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현지 시각으로 5월12일 오전 10시 구글이 새로운 검색 서비스를 발표했다.지난 2007년에 이어 두번째 열린 'Google Searchology'에서 구글 엔지니어링 부사장인 Udi Manber와 검색서비스 부사장 Marissa Mayer는 'search option'과 'Google Squared', 'Rich spinnets'라는 세 가지의 새로운 서비스를 선보였다.또 안드로이드폰 기반의 편리한 서비스도 소개했다.

캘리포니아 마운틴뷰 구글 본사에서 진행된 이번 행사는 주로 미국 지역에 있는 40여명의 기자들을 대상으로 이뤄졌다.(내 이름이 왜 거기에 올라가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동양인은 3명뿐이었는데,나와 일본에서 온 특파원 2명이 있었다.) 뉴욕타임스 LA타임스,ABC 등 주요 언론사 뿐 아니라 테크노크라티 등 유명 블로그도 일부 포함돼 있었다.

구글의 이번 발표는 2년 전 Universal Search를 내놓은 뒤 이를 좀 더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아주 획기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Universal Search의 지평을 넓힌 것으로 파악된다.특히 Search option의 여러 항목들..wonder wheels나 timeline 같은 서비스들은 우리가 평소 통합검색을 쓰면서 가졌던 일부 의문들,즉 좀 더 시간 순으로 볼 수 없을까? 혹은 연관된 다른 어떤 주제를 찾아볼 수 있을까? 등에 대해 답하기 위한 구글 내부의 고민이 담겨 있다.

--현장 사진 및 주요 발표 내용을 이어지츷 포스트에 올려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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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언론인들이 구독하는 월간 '신문과 방송'이라는 잡지에서 서면 인터뷰 형식으로 제 이야기를 실었습니다.'블로그를 통해 세계로 나가고 싶다'는 제 최근의 생각을 비교적 잘 정리해 주셨네요.   한국이란 호수에서 인터넷이란 바다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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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챌 창업 멤버들의 행적

뉴미디어 세상 2009. 5. 1. 23:34 Posted by wonkis

지난해 초 프리챌 창업자 전제완 사장의 소식을 접하게 된 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당시 그와 함께 프리챌을 창업했던 인물들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전제완 사장이 2002년 12월 3일 급작스럽게 구속된 이후 아주 짧은 시간에 전제완 사장이 만든 프리챌이란 기업은 해체돼버렸다.전 사장의 표현대로 200명이 넘는 직원들 중 2명을 제외하고 모두 회사를 나갔고 창업자는 한명도 프리챌에 남아 있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됐다.1999년 7월 전제완 사장의 집에 모여 (주)자유와 도전을 만들었던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또 2000년 1월 최초로 서비스를 오픈할 당시 주축이 됐던 30여명의 준 창업 멤버들은 어디 있을까?

아직 절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들의 행적을 보는 것은 한국 인터넷을 인물 중심으로 보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이들 중 상당수가 그 뒤로도 업계에 남아 계속 활약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제완 사장과 일부 창업멤버들에 따르면 1999년 전제완 사장 집에서 모여서 프리챌의 최초 사명인 (주)자유와 도전을 만들기로 결의한 사람은 모두 7명이라고 한다.전제완,윤태중,김용진,이태신,예덕호,이정수,김정준.이들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조인한 인물들로는 문규동,이확영,변창원,이상원,서해진 등이 있다.약간씩 엇갈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아주 초창기엔 이들 12명이 중심이 됐던 것 같다.

전제완 사장의 행적은 이미 여러 차례 썼으니 생략하기로 하겠다.이 중 가장 특이한 인물은 예덕호씨인데,이 분은 지금은 선교사가 되어 해외에 나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김용진씨 역시 업계를 떠난 인물인데 이 분은 지금 동화마루라는 기업의 사장을 맡고 있다.

