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보다 No를 먼저 배운다

San Francisco&Berkeley 2009. 2. 15. 16:25 Posted by wonkis
다음달이면 세돌이 되는 딸 아이를 이곳에 있는 어린이집(Preschool)에 보내면서 나는 유심히 관찰을 하고 있다.어른도 쉽지 않은 새로운 환경에 어린 아이가 어떻게 적응해가는지,물론 걱정도 걱정이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가 무엇을 배우고 깨닫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페이스를 조절해나가기 위해서다.

딸아이는 이곳 Emeryville에 있는 Emeryville Child Development Center라는 곳에 다니고 있다.나름 Emeryville 시에 소속돼 시의 지원을 받는 비교적 준수한 어린이집이라고 한다.나로서는 이곳이 좀 엄격하게 아이들을 훈육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흑인,백인,동양계,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이 복잡하게 섞여 있어 다문화를 체험하기에 좋을 듯 싶어 딸아이를 이곳에 보내게 됐다.

처음 한 주 동안은 말이 전혀 안통해서 힘들어하던 아이가 2주째로 접어들면서 이상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영어도 아니고,분명히 한국어도 아닌..(아마 말이 섞이는 과정인 것 같다)

그러더니 어느날 'No!'라고 말을 했다.자기가 맘에 안들거나 하기 싫은 일에 대해 강하게 소리치기 시작한 것이다.그 다음날부터는 'Come on'이라는(그렇게 들리기만 했는진 모르지만) 말도 했다.

아내가 그 모습을 보고 한 마디 했다. "얘는 Yes를 배우기 전에 No 부터 배웠네"

아마 새로운 환경이 힘들어서이기 때문일 거다.어린아이에게도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기에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거부하는 것부터 배운 것일 수 있다.생각해보면 하지 말라는 것만 빼고는 다 해도 되는 이 나라에선 분명하게 거부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다만 그만큼 힘들어하는 것 같기도 해 안쓰럽기도 하다.

평소에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어린이집 후기 등을 잘 보지 않았지만 이곳에 와서는 나도 긴장이 됐는지 그런 후기들을 샅샅이 찾아 읽어보고 있다.여전히 그 두마디 말고는 자기 의사 표현을 못하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당분간 힘들 날이 이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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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삶도 가능하구나

San Francisco&Berkeley 2009. 2. 15. 16:05 Posted by wonkis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정확히 말하면 San Francisco도 아니고 Berkeley도 아닌,Emeryville이라는 곳이다.
마치 무슨 마을같은 이름을 가진 이곳은 인구 5000명의 작은 도시인데,북쪽으로는 리치몬드,동북쪽으로 버클리,남쪽으로는 오클랜드를 두고 있다.

처음에 San Francisco 국제 공항에 도착해 마중나온 친구 차를 타고 Bay Bridge를 건너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이런 데서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바다로 둘러싸인 San Francisco와 해변의 집들,한가로이(사실은 치열하게 먹이를 찾는) 날아다니는 갈매기들,바닷바람을 이겨내며 서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마치 영화에 나오는 듯한 그런 풍경을 보면서,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가 살게 된 곳이 그랬다.Emeryville에서도 바다쪽으로 툭 튀어나온 곳에 자리잡은 지역에 있는 아파트단지에 나는 살고 있는데,집 바로 앞이 바다였다!!!! (집을 급하게 구하면서 친구가 수고를 해줬는데,나는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정확히 내가 살 집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있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부서지는 그런 바다가 집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고  옛날 조류도감에서나 보던 온갖 새들을 물위에서,또는 하늘에서 발견할 수 있다.밤에는 뱃고동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 집 앞의 바다로 나가면 썰물로 인해 형성된 거대한 갯벌이 해변에 형성돼는가하면 이름도 잘 모르는 해양 생물들이 갯벌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노을이 질 무렵엔 청둥오리들이 V자를 그리면서 수평선 위로 날아가고 해질 무렵 아파트 단지엔 너구리(로 보이는 동물)가 수시로 다니며 부지런히 먹이감을 찾는다.  
집 앞 공원에는 마치 어린 시절 읽던 동화에나 나올 법한 거대한 나무가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고 그 아래 벤치에는 빨간머리 앤이 길버트를 만나기 위해 기다릴 듯한 그런 분위기다.

