한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가 이 일을 하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희두 대표는 의사다. 그것도 외과의사. 1997년부터 2006년까지 꼬박 10년 동안 그는 의사로서 살았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서 살아왔지만 그는 인턴으로서 첫 출발을 할 때부터 다른 길에 대한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고 했다.

 “외과의사는 문제를 진단하고 솔루션을 찾는, 그런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솔루션에 대해 환자나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안내해야 하는 경우가 정말 많죠. 커뮤니케이션이 하는 일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왠걸. 그는 이런 커뮤니케이션에 보람을 느꼈다. “외과 분야는 사실 상당히 심각한 내용이 많습니다. 상처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구요. 그런데 저는 직접 수술을 하는 것보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동의를 구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그런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에게 문제의식이 없을 리 없다. 10년간 의료현장에서 그가 느낀 것은 한국의 의료현실이 지나치게 최종결과물에만 집착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최종 결과물은 물론 ‘완치’다. “모두가 완치에만 집중합니다. 병을 낫게 하는 분야에선 한국이 경쟁력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서 병을 치료하면 되는거 아니냐. 그거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사실 저는 병을 치료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중간 과정에 대한 설명이나 케어, 상담 등이 전혀 없다는 것. “수술했는데 재발했을 때 수술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항암치료만 해야되는 거죠. 결과에만 집중한다면 그냥 이 환자를 외과로 보내면 됩니다. 또는 수술후 재발해 의학적 조치가 전혀 불가능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엔 그냥 요양병원에 보내야하죠. 결과만 따지자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환자나 보호자는 정말 궁금한게 많죠. 다시 재발하는 건 아닌지, 치료에 얼마나 걸리는지,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왜 병원을 옮겨다녀야하는지 등등. 그런데 못 물어봅니다. 물어봐도 대답을 하기 힘들어요.”

 왜 그럴까. 물론 우리가 모두 아는 이야기다.

 “한국의 대학병원들은 급성환자만 다룹니다. 즉 매우 급박한 상황에 처한 환자들만 다루는 거죠. 그리고 그 환자들이 엄청나게 대기하고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내용을 3분안에 이야기해야 합니다. 30분 동안 환자 10명이 예약돼 있거든요. 이 정도로 예약을 받아 진료를 하니 이 가격에 그런 수술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목적 달성에는 세계 최고 수준이죠. 하지만 중간 과정의 케어는 안되는 겁니다.”

◆환자와 의사간 매체를 만들자

매일 같이 이런 일을 겪으면서 그는 참 많은 생각을 했을게 분명하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환자들이 많아 그에겐 자신도 모르게 ‘연민’과 ‘공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의 성품이 유독 남달랐기 때문일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병원에서 이런 상태론 의사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게 문제였다. 남들보다 훨씬 오래 설명하고 이해와 동의를 구하면, 느릴수밖에 없다. 밤을 새워가며 설명을 한 적도 있고, 장장 사흘에 걸쳐 설득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내 가족이라면 수술을 하게끔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끔 이런 경우 가족들은 되레 수술을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술을 안했다가 나중에 상호간에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죠. 일단 수술을 하고 보려는 심리가 있어요. 그런데 수술한다고 다 되는게 아니거든요.” 결국 그는 이 환자에게 수술을 받지 않는 쪽으로 설득했다.

 수술보다 커뮤니케이션, 진료보다 상담과 케어에서 더 보람을 찾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2000년부터 서서히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 물론 그때 명확한 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림을 그려서 설명을 하면 더 쉽게 이해하고 환자나 보호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된 뒤 그는 처음으로 매체에 대한 생각을 했다. 환자들에게 병의 상태와 진료 과정 등을 알려주는 매체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어머니가 미술학원을 하셨어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환경에 있었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공보의로 있으면서 의료계의 이원복이 되자는 생각도 했었죠. 먼나라 이웃나라 있쟎아요? 그런 것을 저도 하고 싶었어요.”

 사실 그는 대학때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도 홍보부장을 맡아 틈틈이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공보의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만화를 그렸다. 그런 그의 실력을 알고 정부에서 의뢰를 해 공보의 시절 대국민 홍보카툰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그가 만화 그리는 실력때문에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대형병원일수록 병의 개념과 치료, 검사 동의서 및 이에 필요한 설명 등을 자세한 설명한 자료가 다 있었어요. 저는 그걸 알고 있었죠. 그 원자료를 갖고 만화를 그리거나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정말 쉽게 환자들에게 설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가 충북 음성 보건소에서 공보의로 있던 2003년, 조류독감이 전국을 강타했다. 마침 조류독감이 처음 시작된 곳이 음성 보건소 관할 지역이었다. “질병관리본부와 함께 공동으로 조류독감의 대처법 등을 알리는 만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일을 했어요. 그게 경험이 됐죠.”

 조류독감 애니메이션은 그에게 실전을 방불케 한 기회였다. 이 애니메이션때문에 그는 공보의들 사이에 일약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이 덕에 충북대 의대 교수팀과 공동작업을 할 기회도 생겼고, 연구 과정이 전해지면서 충북대 의대엔 애니메이션 연구팀도 신설됐다.

 준비를 하고, 반응까지 확인한 그는 공보의를 마치고 서울대병원 의료정보센터에서 1년여간 연구교수 생활을 한 뒤 2009년 5월, 헬스웨이브를 창업했다.

◆파산 직전에 투자를 받다

정 대표가 염두에 둔 것은 병원들이 갖고 있는 각 질병에 대한 3000개의 원천자료. 이 자료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아주 쉽게, 비교적 짧은 시간에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생각이었다. 이 애니메이션 역시 일종의 의사가 제공하는 처방전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Information Transcription(설명처방)이라는 말이 별도로 있다.

 정 대표는 이것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의사들의 전자차트에 넣는 게 핵심이라고 봤다. 우선 이 처방전을 이해해야 하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줄 알아아하며, 전자차트에 넣어서 작동하게끔 해야 했다. 의학적 지식과, 애니메이션 분야와, IT(정보기술) 분야의 지식까지 다 있어야 한다!

 헬스웨이브를 차리기 전 그는 오래전부터 닥터두애니&일러스트라는 회사를 차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작업을 전문적으로 해 왔다. 사실 2009년에 차린 헬스웨이브는 애니메이션이 전자차트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시스템적으로 구현하는 일을 하는 회사다. 정희두 대표는 2010년 두 회사를 합병, 헬스웨이브로 합쳤다.

 하지만 사업은 역시 녹록치 않았다. 우선 전문의가 참여한 고품질 애니메이션이었지만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병원들도 환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애니메이션 사용료 정도는 내겠다는 의지는 물론, 예산도 없었다. 

 파산 직전까지 가는 위기를 수차례 거듭하던 중 기적같이 투자자를 찾았다. 유전체 분석업체 마크로젠 서정선 회장이 헬스웨이브의 잠재력을 보고 7억원을 투자한 것이다. 때마침 국내에서 스마트폰 시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병원들이 차츰 디지털 콘텐트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2011년 서울대병원을 시작으로 삼성서울병원, 강남차병원 등 대형병원들이 월 500만원 안팎의 이용료를 내고 헬스웨이브 프로그램을 찾기 시작했다. 현재 병원이 20여개까지 확대됐다. 

 헬스웨이브 프로그램은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인 대표적인 서비스다. 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한번 보여주자 금방 이해가 됐다. 환자 입장에서는 의사에게 수십번을 물어봐야 알 만한 내용이지만, 헬스웨이브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환자는 의문을 해소해 만족감이 높아지고, 의사는 보다 진료 행위에 집중하면서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픈 스튜디오 준비

 헬스웨이브의 사업은 글로벌 시장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장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의사가 환자에게 설명하는 의료 지식의 내용이나 의사·환자 사이의 소통 스트레스는 비슷하기 때문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의료진들은 올해 초부터 헬스웨이브와 시범사업으로 헬스웨이브의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진료에 활용하고 있다. 일본·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의 유명 병원 의료진들도 시범 서비스에 참여했다. 