두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 업계에 남아 있다.이태신 프리챌 부사장은 프리챌에서도 CTO등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인물로서 지금은 SK에 인수된 코난테크놀로지의 전략기획실장을 맡았다.김정준씨는 넥슨에서 일하고 있고 윤태중 이사는 전제완 사장이 구속되고 새롬기술에 인수된 프리챌홀딩스가 부도처리되는 과정을 보면서 회사를 나와 계속해서 전제완 사장과 함께 하고 있다.지금은 전제완 사장이 새로 창업한 유아짱의 이사로 일하고 있다.이정수씨에 대해선 분명치 않은데,연대 전산과를 나와 삼성SDS에서 일하다 프리챌 창업의 동지가 된 이 분 역시 업계에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창업 멤버 중 몇몇은 NHN으로 갔다.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나온 서해진씨는 지금 NHN에서 일하고 있고 문규동씨 역시 NHN에서 일하고 있다.변창원씨 역시 NHN으로 자리를 옮겼고,전제완 사장이 최고의 실력자라고 극찬해 마지 않았던 이확영씨는 NHN으로 일찌감치 자리를 옮겨 재작년까지 NHN재팬에서 일하다 당시 김범수 NHN 창업자가 NHN을 떠나 아이위랩을 새로 창업,위지아라는 일종의 집단 지성 사이트를 오픈하는데 참여해 맹활약하고 있다.이확영씨는 아이위랩의 CTO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000년 1월 프리챌이 사이트를 오픈할 당시에는 인원이 이보다 훨씬 더 많아진 상태였는데(프리챌은 급속도로 직원이 늘어난 회사였다) 앞에 언급한 인물들과 2000년 1월 당시 새로 합류한 인재들의 현재 모습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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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에서 주가가 오르고 환율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심지어 디커플링이 다시 얘기될 정도인데,미국은 점점 경제 위기의 심각성이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1930년대 대공황 이후 제대로된 경제 위기를 겪어보지 못한 미국인들이 80여년만에 겪는 위기라는 말도 나온다.

그런 조짐을 보이는 모습들은 일상 생활에서도 숱하게 목격된다.거리에서 일찌감치 차가 자취를 감추고,식당에서 주류값을 일제히 인하하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캘리포니아의 경우 특히 주 정부 재정이 위험하다는 설이 돌고 있어서 주정부 지원을 받는 각종 공공 기관 등이 위기 의식에 빠져 있다.

그러다보니 공공 기관이 예전보다 친절해졌다는 우스개소리도 들린다.(각 기관별로 성적을 매겨서 나쁜 경우 지원 액을 대폭 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그 말을 듣고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 딸이 다니는 시의 지원을 받는 preschool 선생님들도 최근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해진 것 같기도 하다.

아시아에서-특히 중국-대량 화물이 들어오는 것이 주로 캘리포니아 지역의 Long Beach 항구와 샌프란시스코 지역,그리고 북쪽의 시애틀 정도라고 하는데,Long Beach에서 근무하는 분의 말씀을 들어보면,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일상적이었던 overtime 근무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그만큼 물동량이 확 줄었다는 소리다.일용직 근로자들의 경우 정상 근무 시간보다 overtime 근무로 받는 수당이 주된 수입원이 될 때가 많기 때문에 이런 변화는 직접적인 타격이 된다.

경찰들이 유난히 더 자주 티켓을 끊는 경우도 자주 목격된다.10mile 정도 초과는 눈감아주곤 하는 이 지역 경찰들도 최근엔 3-4mile만 초과해도 바로 딱지를 끊는다.경찰들 역시 초과 근무 수당이 확 줄거나 없어지다시피 하면서 생계를 위해 딱지 끊기에 나섰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돈다.

Irvine에서 접한 한인 사회에서 들은 소식은 더 좋지 않았다.한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심지어 '폭동'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일고 있다고 한다.지금 캘리포니아 지역 실업률이 12% 정도인데,실업률이 15%가 되면 엄청난 폭동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주로 한인 실업가들 사이에서 얘기되고 있다고 한다.