그야말로 대자연의 한 복판에 살고 있지만 차를 몰고 2분만 나가면 IKEA,Circuit City,Ross,Safeway를 비롯한 다양한 미국식 대형 체인점들이 나온다.참으로 균형이 잘 잡힌 도시다.

종합해 보면,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다.무슨 이런 곳이 다 있단 말인가...마치 이제껏 속고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이렇게 살 수도 있는데,나는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나 싶기도 하다.또 한편으로는 결국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이 곳을 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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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 Berkeley에 연수온지 어느새 훌쩍 2주가 넘었다.내가 미국에서도 아주 특이한 곳에 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아마 그렇지 않을거다) 여기와서 느낀 것은 정말 "미국에선 모든 것이 느리다"는 거였다.

성격 급한 나에게 이곳에서 가장 먼저 닥친 시련(?)은 이곳 사람들의 속도에 나를 맞추는 거였다.(그들보고 나에게 맞추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인터넷이 아주 느리다.집에서도,학교에서도 무선 인터넷을 쓰고 있는데,체감 속도는 한국의 4분의 1 정도나 될까?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는 것은 엄두도 못내고 어지간한 용량의 파일은 아예 업로드/다운로드를 포기하고 있다.(그걸 하기 위해선 학교 도서관에 있는 데스크톱을 이용하거나 따로 유선을 신청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만간 그렇게 해야 할 듯하다)

황당하기 그지 없는 것은 행정 절차다.미국에 처음 와서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보통 집 렌트,자동차 구입 및 등록,현지 운전면허,대학(원) ID,주 ID,Social Security Number,은행 계좌 등일텐데,하나같이 끔찍할 정도로 기다려야 한다.

Wells Fargo와 Bank of America에 은행계좌를 만들러 갔더니 내 이름이 프린트된 Checking이 집으로 오는데 2주 정도 걸린다고 해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지금 나랑 다 얘기하고 다 확인했쟎아? 도대체 앞으로 뭘 더 하길래 2주가 더 있어야 한다는거지?"
나를 상담해주던 은행원도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도 이해가 안간다고 했다.하하...한국식으로 말하면 직불카드란 것도 집으로 배달되는데 정확히 2주가 소요됐다.

아직도 상당수 가게에서 직불카드나 체킹을 요구하는 미국에서 은행계좌를 만들고 카드가 날라오기까지 2주 동안은 백달러짜리 현금을 여러장 들고다니는 '쇼'를 해야했다.(미국에서는 아직도 상점에서 100달러짜리를 내면 거의 범죄 용의자 취급을 당한다.매니저나 가게 주인이 나와서 돈을 불빛에 비춰보고 난리 법석이다)

운전면허는 아예 미국에 온 지 한달이 지나야 신청할 수 있고 시험을 보고 난 뒤 면허증이 오는 데만 해도 3-4개월이 걸린다고 한다.(당연히 난 아직 면허 신청도 못했다).자동차를 구입해서 등록하러 갔더니 등록하는데만 2주가 걸린다고 한다.(정말 이해가 안 가지만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Berkeley 대학(원)생들이 주축이 되서 실시하는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클래스를 다니다 우연히 프랑스에서 온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재밌었다.

(Adonia) 미국에 와서 제일 힘든 게 뭐에요?
(나)속도요.
(Adonia)아,저도 그런데요!!!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군요!
(나) 아 정말요? 미국에선 정말 모든 것이 너무 느리죠? 느려터져 미치겠어요.
(Adonia) 앗! 그래요?? 저는 미국에서 너무 빨라서 힘든데...미국에선 모든 게 프랑스에 비해 너무 빨라요....
(나)헉...음...여기선 운전면허 시험을 다 보고 면허증이 나오는데만 3-4개월이 걸린데요.여기선 국제 면허증도 몇달씩 걸린다는데,한국에선 면허증 들고가면 15분이면 발급하거든요.
(Adonia) ㅎㅎ 프랑스에서 저는 운전면허 따는데 1년5개월이 걸렸어요.제가 시험을 떨어지거나 중간에 놀거나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근데 미국은 다 빠르네요,사람들이 식사도 빨리하고 뭐든 빨리빨리 해치우고 그런 것 같아요
(나) 혹시 그럼 프랑스가 그 유명한 농담의 진원지인가요? 가구점에 가서 가구를 구입하면 "나무가 준비돼 있다.다른 가게는 나무도 없다.우리가 제일 빠르다"라고 가게 주인이 말한다는..그리고 가구가 6개월후에 도착한다는..
(Adonia)하하 프랑스는 그 정도는 아니고,저도 유럽에 어느 나라가 그렇다는 농담을 들은 적은 있는데요..