 “사실 국내에선 리베이트로 의심받을까봐 광고 기반 사업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지만, 해외에서는 병원과 환자들에게 의료 애니메이션을 무료로 제공하고 광고를 통해 수익을 내는 방식이 훨씬 자유롭습니다.”

 자금 측면에서도 호재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2월에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설립한 스타트업 전문투자사 케이큐브벤처스가 헬스웨이브에 5억원을 투자하기도 했다. 그동안 이 시스템을 쓰겠다는 의료진이 많았음에도 자금이 부족해 사업을 확장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그로서는 날개를 단 격. 

 그는 이 서비스에 ‘오픈 스튜디오’ 개념도 도입할 계획이다. 즉 의료진이 자기가 원하는 정보 안내 프로그램 콘텐츠를 애니메이션으로 직접 만들 수 있게 하겠다는 것. 환자 교육 자료를 의료진이 자유롭게 만들어 활용하면 의사와 환자간의 커뮤니케이션이 더욱 원활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직접 하기 힘든 의사들도 있기 때문에, 출판사 개념의 서비스도 제공할 계획. 이 출판사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출판사다. 즉 제작사라고 할 수 있다. 의사와 병원 등이 소스를 제공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교육자료를 이 출판사를 통해 만들 수 있게 된다. 마치 저자와 책 판매 수익을 나눠갖듯이 이 애니메이션에 광고를 붙여서 수익을 나누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의 사업 계획은 거침이 없다. 2000년 이후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이 길을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14년간 준비한 셈이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중단하거나, 사업을 그만둘뻔한 위기가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면서 내공도 탄탄해졌다. 그리고 14년의 노력의 결과물은 이제야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저는 여전히 제가 의사로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딴 길을 고민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 역시 의사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이 일 자체가 외과 의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의사 중에는 저같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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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기업가의 창업이 살아나야 합니다. 기술창업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싶습니다”

아마 1년도 훨씬 전이었을거다. 류중희 퓨처플레이 대표가 아직 인텔코리아(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는 올라웍스 창업자로 올라웍스를 인텔에 매각한 뒤 인텔에서도 일을 했다)에서 상무로 재직하고 있을 때 만났다가 이런 얘기를 들었다. 구상중이었던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뒤 기술창업이 화두가 되고,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창조경제 바람이 불면서 나는 더욱 궁금해졌다. 그가 이 구상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지.

 아산나눔재단이 서울 강남 역삼동에 세운 ‘마루180’에 자리를 잡은 퓨처플레이 사무실을 찾아가 그의 구상이 구체화되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마루180에서 만난 류중희 대표>

◆Company-building company

역시 만나자마자 예전의 그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다. 그에게서 받은 명함에는 퓨처플레이란 회사명이 적혀 있었다. 

“기술창업 활성화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기술창업을 도와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기계가 더 나은 방법으로 쓰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더 이상 편하지 않거든요. 사람이 더 쓰기 편한 기계, 스마트폰을 보다 더 직관적으로 쓸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퓨처플레이는 포스트 스마트폰 시대를 만들어가는 회사입니다.”

 그는 기술창업에 4가지 축이 있다고 말했다. 인터페이스, 하드웨어(웨어러블기기 등), 기술기반 서비스, 그리고 빅데이터분석 등이 그것이다. 그는 4가지 분야가 다 중요하다고 봤다. 어느 분야에서건 창업을 해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각각의 분야에서 창업을 하는 회사를 찾아 투자를 하면 될까. 처음 그의 구상을 들었을 때 떠오른 건 ‘액셀러레이터’였다. 그런데 그는 그게 너무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이 각각의 아이템을 다 하나씩 회사로 만드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그런 회사를 찾아 투자하는 일은 더욱 힘든 일이죠. 이런 분야에서 창업을 하는게 힘들어서 기술분야 창업이 많지 않은 것인데, 투자만 하려고 하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죠.”

 그럼 그는 어떻게 해결책을 찾았을까. ‘함께 회사를 만들어가는’ 게 그가 찾은 해결책이었다. 함께 회사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는 지금의 액셀러레이터나 인큐베이터가 하는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모습을 그렸다. Company-building company. 이것이 퓨처플레이의 정체성.

 “퓨처플레이는 그냥 액셀러레이터가 아니라 우리 역시 스타트업입니다. 다만 우리의 product는 스타트업이죠. 즉 회사가 프로덕트인 그런 스타트업입니다. 항공모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항공모함은 수많은 비행기를 띄워 올립니다. 하지만 항공모함 역시 바다로 나가야 하죠. 똑같이 사업을 해야 합니다.”

◆스타트업의 성공은, 고생에 대한 보답이 아니다

그가 이렇게 일을 벌인 것은, 멘토링은 그가 할 분야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멘토링이 아니라 회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일에 무게를 뒀다. “뭔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잘못된 점을 알려주고,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하고, 이런 것은 사실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회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건 진짜 전문가가 달려들어야 하는 겁니다.”

 CFO가 필요하면 좋은 CFO를 추천해주거나, 소개해주는 게 아니라 직접 달려들어서 한다. 마케팅이 필요하다면, 마케팅을 잘하는 외부회사를 소개해주는 게 아니라 안에서 직접 해결해준다. 평가나 비판, 조언이 아니라 직접, 같이 하는 게 퓨처플레이의 스타일. 

 그의 말처럼 이런 것을 하려면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6명의 파트너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 밖에 5명의 스페셜리스트, 그리고 5명의 인벤터(예비창업자)가 있다. 이 5명의 예비창업자들은 퓨처플레이의 직원들이다. 직원으로 회사에 입사해 일을 배우고 파트너, 스페셜리스트들과 함께 사업을 준비한다. 그는 기술 창업이 가능한, 엔지니어링을 전공으로 한 석박사급 인재들만 간추려서 예비창업자로 뽑았다고 했다.

 “제가 창업을 한 과정을 돌이켜봤어요. 지나고 보니 그 중에는 정말 저에게 피가되고 살이되는 그런 경험들도 있었던 반면, 해봤자 별 도움도 안되는 고민과 경험들도 많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창업자들, 특히 기술창업을 하시는 분들이 핵심 이슈가 아닌 자잘한 고민들을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려고 퓨처플레이를 만든 거구요. 고생을 해서 보상을 받는게 스타트업이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화해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세상에 자신의 뜻과 꿈을 펼치는게 스타트업이지요.” 

◆막강 투자자와 파트너진 구축

 그는 6명의 파트너들 면면을 소개했다. 우선 넥스알 창업자였던 한재선 박사, 그리고 발명가로 유명한 황성재 박사, 윤경민 변리사, 그리고 HCI(휴먼컴퓨터인터페이스) 분야 전문가 1명과 변호사 1명, 여기에 류 대표 본인까지. 스페셜리스트들 5명의 면면도 화려하다. 세계적인 증권사 출신의 금융전문가는 창업경험까지 갖추고 있고, 해외마케팅 전문가, 하버드대학교 박사과정에 있는 operation 담당, 상품기획자, 지적재산권 전문가 등등. 

 일이 되려면 외부의 조언과 자문, 인정 역시 필수. 그래서 쟁쟁한 투자자들도 모셨다고 한다. 이택경 프라이머 대표를 비롯, 호창성·문지원 빙글 대표, 박지영 컴투스 대표, 김길연 엔써즈 대표, 김상범 넥슨 공동창업자 등으로부터 40억원의 펀딩까지 받아냈다. 퓨처플레이의 첫번째 Company-building 회사는 카이스트 박사출신의 채용욱씨가 하는 Brain-Computer Interface 분야. 