만약 경제 위기로 인해 폭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과거 LA 폭동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큰 규모의 장기적인 싸움이 될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다.오바마 정권 초기 100일에 대한 평가는 아직 호의적인 평가가 훨씬 우세하지만,경제 위기가 지속된다면 이 분위기가 언제까지 갈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정치적인 기대감마저 사라질 때는 어떤 현상이 또 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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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완 프리챌 창업자가 전하는 2002년-2003년 프리챌 매각 비화.이전 글인 '프리챌이 SK에 매각됐다면(1)'에 이어지는 글입니다.이 글은 프리챌 매각을 시도해왔던 전제완 사장이 직접 밝힌 내용입니다.SK 등 관련된 분들의 반론이나,보충 설명 등을 모두 환영합니다.>


-구속되고 난 뒤엔 회사를 매각하는 일도 타격을 받았을 텐데
 프리챌 인수에 관심이 있었던 기업들이 내가 구속된 이후 전부 프리챌 인수를 포기했다.그러면서 회사의 자금난이 가중돼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얘기를 당시 프리챌의 오건석회장, 우지형사장, 이상열사장 등 접견 온 사람들로부터 들었다.

-그러면 누가 딜을 책임지고 했나.
 당시 구속후 모든 실무적인 딜은 우지형사장과 이상열사장이 진행했고 오건석회장은 딜에 직접적인 관여 없이 최종 결과만 보고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출소후에 SK딜을 보류하고 새롬과의 딜을 선택하게 된 것도 우지형사장이 오건석회장에게 SK와 새롬의 매각금액이 동일하고-실제로는 100억차이가 나는데-전제완이의 잔여부채를 상여처리함으로써 탕감하겠다는 홍기태회장의 방침과 새롬측이 프리챌홀딩스 메모시재 25.2억으로 고발한다는 협박 등을 받고 우지형사장의 잘못된 보고로 인해 결국 새롬딜을 선택하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지형사장은 당시 새롬기술의 대표이사였던 홍기태사장과는 공군장교 동기였고 삼성그룹 입사동기란 인간적 친분을 바탕으로 프리챌을 새롬에 매각하는 딜을 진행해 왔다는 것을 나는 출소 후에 알게 됐다 그런데 그는 새롬과의 딜을 진행하게 되면서 당시 구속된 나에게는 다른 어떤 딜도 성사가 되지 않고 오직 새롬만 프리챌인수에 관심이 있다고 보고를 했다.
 
-그럼 실제로 당시에도 다른 딜이 진행되고 있었던 건가?
 2002년 12월 24일 당시 내 변호인인이였던 김상연변호사(서정법무법인)가 찾아와 새롬딜이 성사가 되었고 여러가지 자금 사정상 처리할 서류작업이 많으므로 새롬과의 딜을 위해 프리챌 지분에 대한 인수의향서,금전소비대차,질권설정계약 등에 대한 위임서를 요구했다.당시 새롬과의 딜 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아무런 의심없이 당연히 위임서에 싸인을 했다.

그런데 당시 내 친구 한 명이 율촌의 윤세리변호사로부터 SK가 프리챌 인수의 뜻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이에 당시 프리챌홀딩스의 사외이사였던 조명현 교수(고려대 경영학과)가 나서 SK측의 서진우 사장 (와이더댄닷컴),가종현 부사장,전주호 상무 그리고 윤세리 변호사 등과 함께 하이야트호텔에서 오후 3시경에 만나 오후 9시까지 프리챌 인수에 관한 의견을 조율했다.