하여간,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 같다.여기서 생활하면서 주민등록증이 나오는데 3주가 걸리고,운전면허 따는데 6개월이 걸리고,심지어 학생증을 만드는데도 3일이 소요되는 생활에 길들여지면 한국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일 것 같기도 하다.(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그럴리 없겠지만 이곳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너무 바쁜,'이상한' 사람들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 싶다)

사람이 적응한다는 것은 무섭다.나도 어느새 여기 사람들의 (상대적으로)'느긋한' 일처리에 익숙해지고 있다."그래 뭐 굳이 그렇게 빨리 할 필요 없지"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은 그만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중간에 마음을 바꾸거나 취소를 할 기회도 있다는 뜻이다.

생활이나 행정절차는 놀랄만큼 느린 사람들이지만 머리는 비상하게 빨리 돌아가는 것 같다.내가 주로 대학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School of Information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나 행정 직원들의 경우에도 내가 별로 중요하게 언급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비상하게 기억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거나 약점을 지적하곤 한다.말의 논리적인 실수에 있어선 더욱 가차없다.그런 사람들이 행정 절차를 할 떄는 한없이 느려지는 것을 보는 것도 재밌다.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 엄격하고 빠듯하게 하지만 공식적인 업무나 남을 상대하고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문제에 있어선 한없이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여기서 받은 첫 인상이었다.이런 생활 리듬에 적응하는 것이 지금 나의 첫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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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블로그에 흔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저도 참 오랫만에 들어왔는데,오는 26일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캠퍼스 정보통신대에서 연수를 하게 됩니다.버클리에서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는데,인터넷 민주주의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것이라 흥미롭고 기대도 많이 됩니다.

너무 빠른 시일 내에 결정된 일이라 준비 핑계로 블로깅도 못하고 지냈는데,재밌는 소식 많이 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다른 블로거분들은 실리콘밸리 코너를 따로 만들어보라고도 하시는데,여러가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들 받으시길....요즘 갈수록 블로거로 살아간다는 것에도 철학과 기준이 절실해지는 세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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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게임산업의 경쟁력이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3위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한국게임산업진흥원이 영국 국립과학기술재단(NESTA)의 조사 자료를 인용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게임산업의 경쟁력에 대한 19개 항목을 기준으로 평가한 결과,한국은 총점 190점 만점에 129점을 획득,171점의 미국,133점의 일본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한국에 이어 120점의 캐나다,105점의 영국이 뒤를 이었다.

전체적인 점수보다는 세부 항목 내용이 흥미로웠다.NESTA는 한,미,일을 비롯해 중국,영국,캐나다,독일,프랑스 등 게임 강국이라고 할 수 있는 8개 나라를 비교분석했는데 일본과 미국이 골고루 높은 점수를 받은 데 비해 한국과 중국의 경우 항목에 따라 점수가 아주 극단적으로 나왔다.온라인게임 위주로 발달된 두 나라의 특성을 잘 보여주기도 하고 온라인게임에 대한 해외의 시각을 엿볼수도 있었다.

스튜디오 경쟁력에 있어선 한국은 미국과 함께 만점인 10점을 받아 일본(9점)보다 나은 것으로 평가받았다.한국이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은 오프라인게임 분야의 창의력과 기술력(모두 1점),그리고 서비스 경쟁력(3점),플랫폼 경험도(저사양 5점,고사양 2점) 등이었다.특히 오프라인 게임 분야에 있어서 1점을 받았다는 것은-어떤 항목에서든 1점을 받은 나라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사실상 오프라인 게임이-사행성 도박을 제외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 한국의 현실을 보여준다.

서비스 경쟁력 점수가 극도로 낮은 것은 오프라인 분야가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고,아직 글로벌 서비스 역량에 있어서 해외에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서비스 경쟁력은 8개 국가중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하지만 정부 지원 분야에선 7점을 받아 뜻밖에도 캐나다,중국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특히 온라인게임 기술력 분야에 있어선 유일하게 10점을 받았고 온라인분야 창의력에 있어서도 8점을 획득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비스력에 있어서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이 이날 같이 발표된 미국 온라인게임 시장에서 한국 게임이 아직 순위에 들지 못하는 주된 이유로 꼽히는 것 같다.