 그는 내년까지 100억원을 펀딩할 계획. 기술창업가들이 창업을 하면서 겪는 애로 사항을 해결해줄 뿐 아니라 창업을 해서 훨훨 날아오르게 하겠다는 것. 목표가 크고, 출발은 탄탄하다. 퓨처플레이를 통해 기술 창업의 새로운 장이 열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루180을 나섰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스타트업 창업가들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창업도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진로이고,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행복해야죠. 무작정 고생만 한다고 성공이 다가오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by wonkis

<퓨처플레이 사무실 안쪽에서 밖을 바라본 모습. 맨 윗층이라 옥상 정원과도 통한다. 구조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대표가 디자인했다고 한다.>

<퓨처플레이 사무실을 밖에서 본 것.>

<사무실에 들어가면 벽에 이렇게 책장이 있는데..>

<책장이 문처럼 열리면서 안쪽에 회의실 공간이 등장한다!!!!>

<수납공간처럼 보이는데, 화이트보드로도 쓸 수 있다. 매우 실용적인 쓰임새들이 곳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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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이유에서나, 직업적인 이유에서나, 사진을 정말 많이 찍는다. 그런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일이 많으면서 사진을 관리하는 일이 엄청나게 번거로운 일이 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진은 편리하기 때문에 수시로 찍게 되지만, 그만큼 사진의 양이 너무 많아서 관리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사진만 그런 것은 아니다. 폰에 있는 각종 문서나 동영상 역시 마찬가지. 

 여기서 핵심은 관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에서는 아직까지는 관리보다는 전송의 문제가 더 크다고 봤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 나와도 수천장씩 되는 사진이나 문서를 스마트폰에서 직접 관리하기는 힘든만큼 이를 죄다 PC나 노트북으로 옮겨서 관리해야 한다. 스마트폰 하드를 비워줘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이를 위해 케이블로 연결도 해보고 블루투스도 사용해봤지만 나름대로 다 불편함이 있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이스트몹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파일을 옮기는 게 왜 이렇게 불편하지?’

<서울 강남 마루180에 있는 이스트몹 사무실에서 창업멤버들이 포즈를 취했다. 앞줄 오른쪽이 오윤식 대표.>

◆이스트소프트에서 싹튼 창업

이스트몹 창업자인 오윤식 대표는 소프트웨어 회사 이스트소프트에서 12년을 일했다. 10년을 넘게 직장생활을, 그것도 한 회사에서 하다가 창업을 한 것은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흔한 케이스는 아니다. 

 그가 처음에 이스트소프트에 입사를 하게 된 것은 군복무때문. 항공대 통신공학과 98학번인 오 대표는 2000년 6월 병역특례로 이스트소프트에 입사했다. 그는 병특 시절부터 창업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스트소프트에 입사할 당시 이 회사 직원은 20명. 2~3명으로 시작하는 요즘의 스타트업에 비한다면 큰 회사였지만 그래도 사장부터 갓 입사한 직원까지 서로를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벤처기업이었다. 창업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초창기부터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가 알게 된 것은 ‘창업을 해서 한 회사를 이끌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점이었다. 결국 12년 동안 소프트웨어 개발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이 정도로 오래 일할 줄은 몰랐죠. 12년동안 개발을 했어요. 처음에 20명이었던 직원이 나중엔 500명이 넘을 정도로 회사가 커지는 과정을 겪었어요. 이 기간동안 김장중 이스트소프트 대표가 고생하는 것도 봤죠.”

 그래도 회사를 차리고 싶었던 그는 2010년 회사를 나와 독립하려고 했다. 입사한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때마침 이스트소프트는 줌이라는 포털 사업을 준비하고 있던 시점. 개발자인 그가 중간에 나가기는 어려운 상황이어서 그는 이 프로젝트를 끝내고 2012년 7월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엔 이스트소프트 내에서 사내벤처 형태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독립을 했다.

◆세상에 도움을 주는 소프트웨어 만들자

첫 시작 멤버는 오윤식과 이경호. 이경호는 오 대표의 대학교 동기동창이다. 두 사람이 개발하기 시작한 앱이 지금 회사의 주력인 센드애니웨어(Send Anywhere). 이름 그대로 파일을 어디에서 어디로든 편하게, 빠르게, 쉽게 보낼 수 있는 그런 앱이다. 오 대표가 이런 앱 개발에 착수한 것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파일을 전송할 때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자주 느꼈기 때문. 특히 서로 다른 기기간에 파일을 주고받을 때 불편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가 많아 이것을 해결해보고픈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처음에 창업을 하면서 세상에 도움을 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자 이렇게 다짐을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엔지니어이기 때문에 IT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그런 소프트웨어를 서비스 형태로 제공하자고 했죠.”

 사실 그는 창업을 하기 2년 전부터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봤고, 이를 정리했다고 한다. 모바일을 좀 더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소프트웨어를 고안해온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고안을 했기 때문에 금방 만들었다. 3개월여만에 ‘Send Anywhere’를 출시했고 이듬해인 2013년 5월 박해일이 합류했다. 박해일은 이스트소프트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였다. 개발이 핵심인 회사이긴 했지만 엔지니어만의 조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투자를 받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의 강석흔 이사가 다리를 놔서 강수혁 이사가 합류하게 되다. 강수혁 이사는 전기전자공학를 전공으로 했지만 비즈니스 관련 업무를 하면서 엔지니어 백그라운드에 마케팅, 전략기획 등의 업무까지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강 이사가 합류하면서 앱을 외부에 알리는 일이 본격화됐다. 작년 연말 10만명이었던 월간 활성 사용자 수는 올들어 30만을 돌파했다.

◆라쿠텐 손잡고 세계시장으로

Send Anywhere의 장점은 뭘까. 클라우드 방식으로 파일을 옮긴다거나 블루투스로 공유를 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우선 일반적인 클라우드 스토리지 서비스와 달리 두 기기간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네트워크 전송경로를 찾아 안전하게 직접전송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서비스입니다.” 오 대표의 설명이다. 쉽게 말하면 P2P 방식을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 클라우드처럼 별도의 공간을 확보할 필요 없고, 회원가입이나 로그인 과정도 필요없다. 앱을 다운로드 받거나 웹 페이지에 들어가 일회용으로 발급되는 6자리 숫자 키를 이용해 간단하게 파일을 전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을 PC에 보내거나, 노트북에 있는 문서를 스마트폰으로 전송하거나, 스마트폰 동영상을 태블릿으로 보낼 수 있다. 물론 모든 전자기기는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어야 한다. 와이파이가 됐던, 3G나 4G LTE가 됐던, 네트워크에 접속해 있어야 한다. 

 편리한 만큼 발생할 수 있는 그런 문제점도 얼마든지 예측 가능하다. 우선 보안 문제가 거론된다. 일회용 비밀번호는 한번만 사용되고 없어지기 때문에 유추될 가능성은 적지만 해킹에는 취약할 수 있다. 항상 사용하는 기기간에 매번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것이 나중엔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상시 활용 기기간에는 로그인을 통해 묶어주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보안문제가 더 중요해진다.

 최근 이스트몹은 일본 IT기업인 라쿠텐으로부터 1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라쿠텐은 지난해 한국인 호창성, 문지원 대표가 설립한 미국 벤처기업 비키를 인수한 바 있고 싱가폴에 라쿠텐 벤처스(Rakuten Ventures)를 설립한 뒤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초기 스타트업 벤처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스트몹은 한국 스타트업으로는 최초로 라쿠텐벤처스로부터 투자유치에 성공한 회사가 됐다.

 이스트몹이 라쿠텐의 투자를 유치한 것은 전략적인 목적이 크다. 언어의 장벽없이 전 세계 어디서나 쓰일 수 있는 이 서비스를 해외 시장으로 확대하는데 라쿠텐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본 것이다.

 “처음부터 유료모델을 냈기 때문에 수익이 계속 발생했지만 사업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나니 투자를 받을 필요성이 커지더군요. 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사용자 기반을 넓혀야한다는 생각도 커졌죠. 그런 의미에서 라쿠텐의 투자는 두가지 목적을 다 충족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것이라 생각합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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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게임 분야의 일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 개발이든, 마케팅이든, 기획이든,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차이가 너무나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한다고 하더라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데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한국의 스타트업 일백쉰일곱번째 주인공은 컴투스프로야구매니저를 만든, 에이스프로젝트의 박성훈 대표다.