-인수 합의가 이뤄졌나
 당시 프리챌의 재무담당이었던 이성복상무로부터 내 부채가 총 200억이라고 들었던 조명현 교수 등은 SK가 프리챌을  인수하겠다는 뜻을 확인하고 SK측이 프리챌 및 드림챌,(주)현찰 등 내 지분을 150억에 인수하여 프리챌에 있던 내 개인 명의의 대여금을 전액 다 상환하고 ㈜프리챌홀딩스의 내 지분을 담보로 50억의 대출을 발생시켜 전제완 개인의 외부 부채를 상환한다는 구조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SK와 프리챌의 본협상은 2002년 12월 26일 오전 3시에 합의에 도달,㈜새롬기술보다 좋은 조건의 SK딜을 당시 참석한 프리챌 및 프리챌홀딩스 관계자들이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그 자리에서 MOU를 맺기로 참석자 전원이 합의하였으나,(이상열사장이 작성한 일지에 보면 SK와 새롬과의 딜규모가 50%차이가 났으며 당연히 SK딜을 하겠다고 명확히 나와 있다) 우지형사장이 이렇게 중요한 딜을 맑은 정신으로 아침에 계약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여 집에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같은 날 오전 9시에 MOU 싸인을 위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 후 전원이 다 일단 귀가했다.헤어진 후 서진우사장은 최태원회장에게 프리챌인수에 대한 보고를 한 것으로 들었으며 우지형사장은 모처에서 홍기태사장을 만난 것으로 나는 들었다.

-그럼 홍기태 사장에게 다 보고가 됐다는 건가?
오전에 서진우 사장 등 일행이 프리챌을 방문,몇시간 전에 합의한대로 SK와 프리챌이 MOU 싸인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태도를 바꾼 우지형 사장이 SK딜을 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서진우 사장은 결국 최종 의사결정자인 전제완사장의 결정을 통해 딜을 진행할 수 밖에 없게 됐다고 한다.

 서진우 사장의 상황 설명을 들은 프리챌홀딩스 사외이사였던 조명현 교수,임동욱 박사 등은 나를 구치소로 방문해 SK딜을 설명하고 최종 컨펌을 받기로 하고 특별 면회 신청을 해 왔다.그래서 2002년 12월 27일 오후 3시에 만났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새롬측의 홍기태 대표이사는 첫째, 딜과정에서 알게된 프리챌홀딩스 메모시재 25.2억에 대해 전제완사장 및 프리챌홀딩스의 등기이사였던 오건석회장,우지형사장,이상열사장 및 사외이사까지 전부 검찰에 고발하겠다고 했다.둘째 당초 인수하지 않기로 하였던 ㈜현찰닷컴도 추가로 인수해 인수금액을 일정 금액 상향하여 SK딜과의 차이를 줄여주겠다고 제의하였으며,셋째 그래도 전제완 사장의 부채가 남는다면 그것은 상여처리하여 전제완 사장의 프리챌 부채를 없애주면 결과적으로 전제완의 부채가 전부 소멸되므로 SK와의 딜과의 규모가 결국 같게 된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후 상여처리 등은 전혀 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난 프리챌에 100억이 넘는 부채가 남게 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다.그리고 부채를 상환하지 못해 주주에게 손해를 끼친 부분등이 인정되어 2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2년간 복역후 2004년 11월 30일 출소하게 됐다.

-SK와의 딜이 막판에 성사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나?
 내가 이미 새롬과의 MOU를 위임하는 싸인을 했고 그를 위해 대표이사에서 사임까지 했기 때문에,더욱이 당시 막 감옥에 와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밖에서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몰라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무엇보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아무도 감옥에 있는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즉 당시 상황은 나에게 얘기해주지 않으면서 나를 배제하고 일이 진행됐던 것이다.