주목할 것은 영국에서도 그렇게 평가했지만 캐나다의 게임 분야 경쟁력이 급속도로 강화되고 있다는 것.세계적인 스튜디오가 건립되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게임산업 육성에 나서면서 정부 지원 부분과 인력풀 부분에서 최고 수준을 보여줬고 기술력,창의력,스튜디오 경쟁력 부분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캐나다는 최근 2년간 게임 시장이 매년 2배씩 커질 정도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데 그런 상황이 이번 보고서에도 반영됐다.

(원래 이 보고서는 영국이 자국의 게임산업을 이대로 방치해놓으면-정부지원도 부족하고 신규 투자도 없이-한국,캐나다,일본 등에 밀려 게임 강국의 위치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문제 의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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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2008

夢幻泡影-삶과 꿈,살아가는 이야기 2008. 12. 31. 16:54 Posted by wonkis

해를 거듭할 수록 한 해가 끝나고 다른 해가 시작된다는 것에 솔직히 점점 무감각해집니다.미술관옆동물원에 보면 춘희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저는 정말 공감했습니다.

"어렸을 때 내가 언제 저렇게 나이를 먹을까 하고 생각했던 그런 나이에 막상 도달했을 때 충격을 받지 않는 것은 아마 나이를 한살씩만 먹어서일꺼야"

올해도 어느덧 정신차리고 보니 한 해가 다 지나갔네요.언제부턴가 해가 가기 전에 그 다음 해의 목표를 나름대로 세우고 연말에 결산을 하곤 했는데,요즘엔 연 단위로 끊기 벅찬 일들이나 목표들이 자꾸 생기면서,연말 결산이라는게 의미가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나름대로 정리를 좀 해봤습니다.

저에게 의미있었던 몇 가지 일들을 보니
-임원기닷컴(http://limwonki.com) 오픈..제 나름대로는 아주 진지한 시도였습니다.
-무릎을 다쳐 한달간 깁스를 했던 일
-정치부 발령..새로운 생활의 시작.
-블로그 히어로즈 한글판 부록 발간
-북핵 6자 회담 베이징 취재
-네이버 책 영문화 작업..
-딸과 대화 시작.
-베트남/라오스 ODA 출장
-한경블로거 대상.

그 밖에도 자잘한 일들이 있었지만,미디어의 변화와 인터넷에서 활성화되는 여론의 움직임을 밖에서 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습니다.

블로그만 놓고 보면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작년에 비해 포스팅 수는 줄었고,제가 시간을 쏟는 부분에 있어서도 확실히 일과 분리가 되면서 절충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그럼에도 일단 현재까지는 '연착륙을 했다'는 정도로 위안을 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기쁜 것은 올해는 독서와 대화,그리고 여행 3가지 분야에 있어서 비교적 균형을 갖춘 첫번째 해라는 점입니다.이런 생활이 축적되어 간다면 당장 효과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서서히 모습을 갖춰갈 것이라는 기대를 해 봅니다.

블로그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나고 나서 블로거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해 봤고,뚜렷한 답을 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제가 막연하게 그리고 있는 기자블로거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합니다.

올해도 너무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올해는 특히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람은 정말 혼자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많이 느끼고 배웠습니다.항상 격려를 아껴주시지 않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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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나 같은 사람이 제법 있을 것이다.겨울만 되면 군대 시절이 생각나는 사람들 말이다.

94년 11월에 군에 입대해 97년 1월에 제대한 나는 군대에서 '제대로' 겨울을 3번 보냈다.평택 미군 부대에 있었기에 전방에서 군생활을 한 분들 처럼 힘들게 훈련 일변도의 군생활을 하지도 않았고 눈 치우느라 군 생활을 다 보내지도 않았다.하지만 대신 눈길에서 운전은 정말 실컷 했다.

당시 평택 안정리 미군 부대엔 정말 눈이 많이 왔다.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어떻게 그렇게 눈이 많이 오는 동네가 있을까.그때만 그랬을까.