◆채팅방 만남으로 시작된 엔텔리전트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고려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한 학생 박성훈은 이듬해인 1999년 1학기까지는 착실히 학교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질풍노도의 시기인 20대 초반에 진득하게 학교를 다니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는 법. 게다가 1999년은 전국에 벤처열풍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휴학을 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1999년 11월19일 나우누리 채팅방에서 경희대 영문과에 재학중이던 소태환을 만나게 된다. 

 채팅방에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다들 나가버리는 바람에 두 사람만 남게 된 상황. 어색한 마음에 이것저것 얘기하던 둘은 단번에 서로가 상당히 상대방을 보완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창업을 결심하고 사업 아이디어와 함께 기획을 하고 있던 소태환은 개발자를 찾고 있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은 박성훈은 그 다음날 바로 짐을 싸서 부산 집을 나와 양재역으로 갔다고 한다. 정말 대단하다. 두 사람의 뜻이 정말 잘 통했거나, 박 대표가 놀라운 판단력의 사람이거나, 아니면 너무 무모한 사람일 수 있다. 물론 그 뒤의 사업을 보면 (결과적으로는) ‘무모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어쨌든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처음엔 웹서비스를 기획했었어요. 커뮤니티 사이트 이런 것을 만드는 것도 기획했었구요. 그런데 잘 안됐죠.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자고 얘기를 했죠.”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게임. 게임을 정말 좋아하는 두 사람은 게임 사업을 하기로 했다. 열심히 게임 사업을 기획해서 우선 테스트를 받아보기로 했단다. 두 사람은 경희대 창업보육센터에서 하는 창업경진대회에 자신들의 기획안을 갖고 도전했다. 그리고 여기서 권준모 교수(전 넥슨 대표, 현 네시삼십삼분 의장)를 만나게 된다.

 게임 회사 창업에 의기투합한 권준모, 소태환, 박성훈 등은 2001년 엔텔리전트를 만들었다. 그런데 잠깐. 여기에 내가 몰랐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 있었다. 엔텔리전트는 훗날 넥슨에 인수되면서 권준모 대표는 넥슨 대표도 지낸다. 모바일 게임업체로 널리 알려진 이 회사의 시작은 모바일게임이 아니었다고 한다. 

 “원래는 아케이드 게임을 하려고 했어요.”

 “그럼 모바일게임은 어떻게?”

 “에이스프로젝트 창업멤버인 이성일이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저랑 친구였거든요. 만날 때마다 모바일게임의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계속 얘기를 했어요. 그러면서 모바일게임 세상을 알게 됐죠.”

 이렇게 해서 시작된 엔텔리전트의 모바일게임 사업. 이 회사가 무럭무럭 성장해 넥슨에 인수되고 엔텔리전트 창업멤버들은 모두 넥슨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야구를 좋아하는 세 친구

넥슨 생활은 2009년 끝났다. 엔텔리전트 창업멤버들은 권준모 의장을 필두로 고스란히 나와 네시삼십삼분을 만들게 된다. 권 의장의 한마디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제 다시 새로운 것을 해볼 때다!”

 사실 넥슨에 들어가기 전 이들은 모바일게임에 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큰 회사에서는 그들이 맡아야 하는 역할이 있었다. 이름부터 궁금증을 자아내는 네시삼십삼분을 만든 것은 이들이 하고 싶었던 것을 제대로 다시 한번 해보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네시삼십삼분도 풀어갈 이야기가 만만치 않은 회사이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므로 이 정도에서 넘어가고, 다시 박성훈 대표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네시삼십삼분에서의 생활은 막상 박 대표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의 관심은 모바일게임산업을 장기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콘텐츠였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 자신이 만들고 싶은 콘텐츠를 직접 해보고 싶었다.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동창이었던 전우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부산이 고향이 전우진은 프로야구 롯데의 열혈팬이자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나온 게임매니아. 박 대표의 고려대학교 컴퓨터공학과 동기동창인 이성일까지 세 사람은 야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들이 정말 좋아하는 것. 처음부터 야구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에이스프로젝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2010년 회사를 만들고 1년 반 동안의 노력 끝에 네이버앱스토어를 통해 ‘플레이볼’이라는 소셜야구게임을 출시했다. “컴투스프로야구 매니저의 전신인 셈이죠. 그런데 별로 신통치 않았어요” “왜?”

 “출시 직전에 네이트 개인정보 유출사건이 일어나면서 앱스토어 자체가 얼어붙었어요. 생각보다 사람이 모이지 않았고 이걸 장기적인 주력 콘텐츠로 하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시점에선 대안이 많지 않았을텐데”

 “그쵸 좀 더 좋은 플랫폼을 찾아야겠다. 이런 생각이 우선 들었구요. 확실히 모바일게임 플랫폼이 제대로된 것이 나올 거란 생각이 들어서 모바일판 플레이볼 게임 기획안을 만들고 1년 동안 준비를 했죠.”

 그래도 플레이볼 시도는 나쁘지 않았다. 우선 기대만큼 고객이 많이 들어오진 않았지만 1인당 매출(객단가)이 높았고, 고객 충성도가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게임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컴투스와 손잡고 해외로!

2012년 여름부터 2013년 가을까지는 박성훈 대표의 창업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을까. 왜? 매출이 없었으니까. 매출이 없었던 이유는 물론 모바일에 적합한 야구게임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회사는 투자도 받지 않았다. 돈이 없는데 콘텐츠 개발엔 돈이 필요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럼 그 시기를 어떻게 버텼나요?”

 “대표이사 가수금으로 꾸려나갔어요.”

 “투자를 받지 않고?”

 “투자를 받기엔 저희가 너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때문이었죠. 콘텐츠도 없이 투자를 유치하려고 하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겠죠. 투자를 받으면 지분 관계가 너무 복잡해질 것 같다는 점도 있었구요.”

 에이스프로젝트가 개발하고 있었던 프로야구 게임은 기존 야구게임과 좀 달랐다. 그런데 파트너사를 구하는 과정에서 그게 걸림돌이 됐다. 유저가 매니저가 되는 스타일의 야구게임의 전형을 따르지 않은 것. 흥행을 우려한 다른 게임업체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컴투스만 저희 생각을 알아주더군요. 그 덕에 컴투스와 손을 잡을 수 있었죠.”

 컴투스와 함께 반년동안 게임을 조정하는 작업을 하고 작년 10월 드디어 컴투스프로야구매니저가 출시됐다. 1년반동안 매출이 없어서 고생했고, 대표이사 가수금으로 회사를 꾸려나갔지만 게임 출시하고 4개월도 안 돼 대표이사 가수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컴투스는 퍼블리싱만 맡은 게 아니라 아예 10% 지분 투자도 단행했다. 확실히 피를 섞어 공동운명체가 된 것이다.

 이 회사의 두번째 작품도 야구게임이다. MLB매니저를 개발중인데 올 9월께 미국 시장에서 출시할 예정이다. 이것 역시 미국 시장 경험이 풍부한 컴투스와 함께 한다. 

 “주로 야구 게임을 만들건가 봅니다?”

 “천만에요. 그럴 리가 있나요. 에이스프로젝트는 이제 시작인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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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챌 창업자인 벤처 1세대 전제완 유아짱 사장이 상장사인 키스톤글로벌으로부터 50억원의 투자를 유치, 재기에 나선다. 이에 따라 지난 2012년 9월 운영자금 부족으로 문을 닫았던 영상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짱라이브’도 20개월여 만에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28일 전제완 사장은 “최근 키스톤글로벌과 50억원 투자 유치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고 이 중 20억원이 오늘 입금됐다”며 “이를 기반으로 5월중 짱라이브 서비스를 재개하고 6월15일까지 나머지 투자자금을 받아 미국에서도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키스톤글로벌이 투자하는 회사는 한국의 유아짱이 아닌 미국 신설법인 ‘에어(Aire Inc.)’다. 에어는 올 1월 전제완 사장이 미국에 설립한 벤처회사로서 키스톤글로벌은 이번 투자로 에어의 지분 20%를 보유하게 된다. 키스톤글로벌은 이같은 내용을 29일 공시할 계획이다. 에어는 투자 유치와 함께 짱라이브를 서비스하고 있던 기존법인 유아짱을 100% 자회사로 편입하게 된다. 기존 유아짱 주주들은 정해진 비율대로 에어사의 주주로 변경된다. 전 사장은 이런 절차가 마무리되면 유아짱 사명을 에어코리아로 변경할 예정이다.