-어쨋든 SK과의 딜은 성사되지 못했다.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는 건가?
 무엇보다 SK와 새롬기술은 프리챌 인수에 있어서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SK는 프리챌에 자금을 투자하고 키워서 활용할 생각이었지만 새롬기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그 이후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프리챌이 새롬에 인수된 직후 프리챌의 모든 임직원이 2명을 남고 모두 퇴직했다.관계회사를 포함해 200명이 넘는 임직원이 불과 2년만에 모두 퇴직했다.나는 최고의 인재를 가려 뽑았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실제 이들은 현재 네이버,구글,다음,네이트,CJ 등 각 정보통신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프리챌에 100억과 이자포함하여 140억에 상당하는 부채가 남아있게 됐고 2년간의 실형을 선고 받게 됐다.새롬기술은 나의 이런 부채를 감안해 줄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정당한 가격에 인수가 돠었다면 이 자금은 전부 프리챌의 제 대여금 상환이으로 회수되어 프리챌 주주의 이익이 보호됐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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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챌이 SK에 매각됐다면?(1)

뉴미디어 세상 2009. 4. 22. 16:20 Posted by wonkis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가정을 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허무한 일이다.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그런 가정을 많이 하곤 한다.그러면서 과거를 재구성하기도 하고,역사와 현실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도 하게 된다.새롭게 가정하게 되는 과거의 그 사실이 자기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면,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일이었다면 한번쯤 그런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프리챌을 창업했고 지금은 유아짱으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는 전제완 사장이 바로 그런 케이스다.그가 감옥에 있던 중 프리챌과 SK사이에 진행되던 매각 딜은 무산되고 프리챌은 결국 새롬기술에 팔리게된다.전 사장은 프리챌이 SK에 매각됐다면 부채 문제도 해결되고 회사가 지금의 상황까지 이르진 않았을 것이며 SK의 싸이월드 인수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물론 이것은 그의 ‘가정’이자 ‘주장’이지만,프리챌의 창업자로서 대기업의 투자를 추진해왔던 그의 말을 전혀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무시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런 가정 자체가 인터넷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것 같다.메신저로 그와 오랜 시간에 걸쳐 나눴던 대화들을 재구성해봤다.
(참고로 전 사장이 창업한 프리챌의 지난 이야기와 전 사장의 현재 스토리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그가 최근 오픈한 블로그 를 직접 방문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수 있겠지만 구속되던 당시 얘기를 좀 들었으면 좋겠다.
 2002년 12월 3일 주금가장납입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한양대에 강의가 있어 오전 7시에 옷을 입고 있었는데,갑자기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자 "서울지검 OOO호 검사실에서 나왔습니다. 전제완씨는 특정경제가중처벌법 위반으로 긴급체포하겠습니다." 라는 소릴 들었다.그야말로 아침에 일어나보니 감옥이었다.

-전혀 아무런 조짐이 없었나?
직전까지 나는 전혀 그런 조짐을 알지도 못했다.가장납입 부분은 결국 무죄 판결을 받게 됐지만 나중에 문제가 됐던 것은 프리챌 대표로 있을 당시 대표이사로서 회사의 부채를 대신 지고 있던 부분이었다.내가 구속되고 나서 새롬과의 딜이 진행되면서 대표이사가 바뀌고 대표이사에서 물러나는 과정이 있었는데,상식적으로 그렇게 되면 대표이사 명의로 지고 있던 회사의 부채 역시 새로운 대표에게로 옮겨가야 하는데 나는 구속중이라 이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나에게 이런 과정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출소하고 나서 정말 분통이 터졌지만 결국은 모든 위험을 관리하지 못했던 나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출소하고 나서 공백이 좀 있었던 것 같다.그 기간중 어떤 일이 있었나?
 2004년 12월 출소한 뒤에도 내가 갖고 있던 가장 큰 의문은 2002년 당시 내가 왜 그렇게 갑자기 구속됐고 회사가 그 지경에 이르게 됐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거였다.그래서 출소한 뒤 내가 긴급 체포되던 시점을 전후로 해 어떤 일이 있었고 그 뒤로 회사가 어떻게 됐는지를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또 한가지는 내가 지고 있던 240억원의 부채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서 이것을 해결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부채는 해결됐나.
 2월20일자로 신분이 회복됐다.법원에 파산신고하고 면책 결정을 받기까지 1년이 걸렸다.세금문제도 있었는데 그것이 해결되는 시기가 올해 2월20일이었다.5년 동안 이것 때문에 계속 고생을 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한 개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여러번 죽으려고도 했다.한동안 내 친구 하나는 아침마다 전화해서 내가 살아있는지 확인을 하곤 했다.하지만 기업인으로서 내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서 다시 나서게 됐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파악이 좀 됐나.
 나로선 철저하게 당했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내가 파악한 것은 프리챌이란 회사를 헐값에 매각하고 그 과정을 통해 이익을 챙기려는 당시 프리챌 이성복 상무(CFO)와 일부 경영진,그리고 새롬기술에 철저하게 당했다는 거다.