용산 헌병대에서 대기하다가 나를 픽업하러 온 선임병장을 따라 평택 자대로 들어가던 날도 눈이 펑펑 내렸다.나와 이 병장은 발목까지 오는 눈을 헤치고 막사로 걸어갔었다.제대하던 97년 1월의 그날에도 눈이 정말 많이 왔다.마지막 군용 물품을 반납하고 갖고 나갈 짐만 챙겼건만 더플백이 한가득이었다.(주로 전자제품,CD,책 등이었던 것 같다) 부대 입구까지 나가는 버스를 놓친 나는 그 무거운 더플백을 한쪽 어깨에 들쳐메고 터벅터벅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신기하게도 군 생활에 숱한 경험을 했을 법 한데,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제대하던 날 눈이 하염없이 내리던 그 날의 풍경이다.스물세살 팔팔했던 나는 10km 가까이 되는 외곽도로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아마 그 길을 걸어가면서 나름대로 군 생활을 떠올리고,정리했던 것 같다.그때 여러 기억들을 다 떠올렸기 때문일까.지금은 그닥 떠오르는 게 없다.2년2개월을 보냈고,여자친구를 사귀다가 헤어졌으며 수많은 곤욕을 치루기도 하고 기쁜 날을 겪기도 했건만 이제는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군 생활 중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한 사람을 제외하면 일일이 기억하기 위해선 정말 오랜시간 생각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눈 내리던 그 날의 기억만이 오래 오래 남는다.그 당시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고민했는지는 모르는채 말이다.기억이란 정말 이상한 것이어서-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이 말에 난 아주 동조하는 편이다-나는 당시 제대하던 날 눈 내리던 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풍경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하지만 나중에 생각나는 것은 이 풍경 뿐이었다.나는 분명 그때 여러가지 크고 작은 기대감과 골치아픈 문제들로 많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주변의 풍경 따윈 아무래도 좋았을 터였다.

하지만 12년가량의 시간의 지나고 나서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당시 신경도 쓰지 않던 그런 일들이다.내가 그때 그렇게 고민했던 것들은 지금 와선 기억도 나질 않는다.

어제 딸 아이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다가 다시 그 옛날 생각이 났다.딸에게는 첫 영화관 나들이인 셈인데,우리의 선택은 핀란드 애니메이션 '니코'였다.아빠를 찾아 날고 싶은 사슴(순록?)의 이야기인 이 애니메이션은 러닝타임 1시간20분내내 눈이 내렸다.눈으로 가득한 화면을 보면서 나는 다시 그 시절을 떠올렸다.

겨울이 오면,특히 눈이 내리는 날이 오면 그 날의 그 풍경이 머리 속에 아련하다.더플백을 메고 끝도 없이 걸어야 도달할 것 같은 길의 저쪽을 향해 혼자 걸었던 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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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겨울 한국 본사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던 '특공대'의 대장이었던 당시 신상철 게임개발실 실장을 최근 우연치않게 인터뷰할 수 있었다.지금은 '아라리오'라는 일본 게임 퍼블리싱 업체 대표를 맡고 있는 그와 전화 통화로 간단하게 대화를 나눴다.

-처음 이야기를 들은 것은 언제인가
 "떠나기 며칠 전에 들었다.그동안 계속 준비해왔다기 보다는 아마 일본 시장을 원격으로 지원해주는데 한계가 있다고 김범수 사장이 판단해서 전격 결정된 것 같았다."

-일본 시장이 심각하다고 생각했었나
 "심각하다기보다는 중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일본에서 승부를 볼 타이밍이라고 본 것 같다.일본은 온라인게임에 대해서는 플랫폼이 갖춰지지 않아서 초기엔 한국 스타일을 접목하는 게 필요했었다.즉 서비스를 위한 기본 틀을 일단 갖추자고 한 것이다."

-얘기를 전해듣고 당황하진 않았나.일본어라든가 현지 상황 파악 등의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사실 2년전인 2000년 10월부터 일본어를 공부해왔었다.NHN이 처음 일본에 진출한 2000년부터 유희동 팀장과 함께 일본어 학원도 같이 다니고 어학 공부를 해 왔다.그때 생각에 일본에 조만간 나갈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인데,결과적으로는 그때 판단이 맞았다."

-처음 가서 맡은 역할은
  "한국에서 게임제작실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한게임과 같은 기본적인 플랫폼을 개발하고 이를 일본식으로 정착시키는 일을 주로 했다."
 