 전제완 사장은 지난 1999년 ‘자유와 도전’을 기치로 내걸고 프리챌을 창업, 2년만에 1000만명이 넘는 회원을 모으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2002년 12월 주금가장납입혐의로 긴급체포되면서 프리챌은 몰락하게 됐고, 그는 훗날 개인적인 혐의는 벗었지만 230억원의 부채를 안고 파산에 이르렀다. 2008년에는 동영상 SNS 업체 유아짱을 설립, 짱라이브를 통해 한때 230만명의 회원을 모았으나 자금난을 겪다가 서비스를 중단하기도 했다.

  전 사장은 “현재 전세계적으로 영상SNS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다”며 “한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 안에 미국에서 영상SNS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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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생각 못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결정한 선택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창업의 순간에도 당연히 그런 일이 많다. 이번 일백쉰여섯번째 스타트업의 주인공인 윤영중 에바인(Evain) 대표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인생의 진로가 바뀌면서 삶의 목표과 방향이 모두 달라진 케이스다. 

◆가지 않은 길

1991년 항공대 항공기계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기체 자동제어 분야를 전공으로 했다. 그가 생각한 진로 역시 기체 자동제어와 관련된 업무를 계속해 정비면장을 받아 그 분야에서 일하는 것. 이 분야 전공자들이 그러하듯 그는 공군에 입대해 정비 업무를 하려고 했으나 뜻밖에 전혀 상관없는 분야로 보직이 변경됐다. 

“티오가 없다고 하면서 갑자기 작전 관제로 가게 됐어요. 정비면장을 받으려면 군에서 경험치를 쌓아야 하는데 그걸 못하게 된 거죠. 군에서 이걸 해결 못하면 나와서 면장을 받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거든요. 진로가 바뀔 수 있는 그런 순간이었죠.”

 뜻하지 않게 업무가 바뀌게 된 그는 낙심할 법도 했지만 곧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관제 분야에 근무하면서 컴퓨터 프로그램의 중요성에 눈 뜬 것이다. “물론 당시엔 시스템 운영에 필요한 프로그래밍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정도였어요. 하지만 이게 나중에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계기가 됐죠.”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이 억울하지는 않았을까. 그냥 시간을 좀 더 들이더라도 원래 생각했던 길을 가는 게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까. “처음엔 당연히 막막하고, 답답하고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군에서 작전관제 업무를 하게 된 것에 대해 아쉬움이 없습니다.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게 됐고, 순간적인 판단력이나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능력 이런 것을 배우게 됐으니까요. 이런 분야는 제가 이전에는 배우거나 훈련하지 못했던 일이거든요.”

 2001년, 그에게 색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IT인재를 일본으로 파견해 현장 근무를 하게 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가 지원해 뽑힌 것. 그는 제국데이타뱅크라는 일본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또 다시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게 됐다. 

◆마음먹기에 따라 사회에 기여하는 일 할 수 있다

제국데이타뱅크라는 회사는 기업들의 정보, 각종 데이터 등을 수집·분석해 이 정보를 원하는 기업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윤 대표는 5년간 일하게 된다. 

“회사정보를 C1, 임원정보를 C2, 결산 정보를 C3라고 해요. 여기서 결산정보는 분식회계 가능성까지 분석하게 됩니다. 상당히 고급 정보인 셈이죠. ”

 제국데이타뱅크는, 윤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일본 중소기업의 50% 가량에 대한 이런 정보를 축적, 분석해 놓고 있었다. C3의 경우 계정과목을 표준화해 단독재무제표 기준으로 257개로 집약해 결산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당연히 업계에서 영향력이 있고, 이에 대한 상당한 수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정보의 수집과 가공, 그리고 표준화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어요. 그게 가장 큰 소득이었죠. ””

 2006년까지 이 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한국으로 다시 들어오게 된다. 물론 그는 무작정 들어오지 않았다. 일본 회사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썩힐 마음도 없었다. 한국에 들어와서도 일본에서 하던 업무를 그대로 한 것이다. 본사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일본보다 싼 비용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고, 윤 대표로서는 모국에서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2009년엔 고향인 광주 광역시로 아예 사무실을 옮겼다. 마침 직원들 대부분이 이 지역이 고향인데다 일본과 주로 온라인으로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일을 하기에 굳이 서울에 사무실을 둘 필요가 없어서였다.

 비교적 평온했던 그의 사업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12년부터였다. “그 무렵부터, 뭐랄까 일본에서 반한 감정이 눈에 띄게 커진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일감 자체가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한국에 일을 잘 안맡기게 된 거죠. 100엔당 1400원까지 갔던 환율도 100엔당 1000원까지 떨어지면서 일본에서 일감을 받아오는 메리트도 감소했죠. ”

 위기는 순식간에 닥쳐왔다. 그러면서 그는 ‘IT를 버려야 하나’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10년 넘게 IT분야에서 일을 해 왔는데, 지금까지 뭘 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막막하더군요.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든 거에요. 나이 마흔이 되서 다른 것을 해야하나 고민도 하고 그랬죠.”

 그때 그는 우연히 박원순 서울 시장이 쓴 ‘세상을 바꾸는 1000개의 직업’이라는 책을 읽게 된다. ‘마음먹기에 따라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구절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책에서 사회적기업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그리고 ‘내가 가진 IT기술을 세상을 위해서 써 보자’는 생각이 처음 들었죠. ”

◆마케팅 툴로 키운다

사회적 기여와 자신이 잘하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온 노하우 등 세가지 측면에서 교집합을 찾던 그의 아이디어는 ‘전화번호 식별’. 발신자 전화번호 표시는 오래전부터 제공되고 있지만 저장된 번호가 아니면 상대방이 누군지 알 방법이 없다. 휴대폰의 경우 그마나 알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070으로 시작되는 번호, 사업장 번호 등은 알 수가 없다. 전화를 거는 사람 입장에서도 답답하다. 상대방이 내가 누군지 알면 반드시 전화를 받을텐데, 그걸 알려줄 수가 없으니 모르는 번호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일부러 안받는 일도 생긴다. 중요한 비즈니스를 앞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일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일본에서의 경험때문. 전화번호 식별 하나만 해도 엄청난 정보가 된다는 것을 체험했던 그다. 이 서비스를 위해 그는 2012년 에바인을 설립했다. 서비스 이름은 ‘뭐야 이번호’로 정했다. 모르는 전화가 왔을 때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 서비스명이 된 셈. 전화번호 식별을 위해 우선 공개된 전화번호의 경우 해당 DB를 쓰되 비공개전화번호에 대해선 집단지성을 활용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회사 대표번호 이런 거는 전화번호부 책이나 인터넷 이런 데 다 공개가 돼 있어요. 하지만 내부 부서번호, 이를테면 마케팅팀 번호 이런 것은 알 수가 없거든요. 개인 사무실 번호 중에도 파악이 안되는 게 많죠. ”

 처음에 그 역시 긴가민가했다고 한다. 집단지성이 제대로 작동하면 모르는 번호가 걸려왔을 때 뭐야이번호 앱을 설치한 사람들이 앱에다 등록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스팸성 전화라던가, 스팸이 아니라던가, 스팸인데 구체적으로 보험사의 가입권유 전화라던가, 통신사 마케팅 전화라던가 등등. 이걸 할까. 놀랍게도 사람들은 이 수고로운 작업을 마다하지 않고 했다. 물론 사람들의 이타심만 작용한 것은 아닐꺼다. 최소한 등록을 하면 자신은 그 다음에 같은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고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500만명의 사람이 앱을 다운로드했고, 100만건이 넘는 전화번호의 아이덴터티가 등록됐다. ‘뭐야 이번호’ 앱이 나온 뒤 KT와 NHN도 유사한 앱을 만들어 시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의 다음 숙제는 수익모델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전에 더 시급한 게 있다면 뭐야 이번호 앱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지금 뭐야 이번호는 스팸전화 예방앱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그렇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 우리는 이 앱을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알게 해 줄 뿐 아니라 전화를 거는 나는 누구인지를 상대방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만들었어요. 그게 서로간에 예의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이를 통해 자신을 마케팅할 수 있는 방법도 되구요.”