-좀 더 자세히 들어봐야 할 것 같다.
2002년 12월 3일 구속되기 전까지 같은 해 9월부터 KT와 프리챌 매각관련 딜을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KT와 딜을 하는 과정에서 SK그룹과도 인수협상을 진행했었다.
 2002년11월 28일 이상열사장(프리챌부사장 및 드림챌대표이사)과 함께 저녁 늦게 라마다르네상스 근처에서 와이더댄닷컴사장이었던 서진우사장(현 SK텔레콤 전무)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프리챌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서는 KT와 SK텔레콤과 같은 기간통신 사업자에게 프리챌을  매각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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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위기,인터넷 때문이 아니다?>에 이은 2편입니다.=

토론에서 신문의 시나리오는 2가지 정도로 제시됐다.그런데 이게 사실 좀 허탈하다.내용인즉슨,우선 신문사가 지금 갖고 있는 자원을 최대한 '쥐어짜서' 일단 살아남는 것에 주력하는 방안이다.산업 자체의 미래가 매우 불확실한 만큼 일단 살아남는게 중요하다는 논리인데,비용을 최소화하고 현재의 인력으로 결과를 최대화하는,즉 이익을 현실화하고 비용을 미래로 전가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두번째는 좀 더 공격적이다.현재보다 미래에 투자할 것을 권고한다는 점에서 공격적이다.즉 현재의 어려움을 감수하더라도 10년 후를 위해 신문 자체가 아닌 정보 시장에서의 리더가 될 수 있는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비용을 현재화하고 이익을 미래로 미뤄두라는 말인데,경영자 입장에서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

이런 내용을 듣다보면 Philip Meyer가 이미 2004년 그의 저서 'Vanishing Newspaper'에서 지적한 것과 흡사한 것 같다.그 이상의 논의가 이뤄지기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그만큼 아직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으로도 보인다.

난상토론 끝에 나온 결론은 사실 좀 뻔했지만,한편으론 의미심장했다.신문이든,방송이든-물론 미국의 언론사를 염두에 둔 토론이긴 했지만-빨리 영향력에 집착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1편에서 언급했듯이 좀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신뢰를 회복하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 결국 미디어로서 지금의 신문사,방송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이다.

해당 분야에서 신뢰받는 1인미디어로서의 기자 개개인을 키워나가는 것도 신문사가 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됐다.앞으로는 논란이 되는 기사를 많이 쓰고,영향력을 과시하려고 애쓰는 기자들보다 신뢰를 주는 기자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가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한국의 신문사들은 어떤 시나리오를 갖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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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새벽에-오전 5시 30분쯤?- 베이 브리지(Bay Bridge)를 넘어 샌프란시스코로 가곤 한다.내가 사는 Emeryville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가야 하는 이 다리를 갈 때마다 항상 놀라는 것은 그 이른 새벽에 차가 정말 많다는 것이다.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섬머타임때문에 이전 기준으로는 새벽 4시30분인 셈이다-새벽인데 베이 브리지의 5차선 도로가 차량들의 불빛으로 가득차 있다.어떨 때는 속도를 내기 힘들 정도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이 이른 시간에 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이들은 어딜 향해 그렇게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까.이 길고 긴 다리 너머에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어떤 존재가 있는 걸까.