-성과는 어땠나?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성과를 냈다.그때문에 생각보다 일찍 들어오게 되기도 했지만.일본에 온라인게임이라고는 거의 없던 상황에 일본 시장에 온라인을 통해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고 온 것이다."

-일본에 나중에 다시 들어온 것 같은데
 "2003년 겨울에 우선 유희동 팀장만 들어오고 나는 한국에 남아서 일본 지원 업무를 계속했다.2005년부터는 기술 총괄로 보직이 변경됐고 그때 퍼블리싱 일도 같이 하다가 2006년에 나도 일본퍼블리싱 부장으로 다시 넘어오게 됐다."

-그럼 그때 인생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2000년에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하고 2002년 일본에 와서 한게임의 초기 정착을 지원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아라리오라는 게임업체 대표를 맡고 있다.일본 법인이고 작년 5월에 NHN을 나와서 6월에 창업했다."

-아라리오는 어떤 게임업체인가
 "퍼블리싱 전문 업체라고 보면 된다.창업한지 얼마 안돼 아직 직원 수는 많지 않지만 스키드러쉬와 크로스파이어 등 탄탄한 온라인게임을 일본에서 퍼블리싱했다."

-지금 일본 게임 시장은 어떤가
 "아직 온라인게임은 마이너다.성장은 하고 있지만 성장속도는 아직 느리다.한국이나 중국에서 기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빨리 성장을 못하고 있다.그러다보니 일본 현지 기업들이 온라인게임 사업을 어려워하고 있다.오히려 한국 기업들은 이때를 기회라고 보고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 같다."

-일본에서 왜 온라인게임이 어렵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이 패키지형 게임이나 콘솔에 익숙하고 게임에 대한 개념이 그렇게 돼 있는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게임 개발 업체나 서비스업체들도 온라인게임에 대한 마인드가 아직 분명치 않다.게임을 출시해서 최소 2-3년간 유지하면서 유저들과 계속 관계를 갖고 온라인에서 끊임없이 업데이트 및 A/S를 해야 한다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온라인게임 시장에 희망이 있다면?
 "한국 게임업체들의 선전은 계속되고 있다.매월 1억엔 이상 나오는 게임들 대부분은 여전히 한국 게임들이다.던전앤파이터,리니지,썬 등이 대표적이다.또 일본 유저들은 로열티가 높다.때문에 장기 고객이 많고 이는 온라인게임의 특성상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고객과 장기적인 관계를 갖고 간다는 것은 온라인게임업체에게 많은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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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년에 작성했던 NHN 일본 시장 진출기 내용 중 일부 오류 및 빠진 내용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내용을 수정해 다시 올립니다.NHN 일본 시장 진출기 1-3 내용은 다음을 참고해 주십시오>
NHN 일본 시장 진출기(1)=시부야 쪽방 시절
NHN 일본 시장 진출기(2)=1억원으로 1년을 버티다
NHN 일본 시장 진출기(3)=유료화 단행


김범수 사장은 한국의 게임 플랫폼 업무를 담당해왔던 6명의 특공대를 소수정예로 한게임재팬에 긴급 투입하기로 결정했다.이 역시 한국에서 한게임 유료화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유료화를 시작하고 나서 초반에 확실히 분위기를 잡아놓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것이다.

2002년 11월초 어느날,당시 NHN 본사에서 게임제작실을 맡고 있던 신상철 실장에게 문태식 이사가 찾아와 긴급 지시를 내렸다.
“아무래도 일본에 가서 좀 도와줘야겠다.여기서 지원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어”
“직접 플랫폼을 구축하라는 말씀이죠? 얼마 동안이나 있게 될까요? ”
“글쎄...2∼3년 정도 걸릴 수도 있고..그보다 짧을 수도 있고”

 2002년 11월 11일 어느새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추운 날씨 속에 신상철 실장과 유희동 팀장을 위시한 6명의 특공대원들이 베낭 하나씩만 달랑 메고 일본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신상철 실장이 총괄을 하고 유희동 팀장을 비롯해 게임개발자 2명,빌링을 담당한 사람이 1명,현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1명 등으로 구성된 멤버였다.거주지 마련 등 기본적인 것도 거의 준비하지 못한 채 긴급하게 결정된 사안이었다.이들은 처음 한달 동안은 사무실이나 근처 여인숙 같은 곳에서 숙박을 취하면서 힘들게 생활해야 했다.