 물론 소비자들의 쓰임새를 막거나 바꿀 방법은 없다. 다만 더 다양한 쓰임새가 있음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관련 상품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사용자가 몰리면서 한때 서버부하가 걸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대단해요. 서버부하로 번호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창이 조금만 늦게 떠도 바로 알아차려요. 그러니까 더욱 시스템 안정을 위한 개발에 총력을 다할 수 밖에 없었어요. ”

 윤 대표는 상반기 중 스미싱 방지 기능이 포함된, 뭐야 이번호 1.4버전을 출시할 계획이다. 기존의 기능에 더해 자신을 마케팅할 수 있는 기능이 강화됐다. 궁극적으로는 전화를 거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대방에게 알리거나 각종 상품 등의 정보도 제공할 수 있는 마케팅 툴이 되겠다는 게 그의 비전이다. 소비자로서는 상대방의 의중을 명확히 알 수 있어서 좋다. 어떤 전화일까 고민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도를 명확히 미리 파악하고 전화를 받을지 말지 결정할 수 있다. “물론 수익모델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현재로선 영업비밀이죠. 더 구체화되면 공개하겠습니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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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월드(www.dadaworlds.com)라는 게 있었다. 1999년 한국에서 출시된 이 서비스는 가상세계를 구현했다. ‘세계 최초의 3D 가상세계 서비스’로 해외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다다월드는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세계와 유사한 모습으로 가상의 공간을 만들었다. 이 가상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물건을 팔 수도 있고, 모여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으며, 자신을 치장하거나 사람들을 사귈 수도 있었다. 다다월드는 이후 등장한 세컨드라이프에 비해 컨셉트 측면에서 훨씬 먼저 개발됐고 실제로 서비스를 했다. 

<2000년 당시 다다월드의 모습. 삼성증권이 입점해 있었다.>

 다다월드를 만든 사람은 광운대 건축공학과 신유진 교수. 신 교수는 미국에서 들여온 3차원 채팅 프로그램에 건축 기술을 추가해 사이버 월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가상공간에 현실세계를 옮겨 실제로 생활과 상거래가 이뤄지게 하는 게 신 교수의 구상이었다. 그는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생각다른세상이란 회사를 세워 대표를 맡았다. 다다월드는 ‘정보기술(IT) 붐’에 힘입어 1년여 만에 회원(시민) 10만명을 달성했다. 2000년에는 400개 점포를 분양했는데 눈 깜짝할 새 다 나갔다. 분양가는 평당 10만원. 10평짜리는 100만원, 200평짜리는 200만원을 받았다. 삼성증권 외환카드 성도어패럴 등 대기업도 앞다퉈 사무실을 냈다. 한양대병원은 분원을 열어 가상세계에서 진료를 시작했고, 서울경찰청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사이버 파출소 설치를 추진했다.

 다다월드를 통해 사이버영토를 확장하겠다던 신 교수의 꿈이 무산된 것은 ‘IT 버블’이 꺼졌기 때문. 분위기가 급랭하자 계약을 했던 사업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입주를 포기했다. 상담도 다 끊겼다. 먼저 입주해 사업을 시작한 사업자들도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다다월드 사이버 세상은 한순간 폐허로 변했다. 학교와 회사를 오가며 바쁘게 뛰어다녔던 신 교수는 교단으로 돌아가야 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그가 다다월드의 서비스를 재개하기 위해 움직이던 2007년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터23이란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다다월드는 가상의 세계였지만 터23은 보다 현실적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자 했다. 하지만 터23 역시 뜻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접어야했다. 그리고 다시 6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는 여전했다. 가상세계에 대한 꿈을 버렸거나, 잊고 있지도 않았다. 공교롭게도 페이스북이 가상세계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예고한 시점이었다. 세계적인 기업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선견지명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다시 옛날 얘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선, 과거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다다월드는 왜 도중에 좌초됐을까.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컨드라이프도 결국 몰락하게 된 이유는 뭘까. 그리고 그는 왜 아직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다다월드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그 당시 투자를 받기 위해 벤처캐피털을 만났었어요. 처음엔 주당 2만원에 얘기가 오갔지만 나중엔 20만원 얘기가 나올 정도로 기업 가치가 크게 올랐었죠. 하지만 그 순간 벤처거품이 꺼졌고 투자를 하겠다는 곳이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그렇게 한 순간에 모든 분위기가 변할 줄 꿈에도 몰랐던거죠. 투자를 받아야 할 시점에 투자를 못 받으니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질 못했고, 오래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신 교수의 설명이다.

 세컨드라이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떨까. 세컨드라이프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신 교수 역시 터23을 준비했었다. 다다월드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뜻대로 안됐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세컨드라이프마저 어려움에 빠졌다.

<세컨드라이프>

 “세컨드라이프도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마저 들더라구요. 가상세계는 역시 안되는 걸까. 어디가서 가상세계의 ‘가’자도 꺼내기 힘든 상황이 됐죠.”

 왜 안되는 걸까.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가상의 세계라는 것을 억지로 만드는 것에 집착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냥 사람들이 살아가고 뭔가를 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사람들이 모이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세계가 형성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에 이르른 그는 ‘사람들을 모으게 하는 동인이 뭘까’에 생각이 미쳤다.  

 “어떤 경제적 이익이 있거나, 명예를 얻거나, 시간가는 줄 모르게 즐겁거나 하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까요. SNS는 명예나 소통의 욕구로, 게임은 재미있으니까 사람들을 끌어당기죠. 그런데 세컨드라이나 다다월드의 경우 정체성이 애매했던 것 같아요. 소통을 하기는 어렵고, 시간가는 줄 모르게 즐겁다고 하기엔 게임보다는 훨씬 그런 요소가 약했구요. 결국 게임의 외양을 하고 있는데 게임보다 재미가 덜하고 게임보다 퀄러티가 떨어졌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그가 생각한 것은 경제적 이익을 얻게 하자는 것. 그는 이것을 ‘소셜네트워크마켓(SNM)’이라고 이름붙였다.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서 물건을 팔 수 있고 이로 인해 직접 이익을 얻게 하자는 게 그의 구상. 

 자기가 갖고 있는 중고 물품을 판매할 수도 있고 중소기업이 만든 물건을 판매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도 있다.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물건을 팔게 하면 이를 활용하기 위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인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물론 여기엔 판매자 뿐 아니라 추천만 해도 리워드를 받게 해 주는 시스템을 도입할 계획이다. 누구나 물건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오픈마켓의 가상세계 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네트워크를 극대화한다는 점, 그리고 추천만 해도 리워드를 받아 이를 통해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물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선 온라인 다단계 아니냐는 의혹을 극복해야 한다. 

 그의 새로운 구상은 과연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까. 사실 그는 1999년부터 같은 생각을 해 왔다.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였을 뿐이다. 그가 그 당시에 얼마나 앞선 생각을 하고 이것을 실현했는지는, 이어진 세컨드라이프나 싸이월드, 페이스북 등의 행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다월드나 세컨드라이프가 실패로 귀결됐던 것은, 결국 이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선 게임의 요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인데 게임의 요소에 의존할수록 점점 현실과 괴리된다는 거였다. 가상세계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는 생명력을 오래 가져갈 수 없다는 게 그가 세컨드라이프의 실패를 보면서 배운 점이라고 한다. 