미국 생활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을 많이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물론 그만큼 한국보다 외롭기는 하다.나처럼 가족과 함께 계속 같이 있는 사람은 좀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나 역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전화도 안 걸려오고,찾는 사람도 없고,별로 약속도 없는)을 살고 있다.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이보다 더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참으로 쓸쓸해보인다.아니 쓸쓸하기보다는 고독하고 강인해 보인다고 할까..모두가 외롭기 떄문에 각자 자기 자신의 내면에 깊이 몰입하고(그럴 시간이 많으니깐) 자아가 아주 단단해져 있다는 느낌도 받는다.누군가 남이 들어올 틈도 많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하는 곳이다.간섭도 많지 않고 자유롭다는 것은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그 아주 단순한 원리를 완전하게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그 무거운 책임 떄문에 그 새벽부터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는 것일까.

한국에서는 바쁘다는 핑계-사실 구실에 불과하지만-로 애써 미뤄뒀던 그런 질문을 여기선 많이 하게 된다.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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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2.0 Expo 취재를 전후해 관련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내 신분을 밝히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이거였다.

"그래서,신문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런 질문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전제를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우선,1)신문이 가치 있는 정보 제공자로서의 위치를 이미 상실했다는 것, 2)기꺼이 돈을 주고 사 볼만한 신문들이 이제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그것이다.그리고 그런 전제 하에 과연 신문산업이란 게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사실상 결론이 나온-질문인 것이다.

웹2.0 엑스포 마지막날(4월3일) 식사를 하면서 참석자들과 나눈 난상 토론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했던 것도 이 주제였다.나는 이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하고 싶어 질문을 던졌고(사실 내가 하지 않았더라도,분위기상 그런 질문이 나올 것 같아서 선수를 쳤다), 상당히 의미있는 발언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토론에는 나를 포함해 기자가 3명(블로거 기자1명,신문기자 2명),인터넷기업 팀장급이 1명,공학 석사과정의 학생 1명,교수(연사로 나왔던 컴퓨터 디자인 분야 전문가)가 1명,실리콘밸리 지역 웹2.0기업 대표 1명 등 총 7명이었다.

신문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선,어느 누구도 자신있게 얘기할 수 없듯이 나 역시 마찬가지다.다만 신문산업 입장에선 위기라고 할 만한 이런 상황에서 원인을 잘 살펴본다면 어떤 결론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토론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실 '위기'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을 지 모른다.최소한 미국에서 미디어 분야의 종사자들을 만나면서 내가 느낀 바로는 그렇다.신문산업이란 미국에선 이미 존재가 없어져 버린 것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이미 1990년대후반부터 이들은 신문산업에 대해 'vanishing'이란 표현을 썼다.)

신문의 위기에 대해 웹 2.0 엑스포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지적된 것은 기본적으로 신문의 위기가 인터넷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신문의 위기는 이미 인터넷이 발달하기 이전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었다.

인터넷의 보급과 블로그 등 1인 미디어의 활성화로 인해 시민 저널리즘이 발달하면서 신문의 위기가 촉발된 것이 아니다? 분명 맞는 말 같다. 그런 현상으로 인해 신문의 위기가 가속화됐을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인 것은 아닌 것 같다.일부에서 제기되는 신문의 전문성 부족(또는 깊이 있는 정보의 부재)도 핵심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Integrity and Impartiality. 이 두가지를 상실했기 때문이다.(각각을 어떻게 우리말로 정확히 번역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특히 Integrity라는 단어는 감은 오지만 도저히 정확히 옮기기 힘들었다.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듯)

즉 신문산업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내부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신문이 언제부터인가 integrity를 상실하고 균형잡힌 일관된 논조로 독자를 설득해 나가는 것에 실패하고 실망감을 주는 일이 반복되면서 이미 내부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미국의 사례에선,주로 9.11과 관련된 미국 주요 신문들의 보도 행태가 언급됐다.그때부터 독자들이 미국 주요 신문들로부터 본격적으로 등을 돌리는 시점이 됐다는 것이다.신문이 독자의 신뢰를 상실하게 된 가장 중요한 시점이라는 것인데,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작년 쇠고기 파동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