 김범수 사장이 특별 조직한 이 특공대는 일본에 머무르면서 한게임재팬의 기본적인 시스템과 유료화 구조,네트워크 등을 구축했다.지금의 NHN재팬은 이때 만들어진 시스템위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당시 2∼3년으로 예상했던 체류 기간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감에 따라 10개월로 단축됐다.유희동 팀장은 10개월만인 이듬해 8월에  한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가족들을 데리고 2003년말 일본으로 돌아와 지금은 일본에서 완전히 정착해서 살고 있다.이 특공대가 당시 교육했던 일본인 다쿠마 상이 지금도 NHN재팬의 게임 시스템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로 손꼽힌다.

 특공대를 이끌고 왔던 당시 신상철 실장은 2003년 8월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2006년 일본으로 다시 넘어왔다.신 실장은 1년쯤 NHN재팬에서 퍼블리싱 관련 업무를 하다가 작년 5월에 퇴사,지금은 일본에서 아라리오라는 게임 회사를 창업했다.신상철 실장이나 유희동 팀장이나 모두 2002년 겨울 일본에 왔던 일이 어쩌면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특공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막 유료화를 시작한 일본 한게임의 수익 모델을 안정화시키는 것이었다. 2002년 10월 유료화를 시작한 일본의 한게임은 한국에 비해선 훨씬 못 미치는 유료화 성적을 내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돈이 들어오는 방안을 구체화하고 결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게 중요한 시기였다. 한게임재팬이 확실하게 자립할 수 있어야 한국의 한게임도 부담없이 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게임재팬은 초창기에는 그냥 한국게임들을 그대로 올려놨었다.한국의 한게임에서 서비스하던 게임들을 언어만 바꿔서 올려놓는 식이었다.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현지에서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했다.신상철 실장을 주축으로 한 6명은 오자마자 한게임재팬의 아바타시스템을 대대적으로 바꿨다.아바타를 클라이언트단이 아니라 서버쪽에서 저장해서 바로 불러 오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이로 인해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게임을 개발할 수 있게끔 환경을 구축했다.

 “처음에는 모듈이 2개가 있었습니다.대기실을 누르면 창이 또 뜨는 시스템이었죠.당시 한국에서 넷마블이 하나로 된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우리도 그것을 벤치마킹해 일본 시장에 적용했습니다.동시접속자수가 단숨에 1만명까지 올라갔고 2003년초에는 1만명을 넘겨 1만2000명까지 급상승했습니다.”
 유희동 팀장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2002년 일본에는 게임개발자가 2명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유희동 팀장은 아쉬운 대로 직접 직원들을 교육을 시켰지만 결국 2003년에 여자2,남자 1명으로 구성된 웹개발팀이 한국에서 추가적으로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특공대는 한게임재팬이 자체적으로 게임을 개발하고 과금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다.아울러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고 백업할 수 있는 내부 의사 결정 시스템을 만드는 역할도 했다.

 특공대가 다녀간 이후 한게임재팬은 기준이 달라진 회사가 됐다.이후 하늘처럼 높아만 보였던 야후재팬의 게임 사이트가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여기에 내부적으로 시스템이 구축되자 목표를 정해놓고 이의 달성을 위해 매진할 수 있는 분위기도 형성됐다.이 시기에 천 대표는 또 한번의 큰 모험을 했다.아직 채 성장하지 않고 직원들도 아직 많지 않던 시기였지만 일본 도쿄 시내에서도 유명한 에비수가든으로 사무실을 옮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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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미래

뉴미디어 세상 2008. 12. 21. 23:24 Posted by wonkis
얼마 전 한 후배가 대뜸 이런 말을 해 왔다.

"후배들에게 또는 기자가 되고 싶어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뉴미디어 시대의 기자상에 대해 얘기를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진지한 모습인 것 같아서 사실 좀 난처했다.왜? 나도 모르니까.
그래서 일단은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미디어를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신 분이나 경험이 더 많은 고참 선배들에게 부탁하면 어떨까."

누가 나에게 공개적으로 물어본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기자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기자의 미래 모습을 어떨까.아니 몇년 후의 먼 미래 모습보다 눈 앞에 닥친 그림은 어떻게 될까.