 물론 실패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가상세계에서 제2의 삶을 계속 영위하고픈 마음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도 물론 원인이다. 다다월드를 만들었던 신 교수는 그래서 또 다른 대안을 찾고 있다. 그는 결국 사람들이 현실에서 살아가듯이 가상세계에서도 결국 제2의 삶을 살아갈 것이란 점을 굳게 믿고 있다. 다만 아직 그럴 만한 환경이 구축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만한 강력한 유인책이 없었을 따름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신 교수는 “억지로 가상 세계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들어와 살으라고 할 게 아니라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게 하면 너도나도 들어오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우선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이것을 통해 가상세계가 하나 둘 씩 만들어져 가는, 그런 방법을 이번에는 택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by won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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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정말, 확실한 시장이다. 모바일에서도 게임 시장은 분명히 존재하고, 수많은 게임들이 쏟아져나와도 여전히 유망하며, 아직도 더 성장할 것이 분명하다. 생산보다는 소비가, 물론, 그렇기에 더욱 경쟁이 치열하다. 살아남아 꾸준히 히트작을 내는 업체들에겐 그들만의 노하우와 철학이 있다. 아이디어박스게임즈는 이 험난한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히트작을 만들고 있는 회사다. 이들의 비결은 뭘까. 아이디어박스게임즈 박진배 대표를 만났다.

◆동갑내기 세 남자의 창업

아이디어박스를 창업한 세 사람은 친구 사이다. 박진배 대표와 이치우 이사는 고등학교 동창. 김종진 이사(기술총괄)까지 셋이서 만나게 된 것은 2004년경 농어촌홈페이지 제작 동아리였다. 이 동아리는 각종 농수산물을 판매할 온라인 판매망을 구축하지도, 다른 판매처를 찾기도 힘든 그런 농가나 어가를 지원해주는 게 목적이었다. 즉 자신들이 생산한 농수산물을 소비자들에게 직거래로 판매할 수 있도록 온라인 사이트를 구축해주는 게 주된 일. 2002년경부터 이치우는 이 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었고 2004년 이후 박진배, 김종진이 합류했다. 

 홈페이지 구축을 하면서 세 사람이 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각자의 특기가 달랐기 때문. 박 대표는 경영학을 전공으로 했고 웹 기획에 관심이 많았다. 이치우는 디자인이 전공이었다. 동서울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웹 디자인 뿐 아니라 게임 디자인 등에도 관심을 보였다. 김종진의 경우 숭실대학교 산업정보시스템공학부에 입학해 엔지니어의 길을 가고 있었다. 

 기획과 개발, 디자인 등 3박자가 맞아떨어진 이들은 창업을 하기에 가장 좋은 조합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좋은 일을 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동아리에서 함께 모였다는 것도 서로를 상당히 신뢰하는데 도움이 됐을 게 분명하다. 이들은 창업이라는 최종 결론에 도달하기 전 여러차례 호흡을 맞춰보는 실험을 해 본 것 같다. 함께 웹페이지를 만든 것에 그치지 않고 2009년부터는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 물론 각자의 특기를 살려서다. 

 경력상 게임과는 별 인연이 없어보이는 박 대표에게 하드코어 게이머인지 물었다. ‘아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게임과 관련된 직접적인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단초는 있었죠. 홈페이지 제작업체에서 병역특례로 군복무를 대신한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서 디자인도 하고 개발하는 일도 하다가 사진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디자인을 하고 기획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됐죠.”

 2009년에 이들이 처음 만든 게임은 아이박스. 취미삼아 만들었다고 하는데 발상이 재밌다. 택배박스가 달려가 택배 주문을 하는 게임이다. 그러고보면 게임이라는 것은 상상력에서 나오고, 그 상상력의 원천은 무한하다.

 간단한 게임 몇 가지를 만들어보던 이들은 2010년 본격적으로 게임 개발에 나섰다. 기획에 특기가 있는 박진배 대표가 비를 주제로 한 게임을 기획했다. 비를 피하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단순한 게임이지만, 몰입도를 극대화한 재미가 있었다. 단순한 게임이었지만 200만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하는 등 인기를 끌었다. 때마침 바다플랫폼 대회에 출품해 수상을 하면서 상금 3000만원을 확보한 이들은 셋이서 게임 회사를 창업했다. 아이디어박스게임즈는 이렇게 2011년 5월 설립됐다.

<아이디어박스게임즈 창업 멤버들. 맨 왼쪽이 박진배 대표>

◆옥탑방에서 만들어진 플랜츠워

이들이 창업을 할 당시 사무실은 성남 수진동의 한 옥탑방. 좁고 고립돼 있는 곳이지만 몰두해서 뭔가를 만들어내기엔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밖으로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마케팅을 하는 것보다는 좋은, 그들 자신이 우선 만족할 수 있는 그런 게임을 만드는 게 과제였다.

 서울 도심과 멀리 떨어진, 성남시의 이 옥탑방에서 지금도 이들을 이 이름으로 기억하게 하는 게임이 기획되고 만들어졌다. 800만 다운로드를 기록한 ‘플랜츠워’다.

 플랜츠워는 전략시뮬레이션과 역할수행게임을 결합한 장르의 게임이다. 거창하게 이름을 붙였지만 캐릭터와 그가 이끄는 팀원들을 잘 활용해 적의 진지를 부수는 게 기본 컨셉트다. 물론 모바일게임답게 아기자기한 느낌을 살렸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상상력이 넘친다. 인간들이 버리고 떠난 지구에 남은 동물들이 지배를 하기 시작한다. 동물들에 맞서 식물들이 영웅을 키워내고 이 영웅을 중심으로 동물들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임 이름도 플랜츠워다. 영웅을 컨트롤하고 키우는 재미가 크고 영웅에 의해 게임의 좌우되는 요소가 다분하다. 

 이들의 다음 게임은 바로 이 영웅에 초점을 맞췄다. 아예 영웅들을 대상으로 한 게임을 만든 것이다. 플랜츠워는 게임빌을 통해 서비스했지만 신작 게임은 직접 개발하고 직접 서비스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역시 새로운 도전이다. 페이스북에도 올려놨다. 3월 1일 출시된 이 게임이 ‘마스터오브크래프트’다.

◆시장에 없는 게임을 만들겠다

마스터오브크래프트는 역할수행게임(RPG)이자 마을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세계 영웅들의 마을을 경영하고 육성하는 3D 모바일 게임이다. 수백 종류의 무기와 방어구 등의 아이템을 만들어 영웅들에게 판매를 하고 마을을 확장하거나 운영하는 방식이다. 마을에 상점이나 능력치를 올려주는 여러 종류의 건축물을 지을 수도 있으며 자신만의 부대를 육성하고 운영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제작에 필요한 아이템도 수집할 수 있으며, 경험치와 금화도 얻을 수 있다.

 이 게임은 페이스북, Google플러스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연동돼 있다. 지인들과 함께 전투를 하거나 아이템을 거래할 수 있는 협업이 가능하다. 또 약 300종의 특수장비와 영웅이 등장하며 130여개의 다양한 마을 생산물이 등장, 여러가지 아이템을 수집하고 제작하는 쏠쏠한 재미도 제공한다.

 그는 마스터오브크래프트를 5월 영어버전으로도 출시할 계획이다. 아시아권 국가로 서비스를 넓히는 것도 준비하고 있다. 올 8월에는 플랜츠워2도 출시될 예정이다. 

  박 대표에게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기존 시장에 없는 차별화된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즉각 답했다. 어찌보면 재미나 중독성 등의 다른 요소를 희생하더라도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뜻으로도 들린다. 물론 그만큼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는 뜻일거다.  