물론 인터넷의 발달과 독자들의 생활 변화 등을 배제할 수는 없다.대안 미디어들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개개인의 생활이 점점 바빠지면서 차분하게 앉아서 신문을 이리저리 들춰볼 시간이 없어진 것도 중요한 이유이긴 하다.( 이와 관련해 참석자 중 하나는 이런 말을 던졌다. "도대체 누가 어제 일어난 일에 더 이상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결국 전문성에 있어선 해당 분야의 전문가에 뒤지고,속보성에 있어선 블로거들에 미치지 못하며,신랄한 비판에 있어선 인터넷 논객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신문이 설 자리가 마땅치 않다는 건인데,이런 주장에 대해 반박을 하기란 쉽지 않다.

reasoned cogency를 신문이 다시 정립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비록 해당 신문의 논조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끌어안거나 혹은 수긍하게 할 수 있는,그런 힘이 되게 때문이다.그리고 그것만이 신문이 자신의 길을 다시 모색할 수 있는 첫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게 난상 토론의 미약한 결론이었다.

그러면,신문은 미래를 위해,혹은 너무나 힘든 현재를 위해 어떻게 대비하고 싸워야 하는가? 원인이 그렇다치면,reasoned cogency를 쌓아가면 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아닌가? 현실적으로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건가? 인터넷이나 새로운 미디어의 가능성에는 어떻게 대비하는 것이 좋을까? 이에 대해 몇가지 대안이 제기됐다.다음 글에서 정리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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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2.0 Expo 2009 첫날,salesforce.com에서 제공해주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는데,누군가 식사를 같이 하자며 앞 자리에 앉았다.얼굴이 낯이 익어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둘째날 키노트 스피치 중 하나를 맡은 Amanda Koster였다.

식사를 하면서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웹2.0에 대한 그의 견해였다.그는 “웹2.0이 웹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고 했다.웹2.0이라는 구호가 약해지고 쇠퇴하고 있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그는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듯 했다.
그는 그런 분위기에 대해 "웹이 이미 생활화되고 있다는 뜻이다.뭐든 대세가 되면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웹2.0은 이미 모든 산업 영역에서 기본이 됐다.”고 말했다.

그의 독특한 이력도 눈길을 끈다.그는 사진가이자 ‘Can I Come with you?’의 저자로 유명하지만,2007년 Salaamgarage라는 미디어-NGO 네트워크 회사를 창업했다.개발도상국과 아시아/아프리카 저개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NGO들의 활동과 그들이 처한 현실,저개발국 주민들의 비참한 상황 등을 미디어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Salaamgarage의 주된 사업이다.물론 보여주는 것이 다는 아니다.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현실을 사진을 통해 알려주는 것이 미디어로서 Salaamgarage의 주된 일이긴 하지만 그를 통해 세계적인 지원을 유도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것 역시 병행하고 있다.아마추어 사진가들이나 블로거들이 자유롭게 참여해 여론을 만들고 NGO의 활동 등에 대해 기록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기존 미디어의 접근법과 다른 Salaamgarage의 차별화된 점이었다.

웹2.0이든,뉴미디어든,Amanda Foster는 그 분야만 파고든 전문가는 분명 아니다.(그가 가장 관심있어 하는 주제는 사진이었다.그 사진에 대해 영어로 설명하는 것을 듣느다는 것은-그것도 영어로-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웹2.0의 기본 정신을 응용해 현실 세계에 보여주는 것은 그 누구 못지 않은 전문가였다.

웹2.0에 대해 개념적으로만 논하기 시작하면,너무나 기술에 매몰되거나,인터넷만의 현상으로 치부하기 쉽다.하지만 그가 보여주고 있는 시도들은 현실 세계에서 웹2.0이 어떻게 응용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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