일단 기자들이 정보를 독점하던 시대는 끝난 것 같다.과거 꼭 언론을 통해,훈련된 기자들을 통해 중요 사실을 릴리스하던 관행들이 사라지고 있다.때로는 기자들보다 해당 분야를 훨씬 더 잘아는 전문가들이 직접 자신의 블로그 등을 통해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전달하기도 한다.

기자들의 현장 절대 우위도 끝났다.이미 숱한 동영상 사이트나 커뮤니티 등을 통해 사례가 반복되고 있지만 기자들보다 더 많은 일반인들이,현장에서 직접 생생하게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특종의 의미가 사라졌다.남보다 1분,1초 앞선 보도를 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온라인으로 뉴스가 급속도로 전팟되는 요즘같은 시대에 특종의 효과는 1시간에 불과하다고 한다.실제 특종의 의미,또는 남들이 알아주는 시간은 채 10분도 안된다는 분석도 있다.

정보를 수집해 분석하고 이를 알기 쉽게 풀어쓰는 기자들의 강점도 '전 국민의 블로그화' 시대엔 그리 두드러지는 장점이 되지 못하고 있다.곳곳에 숨어 글솜씨를 닦아온 수 많은 이들의 절묘한 비유와 풀어쓰기가 얼마나 놀랄만큼 재밌고 재치가 번뜩이는지 우리는 이미 인터넷에서 매일매일 확인하고 있다.

지금 상황이 이렇다면 기자의 미래는 없는 것인가? 기자는 그냥 점점 사라져가는 직업이 될 것인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등으로 유명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저널의 위기일진 몰라도 저널리즘의 위기는 아니다'라고 했는데,그가 이런 말을 한 뜻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시대가 변하는 만큼 기자상도 변해야 하고 이미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나는 종종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다.'현재 대한민국 언론의 위기임은 분명하지만-그것도 아주 오래됐지만-이런 환경이 기자들에게 오히려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다.기자들에겐 언론환경의 변화와 언론의 위기가 바로 기회다.'

전통적인 기자의 모습-특히 한국에서-은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배정받은 출입처에 나가 관료들 또는 기업인들을 만나 취재하고 거기서 얻은 정보를 갖고 기사를 쓴 뒤 하루를 마감하는 생활이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지금처럼 수백개의 언론사(방송,신문,인터넷 등등)가 똑같은 현상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전하는 것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즉 그냥 발생한 일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면 지금처럼 많은 언론사가 필요없다.무엇이 언제,어디서 발생했느냐보다 왜 발생했고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될 것이란 분석과 전망이 더 중요한 시대가 왔다.그리고 이것은 기자들에게 정보 수집 능력과 인맥보다 자체적인 분석 능력,즉 전문성을 더욱 요구하게 되는 것 같다.

기자들이 언론사에서만 일하는 시대도 점차 그 끝이 보이고 있다.지금도 많은 독립 언론,블로그 기자 등이 활약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영향력은 언론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하지만 지금의 진행 상황을 보건대 '기자=언론사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게 될 것 같다.

기자들이 출입처에서 발생한 일을 갖고 정리하고 분석해서 발행하는 그런 업무 방식도 크게 변화될 것 같다.기자들의 업무에서 전통적인 기사 작성이 차지하는 부분은 점차 줄어들지 않을까.

그러면 이제 기자들은 뭘 하나.기자들이 직접 독자들과 만나고 소통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 아닌가 싶다.독자와 괴리된 채 자신만의 특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수요자와 온오프라인에서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정보를 주고받고 계속 접속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즉 기자들 개개인의 자신들의 정보 커뮤니티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 미디어그룹의 영향력은 여전할 것이다.오히려 소수에 집중돼 그들의 파워는 더 막강해질 수도 있다.미디어가 분절화될 수록 결정적인 순간엔 기존의 권위에 기대려는 심리도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 미디어그룹의 의미가 변화될 수는 있다.이것은 시간이 더 한참 걸리는 일이겠지만 예를 들어 영향력 있는 미디어란 '우수한 정보 커뮤니티를 조직한 기자들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언론사'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로 인해 제한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기자들 개개인의 능력은 한층 더 중요해 질 것 같다.다른 어떤 개인 미디어나 다른 기자들과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경험으로 축적된 정보 네트워크가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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