 이를 한 마디로 그는 전인미답의 경지라고 표현했다. 욕심이 지나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목표도 없이 어찌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겠는가. 창작가는 욕심이 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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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투페이퍼는 광고를 활용해 대학생들에게 공짜 출력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돈을 내야 인쇄물을 출력할 수 있다는 상식을 깨고 광고주들로부터 광고를 받아 인쇄물에 광고를 올리는 대신 학생들은 공짜로 프린트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사진은 어떨까. 사진도 이런 방식을 적용해 공짜로 사진을 출력할 수 있을까. 씨에프닷이퀄톤은 사진 공짜 출력 서비스에 도전했다. 온라인에서 서비스 주문을 받는 방식이 아니라-물론 그것도 곧 가능하겠지만-오프라인에서 공짜 사진 출력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코닥과 제휴도 체결했다. 공짜 사진 출력 시대에 도전한 씨에프닷이퀄톤의 최민수 대표를 만났다.

◆세번째 창업

씨에프닷이퀄톤. 이 길고 어려운 이름을 가진 회사의 최민수 대표는 이번 창업이 벌써 세번째라고 했다. 그의 첫 창업은 지난 2003년. 당시 그는 유무선연동 채팅 서비스라는 분야를 시도했다고 한다. 상당히 앞서서 서비스를 하지 않았나 싶은데 돈이 잘 안되서 사업을 오래 지속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두번째로 그가 한 사업은 제휴마케팅 분야. 현재 이른바 리워드앱의 2000년대 중반 버전이 아니었을까. “제휴마케팅은 정산시스템이 핵심이에요. 그래도 당시엔 제법 정산시스템을 잘 구축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래요. 요즘 리워드앱들이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정산시스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정산이 몰리면 감당이 안되죠. 제때 정산해주지 못하면 사용자들의 불만이 쌓이고 서비스의 신뢰 문제와 직결되거든요. 그래서 당시 아무리 힘들어도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정산을 해 줬어요.”

 생각보다 사업은 잘 됐는데,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일이 꼬였다. 웹하드 사업에 투자를 했다가 돈을 날리고 사업을 접게 된 것. 두번째 사업이 실패로 끝나고 그는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개발자랑 말이 안통하는게 답답하더라구요. 그래서 개발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공공기관에서 하는 강좌를 들었죠.”

 개발을 배우고 그는 2013년 9월 퓨처로봇이라는 회사에 입사했다. 이 회사는 일종의 서비스 로봇을 만들어 파는 회사였다. 로봇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것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로봇은 디스플레이가 달린 움직이는 컴퓨터다. 터치 기능이 있어서 식당에 설치하면 주문을 받을 수도 있고 전시장에 설치하면 관람객들에게 각종 정보도 제공해줄 수 있다. 그는 이것을 키오스크 서비스 로봇이라고 표현했다. 광고 비즈니스도 해 봤고 개발도 할 줄 알았던 최 대표는 여기에 광고를 넣어서 수익모델을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했다. 이 회사에서 그는 함께 창업을 하게 되는 이민석을 만났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로보월드에 서비스로봇을 출품, 전시하면서 그의 세번째 창업의 전기가 마련됐다.

◆광고 기반 무료 사진 출력 아이디어

“거리를 다니다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쟎아요. 맨날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 가져올까. 이거 참 고민 많이 했어요.”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 끌까 고민하다가 로보월드에서 한가지 시도를 했다. 키오스크 서비스 로봇에 프린터를 연결한 것이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줄을 서서 로봇을 구경하고 사진도 출력하고 그러더군요. 굉장히 많은 관심을 끌었어요.”

 이때부터 그는 로봇에 프린트 기능을 연결하는 것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애시당초 고민하고 있던 광고와 프린트를 연계하는 것에 착안했다. 원래 키오스크서비스 로봇에 광고를 넣는 것을 고려하다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키오스크로봇에 프린트 기능을 넣었다가, 프린트물에 광고를 삽입하면 되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때마침 애드투페이퍼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출력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도 좋은 본보기가 됐다. 

 “처음에 디스플레이에 광고를 넣는 방안을 찾아봤지만, 그건 잘 안됐어요.”

 “왜 그랬을까요.”

 “광고가 붙으려면 매체로서의 가치가 있어야 했는데 키오스크로봇은 너무 제한돼 있어서 광고주를 찾기 쉽지 않았거든요. 한마디로 대중적이지 않았죠. 하지만 사진은 달라요. 누구나 사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게다가 광고로 인해 사진을 뽑는데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이용하려고 하겠죠. 그러면 그만큼 매체로서 가치가 높아지는 거죠.”

 원래 최민수, 이민석 두 사람은 퓨처로봇 사내에서 이 사업을 진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리소스가 제한돼 있는 회사는 다른 분야에 주력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시작해서 한창 의욕적으로 해보려는데 그만둘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따로 밖에 나가서 하기로 하고 퓨처로봇으로부터 사업권을 양수해 새로 회사를 차렸죠.” 그렇게 해서 이퀄톤(Equaltone)이라는 회사가 만들어졌다. 같은 톤으로, 즉 같은 마음으로 사업을 하겠다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사진 출력 서비스는 이퀄톤의 자회사 성격으로 씨에프이퀄톤이라는 회사를 만들고 최민수 대표가 맡았다. 이민석 대표의 지인이자 플로리다대학교에서 전산학과 석사학위를 받고 아이리버 등을 거쳐 일본계 회사 지사장을 맡고 있던 강태윤씨가 모회사 이퀄톤의 대표이사가 됐다.

◆사진 인화 시장 흔들겠다

광고와 마케팅 분야의 일을 해 온 최민수 대표는 사진 출력 서비스에 광고를 붙여 소비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할 수 있으면 분명히 뜰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서비스가 되려면, 우선 사진 품질이 좋아야 하고(공짜라고 해도 품질이 나쁘면 아무도 안 쓴다), 어디서나 비교적 쉽게 사진을 뽑아야 한다. 우선 소비자 입장에선 이 2가지 요건이 충족돼야 했다. 이를 위해 한꺼번에 대용량의 사진을 출력할 수 있는 프린터를 알아봤다. “코니카와 코닥 두 곳 밖에 없더라구요. 그런데 코닥은 한번에 인화지 750매를 넣을 수 있는데 코니카는 350매 정도였어요. ”

 최 대표는 즉시 코닥과 접촉했다. 반응은 뜻밖에 매우 좋았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고전하고 있던 코닥은 광고를 활용한 공짜 출력서비스를 통해 대반전을 꾀하겠다는 전략을 내비쳤다. 물론 사업을 확대하기 전에 소비자들의 반응을 보고, 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시범서비스를 위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장소를 물색, 영화관으로 정했다. 메가박스와 계약을 체결하고 강남역점, 센트럴시티점, 분당점, 대전점, 창원점 등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 10곳에 키오스크로봇과 코닥의 사진인화프린터를 갖춘 무료 사진인화 시설을 들여놨다. 

 물론 시범서비스이기 때문에 이들의 핵심 구상인 광고를 다 구비한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무료로 사진을 출력할 수 있다는 최초의 인상을 심어주는 한편 경험을 하게 하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게 다가 아니다.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하기 위해선 플랫폼이 필요했다. “얼마나 사진을 무료로 출력을 하는지, 어디서 잘 되는지를 파악하고 출력 관련 문제를 컨트롤하거나 광고상품, 가격 정책 등을 변경하려면 중앙에서 이를 제어할 플랫폼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광고주들에게 데이터를 보여주고 협상을 할 수도 있죠.”

 현재 시범서비스 중인 메가박스 강남역점 등에 가면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을 무료로 출력할 수 있다. 코닥 정품 인화지와 잉크를 사용하기 때문에 품질도 좋다. 물론 사진의 절반은 광고다. 광고를 오려내면 사진만 보관할 수도 있다. 플랫폼을 완성하고 나면 앱과 온라인 웹사이트를 3월중 선보일 예정이다. 사진을 활용한 다양한 서비스도 4월 이후 출시할 계획이다. 현재 영화관 일부 지역에서만 시범서비스를 하고 있지만 역이나 터미널 등 사람들의 이동이 많은 지역에서 서비스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 코닥과의 협상 결과에 따라 전국에 300여개 코닥익스프레스 매장에서 사진 출력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경우 무료 뿐 아니라 유료 서비스, 집에서 받아보는 사진 서비스, 앱을 이용한 원격 주문 및 결제 등 다양한 서비스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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